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1.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께서 당신이 유일하게 낳은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여기에서 '세상'은 외적 세계가 아니라 내적 세계로 이해해야 한다.
성부께서 당신의 단순한 본성으로 성자를 낳으시는 것이 분명하듯이 그분이 내적 세계, 곧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성자를 낳으신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과 똑같은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과 하느님은 본성이 동일하며 같은 분이시다.
...단지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하느님도 말씀과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말씀 안에 계시다. 성부께서는 당신이 영원 안에서 성자를 낳으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혼 안에서도 성자를 낳으신다.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부께서는 끊임없이 성자를 낳으실 뿐만 아니라 나도 당신의 아들로 낳으신다.
2. 인간의 두 가지 탄생
인간에게는 두 가지 탄생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고,
하나는 세상 밖에서 영적으로 하느님 안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대의 아이가 태어났는지, 참으로 숨김없이 드러났는지 알고 싶은가?
다시 말해서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가?
그대의 마음이 죄 외의 다른 것 때문에 무겁다면 그대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대는 아직 어머니가 아니다.
그대는 진통을 겪고 있으며 그대의 때가 가까이 왔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대 자신을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 진통을 겪고 있다면 이는 탄생이 가까이 다가와 있더라도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 걱정이 사라지기 전에 탄생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는 본질과 본성, 실체와 지혜와 기쁨, 하느님이 소유하신 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그대가 그것을 원하든 싫어하든 하느님은 그대 안에 성자를 낳으실 것이다. 그대가 자고 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하느님은 활동을 계속하신다.
우리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혀에 피조물의 악취가 묻었고 하느님 사랑의 소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과, 하느님이 하신 모든 일을 맛볼 것이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되고 그분이 하시는 일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동일하게 됨으로써 우리 모두는 그분의 외아들이 된다.
성서에 따르면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단지 아들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들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를 볼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을 본다고
생각하고 또 소를 사랑하듯이 그분을 사랑하려고 한다.
우리가 소를 사랑하는 이유는 소에게서 나오는 우유와 치즈 때문이다.
당신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소를 사랑하는 것이다.
외적 부(富)나 내적 위로를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는사람은 바로 이와 같다.
하느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대 마음 앞에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 진리를 가로막는 장벽일 뿐이다.
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가에 주목하라.
그것은 우리가 성자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그 누구와도 같지 않으신데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혹은 이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이사야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 누가 있겠으며 하느님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본성은 아무와도 비슷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하느님 자신과 같아지기 위하여 그분과 비슷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무 안에서 나를 보고 내 안에서 무를 보려고 할 때,
내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뿌리뽑아 떨쳐버릴 바로 그때,
나는 자유롭게 되어 적나라한 그대로의 영혼이 된다.
내가 하느님 안으로 옮겨가 그분과 동일하게 되려면,
다시 말해 실체와 본질과 본성이 그분과 동일하게 되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려면 먼저 유사함이라는 것을 몰아내야 한다.
성부께서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성자를 낳으시며 당신의 외아들로
그대를 낳으신다. 그러나 내가 아들이라면 나는 다른 어떤 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그분이 아들이신 것과 동일하게 아들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한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이 될 것이며,
내가 하느님의 아들(the Man)이라면 그에 맞게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성 요한이 말하듯이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3.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이것은(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느님을 낳은 것은) 성부께서 영원히 낳으신
그 외아들이 바로 우리라는 개념을 포함한다.
성부께서 모든 피조물을 낳을 때 그분은 나를 낳으셨다.
나는 성부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흘러 나왔다.
언젠가 나는, 성부는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은 성자를 낳고 있는데, 이를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성자를 낳기만 하신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과 함께 빛나신다.
성부께서 내 안에서 성자를 낳을 때 다름아닌 내가 바로 그 성자다.
우리는 사실 인성 안에서는 성자와 다르지만 하늘에서 우리는 바로 성자다. 또한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합법적 상속자들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이것을 잘 안다. '성부'라는 말은 바로 낳는 것, 자녀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자 안에서 자녀이며 성자 그 자체다.
4. 의로운 사람
에카르트는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은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나에게 계시와도 같았다.
옛 성인의 전기를 읽다 보면 멀리서 존경하거나 공경할 만하기는 하지만
집에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함께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 성인이 있다.
'거룩한' 사람은 어둡고 우울하며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는 것처럼 말을
잘 하지도 않고 결코 웃지 않으며 특출하여 홀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에카르트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초대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은 열성적이고 행복하며 하느님과 함께 웃는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비참해지고 두려워해야 한다면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이상한 하느님이다.
그는 마치 전체 요리를 먹듯이 여러 종교를 여기저기 조금씩 건드려 보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지식을 깊게 함으로써 그 종교와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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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 철학자가 관찰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친절한 동물이다.
