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영성수행 비전 (897)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57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일체에 머물지 아니하니 가히 새겨놓고 기억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일체(一切)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취사(取捨) 등 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일체의 마음이다. 불유(不留)는 그러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머물음이 없다. 즉 일체만사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이다. 무가기억(無可記憶)은 마음에 머물음이 없으니 기억될 것이 없다. 작은 것을 작다고 불만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남은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게 되는 이치이다.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꽃과 크고 작은 꽃들이 모여 서로 상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대립하지 아니한다. 이..
56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 심한 의심이 다 정화되면 바른 믿음이 조화(調和)롭게 하고 곧게 한다. 호의(狐疑)의 호(狐)는 여우이고 의(疑)는 의심이니, 여우처럼 의심이 많다는 의미이니, 의심이 대단히 많은 것을 호의라고 한다. 이렇게 심한 의심의 예를 들어 보면, ‘내 것은 왜 저 사람 것보다 작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돈이 더 많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나보다 더 잘생겼을까?’ 등 남과 자기를 비교하여 남을 의심하는 생각을 이어가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사업이 잘 되었을 때, 그를 축하해 주기보다, 자기 일은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느냐고 의심하며 불만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마음은 항상 자기와 남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며 의심하기 때문에 그..
55 계심평등(契心平等) 소작구식(所作俱息) 마음을 평등과 맺어서 일체 짓는 바를 쉬어라. 계심평등(契心平等)은 ‘마음을 평등하게 맺어라,’ 혹은 ‘맺으면’ 인데, 마음을 평등하게 맺는다는 뜻은 앞에서 양기불성(兩旣不成) 일하유이(一何有爾), 즉 ‘양쪽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하나가 있느냐,’고 한 단계에 이르면 사물을 잘못보아서 일으키는 편견(偏見)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대할 때, 마음은 평등하여 만법(萬法)이 평등(平等)하게 마음에 와 닿아 연(緣)을 맺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계심평등(契心平等)이라 할 수 있다. 소작구식(所作俱息)의 소작은 조작(造作)하는 바인데, 말하자면 나와 남을 집착하여 남의 허물을 보고 그..
54 구경궁극(究竟窮極) 부존궤칙(不存軌則) 구경과 궁극에는 궤칙(軌則)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경궁극(究竟窮極) 중 구경(究竟)은 ‘사리(事理)의 마지막,’ 궁극(窮極)은 ‘가장 마지막’이니 같은 뜻을 반복하여 더 이상 높은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게송 52)에서 지동무동(止動無動)하여 일체 번뇌를 소멸하고 중생제도의 길로 나가고, 53) 양기불성(兩旣不成)에서 대립되는 양단(兩段)이 성립되지 않으니, 만법제관(萬法齊觀)하여 만법을 있는 그대로 편견(偏見) 없이 가지런히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니 사리(事理)의 가장 마지막인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니 궤칙(軌則), 즉 궤도(軌道)도 없고 법칙도 없다고 했다. 구경에는 결국 공성(空性)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공성은 형체(形體)도 ..
53 양기불성(兩旣不成) 일하유이(一何有爾) 양(兩)쪽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겠는가. 양기불성(兩旣不成)의 양(兩)은 양쪽을 의미하는 것이니, 간택(揀擇), 증애(憎愛) 등 상대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않으면, 일하유이(一何有爾) 즉 어찌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 중 하나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양쪽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사랑만 혹은 미움만의 한쪽 마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쪽 마음만은 있을 수 없으니,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미워함도 없다는 말씀이다. 작은 것은 큰 것이 있으니까 작은 것이니, 큰 것이 없으면 작은 것도 없다는 말이다. 부자(富者)가 있으니까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부자..
52 지동무동(止動無動) 동지무지(動止無止) 그침 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이 아니요, 움직임 중에 그침은 그침이 없는 것이다. 지동무동(止動無動)의 지동(止動)은 ‘움직이는 것을 그치면’ 이니, 지동(止動)의 동(動)은 일체 편견이나 분별심의 작용이나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다. 그러하니 지동(止動)은 이러한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완전히 소멸되여 적정(寂靜)에 든 경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무동(無動)의 동(動)은 역시 일체 편견이나 분별심의 작용이나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니, 무동(無動)은 이러한 일체 편견, 분별심, 근심걱정, 망상 등의 작용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동(止動)에서 일체 생노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한 경지에서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비행과 보살행..
