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비밀의 가르침 6: 마음과 에테르 생명력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비밀의 가르침 6: 마음과 에테르 생명력

柏道 2020. 1. 29. 14:12


비밀의 가르침 6: 마음과 에테르 생명력

        

Chapter 6: 마음과 에테르 생명력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테복음 6:11)
주기도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란 마음, 즉 에테르 생명력이다. 마음은 저마다의 영적 성숙의 단계에 속해 있는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아낌없이, 골고루 제공된다.

(이 책에서 쓰이는 ‘마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마음의 뜻과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책에서의 마음이란 온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고차원 파동으로써, 그 진동수에 따라 물질, 심령질, 이지질로써 다양하게 표현된다. 반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란 
심령질, 이지질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념체들의 총체물, 즉 현재인격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단원에서 설명하는 마음은 우리가 연상하는 마음이란 단어와 어느 정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역주)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마음은 우리가 탐구하는 다른 모든 
주제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음이란 세상 모든 만물을 빚어낸 재료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신의 성스러운 뜻이 표현된 것이지만, 그것들을 실질적으로 빚어낸 원료는 마음이다.

마음은 ‘무한’ 속 어느 한 군데의 빈틈 없이 모든 곳을 가득 메운다. 
무한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무한이란 절대영원성을 묘사하는 하나의 용어이다. 무한은 절대영원성을 모두 담아낸다. 반대로, 무한 안에서 절대영원성이 아닌 영역이란 없다. (‘무한’, ‘영원한 지금’, ‘자체완전성’, ‘절대사랑’, ‘절대생명’ 이 모두가 절대영원성의 본성이자 하나의 동일한 궁극의 경계를 다양하게 묘사하는 용어들이다. - 역주)

절대적 자체완전성과 성스러운 다중성은 절대영원성의 본성이다. 
그가 품은 뜻은 창조를 통하여 성원소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영원성의 본성은 곧 성원소의 본성이다. 절대영원성이 그러하듯이 그 안의 성원소들 또한 자체완전성과 다중성을 지닌다. 한 성원소가 
자신을 다차원 우주 속에 표현하기 위해선 절대영원성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중 가장 대표되는 본성은 전적지혜, 전적권능, 전적사랑이다. 이 셋은 절대하는 동시에 실재하며 존재한다. 즉, 이 셋은 성스러운 
자체완전성의 경계 속에서 절대하는 동시에 성스러운 이상에 의하여 표현된 다차원 세계들 속에 투영되어 실재하며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이상을 표현해내기 위해선 매개체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다. 모든 만물은 마음의 다양한 진동수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과 대천사를 비롯한 성원소로부터 화현된 모든 실재들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우주라는 장엄한 무대 위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온 우주를 절대영원성의 영광으로 가득 채운다. 찬송가에서는 수세기 전부터 이를 노래하였다. ‘하늘과 땅이 그 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리라.’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창조되었을까? 절대지혜일까? 
아니면 절대권능이나 절대사랑일까? 
그것은 이 셋을 모두 영광스럽게 하는 성스러운 이상이다.

마음은 절대영원성의 표현물로써 영구히 사용되지만, 그것은 성원소와 
같은 절대영원성의 영원불멸한 일부는 아니다. 마음을 성령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가장 높은 진동수의 마음일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성령이 아니다. 마음은 성원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절대영원성에 의하여 표현된 움직임, 진동, 파동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마음은 모든 현상계를 빚어낸 신성한 원료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마음은 신의 도구이지, 신의 화현이 결코 아니다. 
마음이란 물질계를 비롯한 모든 고차원 세계들을 다양한 진동수로써 빚어낸 재료이다.

둘을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성스러운 자체완전성과 성스러운 다중성의 경계에 거하는 설계자, 부모, 창조자인 절대영원성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성스러운 지혜, 성스러운 권능, 성스러운 사랑이 깃들어간 시공간적 표현물인 마음, 만물, 다차원 우주이다. 이 둘의 차이를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귀의해야 할 대상은 창조물이 아닌 창조주란 것을.

