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비밀의 가르침 8: 시공간 본문
비밀의 가르침 8: 시공간
Chapter 8: 시공간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일어주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요한복음 14:2)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선 절대영원성의 본질 속으로
최대한 깊숙이 다가서야 한다. 절대영원성의 가장 근원적 본성은 이제껏
누누이 설명해왔듯이 성스러운 자체완전성이며, 그 경계는 움직임,
진동, 파동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기 이전의 잠재적 경계, 정적 경계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 뒤를 잇는 성스러운 이상의 경계는 비로소 움직임,
떨림, 진동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동적 경계이다.
움직임이란 절대영원성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특별한 속성이다. 움직임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을 범우주적 이성으로 화현하여 다차원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을 역동적인 성령으로써 화현한다.
그가 창조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탄생시키는 것은
움직임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의 진동은 성스러운 이상을 표현하기 위한 필연적 요소인 것이다.
성스러운 숙고의 경계 속에 정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마음이 동적 진동을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만유 생명의 원천인 에테르 생명력으로 표현된다. 절대영원성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그는 로고스와 성령이라는 두 손으로 마음이라는 초질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절대영원성의 이러한 양면적
화현은 ‘위대한 걸작’의 완성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위대한 걸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성스러운 숙고 속에서 구상한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체화된 영역 속에 표현해내는 것이다.
어느 미지의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허공’의 개념을 빼놓을 수가 없다. 허공이란 무엇일까? 그 누구도 공간을 떠올리지 않고는 허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허공이란 절대영원성이 지니는 본성의 하나로써 이것은 인간의 인지의 영역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허공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물론이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한다.
그러나 인간과 대천사를 비롯한 그 어떠한 지적 존재도 무한한 허공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신만이 그것을 아신다. 절대영원성, 로고스, 성령이 아닌 그 어떤 지적, 초지적 존재도 허공의 본질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허공의 표현물인 공간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허공(빌 허虛, 빌 공空)이란 무한히 텅 비어있음이며, 공간(빌 공空,
사이 간間)이란 허공 속의 표현물이다. 허공은 끝없이 무한한 반면,
그의 표현물인 공간은 유한하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지금’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절대적 경계인 반면, 시간이란 ‘영원한 지금’에
의해 탄생된 유한한 표현물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환영이다.
절대영원성의 경계에서는 무한한 허공과 ‘영원한 지금’만이 있을 뿐이다. 이 둘은 절대영원성의 본성이다. – 역주)
태초의 허공 속에서 마음이 진동을 시작하는 순간 다차원 우주가 탄생된다. 최초로 원리의 경계와 원형의 경계가 차례로 탄생하고, 그 이후에
이지계, 심령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계가 탄생한다.
마음의 진동으로써 탄생된 원리계와 원형계는 실재하는 경계이지만,
이들은 아직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은, 실질적 활동이 일어나기 이전의 경계이다. 이곳은 아직 단절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절대영원성으로부터의 분리가 일어나기 이전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절대영원성은 ‘영원한 지금’의 경계, 성스러운 숙고의 경계이며,
이곳으로부터 세상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 (원리계, 원형계는 실재계에
속하며, 이지계, 심령계, 물질계는 존재계에 속한다. – 역주)
절대영원성의 최초의 표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실재계가 창조된다.
이 순간부터 시간과 공간이 탄생한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지금’과 허공으로 이루어진 절대적 경계를 떠나서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실재적 차원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은 실재계에서부터 창조되지만, 이는 존재계의 시공간적 개념을 초월하는 고차원 시공간이다. 이 책에서 종종 사용되는 시공간이라는 용어는 주로 존재계의 시공간을 뜻하며, 시공계라는 용어는 존재계, 단절계를 지칭한다는 것을 염두하자. - 역주)
실재계의 공간은 크게 두 경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절대원리, 절대원칙, 절대법칙, 이데아들을 담고 있는 원리계, 그리고 이들을 바탕으로 탄생된 원형들을 담고 있는 원형계이다. 실재계의 시간을 탄생시킨 근원은 절대영원성의 ‘영원한 지금’이다. 시간이란 ‘영원한 지금’이 없다면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시간은 ‘영원한 지금’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 역주)
수억만 개의 은하계들을 담고 있는 우주공간을 연상해보자. 이 공간이
가히 얼마나 거대한지 느껴보라.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만 13분이 걸린다. 우리 은하계는 이러한 무수한 태양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빛이 우리은하를 관통하는 데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걸린다.
