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마스터와 가르침 (1209)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그분은 제 소리를 냈던 사람입니다" 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 2021-01-13 19:14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① 윤정현 신부 윤정현 신부는 인터뷰에서 "다석은 동양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회통했던 큰 스승"이라고 말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지구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근본주의 신앙으로 인한 전쟁과 살육이 그치지 않는다. 한국같은 다원주의 종교국가에서도 종교간 갈등이 심한 편이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탈(脫)종교 현상이 번지고, 다른 쪽에서는 근본주의 종교가 세계 평화를 깨트린다.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 전래의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회통(會通)..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70) 없음의 신, 죽음의 맛 (70) 없음의 신, 죽음의 맛 류영모, 석가의 공(空)과 '육신 부정'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다 [다석 류영모] 자신의 몸을 만져보라. 살이 있고 뼈가 있고 체온이 있고 굴곡이 있다. 손과 발이 움직이고 살과 주름이 형상과 동작을 이룬다. 돌아보면, 태어나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히 몸의 형상과 상태가 바뀌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몸'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몸이야 말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몸은 무엇인가 과학적으로 인간의 몸을 분석해 구성요소를 보면 이렇다. 물이 2말 정도이고 지방질은 세숫비누 7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연(鉛)은 9자루 연필의 심을 만들 수 있고, 석회질은 방 한 칸을 바를 수 있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9) "나는 하느님 빽이 있다" 공자가 외친 까닭 (69) "나는 하느님 빽이 있다" 공자가 외친 까닭 류영모의 '중용(中庸)신학', 유학 속에 숨은 '얼나'를 발견하다 하늘이 날 보냈는데 사람들이 어쩌겠는가 류영모는 20세 때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갔다. 여기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당 여준(1862~1932)과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나면서 동양학에 눈을 뜬다. 노자와 불경, 그리고 '중용'을 읽었다. 월남 이상재(1850~1927)의 뒤를 이어 서울 종로YMCA 연경반 강단에서 35년간 강의를 하면서 류영모는 기독교 신앙인들 앞에서 동양고전을 두루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유교경전 가운데서 특히 중용을 직접 우리말로 풀어 강의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왜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8) 류영모는 왜 노자를 펼쳐 기독교를 강의했나 (68) 류영모는 왜 노자를 펼쳐 기독교를 강의했나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 노자 도덕경은, 춘추전국의 난세에 등장해 '치세(治世)'의 길을 일깨워주는 리더십 바이블로 자주 읽혀왔다. 이 경전에 대한 이 같은 이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자는 그 시대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파격적인 '신의 리더십'을 거론하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의 도(道)와 덕(德)을 말하면서, 그 벤치마킹할 대상을 '신(神)'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독창적이다. 그 신은 고대에 유행했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신이 아니었고, 초인적인 인격신(人格神)도 아니었다. 노자의 신은, 만물을 일궈낸 우주의 허공이었다. 그 허공은 절대세..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8) 육체와 상대세계를 벗어나라, 류영모의 '노자신학' (68) 육체와 상대세계를 벗어나라, 류영모의 '노자신학' 노자와 다석(2) 도덕경을 품은 류영모, 기독교의 본질로 들어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 노자의 도덕경은, 춘추전국의 난세에 등장해 '치세(治世)'의 길을 일깨워주는 리더십 바이블로 자주 읽혀왔다. 이 경전에 대한 이같은 이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자는 그 시대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파격적인 '신의 리더십'을 거론하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의 도(道)와 덕(德)을 말하면서, 그 벤치마킹할 대상을 '신(神)'으로 삼고있다는 점은 독창적이다. 그 신은 고대에 유행했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신이 아니었고, 초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격신(..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7) 노자와 다석은, 놀라운 '없음'을 발견했다 (67) 노자와 다석은, 놀라운 '없음'을 발견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노자 출관(老子出關). 그림 = 간송미술관 소장] 국경 검문소 함곡관서 써준 도덕경 노자는 주나라의 정치 문란을 슬퍼하며, 멀리 떠날 결심을 했다.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아랍지역(서역)이었다. 태어날 때 81세였던 걸 감안하면 150세쯤 됐을 때였을까. 왜 하필 아랍이었던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를 '접속'했던 우주인인 만큼, 노자는 다른 세계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서쪽의 진나라를 지나, 국경 검문소가 있는 함곡관을 지나간다. 두 골짜기 사이에 상자처럼 움푹 패인 고개에 세워진 관문이었는데, 이곳의 검문소장은 윤희였다. 어..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6) 함석헌 철학의 알짬이 된, '류영모의 참' (66) 함석헌 철학의 알짬이 된, '류영모의 참' 예수는 질투할 이 없고 바라는 바 없는 자유남이었다 목숨이 끝나면 말숨으로 산다 류영모의 모든 가르침은 '말씀'에서 시작해서 '말씀'에서 끝난다. 그의 '말씀론(論)'은 가필이나 부연이나 풀이가 필요하지 않다. 