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18장 본문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18장
나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내 스승님과 나는 아침 식사가 끝나는 대로 히말라야를 넘어서 칼림퐁까지 가는 여행을 곧장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에 내가 느꼈던 감정은, 어릴 적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대를 떠나갈 때 들었던 느낌과 매우 비슷하였다. 휴일만 되면 나는 언제나 그곳으로 놀러 갔으며, 다시 학교에 가야하는 날이 돌아오면 깊은 슬픔을 느끼곤 했다.
나는 그곳의 언덕들과 히스 꽃들(heather)1)과 호수들(lochs)과 강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느낌을 나는 그 날 아침에 다시 받았던 것이고, 내 스승님에게 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1) heath 속(屬)의 식물. 보라 또는 분홍색의 꽃이 핌
모든 사람이 아침 식사를 먹는 자리에 나와 있었다. 수도원장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작별의 선물로 실크 스카프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 스카프는 매우 섬세하여 작은 봉투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선물을 주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이었으며, 이 선물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이를 받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스카프를 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는 게쉬 림포체와 수도원장과 창 타파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모두가 오크 계곡을 떠날 예정이었다. 퉁 라, 말라파, 다르 창은 하 추(Ha Chu) 계곡으로 나 있는 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다르 창은 얀탕(Yantang) 수도원으로, 말라파는 곤사카(Gonsaka) 수도원으로, 퉁 라는 타코후(Takohu)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앞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런 대가(adepts)들이 모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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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늘 모이던 장소에 앉아 아침을 들기 시작했다.
그때 게쉬 림포체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 모두 각자에게는 참으로 잊기 어려운 사건들(occasion)이 한 번씩은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사건을 항상 기억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기억은 다른 모든 봉우리들 보다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산의 봉우리처럼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이 고립된 지역에서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다가 지나간 것입니다.”
“여기 내 사랑하는 아들은 오늘로써 거의 7 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지냈었고, 이제 곧 우리 곁(our midst)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몸을 입은 상태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 안에서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돕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가 하게 될 일은 우리가 그의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짧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우리 모두는 두 차례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 모두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 우리 안에서 자라났던 위대한 이해를 안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새겨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가 과거에 여러 세기를 걸쳐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과, 그의 일에 필요한 영혼의 경험(soul-experience)을 체험하고자 이 시기에 우리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앎 때문에 우리는 이별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며, 그에게 잠시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사랑과 축복을 가져갈 것이며, 신의 사랑은 항상 그와 함께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두를 축복하는 자세(all-hailing sign)를 취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축복한 후 자리에 앉았다. 이는 거기에 있던 모든 대가(adepts)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모든 눈들이 나를 향해 있을 때,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힘을 의식하고(conscious of)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말을 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제 가슴에 있는 것들을 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진정한 사랑(real Love)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사랑은 말 그 이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사랑만이 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a Love that speaks more than words and which alone could solve all problems).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들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며, 이는 마음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저는,”
나는 말했다.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과, 마음이 어떻게 조건들로 묶여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관계들의 속을 거울처럼 들여다보았을 때, 저는 어떤 선입견도 없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see)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각(perception)이 변혁을 가져오게 되고, 여기에는 그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왜곡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을 때, 바로 그러한 사실이 곧 진리이며, 이것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When I see the fact as it is, then that very fact is the Truth which resolves the problem).
