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비밀의 가르침 4: 인간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비밀의 가르침 4: 인간

柏道 2020. 1. 29. 14:10


비밀의 가르침 4: 인간

        

Chapter 4: 인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27)

이 성서의 구절은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탄생하기 
이전, 태초에 절대영원성은 성스러운 숙고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탄생케 하고자 하는 영감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는 만물창조의 원리들을 구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물의 설계도인 이데아들을 탄생시킨다. 이데아란 
신의 전적지혜, 전적권능, 전적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만물의 완전무결한 
설계도로써,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세상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차원 우주는 절대영원성의 말씀(=로고스, 절대지혜 – 역주)으로써 창조된 것이다.

만물 중 절대영원성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단 둘만은 예외이다. 그것은 인간과 대천사이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닌, 신의 직접적 
화현이다. 진흙으로 인간의 육신을 빚으신 신은 이 육신에게 살아 움직이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의 입김을, 그의 생명력을 이 육신 속에 불어넣으셨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의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신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스러움이 깃들어간 신의 전신이요, 신의 자손이다. 
신의 사랑으로써 탄생한 인간은 존재계 안에서 선과 악의 달고 쓴 맛을 
보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삼가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사명을 부여 받았다.

소우주 인간은 대우주 절대영원성의 진정한 축소판이자 복사판이다. ‘하늘이 이루어져 있듯이 땅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심오한 영적 지혜를 드러내는 고대 이집트의 에메랄드 서판에 새겨진 명언. 에메랄드 타블렛이라고도 하며, 헤르메스학과 고대 연금술의 기원이다. - 역주)

절대영원성은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성원소들로써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하나하나는 절대영원성의 다중성을 이루어내는 성스러운 일원이다. 성원소들은 절대영원자의 성스러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표현한다. 신의 이상은 곧이 우리의 이상인 것이다.

인간과 대천사들은 모두 성원소라는 동일한 근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들은 본질적으로 한 형제이다. 한 성원소가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는 순간 그 성원소는 절대영원성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만의 고유한 의식(자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영혼은 전적지혜, 전적권능, 전적사랑으로 충만한 새로운 차원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내면의 참 자아를 구성하는 두 기반을 지니게 된다. 하나는 가장 근원적인 성원소로써의 자아,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여 화현된 자의식을 지닌 영혼으로서의 자아이다. 대천사 이데아를 통과한 성원소들은 스스로를 대천사로 화현한다.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여 화현된 영혼은 절대영원성과의 일체성으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인지하는 자의식을 지니지만, 대천사들에게는 이러한 자의식이 없다. 인간 이데아는 우리에게 대천사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별한 선물을 선사한 것이다.

(인간 이데아는 두 종류의 이데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영혼의 이데아와 인격의 이데아이다. 성원소는 영혼의 이데아를 통과함으로써 자신을 
영혼으로 화현하며, 그 영혼은 인격의 이데아를 통하여 자신을 영구인격으로 표현한다. 인격의 이데아가 있는 곳은 5천 원리계인 반면, 영혼의 이데아가 있는 곳은 6천 성스러운 이상의 경계이다. 영혼의 이데아를 비롯한 
성원소에게 ‘품계’를 수여하는 모든 대천사 이데아들은 고차원 이데아들이며, 이들은 성스러운 이상의 경계에 거한다. 반면, 인격의 이데아를 비롯한 만물의 설계도 역할을 하는 이데아들은 원리계에 머무른다.

고차원 이데아들은 태양으로부터 발산된 태초의 투명한 빛에 무지개 빛깔을 입히는 프리즘과 같다. 투명한 태양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도 되고, 파란색도 되며, 노란색도 된다. 마찬가지로, 성원소로부터 발산된 무색의 투명한 빛 줄기는 고차원 이데아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다양한 색상의 대천사 품계 및 영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성원소를 화현시키는 이러한 고차원 이데아들과는 달리, 원리계의 이데아들은 존재계 속에 표현될 각 만물의 원형을 빚어내기 위한 설계도 역할을 한다. 성스러운 이상의 경계에 거하는 고차원 이데아들을 원리계의 이데아들로부터 명확히 
구분지을 수 있어야 한다. – 역주)

성원소들은 영혼의 이데아라는 주조틀을 거쳐감으로써 스스로를 자의식을 지닌 영혼으로 화현한다. 이는 성원소 자체가 새로운 무언가로 바뀌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성원소는 절대불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만, 
성원소로부터 발산되는 빛(성원소의 투영물)이 영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영혼은 인격의 이데아를 통하여 자신을 하위 차원 속에 다시 한번 표현한다. 이 표현물이 바로 우리가 일컫는 ‘영구인격’이다.

