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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앞 게송 66)에서 극히 작은 것이 극히 큰 것과 같다고 하여 극소동대(極小同大)라 하고, 67)에서 극히 큰 것은 극히 작은 것과 같다고 하여 극대동소(極大同小)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거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무(無)’라고 할 수 있고, 지극히 큰 것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유(有)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에서 극소(極小)는 곧 극대(極大)이고, 극대동소(極大同小)에서 극대(極大)는 곧 극소(極小)라고 말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극소(極小)를 무(無)로 바꾸어 놓으면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
67 극대동소(極大同小) 불견변표(不見邊表)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표면의 변두리를 보지 말라. 대도(大道)는 지극히 큰 것에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작은 것에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는 법성게에서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 일체 티끌 중에 시방법계의 진리가 함유(含有)되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먼저 지극히 크다고 하는 것은 미세한 티끌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된 것이니 티끌을 떠나 큰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니 큰 것의 본질은 티끌의 본질과 다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표면상의 둘레에 개의치 말고 보려고 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이 게송은 앞 게송 66)과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다.
66 극소동대(極小同大) 망절경계(忘絶境界)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그 경계가 끊어지다. 법성게에서 일미진중(一微塵中)함시방(含十方)이라 한 것을 표현된 바대로 보면 시방세계가 다 한 티끌 속에 포함된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일까? 일미진중(一微塵中), 즉 한 티끌 속에 있는 진리에는 함시방(含十方), 즉 시방법계의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라고 해석하면, 한 티끌에서 볼 수 있는 진리는 시방세계에서 볼 수 있는 진리와 다를 수가 없다. 라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한 방울의 피가 가지고 있는 성분을 알면 몸 전체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태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법성게의 이 말씀, 즉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을 이렇게 이해할 수..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대도(大道)는)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눈앞에 있다. 위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니라. 고 하여 시간의 중도성을 설하고, 본 게송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눈앞에 있다. 라고 하여 공간의 중도성과 대도성을 설하고 있다. 무재부재(無在不在)는 ‘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인데, 대도(大道)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니, ‘어디나 다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나 다 있으니 어느 시방에서든 바로 눈앞에 대도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눈앞에 있는 대도와 미국이나 남미에..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니라. 촉(促)은 제촉할 ‘촉’이니 시간적으로 짧은 것을 의미하고, 연(延)은 끌 ‘연’이니 시간적으로 긴 것을 의미한다. 종비촉연(宗非促延)은 종지(宗旨)인 불이개동(不二皆同)은 시간적으로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일념(一念)이란 극히 짧은 한 순간이 만년(萬年)이라고 했다. 한 생각 순간에 만년의 종지를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법성게에서 일념즉시(一念卽是) 무량겁(無量劫)이라 하여 한 생각 순간의 진리는 곧 무량겁의 진리이고,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이라고 하여 무량하게 먼 겁의 진리는 곧 이 한 순간의 진리라고 했다. 진리 즉 대도(大道..
63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지(宗旨)로 들어온다.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의 시방지자(十方智者)란 이 법계에 있는 모든 깨달은 사람, 일체 번뇌와 집착을 소멸하고 공적한 가운데 자기의 이해(利害)관계를 떠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증득한 사람, 혹은 이 법계의 모든 사리(事理)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이러한 종지(宗旨)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이러한 종지(宗旨)란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이니,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을 만나도 못쓸 것을 가려내어 그 존재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찾아 그 존재를 인정하여 주고 인격적으로 평등하게 봄으로서 동화(同化)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62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불이개동(不二皆同)이란 ‘둘이 아니라 함은 모두 같다’는 뜻이다. 즉 곧은 것과 굽은 것이 그 모양은 상반(相反)되지만 ‘둘이 아니고 모두 같다’라고 한 것이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곧은 것은 곧은 대로 굽은 것은 굽은 대로 그 가치가 있고 용도가 있으니 인격적인 면에서 보면 모두 같다는 말이다. 일체를 인격적으로 평등하다고 보게 되면 서로 상대를 존중하게 될 것이니 교류하지 못할 것이 없고,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포용(包容)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면, 옛날에 흑백(黑白)의 인격에 우열(優劣)이 있다고 차별하던 시대에는 곧은 것은 인정하고 굽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 ..
