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우리가 가진 자질
1. 우리는 모두 지혜로울 수 있으며 지혜를 가르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그물과 생명을 모든 피조물 위에
펼쳐놓으셨으므로 보려고만 한다면 그 어떤 것에서라도 그분을 발견하고
알 수 있다.
자유로워지고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랑과 갈망을 통하여 지혜를 받고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영혼 안에서 무한한 지혜를 계시하신다.
그 지혜는 바로 그분 자신이며, 성부께서는 그 지혜 안에서 아버지의 능력으로 당신 자신을 아신다. 이 지혜 자체인 말씀과 그안에 있는 모든 것은 동시에 오직 하나다. 이 지혜가 영혼과 일치하여 있을 때는 의심과 오류가 완전히
사라지며, 그러한 영혼은 하느님의 밝고 빛나는 순수한 빛 안에 있게 된다.
예언자가 말한 대로 주님의 빛 안에서 빛을 보게 된다.
그때에 영혼은 하느님에 의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고 또한 그분의 지혜로써 영혼 자신과 모든 사물을 식별한다. 영혼은 영혼 자신과 동일한 지혜를 알게 될 뿐 아니라 이 지혜로써 성부를 알고 나뉨 없이 온전히 하나인 그분의
참 존재를 알게 된다. 이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겸손과 부지런함과 통찰력 있는 수동성이 필요하다.
학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는 지혜가 저 세상에서도 우리와 함께
남아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성 바오로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참된 지식은 심지어 이 육신 안에서도 본성적으로 너무나 즐거운 것이어서 피조물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순수한 인식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참된 지식이 비록 고귀하다 하더라도 우연적인 것일 뿐이다. 완전한 진리 전체에 비하면 세상에서 우리가 배우는 지혜를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세상 전체에 있는 작은 말 한마디만큼이나 사소하다.
2. 지혜와 선함
하느님 안에서는 지혜와 선이 동일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것은 선이나 그 밖의 것들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하느님 안에서 지혜와 선이 별개의 문제라면 그분 안에 있는 영혼에게는
만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본래부터 하느님을 향하고,
피조물은 모두 지혜에 대한 천부적 갈망을 지니고 있다.
선으로 흘러넘치는 영혼을 지녀라. 선과 지혜가 별개라면 선으로 가득한
영혼은 고통스럽지만 지혜로 가득차기 위해서는 선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3. 선함
진리.정의.선을 알게 된 사람은 그로 인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결코 거기에서 돌아설 수 없다. 한순간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본질은 흡수된 자아다. 이것은 유출이 아니라 내적 융합이다.
그리고 일치는 하나가 되어 모든 것에서 떨어져 외부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은 하느님이 흘러 나오는 것이며,
그분이 모든 피조물로 확산되는 것이다.
본질은 성부이고, 일치는 성자이며, 선은 성령이시다.
선은 그 아래에 하느님이 감추어져 있는 옷이며,
하느님은 선이라는 옷을 입으신다.
하느님이 선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내 의지는 하느님을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대관식 날 왕에게 칙칙한 옷을 입히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다.
내가 행복한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분의 선하심으로 나를 복되게 해주시기를 청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선함은 그분의 옷이다.
4. 지각
여기에서 지각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 있는 빛 속에서 보는 것을 뜻한다.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할 때에는 시간 안에 있는 현세의 빛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시간을 넘어 있으며 영원한 빛 안에서 지각한다. 지각은 길을 인도한다. 그것은 산꼭대기의 처녀지에서 왕자를 찾는 공주다. 이 공주는 왕자를 영혼에게, 영혼을 본성에게, 본성을 육신의 열정에게 드러내 보인다.
5. 진리
철학자는 "진리.정의.선을 알게 된 사람은 그로 인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거기에서 돌아설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자만이 진리이며 성부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본질 안에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 진리는, 내 마음 안에 모상 없이 유일한 형태로 지니고 있는 것을 계시해준다. 이 계시가 진리다. 성자만이 진리다.
성부의 사랑 전체를 그분은 성자 안에서 한번에 모두 말씀하신다.
이 말씀, 이 행위가 진리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
진리를 생각하는 가운데 그대의 습관은 모두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진리 안에 현양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결코 떨어질 수 없다. 그들은 하느님이 영원히 그분 자신임을 아는 복된 사람들이다.
