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영성수행 비전/신심명(信心銘) (78)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승찬대사 신심명 해설 僧璨大師 信心銘 解說 저자: 승찬대사(僧璨大師) 해설: 현성(玄性) 스님 불기 2552년 7월 23일 대한불교 조계종 불 타 사 BULTASA Buddhist Temple of CHICAGO ================================================================================= 신심명 요약 「신심명」의 대의(大意) 「신심명」의 개요(槪要) 신심명 해설 신심명이란? 신심명 게송 설명 01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02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03 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04 욕득현전(欲得現前) 막존순역(莫存順逆) 05 위순상쟁(違順相爭) 시위심병(是爲心病) 06 불식현..
신심명(信心銘) 한글번역 01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道)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간택하는 것만 싫어하면 된다. 02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도는) 화통해져 명백히 드러난다. 03 毫釐有差 天地懸隔 호리유차 천지현격 (간택을 싫어하고 증애가 없는 마음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의 간격으로 벌어진다. 04 欲得現前 莫存順逆 욕득현전 막존순역 (지극한 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순(順)과 역(逆)이 있게 하지 말라. 05 違順相爭 是爲心病 위순상쟁 시위심병 따르고자 하는 것과 따르지 않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다투는 것이 마음의 병이 된다. 06 不識玄旨 徒勞念靜 불식현지 도로염정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
73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말이나 단어의 길이 끊어졌다 인데, 이 뜻은 앞에서 설한 허명자조(虛明自照),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등에서 설한 불이(不二) 법문은 이 자연의 이치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도 아니므로 자연의 궁극의 진리는 언어(言語)의 길이 끊어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비거래금(非去來今)이란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앞에서 설한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즉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라고 한 뜻과 같은 맥락에 있는 말씀이다. 대도(大道)는 시간적으로 짧고 긴 것에 ..
72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 믿음과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닌 것이 믿을 신(信)과 마음 심(心)이다. 믿을 신(信), 무엇이 믿는가? 마음이 믿으므로 믿는 마음이다. 믿는 대상은 무엇인가? 연기(緣起), 중도(中道), 지도(至道), 지복(至福), 불생불멸 등을 믿는다. 연기, 중도, 지도, 지복, 불생불멸은 어디에 있는가? 내 마음에 있다. 그러면 믿는 내 마음이 연기하는 내 마음을 믿는 것인가? 그렇다. 내 믿는 마음인 능(能)이 그 믿는 대상으로서의 소(所)인 연기하는 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마음이 그 대상으로 연기하는 마음, 중도적인 마음, 불생불멸하는 마음을 믿는 것이니, 이들은 능소(能所)의 면에서 보면 다르지만 한 마음인 일심(一心)에서 나오는 것이니 둘이면서..
71 단능여시(但能如是) 하려불필(何慮不畢) 다만 능히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찌 마치지 못하였음을 염려하랴. 단능여시(但能如是)의 여시(如是)는 이와 같이 인데, 이와 같이는 게송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와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즉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 를 능히 이해하고 이와 같이 실천하고 있다면, 하려불필(何慮不畢)의 필(畢)은 마칠 ‘필’ 자이니 진리를 깨달아 유와 무(有無)나 일(一)과 일체(一切)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불이(不二)임을 통달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즉 그와 같이 실천하면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허명자조(虛明自照)하여져 유와 무(有無)가 원융하고 일(一)..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 이는 법성게의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과 같은 뜻이다. 일즉(一卽)의 일(一)은 전체를 하나로 본 일(一)이고 일체(一切)는 전체를 하나로 볼 때 그 하나를 구성하는 모든 낱낱 개체의 합을 의미하니, 일체(一切)는 전체 가운데 있는 모든 개체를 의미한다. 그러하니 일즉일체(一卽一切)는 전체로서의 하나는 그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의 합이라고 하는 것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은 모든 개체의 합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즉 개체의 합은 전체인 하나가 되고, 전체로서의 하나는 그 속의 개체의 합이다가 된다. 이 법계가 일즉(一卽)의 일(一)이 라면, 이 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중생이 일체(一切)가 되니 ‘일즉일체(一卽一切)..