5. 의로운 사람을 열성적이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 머무는지 살펴보자. 그들을 알아보는 표지 가운데 하나는 열성이다. 그들은 선행을 하는 데 미지근하지도 더디지도 않고 마지못해 하지도 않는다. 수원지(水源池)에서는 물이 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양이 언덕 밑바닥에 있는 물을 정상까지 끌어올려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수원지에서는 태양의 열기가 물을 따뜻하게 하고 흐르게 하지만 멀리 흘러갈수록 물은 차가워지고 순수하지 않게 된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 중에 있는 덕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그분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하느님을 맛보았기 때문이며, 한번 하느님을 맛본 영혼이 다른 무엇을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성인들이 그랬듯이 하느님을 맛본 영혼은 하느님이 아닌 것에 비위가 거슬리고 그것을 혐오스럽게 여긴다.
6. 의로운 사람은 자유롭고 강하다.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은 정의를 소유하며 정의와 일치하게 된다.
나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께도 피조물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롭다. 의롭게 될수록 자유롭게 되며 그만큼 그는 자유 자체가 된다. 자유와 내적 평온을 누리는 사람은 평화와 고요 안에서 하느님을
뵙는다. 그리고 소란과 동요 가운데서도 그 분을 뵐 수 있게 될 때
그는 완전한 평정에 이른다.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의에 사로잡히며 그는 정의 자체가 된다.
참으로 삼위일체로 변화된 영혼은 성부의 능력을 지니게 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지니게 된다.
정말로 의로운 사람은 덕 안에서 살고 덕을 행하는 사람이며 하느님 안에서나 피조물 안에서나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고,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사신다.
의로운(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 채워지고 정의로 변화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산다.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 안에서 태어나고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의인은 모든 덕 안에서 하느님은 탄생하고 기뻐하며,
그의 덕 뿐만 아니라 그가 덕으로써나 정의로써 행한 모든 행위를 기뻐하신다. 하느님은 이로 인해 기뻐 환호하신다.
그분의 근저에는 기뻐 춤추지 않는 것이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믿을 뿐이지만 깨달은 사람은 이것을 안다.
의로운 사람은 그가 하는 일에서 아무것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노예와 삯꾼만이 일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한다. 그대가 정의로 채워지고 정의로 변화된다면 일을 하면서 어떤 숨겨진 목적을 갖지 않을 것이다. 시간 안에서나 영원 안에서나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보상이나 행복도, 혹은 이것도 저것도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7. 네 이웃을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그대는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된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자신보다 덜 사랑한다면 그대는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될 때까지,
그리고 하느님이며 인간이신 그 한 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그대는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의로운 사람이며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말할 때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설교하여라"하고 권고하셨다. 피조물들의 절정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각자 받을 수 있는 만큼 당신 자신을 부어주고 계신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똑같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혈연이나 친분 때문에
더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은혜가 똑같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내가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선의를 가지고 있다. 비록 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청한다면 나는 그에게나 자신을
더 많이 줄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며 그들을 당신
존재로 채우신다.
우리 역시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모든 피조물에게 부어주어야 한다.
두 학자가 있었는데 그 중 한 학자가 선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선한 사람도 분명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나쁘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 쉽게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8. 의로운 사람은 침착하다
의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똑같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모두 마찬가지로 더함도 덜함도 없이 똑같이 받아들인다.
9. 이것을 이해한다면 에카르트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온전히 정의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정의롭지 않다면 조금도 하느님께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의에 너무나 충실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관심하며 지옥의 고통에도 천국의 즐거움에도 다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의 격심한 고통과, 지상에서 겪는 과거나 미래의 모든
고통이 정의에서 나온 결과라 하더라도 그들은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과 정의에 충실하다.
의인에게는 정의, 곧 균형에 반대되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더 괴로운 것은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어떤 것이 그대를 즐겁게도 하고 또 우울하게도 한다면 이는 그대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것이다.
한순간은 즐겁다가 마음이 안정을 잃으면 다음 순간에는 즐겁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정의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할 만큼 안정되어 있다.
그 무엇에도 화내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은 자신이 생명을 주는 곳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곳에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이 평범하고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그 실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정의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들은 내 말을 모두 이해할 것이다.
10. 의로운 사람은 학문적으로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자유로워지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과
열망을 통하여 지혜를 받고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
한 스승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무언가를 이해하고,
공식화되고 개념적인 지식에 도달하지만 학문과 이론을 넘어서 더 나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정신이 개념과 형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사람보다 하느님께 수만 배 더 가치가 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상을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들 안에 들어가 활동하실 수가 없다. 성 디오니시오가 말하듯이 그들이 심상에서 해방된다면 그들은 온갖 합리적 개념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출발점에서 이성을 초월한 신앙의 빛을 갖는다.
