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4장 본문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4장 고통. 표상. 시간. 일치
1. 고통
나는 런던 교육병원의 외과 학부에서 일하고 있으며 큰 외과 수술을 받는
환자들에게 수술 전후의 통증을 완화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연구 과제를
거의 끝마쳤다. 통증 완화에 대하여 내가 알고 가르치는 것 대부분이
에카르트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정신과 육신은 하나다.
"영혼은 몸 전체 안에 있듯이 가장 작은 지체 안에도 있다."
육신이 고통받을 때에는 정신도 고통받는다.
또한 정신이 고통받을 때에는 육신도 고통받는다.
둘째, 아픔과 고통은 삶에서 필수 부분이다.
아픔을 느낄 수 없도록 태어난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살아 남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아픔은 위험을 예고해 준다.
셋째, 고통을 이겨내려면 참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내와 수용은 둘 다 신체적 상태이며 동시에 정신적 상태이다.
인내는 무언가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결국 사라져야
할 잘못된 것으로 보며,
하느님께서 실수를 하셨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을 수 있는 힘은 그 고통이 끝날 때를 바라보는 데서 온다.
참을 때는('참다',곧 영어의 endure라는 단어 자체가 '단단한, 힘든'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신체가 긴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몸에서 분비되는 일종의 마취 성분인 엔돌핀이 잘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고통 - 참음 - 긴장, 다시 고통 - 참음 - 긴장이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뿐이다. 에카르트가 "모든 고통은 사랑하는 데서, 그리고 애착하는 데서 온다"고 한 말은 스토아 학파의 '참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대안으로 '사랑하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음'을 제시할 때 그는 초탈(超脫,마음을 비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모님께서 초탈하여 당신 아드님의 고통에 대해 "애정을 품고 걱정하는 것"에 빠져들지 않으셨던 것은 아드님에 대해 가지셨던 진정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가? 그분이 아드님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분명 성모님이 그 아드님께 드릴 수 있었던 가장 큰 도움은 자신에게 살아
남을 힘을 주신 하느님의 뜻에 신뢰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성모님은 아드님께 힘을 드릴 수 있었다.
수용은 평온한 상태다. 평온한 사람은 지금 이순간을 산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과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카르트는 "모든 고통은 사랑하는 데서, 애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사실 그렇다. 만일 "내가 아직도 시간의 사물들을 움켜쥐려고 한다면",
내가 하느님의 의지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때 나는 하느님과 맞서서 겨루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에카르트는 계속해서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법, 긴장을 푸는 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것을 계속 배워왔다.) 우리 본성 안에는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여 '고통스런 삶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환자들이 청하지 않으면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통에 맞서 의지와 노력으로 싸우기보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긴장을 풀고 고통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가르친다.
이렇게 하는 동안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이 가벼워진다.
자기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되면 고통과 아픔을
다스리는 방법은 그의 삶 전체를 위한 계시가 된다.
~ ~ ~ ~ ~
하느님 안에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삶은 좋은 삶이다. 인내하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더 좋은 삶이다. 그러나 고통스런 삶 중에서도 평화를 누리면
가장 좋은 삶이다.
의로운 사람에게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은 정의에 어긋나는 일,
공평하지 못한 일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어떤 것은 그대를 즐겁게 하지만
또 어떤 것은 우울하게 한다면 그대는 한결같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안정되어 있어서 그의 삶 자체를 사랑하고 아무것도 그를 당황하게 하지 못하며 그는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대를 목적지에 가장 빨리 데려다 줄 말은 고통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깊은 고통을 견디는 사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고통은 담즙처럼 쓰지만 견디어 내면 꿀처럼 감미롭다.
2. 고통의 원인
모든 고통은 사랑하는 데서, 애착하는 데서 온다. 좋아하거나 마음을 쓰는 것이 고통의 시작이요 마침이다. 내가 일시적인 것들(덧없는 것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거기에 마음을 쓰기 때문이고, 아직도 그것들을 대단하게 여기며 하느님이 바라는 대로 온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고통과 아픔을 허락하신다고 해서
그것이 이상한 일인가?
내 고통은 내 선택일 수 있다. 모든 슬픔은 무엇을 잃은 데서 온다.