69 약불여차(若不如此) 필불수수(必不須守)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니라.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라고 볼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면 그런 이치는 지켜서 안 된다는 말씀이니 반드시 그와 같이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게송이다.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라고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려면, 어떠한 것에도 탐욕이나 애욕(愛慾)이 전혀 없어야하고, 사리(事理)에 밝아 무명(無明)이 없어야만 유(有)에도 집착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무(無)에도 집착이 없어 유무에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유무에 자유로울 때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가 그의 필요에 응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는 유무(有無)의 중도를 설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즉 ..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앞 게송 66)에서 극히 작은 것이 극히 큰 것과 같다고 하여 극소동대(極小同大)라 하고, 67)에서 극히 큰 것은 극히 작은 것과 같다고 하여 극대동소(極大同小)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거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무(無)’라고 할 수 있고, 지극히 큰 것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유(有)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에서 극소(極小)는 곧 극대(極大)이고, 극대동소(極大同小)에서 극대(極大)는 곧 극소(極小)라고 말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극소(極小)를 무(無)로 바꾸어 놓으면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
67 극대동소(極大同小) 불견변표(不見邊表)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표면의 변두리를 보지 말라. 대도(大道)는 지극히 큰 것에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작은 것에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는 법성게에서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 일체 티끌 중에 시방법계의 진리가 함유(含有)되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먼저 지극히 크다고 하는 것은 미세한 티끌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된 것이니 티끌을 떠나 큰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니 큰 것의 본질은 티끌의 본질과 다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표면상의 둘레에 개의치 말고 보려고 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이 게송은 앞 게송 66)과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다.
66 극소동대(極小同大) 망절경계(忘絶境界)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그 경계가 끊어지다. 법성게에서 일미진중(一微塵中)함시방(含十方)이라 한 것을 표현된 바대로 보면 시방세계가 다 한 티끌 속에 포함된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일까? 일미진중(一微塵中), 즉 한 티끌 속에 있는 진리에는 함시방(含十方), 즉 시방법계의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라고 해석하면, 한 티끌에서 볼 수 있는 진리는 시방세계에서 볼 수 있는 진리와 다를 수가 없다. 라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한 방울의 피가 가지고 있는 성분을 알면 몸 전체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태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법성게의 이 말씀, 즉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을 이렇게 이해할 수..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대도(大道)는)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눈앞에 있다. 위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니라. 고 하여 시간의 중도성을 설하고, 본 게송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눈앞에 있다. 라고 하여 공간의 중도성과 대도성을 설하고 있다. 무재부재(無在不在)는 ‘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인데, 대도(大道)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니, ‘어디나 다 있다.’는 뜻이다. 어디에나 다 있으니 어느 시방에서든 바로 눈앞에 대도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눈앞에 있는 대도와 미국이나 남미에..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종지란 (시간적으로)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순간이 만년이니라. 촉(促)은 제촉할 ‘촉’이니 시간적으로 짧은 것을 의미하고, 연(延)은 끌 ‘연’이니 시간적으로 긴 것을 의미한다. 종비촉연(宗非促延)은 종지(宗旨)인 불이개동(不二皆同)은 시간적으로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짧고 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일념(一念)이란 극히 짧은 한 순간이 만년(萬年)이라고 했다. 한 생각 순간에 만년의 종지를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법성게에서 일념즉시(一念卽是) 무량겁(無量劫)이라 하여 한 생각 순간의 진리는 곧 무량겁의 진리이고,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이라고 하여 무량하게 먼 겁의 진리는 곧 이 한 순간의 진리라고 했다. 진리 즉 대도(大道..
63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지(宗旨)로 들어온다.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의 시방지자(十方智者)란 이 법계에 있는 모든 깨달은 사람, 일체 번뇌와 집착을 소멸하고 공적한 가운데 자기의 이해(利害)관계를 떠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증득한 사람, 혹은 이 법계의 모든 사리(事理)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이러한 종지(宗旨)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이러한 종지(宗旨)란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이니,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을 만나도 못쓸 것을 가려내어 그 존재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찾아 그 존재를 인정하여 주고 인격적으로 평등하게 봄으로서 동화(同化)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62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불이개동(不二皆同)이란 ‘둘이 아니라 함은 모두 같다’는 뜻이다. 즉 곧은 것과 굽은 것이 그 모양은 상반(相反)되지만 ‘둘이 아니고 모두 같다’라고 한 것이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곧은 것은 곧은 대로 굽은 것은 굽은 대로 그 가치가 있고 용도가 있으니 인격적인 면에서 보면 모두 같다는 말이다. 일체를 인격적으로 평등하다고 보게 되면 서로 상대를 존중하게 될 것이니 교류하지 못할 것이 없고,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포용(包容)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면, 옛날에 흑백(黑白)의 인격에 우열(優劣)이 있다고 차별하던 시대에는 곧은 것은 인정하고 굽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 ..
