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16장 본문
16장
참으로 아름다운 겨울 아침이었다. 공기는 상쾌했으며, 해는 코몰하리 산 뒤쪽에서부터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신들이나 볼 수 있을 법한 경치였다. 그날따라 아침은 더욱 환해 보였으며, 해가 떠오르는 그 모습은 더욱 장엄해 보였고, 코몰하리 산도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아침 햇살은 산 뒤쪽으로부터 해서 하늘로 퍼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뒤로 아직 숨어들지 못하고 반짝이는 별들을 바탕으로 해서 온갖 색으로 반짝이며 산 정상에 박혀 있는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발코니에 서서 대자연의 이 파노라마가 점점 더 밝은 색조로 바뀌면서 머리 위에 있는 창공(canopy)을 시나브로 밝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라마승들이 “옴 마니 받메 훔”을 노래하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나는 링-쉬-라 은수자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말을 다시 들을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뒤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내 스승님이였다. 그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장엄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가 평소에 하던 친근한(affectionate) 방식대로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네가 여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아들아. 나는 네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모습을 보았단다. 그때 너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코몰하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검은 실루엣의 형태로 서 있었으며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너를 감싸고 있었단다.
그 모습은 이제껏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inspiring) 그림이었단다. 너는 햇살이 퍼져나가는 그 중심에 서 있었는데, 햇살이 네 주위로 더욱 더 넓게 퍼져나갔단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산을 배경으로 네가 두드러지게 서 있었을 때, 너의 머리와 어깨는 더욱 커보였단다. 그리고 산의 정상은 온 세상에 자신이 받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단다.
나는 이 모든 장엄한 모습에 깜짝 놀랐단다. 해오름을 보는 동안 나는 너와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단다. 아들아, 내가 몸으로는 너와 함께 하지 못하겠지만 영으로는 함께 할 것이란다.”
“오늘 아침에는 너에게 행동(action)에 대해 말하고 싶구나. 그러니 어서 앉도록 하자.”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있는 자리로 가서 함께 앉았다.
그는 곧장 시작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모른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시간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고요한 변모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한가운데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내 안에서 깊숙하게 듣고 있는 듯 했다.
“개인이 곧 세상의 모습이며, 개인의 변혁 없이는 세상의 변혁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란다. 세상은 지금 엄청난 투쟁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 투쟁의 원인은 바로 개인 안에 있기 때문이란다(The individual is what the world is, and without transformation of the individual there can be no transformation in the world, for the individual is the root of the strife in which the world now lives).”
“자, 아들아. 사람들은 개인이 혼란과 갈등에서 자유로워지기 전에 앞서 집단적인 변혁(regeneration)이 반드시 먼저 와야 한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나 사실(the case)은 그와 정반대란다. 개인의 변혁(regeneration)이 없다면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 역시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왜냐하면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변혁도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개인이 전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
나는 그분의 나지막한 음성을 영원토록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인류 전체의 산물이란다(We are the product of the whole).”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개인 각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서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인 조건들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묶여있지만 말이야. 개인으로서는 각자 서로 다르게 조건화되어(conditioned)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류 전체를 제한하고 있는 이 모든 조건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총체적인 과정에 속해 있다는 것을 너는 곧 알게 될 것이란다(You will see that, though each one may be conditioned differently, the total process of separation is this conditioning).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단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 네가 스스로 조건들로 인해 묶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자, 아들아. 세상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단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어 하지. 특히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로 세상이 나누어져 있고, 소위 종교 단체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는 지금의 경우에는 특별히 더 그렇지.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고, 이토록 불행하고, 이토록 큰 혼돈에 빠져 있단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행실(behavior) 때문에 일어난 것이란다. 이는 우리가 곧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자, 행동(action)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행동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 관념에 대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행동(action)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바르게 행동할(act rightly) 수 있게 될 것이란다.”
“행동이란 뭔가를 한다는 것(behavior)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패턴에 따라 그 조건을 강화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행동이 아니라, 반응(reaction)하는 것에 불과하단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패턴(pattern)을 습득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패턴에 속해 있는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란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관념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올바른 행동(right action)이 아니란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 패턴에 순응(conforming)하는 것일 따름이지. 그렇지 않니?
