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7장 본문
제7장 완성
1. 신성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들이 신성(Godhead)을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신성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어떤 활동을 한다고 말 할 수가 없다.
하느님은 활동을 하지만 신성은 활동을 하지 않는다.
신성에는 활동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성은 어떤 활동을 생각한 적이 없다. 하느님은 활동적이고 신성은 비활동적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과 신성은 서로 다르다. 내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때 거기에서 나는 아무런 형상도 없으며 나의 돌파는 나의 유출보다 훨씬 고귀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홀로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감각에서 내 정신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 내가 근저로, 깊은 곳으로, 신성의 원천으로 돌아갈 때 아무도 나에게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하느님께서는 지나가 버리신다.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고 전에도 알려진 일이 없으며 영원히 알려져 있지 않을 영원한 신성의 어둠의 신비다.
신성의 본질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성부의 위격이 영원히 성자의 위격을 낳고, 이들은 함께 그들의 성령을 발하신다.
신성과 하느님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그뿐 아니라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도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신성의 가장 깊은 마음을 인간에게 넣어주셨다. 내가 바닥에, 근저에, 신성의 강과 원천에 있었을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내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흘러가고 있을 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이야기했다.
"에카르트 형제여, 당신은 언제 집 밖으로 나갔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분명 안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들이 신성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성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어떤 활동을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느님은 활동을 하지만, 신성은 활동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성은 어떤 활동을 생각한 적이 없다.
하느님은 활동적이고 신성은 비활동적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과 신성은 서로 다르다. 내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때 거기에서 나는 아무런 형상도 없으며 나의 돌파는 나의 유출보다 훨씬 고귀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홀로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감각에서 내 정신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
내가 근저로, 깊은 곳으로, 신성의 원천으로 돌아갈 때
아무도 나에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하느님은 지나가시기 때문이다.
성 디오니시오는 "이 세상에서 육신이 외적. 자발적 가난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만큼 영혼은 신성의 사막으로 하느님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성 비르나르도는 이렇게 답변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며,
기다림이 익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일보다 힘든 일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신성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다른 어떤 것이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끊어버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하느님을 섬기라'고 하신다.
또한 철학자는 "제1원인에 의해 움직여진 영혼은 어떤 인간적 지혜에서도
위로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 영혼은 지혜를 초월하는 것에 순종한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는 원천적 진리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영혼은 하느님께로 아주 가깝게 흘러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는다.
그러나 영혼이 지금과 같은 존재인 것은 은총에 의해서이며,
영혼은 다른 이의 능력에 의해서 지금 있는 그곳에 있다.
이윽고 영혼은 하느님께 가까이 접근하여 성부의 능력으로,
성부께서 본성상 신성을 지니듯이 은총으로 신성을 지니게 된다.
성 바오로는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한 신성과 그에 따르는 결과들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거기에서 영혼은 신성이 신성을 지니는 것과 똑같이 신성을 지니게 될 것이며 영혼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는 하나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이든지 우리도 하느님과 같게 될 것이다.
아무도 이 육신 안에서는 거기에 이를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당신의 마지막 선물을 주시어 그분의 신성을 보게 하실 때
영혼은 삼위일체로 들어올려질 것이다.
플라톤은 "모든 피조물의 영혼은 신성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뽑힌 이들의 영혼이시다.
하느님은 무보다 앞서 있었던 완전한 무 속에,
어떤 인간도 그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순수한 지식의 감추어진 신성 안에 계시다.
궁극적 종착점은 무엇인가?"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고 전에도 알려진 일이 없으며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영원한 신성이 지닌 어둠의 신비다.
그 안에서 하느님은 알려지지 않은 채 머물러 계시다.
영원하신 성부의 빛은 언제나 거기에서 빛나고 있으며,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 진리가 우리를 도와주기를!
2. 삼위일체
성부의 위격은 영원히 성자의 위격을 낳으며
이들은 함께 그들의 성령을 발하신다.
성부는 끊임없이 당신 자신 안에서 성자를 낳고
성부와 성자는 같은 능력으로 그들의 성령을 발하신다.
성자와 성령은 본질적으로 성부와 함께 계신다.
이 삼위일체를 바라보는 것이
하느님의 지복에 참여할 수 있는 피조물의 완전한 행복이다.
신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으로 흘러든다.
영원 안에서는 영원 그 자체 안으로,
피조물 안에서는 피조물 안으로 각자가 담을 수 있는 만큼씩 흘러든다.
돌에게는 존재가, 나무에게는 성장이, 동물에게는 감각이,
천사에게는 이성이, 인간에게는 이 네 가지 본성 모두가 신성이다.
'그분으로부터'라는 것은
영원 안에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 만물의 근원이신 성부께 적용된다.
'그분을 통하여'라는 것은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생겨난 성자께 적용된다.
'그분 안에서'라는 것은
그분 안에 만물이 포함되어 있고 그 안에서 영이 만들어졌으며
만물이 그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성령께 적용된다.
3. 성화된 도시
그분은 도성으로 가셨다.