이 담화를 따를 수 없다면 신경 쓰지 말라. 이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에서 직접 나온,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그것을 체험하며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6. 지식
가장 중요한 개념과 영원한 행복의 핵심은 지식이다.
'케파스'라는 말은 머리를 뜻한다. 이해는 영혼의 머리다.
겉보기에는 사랑이 첫번째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사랑보다 지식에 있다고 명백히 말하는 것이 가장 옳은 주장이다.
지식은 흐른다. 지식은 사랑보다 뜨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이 하나보다 낫다. 이 지식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어리석게 되거나 친절에 사로잡힌다. 사랑할 때 나는 눈이 멀어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문가에서 배회한다. 돌조차도 사랑을, 땅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내가 사랑이 선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선한 것을 붙잡으려 한다면 나는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을 향한 문을 붙잡는 셈이 된다.
지식이 사랑의 머리가 되고 사랑에 앞서는 것이 더 낫다.
사랑은 의지이고 지향이다. 이 지식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래서 완전히 이탈되고 홀로 떨어져 하느님의 품안으로 달려들어가
하느님 자신을 붙잡는다.
다른 모든 것을 알더라도 하느님을 알지는 못한다.
천사가 다른 천사를 보거나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본다면 그 천사는 어떤 매개, 곧 수단을 통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자신과 하느님은 직접 본다. 내 영혼이 천사를 안다면 그것은 어떤 수단과 표상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그 표상은 현세에 있는 표상들과는 달리 표상 없는 표상이다.
영혼과 천사는 하느님에 비하면 물질적이다. 천사의 지식은 창조된 것으로 한 가지 수단이다. 하느님께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그분은 수단 없이 인식된다. 내 영혼이 수단 없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한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시듯이 우리도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분이 모든 것을 당신 안에서 보시듯이 우리도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성 바오로는 말한다. 작은 존재는 환히 밝혀지고, 나는 그분이 나를 보시듯이, 그분이 당신 자신을 보시듯이 그분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고 그분 밖에서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도 아무런 수단 없이 보게 될 것이다.
7. 자기 인식
"너 자신을 알라. 그것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지식에 세 종류가 있다고 가르친다.
첫째는 물리적 지식이다. 예를 들어 눈은 표상을 지각할 수 있다.
둘째는 정신적이면서도 아직 물질적 사물의 표상을 인정하는 지식이다.
셋째는 정신의 내면에 있는 지식으로서, 표상이나 모상 없이 인식하여
천사들의 인식과 비슷하게 된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그들의 이해력은 정확하여 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든지 그들은 그 안에서 본성의 역할을 분명하고 상세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완전히 인식한다. 둘째,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그것이 원칙에 맞는 것인지를 본다.
셋째, 그들의 지성은 치밀하여 어떤 영감을 받거나 희미한 계시를 받을 때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그릇된 영에서 오는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것들에서 위로를 찾지 않으며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간다. 그들은 모욕과 역경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자기 인식을 위한 가장 좋은 학교가 된다. 그리고 자기 인식은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가져온다.
세 가지 사물이 세 가지 인식을 상징한다.
첫째는 감각적인 것이다. 눈은 멀리에서도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을 본다.
둘째는 이성적인 것으로서 첫째 것보다 훨씬 상위에 있다.
셋째는 영혼의 드높은 능력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능력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을 만큼 높고 고귀한 것이다.
이 능력은 무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것은 어제도 그제도 내일도 모레도 알지 못한다. (영원 안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 능력 안에서 어제나 내일은 지금 현재다.
8. 의지
의지가 도움을 줄 때는 언제인가? 의지가 선하고 도움을 주는 경우는
그것이 비인격적일 때, 자아에 대하여 죽어 있고 하느님의 뜻 안으로
변형되고 형성될 때다.