영구인격이란 영혼의 시공계 속 투영물이다. ‘경험의 세계’로 내려온 영구인격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형상으로써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한다. 그는 시공계 속에서 윤회를 하며 수많은 이름과 성격을 지녀가며 다양한 종류의 삶을 살아간다. 영구인격은 무수한 윤회를 거듭하여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영구인격은 불멸의 초질료 마음으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현재인격이다. - 역주)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영혼이 자신을 시공계 속에 영구인격으로 표현하였듯이, 영구인격도 마찬가지로 시공계 속의 각 생마다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한다. 이 영구인격의 그림자가 바로 현재인격이다. 영구인격 자체가 단절계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재계에서 영혼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일부를 단절계 속으로 투영한다. 
시공계로 투영된 영구인격은 각 생으로부터 경험, 감정, 느낌을 수집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영구인격은 우리의 물질체, 심령체, 이지체를 구성하는 것과 동일한 재료의 물질, 심령질, 이지질을 사용하여 자신이 머무르며 활동을 하기 위한 거처를 만든다. 이곳은 바로 우리의 에테르 심장인데, 이것은 우리의 물질심장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는 영구인격이 머무르는 중심기관인 이곳을 ‘영구원자’라고 일컫는다.

영구원자는 물질, 심령질, 이지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영혼이 자신을 영구인격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순간에 탄생한다. 영구원자란 영구인격이 삶 속에서의 모든 경험, 행동, 감정, 생각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책과 같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구인격에 의해서 영구원자에 기록되며, 각 기록은 영구원자를 구성하는 물질, 심령질, 
이지질 속에 동시에 새겨진다. 인간이 물질계 속을 살아가는 동안 영구원자에 기록하는 내용들은 그의 현재인격과 영구인격의 성숙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심령계, 이지계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수호대천사와 영구인격이 
기록을 담당한다.

인간이 물질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현재인격과 영구인격은 심령계 속으로 환원한다. 심령계에서 영구인격은 영구원자 속에 저장해온 다양한 기록들을 되새기고 평가하고 공부하며, 그것들의 옳고 그름을 깨닫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계는 ‘위대한 배움의 회관’이라고 불리운다. 심령계에 머물면서 필요한 만큼의 영적 균형을 충족해낸 후 영구인격은 이지계로 환원한다. 이지계는 영구인격이 전보다 더욱 
보람 있는 다음 생을 준비하기 위한 교훈과 지혜를 습득하는 곳이다. 대개의 경우 이 모든 과정은 포근함 속에서 진행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매 
윤회마다 예외 없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적 발전을 해나간다. 
하지만, 그 발전의 정도는 개개인에게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인간성원소는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다중성을 이루는 무수한 성원소들 중 하나이다. 대우주 절대영원성이 지니는 본성인 다중성은 소우주인 각각의 성원소들에게 그대로 반영된다. 절대영원성의 축소판이자 복사판인 인간성원소는 자신만의 진아단(성원소 + 영혼 + 영구인격 + 현재인격 - 역자주)을 탄생시킨다.

광활한 물질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인간의 물질체 안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리고 광활한 심령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인간의 심령체에 안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끝없이 넓은 이지계 안의 모든 것은 인간의 이지체 속에 온전히 반영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확장이다.

티끌 하나에서부터 대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절대적 일체’로써 존재한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창조물일지라도 그 속에는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지혜, 성스러운 권능, 성스러운 사랑이 온전히 깃들어 있다.

성원소로써의 인간은 영원하다. 인간도, 대천사도 모두 절대영원성의 순수한 화현이다.