신앙의 출발점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며, 하느님 당신이 뜻하는 대로, 당신이 뜻하는 때에, 당신이 뜻하는 것을 행하기 위해 당신의 안식과 평화를 발견하는 곳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하실 수 있으니, 곧 신앙 안에서 그들을 당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의 삶과 방식은 그들처럼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추상적 지식과 순수한 이해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러한 진리와 복된 삶에, 이렇게 높고 완전한 정상에 이를 수 없다.
11. 의로운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는가
신심이 깊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그들의 이해력은 정확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든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성질을 분명하고 상세하게 파악하며 그것을 완전히 인식하고 참작한다.
둘째,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그것이 원칙에 맞는지를 본다.
셋째, 그들의 지성은 너무나 예민하여 어떤 영감을 받거나 아무리 희미한
계시를 받을 때라도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그릇된 영에서 오는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세 가지로 알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오롯한 의지이다.
그의 의지는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둘째는 분명한 이해력이다.
그의 영혼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다.
그 영혼은 조명을 받으면 공통된 근저에서 지식을 여러모로 심화시킨다.
셋째는 정신의 평화로움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표상은 그 영혼을 방해하지 못한다.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잃은 채로 있으며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행복은 자신과 만물이 헛됨을 아는 것, 하느님을, 오직 그분만을 아는 것, 하느님께서 뜻하고
택하시는 것만을 알고 다른 모든 의지와 선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하느님을, 오직 그분만을 아는 것, 하느님께서 뜻하고 택하시는 것만을 알고 다른 모든 의지와 선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성 바오로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하느님을 아는 것"에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알고 뜻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2. 덕행
순명. 청빈과 같은 덕을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덕을 실천해야 하고 때로 우리 자신을 시험하면서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사람들의 요청에 응하여 그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이용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덕을 행하는 것, 예를 들어 순명하거나 가난하게 되거나
사물을 포기하거나 그 밖의 어떤 방법으로 겸손하게 되고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더 나아가서 덕 자체에, 그 덕의 근원에 도달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덕행이 훌륭한 것이라거나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도 덕에 열성을 기울이고 자발적으로 덕있는 행동을 한다. 우리는 덕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덕을
사랑하기 때문에 덕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덕을 소유하게 된다.
이교 철학자는 덕 자체를 위한 덕만이 덕이라고 말한다.
칭찬이나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덕을 가지고 거래하는
셈이다. ...선한 사람은 칭찬이 아니라 칭찬받을 만하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 학자들은, 덕은 그 본성의 근저와 절정에 있어서 너무나도 순수하고
완전히 추상적이며 물질적인 사물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덕을 더럽히고
악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그 안에서 아무 일도 발생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덕의 본성은 그러한 것이다.
13. 의로운 사람은 이것저것 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한 가지를 행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는 언제나 한 가지 사물이어야 하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하려고 하는 것, 더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방법을 버리는 것은 불안정을 가져올 뿐이다. 내 말을 믿으라.
가능한 길 모두에 하느님은 좋은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다.
어떤 선도 다른 선과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존경할 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거나 그를 만날 경우 그의 방법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의 수고를 모두 헛되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의 방법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덕과 지향을 헐뜯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방법을 존중해야 하며,
다른 모든 방법을 결합시켜 그 모든 장점 중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방법의 전환은 형식만이 아니라 정신의 안정도 깨뜨린다.
그대가 한 가지 방법을 택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건전하고 선하며
하느님만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방법으로도 이룰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같은 길로 갈 수는 없다.
좋은 방법 한 가지를 선택하여 그것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좋은 방법을, 그것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이면서 선택한 방법 안으로 통합해야 한다.
오늘은 이 방법, 내일은 저 방법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무엇을 놓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므로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 역시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다.
14. 의로운 사람은 경쟁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 안에서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어떤 영혼도
알 수 없지만, 그분을 자신 안에 모신 영혼은 그것을 알 수 있다.
15. 행복
행복은 지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데서 온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천천히 자신을 죽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파괴한다.
행복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으며 우리는 자신의 뜻에 따라 행복을 택하거나 버리거나 한다.
시간과 시간의 사물은 우리를 번민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넘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께,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행복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도 우리의 행복을 기뻐하며 좋은 상황에 있든지 나쁜 상황에 있든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호감은 변할 수 있고 피상적이며 보답을 바란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특성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답을 받는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개개인이 지닌
성격적 특성보다 더 심오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에 도달함으로써,
우리 자신안에 있는 '태풍의 눈'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 안에도 동일한 본질이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들어 있음을 앎으로써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우리 본성 안에서 행복을 누린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겁거나 어둡지 않으며 가혹하거나 강압적이지도 않다.