나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잘 정돈되고 튼튼해진 영혼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 영혼은 죄를 경계하고 다수성을 막아내어 예수 안에서 안전을 누리고
있다. 하느님의 빛이 이 영혼을 둘러싸고 성곽이 되어준다.
본질은 자기 일에 열중한다. 이것은 유출이 아니라 내적 융합니다.
그리고 일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떨어지고 외부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그 자체로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선은 하느님께서 흘러 나와 그분이 모든 피조물로 확산되는 것이다.
본질은 성부이고, 일치는 성자이며, 선은 성령이다.
성령은 가장 높고 순수한 영혼(성화된 도시)을 사로잡아
그 첫 원천인 성자께로 끌어올리신다.
또한 성자는 그 영혼을 당신 원천, 곧 당신 성부께로, 근거로, 첫번째 것으로, 성자께서 당신 존재를 지니는 곳으로 데려가신다.
거기에서 영원한 지혜는 거룩하고 성화된 도시에서,
가장 깊은 곳에서 응답하신다.
하느님의 존재는 원천이 된다. 그것은 흐르면서도 고정되어 있고,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다. 그 존재에서 능력이 흘러 나와 활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 위격은 신성의 창이며 은총으로서
영혼의 본질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영혼의 본질 속에 있는 하느님의 존재는 세 위격의 모방이며,
한 위격의 존재가 다른 위격 안으로 스며든다.
세 위격이 신성에서 나오듯이
영혼의 주된 능력이 그 영혼의 본질에서 흘러 나온다.
성인들에 따르면 능력은 성부 안에 있으며 합일은 성령 안에 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성자에게 현존하고 성자가 모든 면에서 그분과 같다면
성부를 아는 것은 성자 뿐이다.
4. 참된 진리
이제 영혼이 삼위일체 안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들을 보자.
우선영혼이 성령을 뵙고나면 죄가 씻겨지며 자신과 사물을 잊는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그 영혼이 신성을, 곧 성부의 영원한 지혜를, 만물에 대한 지식과 분별을 알게 되어 이제는 의견. 가정. 믿음이 필요 없이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영혼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믿고 사람들의 주장과
소문을 통해 배웠지만, 이제 사람이나 천사가 그에게 어떤 사물을 제시한다면 그 영혼은 누구에게도 물을 필요가 없다. 추상적 진리가 계시되면 실재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천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유한한 정신으로 파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나는 하느님의 자유에 대하여 그 자유가 한 가지 본성만 낳는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성자에서 시작하며, 그 성자는 능력이신 성부와 다르고,
그 둘로부터 성령이 피어나온다.
철학자들은 태양이 줄기를 통하여 뿌리에서 꽃을 끌어낸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눈으로 파악하기란 어렵다. 자신의 근저, 곧 그 영혼이 사랑이 되는
사랑의 근저 안에 아무런 본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은,
영혼을 하느님 안에 보존하는 하느님의 본성에서 나온다.
이 존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거의 동일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
신부인 영혼이 오면 그분은 영혼에게 온 마음을 기울이며 그분의 근저 안에서, 그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그 곳에서 온 능력을 다해 일하신다. 신성의 나무가 이 안에서 자라며, 성령은 그 뿌리에서 싹터 나온다. 이 나무에서 꽃피는 사랑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 안에서 영혼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꽃을 피우며, 이 꽃 위에서 주님의
영이 머물고 쉬신다. 그분이 먼저 성령 위에 머물지 않았다면 그 분은 쉴 수 없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 위에 머물고 성령은 그 근원인 성부와 성자 위에 머문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하여, 위격과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 할 것인데,
이것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설명을 따라올 수 없는 사람들은
내가 가르쳤던 교리, 곧 세 위격은 본질이 하나이며 한 본질이 세 위격 안에 있다는 내용에 머물러도 괜찮다.
우리는 지금 성부와 부성(아버지 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부와 부성은 두 본체 안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본체라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부성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아버지다운 능력을 의미한다.
그가 낳는다는 사실로 아버지임을 알지만,
우리는 미래의 잠재적 아버지에게서도 부성을 알아본다.
예를 들어 젊은 처녀를 생각해 보라. 그 처녀에게도 모성이 있지만 실제로
어머니는 아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출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부성을 가지지만, 그를 아버지로 만드는 것은 낳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이 영혼 안에서 영적으로 태어난다고 할 때 아버지와 부성의 차이를 염두에 두라. 영혼이 정화되고 적합한 상태가 되어 하느님의 빛을 잉태하게 되는 경우에 말씀이 영혼 안에서 영적으로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유일하신 능력으로 그 영혼은 신성으로 자라나게 된다.
여기에서 영혼도 이러한 내재적 능력에 의하여 부성적임을 알 수 있다.
계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영혼은 성부와 함께 낳으며
따라서 성부와 함께 아버지라 불린다.
아버지와 부성은 영혼에 작용될 때 차이가 난다.
또한 아들과 아들 됨도 다르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둘은 분리되어 두 본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본체다.
우리는 잠재적 아버지의 본성 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 됨을 본다.
그가 이미 잠재적 본성 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그를 낳을 수가 없다.