이제 영구인격에 대한 주제로 돌아오자. 경험과 지식을 수집하기 위하여 
시공계로 내려온 영구인격은 자신의 투영물인 현재인격이란 옷을 걸치고 매 생을 살아간다. 윤회의 과정이란 절대영원성과의 일체를 향해가는 
여정이다.

현재인격은 결코 우리의 전부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덧없는 욕망, 생각, 흥미 등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자의 이러한 것들을 ‘삶의 현상물’이라고 한다. 삶의 현상물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동물계의 다른 생명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영구인격과 현재인격은 어떠한 관계를 지닐까? 각 전생을 살아온 수많은 자신들과 영구인격으로써의 자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각 생의 현재인격이란 영구인격이 쓰는 가면과 같다.

우리는 그동안 시공계의 수많은 시대와 장소 속에서 다양한 인격의 가면들을 쓰고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다. 만일 우리의 영구인격이 그의 첫 환생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수집해온 모든 경험들을 한꺼번에 회상한다면, 
모든 기억은 단지 기쁨과 슬픔이란 두 가지 인상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그 기쁨과 슬픔을 느꼈던 존재는 누구인가? 내 안에서 생각하는 그 존재는 누구인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른가? 누가 어제를 살았는가?

우리 내면의 영구인격을 통하여 우리가 먼 과거에 겪었던 인상들과 오늘날 겪고 있는 인상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지금’의 경계란 무엇인지 점차 깨닫게 된다. 우리의 영구인격에게 있어서 한 생 내지 특정한 시대와 장소 속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름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긴다. 살다가 언젠간 죽음을 맞이할 영원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절한 수도를 병행하며 내면을 탐구해나가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에 불멸의 실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실재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원소와 영혼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영혼과 영구인격의 관계는 무엇일까?

우리의 영구인격은 현재인격이라는 옷을 걸치고 단절계 속에서 오늘날의 삶을 살아가며, 그 속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으며 완성을 향해간다. 
이 과정은 마치 영구인격이라는 아주 조그마한 원이 자신의 테두리를 
바깥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언젠가 그 원의 테두리가 
자신을 머나먼 바깥에서 감싸온 영혼이라는 거대한 원의 테두리와 합쳐질 때까지.

모든 인간은 두 개의 동심원을 지니고 있다. 이중 테두리가 큰 원은 영혼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주 조그마한 또다른 원이 있는데, 이것은 영혼-영구인격이다. 왜 단순히 영구인격이 아니라 영혼-영구인격일까? 그 이유는, 작은 원은 거대한 원에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작은 원 안에는 큰 원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부분, 거대한 원의 일부가 아닌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원은 거대한 원의 테두리와 포개져 하나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확장해나간다. 그리하여 언젠가 작은 원이 큰 원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오면, 작은 원은 큰 원에게 흡수되어 사라져 버릴까? 작은 원이 스스로를 확장하는 과정동안 모아온 경험들이 소멸되어 버릴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작은 원은 거대한 원과 일체가 되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를 확장한다. 
영구인격은 윤회와 경험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장해나가며, 궁극에는 
자신을 품어온 영혼과 일체된다. 그리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땅 위의 몸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으로 변화’(고린도전서 15:53)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흔히 ‘내가 느낀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이해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 ‘나’가 내면의 영원한 진아단의 작은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우리의 내면을 진지하게 관찰해보면, 과거의 생각, 경험들에 의하여 형성된 오늘날의 나의 모습은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경험들, 생각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교체되고 변화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거에 지녀온 생각, 욕망, 감정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변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의 나의 욕망, 생각, 감정들은 과거의 내가 지녔던 그것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사색했던 나 자신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사색하고 있는 나 자신과 동일한 나이다. 이로부터 영구인격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가? 영구원자는 우리가 겪은 모든 경험들과 지식들을 축적하는 저장고이며, 더 나아가 향후에 겪어나갈 경험들을 더욱 깊고 넓은 안목으로써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준다. 인간이 자신의 
윤회의 과정 동안 지녀왔던 모든 행동, 사고, 감정, 삶의 방식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곳이 바로 영구원자이다.