그중 꼭 거듭 읽고 마음에 인(印, 도장)을 치듯 받아써야 할 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얼님은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마음에 인(印) 치듯 교훈하신다.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한얼님의 말씀을 막을 길은 없다. 잠잘 때나 꿈꿀 때나 말씀하신다. 한얼님의 소리를 들어라. 그것은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기 위해서다. 한얼님 말씀은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진실이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5)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똑같은 점 하나가 보인다 (65)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똑같은 점 하나가 보인다 생과 사의 '신비'를 깨달은 류영모 독일 유학파 신학자가 깜짝 놀랐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1952~ )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신학박사로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을 지낸, 국내에서 손꼽히는 신학자 목자(牧者)이다. 그는 류영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독일에 있으면서 왜 우리가 라틴어나 독일어로는 신학을 하면서 같은 소리글인 우리글과 말로는 신학을 할 수 없는 듯이 생각해왔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그것은 물론 지금까지 우리 신학이 지나치게 유럽지향적이었기 때문이거나 어려운 중국문자의 개념을 빌려와야 비로소 그것이 학문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4) 한글 속에 하느님 있다, 류영모는 '우리 말글의 성자' (64) 한글 속에 하느님 있다, 류영모는 '우리 말글의 성자' 글자 하나에 철학 개론이 들어있다 말은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과 글은 신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다. 신의 뜻을 나타내자는 것이 말이요, 신에 대한 사모를 드러내자는 것이 글이다. 이렇게 광야에서 외쳤던 사람이 이 땅에 있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철학사상가 다석 류영모(1890~1981)다. "우리 말도 이런 정도가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같이 외국서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있고 말 한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말에..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3) 인도서 났으면 부처가 됐을 분입니다 (63) 인도서 났으면 부처가 됐을 분입니다 신의 관상을 본 사람 [광주 귀일원에서 강의하는, 이현필의 제자 김준호.] 이현필 제자 김준호의 '인생 반전' 1967년 류영모는 광주 무등산의 산양목장에 머물렀다. 그 목장은 류영모를 존경하던 김정호 교수(목포대)가 경영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우리말로 풀어냈다. 류영모는 '중용'을 '가온씀'이라고 했다. 가온(中)은 참나를 의미하며 '씀'은 참나를 사는 생활을 뜻한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통하는 것이 바로 공자의 사상이라고 푼다. 산양목장에서 류영모는 모여든 제자들 앞에 경전과 자작한 글들을 펼쳐 놓고 강의를 하곤 했다. 하느..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2) 수녀들의 '진달래 할아버지'와 류영모 작대기송(頌) (62) 수녀들의 '진달래 할아버지'와 류영모 작대기송(頌) 하늘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이현필과의 촌철(寸鐵)논쟁 [다석 류영모] 류영모와 이현필의 '이-아' 차이 광주 양림동 양림교회 앞을 지날 때였다. "이이이이이" 류영모가 나직한 소리를 냈다. 처음엔 그냥 내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계속해서 그 소리를 내자, 옆에서 걷던 이현필이 입을 뗐다. "이보다는 아가 먼저 아닐지요?" 이것이 두 사람이 나눈 첫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가 이현필 옆에서 '이'를 계속해서 발음하며 노래로 부른 것은, '신통(神通, 하느님과 통함)'의 흥(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몸이 아..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1) 광주역에 내린 류영모가 만난 그 눈빛 (61) 광주역에 내린 류영모가 만난 그 눈빛 여순사건 고아들을 맡다, 이현필 '동광원 운동' 이세종을 성인이라 호칭한, 다석 이세종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시므로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60) 류영모는 왜 광주를 빛고을이라 명명했나 (60) 류영모는 왜 광주를 빛고을이라 명명했나 "난 없는 사람이니 공(空)이라 불러주오" 빛고을 성인, 이세종의 빛 빛고을 호칭 처음 쓴 다석 류영모 대한민국 남녘의 호남 최대도시, 광주는 저항의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가까운 역사로는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다. 전두환 독재에 항거한 이 투쟁은 이 도시를 민주화 성지로 각인했다. 1987년 민주화투쟁의 상징인 이한열도 이곳 출신이다. 광주는 이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운동 궐기가 있었던 곳이며 또 1929년 광주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외세와 압제에 굴하지 않는 뚜렷한 의기(義氣)를 보여준 곳이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펼친 이 고장의 대단한 면모를 보여주는..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59) '얼나 사망' 조의(弔意)를 표함 (59) '얼나 사망' 조의(弔意)를 표함 해방 이후 김교신의 후임, 노평구(盧平久)…류영모를 알았지만 몰랐던 사람 [다석 류영모] 얼나의 죽음을 슬퍼함 류영모가 남긴 시 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은, '대동조(大同弔)'가 아닐까 싶다. 고대왕국의 국가관에서 형성된 관념인, 충효(忠孝)사상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과 육친에게 효도하는 것을 상응하는 가치로 연결해놓았다. 화랑도 세속오계의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 군주를 섬김)과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 어버이를 섬김)는 국가 권력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강조되어 왔다. 여기엔 일정한 '트릭'이 있다.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이지만, 백성이 군주를 섬기는 것..