내가 잃어버린 사물에 마음을 쓴다면 그것은 내가 외적인 사물들을 좋아하고 슬픔과 불안을 사랑한다는 확실한 표지다. 내가 불행과 불안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이 소유한 선을 피조물에게서 찾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피조물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은
행복과 위로의 원천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고, 이로 인해 자연히 온갖
불행이 온다. 그러니 슬픔이 가득하고 비참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느님이든 누구든 피조물에게서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 안에서만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어디에서나 참되고 한결같은 위로를 발견한다.
3. 고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외부로부터 악을 당하게 될 때 그가 평온하게 평화를 간직한다면 그는 외적인 일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일들에 동요한다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의로운 척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만
작은 것에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깨끗한 대야에 맑은 물을 담고 흔들리지 않게 하면 그 물에 그대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다. 그 물에는 불순물이 없고 잔잔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평화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뵙고 또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자유롭고 내적 평온을 지닌 사람에게는
완전한 마음의 평정이 있다. 그러나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 즐겁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열심히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보내시든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최선의 것이며,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다른 것들이 더 좋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대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다른 길이 아니라 이 길을 원하시기 때문에 이 길이 가장 좋은 길일 수 밖에 없다. 병이나 가난, 배고픔이나 목마름 등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것이나 주시지 않는 것은, 비록 그대가 그것에 대해 열성이나 내적 활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대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그대가 가졌거나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보내시는 것은 최선의 것이 된다.
아마 그대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병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일이 하느님의 뜻임을 안다면 그대는 기뻐하고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찌르는 뜻한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번민이나 고뇌를 느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장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라.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것을 잘 이용하는 것은 하느님을 곤궁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한결같이 사랑하고,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그분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물동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가볍다.
이때 한쪽이 무거울수록 다른 하나는 가벼워진다. 제거하면 할수록 제거하기가 더 쉬워진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마치 달걀 하나 내놓듯이 쉽게 끊어버린다. 포기하면 할수록 포기하기가 쉬워진다.
이교 철학자 세네카는 고통과 불안 중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그 고통을 마치 원하고 청했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했다면 그대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한 이교 스승은 "주님,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 최고 하늘의 유일한 통치자시여, 당신께서 무엇을 뜻하시든지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친절하게도 당신은 저에게 의지를 주시고 그 의지를 당신 의지에 일치시켜 주셨습니다."라고
외쳤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것은 걱정을 버리고 영원한 기쁨이 그대의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아기가 태어난다. 그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날 때에 친구들과 아버지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지금 겪는 고통이 그대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분명히 알기를 원하는가? 다음과 같이 말해 보겠다. 어떤 식으로든 그대 자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그대에게 상처를 주며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당하는 고통은 상처를 주지도 않고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 짐을 지시기 때문이다.
내 말을 믿으라.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고통을
받고자 한다면 갑자기 온 세상의 고통을 모두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를
괴롭히거나 꺾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 짐을 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어깨에 지우는 짐이 수십 킬로그램이 넘는다 하더라도 마치 몇 그램밖에 안 되는 것처럼 기꺼이 질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겁거나 괴롭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지는 고통은
가볍고 즐겁다.
사람들은 거룩한 삶에 대하여, 거룩한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 주님의 친구들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너무나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느님 의식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나 고통은 모두 잊혀질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육신 안에 있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영혼은 아직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고통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 고통이 힘들고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고통스럽지 않고,
하느님 보시기에 그 고통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친구들이여, 하느님 안에서 죽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고통은 육신과 그 하위 능력과 감각들에게 맡겨두고, 영혼은 그 모든
능력들과 함께 자유롭게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한다. 감각과 하위능력들의
고통과 투쟁은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다. 싸움이 길고 힘들수록 승리와
승리의 열매는 더욱 훌륭하고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는 슬픔도 고통도 번민도 없다. 그대가 모든 역경과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대의 모든 고통은 그대가 하느님을, 하느님만을 향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
4. 고통 앞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거나 고통을 당할 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기꺼이 고통을 받고 견디겠다"고 말한다.