지상에서의 한 생이 마무리되면, 영구인격은 현재인격과 함께 물질체를 
버리고 심령계로 떠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현재인격의 질과 영구원자의 기록에 상응하는 심령계의 차원, 그리고 하위차원 
속에 머물게 된다.

심령계로 들어선 영구인격은 바로 이전 생에서 지녔던 현재인격의 가면을 아직 쓴 채로 심령계를 살아가며, 그곳에서 겪어나가는 새로운 경험들을 영구원자에 계속해서 기록해나간다. 심령계 속에서 우리는 영구인격과 현재인격이라는 두 가지 존재성을 동시에 지니며 살아간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물질계적 관점으로는 이러한 양립적 존재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심령체를 지니고 심령계에서 사는 순간 이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나 쉽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현재인격은 물질계에 머물던 때와 마찬가지로 심령계에 살면서도 다양한 기쁨과 슬픔의 인상들을 느끼고 경험하는데, 이때 우리의 현재인격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진리적 사고를 하는 참 나인 영구인격이다.

심령계에는 천국과 지옥이 정말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 의해 창조된 세계이며, 둘 다 경험을 얻고 가치 있는 교훈들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천국과 지옥이란 이름, 국가, 갈망, 생각, 욕구의 총체물인 현재인격 스스로가 창조하고 겪어나가는 환영의 세계이다. 영구인격은 수호대천사와 함께 현재인격을 지켜보고 감독하며, 현재인격이 배우고 깨달을 때마다 영구인격도 함께 성숙해나간다.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영구인격과 수호대천사는 결코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으며, 그리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8:51).

심령계 안에 머물며 모든 필요한 경험들을 기록한 후에 영구인격은 자신의 심령체를 이지체에게 동화시킨 후 이지계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이지계에서 자신과 동조하는 차원과 하위차원 속에 머물게 된다.

심령계는 7개의 차원과 49개의 하위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지계 또한 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지계에서 일정 기간을 머문 후 영구인격은 이지체를 해체하여 모든 육신을 버리고 원형계로 환원한다. 그리고 기존에 지녀온 현재인격의 정수는 
영구원자 속에 흡수된다.

원형계의 인상들을 흡수하는 작업을 마치면 현재인격은 한 생을 온전히 
마무리 짓게 된다. 이곳까지의 과정이 힘겹고 가혹했던 이들은 이제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편안하고 행복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또는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다음 환생, 새로운 삶을 위하여 바로 떠날 수도 있다.

환생을 위해 다시 이지계로 내려온 영구인격은 성령을 비롯한 창조의 대천사들과 함께 다음 생에서 사용할 새로운 이지체를 만드는데, 이때 운명의 신령들과 인과응보의 신령들은 새 이지체를 만들기 위한 재료인 이지질을 영구인격에게 선사한다. 이는 영구인격이 자신이 사용할 이지체를 스스로가 직접 만들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기회는 가장 낮은 지옥에 머무는 
인간의 영구인격에게조차도 똑같이 주어진다.

새로운 이지체를 완성하면 영구인격은 심령계로 내려오는데, 이곳에서도 이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운명의 신령들으로부터 새로운 심령체를 만들기 위한 심령질을 받는다. 그리하여 심령체를 만들고 나면 우리의 현재인격은 물질계의 에테르 복체(에테르계 - 역주) 속으로 진입한다 (현재인격은 이지체와 심령체가 만들어지는 동안 생성된다. 현재인격은 심령이지질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 역주). 그리고 운명의 신령들은 사랑의 법칙, 동정의 법칙, 자비의 법칙을 바탕으로 하여 환생하는 현재인격에게 그의 카르마적 상태에 상응하는 삶의 환경을 내려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주어진 환경 속에 태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높은 심령이지적 의식의 경지에 도달한 자들(대사들)은 위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성성이 깨어진 의식을 지니고 모든 진행 과정을 지켜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 과정에 대한 직접적 통제권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환생할 시공계 속의 시대와 장소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일부 대사들은 물질계보다 높은 차원에 환생하여 그곳 존재들의 완성을 돕는 길을 택하며, 다른 대사들은 우리와 같이 물질계에 환생하여 동일한 일을 한다.