많은 진리 탐구단은 마음을 성령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그릇된 신격화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그 원인은, 많은 신비가들은 현상계 속에서 
자신이 아직까지 지녀온 형체(육신=물질체+심령체+이지체 - 역주)를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육신 없는 무형의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체를 비롯한 모든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깨닫고 모든 갈망과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빛으로 가득한 내면의 천국을 건설하여 한량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었다. 이는 현상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계, 빛의 경계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은 자신이 아직까지 지녀온 
형체조차 과감히 놓아버리고, 현재 머물러 있는 그곳조차 초월하는 성스러운 자체완전성의 경계로 들어서 테오시스를 성취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였다. 해탈을 이루어 절대영원성의 경계로 들어서면 그곳에 있는 것은 허무함일 것이라고.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해탈, 테오시스는 허무함(nothingness)이 아닌, 가득참 (everythingness)이요, 끝없는 무한함이다. 위와 같은 신비가들은 거울 속의 웃고 있는 자신의 상을 바라보며 매우 흡족해하는 자들과 같다. 그들은 거울을 깨부수지 못했다. 거울 속의 상이 깨져서 없어져 버리면 실제 자신도 그렇게 되버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거울을 산산조각 내더라도 자신은 그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실체인 참 자아를 한낮 환영에 지나지 않는 거울 속 이미지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궁극의 완성을 성취한 진리탐구자는 깨달을 것이다. 테오시스란 소멸과 
허무함이 아닌, 끝없는 행복, 절대적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의 참 자아인 성원소는 절대영원성과 항상 일체이며,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뜻하는 모든 것을 무한히 표현하고 확장해낼 수 있다. 그에게는 초질료 마음을 자유롭게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성원소는 결코 소멸되지도, ‘나’를 잃지도 않으며, 
그의 모든 경험과 이상은 그와 영원히 함께 한다.

마음은 모든 만물을 낳아 길러내는 바다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모든 것’이란 절대영원성만은 포함하지 않는다. 절대영원성은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탄생시킨 태초의 불이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 초질료 마음을 창조한 
진정한 목적과 그 창조의 기쁨은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

마음은 태초의 빛이자 영원한 빛이요, 모든 표현물들을 담아내는 무한히 큰 흰 도화지이다. 그 위에는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숙고로부터 구상된 성스러운 원칙들, 법칙들, 이데아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성원소들은 그 위에 자신을 자유로이 그려내고 표현함으로써 절대영원성의 위대한 지혜, 권능, 사랑을 실현하여 그의 영광을 더욱 빛낸다. 하지만, 대천사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이데아의 종류에는 한계가 있다. 원리계의 이데아는 그 어떤 인간이나 대천사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진리적 경계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물들에게는 저마다의 인지의 영역이 있다. 
그 어떤 존재도 절대영원성의 장엄함과 위대함의 전부를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은 성스러운 숙고 속의 구상물들을 실제로 빚어내어 표현하기 위한 
필연적 재료이다. 마음은 그 진동수에 따라 물질, 심령질, 이지질, 에테르질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절대영원성은 마음을 사용하여 자신을 반영하는 다양한 이성적 표현물들과 성령적 표현물들을 창조한다.

우리에게는 마음을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성원소는 절대영원성과의 일체의 경계 속에서 절대하는 동안에도,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여 자신의 일부를 영혼으로 화현하여 실재하는 동안에도, 그 후 자신을 
단절계 속에 인격과 육신으로 투영하여 존재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끊임없이 마음을 사용한다. 물론 그 사용은 좋은 쪽이 될 수도, 나쁜 쪽이 될 수도 있다.

마음(초광명, 태초의 빛, 우주에테르)이 창조된 순간부터 진동은 시작된다. 다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표현된 동적 진동이 아닌 절대영원성의 원리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정적 진동이다.

마음의 동적 진동이 시작되는 순간 장엄한 파동의 물결이 퍼져나가 
다차원 우주가 형성되었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세상이 실현되었다. 
이렇게 탄생된 차원들 중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은 물질계, 심령계, 
이지계, 그리고 원형계이다. 원형계란 단절계를 구성하는 앞의 세 차원들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써 만물이 형체(물질+심령질+이지질- 역주)를 갖기 이전 단계이다. (원형계는 만물이 탄생하기 이전 단계로써, 
만물의 순수한 원형들이 있는 곳이다. 원형이란 장차 그려질 만물의 
밑그림이며, 물질, 심령질, 이지질은 그 밑그림 위해 칠해지는 물감이라고 할 수 있다. - 역주)

원형계를 포함한 더 높은 차원들에 대한 탐구는 지상의 인격적 존재가 
아닌 영혼으로써 다가가야 한다. 고차원 진리는 이론적 지식이 아닌 동조와 일체를 통하여 얻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초질료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지니는 특성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마음은 단순한 매개체일 뿐일까? 아니면 초질료 마음 속에도 어떤 특정한 의식이 존재할까?

마음이 온 우주를 빚어내는 신성한 창조물인 이상, 그 속에는 어떠한 신적 의식이 반드시 잠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 의식은 성스러운 원칙(사랑, 덕, 자비 등)과 성스러운 법칙(인과응보의 법칙, 균형의 법칙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둘은 천지창조를 이루어낸 절대적 기반이다.

