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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19장 해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조셉머피

조셉머피. 요한복음 19장 해설

柏道 2022. 8. 23. 20:22

조셉머피. 요한복음 19장 해설

 

(1) 그러므로 그때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2) 병사들은 가시로 관을 엮어서 그의 머리에다 씌우고 자주색 겉옷을 입히며 (3)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하며 손으로 주를 치더라. (4) 그때 빌라도가 다시 나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라, 내가 그 사람을 너희에게 데려왔노라.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지 못하였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더라.(5) 그때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자주색 겉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을 보라!”고 하더라. (6)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경비원들이 주를 보고 소리질러 말하기를 십자가에 처형하소서. 십자가에 처형하소서.”하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그를 데려가서 십자가에 처형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니라. (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8) 그러므로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나서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하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꾸도 아니하시더라. (10) 그때 빌라도가 주께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말하지 않느냐? 나에게는 너를 십자가에 처형할 권세도 있고 너를 놓아 줄 권세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더라. (11)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위에서 네게 주신 것이 아니라면 너는 나를 대적할 아무런 권세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준 자는 더 큰 죄를 진 것이니라.”고 하니 (12) 이때부터 빌라도는 주를 놓아 주려고 애쓰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말하기를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 주면 당신은 카이사의 친구가 아니니이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자는 누구나 카이사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니라.

 

가시관이란 당신의 인생에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고통에서 평화로 옮겨감으로써 얻게 되는 승리의 왕관을 상징한다. 이것은 영적인 인간의 승리이고 고상함, 사랑, 그리고 정신적 인식 속에서 형성된 힘이다. 당신 삶의 모든 부분을 신에 대한 믿음이란 옷으로 입히면 직관과 분별력은 커지게 될 것이다. 믿음을 가진 인간은 항상 힘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 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마음속의 지배력이다. 유일한 힘에 대해서 신뢰하고 믿어라. 그러면 우주적 규모의 왕관(가시관)을 쓰게 된다. 당신의 십자가(당신의 이상이나 신에 대한 개념)를 올려라. 그러면 당신은 마음속 대중들을 지배하는 주권자가 된다. 당신은 지금 자줏 빛 예복, 왕의 옷을 입을 준비가 되었다.

 

7절의 유대인은 과거의 믿음에 지배 받는 보통사람, 혹은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는 신성모독이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현재의식에게는 어떤 생각과 믿음도, 느낌을 통해서 잠재의식에 각인시킬 수 있다는(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것이 10절의 내용이다. 이것은 또한 기도와 명상, 그리고 신의 영원한 진리를 단언함으로써 잠재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 상태를 풀어주거나 깨끗하게 할 수 있다.

 

11절은 창조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오직 잠재의식에게만 있고 현재의식에는 없다는 뜻이다. 모든 힘은 잠재의식 속에 있다. 현재의식이 단순히 하나의 개념을 선택하면 주관적인 느낌을 통해 잠재의식에 각인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각인된 것은 다시 현재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주관적 마음은 당신의 확신과 믿음과 느낌을 받아 들인다. 그것들이 고귀하든, 비천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12절에서는 주관적 느낌에 의해서 카이사의 힘(현재의식 혹은 세속적 믿음)이 통제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이상을 왕의 위치까지 올리면, 우리는 카이사에 대항할 수, 즉 세상에 반대할 수 있다. 진리를 새롭게 인식하고 마음이 계몽되면 세상의 모든 잘못된 믿음을 거부하거나 거절할 수 있고 따라서 카이사(세상 또는 인류의 믿음)를 거부할 수 있다. 잘못된 지식과 관점과 견해에 꽉 차있는 사람들의 마음, 즉 세상이라 표현된 것은 항상 진리와 대항한다. 자신의 마음이 원인이어서 실제 자신이 믿는 것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부원인의 원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이해의 빛으로 가득 차, 세상의 믿음을 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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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이 대답하기를 카이사 외에는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하더라.19:15 외부적인 계급과 전통에 얽매여, 세상에 의해 바뀌는 관습적인 종교의식, 형식, 예법만을 믿으면서 바깥세상의 힘을 구하는 지배적인 생각과 믿음은 대제사장으로 표현된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과 생명의 진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는 자신들의 힘을 뺏기기 때문이다. 자긍심, 거만함, 과대평가, 우리가 버리길 꺼려하는 하나님에 대한 과거의 신학적 개념 등, 이런 내부의 의식상태는 또한 대제사장을 말한다

 

 

(17) 주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히브리어로 골고다, 즉 해골의 장소라고 하는 곳으로 가시니라. (18) 거기서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 박더라. 그리고 주와 함께 다른 두 사람도 이쪽과 저쪽에 못 박고 예수를 중간에 두니라.

