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마스터와 가르침 (1209)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3) 너를 돌아보라, 몸을 믿는가 성령을 믿는가 (33) 너를 돌아보라, 몸을 믿는가 성령을 믿는가 성서조선 모임을 발칵 뒤집은, 류영모 요한복음 강의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영화 '부활'(2016)의 한 장면.] 수전노보다 더 심한 어른 류영모는 김교신의 성서조선 집필 부탁을 거절했고, 함께 모임에 참여해서도 별로 말이 없었다. 우치무라의 가르침으로 기독교의 관(觀)을 세운 김교신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정통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기에, '괜히 충돌하여 남의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에서 류영모는 논쟁적일 수 있는 대목에서 입을 다문 것이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김교신이 소극적인 류영모 스승에 대해 서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1935년 2월 3일 성서조..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2) 위대한 영혼의 비밀 ; 다석사상은 씨알사상이다 (32) 위대한 영혼의 비밀 ; 다석사상은 씨알사상이다 나는 비정통이다…일제 말기에도 꿋꿋했던 스승 [다석 류영모] 씨알사상이란 무엇인가 '씨알'이란 개념을 창안한 사람은 류영모다. 스승에게서 배운 '씨알사상'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사회적 정의 실현으로 실천적 확장을 한 사람은 함석헌이었다. 씨알은 원래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기도 하다. 새끼를 부화하는 종란(種卵)을 뜻하는 낱말이며, 씨나 열매 · 곡식처럼 알의 형태로 된 것의 크기(굵기)를 말할 때도 쓰였다. 류영모는 이런 의미를 유지하되, 좀 더 철학적인 함의를 포괄하도록 했다. 씨알은 씨와 알이 결합된 말이다. 씨는 식물의 생명을 품고 있는 작고 단단한 물질이다. 씨앗..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1) 내 마음 속에 얼나가 와 있다, 염재신재(念在神在) (31) 내 마음 속에 얼나가 와 있다, 염재신재(念在神在) 스쳐간 이승만과 깨어난 김흥호…이 땅에 '영성의 國父(국부)'가 있다면 이승만과 류영모의 만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어느 날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이 YMCA 연경반 금요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류영모의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승만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그가 YMCA학관의 교사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자였던 현동완은 사제(師弟)의 인연으로 이승만과 일생 동안 가까이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동완의 능력을 인정하여 장관직(농림부, 보사부)을 두 번 추천한 적도 있었다. [이승만 전대통령] 현동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YMCA의 인..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0) 종교는 셀프다, 직접 신을 만나라 (30) 종교는 셀프다, 직접 신을 만나라 35년 '영성의 스승' 류영모와, 그를 모신 현동완 오른쪽부터 함석헌, 김흥호, 류영모, 현동완, 방수원.[사진=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이 땅에서 학력과 학벌은 한 인간의 평생능력을 보장하거나 해명하는 놀라운 증거능력을 지닌다. 이 뿌리 깊은 관행이 일정하게 한 사람의 이력을 쉽고도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는 효율을 제공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외국도 비슷한 현상들이 있지만, 유독 견고한 선입견이 형성되어 학교과정 졸업 이후의 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는 사회적 체계로는 이 나라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다석 류영모는 예수와 같은 메시아를 자처하지도 않았거니와 스스로 개창한 교..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9) 교회에서 무당 노릇을 하지마라 (29) 교회에서 무당 노릇을 하지마라 "예수 믿는다 하기가 부끄럽다" 류영모의 '이단'론 [다석 류영모] 기독교 자체가 원래 유대교의 '이단'이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 사태 속에서, 뜻밖에 전염의 숙주 역할을 하게 된 종교집회가 논란이 되면서 '이단(異端)'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단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단의 영어 표현인 헤러시(heresy)는 헬라어인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에서 온 말이다. 원래는 선택이나 의견 혹은 어떤 집단 속의 분파(分派)를 뜻하는 말이었다. 종교적 용어로 쓰이면서 교회 내에서의 편당(偏黨)을 가리키거나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분파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또 다른 '이단'이란 말로 하이레티..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8) 나는 하루살이다 (28) 나는 하루살이다 지금·여기·나, 어떻게 살 것인가…30000개의 하루를 끝날처럼 살라일년살이와 하루살이의 차이 하루는 일주일이나 한달, 혹은 1년과는 다르다. 하루는 해가 돋는 새벽과 아침이 있고, 해가 중천에 있는 한낮이 있으며, 해가 지는 저녁과 해가 사라진 밤이 있다. 하루를 인식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다. 해의 이동 그리고 낮과 밤의 순환이 뚜렷이 관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인위적으로 나눠진 단위에 가깝다. 월요일이 달과 관련 있는 날도 아니고, 일요일이 해가 특별해지는 날도 아니다. 