밖으로 나올 것은 먼저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 됨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성부가 성부이기때문에 우리는 아들을 아버지가 당신 자신의 말씀을 낳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성자는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부에 의해서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자신에 의해서 하느님이라면 아버지와 하나가 아닐 것이며
어떤 시작도 없이 이들은 둘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위는 세 가지 상이한 속성을 가정한다.
성부의 속성은 그분이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서 오신다는 것이며,
성자의 속성은 그분이 자신에게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탄생을 통하여 아버지에게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속성은 성부에게서 오되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탄생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위격 안에 서로 분리된 성부와 성자는 함께 하나를 낳을 수가 없고
오직 상호간의 사랑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순환
아가서의 신부는 "나는 원둘레를 돌아다니다가 그 끝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영혼이 뛰어다니는 원둘레는 삼위일체가 만든 모든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의 작품을 원둘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 위격이 이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 안에 그들의 모상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은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영혼이 따라가는 순환이다.
영혼은 언제 이 순환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영혼이 묵상할 때다. 하느님은 뜻하시기만 하면 당신이 만든 모든 것을 천 번이라도 다시 만드실 수 있다. 그래서 영혼은 끝없는 고리를따라 회전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피조물 중 가장 미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영혼은 그 끝을 찾아낼 수 없고 그 가치를 밝혀낼 수 없다.
찾기에 지친 영혼은 한가운데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곳은 삼위일체의 능력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 모든 활동을 하는 자리다. 여기에서 영혼은 전능하게 된다.
세 위격은 하나의 전능이다.
이것은 움직임이 없는 그 지점이며 삼위일체의 일치다.
그 순환은 이 세 위격이 이루는 불가해한 활동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께서는 변함이 없으며 본질에 있어 서로 일치하시고,
영혼은 이 고정된 점과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그 능력들에서 삼위일체를 닮아있으면서도 그 일치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많은 파리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문제를 다루다가 실패했다.
그들은 삼위의 활동에 몰두하여 그 일치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온 땅에서 시간이 일정하듯이 그 중심은 원둘레의 모든 곳과 같은 거리에
있다. '지금'은 이 순간(시간)이며 '지금'은 로마에서와 같은 시간이다.
6. 거룩한 죽음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죽은 사람의 것이다.
주님, 제가 당신 안에 있었을 때
저는 저의 무 안에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를 궁핍하게 만든 것은 당신이 저를 보신 것,
당신이 저를 아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떠나는 것이 영혼에게 죽음이듯이 하느님께서 유출되는 것도
영혼에게는 죽음입니다. 모든 변화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죽게 되고, 영혼은 하느님의 본성을 붙잡아 보려다 그저 신성에 놀라워 죽습니다. 무 속에서 영혼은 해체되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이러한 비존재 상태로 영혼은 묻히고, 무지 속에서 무지로 섞여 들어가고
생각 없는 상태에서 생각이 없는 세계로 섞여 들어가고,
사랑이 없는 상태로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섞여 들어갑닌다.
죽음의 힘은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육신에게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영혼을 갈라내어 그 영혼을 신성 속에 내던집니다. 거기서 영혼은 파묻히고 모든 피조물에게 잊혀집니다.
영혼은 무덤 속에 있는 이들처럼 잊혀지고,
어떤 사람의 품 안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영혼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성 안에 죽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 육신에 대해 죽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영혼이 영원히 탐색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 죽은 영혼은 자신의 무를 잃고 신성 안으로 던져집니다.
7. 자신에 대해 죽을 때 하느님을 뵙게 된다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나를 보고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성 그레고리오는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그대는 얼마만큼 죽었는지, 세상의 사물들이 얼마나 미약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 죽지 않게 된다.
영혼이 다른 본성을 수용할 수 있게 되려면 죽어야 한다.
그대는 모든 사건에 대해 죽은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그대의 전존재가 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여러가지 선물과 빛과 위로, 그리고 매우 소중한 것들을 주실 수 있지만, 그대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는 남김없이 당신 자신을 주시지 않는다. 영혼이 자신 안에서 죽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의 생명이 되시며, 그때 내 몸과 영혼이 단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성 바오로는 순교자들과 우리 주님의 친구들은 '죽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부터 그는 우리도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죽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계시하신 거룩한 것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대가 아직도 시간 안에서 누가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대는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아무도 그대의 죄를 사해 주지 않고 아무도 그대에게 성체를 주지 않으며 아무도 세상 멸시에서 그대를 지켜주지 않을 때, 그대가 거기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대는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대가 자신 안에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다면, 지상의 형상에서 벗어나 영예로운 지위와 모든 현세의 일들을 잊는다면, 그대가 깊은 망각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그대 안에서 형상을 만들지 않고 그대가 아무것도 감각으로 알지 못하며 오직 그대의 영혼이 똑바로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만을 안다면 그 때 비로소 그대는 참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고 아무것도 그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성 요한은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복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이여, 하느님 안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보라.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고 활동하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죽지만 그것은 고귀한 죽음이다.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하느님은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 머무신다". 그 빛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죽어야 하고, 자신의 존재에서 비워져서 아무런 모상도 없고 무엇과도 유사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은 이들과 같이 선과 악, 그리고 온갖 고통에 대하여 냉담해야 한다. 둘이 하나가 되려면 하나가 그 본성을 잃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영혼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영혼이 자신의 생명과 본성을 잃어야 한다.
