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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6장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6장

柏道 2020. 1. 29. 13:59


에크하르트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6장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6장 영혼
1. 영혼은 무엇인가?

영혼은 본래부터 천국의 상속자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합법적 유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영혼을 낳으시기 때문이다.
영혼은 그렇게도 높고 위대한 선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쉴 수가 없다. 영혼은 언제나 영원한 선을 향하여 서둘러 나아간다.
이교도 학자는 영혼이 자신을 안다면
그 영혼은 모든 것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이 탄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영혼의 본성은 결코 영혼의 본성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탄생을 바라지 않았더라면 영혼은 자신의 본성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하느님도 당신 안에서 탄생되도록 뜻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이 지나가도록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느님은 행하시고, 영혼은 갈망한다.
하느님은 힘을 가지고 계시고, 영혼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영혼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서 탄생하게 하고
자신은 하느님 안에서 탄생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영혼이 당신과 닮도록 계획하신다.
영혼은 합일과 하느님의 보호를 갈망하며 하느님이 자신 안에서 탄생하시고 자신이 하느님 안으로 자라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본성이 영혼의 빛 안으로 부어지며 그 안에서 영혼이 보존된다.
하느님은 당신의 본성과 본질과 신성을 지니고 영혼 안에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영혼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이 모든 지식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으며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그 지식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2.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혼은 말하자면 시간과 영원 사이의 장소에 있으면서 양쪽 모두에 닿아
있다. 그보다 상위 능력에서는 영원과, 하위 능력에서는 시간과 닿아 있다.
고대 철학자는 영혼이 1과 2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1은 영원성으로 언제나 홀로 있고 변화가 없다.
2는 시간이며 변화하고 다수가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혼이 그 상위 능력에서는 영원성,
곧 하느님께 닿아 있고 하위 능력에서는 시간에 닿아 있어서
변화에 종속되고 영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물질들에 기운다는 사실이다.
영혼이 천사들처럼 하느님을 잘 알 수 있었다면
영혼은 육신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이 세상 없이 하느님을 알 수 있었다면
세상은 영혼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영혼을 위하여, 다시 말해 영혼의 눈이
하느님의 빛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긴장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영혼은 자신을 자신 위로 들어높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당신과 함께 계신 그 공간으로 옮겨 가도록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어떤 외부 사물과 만나지도 말아야 한다.
내가 살아 있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하듯이 하느님을 아는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이렇게 하느님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영혼은 하느님 나라, 곧 완전히 충만한 하느님께서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영혼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분이 가혹한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더욱 넓어져서 당신이 주고자 염원하는 그 많은 것을 수용하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큰 은혜 때문이다.
영혼은 그렇게도 높고 위대한 선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쉴 수가 없다. 영혼은 언제나 영원한 선을 향하여, 영혼의 목표인 하느님을
향하여 서둘러 나아간다.