하느님은 기뻐하며 웃으신다. 의로운 사람, 하느님을 발견하는 사람은 걱정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유로이 하느님과 함께 웃는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갈망한다. 철학자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은 존재하기를 갈망한다."
16. 행복은 지식과 지혜다
가장 중요한 개념과 영원한 행복의 핵심은 지식이다.
우리의 행복은 지식에, 하느님 자신인 최고선을 아는 데 달려 있다.
우리는 영혼 안에 하느님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듯이 하느님보다 내게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신다.
내 생명은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현존하시는 데 달려 있다.
그분은 돌맹이에도 통나무에도 마찬가지로 현존하시는데, 다만 그것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나무가 최고의 천사처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안다면 그 나무는 가장 높은 천사만큼이나 복될 것이다.
인간이 나무보다 더 행복한 이유는 하느님을, 그분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알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알면 알수록 더 행복해지고,
모르면 모를수록 더 불행해진다.
인간이 행복한 것은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고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자신과 가까이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며,
이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안다.
어느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참된 지식은 이 육신의 것이라 하더라도 본질상 너무나 즐거운 것이어서
피조물을 모두 합쳐도 순수한 인식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철학자에 따르면 인간의 최고 행복은 정신적으로 지혜를 사용하는 데 있다. 그리고 성부의 즐거움, 그분의 완전한 행복은 이러한 지적 행위,
곧 당신 성자를 낳는 데 있다. 그분은 이 탄생을 기뻐하셔서 당신의 모든 능력을 성자의 탄생과 본성에 쏟아부으신다.
따라서 자신 안에 있는 지성의 힘으로 성자를 얻은 영혼은 완전한 기쁨과
행복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린다.
17. 행복은 시간에 자유롭다
시간과 덧없음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언제나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시간의 충만이며, 그때 하느님의 성자께서 그대 안에 탄생하신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다.
시간을 넘어서 시간과 관계없이 기뻐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게 된다.
다른 곳에서 나는, 영혼 안에는 시간과 육체로 손상을 입지 않고
영에서 흘러나와 영 안에 남아 있는 완전한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 능력 안에서 언제나 젊은 하느님은 당신 자신의 온갖 기쁨과 영광 안에
꽃을 피우신다. 이 즐거움은 아무도 완전히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심원한 기쁨이다. 이 능력 안에서 영원하신 성부께서 쉼 없이 당신의 영원하신 성자를
낳으시기 때문이다. 이 성자는 성부의 아들로서 성부의 유일무이한 능력을 지닌 아들이다. 절대 군주로서 모든 현세 재물을 독차지 하고 있는 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지금까지 사멸할 어떤 인간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주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견뎠으며 하느님께서 그가 신적 권능을 누리는 존재임을 잠시 보여주셨다고 생각해 보라. 그의 기쁨은 너무나 열렬해서 모든 궁핍과 고통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느님은 그에게 천국을 이렇게 잠시 동안 맛보게 해주셨지만 그는 수난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 자신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이 능력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이 언제나 이 같은 능력 안에서 하느님께 결합되어 있다면 그는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첫 인간을 만드셨던 현재와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현재,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현재는 오직 현재만이 있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특히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떤 스승은 사랑이라 말하고,
다른 스승은 지식과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후자가 더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이 지식에나 사랑에 있지 않으며, 영혼 안에는 지식과
사랑이 흘러 나오는 원천 하나가 있으며, 영혼의 다른 능력과 마찬가지로
이 원천 자체는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여기에는 선후도 없고 장차 올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며
얻거나 잃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원하는 것이며, 그저 그 자체로서 하느님처럼 스스로 즐길 뿐이다.
우리의 완성과 행복은 피조물. 시간. 상태를 초월하여
원인이 없는 원인 안으로 들어가는데 달려 있다.
18.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열심히 듣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하느님의 빛을 그대로 따른다.
존재를 가지고 있으며 간절히 바랄 만하고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 다시 말해서 분열되지 않는 영혼이, 그 존재의 근저 안에 처음 싹터
나오는 곳에서 그 영혼의 완전함과 절정 속에 계시되면서, 그리고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품고 있는 곳에서 모든 것을 품으면서 그 분열되지 않는 영혼과 하느님 안에 동시에 그리고 온전히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걱정을 버리고 영원한 기쁨이 그대의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아기가 태어난다. 그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날 때 친구들과 아버지의 모습은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내 마음이 그들에 의해 움직인다면 우연히 아기가 곧 탄생할지는 몰라도
내 안에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과 천사들은 선한 사람의 모든 행위를 그와 같은 기쁨이 다시 없을 정도로 매우 기뻐한다. 그대 안에서 이 아기가 태어날 때 그대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선행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 기쁨은 끝없이 지속된다.