자비의 신령들과 사랑의 신령들은 각각의 영구인격에게 그가 육신을 빚어내기 위한 재료로써 그의 영구원자의 질에 상응하는 심령이지질을 선사한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현재 준 것보다 더욱 정교하고 순수한 영적 질료를 얻고 사용할 수 있는 기회들을 새로운 생 속에 제공한다. 이는 우리가 
이전보다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이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며, 그 모든 결과는 우리가 스스로의 진보와 성숙에 대한 필요성을 얼마나 깊게 깨달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간절한지에 달려있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자비의 법칙이다.

우리는 고차원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회개하고 자신을 개선해나갈 수 있는 전적인 자유가 있다. 진정한 자기정화와 진보를 이루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영구인격과 새롭게 탄생한 현재인격의 노력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물질계 속 갈망들, 생각들의 총체물인 현재인격과 ‘영원한 지금’의 경계 속에서 실재하는 영혼의 차이를 분간할 수 있다. 물질계, 심령계, 이지계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영구인격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 영구인격이 품고 있는 지혜와 
사랑을 탐구해나가다 보면 점점 확장되어가는 나, 영혼에게 동화되어가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물의 
세례가 아닌, 불의 세례, 뜨거운 성령의 세례를(누가복음 3:16). 이때의
 느낌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이것이 정녕 인간이 추구하고 염원해온 
진정한 해방이던가? 아쉽게도, 이곳은 아직 우리 여정의 종착역이 아니다.

처음에는 아주 포근한 곳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곳은 마치 아름답고 눈부신 무대의 단상과도 같다. 그리고 곧 이어 자신이 발을 
내딛고 있는 길은 빛의 세계, 영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단절계, 시공계를 뒤로 하고 끝없는 자유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아를 깨닫고 영혼과 하나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하여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한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진아가 이제는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향해가야 할 방향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길을 걸어나가는 것은 현재인격과 영구인격의 몫이다. 인간으로써의 우리의 사명은 진아실현을 이루어내고, 
더 나아가 절대영원성과 일체되는 테오시스를 성취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 온전히 깃들어 있다. 
또한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절대영원성 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한복음 14:28)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인 절대영원성과 그의 화현인 성령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아버지 절대영원성으로부터 탄생한 로고스는 전적지혜, 전적권능, 전적사랑으로 가득하며, 그 외에도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수많은 성스러운 
본성들을 지니고 있다. 로고스는 모든 권능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 모든 곳에 있으며, 모든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에 의해서 탄생한 표현물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로고스(절대이성)는 인지의 영역을 초월하는 신의 
진정한 실체이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의 참 나는 무형의 성원소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그의 화현체인 영혼과 인격에게 절대지혜, 절대권능, 절대사랑을 공급해주는 원천이다.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기 이전의 성원소가 작고 보잘것없다고 착각해선안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성원소는 신이다. 
그리고 인간 이데아를 통과한 성원소는 신의 이성이다.

이제 이데아에 대하여 탐구해보자. 인간 이데아는 다른 고차원 이데아들과 함께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숙고의 경계 속에 거한다. 이데아란 정작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과 로고스에 의해 ‘영원한 지금’의 경계 속에 
표현된 성스러운 무언가이다. 그렇다면 인간 이데아를 통과할 성원소들을 정하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성원소 자신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결정은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가 내린 것이며, 그 자주적 결정을 내린 순간이 바로 인간이 지니게 된 절대적 자유의 기원이다. 우리가 자의식을 지니게 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며, 이 잃어버린 자의식을 되찾는 것은 절대영원성으로 귀환하여 테오시스를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절대영원성은 수많은 고차원 이데아들을 창조하였는데, 그 중 인간 이데아를 통과한 성원소들은 스스로를 영혼으로 화현한다.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기 이전의 성원소는 영원한 절대생명이긴 하였으나, 영혼과 같이 자의식을 가진 독립적 개체는 아니었다. 성원소는 절대영원성의 일원이었지만, 그 일체로부터 분리된 자신만의 고유한 개체성은 인지하지 못하였다. 인간 이데아를 거쳐 영혼으로 화현되어야 비로소 자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자의식의 경지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크게 잠재적 자의식, 자의식, 그리고 초자의식으로 나뉜다. (잠재적 자의식이란 자의식이 활성화되지 않은 
보통 인간의 닫혀있는 의식이고, 자의식이란 진아실현을 통하여 얻게 되는 완성된 의식이고, 초자의식(초의식+자의식)이란 테오시스를 성취하여 얻게 되는 궁극적 의식의 경지이다 - 역주)