3. 육신과 영혼
육신과 영혼의 긴밀한 결합 때문에 영혼은 육신 전체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지체 안에도 있다.
육신과 영혼은 쌍둥이와 같다. 야곱과 에사오가 함께 태어났듯이
육신과 영혼은 한 사람으로 함께 태어나고 또 서로 대립된다.
에사오는 경솔한 사람으로 사소하고 썩어 없어질 것에 마음을 쓴다.
야곱은 투쟁하는 사람이고 승리자다. 땅은 이 현재 세계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이런 것들 때문에 야곱은 그의 고향과 형을 피해 떠나갔다.
영혼도 이와 비슷하다. 영혼은 하늘에서 오고 육신은 땅에서, 곧 부모에게서 온다. 그리고 육신은 영혼과, 영혼은 육신과 싸운다. 성 바오로에 따르면
영혼과 육신은 본래 싸우게 되어 있다. 영혼은 영원한 것을, 육신은 덧없는 것을 갈망한다. 영혼은 감각적 쾌락과 영원하지 않은 모든 사물을 피해야 하는데, 성 바실리오가 말한 것처럼 "완덕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쓰지 않아야 할 것으로 다음 네 가지를 예로 든다.
첫째는 현세 사물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헛된 영광, 곧 이웃의 명예보다 자신의 명예에 더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감각의 쾌락이다.  이 세 가지를 통해 네번째 것을 배우게 된다.
넷째는 자신에 대해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은 안식을 누리게 되며 돌베개를 베고 자면서 사다리가
한쪽 끝은 땅에, 한쪽 끝은 하늘에 닿아 있음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 위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영혼을 살펴보면 영혼은 약간의 지적 본성을, 불꽃을, 한 줄기 빛을 가지고 있으며 육신 안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는 갖가지 능력들을 지니고 있다.
그 한 예가 소화 능력인데, 이 능력은 낮보다 밤에 더 활발해지고 이를 통하여 인간은 성장하고 자라난다. 또한 영혼은 눈에도 능력을 가진다.
그 능력은 눈을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게 하며 너무나 까다로워서 사물이
원래 가진 조잡한 양식으로는 수용될 수 없게 만든다. 그 대상 사물은 먼저
빛과 공기에 의해 걸러지고 정화되어야 하는데, 그 사물이 영혼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영혼 안에 있는 다른 능력은 생각하는 데 쓰이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물을 자신 안에 떠올릴 수 있어서 나는
그 사물을 마치 내 눈으로 보듯이 보거나 또는 그보다도 더 잘 볼 수가 있다. 나는 겨울에 장미가 없어도 장미를 볼 수가 있다.
이 능력으로 영혼은 비실존물에서 사물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무에서 사물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처럼 말이다!

다른 무엇들보다도 참회의 고행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단식, 밤샘, 기도, 무릎 꿇는 것, 편태(鞭笞), (거친) 털로 된 옷을 입는 것,
딱딱한 바닥에 눕는 것 등은 모두 육신이 영혼에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육신이 영혼에 비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끝없는 갈등과 투쟁이 생긴다. 이 세상에서 육신이 용감하고 강한 것은 세상이 육신의 고향이고, 세상은 육신을 도와주며, 세상은 육신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은 육신의 모든 가족들, 곧 음식.음료수.편안함과 같은 것에서
도움을 받는다. 이들은 모두 영혼에 대립된다.

이 세상에서 영혼은 이방인이며, 영혼의 가족들은 천국에 있다.
영혼이 사랑하는 이들은 천국에 살고 있다. 어려움에 빠진 영혼을 돕고
육신이 영혼을 정복하지 않도록 싸움에서 육신을 방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육신에 고행이라는 굴레를 씌워 영혼이 육신을 통제하게 한다.
그 목적은 육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을 정복하고 억제하기 위해서, 그것도 훨씬 더 잘 억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굴레를 씌워야 한다. 사랑으로 그대는 육신을 가장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며 사랑으로 육신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신다.
사랑은 어부의 낚싯바늘과 같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만이 어부의 것이 된다. 바늘에 걸린 물고기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지만 일단 바늘에 걸리고
나면 그 물고기는 영락없이 어부에게 잡히고 만다. 어부는 확실히 그 물고기를 잡았다. 사랑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사랑에 붙잡힌 사람은 가장 강하게 묶인 셈이지만 기분 좋은 짐이다.
이 감미로운 짐을 지는 사람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심한 고행을 할 때보다 더 가까이 간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에게 닥치는 시련을 즐거이 견디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고통을 즐거이 받는다. 이 감미로운 결합보다 더 그대를 하느님의 것이 되게 하고 하느님을 그대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없다. 바늘에 걸린 사람은
빨리 붙잡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손과 발, 입, 눈, 마음,
그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므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다.
영혼 안에 그와 유사한 것이 있다. 영혼이 모든 지체들 안에, 그리고 그 각각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창조될 때 영혼은 자신의 존재 근거에서
이런 것을 받았다. 그래서 영혼은 전체로서의 지체들 안에서,
그리고 그 각각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영은 신비로운 것으로서 영혼과 육신의 긴밀한 일치의 힘으로
모든 지체들에게 생명을 준다.