자아가 곧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게(see) 되면, 이에 관한 진실(truth)로부터 숨거나 도망치려고 애쓰지 않고 이 사실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변혁이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한 변혁만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게 되면, 그 순간 마음의 고요함이 있게 되며, 이 고요함 안에서 갈등은 멈추게 됩니다. 이 고요함 속에 실재-사랑이 있는 것이며, 실재-사랑이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 때에는 자아가 이미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단순한(simple) 사실이며, 단순한 사람도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understanding)란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재는 지금 존재합니다(Reality is now)! 그렇기 때문에 변혁은 즉각적인 것입니다. 시간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란 무엇인지(what is now)를 이해하고, 매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과거의 기억(past-memory) 즉, 새로운 지금을 가리고 있는 오래된 그것의 방해 없이 자각하고 있을 때, 새로운 지금은 스스로 매순간 새로워집니다. 이는 내가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순간을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능합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세상에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관념들을 짊어지고 있는 마음들에 더 많은 관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마음을 구속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관념들은 결코 진리(the Truth)를 밝혀낼 수도 없고,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믿음과 기억의 조건들이 다 이해되어 사라지고 나면, 사랑은 그 즉시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얻게 된 사랑과 지혜에 대해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떠나게 됩니다. 제가 얼마나 여러분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지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임무를 수행해 나갈 때 여러분도 저를 돕게 될 것이라는 앎으로 인해 저는 지금 매우 기쁩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강복하는 자세로 축복하였다(Then I blessed them all with the all-hailing sign). 이제 나도 그렇게 할 권한을 받게 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치러야 할 시험을 나도 모두 통과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 후 내 스승님과 나는 그들을 떠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발코니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우리는 출발했으며, 라마승들은 “옴 마니 받메 훔”을 노래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수도원 전체가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 듯 했다.
그 날 아침 일출은 특별히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가 밤낮으로 그토록 자주 올려다 보았던 사랑스러운 산인 코몰하리도, 내가 산에 대해 품었던 사랑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코몰하리는 나에게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반사해 비추었는데, 이는 마치 반짝이는 보석 같았다.
우리는 얼굴을 돌려 파리(Phari)로 향했다. 우리는 겨울이라 얼어붙어 있는 수많은 강들을 건넜다. 우리는 두 마리의 눈 표범들(snow leopards)이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평야들(plains)은 겨울이 되어 완전히 황폐해 보였으며, 주위를 둘러봐도 야생 야크와 야생 토끼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은 코몰하리 산으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하여 평야들을 휩쓸며 파리로 향해 불어 나갔다. 여름이 되면 이 평야는 들꽃들이 온 가득 피어나 온갖 색깔들로 가득하였다. 그런데 그 날에 본 평야는 참으로 달랐는데, 평야는 온통 눈 담요(blanket of snow)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로 들어갈 때 우리는 야크와 당나귀 떼의 행렬을 몇 번인가 만나게 되었다. 파리는 온 세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동시에, 가장 추운 곳이자, 가장 불결한 곳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지들이 자신들의 기도 바퀴(prayer wheel)를 돌리면서 구호물을 바라며 손을 내밀면서 차가운 눈 위에 앉아 있었다.
겨울이 되자 그곳의 여인들은 야크의 피와 진흙을 혼합한 것을 얼굴에 발랐는데, 이는 추위와 바람과 햇빛으로부터 자신들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추위와 바람과 햇빛, 이 세 가지가 결합된 상태에 피부가 노출이 되면 엄청 따가웠다.
거리들은 여러 세기를 걸쳐 쌓아왔던 쓰레기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장난꾸러기들은 똥과 오물에 아랑곳 하지 않고 추운 줄도 모르며 맨발로 뛰어다녔다. 죽은 개들이 거리마다 누워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을 치우려들지 않았다. 반면 살아 있는 개들은 먼저 죽은 자신들의 동료들의 시체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음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오후 네 시 경에 파리에 있는 방갈로(bungalow)2)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땔감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불을 크게 지펴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나는 파리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기뻤으며, 친구에게 이를 이야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토록 불결한 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보였다.