61 요급상응(要急相應) 유언불이(唯言不二) 급히 상응하고자 한다면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대도(大道)와 급히 상응하고자 한다면 오직 불이(不二)를 말할 뿐이다. 대도를 한 마디로 하려면 ‘불이(不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 불이(不二)란 무엇인가?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다.’이다. 둘이 아니란 무엇인가? 진망(眞妄), 선악(善惡), 장단(長短), 남녀(男女) 등 일체 상반(相反)되는 관계에 있는 양변(兩邊)은 겉으로 보기엔 다르지만 그 내면을 보면 같은 이치에 의해 존재함으로 둘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또 둘이 아니라고 보면, 둘이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보이니 무엇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다. 진망(眞妄)의 진(眞)은 참된 것이고 망(妄)은 거짓된 ..
60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 진여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은 자성(自性)이 밝혀진 공(空)이고, 이 자성의 자리가 바로 진여법계가 있는 자리이며, 진여법계에서는 자타(自他)가 있으면서도 자타가 없는 것을 보고 서로 함께 융화(融和)할 수 있는 자리이다. 무타무자(無他無自)라 함은 남도 없고 나도 없다는 말이나, 자(自)와 타(他)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니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타(自他)가 서로 자기가 자기를 고집하지 않을 때 융화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니, 자타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요, 주객(主客)이나 능소(能所)도 그와 같으니 일체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니 서로..
59 비사량처(非思量處) 식정난측(識情難測)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으로는 측량키 어렵다.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 텅 비어 밝게 스스로 비취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다. 라고 하는 곳이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의식이나 감정으로 측정하기도 어려운 곳이라는 뜻이다. 생각하고 재보고 저울질하는 것도 의식(意識)이 하는 것인데 이 의식이나 감정(感情)으로도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의식이나 감정은 우리들이 욕계(欲界)에서 살아가는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욕계를 벗어난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을 사량(思量)하거나 측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은 일체 번뇌망상이 끊어진 적정(寂靜)한 곳에서..
58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 텅 비어 밝게 스스로 비취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다.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즉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고 한 것에서, 수많은 차별상 중에서 특별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머물음이 있는 것이고, 기억할 일이 있는 것이라, 그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차별상 중에서 어느 것에도 특별히 마음 가는 것이 없다면 머물음이 없는 것이요 기억할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일체 머물음이 없을 때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이 텅 비어있게 된다. 그리고 텅 비어 있으니 장애가 없어 자성(自性)이 밝게 저절로 비춰지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없게 된다는 말씀이다. 모든 ..
57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일체(一切)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취사(取捨) 등 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일체의 마음이다. 불유(不留)는 그러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머물음이 없다. 즉 일체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이다. 무가기억(無可記憶)은 마음에 머물음이 없으니 기억될 것이 없다. 작은 것을 작다고 불만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남은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게 되는 이치이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꽃과 크고 작은 꽃들이 모여 서로 상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대립하지 아니한다. 이..
56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 심한 의심이 다 정화되면 바른 믿음이 조화(調和)롭게 하고 곧게 한다. 호의(狐疑)의 호(狐)는 여우이고 의(疑)는 의심이니, 여우처럼 의심이 많다는 의미이니, 의심이 대단히 많은 것을 호의라고 한다. 이렇게 심한 의심의 예를 들어 보면, ‘내 것은 왜 저 사람 것보다 작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돈이 더 많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더 잘생겼을까?’ 등 남과 자기를 비교하여 남을 의심하는 생각을 이어가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사업이 잘 되었을 때, 그를 축하해 주기보다, 자기 일은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느냐고 의심하며 불만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마음은 항상 자기와 남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며 의심하기 때문에 그..
55 계심평등(契心平等) 소작구식(所作俱息) 마음을 평등과 맺어서 일체 짓는 바를 쉬어라. 계심평등(契心平等)은 ‘마음을 평등하게 맺어라,’ 혹은 ‘맺으면’ 인데, 마음을 평등하게 맺는다는 뜻은 앞에서 양기불성(兩旣不成) 일하유이(一何有爾), 즉 ‘양쪽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하나가 있느냐,’고 한 단계에 이르면 사물을 잘못보아서 일으키는 편견(偏見)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대할 때, 마음은 평등하여 만법(萬法)이 평등(平等)하게 마음에 와 닿아 연(緣)을 맺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계심평등(契心平等)이라 할 수 있다. 소작구식(所作俱息)의 소작은 조작(造作)하는 바인데, 말하자면 나와 남을 집착하여 남의 허물을 보고 그..