아픈 사람은 하느님께서 내가 아프기를 바라셨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아프다는 사실 자체에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위로를 밖에서 찾는다면 이는 그의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며 사멸할 일시적 피조물만이 있다는 분명한 표지다.
당신의 사랑에 대하여 판단해 보라! 당신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무엇보다 당신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가장 잘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고통이나 궁핍이 아무리 크게 보인다 하더라도 편안하고 풍요로울 때와 마찬가지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탄생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고,
하나는 세상 밖에 영적으로 하느님 안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대의 아이가 태어났는지 알고 싶은가?
... 그대의 마음이 죄 아닌 다른 것 때문에 무겁다면 그대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고통 중에 있다면 그대는 아직 어머니가 아니다.
그대는 진통을 하고 있으며 그대의 때가 다가왔다.
...그대의 마음에 걱정이 사라지기 전에는 탄생이 끝나지 않는다.
그때에는 본질과 본성, 실체와 지혜와 기쁨, 하느님이 소유하신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5. 하느님의 위로
위로가 없는 역경이나 어려움은 없고, 얻는 것이 없는 손실은 없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하느님의 선한 신뢰와 그분의 타고난 자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그분은 언제나 인간을 돕기 위하여 위로를 마련해 주신다. 또한 성인들과 학자들은 하느님과 자연이 악의 존재를 허용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선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계셔서, 피조물은 먼저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그에게 갈 수 없고 먼저 하느님을 통과하여 하느님의 향기를 지니고 거룩하게 되지 않고서는
그에게 이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느님을 거쳐서 온다면 하느님께서 그 고통을 막아주신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아주 작은
고통이라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면, 그가 고통을 하느님께 맡긴다면 (그것이 어떤 불행이거나 불쾌한 일이라도) 그 고통은 인간보다는 하느님께 더 크게 주어질 것이고 다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더 거슬릴 것이므로 하느님이
잘 막아주실 것이다.
하느님이, 오직 하느님만이 보편적 선, 본질적 진리, 완전한 위로의 원천이며 동맥이시다.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들은 본래부터 그 자체 안에 고통과 불행을 지니고 있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하느님과 같은 선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감미로움. 기쁨. 위로를 줄이고 덮어버릴 뿐이다.
우리 주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가면 그들이 슬퍼할 것을 알고 떠나기 전날 밤 만찬 후에 이 말씀으로 당신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6. 하느님은 표상에 매이는 것을 거부하신다
하느님은 도구 없이, 표상 없이 일하신다. 표상들에게서 자유롭게 될수록
그대는 그분의 내적 작용을 잘 받아들이게 될것이다.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선이고 진리이고 존재이므로 표상이나
모상을 갖지 않으신다."
그대 안에서 형태를 취하는 피조물의 가장 작은 표상이라도 그것은
하느님만큼 크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하느님을 완전히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 표상이 나타나면 하느님과 모든 신성은 사라진다. 이 표상이 사라질 때 하느님께서 들어오신다.
세상의 표상은 거룩하지 않으며, 영혼에게 세 가지로 해를 끼친다.
첫째, 영성을 혼란시키고 둘째, 순수성을 흐리게 하며 셋째, 초탈을 방해한다. ...하느님은 내 정신에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분은 그대 자신을 초월하고 피조물들을 사라지게 하신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그대의 정신에개 하시는 일이다.
이제 그대는 영혼이 내적으로나 수단과 표상에서 자유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형상이나 이미지 없이 자유롭게 영혼과 결합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혼이 영원한 말씀을 낳을 때 표상으로 하는가, 표상 없이 하는가?
이것을 기억하라. 영혼이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과 일치되어 하느님이 영혼의 일을 떠맡게 될 때 영혼은 단지 받아들일 뿐이며 활동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때 영혼에는 형상이나 표상이 없다. 형상이나 표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그리고 피조물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많이 활동하면 할수록 하느님은 적게 활동하게 된다.
영혼은 표상으로써가 아니라 표상 없이 말씀을 낳는다.
이 탄생은 자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영혼이 영원한 말씀을 가장 잘 낳으려면 어떤 표상을 통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다. 표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영혼이 감각을 통하여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표상이다.
둘째는 영혼이 우리 주님의 어린 시절 또는 그분의 죽으심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내부에서 떠올리는 표상이다.