얼나의 성자 다석 (58) 류영모 알고, 김교신·함석헌은 몰랐던 것 (58) 류영모는 알고, 김교신·함석헌은 몰랐던 것 기독교 보편성과 국가주의의 모순 꿰뚫다…김교신 · 함석헌, 그 위의 성자 [다석 류영모와 바보새 함석헌, 뒤쪽 가운데는 김흥호.] '국가 잃은 땅'에서 삶을 시작한 그들 류영모는 1890년생이고 함석헌은 1901년생이다. 두 사람은 1945년 이전까지 정상적인 국가를 거의 경험할 수 없었다. 해방이 되는 해는, 류영모는 55세가 되는 해였고 함석헌에겐 44세가 되는 해였다. 두 사람의 사상적 토대는 해방 이전에 갖춰졌고, 그 사상에는 '국가 결여'라는 심각한 비정상적 상황이 개입했을 수 밖에 없다.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들에게 국가는 '잃어버린 것'이었고, '반드시 되찾아..
얼나의 성자 다석 (58) 류영모 알고, 김교신·함석헌은 몰랐던 것 (58) 류영모는 알고, 김교신·함석헌은 몰랐던 것 기독교 보편성과 국가주의의 모순 꿰뚫다…김교신 · 함석헌, 그 위의 성자 [다석 류영모와 바보새 함석헌, 뒤쪽 가운데는 김흥호.] '국가 잃은 땅'에서 삶을 시작한 그들 류영모는 1890년생이고 함석헌은 1901년생이다. 두 사람은 1945년 이전까지 정상적인 국가를 거의 경험할 수 없었다. 해방이 되는 해는, 류영모는 55세가 되는 해였고 함석헌에겐 44세가 되는 해였다. 두 사람의 사상적 토대는 해방 이전에 갖춰졌고, 그 사상에는 '국가 결여'라는 심각한 비정상적 상황이 개입했을 수 밖에 없다.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들에게 국가는 '잃어버린 것'이었고, '반드시 되찾아..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57) 누가 바보새 였나 (57) 누가 바보새 였나 세상의 투사로 나아갔지만, 다석의 '영적 공간'엔 미치지 못한 제자 [다석 류영모] 나는 바보새입니다 "선생님,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이놈을 신천옹(信天翁) 곧 ‘하늘 믿는 늙은이’라 이름한 것은 이놈이 날기는 잘해서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가 잡아서 먹다가 이따금 흘려버리는 것을 주워 먹고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그놈을 아호도리 곧 바보새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 새를 좋아하는 것은 이 바보새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산 시절은 또 몰라도, 적어도 해방 후의 제 살림은 틀림없는 바보새 살림입니다. 마음은 푸른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56) 스승과 같은 날 죽고 싶었던 함석헌 (56) 스승과 같은 날 죽고 싶었던 함석헌 류영모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바보새, 36년 인연함석헌이 몰래 봤던, 류영모 교장실 "한번은 선생님 방 앞을 슬쩍 지나다보니 방문이 좀 열렸는데, 벽에다 큰 글씨로, (아마 한자가 손바닥보다도 더 크게) "夜靜海濤 三萬里(야정해도 삼만리)"라 써 붙인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나도 왕양명(王陽明)을 읽지 못해 그것이 그의 글인 줄도 몰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그것을 쓰셨을까 혼자 생각을 해 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들어가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1983. 10.18) 함석헌이 1983년에 류영모 스승을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55) 증오와 질투로 천국 만들겠다고? (55) 증오와 질투로 천국 만들겠다고? 해방 이후 은평면 자치위원장 류영모…공산주의에 대해선 단호 [다석 류영모] 주민들이 만장일치로 류영모 선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일본천황이 라디오방송에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한 뒤, 일본인들이 사라졌다. 한반도에 그야말로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일순간에 찾아왔다. 조선총독부가 사라지니 나라의 행정공백도 함께 찾아왔다. 마치 옛 부족사회로 돌아간 듯 주민들이 나서서 자치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면사무소에도 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면민들이 모였다. 그날 면사무소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만장일치로 류영모를 자치위원장으로 뽑은 것이다.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54) 신의 저녁콜이 왔다, 다석(多夕)의 비밀 (54) 신의 저녁콜이 왔다, 다석(多夕)의 비밀 33200번의 저녁을 쉬었다가 마침내 영원한 저녁으로 쉬러간다 [다석 류영모] 저녁(夕)이 세번 들어가는 두 글자 류영모는 '다석(多夕, 많은 저녁)'이란 인상적인 호(號)를 지녔다. 한자가 어렵지도 않고, 어려운 의미의 말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석'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이게 무슨 뜻일까 아리송한 마음이 든다. 새벽도 있고 아침도 있으며 대낮도 있고 한밤도 있는데 왜 하필 저녁인가. 매일의 모든 때는 함께 굴러가는 것이건만 굳이 저녁이 많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류영모는 왜 모든 시간 중에서 저녁을 택했으며, 단 한번의 저녁이 아니라 거듭되는 저녁에 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