순수한 본성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친한 친구에게도 바다 건너에 있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죽어 있어야 한다.
자신을 없애는 것, 자신을 잊는 것, 이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고 이것보다 더 힘든 싸움은 없다.
8. 육신의 죽음
그분(하느님)이 무엇을 파괴시키실 때는 반드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신다. 순교자들은 죽었지만 목숨을 잃고서 존재를 얻었다.
하느님 안에 있는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순수한 본질로서 그 자체 안에서
알게 되면 이것이 한낮이다.
영혼은 이 가장 고귀한 존재를 보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죽음으로써 생명보다 더 나은 존재로 부활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생명은 그 존재 안에 존속하며 그 안에서 실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9. 영원한 생명
성 바오로는 죽음도 고통도 나를 내 안에 지니고 있는 것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에게서 하느님을 거두어 달라고 내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무조건적인 존재는 하느님 위에 있으며 구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나는 나 자신이었고, 나는 나 자신을 원했고, 나 자신이 이 사람을 만들었음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원한 본성에 있어서나 현세적 본성에 있어서나
나 자신의 원인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영원한 탄생에 이르기까지
결코 죽을 수 없다. 영원한 탄생에서 나는 언제나 있어왔고 현재에도 있으며 영원히 있을 것이다. 나는 시간에 속하며 시간과 함께 지나가기 때문이다.
10. 초탈
그러면 절대적 초탈(초탈)의 목적은 무엇인가?
절대적으로 마음을 비우는 목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높은 경지이기 때문이다. 변화될 수 없고 피조물을 완전히 버리고 떠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하느님과 완덕의 정상에 가장 가까이 있게 하는 것이다.
11. 초탈의 방법
초탈에는 네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인간의 사멸할 것들을 무너뜨리고 멀어지게 한다.
둘째 단계에서는 그것들을 모두 끊어버린다.
셋째 단계에서는 마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모두를 잊어버리며 그것들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어버린다.
넷째 단계는 바로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임금이 우리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최고의 초탈에 있는 사람보다 더 복된 사람은 없다.
현세적 육신의 쾌락에는 반드시 영적 해악이 따른다.
육신은 영을 거스르는 것을 갈망하고,
영은 육신이 싫어하는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육신 안에 무절제한 사랑을 심는 사람은 죽음을 얻지만,
영 안에 선한 사랑의 씨를 심는 사람은 영에서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
피조물에서 벗어날수록 더 빨리 그 창조주께 가게 된다.
사려 깊은 영혼들이여, 잘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느끼도록 주어진 사랑마저도 성령을 받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피조물이 주는 위로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께 이르는 데 얼마나 더 방해가 되겠는가?
초탈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하며 마음을 불타게 하고 영을 일깨운다. 또한 초탈은 하느님을 직관하게 하여 피조물을 벗어나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도록 재촉하고 덕을 강화한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분리된 사랑은 불속에 있는 물과 같지만,
하느님과 결합해 있는 사랑은 꿀 속에 있는 벌과 같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라. 외부에서 오는 표상들을 멀리하고 집착과 부담이 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언제나 구원을 관상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라.
거기에서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눈길을 잠시도 떼지 말라.
단식. 밤샘. 기도 등 다른 모든 고행들은 이 목적에 종속되므로,
이 목적에 필요한 정도로만 사용하면 완덕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나는 이교 철학자들과 구약과 신약의 현자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어보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 있었던 때,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기 전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었던 때와 같이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결합되고 그분을 가장 잘 닮기 위해서는 어떤 덕이 제일 좋은가를 부지런히, 열심히 찾아보았다. 내 능력을 다하여 성서를 탐구한 결과, 나는 모든 피조물에서의 절대적 초탈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주님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평화롭고 순수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초탈뿐이라는 뜻이다.
나는 초탈을 사랑보다 더 높게 본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랑은 기껏해야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 나의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데 달려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쉽게 당신 자신을 나에게 결합시키며,
내가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쉽게 나와 통교하신다.
초탈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나에게 오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자기 고유의 본래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하느님 고유의 본래의 상태는 하나 됨과 순수함이고, 이것은 초탈에서 온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초탈을 이룬 영혼에게 자신을 주시게 되어 있다.
둘째로 내가 초탈을 사랑보다 위에 두는 이유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고통을 받게 하는 반면 초탈은 내가 하느님만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고통을 받는 것보다 하느님만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
고통을 받을 때는 그 고통의 근원인 피조물과 관계하게 되는 반면,
초탈은 피조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초탈은 하느님 말고는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초탈은 무에 가깝기 때문에, 초탈된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밖에 없다. 그분은 단순하고 미묘하시기 때문에 고독한 영혼 안에
머무실 수 있다. 그러므로 초탈은 하느님만을 받아들인다.
스승들은 겸손을 다른 모든 덕보다도 높이 칭송한다.
그러나 나는 초탈을 겸손보다 위에 두는데, 그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초탈이 없는 겸손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한 겸손 없이는 완전한 초탈이 불가능하다.