이렇게 얻어진 표상들도 모두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세번째 표상은 하느님께서 직접 영혼에게 주는 표상이다.
이 마지막 표상을 통해서 영혼은 하느님의 탄생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다.
한 스승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이해, 즉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학문과 이론을 넘어 더 나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정신이 개념과 형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사람보다
하느님께 수만 배 더 가치가 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상을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들 안에 들어가 당신의 일을 하실 수가 없다.
성 디오니시오가 말하듯이 표상에서 해방된다면 그들은 온갖 합리적 개념들을 넘어설 수 있으며 신앙의 초이성적 빛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그곳에 머무시며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당신이 뜻하시는 때에 당신이 뜻하시는 것을 평화로이 행하신다.
표상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그것은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이 표상하는 것에게서 직접 존재를 부여 받는다. 나무에서 줄기가 나오듯이 표상은 표상하는 것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 어쩔 수 없이 거울 위에 어떤 상(모양)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거울의 상에는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눈.코.입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상 안에 당신의 본성, 당신의 온 존재, 당신의 모든 능력,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다. 그분의 표상은 의지를 앞서고 의지는 표상을 뒤따른다. 하느님의 본성에서 먼저 표상이 나오고, 그안에 당신의 본성과 존재를 집약시킨다.
하느님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체에 머물면서,
동시에 그분의 표상에 본성 자체를 쏟아붓는다.
스승들은 그 표상을 성령이 아니라 둘째 위격, 곧 성자 안에 둔다.
왜냐하면 성자는 아버지의 본성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분이므로
성부의 드러난 표상을 성자라고 부르지, 성령이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7. 실재는 표상이 아니다
하느님은 표상이 필요 없으며 표상을 갖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표상이나 모상이나 수단 없이 영혼 안에서 일하신다.
표상이 영혼의 근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본질을 지니고 들어가시는 것이다. 어떤 피조물도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표상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합일이 없으며,
그대의 지복은 모두 이 진정한 합일에 있다.
표상은 어떤 것 자체도 아니며, 그것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눈안에 들어온 표상은 눈 자체도 아니고 눈안에 실존해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어떤 것에서 나와서 거기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어떤 것에 속하면서 존재하는, 그것과 같은 존재다. 표상에 대한 나의 정의에 주목하라. 염두에 둘 점이 네 가지 있는데, 그대에게는 다른 것들이 더 생각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의 표상은 그 자체도 아니며, 그것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것의 반영일 뿐이며, 표상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 어떤 것 덕분이다. 표상은 그 사물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다른 것에 속하지도 않는다. 표상은 직접 그 사물에게서 존재를 받으며, 그 사물과 본성이 동일하고
존재도 같다. 이것은 학교에서 논의할 주제는 아니지만 교수가 탐구해 볼 만한 주제다.
그대는 언제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러니 이 대답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여기서 표상에 대해 말한 것처럼 바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에게 속하는 것이 되라. 당신만의 것이 되거나
당신 자신에게 속하지 말고 또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아야 한다.
영혼의 능력들이 피조물에 접하게 되면 그 능력들은 피조물의 표상을 만들기 시작하여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으로 영혼은 피조물을 안다. 피조물들은 영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영혼 역시 그 피조물의 표상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피조물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현존하는 그들의 표상을 통해 피조물에 접근한다.
그 표상은 영혼이 자신의 능력들로 만든 것이다.
돌이든 장미꽃이든 인간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영혼은 자신이
알기를 원하는 것에서 표상을 취하고 받아들여 자신을 그것과 결합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인 표상은 반드시 외부로부터 감각을 통해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가장 알지 못하는 것은 영혼 자신이다.
8. 시간
시간을 넘어선다는 것은 그렇게 기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정도의 문제, 다시 말해 의식의 강물이 넓고 얕게 퍼져 흐르지
않고 깊게 흐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멈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늘 어떤 강렬한 체험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가 기쁨을 잃고 산산이 흩어져 분산되는 이유는
미래의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분할이다. 우리가 시간 안에 분할되어 있을 때는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다. 시간을 벗어난 곳에서는 지루함도 근심도 우울함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시간을 반복으로 보고 있지만 반복된 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주님의 기도를 백만 번째 기도할 때,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아픔이나 고통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매일 매순간은 유일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시간에 얽매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9. 시간의 충만
시간과 무상함을 넘어서면 언제나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시간의 충만이고, 그때 하느님의 성자가 그대 안에 탄생하신다.