 

골고다 란 해골, 또는 항상 십자가 형이 처해지는 장소인 우리 의식을 의미한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모습을 느끼고 명백하게 상상할 때 당신은 골고다에서 죽는 것이다. 마음속 이미지에 관심과 흥미를 계속 불어넣으면 깊은 마음 안에 그 그림을세세히 새기게 될 것이다. 안에 각인된 것은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은 이제 골고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과거의 인간은 죽었고, 자신에 대한 새로운 모습과 평가는 부활한다. 우리가 쓰는 왕관은 우리의 이상 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까지, 즉 주관적 실체를 형성하고 그 생각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취할 때까지 왕관을 정신적으로 계속 쓰고 있어야만 한다. 당신 앞에 나타날 기쁨을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계속해서 좋은 소식을 듣고, 듣기 원하는 것만을 듣도록 하라. 의식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 과거의 사고는 죽고 새로운 것은 탄생한다. 이러한 변화를 유월절 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절에서는 두 명의 도둑 사이에 있는 예수, 즉 당신의 의식이 바로 당신이란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장을 읽어 감에따라,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옳다. 왜냐하면 내 자신에게 있어서 진실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두 명의 도둑은 현재의 당신과 당신이 되고자 하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과 당신 소망이다. 만약 관절염이 있다면 그 고통은 도둑이고 또한 오랜 기간 동안 가지고 있던 건강에 대한 소망도 또한 도둑이다. 소망이 이루어질 때 구원자를 나타낼 수 있다. 완벽한 건강을 계속 소망한다면 우리는 그 완벽한 건강의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기게 된다. 두 명의 도둑 , 즉 “나는 아직 원하는 상태가 되지 않았다.” 와 “내가 원하는 상태”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의 의식(예수)은 이 두 상태 사이에 있다. 한 도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누가복음 23:42 그리고 들려오는 답변은 다음과 같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이 두 구절은 기도의 진정한 방법을 설명한다. 주는 당신의 정신적 인식이다. 기억하다 란 정신적으로 일치시키고 당신의 신이자 주인이자 창조의 최고의 힘인, 그 유일한 힘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마치 약혼한 커플이 설레는 마음으로 결혼을 원하듯이 당신은 소망에 대해서 열광적인 흥분을 갖고 의식 속에서 소망을 구애求愛하게 된다.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신에게 향하면, 신 또한 당신에게 향하고 요청에 응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틀은 죽고 새로운 것은 탄생한다. 이것이 낙원 또는 평화, 당신 이상과 하나됨이다. 


이 장의 19절과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빌라도가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으니 ‘유대인의 왕 나세렛 예수’라고 쓰여 있더라. 그것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쓰여 있더라. 이것은 기도의 세 단계를 의미한다. 히브어는 당신의 정신적인 힘이나 신을 의미하고, 헬라어는 신적인 사고 또는 소망을 의미하고, 라틴어 는 당신이 갈망하는 상태에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것의 성취를 의미한다. 히브리어는 신의 언어를 상징하고, 헬라어는 지성의 언어를, 라틴어는 영적 교섭을 상징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히브리어는 신이나 당신 의식을 창조의 권능으로 인정하고, 헬라어는 당신 이성 속에 있는 소망이나 계획을 의미하고, 라틴어는 당신이 그 계획을 명상함으로써 상응하여 일어나는 감정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루어진 모든 기도속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과정이다. 당신 계획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활기를 주어라. 그러면 그것들은 당신 안에서 살게 된다.


(23) 그때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의 겉옷을 들고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각자 한 조각씩 가지며, 또한 주의 속옷도 가지니, 그 속옷은 잇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그것을 찢지 말고 누가 가질 것인지 제비를 뽑자.” 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끼리 내 옷을 나누고 내 속옷도 제비를 뽑나이다.’ 라고 말한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 그러므로 그 병사들이 이런 일들을 하더라.