의지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가 우연적이고 본질적이지 않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의한, 창조적이며 상존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면서 때로 마음의 초탈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초탈은 숙련되고 일상적이어야 하며 계속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훌륭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선물을 잃게 되고 그 선물들 안에서 하느님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대로 항상
해주실 수 없으시다. 그분의 탓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천배 이상으로 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폭력을 가하고 부당한 일을 하며,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분 본래의 자연스러운 활동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모든 은총 안에서 자신을 그분께 희생으로 바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아무것도 자신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이익도 즐거움도
내적인 것도 감미로움도 보상도 천국도 자기 의지도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써가 아니라 오직 당신 자신의 의지로써만 자신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의지가 있는 곳에 당신 자신을 당신의 전존재를 내어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대해 죽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그분의 의지 안에서 살게 된다.
배와 그물만을 버리고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했던 성 베드로의 말을 주석하면서 거룩한 사람(예로니모)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조금 버리는 사람은 그것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인들이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과 그들이 바랄 만한 모든 것을 버린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리는 사람은 모든 것이
완전히 자기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완전하게 그것들을 포기한다.
9. 자유의지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하느님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무슨 해가 된단 말인가? 하느님을 위하여 그대 자신을 비우면,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위하여 자신을 비워주신다. 둘이 모두 비워지고 나면 남는 것은 단지 하나뿐이다.
한 분 성부께서 그분의 가장 내적 원천에서 당신 성자를 낳으신다.
거기에서 성령이 발출하고, 거기에서 영혼에게 속하는 의지가 하느님 안에서 생겨난다. 그동안에 이 의지는 피조물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며 자유롭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온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사물들은 무에서 만들어졌고, 그들의 참된 근원은 무다. 이 고귀한 의지가
피조물로 기울고 있을 때 그 의지는 피조물들과 함께 무가 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악을 행하면 죽음을, 선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께서 그의 앞에 마련해 두실 때 다른 사람의 피리소리에 춤추는 꼭두각시가 되지 말고 자유로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학자들은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이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의지를 구속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의지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주며, 자유로이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신다. 이것이 참된 자유다.
영혼이 하느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원할 수 없다면 이는 예속이 아니라
참된 해방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자유로이 나 자신의 의지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대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법을 거슬러
다른 어떤 것을 원할 수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세상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기꺼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은 채로 둘 수도 없고 하느님께서 싫어하는 일을 할 수도 없다. 다리를 함께 묶은 사람처럼 그는 길을 벗어날 수도 없고 누가 하느님 안에
있는지 잘못 알 수도 없다.
10. 의지의 힘
내가 하느님을 지배하고 내 뜻에 그분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 의지나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라도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자기 의지로 철벽이라도 뚫을 수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으로 물 위를 걸어갔다.
의지 그 자체는 잘 받아들이는 편이 아니다. 의지는 열망에 있기 때문이다.
11. 지성
영혼 안에는 한 가지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지성이다. 지성은 영혼이 하느님을 의식하고 발견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지성에는 다섯 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로 지성은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
둘째, 지성은 무와 유사하다.
셋째, 지성은 순수하고 섞임이 없다.
넷째, 지성은 그 자체 안에서 활동적이다.
다섯째, 지성은 표상이다.
영혼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갈 때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다.
추구하는 지성
지성은 하느님을 자세히 살피고 탐구하며 성부의 마음 안에서, 그분의 근저 안에서 성자를 발견하고는 그분을 자신 안에 모신다.
지성은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간다. 지성은 선.지혜.진리로 만족하지 않으며
하느님 자신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나무나 돌로는 만족하지 못하듯이
하느님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지성은 진리와 선이 솟아나오는 원천으로
들어가 그 진리와 선이 처음 나오는 기원에 이르기까지 결코 쉬지 않는다.
이곳은 진리와 선보다 훨씬 높은 곳이다. 지성의 자매(의지)는 하느님께서
선하신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지성은 이를 넘어서서 성자께서 나오고
성령께서 피어나는 그 원천으로 뚫고 돌파하여 들어간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를 향한다. 사랑은 거기에서 무엇이 선한지를 발견한다. 지성은 선의 원인을 파악한다.
꿀은 꿀로 만들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달다.
사랑은 하느님을 감미로운 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성은 더 깊이 들어가 그분을 존재로 파악한다
12. 쉬는 지성
추구하는 지성은 생각 위에 있다.
이 지성은 찾아 나서서 여기저기 그물을 던지며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나아간다. 추구하는 지성 위에는, 추구함 없이 빛의 영역 안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본질 안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다른 지성이 있다.