완전한 겸손은 자신을 무로 만들지만,
초탈은 무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무와 절대적 초탈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겸손이 없이는 완전한 초탈도 없다.
또한 두 가지 덕은 한 가지 덕보다 더 낫다.
내가 초탈을 겸손보다 더 높게 보는 둘째 이유는,
겸손은 피조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자신을 떠나 피조물들에게 가는 것인 데 비해 초탈은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예언자가 말했듯이 왕의 딸의 온갖 영광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완전한 초탈은 피조물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으며,
높은 곳에 있는 것에도 낮은 곳에 있는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초탈은 아래에 있으려는 마음도 위에 있으려는 마음도 갖지 않고,
오직 자신을 정복하여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어떤 피조물에 대해서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오직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만을 바랄 뿐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다. 혹은 저런 사람이다'라고 불리길 원하는 사람은
어떤 무엇이 되지만, 초탈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완전한 무다.
초탈은 사물들을 방해받지 않은 채 그대로 둔다.
초탈은 마치 큰 산이 부드러운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기쁨이나 슬픔, 영광이나 불명예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움직임이 없는 초탈은 인간을 최고로 하느님과 같아지게 한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은 그분이 움직임이 없이 초탈을 지녔기 때문이며, 그분의 순수성과 단순성과 불변성은 이 초탈에서 비롯된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한껏 닮을 수 있는 만큼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한다면 이는 초탈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13.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 존재의 의식(의식)이며 그 의식 중에 찬양하는 것이다.
기도 방법
인간이 완전히 하느님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의지를 갖지 않게 되기 전에는 참되고 완전한 의지란 없다. 그렇게 될수록 그는 안전하게 하느님
안에 자리잡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잊고 성모송 한 번을 바치는 것이 자신을 잊지 않고 천 번을 바치는 것보다 낫고, 이 길을 따라 한 걸음을 걷는 것이
다른 길에서 바다를 건너 여행하는 것보다 낫다.
우리 주님은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산이나 성전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느님의 장소에서 예배하는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의 교훈은, 우리가 산꼭대기와 성당에서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바오로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모든 일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들, 자신의 개인적 쾌락에
마음을 쓰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오직 하느님께서 행하시도록 하는 이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입으로 바치는 기도를 명하는데, 이것은 영혼이 다수의 덧없는 사물 속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최고 능력(지식과 기억과 의지)으로 돌아온 영혼은
영을 향하고, 그 영은 의지의 완전한 일치를 통하여 하느님께 결합되어 하느님을 향한다. 그대가 이처럼 창조의 목적에 도달할 때에야 참된 기도가 있게 된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이 되도록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기도의 덕이 외적으로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증가되는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외적습관은 기도의 가치를 거의 또는 전혀 높여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도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많기 때문에 좋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다.
동전 몇 푼은 거의 가치가 없지만 천 개라면 상당한 액수가 된다.
그것은 오직 수가 많기 때문이다. 수가 많지 않다면 동전 그 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외적 실천도 그렇다. 그러나 횟수는 좋은 기도냐 아니냐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모송 한 번이 입술에서 나오는 천 번의 성모송보다 더 큰 힘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선행의 수가 많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올바르게 했다면 천 번의 선행과 똑같이 좋고 선하다.
덕을 외적으로 많이 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횟수가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이 된다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좋은 것은 하나일 때에 좋은 것이지 다수가 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참된 덕은 덕스럽게 행한 덕행을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선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 없이 인색하게 주는 사람은 비록 덕행을 한다해도 덕스럽게 한 것이 아니다.
기도나 다른 어떤 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내를 예로 들어보자.
외적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 그 사람을 인내롭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의 신뢰를 시험할 뿐이며, 동전이 은으로 된 것인지 구리로 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불로 시험하는 것과 같다. 인내로은 사람은 외적 고통을 받지 않더라도 인내한다. 기도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향하여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외적 행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외적 기도 때문에 마음이 순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기도가 순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바라고 기도하면 내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도할 때 나는 마땅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이 같은 거리에 있고 모두가 똑같은 중에
그것들과 내가 하나가 될때, 그것들은 모두 하느님 안에 있으며 또한 내 안에 있다. 거기에는 하인리히에 대한 생각도, 콘라드에 대한 생각도 없다.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그릇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위해, 하인리히나 콘라드를 위해 기도할 때에는 가장 약하게
기도하는것이다. 누구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을 때 나는 가장 강하게 기도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청하지 않을 때 가장 잘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는 하인리히도 콘라드도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외에 어떤 것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고
신앙이 없는 것이며, 말하자면 불완전한 것이다.
사멸할 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당신이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을 청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어떤 선물 때문에 기도하지도 않고, 받은 선물 때문에 그분을 흠숭하지도 않겠다고 맹세한다. 다만 내가 받기에 합당하게 해주시도록 청할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실 수 밖에 없는 본질과 본성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흠숭할 것이다.
우리 신학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을 찬미하는가 묻는다. 모상이 찬미한다.