시간의 충만은 시간이 끝날 때 이루어진다. 시간 안에서 마음을 영원에 두고 있는 사람, 자신 안에서 모든 현세 사물들이 죽어있는 사람, 그런 사람 안에는 시간의 충만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 6천 년 동안의 시간과 그동안의 모든 시간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을 모든 것을 현재 한순간에 모을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시간의 충만이 될 것이다.
시간이 그대에게서 끝날 때 그대의 시간은 충만하게 된다.
시간의 충만은 시간이 끝날 때, 곧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이 끝나는 것은 선후가 없을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을 때, 그대가 한순간에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과 장차 일어날 모든 것을 보게 될 때다. 여기에는 선후도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이며, 그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성 바오로는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에서 때가 찼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하루가 차는 것(하루의 끝)은 하루가 지나갔을 때다.
분명히 탄생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나 피조물만큼 이 탄생을 가로막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하느님이나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간이 영혼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 영혼은 영혼이 아니다.
하느님이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시간이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느님은 그 영혼 안에서 태어나실 수 없다. 하느님께서 태어나시는 영혼은 시간을 벗어나 있어야 하고,
시간은 그 영혼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 영혼은 의지와 갈망에 있어 완전히 하나여야 한다.
10. 시간이 갖는 문제점, 그리고 수
빛깔들을 보듯이 내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현세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현세의 것들은 시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최하의 가치를 갖는다.
현재는 본래 시간이며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 수와 양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인간은 마땅히 되어야 할 바대로 되어 있지 못하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하느님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의 것이 되지 않으신다.
고대 철학자는 영혼이 하나와 둘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하나는 영원성으로 언제나 홀로 있고 변화가 없는 것이다.
반면 둘은 시간이며 변화하고 여럿이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혼은 그 상위 능력에서는 영원성,
곧 하느님께 접하고 하위 능력에서는 시간에 접하고 있어서 변화에 종속되고 영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향한다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만큼 영혼이 하느님을 아는데 방해되는 것은 없다.
시간과 공간은 분열된 것이지만 하느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영혼이 하느님을 알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그분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수도 없이 다양한 사물들처럼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 영(spirit)은 시간도 수도 알지 못한다.
수는 시간이라는 문제점만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뿌리는 영원 안에 있을 뿐인데, 거기에는 하나라는 숫자 밖에 없다.
이 영은 수를 초월하여 다수성 안으로 뚫고 들어가고 하느님께서 이 영을
꿰뚫으신다. 하느님께서 나를 꿰뚫으신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도 또한 그분을 꿰뚫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영을 사막으로, 당신 자신의 고독으로 이끄시고 거기에서 영은 단순히 하나로서 그 자체 안에서 솟아나온다.
이 영은 원인이 없다. 영에게서 원인이 있다면 일치(하나 됨)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은 일치와 자유 안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 함은 그 원인을 안다는 뜻이다.
어떤 것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참으로 아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의 기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참 존재가 되게 하는 그 원천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 원천에 머물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자가 말하듯이 시간과 접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적이고 사멸할 것에만 영향을 미친다. 철학자는 천상의 과정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영원의 행로는 영원하고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혼은 추상적 존재들의 법칙을 따른다.
'언제'라는 말은 시간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빛이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하느님께는 시간보다 더 큰 장애물이 없다.
여기서 시간의 의미는 단순히 시간뿐만 아니라 현세의 덧없는 것도,
사물 뿐만이 아니라 애착도, 애착뿐만 아니라 시간의 흔적과 향기까지도 뜻한다. 사과가 있던 곳에 사과 냄새가 남아 있듯이 시간과 접한 것도 시간의
흔적과 냄새가 남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고 권위자들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 해와 별들은 시간과 약간 접하고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시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하늘보다 높이 솟아 있는영혼의 정점은 시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 시간 안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다면 그 영혼은 난처하게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영원 안에서, 영원한 현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오며 당신을 영혼에게 주신다.