 

 

이 절들은 오직 하나의 신과 하나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많은 부분으로 분리시키며 오감에 의지하고 있는, 혼란스럽고 분쟁적인 세속적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고와 느낌의 틀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습관적으로 과거의 것을 고수하려고 하고 진리가 아닌 미신을 위해서 기꺼이 죽으려고 한다.

 

인간은 이음매 없는 옷(유일한 신, 하나의 진리)을 분리해서 잘못된 신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었고, 자신들의 이상한 견해와 잘못된 이론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왔다. 그는 지팡이, 돌 등의 온갖 외적인 힘들을 경배해서 수많은 교파, 교리, 독단, 견해, 믿음들을 가지게 되었다.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란 세상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숫자 넷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를 지닌, 창조된 현상을 의미한다. 병사들은 계몽되지 않고 갱생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항상 일어나는 전쟁을 상징한다. 인간은 율법의 문자만 놓고 서로 싸우고 있을 뿐, 만물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정신은 부족하다. 우리는 사랑과 선함의 관점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언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옷은 잇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이것은 무한한 존재가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환상을 통해서 움직일 때 입는 겉옷이다. 무한한 존재는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다. 거기에 두개의 힘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른 하나를 상쇄相殺시키고 질서, 조화 대신에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두개의 무한함을 가진다는 것은 수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무한을 증가시키거나 분리할 수 없다.

 

24절에서는 사람들이 제비를 뽑는다고 한다. 인간은 우연, 사건, 불운, 재난 등을 믿는다. 하지만 법칙과 질서의 세계 속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28) 이 일 후에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목마르다.”고 하시니 이는 성경이 이루어지게 함이라. (29) 거기에 식초를 가득 찬 그릇이 놓여 있는데 그들이 식초를 해면에 적셔서 우슬초 가지에 꿰어 주의 입에 대니라.

 

목마르다 란 내적 평화와 성스러운 존재의 힘을 마시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을 말한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최고의 이상에 대해 목말라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나님 평화의 강물이 마음속으로 밀려오게 하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슬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향기를 분비할 것이고 훌륭하고 고양된 느낌은 뒤따를 것이다. 그때 당신을 괴롭히는 것들은 당신 안에 있는 끝없는 빛에 의해서 사라질 것이다.

 

식초를 해면에 적셔서 우슬초 가지에 꿰어 란 물론 상징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부정을 없애는 우슬초 가지는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이용됐다. “우슬초 가지가 그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나에게는 상징적인 것으로 보인다... 갈대는 왕권과 신의 법칙을 의미한다.” (알렉산드리아. 디오니소스 주교의 누가복음 번역에서) 동양에서는 발효가 많이 되어서 식초 같이 시큼한 술과 미르다(*동아프리카, 아라비아 산産 수지樹脂의 일종으로 향료, 동양에서 약재로 사용)를 섞은 것을 알코올 중독자의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사용했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믿음들을 버리고 신과 그의 법칙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과도기적 과정을 상징한다.

 

30절에서 다 이루어졌다 란 아멘, 이루어진 기도 또는 영혼에 대한 조용한 인식을 의미한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속에 우리의 확신에 도전하는 것이 없게 될 때, 다 이루어진 것이다. 다 이루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그의 제한, 한계의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끝없는 존재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융해점融解點에 도달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한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가?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경외서인 베드로 복음에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으면서 “나의 힘, 나의 힘, 그대는 나를 버렸는가?” 라고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서백과사전에서의 그 원문은 오직 고대 시리아어만을 알고 있던 유대율법학자에 의해서 변형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아람어(*샘 어족의 하나)인 사박타니는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어릴 때 나는 선생님에게 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것을 알고 증명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아마 그 대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태의연한 반응인 “그런 어리석은 질문하지 마라.”였다.