2) 별장식의 단층집
다음 날 아침, 토스트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우리는, 16 마일(약 26km) 가량 떨어져 있는 고차(Gautsa)라 부르는 곳을 향해 갔다. 뒤를 돌아보니 코몰하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앞으로는 광대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수 백 마리의 야크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눈을 파헤치고 있었다. 여우들과 산토끼들은 무리를 짓고 열 마리 남짓하게 각각 모여 있었다. 모든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양털(wool)을 나르는 야크 행렬을 만났는데, 거기에는 당나귀들도 몇 마리 있었다. 이것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며,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유쾌해졌다. 여기서부터 길은 산중턱 위로 올라가는 길이었으며,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울퉁불퉁하게 머리 위로 달려 있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넌 후에 고차(Gautsa)에 도착했는데, 그 다리는 오래 전에 지은 부분과 새로 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가 묵게 될 오막살이는 나무로 지은 그 작은 마을에 있었다. 헛간들 중 한 곳에서 노새몰이꾼들 몇몇이서 기분을 좋게 해주는 창(티베트 맥주)을 마시고 있었다. 이 티베트 사람들은 술에 취하게 된다 할지라도 매우 행복하며 명랑한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좀처럼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스승님은 그들에게 티베트 말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라마승의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주었다. 그 커다란 헛간에서 이 친구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추었던 춤들 중 어떤 것들은 매우 격렬했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빙빙 돌았으며, 그들의 옷자락은 거의 날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춤을 계속 추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이 되었을 때, 길은 꽝꽝 얼어 있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자 눈과 진흙이 녹아내려 섞이게 되면서 길은 질척해졌다.
길은 아마 추(Ama Chu) 강변을 따라 나 있었다. 아마 추 강은 15,000 피트(약 4570m) 높이에 달하는 두 산맥 사이에 있는 계곡(gorge)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산으로부터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그 강은 산에서 녹아내리는 눈들로 인하여 엄청난 급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계곡의 끝자락에 오자 우리는 링마탕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나는 기뻤는데, 그곳 수도원장은 우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곳이 내가 게쉬 림포체를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첨비(Chumby) 계곡으로 들어섰으며 수도원을 향해 나갔다. 링마탕은 이 골짜기(valley)의 끝자락이자, 계곡(gorge)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우리는 야퉁(Yatung) 마을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마을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갈 때 모든 크기를 통틀어 마주치게 되는 첫 번째 티베트 마을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르할(Burrhal)이라 부르는 야생 양을 몇 마리 보았다. 야생 곰들은 산에 있는 숲에서 내려와 농작물이 있는 곳을 급습하기도 하였다. 먹이를 찾아 배회하고 있는 표범과 늑대들로부터 자신들의 동물들을 보호하고자 유목민들은 마스티프(mastiff)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곳의 수도원장은 우리를 다시 보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틀 밤을 묵고 가라고 설득하였으며, 우리는 그의 말대로 했다. 바깥 세계와 이곳을 가르고 있는 마지막 산맥을 넘기 전에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우리는 기뻤다.
첨비 계곡은 심지어 겨울에도 아름다웠다. 야퉁은 발전하고 있는 마을로서, 그곳에는 판자 지붕을 이고 있는 돌로 만든 집들이 아마 추 강을 따라서 이곳저곳에 박혀 있었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나는 게쉬 림포체의 숙소(quarters)에서 잠을 잤다. 그곳에 있는 동안 만큼이라도 내가 그의 숙소에서 잠을 자야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먹고 푹 쉬었는데, 이제 우리는 제펠(Jepel) 관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나탈라(the Natala)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인도와 티베트를 가르고 있는 히말라야의 산맥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게쉬 림포체의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든 다음에 고요하게 앉아 있었으며, 나는 게쉬 림포체의 영향력(influence)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스승님도 이를 느꼈는데, 그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for he gave us a brilliant talk)3).
3) 그 순간 게쉬 림포체가 나타났다는 것인지, 전에 그가 말을 한 것을 회상한 것인지 의미 파악이 어렵다.
그는 말했다:
“평화란 갈등을 부정하는 상태가 아니란다. 악을 무턱대고(merely) 부정한다고 해서 네가 고결한(virtuous)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추한 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더냐? 자신의 현재 모습과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동안 너는 결코 평화로워질 수 없단다. 그렇게 하는 것은 덕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아니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너의 현재 상태가 항상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 어떤 것이라도 부정하는 그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은 갈등을 만들어 낸단다.