그대가 자신의 자아와 피조물에서 떠난다면 그 정도에 따라 그대 영혼의
불꽃 안에서 일치와 행복을 얻게 된다.
영혼의 불꽃은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19. 하느님의 행복
그는 "그의 상급은 주님과 함께 있다."고 말한다.
그가 '함께'라고 말한 의미는 의로운 사람의 상급은 하느님 자신이 계신 곳에 있다는 뜻이다. 의로운 사람의 행복과 하느님의 행복은 하나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복을 누리시는 곳에서만 지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즐기신다.
스스로 즐기는 기쁨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즐기신다.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 안에서만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어디서나 참되고 한결같은 위로를 발견한다.
20. 우리 형제를 사랑함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모든 피조물이 사랑하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그리스도인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며 그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바라고 다른 이를 자신과 같이 대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어려울 때나 영예로울 때나 마치
천국에 있듯이 행복해지며 자신이 받은 축복 이상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명하시듯이 같은 그리스도인을 우리자신처럼 사랑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때는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맺는 열매에 주목해 보라.
그는 하느님과 함께 모든 피조물을 낳고 있으며
그분과 하나가 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서 큰 행복을 누린다.
현명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위에 당신의 그물을 펼쳐놓으셨고
우리가 보려고만 하면 어떤 피조물 안에서도 그분을 볼 수 있으며
알 수 있다고 말한다.
21. 하느님은 웃고 즐기신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서 사신다.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 안에서 태어나고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의인의 모든 덕 안에서 하느님은 탄생하고 기뻐하며,
그의 덕뿐만 아니라 그가 덕과 정의로 행한 모든 행위를 기뻐하신다.
하느님은 기뻐 환호하신다. 그분의 근저에는 기뻐 춤추지 않는 것이 없다.
하느님이 영혼에게 웃으시고 영혼이 하느님께 웃는다면
영혼은 위격을 낳는다. 비유로 말하자면 성부께서는 아들을 향하여 웃으시고 아들은 다시 아버지를 향해 웃으며 이 웃음은 호감을, 호감은 기쁨을 , 기쁨은 사랑을, 사랑은 위격을, 위격은 성령을 낳는다.
진실로 하느님께 맹세코 가장 작은 선행, 가장 작은 선한 의지, 가장 작은
선한 갈망에도 천국의 모든 성인과 천사들은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모아도 비길 수 없을 만큼 크게 기뻐한다. 더 높은 성인일수록 더욱 기뻐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에 비하면 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하느님은 이 선행에 대해 웃고 즐거워하는 반면, 하느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모든 행위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재나 먼지와 같다.
그러므로 "하늘아, 기뻐하여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셨다."라고
외친다.
최고선의 직관, 그것이 하느님이다! 최고선의 직관을 소유하는 것은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진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고유의 분명한 개념을 가지기를, 당신 스스로 즐거워하기를 원하신다. 신성 안에서 이를 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당신 본성이
하는 놀이를 바라보시는 성부이다. 그 놀이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다, 그 놀이는 성부의 본성 안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놀이와 이 놀이를 보는 관객은 동일하다. 성부께서 당신 자신의 본성을 보는 눈길이 곧 그 아들이다. 성부는 당신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성부의 영원한 본질의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당신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신다. 그분의 고유한 본성이 다시 보내는 눈길이 바로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를 그분의 본성 안에서 바라보신다.
성자는 성부와 본성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시는 데서부터 성자의 이 영원한 놀이가 시작된다.
이 놀이는 창조 이전에 영원히 있었던 것이다. 지혜서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창조가 있기 전에 영원한 현재 안에서 성부께서 당신의 영원한 고요 가운데 계실 때 지혜는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성자는 성부 앞에서, 성부는 성자 앞에서 영원히 뛰놀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가 함께하는 놀이가 성령이며,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서 놀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서 논다.
놀이와 놀이를 하는 이는 동일하다.
22. 불의한 사람
에카르트는
'침체되고 냉담하며 무미건조한'사람은 불의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끌지도 못하고 따분하게 하며
피하게 만든다.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누구에게 가야 하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깨달은 한 사람이 책의 내용만을 깨달은 천 명보다 낫다.
그러나 아무도 하느님 없이는 삶에 대한 어떤 것도 깨달을 수 없다.
내가 만일 학문의 스승을 찾는다면 파리로, 고등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삶의 깊이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들은 나에게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나는 본성과 내적 존재가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람에게 가야 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곳은 없다. 그에게서 나는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왜 죽은 뼈들 사이에서 찾고 있는가?
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가?"
23. 불의한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는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불의한 사람) 침체되고 냉담하며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다. 불의한 사람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환상의 노예이다.
그는 이 세상과 피조물을 섬기면서 죄에 예속되어 있다.