54 구경궁극(究竟窮極) 부존궤칙(不存軌則) 구경과 궁극에는 궤칙(軌則)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경궁극(究竟窮極) 중 구경(究竟)은 ‘사리(事理)의 마지막,’ 궁극(窮極)은 ‘가장 마지막’이니 같은 뜻을 반복하여 더 이상 높은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게송 52)에서 지동무동(止動無動)하여 일체 번뇌를 소멸하고 중생제도의 길로 나가고, 53) 양기불성(兩旣不成)에서 대립되는 양단(兩段)이 성립되지 않으니, 만법제관(萬法齊觀)하여 만법을 있는 그대로 편견(偏見) 없이 가지런히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니 사리(事理)의 가장 마지막인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니 궤칙(軌則), 즉 궤도(軌道)도 없고 법칙도 없다고 했다. 구경에는 결국 공성(空性)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공성은 형체(形體)도 ..
53 양기불성(兩旣不成) 일하유이(一何有爾) 양(兩)쪽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겠는가. 양기불성(兩旣不成)의 양(兩)은 양쪽을 의미하는 것이니, 간택(揀擇), 증애(憎愛) 등 상대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않으면, 일하유이(一何有爾) 즉 어찌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 중 하나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양쪽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사랑만 혹은 미움만의 한쪽 마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쪽 마음만은 있을 수 없으니,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미워함도 없다는 말씀이다. 작은 것은 큰 것이 있으니까 작은 것이니, 큰 것이 없으면 작은 것도 없다는 말이다. 부자(富者)가 있으니까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부자..
52 지동무동(止動無動) 동지무지(動止無止) 그침 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이 아니요, 움직임 중에 그침은 그침이 없는 것이다. 지동무동(止動無動)의 지동(止動)은 ‘움직이는 것을 그치면’ 이니, 지동(止動)의 동(動)은 일체 편견이나 분별심의 작용이나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다. 그러하니 지동(止動)은 이러한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완전히 소멸되여 적정(寂靜)에 든 경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무동(無動)의 동(動)은 역시 일체 편견이나 분별심의 작용이나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니, 무동(無動)은 이러한 일체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동(止動)에서 일체 생노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한 경지에서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비행과 보살행..
51 민기소이(泯其所以) 불가방비(不可方比) 그 까닭을 없애면 가히 비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민기소이(泯其所以)의 민(泯)은 망(亡)할 민으로 멸망하다는 의미가 있고, 기소이(其所以)는 그 이유 혹은 근거이니, 그러한 이유나 근거를 없애버리면 불가방비(不可方比), 즉 가히 비교할 것이 없다. ‘그 이유 혹은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42) 장심용심(將心用心),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 43) 미생적란(迷生寂亂), 미혹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일어나는 것, 44)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짐작으로 두 변(邊)을 일으키는 것, 45) 몽환공화(夢幻空華), 실제가 아닌 꿈, 허깨비와 헛꽃 속에서 사는 것, 46) 득실시비(得失是非),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에 몰두하는 것, 47)..
50 만법제관(萬法齊觀) 귀복자연(歸復自然) 만법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저절로 되는 이치(自然)에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게송 49)에서 일여체현(一如體玄)할 때 만법제관(萬法齊觀) 즉 한결같은 근본인 체(體)가 현묘하게 나타날 때 만 가지 법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만법을 가지런히 볼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은 근본으로 돌아왔을 때 가능하다. ‘만 가지 법을 가지런히 본다.’는 뜻은 이 세상의 현상은 형형(形形) 색색(色色)의 모양과 질이 다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계, 동물계, 미생물(微生物), 인종(人種)도 수없이 많고, 모양과 질이 개체(個體)마다 차별(差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양성(多樣性)을 차별화해서 그들의 개성(個性)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선양(宣揚)하게 하..
49 일여체현(一如體玄) 올이망연(兀爾忘緣)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우뚝이 연(緣)을 잊는다. 앞 게송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고 한 것은 마음이 만약 있고 없거나, 높고 낮거나, 움직이고 멈추거나, 좋고 나쁘거나 하는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 치우쳐 다르게 보지 않으면, 즉 ‘심약불이(心若不異)하면 만법일여(萬法一如)하리라,’ 곧 만 가지 법이 한결 같으리라고 했다. 이 게송 49에서는 마음이 모든 법의 다른 모습을 보되 차별하는 의식으로 보지 않고 만법일여(萬法一如)하게 보려면 일여(一如)(한결같이 변함이 없는)한 체(體)를 체험하고 현묘(玄妙)한 그 체의 용(用)을 체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올이망연(兀爾妄緣)의 올이(兀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