이러한 은하계가 우주 안에는 수억만 개가 있다. 이 우주를 이루는 공간이 얼마나 광대한지 가히 느껴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 공간은 허공 속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허공 안의 모든 표현물들은
마음의 파동, 진동, 움직임으로써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움직임이란 만물의 존재법칙이자 표현된 생명의 특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물들을 통하여 허공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공간을 허공으로부터 탄생된 표현물로써,
그리고 그 표현물이 진행되고 발전해나가는 연속적 과정을 시간이라는
개념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은 ‘모든 것의 시작’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절대영원성이 초질료 마음을 탄생시켜서 우주의 창조를 시작한
태초의 그 순간 말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려온 태초의 근원은 무한한 허공이며,
그곳에는 절대영원성이 절대적 초자의식으로써 군림하고 있다.
그의 성스러운 뜻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공계 속의 만물을 체계적으로 탐구해나가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표현된 생명들은 조그마한 아메바에서부터 거대한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성스러운 지성이 깃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절대권능과 절대지혜가 모든 창조의 기반을 이루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깊은 수도와 명상을 하며 각각의 존재물들이 지니는 생명의 주기와
생명의 과정을 세심히 탐구해나가다 보면 이 모든 것의 근원인 허공이
무엇인지 차츰 깨닫게 된다.
허공 속에서 아메바 한 마리가 차지하는 시간의 영역(생명의 주기와
생명의 과정)과 공간의 영역(장소, 위치)을 그릴 수 있는가? 심해저에
살고 있는 물고기, 또는 태양계의 특정한 행성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차지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그릴 수 있는가? 모든 존재물은 허공 속에서 특정한 시간의 영역(존재의 기간)과 공간의 영역(존재하는 장소)을 차지한다. 게다가 이들이 허공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좌표는 매 순간 바뀐다.
정지되어 있는 물체조차도 그렇다. 그 이유는 동일한 공간 속에 머물러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2차원 그래프 선상에서 x축을 시간, y축을 공간으로 정의해보자. x축의 왼쪽 방향을 과거,
오른쪽 방향을 미래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같은 y좌표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x축의 오른쪽 방향으로 진행해
나간다. - 역주)
물질계 속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삶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생명의 주기와 생명의 과정이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의 과정(삶의 과정 - 역주)이 있으며, 그 과정은 가변적이다. 심지어 삶의 도중에 죽음을 맞이하여 그 과정이 끊어져 버릴 수도 있다. 반면, 생명의 주기는 절대불변하는 신의 법칙이다.
모든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주기를 바탕으로 성장해나간다. 자신이 지녀온 생명의 주기를 변형시켜서 다른 생명체로 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나무는 레몬나무나 오렌지나무가 될 수
없다. 소나무의 씨앗은 자라서 항상 소나무가 된다.
우리는 이 물질행성 속을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통하여 다양한 생명의 주기들과 생명의 과정들을 쉽게 접하며 이해할 수 있다. 수천 개의 씨앗들이 바람에 실려와서 대지의 여기저기에 뿌려진다. 그 모든 씨앗들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동일한 생명의 주기를 지니지만, 이를 이루어나가는 각 씨앗들의 생명의 과정은 모두 다르다.
이제 인간의 생명의 주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 인간이 지니는 생명의 주기는 정자와 난자, 수태, 출생,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그리고 죽음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생명의 주기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삶의 종결이 아닌, 더욱 큰 생명의 대주기 속의 일부분으로써
또다른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니는 생명의 대주기란 수없이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의식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며 궁극의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생명의 주기는 불변한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가 수태에 실패하여 생명의 과정이 도중에 중단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거기서 끝이다! 이러한 현상은 물질계에서 흔히 일어나는데, 이것은 생명의
과정이 생명의 주기를 온전하게 완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하나의 예이며, 이 또한 성스러운 계획의 일부이다.
심령계에서는 (최소한 인간에게 있어선) 생명의 과정에 의해 생명의 주기가 방해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심령계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주기를 온전히 완수할 때까지 삶을 이어나간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아기가 불행하게도 죽게 되면, 그 아기는
심령계에서 삶을 이어나간다. 아기가 3살 때 죽고 난 이후 10년이 흘렀다면, 그 아기는 심령계에서 현재 13살이 되어 있다. 부모는 아기가 죽었다고 해서 정말로 그 아기를 잃는 것이 아니다. 아기는 심령계에서, 그리고
이지계에서 생명의 주기를 이어나가며 성장을 계속 해나가기 때문이다.
마치 물질계 속을 살아가듯이 말이다.