영혼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느님과 전혀 다른 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초상화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예술적 착상을 구현한 화가에게
영예가 되며 그 화가의 모상이 된다. 초상화의 모상은 말없이 그 화가를 칭송한다. 말로 칭송하는 것이나 입으로 기도하는 것은 큰 가치가 없다.
우리 주님은 언젠가 "너희는 기도하지만,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른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올 것인데, 그들은 말로써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내 아버지께 기도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기도란 무엇인가?
디오니시오는 "마음이 하느님께로 오르는 것, 그것이 기도다"라고 말한다.
영이 있고 일치와 영원성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교인이다. 육이 영과 맞서 싸우는 곳, 분열이 합일에 맞서 싸우는 곳, 시간이 영원성에 맞서 싸우는 곳, 거기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14. 관상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혼자 생각한다. 그대는 왜 밖으로 나가는가?
왜 집 안에 머물면서 자신의 보물에 신경을 쓰지 않는가?
왜냐하면 진리는 그대 안에 온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관상 상태에서 우리는 성령의 불 같은 사랑으로 불살라진다.
죽을 죄든 가벼운 죄든 의식적으로 죄를 범하기보다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순교를 겪는 편이 낫다.
가벼운 죄 하나를 지음으로써 무수한 지옥 영혼들을 풀어줄 수 있다해도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관상 중에 인간은 하느님께 이와 같은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관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방해받지 않고 한적한 장소가 필요하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손이나 혀뿐만 아니라 오감도 모두 쉬고 있어야 한다.
영혼은 고요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되지만,
육신이 지쳐 있으면 흔히 타성에 젖게 된다.
15. 관상의 일곱 단계
관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고요한 장소를 찾고
먼저 그의 영혼이 얼마나 고귀한지, 그 영혼이 어떻게 하느님께로부터
곧바로 흘러 나왔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생각은 그를 큰 기쁨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을 잘 숙고한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그 영혼을 만들어 주셨는지, 그래서 하느님이 본성으로 지니신 것을 영혼도 은총으로 지니게 해 주셨는지를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더욱 뜨거운 기쁨을 느끼게 된다.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왔다는 것보다 훨씬 고귀하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에서 그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묵상한다.
넷째 단계는 하느님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이 영원으로부터 누리셨고
지금과 앞으로도 영원히 누리실 것, 곧 하느님 자신을 누리게 해주셨다는 것을 생각한다.
다섯째 단계에서 영혼은 자신 안으로 들어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아는데, 그것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어떤 존재도 존재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는 존재를 먹고 산다.
그러나 존재는 이 음식이 복된 본성과 동일하게, 그리고 자존적 존재에 적합하게 변화될 때까지는 이 음식을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영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먹고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신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내 영혼은 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내가 생기를 잃어버리길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문은 나에게 존재를 주셔야 한다. 어떤 존재도 하느님 없이는 존립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께서 내가 존재를 가지고 있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나에게 당신 자신을 주셔야 하는 것이다.
여섯째 단계에서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안다.
이것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다.
내 생각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내 영혼은 늘 하느님과 하나이고 하느님이며, 나는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그 나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하느님의 존재 양식으로 고양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숙련된 영혼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일곱째 단계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그분 자신으로서,
그분에게서 만물이 나온 시작 없는 존재로서 알게 된다.
이러한 지식은 현세의 삶 동안에는 어떤 인간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가 하느님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을 때에는 그것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과 하나 되지 않는다.
단 하나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눈 멀음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무지만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높은 위치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낮고 무의미함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완성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고 영원의 굳건함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선후도 없으며 모든 것이 새로운 현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보다 길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경이로움 속에 머물자. 인간의 지혜는 그것을 밝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깊이 파고들려 하면 경솔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16. 상식
이 세상의 삶에서는 아무도 외적 활동에서 벗어나는 단계에 이를 수 없다.
관상생활을 한다고 해도 밖으로 흘러 나가 활동의 생활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전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주고자 하는 의지로 관대할 수가 있고,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도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관대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가 없다.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서 덕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도 덕을 지닐 수가 없다. 그러므로 관상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외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가장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관상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가 관상을 행하고 있을 때에는 외적 활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후에는 외적 활동을 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중단 없이 관상생활을 살 수는 없으며, 활동 생활이 관상 생활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기 떄문이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하여 읽거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것이며 영혼에게 고귀한 즐거움이 된다. 생각 안에 하느님을 품는 것은 꿀보다 더 감미롭지만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고귀한 영혼에게는 풍요로운 위로가 되며,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됨으로써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이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하게 될 때
이 세상에서 그 기쁨을 즐기게 된다.
하느님의 마술 거울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원숙한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상당히 소수의 사람만이 여기 지상에서 관상생활을 살아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시작하지만 완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르타의 삶을 올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수리가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는 새끼를 쫓아내듯이 영적 어린이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대는 내가 기도와 덕행을 모두 헛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할 것이다. 하느님은 그것들에 신경 쓰지 않으므로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탄원을 듣고 싶어하신다고 말한다.