영혼이 외부 사물들을 찾아 밖으로 향한다면 그 영혼은 죽게 될 것이고
하느님도 그 영혼 안에서 살지 못하실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가장 교묘한 유혹은
외적 일들에 지나치게 전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4. 이유
우리가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면 그것은 피조물이기 때문이기보다는
우리의 소망이 약하기 때문이다. 드높은 곳에 뜻을 두고 높아지도록 하라.
당신은 결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지옥에서 불타는 것은 무엇인가?
학자들은 모두 자기 의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는 지옥에서 불타는 것은 결핍이라고 주장한다. 비유로 말해 보겠다. 내가 불타는 석탄을 손 위에 놓았다고 해보자. 이때 석탄이 나를 태우고 있다고 말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태우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해 본다면 그것은 결핍이다.
석탄은 그 안에서 내 손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는 것이다. 잘 살펴보라. 바로 이 결핍이 나를 타게 만든다.
내 손이 석탄과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 손은 똑같이 불타는 본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하느님을 뵙는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에 속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결핍이 자기 의지나 어떤 불보다도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죄와 악, 또는 어둠으로 가득찬 죄인은 이빛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한다. 빛이 들어오는 길이 어리석음과 어둠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은 마치 하느님과 피조물처럼 양립할 수 없다.
하느님이 들어오면 피조물은 나간다.
자신의 근저에서 너무 오랫동안 계속해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경우가
아니고서는 어떤 사람도 길을 잃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많은 사람들이 빛과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없는 곳에서, 먼 곳에 떨어져서 찾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결국 너무 멀리 가서 결코 돌아오지 못하고 길을 찾지 못한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발견하지도 못한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근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좋은 선물을 받으면서도 처녀처럼 소심하기 때문에
부인들처럼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를 낳지 못한다.
그러면 선물들은 변질되고 사라지며 인간은 그 선물들로 인해 더 나아지거나 행복해지지 못한다. 이 경우에 그 동정성은 쓸모가 없다.
동정성에 부인의 완전한 풍요로움이 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로운 일이다. 하느님이 정신에게 아무리 자연스럽고 적합하다
하더라도, 정신이 피조물들과 제휴하여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져 버리면
정신은 약해지고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며 좋은 지향에 중대한 결함을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잃어버린 근저를 되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만약 되찾게 되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방어 태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지성이 죽어버리면 통제되지 않은 악이 이를 정복하게 된다.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것은 나쁘지만
하느님에게서 분리된 영혼은 훨씬 더 나쁘다.
25. 덕을 진리로 잘못 생각하는 것
우리 주님의 가난과 겸손을 묵상하면서도 그것을 얻고자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은 쓸모없게 된다. 또한 그것을 갈망하면서도 어떻게 그러한 덕을 얻을 수 있는지 부지런히 찾지 않는다면 그 갈망 역시 쓸모없게 된다.
우리는 기꺼이 겸손하게 되고자 하지만 무시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무시와 거부를 당하는 것은 덕의 속성이다. 우리는 가난하게 되고자 하지만 궁핍을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내하지만 역경과 불쾌한 것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 모든 덕에 대해서 이와 같다.
(성전에서) 사고 팔던 사람들은 누구였고 지금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덕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지만 그 상인들이 누구였고 또 오늘날에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 주님께서 흩어버리고 쫓아내신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지적할 수 있다. 그분은 지금도 이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성전 안에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아, 대죄를 피하고 고결하게 되기를 원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단식하고 밤새워 기도와 같은 선행을 하고 훌륭한 일을 하지만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시기를 바라고 무언가 해주시기 바라면서 행하는 사람들, 되돌려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장사꾼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한 가지를 주면서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하여 그들은 우리 주님과 거래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이렇게 주님과 거래하는 사람은 딱한 바보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그들을 흩으시고
성전에서 내쫓으신다. 빛과 어둠은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6.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을 해야한다'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릇된 이유는 자기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어떤 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잃는다면 그것도 자신에게 지는 것이므로 그릇된 것이다. 굴욕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의견을 구하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께서 무엇을 보내시든지 평온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르다.
악마도 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악마는 지나친 덕을 행하도록 충동질 한다. 지나치게 단식하고 밤을 새우며 무릎을 꿇고 너무 많이 울게 만든다. 그리고 악마의 권고는 명령에 가깝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하지 않으면 너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너는 선하거나 완전하지 못하다."는 식이다. 지나치고 조절되지 않은, 분명한 목적이 없는 덕행은 악마의 자극이며, 이에 대하여 영혼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 말에서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한다.
예를 들어 고행과 육체적 극기로 유명하고 존경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의 진리는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러하다. 그 사람은 겉보기에는 거룩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어리석으며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 알지 못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전혀 따르지 않고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새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나쁘지 않다. 그들의 의지는 선하며 칭찬할 만 하다. 하느님은 당신 자비로 그들을 지켜 주신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에카르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버려야 진정한 가난이라고 말한다.)