4. 영혼의 능력
영혼의 최고 능력은 남성, 곧 영혼의 의지다. 이것은 언제나 가려지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서 있다. 둘째 능력은 여성, 곧 지성이다. 이것은 언제나 베일로 덮여 있다. 하위 능력은 상위 능력으로 드높여진다.
남성이라고 하는 의지가 여성이라고 하는 지성과 결합되면 이 여성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 남성 능력이 여성 능력에서 분리되면 인간의
의지는 거짓된 빛 안에서 흔들리게 된다.
영혼 안에는 시간과 육체로 손상을 입지 않고 성령에게서 흘러 나와 성령
안에 남아 있는 완전히 영적인 능력이 있다. 이 능력 안에서 언제나 젊으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온갖 기쁨과 영광 안에서 빛나신다.

영혼은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정신과 의지와 열정이다.
이 세 능력은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다. 하느님께 굳게 결합되어 있는 의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신성을 소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의지에게 능력과
생산력을 주신다. 성자께 굳게 결합되어 있는 정신은 성자와 함께 안다.
이 정신이 지식을 가지지 않을 때 성자와 함께 알게 되는 것이다.
셋째 능력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는 추진력이다. 이 능력은 늘 자신이 나온
원천을 향해 나아가는데, 이렇게 그 내적 본성을 향해 가도록 자극하는 것이 성령이다. 영혼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 거기에서 영혼은 시간을 초월하는 시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잃게 된다.
영혼은 세 가지를 이해한다.
첫째는 자신보다 위에 있는 것을 이해하고,
둘째는 영혼 자신을 이해하며 여기에서 시작하여
세번째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일자(一者)에 대한 이해다.
여기에서 영혼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자신을 소유한 채
자기 자신을 잃는다.
하느님께서 영혼을 영혼 위로 들어올려 당신께로 데려가시기 때문이다.
거기서 영혼은 혼자 힘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알지도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 바오로가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영혼에게 속하는 세 종류의 지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피조물에 대한 지식인데, 이것은 오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으며
인간 외부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만 그분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고
대략을 본다.
둘째 지식은 좀더 영적인 것으로 현존하지 않는 것이나 의식에 대해 갖는
지식이다. 예를 들어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친구를 생각한다면
이때의 지식은 여기에 속한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를, 그의 옷을, 그의 형상을 보며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본다. 이것 역시 본성이다. 이 지식에서 그는
직접 알려져 있지는 않으며, 나는 시간이나 공간이나 색채를 통해서는 그를 진정 알 수 없다.
셋째 하늘이란 순수하게 영적 지식을 말한다. 여기에서 영혼은 모든 대상을, 물질적 사물을 벗어난다. 거기에서 우리는 수단 없이 듣고 질료 없이 본다.
거기에는 붉거나 희거나 검거나 푸르다는 것이 없다.
이러한 순수한 지각으로 영혼은 하느님을 그 본성에 있어서 하나로,
그 위격에 있어서는 셋으로 인식한다.

영혼은 자신 안에 결코 죽지 않는 지성의 불꽃을 지니고 있다.
정신의 정점인 이 불꽃에서 우리는 영혼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영혼 안에는 외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고 감각적. 이성적
지각이 있는데, 이들은 표상과 언어로 존재하여 우리에게 그 불꽃을 가린다.
영혼은 (천사들을) 넘어선다. 영혼이 시간 안에 있는 최고의 인간 존재와
동일하다고 해도 그 인간은 각각의 현재 안에서 수도 없고 방법도 없는,
천사의 방법과 모든 창조된 지성을 넘어 새로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혼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자신의 본래 형상을 되찾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는다.