이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성은 하느님에게서 이 (선이라는) 베일을
벗겨 그분을 선이나 이름들 없이 적나라하게 만든다.
지성의 대상은 우유(偶有)가 아니라 본질이며,
변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 그 자체다.
실제하는 무엇을 인식하게 되면 지성은 곧 거기에 의지하고 머물며,
이 대상에 대하여 지적인 말을 발설한다. 지성이 사물들의 실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근본에 이르지 못하는 동안 탐색과 기대의 상태에 있게 되어 지성은 결코 멈추지 않고 사물들의 원인을 끊임없이 찾는다.
그 지성은 추구하고 기다린다. 지성은 어떤 자연적 사실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1년이나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그런 다음에는 또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를 밝히기 위해 그만큼의 기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 시간 내내 지성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으며, 진리의 근저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단언도 내리지 않는다.
현세 생활에서 지성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현세의 삶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무리 많이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그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는 근저에 있지만 지성에게는 가려져 있고 감추어진 채로 있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은 어떤 영원한 것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이 정신은 전혀 정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장차 오겠지만 아직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기대하고 준비한다. 하느님께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느님께서 무엇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분별이 있는 영혼은 이것을 거부한다.
한편 지성은 질료가 형상을 기다리듯이 덧없는 것들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질료가 형상에 대하여 만족할 줄 모르듯이 지성은 본질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진리로써가 아니면 충족되지 않는다. 그 진리만이 지성을 충족시키고, 하느님께서는 지성의 열정을 자극하여 원인이 없는 선을 추구하고 파악하며 덧없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최고의 선을 갈망하도록 하기 위하여 조금씩 지성에서 물러나신다.
13.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
우리는 지금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능동 지성은 외부 사물들의 표상을 추상하며 그 사물들에서 질료와
우유(偶有)를 제거하고 그 안에 있는 정신적 원형을 얻어낸다.
수동 지성은 위와 같이 능동 지성에 의하여 채워지고 능동 지성의 도움으로 이 사물들을 인식하고 간직한다. 수동 지성은 능동 지성이 비추어 주지 않으면 인식을 계속할 수 없다. 이제 잘 살펴보라. 능동 지성이 보통 인간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느님께서는 홀로 있는 영혼에게 해 주신다. 그분은 능동 지성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당신 자신이 능동 지성이 할 일들을 맡아 하신다.
영혼의 능력 가운데 최고는 지성의 능력이다. 지성은 결코 가만히 정지하지 않는다. 지성은 하느님을 성령이나 성자로서 원하지 않는다.
지성은 성자를 피해 달아난다.
지성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이름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수 천의 하느님이 있다 하더라도 지성은 그분이 이름을 가지지 않는 데까지 이르려는 갈망으로 그 모든 것을 뚫고 나갈 것이다.
지성은 이름을 가진 하느님보다 더 고귀하고 더 나은 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지성이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지성은 잘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하고 외친다. 그분을 친절 그 자체로, 넘쳐흐르는 풍요로움으로, 근본으로,
선의 원천으로 원한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아버지이시다.
14. 가능 지성
선생님, 지성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며 지성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 지성은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분명 아무것도 아닐 수 밖에 없는 미지의 지식을 향하여 정신을 들어높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것은 무지가 아니고, 또 나는 빈곤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지도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완전한 어둠과 무지에 머무는 것이다.
선생님! 그렇다면 모든 것은 떠나가야 하고 돌아오지도 않는 것입니까?
참으로 그렇다. 당연히 돌아옴은 없다.
그렇지만 이 어둠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잠재적 수용성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실제) 존재가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잠재적 개념으로서 그대는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돌아오는 것은 없다. 만일 그대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어떤 진리 때문이 아니라 감각과 세상 또는 악마 때문이다.
돌아가는 것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대는 죄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고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돌이킴이 없고, 오직 줄기차게 앞으로 나아가 완성에 이르기까지 이 가능성을 따라가는 것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로 가득차게 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질료가 모든 가능한 형상들로 채워지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듯이 지성도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가득 채워지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지성의 잠재적 능력은 천사 본연의 빛, 곧 밤의 빛과 유사하다.
지성은 자신의 실제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며,
거기에서 모든 것은 아침 빛에 젖게 된다.