더 나은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을 매우 존경하지만 이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뿐이다.
27. 자신을 속임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방식대로 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나쁜 것이며 거기에는 죄가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고 그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 하지만 아플 때에는 하느님께서 낫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조금 낫다.
이 사람들이 완전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을 하느님의 뜻이 일치시키기 보다 하느님을 자신의 뜻에 일치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마치 사소한 물건에 애착을 갖듯이
자아를 거머쥐고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많이 진보했다고,
하느님과 하나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통탄할 일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의견과 의지로 가득차 있다. 아무것도 아니 것, 곧 무를 찾는 사람이 무밖에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평할 권리가 없다고 나는 때때로 말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추구하고 바라는 것은 결국 무를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며,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결국 무를 얻으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것을 좋게 여기고 좋은 것을 나쁘게 여긴다.
28. 지옥
참되게 진보하려면 그릇된 방법을 고쳐야 하는데, 많은 일을 하고 단식하고 많이 밤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들의 그릇된 방법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은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악마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라고
나는 여러차례 말했다.
피조물들은 모두 예외 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저주를 받아 지옥에
있는 이들도 어느 정도는 그분의 존재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없이도 행복하다고 여긴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느님 없이 계속해서 지옥의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이다.
지옥벌을 받아야 한다.
지옥의 고통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영혼에게 다시 생명을 주고자 하는
하느님의 노력을 영혼이 계속해서 벗어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지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지옥이 무엇인지 말하겠다.
그것은 단지 어떤 상태다. 여기에서 그대의 상태는 영원하다.
이것이 지옥이다. 예를 들어보자.
붙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은 도둑을 생각해 보라.
다른 이들이 행복한 것을 보는 그의 마음 상태를 그려보라.
우리도 그렇게 느끼거나, 또는 그보다 더 나쁘게 느낀다.
하느님과 그 곁에 함께 있는 이들을 지옥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도 그렇다.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29. 죄
죄로 기우는 성향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죄에 동의하는 것,
(예를 들어) 분노에 지고 마는 것은 죄다.
영원한 빛을 받은 사람도 불완전에 떨어질 수 있고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쉽게 사소한 죄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성향이 생기는가?"
그것은 한 가지 단순한 것에 몰두하는데서 온다.
수많은 표상들이 영혼을 어지럽히고 여러 가지 거짓으로 영혼을 뒤흔든다. 그 영혼은 전에 단일한 것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다양성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영혼이 그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영혼은 마치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노력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이 영원한 빛을 받았다는 표지다.
그러나 영혼이 깨달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한 빛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영원한 빛을 받고도 사람들이 쉽게 죄를 짓는 이유를 알것이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뒤에도 죄를 지었다.
30. 용서
감히 말하건대 그대가 돌연히 결정적으로 모든 죄를 정말로 꺼리고
혐오하면서 그 죄에서 얼굴을 돌리고 단호하게 하느님께 돌아선다면,
비록 아담의 시대로부터 있었던 모든 죄와 앞으로 있을 모든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모두를 완전히 용서받고 그 벌도 용서받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께로 돌아선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면전으로 들어올려질 것이다.
죄를 짓고서 뉘우쳤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시간 안에서나 영원 안에서나,
죽을 죄에 대해서나 가벼운 죄에 대해서나,
어떤 죄에 대해서나 아무도 죄에 동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잘 아는 사람은, 신뢰할 수 있고 사랑이 많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죄로부터 하느님의 생명으로 옮겨주셨고 또한 당신의
원수였던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보다도 더 훌륭하다 - 잊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
편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최상의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며,
강하고 높은 목적으로 인간을 불타게 하고 자신의 요구를 버리게 하는
놀라운 일을 인간 안에 이룬다.
일단 하느님의 뜻에 일치된 사람은 자신이 떨어졌던 그 죄가 없었더라면
하고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경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죄는 단지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에 그치지 않고 죄로 인하여
낮아지고 비천해진 자신을 더 큰 사랑에 맡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죄를 허락하신 이유는 오직 그대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인간이 죄를 모두 떨쳐버리고 나서 죄에 완전히 등을 돌리면 하느님은 마치 그가 죄에 떨어진 일이 없었던 것처럼 대해 주신다.
그분은 한순간도 죄를 염두에 두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온 인류가 지은 것만큼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 죄를 헤아리지 않으며 그를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대하실 것이다. 그가 준비되어 있다면 하느님은 이전에 그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은 현재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그대가 지금 어떠한지에 따라 그대를 받아들이신다.
(그대가 과거에 어떠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떠한지만이 중요하다.