이제 다음의 말을 잘 생각해 보라. 하느님께서 처음에 영원을 바라보실 때 - 그러한 첫번째 바라봄이라는 것을 가정하면 말이다 - 그분은 모든 것이
어떻게 생겨날 것인지를 보셧고 동시에 언제 그리고 어떻게 피조물들을 만들 것인지를 보셨다. 그분은 그들이 바칠 가장 미천한 기도와 그들이 행할 가장 작은 선행도 보셨고, 어떤 기도와 어떤 신심행위를 들어주실 것인지도 이미 보셨다. 그분은 내일 그대가 당신을 간절히 부르며 탄원할 것을 미리 보셨고, 그렇기 때문에 내일 비로소 그 기도와 탄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영원 안에서 그대가 인간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들어주셨다. 그대의 기도가 어리석고 열성이 부족하여 하느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고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때에 그것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성 안에서 이미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17. 은총
한 스승이 이렇게 말한다. 은총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아무런 도구 없이
영혼 위에 분명하게 새기신 하느님 얼굴로서 영혼에게 하느님의 형상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은총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
인간은 은총을 통하여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던 성 바오로와 같이 넓은 이해를 이룰 수 있다. 한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은총은 성부의 마음에서 솟아나와 성자 안으로 흘러들어,
성부와 성자의 일치 안에서 성자의 지혜로부터 나와 성령의 선물로 발출되고, 또한 성령 안에서 영혼에게 부어진다. 영혼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죽어 있을 때 이해를 일깨우는 상위 정신은 하느님께 은총을 주시기를 애원한다.
영혼은 하느님 아주 가까이 흐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는다.
그러나 사실 영혼이 지금과 같은 존재인 것은 은총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고, 영혼은 다른 이의 능력에 의하여 지금 있는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영혼은 하느님께 가까이 접근하여 성부께서 본성으로 신성을
지니시듯이 성부의 능력으로, 은총으로 신성을 지니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들을 피조물의 도움을 받아 행하고 어떤 것들은 도움 없이 행하신다. 내 말을 통해 전해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은총이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아무 도구없이 그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대의 영혼은 곧 변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발설함으로써 하느님과 협력하게 되며,
은총은 내 안에 함께 섞이고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서 그것을 말씀시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도구가 되는 것이므로 그대의 영혼 안에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성령 자체에 의하여 발설된 은총은 그 영혼이
하느님을 직감하는 고유한 능력 안으로 모여서 직접 받아들여지며 변화되지 않은 채 영혼 안에 새겨진다.
성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하느님은 영혼의 깊은 곳에 숨으신다.
그분은 은총의 활동 안에 당신 모습을 감추고 그 안에서 은밀히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분이 이렇게 몰래 숨으신 그 영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18. 이해와 지성을 넘어
이해를 넘어
영혼에 관한 최고 권위자인 철학자에 따르면 인간의 지혜는 영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초자연적 지혜가 필요하다.
영혼에서 나와서 작용을 일으키는 능력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조금은 알지 모르지만 영혼의 근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근저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은 초자연적이어야 하고
하느님 자비의 동인(動因)인 은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지성을 넘어
또 하나의 빛, 은총의 빛이 있는데 이에 비하면 자연의 빛은 지상의 작은 한 부분을 비출 뿐이다. 아니, 땅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넓은 온 하늘을 땅과 비교할 때처럼 그것은 정말 작은 부분이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영혼 안에 현존하실 때 그 영혼은 어떤 지성이 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빛으로 채워지게 된다. 지성의 빛은 이 빛의 바다 속에 있는 물 한 방울일 뿐이며 수천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영혼에게는 모든 사물과 그의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작고 하찮게 보일 것이다.
은총은 지성 안으로도 의지 안으로도 들어가지 않는다. 은총이 지성과 의지 안으로 들어가려면 지성과 의지가 그 자신을 초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스승이 "그들 위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 완전히 신비로운 것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영혼이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인 영혼의 불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이 작은 불꽃 안에서 영혼과 하느님의 참된 합일이 이루어진다. 은총은 어떤 덕행을 하는 일이 없으며, 선행과 그 결과까지
포함하여 어떤 일도 한 일이 없다. 은총은 활동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은총은 오직 영혼이 하느님 안에 사는 것, 함께 사는 것이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모든 활동은 그 아래에 있다.
19. 은총 지위에 있는 사람은 초탈한 상태에 있다
하느님의 은총을 지닌 영혼들은 (즐거이) 떠난다.
피조물은 그 영혼에게 고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천사가 한 첫 마디,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은총이 태어날 영혼의 상태를 나타낸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은총을 받았음을 뜻한다.
"이 아기는 은총을 가득 받았고,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모태에서 순수하게 탄생한 세 경우가 있었다.
성 요한은 순수하게 탄생하여 죽을 죄를 범할 수가 없었고,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여 죽을 죄든 가벼운 죄든 죄를 전혀 짓지 않으셨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순수하여 원죄에 예속되지 않고 잉태 되셨다. 처녀가 초탈한 상태에 있었듯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태어날 영혼도 순수하여 사람들에 대한 즐겁거나 불쾌한 생각들로 채워지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향해야 한다.
20. 은총 중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는가
영혼 안에 은총이 있다는 것을 세 가지로 알아볼 수 있다.
첫째는 그 영혼이 하느님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 영혼은 신성으로부터 내려왔다.