5.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데 유익한 것과 방해되는 것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영혼이 너무 분열되어 충분히 단순하지(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영혼이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단순하지 않을 때 그러하다.
둘째는 현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이다.
셋째는 육신을 좋아하여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영혼 안에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도와주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혼이 하나가 되어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같이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둘째는 영혼이 자신과 모든 현세 사물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모든 덧없는 사물에서 벗어나고 행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내 영혼이 자신을 미워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 영혼이 내 것인 한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내 영혼은 완전히 하느님 안에 자리잡고 하느님께 되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영혼이 자신을 영혼으로서 즐기고 하느님을 영혼과 함께 즐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즐겨야 한다.
하느님은 온전히 영혼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듯이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다". 이 세상 안에서 영혼의 존재와 영혼이 보는 것들, 이해했다고 여겨지는 것들, 이 모두를 영혼은 미워해야 한다. 한 스승이 말하기를 가장 높고 순수한
상태의 영혼은 온 세상을 초월한다고 하였다.
영혼을 세상에 얽매이게 하는 것은 애착일 뿐이다.
때로 영혼은 육신에 대하여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사랑을 갖는다.
때로는 피조물을 향하여 의지가 기울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영혼이 세상 사물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귀가 색깔에 대하여 눈이 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정도를 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연 철학자들은 영혼이 육신 안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육신이 영혼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통이 포도주를 담고 있는 것이지 포도주가 통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듯 육신이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신을 간직하고 있는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혼이 무엇을 사랑하더라도, 영혼은 그 본성상 순수하다.
한 철학자에 따르면 영혼은 자신 안에서 이해를 얻는 것이 본성이자 본래의 목표이며,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일반적 개념을 알려주신다고 한다. 자신의 본성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하느님 안에서처럼 빛 안에 형성되어 있다. 그것들이 각각의 본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정신도 천사도 영혼의 근저나 또는 그 본성에 이를 수 없다. 영혼의 근저에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선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퍼져 나는 그 원천으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데, 그것들은 합성되지 않은 영혼의 본성 안에서처럼 순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느님 안에서처럼 나누어지지 않을 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영혼이 그렇게도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고 차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영혼은 시간 안으로 들어와 시간과 수 안에 있는 사물들을 붙잡고는 이미 소유하고 있던 것들을 잃는다"고 말한다.

6. 영혼이 해야 할 것
영혼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 순수한 자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언제나
그 안에 있고 밖으로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현존하며 그 가까이 계신다.
영혼은 세 가지 이유로 자신 위에 머물러야 한다.
첫째는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즐거움 때문이다.
하느님의 충만하심은 그 자체 안에 담겨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피조물들이 흘러 넘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상을 받을 수 있는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줄 수
있고, 그 피조물들은 마치 하느님을 비워버릴 만큼 헤아릴 수 없이
하느님께로부터 흘러 넘친다.
그 수는 잔디의 씨나 잎보다도 많고, 이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빛과 선물과 은총이 흘러 나온다. 이 본성을 통하여 흐르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주시며, 이 선물들 안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지 않으신다면 영혼은 무와 같을 것이다.

둘째,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빛을 향하여 올라간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빛이다. 피조물들이 하느님께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이 분명하듯이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는 무와 유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하느님 안에는 빛과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어둠이다.
하느님 안에서 무(無)는 빛이고 어둠이다.
셋째,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동일성을 향하여 올라간다.
하느님 안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는 지혜와 선이 동일하다. 지혜에 관한 것은 선이나 그 밖의 것들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그분 안에서 지혜와 선이 별개의 것이라면 하느님 안에 있는 영혼에게는
만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하고,
피조물들은 모두 지혜에 대한 천부적 갈망을 지니고 있다.

영혼은 네 단계를 거쳐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
첫 단계에서는 영혼의 희망과 갈망과 두려움이 약해진다.
다음 단계에서는 희망과 두려움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진다.
셋째 단계에서 영혼은 이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넷째 단계는 이들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않게 되는 망각이다.

7. 영혼의 불꽃
영혼은 자신 안에 영적인 한 지점을 지니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마치 제 1원인이 자신 안에 모든 사물을 비질료적으로 품고 있듯이 영혼이 모든 사물을 질료에서 벗어난 상태로 소유하고 있다. 또한 영혼은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는 빛을 지니고 있다. 이 빛과 이 지점이 일치하여 그들이 서로 안에
자리하게 될 때, 오직 그때 영혼은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다.
스승들에 따르면 이 빛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작용한다.
이를 '신데레시스(synderesis)'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에 결합시키고
또 어떤 것에서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두 가지 작용을 하는데
하나는 불완전성에서 돌아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영혼이 지옥에 있을지라도 언제나 선을 바라며,
그리하여 영혼 안으로 직접 선을 가져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완전한 고요 속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완전한 활동을 하시는 신적.영적 하늘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보라, 내가 네 안에 새 하늘을 만들리라"고 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