61 요급상응(要急相應) 유언불이(唯言不二) 급히 상응하고자 한다면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대도(大道)와 급히 상응하고자 한다면 오직 불이(不二)를 말할 뿐이다. 대도를 한 마디로 하려면 ‘불이(不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 불이(不二)란 무엇인가?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다.’이다. 둘이 아니란 무엇인가? 진망(眞妄), 선악(善惡), 장단(長短), 남녀(男女) 등 일체 상반(相反)되는 관계에 있는 양변(兩邊)은 겉으로 보기엔 다르지만 그 내면을 보면 같은 이치에 의해 존재함으로 둘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또 둘이 아니라고 보면, 둘이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도 보이니 무엇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다. 진망(眞妄)의 진(眞)은 참된 것이고 망(妄)은 거짓된 ..
60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 진여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은 자성(自性)이 밝혀진 공(空)이고, 이 자성의 자리가 바로 진여법계가 있는 자리이며, 진여법계에서는 자타(自他)가 있으면서도 자타가 없는 것을 보고 서로 함께 융화(融和)할 수 있는 자리이다. 무타무자(無他無自)라 함은 남도 없고 나도 없다는 말이나, 자(自)와 타(他)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니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타(自他)가 서로 자기가 자기를 고집하지 않을 때 융화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니, 자타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요, 주객(主客)이나 능소(能所)도 그와 같으니 일체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니 서로..
59 비사량처(非思量處) 식정난측(識情難測)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으로는 측량키 어렵다.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 텅 비어 밝게 스스로 비취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다. 라고 하는 곳이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의식이나 감정으로 측정하기도 어려운 곳이라는 뜻이다. 생각하고 재보고 저울질하는 것도 의식(意識)이 하는 것인데 이 의식이나 감정(感情)으로도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의식이나 감정은 우리들이 욕계(欲界)에서 살아가는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욕계를 벗어난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을 사량(思量)하거나 측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곳은 일체 번뇌망상이 끊어진 적정(寂靜)한 곳에서..
58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不勞心力) 텅 비어 밝게 스스로 비취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다.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즉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고 한 것에서, 수많은 차별상 중에서 특별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머물음이 있는 것이고, 기억할 일이 있는 것이라, 그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차별상 중에서 어느 것에도 특별히 마음 가는 것이 없다면 머물음이 없는 것이요 기억할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일체 머물음이 없을 때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이 텅 비어있게 된다. 그리고 텅 비어 있으니 장애가 없어 자성(自性)이 밝게 저절로 비춰지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없게 된다는 말씀이다. 모든 ..
57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일체(一切)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취사(取捨) 등 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일체의 마음이다. 불유(不留)는 그러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머물음이 없다. 즉 일체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이다. 무가기억(無可記憶)은 마음에 머물음이 없으니 기억될 것이 없다. 작은 것을 작다고 불만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남은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게 되는 이치이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꽃과 크고 작은 꽃들이 모여 서로 상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대립하지 아니한다. 이..
56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 심한 의심이 다 정화되면 바른 믿음이 조화(調和)롭게 하고 곧게 한다. 호의(狐疑)의 호(狐)는 여우이고 의(疑)는 의심이니, 여우처럼 의심이 많다는 의미이니, 의심이 대단히 많은 것을 호의라고 한다. 이렇게 심한 의심의 예를 들어 보면, ‘내 것은 왜 저 사람 것보다 작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돈이 더 많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더 잘생겼을까?’ 등 남과 자기를 비교하여 남을 의심하는 생각을 이어가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사업이 잘 되었을 때, 그를 축하해 주기보다, 자기 일은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느냐고 의심하며 불만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마음은 항상 자기와 남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며 의심하기 때문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