11. 현재와 새로운 시간
스승들은 "아들은 이미 탄생했는가?"하고 묻는다. 우리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스승들은 "아들은 이제 탄생할 것인가?"하고 묻는다.
우리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아들은 태어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분은 끊임없이 새로이 태어나고 계시다.
실제로 영혼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새로이 만들고 있다.
우리는 천사들과 같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인식이란 시간 속의 빛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내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시간과 현세의 빛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시간을 초월하며 영원한 빛 안에서 지각한다.
그들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인식한다.
반면 인간은 시간의 현재 안에서 인식한다.
시간의 현재는 무한히 짧지만 이 시간의 현재를 벗어나면
그대는 어디에나 있게 되고 시간 전체를 소유하게 된다.
다시 그분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얼마 안되는 시간과 세상이 너희 안에 있을 때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천사는 이 삶이 끝나면 그때는 더이상 시간이란 없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한다.
요한복음에는 분명하게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교 학자의 말대로 세상과 시간은 작은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는 것은 세상과 시간 밖에서다.
우선 그것(영혼의 지성)은 지금 여기와는 분리되어 있다.
여기와 지금이란 다른 말로 하면 공간과 시간이다.
지금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시간이다.
그것은 시간의 파편도 아니고 시간의 일부도 아니다.
시간의 향기, 시간의 연속, 시간의 마지막이다.
그것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에서 떠나야 한다.
시간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우리는 떠나야 한다.
성부를 흠숭하고자 하는 사람은 영원 안에서 갈망하고 희망해야 한다.
거기에서 영혼의 가장 높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보다 높이 있으며
시간이나 육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천년 전에 일어난 일들이나
수 천 년 동안 흘러간 날들은 영원 안에서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만큼 가깝다. 천년 후에 올 날이나 앞으로 천년 동안 있을 날들이 영원 안에서는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이 순간만큼 가깝다.
우리 학자들은 하느님 안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으며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시간은 오늘이고 지금이라고 가르친다.
영원 안에서 시간을 넘어 그 위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과 같은 일을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천년 전에 했고 앞으로 천년 동안 계속 하실
일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원 안에는 선후가 없다. 과거 천년 동안의 일과 앞으로 천년 동안의 사건들과 현재는 영원 안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천년 전이든 지금이든,
아니면 앞으로 천년 동안이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오직 단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넘어서 영원으로 올라간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그분이
과거에 한 일들과 그분이 앞으로 천년 동안 할 일들을 하게 된다.
이것은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지식의 문제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문제이다.
다시 한순간을 생각해 보자. 그것이 오늘이거나 어제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현재라면 그것은 모든 시간을 포함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현재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현재만큼
이 순간에 가까우며, 마지막 날은 어제만큼 지금에 가깝다.
영혼의 날과 하느님의 날은 다르다. 영혼은 하루 동안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것을 안다. 멀거나 가까운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날 모든
사물들이 동일한 지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내일 또는 어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느님은 세상과 모든 것을 현재 이 순간에 만드신다.
천년 전에 흘러간 시간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이며
하느님께는 천년 전도 지금 이 순간과 똑같이 가까운 것이다.
(영혼의) 이 능력은 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것은 어제도 그제도
내일도 모레도 알지 못한다.(영원 안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기 때문이다.)
어제나 내일은 지금 현재다. 천년 전에 있었던 사건들과 앞으로 천년 동안
있을 사건들은 현재에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와는 정반대다.
시간과 공간, 형상과 질료를 초월하고 행복과 불행, 부유함과 가난에
흔들리지 않으며 영원한 현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되다.
사물은 움직임이 없을수록 영원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늘은 천사들이 있는 영원한 현재에 가까우며 움직임이 없고 정지해 있다. 그러나 천사들이 있고 영원한 현재에 닿아있는 하늘과 태양이 있는 하늘
사이의 공간은 천사의 힘으로 움직이며 백년마다 한 번씩 회전을 한다.
태양이 있는 하늘은 천사의 힘으로 움직이며 매 년 한 번씩 회전을 한다.
달이 있는 하늘도 천사의 힘으로 움직이며 매달 한 번씩 회전한다.