화현되기 이전의 성원소는 절대영원성의 절대적 축복의 경계 속에 거한다. 이러한 그가 전체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개체가 되기 위해선, 그리고 
현상계 속에 환생하여 표현된 생명이란 무엇인지 직접 체험하고 깨닫기 
위해선 그는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여야만 한다. 현상계로 내려온 성원소에게는 궁극적으로 절대영원성에게 다시 귀환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다. 
인간이 진아실현을 하여 얻게 되는 자의식은 인간 외의 그 어떤 창조물, 
심지어 대천사들조차도 지니지 못하는, 오직 인간 이데아를 통과한 성원소들만이 지닐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그 이유는 한 성원소가 진아를 인지하는 자의식을 얻기 위해선 시공계로 내려와 표현된 생명의 실상을 몸소 
체험하고 깨닫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이데아 속으로 들어선 성원소는 자신의 일부분을 자의식을 지닌 경이로운 영혼으로 표현한다. 성원소에게 있어서 영혼으로 표현된 부분은 그의 아주 작은 일부이다. 성원소를 태양에 비유한다면, 영혼은 태양으로부터 발산된 한 줄기 빛에 해당된다. 한 성원소 전체가 영혼이 되거나 환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원소로부터 발산되는 빛이 영혼으로 표현되어 경험계로 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은 그것을 발산한 성원소와 
질적으로 동일하다.

인간을 탄생케 한 이는 누구일까? 그리고 인간에게 그 복잡하고 정교한 세 육신을 만들어주어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해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성스러운 계획 안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인간을 창조한 이, 그는 바로 절대영원성이다. 그는 창조자인 자신을 그대로 반영하는 복사판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였다 (창세기 1:26).

원소의 대천사들은 인간에게 시공계 속을 살아가기 위한 육신을 선사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갈 육신을 만들고 관리해줌으로써 영구인격과 수호대천사가 단절계 속에서 일련의 현재인격들을 씨 뿌리고 경작해나가는 과정인 윤회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현재인격이란 영구인격이 쓰는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에 말하였다. 
현재인격은 매 생마다 새롭게 창조되며, 이것은 수호대천사와 영구인격의 공동작품이다.

현재인격은 자주적이면서 사고의 능력이 있으며, 에테르 에너지를 사용하여 사념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궁극적 임무는 영구인격에게 경험과 지식을 수집하여 전달해주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현재인격으로써의 우리는 덧없는 존재이다. 그 덧없음은 우리의 세 
육신, 그리고 갈망, 생각, 욕구 등을 비롯한 현상계 속에서 우리가 지니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언젠간 우리의 현재인격과 물질체가 소멸되어 버리는 날이 올것이다. 
심령체, 이지체 또한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사라져 버리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내면에는 잃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이다! 이 나를 찾는 순간 우리는 말하게 된다. 
‘나는 나이다.’ 이 나는 이름을 초월하는, 밀물과 썰물과도 같이 수없이
 교차하는 모든 감정과 갈망들을 초월하는 내면의 진정한 나이다.

생각과 갈망이란 놓아버릴수록 성숙하고 정교해지는 것이건만, 그렇지 않고 그것들을 움켜쥐기만 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것들이 쓸모 
없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쥐고 놓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삶 
속에서 얻고 잃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 얻음과 잃음을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욕망, 
생각, 집착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 물질체를 떠난다면 그것들은 심령계 속을 살아가면서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 이후 이지계 속의 삶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인간이 투영된 삶의 영역은 물질계뿐만이 아닌 심령계와 이지계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는 사람을 보거나 물질체가 썩는 것을 보면 겁을 먹는다. 그러나, 정작 떠나가는 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잠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듯, 죽는 자는 자신이 죽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잠자는 동안 물질체를 빠져 나오지만(무의식적 유체이탈), 그 과정에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매일 밤 곤란할 것이다.