그리고 덕이란 결코 자신의 현재 상태와 반대되는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란다. 전쟁을 부인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란다(Peace is not the denial of war). 전쟁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기 때문이지.”
“이상주의자들이 이상을 따르지 않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하지 않더냐? 사실 이상(ideals)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가르고 있단다. 나는 네가 게쉬 림포체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단다. 이에 대한 이해는 너의 일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좌파 성향이 있는 사람이든, 우파 성향이 있는 사람이든 간에, 그들은 그저 관념(ideas)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더냐? 자신의 관념이 다른 이들의 관념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갈등과 전쟁과 증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란다.
인류가 서로 화해(reconciliation)하게 되는 것은, 관념이란 무엇인지, 그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가르고 있는지를 알아보게 될 때라야 가능하단다.”
“우리는 스스로를, 영국인, 미국인, 러시아인, 중국인, 인도인 등등 그 밖의 다른 이름들로 부르고 있단다.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길 바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안전해지고 싶어 하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특정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단다.
그러나 동일시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분리와 분열과 전쟁을 뜻하는 것이, 이것들 안에서 안전(security)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모든 이상주의자들이 갖는 꿈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똑같이 믿게 되는 것이란다. 그 사상이 우익이든 좌익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갈라놓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믿음이란 분열을 일으키는 인자(factor)이지 통합하는 인자가 아니란다.”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갈등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갈등은 밖으로 투사될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내적 갈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얻고자 노력하거나 어떤 조직을 만드는 활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무턱대고(merely) 전쟁에 반대하기만 하면서, 자기 내부의 심리적 갈등은 계속 유지시키고 있다면,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게 된단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는 내적 갈등의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너는 더 이상 전쟁광도, 평화주의자도 아니란다. 너는 완전하게 달라진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때 너는 자기 내부에서부터 평화롭기(at peace) 때문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세상과도 평화롭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저런 단체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이런 저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란다. 참으로 너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사람들은 때때로 적을 바꾸고 있으며(You change enemies from time to time),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 보인단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선전에 의해서, 자기 내부의 심리적 갈등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어 간단다.”
“그래서 사람들은(you) 이상, 국가 또는 민족성을 통해서, 탐욕을 통해서, 과장(aggrandisement)을 통해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단다. 일단 내적으로 전쟁을 부추기고 나서 외부로도 전쟁을 부추기게 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은(you)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임이 확실하며, 언제나 모순에 빠져 있는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 고함치는 것에 불과하단다.”
“너는 항상 무엇인가가 되길 바라고 있단다. - 전쟁 영웅, 백만장자, 고결한 사람, 평화주의자 등 그러한 모든 것들을 말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 안에 이미 갈등은 내포되어 있는 것이란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을 때, 평화가 있게 된단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어간다는 것은 실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멈추게 된단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마음을 멈추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실재가 있게 된단다. 창조성 그 자체인 그것이 말이야.”
“너는 더 이상 안전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란다. 안전을 구하고 있는 마음은 언제나 두려움 속에 있기 마련이고, 창조적 존재(Creative Being)의 기쁨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네가 안전해질 수 있는 그 근본은 이해에 있는 것이지, 관념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다(The very basis of your security is in knowing and not in seeking).”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느낌의 형태는 자기-이해와 신성한 이해(Divine comprehension)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이상주의자의 공격적인 자기 독단적 태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이러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마음과 가슴은 반드시 평화로우며 고요해야 한단다. 그러면 그때 너는, 갈등이 없는 상태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란다.”
“모든 전쟁이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내듯이, 각각의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만들어 낸단다. 이러한 갈등들을 끝내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자아를 이해해야 한단다. 자기-이해가 있을 때라야,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갈등을 벗어난 자기 해방(liberation)이 있기 때문이란다.”