영원한 현재에 가까울수록 움직임이 더 없으며, 영원한 현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유사하지 않을 수록 쉽게 움직인다. 태양과 달과 별이 있는 하늘은
천사의 자극으로 움직이며, 세상의 현재 안에서 회전한다.
영원한 현재는 그들의 움직임을 더해 주는데, 이것은 모든 사물이 영원한
현재가 주는 이 움직임에서 그들의 생명과 존재를 얻어낼 만큼 강력하다.
이제 영혼의 가장 낮은 능력이라도 천사들과 영원한 현재가 있는 하늘의
가장 높은 부분보다 더 고귀하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영원한 현재가
주는 움직임에서 그 생명과 존재를 얻는다.
영혼의 하위 능력들도 그렇게 고귀하다면 영혼이 그 상위 능력들로
하느님의 근저와 만나는 곳에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높을지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현재를 추구하며 현재에
이르러 영원한 현재를 소유하도록 하라.
우리가 영원한 현재에 다가가서 그것을 소유할 수 있길 빈다.
이 (은총의) 빛은 매우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그 빛을 받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 유형의 모습과 외부에서 비롯된 모두를 잃게 된다. 전에 여러 번 말했듯이 시간도 공간도
그 밖의 어떤 것 도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가 되고 자신을 겸손의 밑바닥까지 낮추는 사람은
은총에 젖게 된다.
영원 안에서 대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제 충분히 말했고,
시간 안에서 대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한 가지 더 말해 두어야겠다.
대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타자(내가 아닌 것)이고, 하나는 자신이다.
첫번째 타자는 생성된 것, 즉 존재하게 된 것 모두이다.
이런 사물들은 타자를 만들어내고 사라진다. 이것은 시간의 경과를 따른다.
모든 사물 안에 있는 한 가지 질료를 아는 존재는 움직임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질료는 형상에 종속되며, 형상이 없이는 질료가 없고 질료가 없이는
형상도 있을 수 없기 떄문이다. 질료가 없는 형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질료는 형상과 결합하며 그 전체가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다.
형상은 본래 무이므로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다.
질료는 분할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형상이나 질료로 움직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간 안에서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첫 인간을 만드셨던 현재,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현재,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현재에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하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동일하다.
12. 하느님과의 합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현존하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준비하고
이 지향을 고정시켜 그 합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불꽃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보는데,
그 고귀한 불꽃은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이 없으며,
하느님과 그 불꽃 사이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성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들 안에 계시되어 있는 빛과 은총이 무엇인지를 본다.
"나는 시작이요 마침이다"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본성 안에, 그리고 그 위격들 안에는 차이가 없다.
그 본성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은 하나이며,
각각의 위격 역시 그 본성이 그렇듯이 하나다.
하느님 안에서 존재와 실존은 아무런 구별 없이 동일하며 하나다.
하느님 안에 있지 않을 때 차이를 가지게 되고 그 차이를 나타내 보인다.
하느님은 하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한 사람이 나갔다"(루가 19, 12 참조)고
말씀하신다. 차이(분별)가 있는 곳에는 실재도 없고 '하나'도 없으며 하느님도 휴식도 만족도 없다. 하나가 되라. 그러면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진정 하나라면 그대는 분별 속에서도 하나로 남을 것이며,
분별이 그대에게는 하나가 될 것이고, 그리하여 아무것도 그대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수십만 개의 돌들 속에서나 4개의 돌들 속에서나 하나는 똑같은 하나이고, 백만은 4처럼 단지 하나의 숫자일 뿐이다.
그대 안에 더함이나 덜함이 있다면 하느님은 그대 안에 머무시거나
활동하실 수 없다. 하느님이 들어오시려면 더함이나 덜함이 사라져야 한다.
그대가 그것들을 더 높고 좋은 방식으로, 다수의 것들을 그대 안에서 하나로 종합하여 지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다수성이 많을수록 하나됨도 더 많아지게 된다. 하나는 다른 하나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분은 유일한 능력이시다.