51 민기소이(泯其所以) 불가방비(不可方比) 그 까닭을 없애면 가히 비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민기소이(泯其所以)의 민(泯)은 망(亡)할 민으로 멸망하다는 의미가 있고, 기소이(其所以)는 그 이유 혹은 근거이니, 그러한 이유나 근거를 없애버리면 불가방비(不可方比), 즉 가히 비교할 것이 없다. ‘그 이유 혹은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42) 장심용심(將心用心),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 43) 미생적란(迷生寂亂), 미혹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일어나는 것, 44)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짐작으로 두 변(邊)을 일으키는 것, 45) 몽환공화(夢幻空華), 실제가 아닌 꿈, 허깨비와 헛꽃 속에서 사는 것, 46) 득실시비(得失是非),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에 몰두하는 것, 47)..
50 만법제관(萬法齊觀) 귀복자연(歸復自然) 만법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저절로 되는 이치(自然)에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게송 49)에서 일여체현(一如體玄)할 때 만법제관(萬法齊觀) 즉 한결같은 근본인 체(體)가 현묘하게 나타날 때 만 가지 법을 가지런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만법을 가지런히 볼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은 근본으로 돌아왔을 때 가능하다. ‘만 가지 법을 가지런히 본다.’는 뜻은 이 세상의 현상은 형형(形形) 색색(色色)의 모양과 질이 다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계, 동물계, 미생물(微生物), 인종(人種)도 수없이 많고, 모양과 질이 개체(個體)마다 차별(差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양성(多樣性)을 차별화해서 그들의 개성(個性)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선양(宣揚)하게 하..
49 일여체현(一如體玄) 올이망연(兀爾忘緣)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우뚝이 연(緣)을 잊는다. 앞 게송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고 한 것은 마음이 만약 있고 없거나, 높고 낮거나, 움직이고 멈추거나, 좋고 나쁘거나 하는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 치우쳐 다르게 보지 않으면, 즉 ‘심약불이(心若不異)하면 만법일여(萬法一如)하리라,’ 곧 만 가지 법이 한결 같으리라고 했다. 이 게송 49에서는 마음이 모든 법의 다른 모습을 보되 차별하는 의식으로 보지 않고 만법일여(萬法一如)하게 보려면 일여(一如)(한결같이 변함이 없는)한 체(體)를 체험하고 현묘(玄妙)한 그 체의 용(用)을 체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올이망연(兀爾妄緣)의 올이(兀爾)..
48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만약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검정색과 흰색을 보고, 검정은 검정이고 흰 것은 흰 것이겠지만 흰 것이 검정보다 우월하다는 차별의식을 갖지 않으니, 흰색을 검정보다 더 좋아하게 되는 차별의식을 갖게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녀 간에 있어서나, 민족 간에 있어서나, 국가 간에 있어서나 혹은 종교 간에 있어서 우월주의 관념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이 그들을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또 이 다르게 보는 마음은 그의 의식이 짐작하고 꿈을 꾸는 것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의식이 만법을 대하되 만법 각각의 다른 모습을 인지하면서도 차별적인 의식이 없다면 만법을 한결같이 취급하고 포용하고 활용할 수 ..
47 안약불수(眼若不睡) 제몽자제(諸夢自除) 눈이 만약 졸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제거된다. 여기에서의 꿈은 앞 게송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어떤 일을 보고 짐작하고, 한 변에 치우쳐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지고, 대립하고 불목(不睦)하는 일들을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일들은 마치 눈이 잠이 들어 꿈을 꾸는 것과 같이 마음이 탐욕으로 눈병난 사람이 공화(空華)를 보듯이 하니까 망념에 들게 되는 것이니, 눈이 졸리지 않으면 꿈을 꿀 수 없듯이 마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면 짐작하여 한 변에 치우치는 생각, 말,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마음에 쌓여진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무위(無爲)에 들게 되면 눈에 병이 없는 것이니, 사리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며 행하는 도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
46 득실시비(得失是非) 일시방각(一時放却)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즉각 놓아 버려라. 위 게송 44)에서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좋다 나쁘다고 하는 상대적인 대립관계인 이변(二邊) 중 한 변에 치우치는 것은 짐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게송 45) 몽환공화(夢幻空華) 하노파착(何勞把捉), 즉 이렇게 짐작에서 비롯된 것은 모두 몽환공화(夢幻空華)인데 어찌 목숨 걸고 그들을 잡으려고, 주장하고 쟁취하기 위해 수고할 것이냐고 했다. 이 게송 46)에서는 이렇게 짐작에서 비롯된 일에서 득이 된다거나 손해라거나, 옳으니 그르니 따지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니 일시에 놓아버리라고 했다. 어떻게 이해(利害)를 따지는 것을 놓으라고 했을까? 상업(商業) 경제하에서는 반드시 득이 될 ..