인간의 사회 활동 속에서 일주일이란 기간의 구분은 중요하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하늘만 보고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7) 구원받겠다고 믿는 건 참종교가 아니다 (27) 구원받겠다고 믿는 건 참종교가 아니다 서른 즈음에 믿음의 역사를 이뤘다 영화 '예수 그리스도(The King of Kings, 1927년작)'의 한 장면 서른 즈음에 믿음의 대역사가 이뤄졌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about thirty) 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성서기록을 바탕으로 따져보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때가 32세쯤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인류가 경험한 영적인 신념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강력한 믿음을 수립한 이가 30대 초반이었으며, 그분이 이룩해놓은 역사(役事)가 인류의 신앙을 2000년 동안 이끌어온 큰길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6) 가치와 믿음의 '혼란시대', 류영모 같은 큰 스승이 있는가 (26) 가치와 믿음의 '혼란시대', 류영모 같은 큰 스승이 있는가 '부활 오산학교'의 신임 교장과 함석헌 학생 "3·1운동은 이승훈의 작품이었다" [남강 이승훈.]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의 전기를 쓴 오병학은 이렇게 말했다.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3·1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느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이승훈은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서울과 선천 · 평양을 다니며 함태영 · 박희도 · 이갑성을 포섭했고, 최린과 연락을 취하며 천도..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5) 참 종교는 이래야 한다, 3.1운동을 이끈 그들처럼 (25) 참 종교는 이래야 한다, 3.1운동을 이끈 그들처럼 3·1운동은 겨레의 '성령'운동이었다 [다석 류영모] 3·1운동은 겨레의 성령이 통한 운동이었다 류영모는 3·1운동에 대해 뜻밖의 말을 한다. "3·1운동은 사람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聖靈)의 운동이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겨레가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위대한 거사였는데, 사람의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첫째, 거기엔 하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 류영모의 통찰이었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민족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은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닌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되..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4) 나는 공자보다 뛰어난 성인을 보았다 (24) 나는 공자보다 뛰어난 성인을 보았다 새마을운동 기획자 류달영이 추앙한 다석 [다석 류영모] 간디, 이순신, 그리고 다석··· 시대의 인물 "인도가 30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피해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마하트마 간디의 탄생으로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36년 동안 일제(日帝)의 식민지가 되었던 손해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류영모의 탄생으로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순신이란 인물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인물은 그 시대의 소산입니다. 나라에는 참된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류영모 한 사람의 탄생이 일제 36년 동안 온 겨레가 겪은 고통의 값만큼 크고 귀하다(이 말은 결코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3) 몸뚱이를 바르게 써라, 그래야 애국도 할 수 있다 (23) 몸뚱이를 바르게 써라, 그래야 애국도 할 수 있다 이마에 땀 흘리고 살아라 23세 류영모, 문득 유학을 포기한 까닭 1913년 류영모가 도쿄 유학 중에 학업의 뜻을 접고 귀국한 이유에 대해선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그 이후의 행적으로 그 마음을 살필 뿐이다. 그는 세상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성취가 있으며, 그것에 생을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 그의 선택을 압축하고 있는 말이 아닐까. 류영모의 생을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나아간 거룩한 궤적이라고 말할 때, 23세 때의 대전환이 하나의 모멘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적인 선구자인..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2) 오직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 (22) 오직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 최남선이 신음소리를 냈다면, 나는 곡소리를 냈다 [다석 류영모] 세상의 명망이란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때 걸출한 신학자 종교인이었던 김교신은 "1910년대 당시 뭇사람들이 세 사람을 가리켜 하늘이 낸 삼천재(三天才)라 불렀다"고 말했다. 최남선과 류영모, 그리고 이광수가 그 세 사람이다. 최남선과 류영모는 1890년생으로 동갑이었고, 이광수는 두 살 아래인 1892년생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최남선과 이광수의 이름은 후인들의 기억 속에 크고 깊이 남아 있지만, 류영모는 그에 비하여 세상의 명망에서 벗어난 이름에 가깝다. 류영모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20대 시절의 민족지도자이자 시대선구자였던 최남선과 이광수는 그러..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1) 아버지를 불러보라 (21) 아버지를 불러보라 신랑 류영모, 첫날밤 실종 사건 [다석 류영모와 부인 김효정.] 신부를 놔두고, 목포행 열차를 타다 혼례식을 올린 류영모는 그 길로 호남선 목포행 열차를 타고 목포에 있는 처가로 향하였다. 신부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는 감히 신방에 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신부는 신랑이 신방에 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도록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부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신랑이 행방불명이 된 셈 치고는 집안이 너무 잠잠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장가든 날 신부보다 더 중요한지 궁금하였다. 