“대량 학살, 기아, 불행, 파괴 등과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문제가 발생한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붙잡고 늘어질 때, 오히려 너는 고통(misery)을 심화시키는 것이란다. 너는 오로지 탐욕과 악의(ill-will)를 새로 포장(reorganisation)하는 데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단다. 그러므로 혼란과 적개심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이며, 혼란과 적개심은 네가 그 문제의 뿌리를 다루기 전까지 남아 있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이러한 뿌리들은 너희 자신 속에 깊이 박혀 있단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분명해졌구나. 그렇지 않니? 만약 어떤 개혁가(reformer)가 자신이 바로 문제라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변화되지(transformed) 못했다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공헌한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 더욱 심화된 갈등과 불행을 더할 뿐이지.”
“때때로 고통을 겪음으로써 너는 자신의 필멸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단다. 자신만이 홀로 스스로의 고통을 영속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방법과 수단에 대해 생각을 적게 할수록 너는 너 자신을 더욱 더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며, 더 빨리 평화가 네 안에 깃들게 될 것이란다.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영원한 가치(Eternal value)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대립되는 것들의 갈등의 상태가 아니란다.”
“이해하고 있는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 누구나 그것을 발견한단다. 그러나 이해가 없는 자의 등에는 매질만이 있을 뿐이란다(In the lips of him that hath understanding wisdom is found: but a rod is for the back of him that is void of understanding).”
그가 말을 마치고 난 다음에도 나는 한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이제 나는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단순히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보는 가운데 깊은 이해와 함께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보는 행위 그 자체가 해방이자 변혁으로 즉각적으로 이어지게 된다(in doing so that very seeing was liberation and transformation).
나는, 수도원장도 마찬가지로 깊은 명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명상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명상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배제하고 하나의 관념에만 집중하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갈등에서 해방될 수도 없고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푹 자면서 편히 쉬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기분이 매우 상쾌했으며, 제펠 관문(Jepel pass)을 거뜬하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출발했으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의 중간 높이 정도에 있는 헛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밤을 보냈다. 우리는 깊게 쌓여 있는 눈 속에서 여덟 시간 동안 여행했으며, 종종 우리 허벅지까치 쌓여있는 눈길을 만나기도 했다.
나는 다음 날이 여행 최악의 날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었다(The next day I thought would be the worst). 그리고 나는 눈보라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눈보라는 정말로 두려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매우 격렬하게 불며, 그때에는 바로 몇 야드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이는 일 년 중 이 시기에는 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바람에 날려 눈은 길에 높게 쌓이고, 이를 헤쳐서 여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이것을 한 번 경험했으며, 또 다른 경험을 원하지 않았다.
전에 이미 한번 일어났었던 탓일까. 우리가 가는 내내 날씨는 공평하게 맑았다. 대신 햇볕이 매우 뜨거웠다. (한겨울이라 할지라도 불쾌해 질만큼 뜨거워지곤 했다.)
관문의 정상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시킴(Sikkim)의 수도인 강톡(Gangtok)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길을 넘어서자 또 다른 헛간이 나타났으며, 우리는 거기서 밤을 보냈다. 우리는 통나무로 불을 피웠으며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거의 다 타고 남은 재들이 빨갛게 소진해갈 때까지 불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초는 방 전체에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게쉬 림포체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이를 내 스승님에게 말했다. 내스승님 역시 내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영향력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몇 분만 더 고요하게 있어 보자. 그러면 그를 볼 수 있게 될 거란다.”
우리는 그렇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서 형성되고 있는 림포체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나는 그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으며, 이러한 방문에 대해 더 이상 무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희미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들아, 지금 네가 보고 있듯이,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단다.”
이 말이 끝나자, 링-쉬-라 은수자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산들도 움직일 만큼의 굳은 믿음을 가져라(Have the faith that moves mountains, my son).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너를 돕게 될 것이란다.