인간은 능동 지성. 수동 지성. 가능 지성을 가지고 있다.
능동 지성은 언제나 움직이며 피조물 안에서든 하느님 안에서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이것이 능동 지성의 영역이며, 그래서 그 이름이 능동(active)지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 활동을 하느님께서 떠맡게 되면 정신은 수동적 상태에 있어야 한다. 가능 지성은 하느님의 능동성과 영혼의 수동성, 그리고 그 잠재적 능동성 모두와 관계되어 있다. 첫째 경우 지성이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은 능동적이다. 하느님께서 그 활동을 맡으시면 지성은 가만히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게 하고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이제 정신이 이것을 시작하고 하느님께서 이것을 끝마치시기 전에 영혼은 이에 대한 예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잠재적(가능적) 지식이다. 이것이 가능 지성이다. 그러나 가능 지성은 흔히 소홀히 다루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정신이 진지하게 자신을 실행시킬 때 하느님은 정신과 그 활동에 개입하시고, 그러면 영혼은 하느님을
보고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육신 안에 있는 영혼은 중단 없이 하느님을
뵙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께서는 때로 영혼에게서 물러나신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질료와 분리되어 있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내가 20년 전에 보았던 한 사람이 지금은 죽었다
하더라도 나는 마치 그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그의 형상에 대한 모상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은 어떤 질료도 필요하지 않지만 질료로부터 (형상 안에) 부여받았다는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빛과 지성은 이미 질료를 초월했거나 혹은 잠재적으로 그러한 것을 초월한다.
15. 지성의 죽음
복음 중에 외아들을 잃은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루가7,11-17) 주께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다가가시어 "젊은이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 앉는다. 이 과부는 영혼을 상징한다. 과부의 남편은
죽었고 아들도 죽었다. 아들은 과부의 지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1-4절) 주께서는 우물가에 앉아 그 여인에게 집에 가서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신다. 살아 있는 물, 곧 성령은 그 여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가 빠른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지성은 영혼의 절정이다.
지성은 천사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 천사들과 서로 통하고 사귄다.
천사의 본성은 시간이 미치지 않는 것이며 지성도 마찬가지다.
지성이 천사의 본성 안에 있지 않다면 그 지성은 죽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여인이 과부라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과부인 여인 안에서 지성은 죽었고, 그 지성과 함께 지성의 열매인 성자도 죽었다.
16. 지성은 의지보다 앞선다
나는 지성과 의지가 둘 다 이 빛에 속하지만
지성이 의지보다 상위라고 가르쳐 왔다.
다른 신학자는, 의지가 사물을,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채로 즐기는 데
비하여 지성은 그 사물을 지성 안에서 즐긴다는 이유로 의지를 지성보다
우위에 둔다.
사실 그렇다. 본래 눈은 벽에 그려진 눈보다 더 낫다.
그런데도 나는 지성이 의지보다 상위라고 주장한다.
의지는 하느님을 선이라는 옷 안에서 받아들이는 반면,
지성은 선과 존재를 벗어버린,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지성과 의지 가운데 주로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의지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갈망과 사랑이다. 한편 지성은 단 한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의지보다 상위에 속한다. 지성의 기능은 이해다. 그리고 지성은 보는 바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되기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지성은 의지를 앞서 가며 의지에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직 소유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을 갈망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을 사랑한다. 그때 갈망은 사라진다.
지성의 불꽃이 정확히 하느님을 향할 때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다.
17. 가난 - 두 종류의 가난
가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외적 가난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며,
지상에 계실 때 그렇게 사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이 가난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가난을
내적 가난이다. 우리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이 가난에 대해 언급하신다.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벌거벗고 통 속에 앉아, 온 세상을
지배하던 알렉산더 대왕에게 "나는 당신 보다 위대하다.
나는 당신이 지금까지 소유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랑하는 재산은 나에게는 경멸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18. 세 종류의 가난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우선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한다. 예를 들어 고행과 외향적 극기로 유명하고 존경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거룩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바보이고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전혀 따르지 않고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보면 그들은 나쁘지 않다. 그들의 의지는 선하며 칭찬할 만하다.