둘째, 그 영혼은 하느님처럼 행동한다.
이 영혼 안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어서 이 영혼은 하느님과 매우
유사하게 되어, 그 고귀한 본성 때문에 악마는 이 영혼을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셋째는 그 영혼이 모든 완전함을 동시에 소유하게 되기까지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교 철학자는 "영혼의 완성은 하느님의 천사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모상을 지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1. 은총의 기능
이제는 영혼 안에서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자.
우리는 그것을 도끼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로 그것은 잘 다듬고 날을 잘 갈아야 한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죄없이
깨끗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은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또한 이 도끼는 일하는 사람이 바라는 목적을
실현시킨다. 마찬가지로 은총은 영혼을 하느님 안으로 데려간다.
그것은 영혼이 자신을 넘어서게 하며 자아와 모든 피조물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한다. 은총은 영혼에 작용하여 영혼이 빈 자리를 마련하고 오직 하느님과 영혼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한다.
하느님의 최종 목적은 탄생이다. 그분은 당신 성자가 우리 안에 탄생하게
하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 탄생에서 은총이 솟아나온다.
은총이 그 안에 부어지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은총의 작용은 그것이 되고 있는 과정이다. 은총은 하느님의 본질에서 흘러나와 영혼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영혼의 본질로 들어간다.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여겨야 하며 언제나 우리 주 하느님의 문 앞에 손을 내밀고 하느님의 은총을, 그분의 자선을 청해야 한다. 은총은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 은총의 보호가 없이는 어떤 영혼도 죄에서 벗어나 있을 수가 없다. 은총의 기능은 영혼을 일깨우고 하느님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시키는 데
있다. 영혼은 하느님의 향기를 내는 신성한 흐름 안에 흐르며 하느님의 모상인 이 흐름은 영혼을 하느님과 같게 만든다. 은총이 그 향기와 함께 의지로
향할 때 그것은 사랑이라 불리고, 그 은총이 지성으로 향하면 신앙의 빛이라고 불리며, 같은 은총이 격정으로 싸이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세 가지 덕을 거룩한 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영혼 안에서 신성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태양빛이 땅위에 힘을 주고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며 존재를 유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빛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은총이 있고 그 은총이 사물들을 사랑하는 곳에서 쉽게 무엇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하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은총이 있지 않다는 확실한 표지다. 때가 완전히 차면 은총이 탄생한다.
22. 은총을 초월함
하느님을 볼 수 있기 전에 먼저 빛과 은총이 풍부해야 한다.
은총은 탁월한 빛이며 천사들을 넘어선다.
은총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지만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우리 주님은 당신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너희에게는 빛이 조금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은총의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약했다.
은총의 빛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들 중에, 그분이 만드실 수 있었던 것들 중에 가장 밝은 것이다. 때로 영혼에게는 은총이 증가해야 한다.
은총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 영혼은 은총으로 올라가야 하고,
완전하게 된 다음에는 은총을 초월해야한다.
그때 영혼은 하느님을 뵙게 된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 영광은 은총을 파괴하지 않고 끝까지 완성시킨다. 영광은 완전하게 된 은총이기 때문이다.
23. 마침 - 평화
불안에서 '고요'로 건너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불완전한 것이다. "평화로이 가라. 불안해하지 말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로 들어가야 하며, 평화 안에 계속 머물고
평화 안에서 끝마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서 너희는 평화를 누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 안에 있는 동안에는 평화 안에 있다.
어떤 것이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은 평화 안에 있다.
어떤 것이 하느님 밖에 있다면 그것은 평화 밖에 있다.
성 요한은 "하느님께로부터 난것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것은 평화를 추구하며 그 평화를 따라간다.
평화로운 길을 추구하고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천상의 사람이다.
하늘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그 움직임 중에서 쉼(휴식)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 있으면 그는 평화를 누린다.
하느님 안에서 멀리 있을수록 평화에서도 멀리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그대가 하느님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어디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판단해 보라.
그대가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분명 불안할 것이다.
불안은 피조물에게서 오는 것이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사랑할 만한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슬퍼할 이유도 없다.
하느님이 뜻하는 것,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평화를 누린다.
자신의 의지와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하나가 된 사람만이 이 평화를 차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함께 주신다.
마지막으로 피조물들은 모두 알든지 모르든지 쉼을 추구한다.
돌이 땅 위에 놓여있지 않으면 그 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불도 마찬가지고,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는다.
사랑하는 영혼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쉴곳을 찾는다.
다윗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셨다.
물고기는 물속에, 새들은 공중에, 짐승들은 땅에,
영혼은 신성에 두신다"라고 말한다.
또한 욥도 "우리가 기쁘고 행복할 수 있도록
그분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을 주신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안의 평화와 안식을 주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출처]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7장|작성자 곡두
'마스터와 가르침 > 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밀의 가르침 1: 절대영원성 (0) | 2020.01.29 |
---|---|
비밀의 가르침 The Esoteric Teachings (0) | 2020.01.29 |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6장 (0) | 2020.01.29 |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5장 (0) | 2020.01.29 |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4장 (0) | 2020.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