의심하지 말고 다만 행하여라(Never doubt but act). 그러면 그 행동 안에서 실재가 일하게 될 것이란다. 기억해라.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시란다.”
이 말이 끝나자 둘 다 사라졌다. 나는 기쁨에 찼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나를 뒤흔들 수 없을 만큼 확신이 강해졌다.
나는 내 스승님에게 말했다:
“이제껏 보냈던 저녁 중에서 오늘이 가장 경이로운 저녁이었습니다. 방금 전 두 분이 나타나신 것은 전에 마련되었던 모임보다도 저에게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방금 전의 짧은 몇 분이 저에게는 영원 그 자체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날 밤 나는 어린아이처럼 푹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난 후에도 나는 전날 저녁에 일어났던 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나는 여전히 게쉬 림포체와 링-쉬-라 은수자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 모든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며 중대해졌다.
시킴의 수도인 강톡으로 내려가는 동안 내 발은 날개라도 단 듯 했다. 나는 새처럼 가벼웠으며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해 있는 듯 느껴졌으며, 그 환희의 느낌(that feeling of ecstasy)은 항상 나와 함께 남아 있었다. 이것이 나의 젊음을 지켜주었다.
내 친구 중에서 나를 20년 넘게 보지 못했다가, 내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보기로 결심하고 나를 만나러 온 친구가 있었다. 그가 늙었듯 나 역시 늙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이렇게 감탄했다:
“오 이런(Good God), 너는 하루도 늙지 않았구나. 도대체 비결이 뭔가?”
나는 대답했다:
“아무런 비밀도 없어. 나는 그냥 항상 나야(I am just what I am).”
물론 그는 늙어버렸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강톡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문명 세계에 돌아온 것에 대해 유감을 느꼈다. 그것은 매우 독특한 느낌이었다. 문명 세계로 돌아온 것이 싫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반대편을 생각하다보니, 다소 슬픈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곧장 임무를 시작해야겠다는 열정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세상에 뭔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참이라 믿고 있는 것들에 확신이 없다는 느낌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곤 했었다.
내 안에서는, 실제로 나는 모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거짓된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똑같은 그것을 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알게 되었으며,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내 일을 시작하기 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울드 씨(Mr. Gould)와 인사를 나눈 다음, 그와 함께 그날 저녁 식사를 먹었다. 대화의 주제는 내가 지난 7 개월 동안 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나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함께, 한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for my acquaintances had lost track of me altogether). 그러나 내가 고울드 씨에게 내가 했던 일들과, 내가 갔던 곳들에 대해 말을 하자, 그는 거의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동안 나는 어떤 백인도 발을 디뎌 보지 못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탐사되지 않은 티베트의 지역들을 말이다. 그곳은 티베트 마스터들(adepts)에게만 가능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야말로 삶(Life)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음 날 우리는 소형 오스틴(Austin)차를 타고 칼림퐁까지 운전해 갔다. 길의 끝까지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스승님에게 작별을 고할 때 느꼈던 그 외로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감정에 동요되지는 않았다(yet I was not emotional).
나는 내 인생이라는 차의 크러치를 잃어버린 듯 했으며, 혼자서는 이를 견딜 수 없을 듯 했다. 내스승님이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그는 내 생각을 읽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나는 너를 떠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겠구나. 네 안에 계신 영께서 네 인생의 남은 길 동안 너를 지탱해주실 것이란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너의 곁에 계시고,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보다 위대하시지. 그분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아우르고 계신단다(He is Wholeness). 그분은 생명 그 자체이시지. 아버지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며, 아들에게도 그분 안에서 같은 생명을 갖도록 허락하신단다.”
“너는 그동안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아직도 의존하려 하는구나(You have learned to be independent, yet you feel dependent). 다른 이에게 의존하려는 환상이 너를 계속 노예 상태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이란다.