흔히 인간은 다른 이들이 죽어서 물질체를 떠날 때 ‘죽을 때 아플까? 고통을 느낄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육체적 고통이란 
물질계 안에서만 존재하며, 죽어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순간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육체를 버리고 떠나는 한 영혼의 
성스러운 해방의 순간을 오해하면 안된다.

‘죽음’의 현상이 일어나면 영구원자는 더 높은 차원으로 환원하며, 
그가 지녀온 물질적 요소들은 영적 빛으로 화한다. 
지식이 지혜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쉽게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불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불은 태울 무언가가 있는 한 계속하여 화염을 내뿜는다. 그러다가 태울 것이 모두 소진되면 불은 우리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흔히 병든 사람들이 죽기 전에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년간을 병에 시달리며 아파온 사람일지라도 죽는 순간에만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죽어서 물질체를 떠난 이후에는 몸이 더욱 가볍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며, 만일 그의 물질체가 훼손되었거나 부상을 당했었다면, 그의 심령체는 상처 하나 없는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죽고 나면 지난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영구원자에 모아온
느낌, 인상들과 동조하는 심령계의 차원과 하위차원 속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영구원자와 영구인격을 구성하는 재료는 에테르 생명력이다. 우리의 
낮은 차원의 육신들은 다양한 밀도의 에테르 성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육신은 성령적 표현물인 반면, 영구인격과 영혼은 이성적 표현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고스가 우리의 아버지인 것은 아니다 (절대영원성만이 진정한 아버지이다. – 역주). 예수께서도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셨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20:17).

로고스는 곧 신이다. 그리고 우리들 각각의 영혼은 로고스(절대이성)를 
이루어내는 원소인 ‘이성소’이다. 이성소의 수는 어느정도일까? 대천사의 수만큼 많다. 각 품계의 대천사의 수는 무한대에 가깝다. 그들은 모두 
성령적이면서도 이성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대천사들보다 이성적이며, 
대천사들은 인간보다 성령적이다. 인간은 로고스의 표현물이요, 대천사는 성령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 역주)

현재인격을 쓰고 물질계를 살아가는 자신이 설령 고통과 욕망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결코 자신을 비하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원소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절대영원성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이자 ‘그의 아들’이다.


인간 이데아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귀의해야 할 대상은 성스러운 숙고를 통하여 모든 이데아들을 비롯한 온 우주를 창조한 절대영원성이다. 창조의 위대한 숨결은 물질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심령계에서는 그것이 더욱 선명하고 명백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지계에서 그것은 더욱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상 어떤 인간도, 대천사도, 그 어떤 존재도 절대영원성의 위대함을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성원소들은 이미 그의 장엄함 
속에서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쾌락은 절대영원성의 성스러운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스러운 축복은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형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다.’ (고린도전서 2:9)

우리의 영구원자는 육신(물질체, 심령체, 이지체)보다 위대하다. 영구원자는 영구인격의 일기장이다. 영구인격은 항상 이 일기장을 소지하며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겪어온 모든 기쁨과 슬픔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그렇다면, 영구인격은 과연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 할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우리의 영구원자 속에 전생들로부터 기록되어 온 이름만 수백 개가 넘기 때문이다. 또한, 매일같이 떠오르고 매 순간 바뀌는 우리의 무수한 갈망, 감정, 생각들 중 영구인격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을까? 그가 취하는 것은 오직 경험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이 원형계로 돌아갈 때 취하는 유일한 것은 시공계 속에서 겪은 경험들이며, 또한 그것들의 세부사항들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구인격은 수집한 경험들 속에 깃들어 있는 진리적 
인상, 진리적 진동만을 취한다. - 역주)

진아단

진아단이란 가장 높은 정점에서 절대영원성과 일체인 성원소에서부터 
가장 말단에서 고군분투하는 현재인격까지 한 진아의 모든 단계적 표현물들을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총칭이다. 영혼의 가장 중대한 사명은 윤회의 굴레를 통하여 인격을 완성시키고, 그리하여 분리된 진아단을 재통일하여 궁극적으로 테오시스를 성취하는 것이다.