45 몽환공화(夢幻空華) 하노파착(何勞把捉) 꿈, 허깨비와 공중의 꽃을 어찌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 몽환공화(夢幻空華)의 몽(夢)은 꿈 몽자로 꿈을, 환(幻)은 변할 환자로 허깨비를, 공화(空華)는 공중의 꽃으로 헛꽃을 하노파착(何勞把捉)의 하노(何勞)는 어찌 수고로이, 파착(把捉)의 파(把)는 잡을 파, 착(捉)도 잡을 착으로, 파착(把捉)은 아주 꼭 잡으려는 부동한 마음이나, 목숨을 걸고 잡으려는 모습을 수식하는 단어이다. 앞 게송 44)에서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일체 상대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 중 한 변에 치우치는 것은 짐작(斟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나, 사람들이 이러한 짐작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고 한 변에 치우치는 것이니 이는 몽환공화(夢幻空華)인데 어찌 목숨을..
44 일체이변(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 일체 두 변(邊)은 짐작에서 일어난다. 지금까지 설한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취사(取捨), 미오(迷悟) 등 일체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두 변(邊)은 모두 짐작(斟酌) - 마치 술 마시는 사람들이 주고받은 술을 헤아리듯이 어림처서 헤아린다는 뜻 - 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는 실질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니 실질적인 근거를 찾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실질적인 근거는 앞에서 설명한 일종(一種)이다. 즉 두 변(邊)은 일종(一種)에서 나온 것이니 자기중심을 바로 갖도록 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가정사를 꾸려가는 사람이 짐작으로 일을 하다보면 사업을 하는 사람은 부도를 내기 쉽고, 가정사를 꾸려가는 사람은 크레..
43 미생적란(迷生寂亂) 오무호오(悟無好惡) 미혹하여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느니라. 고요하다거나 산란스럽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미혹하기 때문이고, 좋은 것도 없고 미운 것도 없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좋다는 생각이나 나쁘다는 생각들이 하루에도 몇 번 씩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나 이는 우리들이 미혹하기 때문이고, 이치를 깨닫고 보면 좋아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미혹할 미(迷)와 깨달을 오(悟)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들의 감정이 외부조건에 의해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고요해지기도 하고 산란해지기도 하는 것이 미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아서 기쁘고, 누가 갚을 돈을 갚지 않아서 감정이 상하고 정신이..
42 장심용심(將心用心) 기비대착(豈非大錯)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는 말은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을 스스로 변명하거나 덮어버리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이 어찌 큰 착각이 아니겠는가라고 물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 말을 하는 것도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자기 마음이 하는 것이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을 할 때, 이것은 자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행위이다. 어떠한 일에서도 자기 잘못을 보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잘못을 고치려는 사람은 자기 개선(改善)이 있고 발전이 있을 수 있는 길로 가는 것..
41 법무이법(法無異法) 망자애착(妄自愛着) 법에는 특별히 다른 법이 없는데 망령되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 집착한다. 집이나 자동차나,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나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서 좋고 나쁜 것을 만들어내서 그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망령된 짓이라고 했다. 일체 사물, 즉 감나무나 밤나무, 노동자와 고용주, 며느리와 시어머니 등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고, 그 자체가 하고 있는 가치가 있는 법이니 그 가치를 바르게 보고 자기의 필요에 응해 택할 일이지, 자기가 만든 애정이나 이익에 끄달려 집착하는 것은 삿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고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술, 담배, 약물에 중독되는 것은 자기가 좋아해서..
40 지자무위(智者無爲) 우인자박(愚人自縛) 지혜로운 이는 조작함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동여맨다. 무위(無爲)의 반대는 유위(有爲)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조작함이 없는 무위(無爲)이냐 하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이 발심해서 수행하여 정각을 이루겠다고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 글자 뜻대로 하면 이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이 인위적(人爲的)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유위(有爲)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 끈으로 자기를 묶는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사람의 발심이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욕심을 내서 세워진 것인가? 순리에 따라 욕심 없이 세워진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욕심으로 세워진 발심이면 유..
39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정각(正覺)에 돌아간 것과 동일(同一)하다.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정각(正覺)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 중 육진불오(六塵不惡)-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은 위38송에서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라고 한 대목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 39송에서는 그렇게 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깨달으신 정각(正覺)과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은 나와 나의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로, 능소(能所)를 여읜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을 성취한 경지이니 이를 부..
38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려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일승(一乘)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고 한 일승(一乘)은 하나의 수레를 타고 성불(成佛)한 부처라는 뜻으로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지도하셨는데 제자들 중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을 후에 성문승(聲聞乘)이라 부르고, 참선수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들을 연각승(緣覺乘), 보살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들을 보살승(菩薩乘)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행승들 중에 보살승이 성문승이나 연각승보다 상위(上位)에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자 삼승(三乘)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현상이 생겼다. 이 때 부처님께서 수행 방법에 따라 다른 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