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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가르침 7: 우주의 탄생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비밀의 가르침 7: 우주의 탄생

柏道 2020. 1. 29. 14:13

비밀의 가르침 7: 우주의 탄생

           

Chapter 7: 우주의 탄생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골로새서 1:1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창세기 1:3)

탄생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뿐이다. 
절대계(가장 깊은 절대영원성의 궁극의 경계 - 역주)속에 영원 전부터 
있어온 성스러운 빛이 실재계, 존재계 속으로 표현된 것이다. 
본질적으로 모든 것은 창조된 것이 아닌, 표현된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영원성의 경계 속에 항상 있어왔다. 그 무엇도 최초로 창조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전에도, 지금도, 이후에도 영원히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절대계와 실재계, 존재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절대영원성의 본성인 절대권능은 만물을 통하여 다양하게 표현된다. 
절대영원성에게는 절대권능이 있었기에 그가 품은 이상을 창조로써 실현할 수 있었다. 그의 절대권능이 표현되는 경계는 실재계인데, 이곳은 
로고스와 성령이 거하는 경계이자 모든 품계의 대천사들이 표현되는 곳이다. 절대계의 신은 영원한 절대생명이며, 존재계의 신은 표현된 생명이다. 존재하는 것이란 어떤 특정한 시점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존재계 속 모든 만물을 탄생케 한 최초의 시작, 
그것은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이상이다.

절대계에서 모든 것은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한 ‘있음’이다. 
반면, 존재계 속의 표현물들은 그렇지 못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변화의 과정으로부터 비로소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이 탄생한다. 
절대영원성의 경계에서는 시공간의 제약 따위란 없지만 말이다.

우리 자신을 예로 들어보자. 태초의 우리는 절대계의 
순수한 성원소,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생명이었다. 이 시점은 우리가 스스로를 영혼으로 
화현하기 이전이며, 존재성과 실재성을 지니기 이전의 경계이다. 
우리가 실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성원소로부터 발산된 빛이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영혼으로써 화현되어 실재한다. 
절대계의 성원소가 스스로를 실재계 속에 영혼으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계의 영혼은 존재계 속에 스스로를 영구인격, 현재인격으로 표현한다. 인격은 존재하며, 영혼은 실재한다. 
그리고 성원소는 ‘절대’한다. - 역주)

성원소가 실재계와 존재계로 들어서면서 그가 본래 지녀온 영원성, 절대생명을 잃는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는 태초의 그 어떤 본성도 잃지 않는다. 성원소의 화현이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원소가 자신의 작은 일부를 실재계, 존재계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 일부란 그에게서 발산된 한 줄기의 빛과 같다.

인간 외의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탄생할 때에도 위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존재계란 이지계, 심령계, 물질계를 포함한다. 존재계 내의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만물은 대천사들의 표현물이다. 이 행성 안에 존재하는 
인간 외의 모든 생물, 무생물들은 대천사들의 투영물들, 그들로부터 발산된 사념체들인 것이다. 대천사들은 이러한 창조 활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삶의 무대를 제공하였으며, 앞으로도 우리를 위하여 영원히 이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시공간적 제약을 초월하는 이름 없는 성원소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절대영원성의 품 안에서 살아가며, 단 한 순간도 그로부터 벗어나거나 분리된 적이 없다. 바닷물의 표면에는 수많은 물결들이 
굽이친다. 그 물결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의 바다로부터 비롯되었고, 같은 바다의 일부이며, 
동일한 성분의 바닷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성원소는 절대영원성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성원소로써의 우리는 너와 나가 결코 
다르지 않으며, 서로 분리되어 있지도, 분리될 수도 없다. 
무한한 절대영원성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비하하여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하나는 절대권능, 절대지혜, 절대사랑이 깃들어 있는 기적과도 같은 성스러운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시공계의 진흙구덩이 속을 살아가면서 다른 누군가가 추구하는 바가 우리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하여 그들을 적으로 대해선 절대 안된다. 눈 앞의 추구와 이익이란 존재계 속의 일시적 환영일 뿐, 결코 진정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감정들로부터 비롯된 상대적 진실일 뿐이다.