다양한 표현물로 구성된 진아단은 절대영원성의 축소판이요 복사판이다. 어떠한 원리로써 그러할까?

첫째로, 우리는 자체완전성을 지닌다. 대우주 절대영원성이 그 무엇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 완전하듯이, 소우주인 우리들 또한 내면에 
이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진정한 천국은 우리 안에 있다.’

둘째로, 절대영원성이 우주(물질계, 심령계, 이지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 이성적 화현물인 인간을 표현하였듯이, 우리 인간 또한 육신(물질체, 
심령체, 이지체)을 창조하고, 그 속에 자신만의 고유한 진아단을 표현한다.

셋째로, 우리에겐 사고의 힘, 감성의 힘, 사랑의 힘이 있다. 우리는 환경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신을 뜻대로 표현할 수 있는 위대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

넷째로, 우리에게는 출산의 능력이 있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값진 선물이자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로고스, 성령과 함께 성스러운 계획을 이어받아 실현하는 공동 창조자이다.

진아단이란 스스로를 넷으로 펼치는 하나의 우산이다.

성원소

우리의 가장 근원적 진아인 성원소는 절대영원성과 항상 일체이며, 그의 
성스러운 다중성, 성스러운 자체완전성의 경계를 단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성원소는 자신으로부터 한 줄기의 빛을 발산하여 스스로를 표현한다. 절대영원성이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은 성원소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이다.

영혼

성원소가 발산한 한줄기의 빛은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는 순간 영혼으로 
화현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절대영원성과 일체인 동시에 자신을 그 전체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써 인식하게 된다.
영혼은 절대성과 실재성을 동시에 지닌다. 절대영원성의 경계 속에서 절대하는 동시에 성스러운 이상에 의해서 표현되어 실재하는 것이다.

영구인격

일명 ‘영혼의 발’이라 일컬어지는 영구인격은 영혼의 시공계 속 투영물인 동시에 영혼과 일체이다. 영구인격은 전적지혜, 전적권능, 전적사랑을 비롯한 모든 성스러운 법칙들을 담고 있다. 그의 임무는 현재인격이 
겪어나갈 삶과 경험들을 결정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영구인격은 성숙하고 정교해지며 완전해진다.

현재인격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떠올리는 인격이다. 현재인격은 영구인격의 세 차원들로 이루어진 단절계(물질계, 심령계, 이지계) 속 표현물이다. 현재인격은 시공계 속을 살아가는 영혼의 투영물이며, 그 속에서 만들어낸 감정, 취향, 갈망들의 혼합물이다. 현재인격은 자신이 수집한 경험들과 인상들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면서 스스로를 개선하고 다듬어나간다. 이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우리가 지녀온 번뇌와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우리의 에테르 파동은 더욱 정교해진다.

진아단을 구성하는 단계적 표현물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정리를 
해보자. 비록 우리의 진아단은 성원소, 영혼, 영구인격, 현재인격이라는 
넷으로써 구성되어 있지만, 이들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다.

거대한 태양(성원소, 절대영원성)으로부터 한줄기 빛이 발산된다.
 이 빛은 인간 이데아를 통과한 영혼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빛은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선다. 창문을 통과하여 실내로 진입한 빛은 영구인격을 상징한다. 영구인격의 일부는 ‘영원한 지금’의 경계(집의 외부)에 머무르는 영혼과 일체이며, 나머지 일부는 단절계(집의 내부) 속으로 투영된다.

집 안으로 들어선 빛줄기는 마침내 마루 위에 닿는다. 마루 위에 펼쳐진 
빛이 바로 현재인격이다. 태양으로부터 발산된 본래의 빛은 순수하며 눈부시다. 그 빛은 이데아들과 다양한 차원들로 구성된 층을 거쳐 내오면서 
분산될 뿐, 근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빛이다. 성원소와 영혼의 빛이 궁극적으로 펼쳐지고 표현되는 곳은 마루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마루 
위에 쌓여있는 먼지를 치우고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