그러므로 그 능력과 일치되어 우리 안에서 힘을 발하시게 함으로써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면서 때때로 마음의 초탈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초탈은 숙련되고 일상적이어야 하며 계속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훌륭한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긴밀한 결합은 다시 없다. 인간이 만들어질 때 육신과 영혼의
결합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영혼은 하느님께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은 물 한 방울이 포도주 통 속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긴밀하다.
물이 포도주와 같게 되어 아무도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영혼을 되돌리기 위하여
천사가 파견되었다. 지식은 유사성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영혼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영혼이 본래 형상을 되찾기 전까지는 결코 쉬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천사들이 무수히 많으며 그 숫자를 상상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다수성과 수에서 벗어나 차이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백은 하나와 같다. 신성 안에 위격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들을 한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하느님으로서의 정의를 사랑한다면 정의 그 자체만으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대는 정의 그 자체를 부분적으로 사랑할지는 몰라도 그대는 그 전체를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13. 차별을 초월함
어떤 사물이 공통 본성에 참여하게 될수록 그것은 그 공통 본성이 지닌
불가분리성과 하나되어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온전한 진리로 향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탄생은 생성과 같다. 영원한 탄생 안에는 영혼의 생성이 있고, 거기에서 영혼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자신과 동일한 존재외에 다른 존재를 갖지 않게 된다. 이 존재는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서 하시는 모든 활동의 원천이며 근저이고 기원이다.
자기 본성과 존재와 생명에 대해 죽음으로써 영혼은 자신의 신성 안에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그 영혼의 생성이다. 영혼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영혼은 영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구별이 없게 된다.
왜 그분(하느님)은 한 말씀만 하시는가? 모든 사물이 그분의 정신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한 관념 안에서 내가 과거로부터 해왔고 앞으로 할 모든 생각들을 파악할 수 있다면 나는 한 마디 말만 할 것이다. 입은 마음에 있는 것을 발설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단순하게 되고자 한다면 다수성을 떠나 하느님의 한 가지 개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이것은 드물게 이루어진다. 성 디오니시오에 따르면 하느님 안에 묻히는 것은 창조되지 않은 삶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지식이 가진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영혼의 창조된 본성을 초월하는, 피조물이 접근할 수 없고 피조물처럼 실존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천사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천사의 본성은 (지성적으로) 명확한데, 분명하고 명백한 것들은 이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에 가깝고,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무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많은 사제들은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것은 하나다. 그것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없으며,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풀잎이 왜 서로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왜 서로 다른가 하는 것보다 그 풀잎들이 서로 유사한 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 철학자는 풀잎이 모두 서로 다른 이유는 하느님의 넘치는 선하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당신의 선하심을 풍부히 부어주어 당신 엄위를 드러내게 하셨다는 뜻이다. 나는 풀잎이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며, 천사들이 그들 본래의 순수한 본성에서 모두 서로 동일하듯이 풀잎도 모두 동일하고 모든 사물도 서로 같다고 말한다.
하느님과 영혼은 완전히 하나여서 영혼은 하느님께 말씀 드릴 것도 없으며 하느님은 영혼과 다른 것도 없다. 하느님은 사물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사물에게 있어서 사물 자신보다 하느님이 더 본유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물들에서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자아를 온전히 버리고
떠남으로써 모든 사물에서 분리되지 않고 모든 사물 안에 있게 된다.
학자들은 본래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합일을 이룬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영혼에게 내어주시는데, 그것은 영혼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 야고보가 말하듯이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모든 사물이 성부께서 발하는 (같은) 한 빛으로서 그분의 감추어진 빛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사물이 한 빛이므로 사물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떠나가지 않는다면 모두 그 한 빛으로 다시 흘러들어가게 된다.
14. 합일을 가로막는 것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데 세가지 걸림돌이 있다.
첫째는 영혼이 너무 분열되어 합일에 적합하도록 단순하지(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영혼이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단순하지 않을 때 그러하다.
둘째는 현세 사물에 대한 집착이다.
셋째는 육신을 좋아하여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다.
또한 영혼 안에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도와주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영혼이 하나되어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같이 순수해져야 한다.
둘째는 영혼이 자신과 모든 현세 사물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모든 덧없는 사물을 버리고 떠나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시간이고, 둘째는 육신이며, 셋째는 다수성 또는 수이다.
[출처]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4장|작성자 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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