하느님은 자비로 그들을 지켜주신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을 매우
존경하지만 이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선한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될 수는 있을
테지만 그들은 앞에서 말한 가난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고 하자.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내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의지를,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가 진정으로 가난하다면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처럼 창조된 의지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영원한 진리로 말하건대,
그대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영원과 하느님에
대한 작은 갈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대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나의 제1원인 안에 있을 때 나는 하느님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나는 나 자신의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조건 없는 존재였고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나 자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나 자신을 원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내가 뜻한 것은 나였고 나는 내가 뜻한 바였다. 그때 나는 하느님과 모든
사물들에게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내가 내 자유 의지에서 벗어나 창조된
본성을 입게 되자 그때부터 나는 하느님을 지니게 되었다.
피조물들이 있기 전에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있는 그대로의 그분이셨다.
피조물들이 생겨났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피조물 안에 계신 하느님이 되셨다. 이제 하느님으로서의 하느님은 피조물들의 최종 목적도 아니고 가장 작은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위대한 풍요로움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만일 벼룩이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성을 통하여 자신의 원천인 하느님 존재의 영원한 심연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면 하느님과 그분의
온 존재가 그 벼룩을 가득 채우고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벗어나 영원한 진리에 이르고 영원성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최고의 천사와 영혼은 내가 있었고 있고자 원했으며 내가 뜻한 대로 존재했던 저 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의지에 있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 뜻하고 원했던 것처럼 적게 뜻하고 원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둘째,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나
진리나 하느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 가난한 사람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도
살지 않을 때, 자신이나 진리나 하느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때 그의 모든 존재를 얻었다고 힘차게 주장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인간이 영원한 형상 안에
있었을 때 하느님께서 바로 그분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으로 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그가 있었을 때에도 그가 없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뜻대로 일하시도록 내맡기며, 그가 하느님께로부터 왔을 때와 같이 가만히 있는다....
셋째,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흔히 완덕은 지상의 무상한 것들을 소유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특별한 경우에, 곧 그것이 자발적인 경우에 이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어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처럼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가난이 가장 심오한 최고의 가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물에게서 자유로우시듯이 인식과 지각에서 자유로운 것, 이것이 가장 적나라한 가난이다. 그러나 세번째 가난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가난 가운데 가장 궁핍한 가난으로 이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자주 이야기했으며 유명한 권위자들도 언급했던 말을
다시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활동하시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고자 한다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사물들과 활동들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좀 더 다른 것을 이야기하겠다.
어떤 사람이 모든 것에게서, 피조물과 자신과 하느님께로부터서 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공간을 마련해 드리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공간이 그 사람 안에 있다면 그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가난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활동하실 때 그 사람이 자신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할 공간을 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모든 활동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일하기를 선택한다면 그분은
그분이 원하는 대로 그분 자신의 공간에 계셔야 한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을 발견하면 하느님은 스스로 당신의 환자가 되고 수술실이 되신다.
하느님 안에서 수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난 안에서 인간은
그분의 영원한 본성에 순종한다. 그분은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그러한 본성이시다.
19. 다섯 종류의 가난
가난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악마적 가난이고,
둘째는 황금 같은 가난이며,
셋째는 자발적 가난이며,
넷째는 영적 가난이며,
다섯째는 신적 가난이다.
첫째 가난, 곧 악마적 가난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가난이다.
둘째 가난, 곧 황금 같은 가난은 재산과 소유물이 있으면서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비어 있는 사람들의 가난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 모두 불에
탄다고 해도 그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은 분명 그들의 것이며 그들은 반드시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자발적인 가난으로, 재산과 명예, 육신과 영혼을 포기하고 선한 은총을 통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의 가난이다. 이런 것들은 열두 사도에게 심판의 기준을 제공하는데, 이런 심판을 통해서 심판날에 그들이 버린 것은 무엇이며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이것마저 버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런 것이 자발적 가난이다.
넷째는 영적 가난이다. 재산과 명예, 육신과 영혼뿐만 아니라 친구와 가족도 버렸으며 모든 선행에서조차 벗어나 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다. 영원한 말씀께서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일을 하신다. 영원한 말씀 안에는 선도 악도 없으므로 그들은 절대적으로
비어있다.
다섯째는 신적 가난이다. 하느님은 그들 안에서 활동할 장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우연적 형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비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
안에는 모든 사람이 같은 한 사람이며, 그 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