(절대법칙이란 차갑고 냉정하게 정해져 있는 법칙으로써, 그 대표적 예로 카르마의 법칙, 균형의 법칙, 음양오행의 법칙 등이 있다. 반면, 절대원칙이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동경하고 지향하는 따스하고 포근한 원칙으로써, 그 대표적 예로 인간에게 있어선 사랑, 덕, 의로움, 공경, 감사, 믿음 등이 있다. 절대법칙은 절대원칙이 전제가 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절대법칙의 존재목적은 절대원칙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면서 절대법칙을 공부하는 이유는 절대원칙을 보다 깊게 깨닫기 위함이다. 절대법칙에만 빠져버리면 자칫 흑마술사가 될 수 있다. 
절대법칙과 절대원칙을 묶어서 절대원리라 하며, 이들은 원리계(5천)에서 표현된다. – 역주)

마음에 내제되어 있는 의식은 일종의 초지성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지니는 현재의식이나 자의식과는 다르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 인체의 피부에 벌레가 앉으면 뇌에 신경이 전달되어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피부는 이미 자체적으로 움찔하며 반응을 한다. 이러한 피부의 자체적 의식은 우리가 지니는 의식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초질료 
마음 속에 내제되어 있는 의식은 성령적 의식(초의식)과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성령인 것은 아니다. 성령은 신의 직접적 화현이며, 
다차원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마음을 도구로써 사용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초질료 마음은 원형계를 구성하는 파동으로써 인간의 현상계적 인지의 
영역을 초월한다. 마음이란 절대영원성이 걸치는 눈부신 외투와도 같으며, 절대영원성의 이미지를 온전히 담아내는 맑고 순수한 거울과 같다.

그러나, 거듭 강조해왔듯이 절대영원성은 마음을 포함하여 현상계 속의 그 어떠한 차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모든 차원들이 
필요하지 않다. 절대영원성의 본성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홀연한 자체완전성이기 때문이다. 절대영원성은 자신의 일부를 영혼과 대천사로 화현하지만, 이것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으리라!

신, 절대영원자는 그 어떤 차원의 세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절대적이며, 자체적으로 완전하다. 그는 자신의 성스러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초질료 마음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사용하여 
원리계를 창조하였다.

로고스와 성령은 그의 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은 사역자로써 창조의 성업을 이어나갔고, 그 결과 인간, 대천사, 천사, 그리고 그 외 모든 존재들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느끼는 오늘날의 경이로운 세상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그는 우리에게 마음의 다양한 진동수로 이루어진 세상의 모든 표현물들을 제한 없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창조의 궁극적 이상이다.

진동수가 낮은 마음은 물질로 표현되며, 진동수가 높은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이지질로 표현된다. 이 중 후자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심령이지질이란 인간 육신의 에테르 복체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에테르 복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공부와 함께 적절한 명상과 수도를 병행한다면, 
에테르 복체의 존재 여부뿐만이 아니라 이 복체가 지니는 신성한 특성들
까지 이해할 수 있다. 에테르 복체에 대하여 탐구함으로써 우리의 물질체의 조화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성령의 실재를 비로소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 성령과 함께 물질체를 관리하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의 물질체 속에는 생명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데, 이를 에테르 생명력이라고 한다. 우리의 현재인격은 몸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에테르 생명력을 
재료로 사용하여 사념체(생각 염念 몸 체體. 심령이지질로 이루어진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 - 역주)를 생성해낸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주된 에테르 생명력의 공급원은 태양이다. 
다른 일부는 실재계로부터 공급받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음식으로부터 
공급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들은 본질적으로 마음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파동이 각기 다른 진동수로 진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와 원자는 모두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이들은 인체의 에테르 복체로부터 그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또한 에테르 복체는 인체 내의 오감 신경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줌으로써 우리가 외부로부터의 다양한 인상들을 느끼고 수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 나아가 복체는 심장의 박동, 기혈순환과 같은 자율신경계를 관리하며, 그 외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수많은 인체 활동들을 관할한다.

적절한 수련을 하면 몸 속의 에테르 복체로부터 에테르 생명력을 끌어다가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것을 먼 곳으로 투사시켜서 ‘기적’이라 불리우는 일들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인체 내부에 
있는 에테르 생명력의 일부를 끌어와서 몸 외부의 어딘가에 투사하여 형체를 빚어낸 후, 그 위에 심령이지적 이미지를 입혀야 한다.

위와 같은 정형화된 작업은 우리가 지적 갈망(지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갈망)을 할 때 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반면, 갈망적 사고(갈망이 앞서는 무분별한 사고)를 할 땐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후자를 
‘벙어리, 귀머거리 귀신’(마가복음 9:25)이라고 하셨다. 이 두 종류의 생각은 모두 에테르 생명력이라는 재료로 빚어진 표현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품는 생각 하나하나는 모두 생명체화 되어 고유한 존재성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사념체’라고 한다.

에테르 생명력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제공되는 ‘양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용하여 사념체를 생성하고 길러내는데, 이러한 수많은 사념체들이 
모여서 우리의 현재인격을 형성해낸다. 에테르 생명력은 우리의 인격을 
다듬고 정화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이기도 하다. 내면을 정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감으로써 우리는 점차 자신의 인격을 진아(영혼)에게 동화시켜나가게 된다.

뒤에 이어질 단원들에서 마음과 사념체에 대하여 더욱 자세하게 배울 것이다. 마음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빚어낸 신성한 초질료인 만큼 어떤 주제에 대하여 배우든지간에 항상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