심령계와 이지계에서의 삶은 생명의 주기를 예외 없이 온전히 채우게
되어 있다. 만약 물질계에서처럼 생명의 과정에 의해 생명의 주기가 끊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인격의 성장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3차원계는
다양한 생명의 주기를 지닌 만물이 표현된 세계이다. 우리 모두 공간이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공간 속에서 나날이 살아가며,
우리의 육체 또한 그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의 크기를 측정하고 이해할 때 다른 대상과의 상대적인 비교를 거친다. 그 예로써, ‘방 안의 공간’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은
방의 크기와 연관지어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방 밖의 공간’은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우리가 비교와 측정을 하기 위해 떠올릴 수 있을 만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항상 상대적 비교에 바탕을 둔다.
만약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을 만큼 엄청나게 거대한 공간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공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절대로 없다.
우리의 마음은 무한함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한함을
무언가에 비교하여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공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이해의 방법은 그것을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절대영원성의 본질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허공을 절대영원성의 본성이자 궁극의 경계로써 받아들인다면 허공에 대한 이해가 한결 용이해질 것이다.
시간이 무엇인지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영이다. 사건들, 인상들의 연속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생명의 주기를 구성하는 각 단계들은 서로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모든 단계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해보면 그 차이가 한 눈에 확연히 드러난다. 이러한 연대기적 나열로부터 3차원적 시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계의 시간은 심령이지계의 시간과 매우 다르다. 3차원 물질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매우 느리다. 예를 들어 한 사건이 일어나서 전개되는 데에 며칠,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흐른다. 반면, 심령계에선 이 동일한 사건을 ‘생각’을 통하여 단 몇 초 안에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생생하게 겪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이가 일어나는 원인은 각 차원마다 시간이
흐르는 패턴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각 차원을 구성하는 진동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 역주) 우리의 영구인격은 이러한 차이를 쉽게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다.
물질계 속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건들이 있는가 하면,
매우 더디게 진행되는 사건들도 있다. 또한, 똑같은 양의 시간이 흘러도
어떤 때는 시간이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흘러버리는가 하면,
복장이 터지도록 시간이 안 갈 때도 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행복 또는
고통으로, 심하면 천국 또는 지옥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모든 차이는
각기 다른 차원들을 지배하는 시간의 구조를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우리가 물질계 속을 살아갈 때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선 우리의 물질체를 그 장소가 있는 곳으로 물리적으로 가져가야 한다.
반면, 물질체가 없는 심령이지계에서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생각의 속도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하게 된다. 심령계 속에서 행해지는 이동의 방식은 보행이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물질계와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물질계와 심령계를 구성하는 시공간의 구조가 다른 데에서 비롯된다.
심령계 속에서의 이동은 생각과 집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동하고자
하는 장소를 떠올리고, 그곳을 이루는 파동들과 자신의 생각이 동조,
공명하는 순간 그곳에 있게 된다. – 역주) 물질체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가령 유체이탈을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지구의 정 반대편으로 1, 2초 내에 이동할 수 있다. 심지어 여기저기의 수많은 장소들 속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세계에 과연 고정적
시간의 관념이 존재할까?
유체이탈과 동조 앞에선 기존의 시공간적 통념이 무너져 내린다.
모든 존재물은 마음의 진동이라고 전에 말하였다. 물질계를 구성하는
파동들만의 고유한 진동수가 있으며, 심령계와 이지계를 구성하는 파동들은 훨씬 높은 진동수를 지닌다. 적절한 수련과 집중훈련을 하면 누구나
높은 차원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사건들과 사물들이
동일한 공간 내에 여러겹으로 중첩되어 공존할 수 있으며, 그 세계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속도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공은 환영이 아닌 실체이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공간이란 허공 속에 표현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 역주) 시공간을 빚어낸 재료는 마음이고, 우리 또한 마음을 매개체로써 사용하여 다양한 대상들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공간이 마치 실체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가 시공간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진실이다. 만일 정말로 시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깊이 사색해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우리 내면에 있는 불멸의 그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하여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참 자아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곧 전지전능한 신,
절대영원성이라는 것을.
[출처] 비밀의 가르침 8: 시공간|작성자 곡두
'마스터와 가르침 > 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밀의 가르침 10: 빛, 그리고 초광명 (0) | 2020.01.29 |
---|---|
비밀의 가르침 9: 다차원 우주 (0) | 2020.01.29 |
비밀의 가르침 7: 우주의 탄생 (0) | 2020.01.29 |
비밀의 가르침 6: 마음과 에테르 생명력 (0) | 2020.01.29 |
비밀의 가르침 5: 대천사 (0) | 2020.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