상대적 진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존재계 속의 특정한 동기로부터 시작되어서 발전해나가다가 언젠가는 끝을 맞이한다. 어느 시점으로부터 탄생되었다가 일정시간이 흐르면 예외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덧없는 환영들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서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움과 일체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덧없는 모든 것들을 필연적으로 거쳐가야만 한다. 이들은 우리의 성숙과 완성을 향한 여정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애시당초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계 속의 그 어떤 것도 과소평가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말아야 한다. 대신, 그것들이 왜 존재하는지,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절대영원성과 우리 성원소들에 의해 현상계 속에 표현되었는지 이치적으로 
헤아리고 깨달아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단순히 죠지, 메리와 같은 이름일까? 기쁨과 슬픔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갈망, 생각, 욕구 덩어리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위대하다. 우리는 자의식을 지닌 영원한 실재, 지혜와 사랑을 표현하는 위대한 실재이다. 우리 모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존재계를 모험하는 탐험가이다. 이 탐험의 목적은 
지식을 얻고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들에 대한 모든 판단과 결정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고 세심하게 탐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대가 겪어온 모든 경험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라.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으로. 그 이후에는 이들 중 어떤 것들이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고 갚진 경험이었는지 가려내라. 이때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이 훈련을 할 때는 기존에 지녀온 통념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특히 물질 속에 깊숙이 얽매인 
의식은 우리를 실체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이를 주의하여야 한다.

심령계의 원리도 이와 같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감정들은 천국을 건설하고, 이기적인 행동, 갈망,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불쾌한 감정들은 지옥을 
건설한다. 천국과 지옥, 이 두 세계 중 어떤 것도 영원하지 못하다. 물론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영원하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은 우주의식 속에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의식이란 우주의 도서관과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상, 
느낌, 생각, 사건, 정보, 지식, 존재물들은 우주의식 속에 새겨져 영구히
 보존된다. - 역주)

인간으로써 우리의 사명은 배우고 깨닫고 성숙하여 진아단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영구인격은 자신의 낮은 차원적 표현물인 현재인격을 창조한다. 현재인격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환경과 인상들을 기쁨 또는 슬픔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적인 자유가 있다. 
더 나아가 그것들의 본질에 대하여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궁극의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은 그의 내면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남김없이 환하게 밝혀내는 순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친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물론 무지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들의 깊은 내면은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을 표면적으로 기쁘게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일시적이며 덧없음을. 속세의 덧없는 것들에 집착하는 갈망의 반복은 
물질적 욕망을 키워나갈 뿐이다.

이 세상은 한 치의 빈틈없는 정확하고 명백한 법칙에 의하여 다스려진다. 그 법칙이란 인간은 항상 자신이 행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되돌려 받는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조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은 물질체에 병으로 나타날 수도, 또는 심령체나 이지체에 정신적 고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차원의 세계(물질계, 심령계, 이지계)를 다스리는 성스러운 법칙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탐구해나가며 범우주적 원리들을 깨달아나가야 한다. 그리하면 언젠간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될 날이 
올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창세기 1:3) 여기서의 ‘빛’이란 무엇을 뜻할까? 신께서는 왜 이 빛을 시공계 속에 
표현하셨을까? 만일 우리가 사는 단절계 속에 이 진리의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물질의 환상, 키르케(마술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버렸던 마녀 - 역주)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영원불멸의 실재가 되어 본래의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겠는가.

물질이란 인간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와 같다. 반면, 인간이 물질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여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발전과 성숙을 돕는 여신이 될 것이다. 모든 창조물의 근본적인 존재 
목적은 성원소를 조력하기 위함이다. 한낮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현재인격의 욕망 따위를 충족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충족되지도 않는다. 끝없이 불어나서 더욱 더 환상 속을 헤매게 할 뿐이다. - 역주)

물질욕으로부터 초탈한 인간은 ‘주의 기쁨’(느헤미야 8:10)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인격이 아닌 영혼으로써 자신을 시공계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그의 인격은 시공계 속을 살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배움의 과정을 완수해야만 한다.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하면 큰 일에도 정직해질 수가 없다.’ (누가복음 16:10) 성스러운 영혼 예수께서 내려주신 이 말씀을 되새겨 보자.

부, 안락, 쾌락과 같은 것들은 지금 당장 절실하게 있어야만 할 것만 같이 느껴지나,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목적은 그러한 일시적인 것들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지속적이며 영원한 내면의 가치를 탐구하고 계발하는 것이다. 이것을 추구하는 인생이 진정한 삶이요, 영원한 삶이요, 절대생명을 향한 삶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은 삶의 대전제들에 대하여 깊게 사색해야 한다. 
그리고 성스러운 깨달음을 향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한히 황홀하고 끝없이 영원한 참 진리와 하나되는 그 순간까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지혜의 말씀이다.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 (마태복음 6: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