신식 혼례를 올렸으니 신랑이 풀어 주어야 하는 족두리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0) 사랑 없는 시대, 결혼이란 무엇인가 (20) 사랑 없는 시대, 결혼이란 무엇인가 "남녀는 최선 다하라" 주례사서 성서 읽은, 류영모-김효정 결혼식 [다석 류영모와 김효정 부부의 한때.] 종교는 저마다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경기침체와 고령화, 급격한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 등 총체적 사회변동의 멀미일까. 사람들은 이전에 지니고 있던 '정신줄'을 놓은 것 같다. 정신적 가치와 목표를 상실한 채 일상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과 우울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거의 자부심도 없고 현재의 자의식도 없고 미래의 자신감도 없다. 청년세대는 사회 진입이 힘겨워지면서, 힘차게 꿈을 펼쳐야 할 시점에 급습하는 피로감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9) 그분은 오직 '사랑'을 말했을 뿐이었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9) 그분은 오직 '사랑'을 말했을 뿐이었다 다석 류영모, 톨스토이, 우치무라와 종교 본질에 대한 입장들 [우치무라 간조] 임종 때도 일본 융성을 말한 우치무라 우치무라 간조는 70세인 1930년에 눈을 감으며 "인류의 행복과 일본국의 융성과 우주의 완성을 기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와 일본을 늘 함께 생각했던 애국적인 신념을 드러낸 유언이었다. 그가 일본을 비판할 때도, 거기엔 깊은 애국심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그가 남긴 사상인 '무교회주의'는 평생 투쟁적으로 살았던 신앙적 삶의 기반 같은 것이었다. 또한 세상에 남겨 놓은 결실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무교회주의는 나의 신앙이다.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8) 사무라이의 아들, 그는 왜 불경죄에 휘말렸는가 byunsdd71074un 2021. 3. 15. 10:17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8) 사무라이의 아들, 그는 왜 불경죄에 휘말렸는가 류영모와 우치무라의 길 [다석 류영모] 30년 시차로 찾아온 일본과 조선의 개방시대 우치무라는 1861년생이며, 류영모는 1890년생으로 두 사람은 29살 차이다. 우치무라와 류영모의 생은 일본과 한국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깊은 고뇌를 전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간 약 30년의 갭은 절묘하게도 서구에 의해 '강제 개방'을 맞는 두 나라의 충격적 경험이 시간차로 진행되는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치무라가 태어나던 무렵은 외풍이 살벌한 때였다. 미국..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7) 위대한 생각을 깨운 놀라운 그들이 있었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7) 위대한 생각을 깨운 놀라운 그들이 있었다 김정식 · 조만식 · 우치무라, 일본 유학 시절의 인연 [다석 류영모] 오산학교를 나온 뒤, 일본 동경물리학교로 1912년 오산학교를 나온 22세의 류영모는 길 위에 서서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늦가을 오후 교사로 2년을 근무했던 교정엔 마른 잎들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서슴없이 제 나무를 버린 저 잎들은 다시 시작될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거름이 되리라. 그에게 지난 2년은 다양한 동서양 학문을 접하는 기간이기도 했지만 이승훈, 여준, 이광수, 안창호, 신채호, 윤기섭 등 당대의 지식인-교육자-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열정과 지식과 신념에 감화를 받던..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6) 삶은 물음이고, 죽음은 깨달음이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https://www.ajunews.com/view/20200128145947360 (16) 삶은 물음이고, 죽음은 깨달음이다 동생을 잃은 21세 청년은 물었다, 살려고 태어난 인간은 왜 죽는가 오산학교 '톨스토이 신앙' 탄압사건 그 추도식(1910년 11월 7일) 이후 류영모는 톨스토이 사상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오산학교에서는 '톨스토이 신앙탄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10년 12월 학교설립자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가 된 뒤 평양신학교장이자 선교사인 로버트와 가까워졌다. 그간 교장 역할을 하던 여준이 만주로 떠나자 로버트 선교사에게 교장을 맡긴다. 이듬해 2월엔 이승훈은 안명근 사건으로 ..
정역원문(正易原文) 大易書(대역서) 聖哉 易之爲易 易者曆也 無曆無聖 無聖無易 (성재 역지위역 역자력야 무력무성 무성무역) 是故 初初之易 來來之易 所以作也 (시고 초초지역 래래지역 소이작야) 夫子親筆吾己藏 道通天地無形外 (부자친필오기장 도통천지무형외) 伏羲粗畫文王巧 天地傾危二千八百年 (복희조획문왕교 천지경위2800년) 嗚呼聖哉 夫子之聖乎 知天之聖 聖也 樂天之聖 聖也 (오호성재 부자지성호 지천지성 성야 락천지성 성야) 親天之聖 其惟夫子之聖乎 (친천지성 기유부자지성호) 洞觀天地無形之景 一夫能之 方達天地有形之理 夫子先之 (통관천지무형지경 일부능지 방달천지유형지리 부자선지) 嗚呼聖哉 夫子之聖乎 文學宗長 孔丘是也 治政宗長 孟軻是也 (오호성재 부자지성호 문학종장 공구시야 치정종장 맹가시야) 嗚呼 兩夫子 萬古聖人也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5)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https://www.ajunews.com/view/20200120100519455 (15)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여준이 전해준 노장과 불경, 신채호가 보여준 민족주체성, 톨스토이가 건네준 본질적 기독교 류영모에게 여준이 다가왔다는 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여준.] 그랬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류영모에게 여준(呂準·1862~1932)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1920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한 류영모에게 여준이란 존재가 다가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