예수님은 시편 22장을 인용했다. 그러나 번역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번역하면서 실수를 했다. 히브리어 사박타니 는 버리다는 의미가 아니고 찬송하다는 의미이다. 버리다에 맞는 것은 아작타니라는 단어이다. 실제 의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를 찬송했습니다.”이다. 사박타니 의 어근인 사박 의 의미는 찬송하다이다.(strong concordance에서)

 

경외서에 쓰여 있는 또 다른 번역인 “나의 힘, 나의 힘, 그대는 나를 버렸는가?”에서 버리다에는 포기하다, 풀어주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는 의미가 있다. 영적인 인간은 세상 사람들의 믿음과 외부 사물의 힘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버리면서 그의 모든 영광과 존경을 최고의 하나의 힘인 하나님에게만 준다. 그는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의 인간적인 의지는 완전히 버려지게 되고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 질서, 아름다움, 완전성, 완벽성, 그리고 신의 빛을 가져오게 하는 성스러운 명령(저자 주: prayer is the answer 참조) 아래에 있게 된다. 이 드라마는 당신 안에 있는 신의 탄생을 다루고 있다.

 

 

(34) 그 병사들 중 하나가 창으로 주의 옆구리를 찌르니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 (36) 이런 일들이 일어난 까닭은 주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 하리라.”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

 

 

성서백과사전은 체내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에게서 피와 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피와 물은 신의 은총(사랑과 지혜)을 전달하는 통로를 표현한 전문용어이다.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피와 물을 배출한다. 이것의 상징적 의미는 정신적 재탄생이나 우주적 의식이다. 뼈가 하나도 꺽이지 아니 하리라 란 생명은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살아있는 전능의 영혼과 하나됨을 상징한다. 아무런 뼈(사고)도 부서지지 않는다 란 우리에게 분리감이 사라지고, 완전함과 영원한 존재와 하나됨을 느끼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불완전한 그림을 가져서는 안 되고 완전함과 완벽함을 항상 유지해야한다. 그러면 우리 신체나 의식의 뼈는 하나도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못 박힘은 신비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나 절대적 존재가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무한한 존재가 절대적 상태에서 상대적 상태로 넘어간 것이고, 무형의 존재가 정형화된 것이다. 형태가 없는 존재가 모양, 크기, 그리고 차원次元에 의해서 자신을 제한했다.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고, 아이들의 주관적 마음 깊은 곳에는 신의 모든 영광이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의 힘을 부활시키고 모든 장애물과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한다.


성서 언어사전에 따를 때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힘은 신성한 희생의 상징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에너지와 속성들이 물질의 형태로 구속되고 속박되는 것을 말한다. 신은 우리 모두와 만물에게 생명을 주었다. 신은 당신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구원의 모든 과정은 이렇게 당신 안에 존재하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에 있다. 지식과 이해의 확장을 통해서 당신 안에 감금되어 있는 신의 힘과 자질을 해방시킬 때 모든 공포와 의심, 잘못된 개념들을 정복한다. 정신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결국 신과 일치감을 느낀다. 당신은 신이 의도하는 인간이 될 것이고 신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의 귀를 트이게 할 수 있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매순간마다 신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갈리디아서 2:20 참조 라고 말했디.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가? 그는 자신이 빛 속으로 건너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라는 단어는 당신의 생명 속에서 작용하는 신의 존재와 힘을 의미한다. 당신이 신의 빛에 의해서 계몽될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말씀드리기를, 그대는 내가 고난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는가, 하지만 나는 고난을 받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창에 찔렸다는 말을 들었는가, 하지만 나는 구타 조차 당하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매달린 채 죽었다는 말을 들었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그대여 보아라 언어(로고스)의 죽음을. Act of John, second century 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살해당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것은 고통이라는 환영임에 틀림없고, 말씀의 죽음이다. 우리가 잠과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신은 우리 안에서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 배 안에서 신이 주무시고 계시는가? 당신은 대양에 떠 있는 배다. 인생에 있어서 폭풍이 닥칠 때 흥분해서는 안된다. 신은 바로 그곳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그를 깨워라!  “잠에서 깨어나고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빛을 주리라.”


38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고도로 숙련된 상상력이나 의식의 높은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이상을 무덤 안에 두어야만 한다. 즉, 우리의 관념을 두어야 하는 곳이 내면 깊은 곳의 무덤 같은 상태란 뜻이다. 돌 (확신)은 무덤을 봉인한다. 바로 이곳에 우리는 예수님, 즉 우리의 새로운 이상을 둔다. 과거는 죽었고, 잊혔고,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다. 보라! 나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