너에게 도움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려 할 때, 너는 의존과 분리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된단다. 그들이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만약 네가 시작과 끝을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두려움도 있게 된단다. 그러나 네가 이 사실에 관한 진리(the Truth)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때 너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것을 네 자신 안에서 찾게 될 것이란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들은 네 주의를 산란하게 하여 무지와 환상으로 이끌게 된단다.
실재는 남에게 의존하려는 환상에서 자유로울 때 찾아오게 된단다. 만약 네가 지금 이 순간 생각-느낌-반응을 식별하고(discern), 그것의 거짓됨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거짓된 그것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란다. 그러면 그때 너는 우리 사이에 어떤 분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왜냐하면 다만 ‘하나’(‘One’)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분 안에는 분열도, 분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즉각적인 현존 안에는 구별도, 분리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단다(There is no distinction, no separation, in the immediate Presence). 분리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구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다. 우리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사랑의 왕국(Kingdom of the Ever-Present Love) 안에 살고 있는 것이며, 이 사실을 제일 나중에 깨달은 이나, 이를 제일 먼저 깨달은 이나 다 똑같단다. 우리 모두는 지금 왕국 안에 있는 것이며,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나는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할 것이란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나를 떠나갔다.
나는 그가 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가 돌아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보았던 그 걸음 그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다 꿈인가?”
얼마나 오래 동안 거기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얼마 후 나는 내 꿈에서 빠져 나왔으며,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임무가 무엇인지 자각했으며(knew), 그 임무가 나를 어디로 이끈다 할지라도, 세상 모든 곳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어낼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구의 모든 구석구석마다 나는 자유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 순간 나는 노르부를 떠올렸고, 그녀와 내 친구를 보러 삼 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래.”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는 모두 생생한 현실이야(it is all real).”
나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나, 그 일은 참으로 일어난 것이며, 다만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도 척척 들어맞게 이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났으며, 마치 이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듯 했다(Things just came to pass all dovetailed in such a way as if by some unseen agency).
* * * * *
나는 이 책을 대부분 거짓된 것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으로서, 거짓된 것을 앎으로써 그대는 참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요가 (THE YOGA OF THE CHRIST)
오 전능하신 하나시여,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나, 당신과 함께 할 때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룩하게 이치를 헤아리고 거짓된 것들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당신의 살아 계신 현존이 들어설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신의 현존 안에서 저는 그 어떤 악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유일한 하나이실 뿐, 제가 본 악이란, 제 자신의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인격 안에는 그 어떤 진실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홀로 실재이시며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 안에는 그 어떤 진실도 없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죄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당신 홀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죄는 머물고 있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이 거짓된 것입니다.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진리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게 나를 가리고 있던 것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그 거짓된 것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진리는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으며, 거짓된 것이 참된 것이라 믿었던 그 오류가 바로 내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아는 이제 죽었기에, 제 생명은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생명은 저의 것입니다. 영원토록.
오! 복되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현존이시여!
오! 복되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현존이시여!
(O Mighty One, I myself am nothing but with Thee I am all there is, for Thou art not divided.
When I reasoned Divinely and observed the false I cleared the way for Thy Living Presence.
In Thy Living Presence I saw no evil because Thou art the only One; evil I saw was of my own mind.
I saw there could be no Reality in personality because Thou alone art Real and Indivisible.
I saw there could be no Reality in sin because in Thee there is no sin and Thou alone existeth. Only in the mind of man does sin dwell and the mind of man is false.
Truth is all there is, Truth is indivisible because there is nothing else to divide It.
Truth is unchangeable because there is nothing else to change It.
When I saw what blinded me to the Truth I died with the false.
Now the Truth has set me free knowing that in myself was the error believing the false to be true.
Now that the self has died, my Life is Thine, Thy Life is mine, for evermore,
O Blessed Eternal Living Presence
O BLESSED ETERNAL LIVING PRESENCE)
* * * * *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그대들을 향한 내 바람은 이렇습니다:
신께서 그대를 축복하시고 그대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이제와 영원토록.
그대에게 진심을 담아.
M. 맥도날드-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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