죄가 하느님께 끼쳤던 모든 잘못과 해악을 그분은 기꺼이 인내하며 이미
여러 해 동안 참아오셨다. 그것은 죽을 인간이 당신의 사랑을 생생하게
알도록 하기 위함이며, 인간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더욱 뜨거운 신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죄에서 나오는 일반적
반응이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죄의 공격을 기꺼이 견디며 때로는
그 죄를 묵인하고, 대개는 높은 목적에 이르도록 마련한 사람들에게
그 죄를 허락하신다.
보라, 주님의 제자들보다 주님께 더 소중하고 친밀한 사람들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모두 대죄에 떨어졌다. 구약에서나 장차 하느님께
가장 소중하게 될 사람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도 잘못을 먼저 범하지 않고서 높은 완덕에 이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주님의 뜻은 우리가 당신의 크신 자비를 알고 더욱 큰 신심과 겸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회개하여 쇄신됨으로써 사랑은 활기를 되찾고 빨리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나쁘게 생각할수록 하느님께서는 더 기꺼이 그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며 영혼 안으로 들어와 그 죄를 몰아내고자 하신다.
누구나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없애려고 노력하듯이 죄가 많고 클수록
하느님께서는 그 죄를 더욱 싫어하시며 더 즐거이 그것을 용서하신다.
이 거룩한 회개가 하느님께 이르게 되면 내가 눈을 깜박하기도 전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통회를 통하여 모든 죄가 사라진다.
아무도 자기의 약함이나 잘못이나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어떤 큰 결함이 그대를
방황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하느님께서 그대 곁에 계시다고 여겨야 한다. 하느님을 멀리 두는 것은
지극히 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멀리 갔다 가까이 갔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가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곁에 가까이 서 계신다.
그분이 비록 바로 곁에 계실 수 없으시더라도
문밖으로 멀리 가시지 않고 가까이에 계신다.
31.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정의는 준엄한 것이어서 모든 이들을 두려워 떨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라.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다음에는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라고 말하라 가르치셨다.
성 요한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숲에 있는 짐승에 비유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이에 덧붙여 하느님의 정의는 가혹한 것이어서 어떤 사람이 지금 영생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이 한 선행을 모두 한다 하더라도
그가 죽을 죄 가운데 한가지를 지었다면 - 그 첫째는 교만이고,
둘째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태만한 것이며, 셋째는 미움, 넷째는 분노,
다섯째는 탐욕, 여섯째는 탐식, 일곱째는 부정함이다. 이것이 칠죄종이다 - 그는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이 그를 위하여 전구한다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성부께 탄원한다 해도 그의 영혼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 가지 죄를 짓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천 가지 죄를 짓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낫다.
전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사실 그분은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심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각자 자신의 심판관이 될 것이며
그때 나타나는 저마다의 상태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육신이 영혼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부활하지는 않을 것이다.
육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가 한 존재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하느님 안에서 시간을 보냈던 영혼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존재가 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 영원히 그들의 존재.육신.영혼이 되실 것이다.
피조물에게 시간을 낭비했던 악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상태는 지속될 것이며 이렇게 영원히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벗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상태를 지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도 하느님으로터 존재를 받았으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그들 안에 계신다.
보라,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하느님 안에 있지만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주인의 명예를 탐내고 그 친구들을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며 주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그 주인은 그가 변화되기를
바라며 늘 친절을 베풀어 오다가 결국 그가 개심하기를 거부하자 그의 목숨을 빼앗기로 결정한 것과 같다. 주인은 정의를 지키며 그를 죽이지 않고 참고 있다가, 마침내 그의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 벌한다. 먼저 손과 발을 묶은 다음 그를 깊숙한 성의 지하 감옥, 두꺼비와 파충류가 우글거리는 더러운 웅덩이에 던진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불려 나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당한다. 사람들은 그가 공공연히 당하는 수치를 보고, 그는 그들의 기쁨을 본다. 그래서 그의 고통은 그만큼 더 큰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를 모욕하며
상상할 수 없는 수치를 준다. ...그런데 어쩌면 그 사람은 궁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안의 넓은 방에 왕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머물기
때문에 그 성안의 왕의 궁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조건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천상의 삶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그 슬픔이 영원히 계속됨을 알라.
이 말을 듣고도 감히 다시 죄를 지을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연옥은 본래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연옥에 대해 올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잠시도 죄에 머무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라. 죄는 결핍에서 생겨난다.
영혼 안에서는 결핍을 처음부터 뿌리뽑아야 한다.
그대 안에 결핍이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울며 탄식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 더 이상 울며 통곡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핍이 없어야 한다. 인간은 나무나 돌처럼 불완전하거나 무가치하지 않다. 이 결핍이 좋은 것이 되고 또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분처럼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