나는 네가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길(watch) 원한단다. 그래야 너는 지극히 중요한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란다. 또한 네가 이제 곧 돌아가야 할 세상 안에서 너는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행동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일정한 패턴에 순응하는 그 그릇된 과정(false process)을 이해해야 한단다. 순응(conformity)이라는 공격적인 행동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될 수 없단다. 올바른 행동 안에는 반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일정한 패턴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혼란과 갈등(strife)의 원인이 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때 너는 순응이라는 과정의 거짓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될 때 네 행동은 자신이 따르고 있는 패턴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며, 그 패턴이라는 것도 다른 패턴에 반대되는 것일 뿐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단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평화와 조화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란다. 그러나 네가 그 거짓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알아보게 된다면, 거짓된 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이며 너는 참인 것을 갖게 될 것이란다(But if you know the false as the false, the false will fall away and you will have the True).”
“올바른 행동이란 생명 자체에 대해 평화롭게 접근하는 것을 말한단다(Right action is your peaceful approach to Life Itself).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생명에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결코 아니지. 자아를 표현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슬픔과 갈등을 가져오게 된단다. 자아를 표현하는 이러한 행동은 관념의 결과일 뿐 참된 행동은 아니란다.
참된 행동은 네가 거짓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그 무한한 상태에서만 발휘되는(operates) 것이란다. 거짓된 것을 네가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너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이는 관계를 통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고. 아들아, 너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니?”
“네.”
나는 대답했다.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삶을 걸어 나가면서 서로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완전한 변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사물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ecause things cannot go on as they are).
이 사실은 관념, 전통, 체계, 패턴 등에 순응하는 과정 속에 있는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 활동에 대해 깨어 있으며(alert),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자에게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관념, 전통, 체계, 패턴 등은 그것들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우리를 재난의 벼랑 끝으로 이르게 하며, 우리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간단히 무시하거나 거기에 만족하는 행동은 이 절박한 눈사태를 저지하지 못합니다. 그 원인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변혁(regeneration)으로 이어지게 하는 올바른 행동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변모(transformation)를 일으키는 행동은 우리 삶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변모이어야지 시간에 걸친 변화여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인데, 오직,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 상태 안에서만 평온함(tranquility)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단다.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네가 말한 그것이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이란다. 세상 모든 곳에서는 다툼(strife), 빈곤, 비열함(dirt), 서로 다른 집단 간의 분쟁(struggle), 파업(strikes), 소규모 전쟁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며 존재하고 있단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에는 지구 차원의 분쟁으로 발전할 뿐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단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한 허구들(the false)이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이 문제를 지적으로만 토론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없단다. 이제껏 우리가 서로 말했던 내용들을 실제로 내면에서부터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변혁이란 있을 수 없지.
너는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내용을 반드시 다 잊어야 한단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누구의 말도 인용하고 있지 않단다. 그렇게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네가 그 누구도 따르지 않게 될 때라야 너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너는 반드시 네 스스로 이를 알아내야만(find out) 한단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다른 이들이 믿고 있는 것에 순응(conforming)하고 있을 뿐이야.”
“만약 네가 어떤 관념을 따르고 있다면, 그때 이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그때 너는 그저 순응하고 있을 따름이야. 그러므로 관념과 행동 중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먼저 오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란다. 만약 관념이 먼저 온다면, 너는 그 관념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한다는 것은 그저 그 관념을 따라 모방한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antagonism)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단다.
소위 우리의 문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전체 구조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관념들 위에 세워져 있단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혼란과 갈등이 있는 것이지. 세상은 서로 반대되는 관념들 때문에 나누어져 있지 않더냐?
관념의 모든 구조를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어떤 편을 든다는 것은 어리석으며 유아기적 행동이지.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가 성숙치 못했다는 증거지.
성숙한 사람은 인류의 고통, 전쟁,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try)한단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조건에 묶여 있는 이런 저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게 된단다.”
“만약 관념이 너의 어떤 행동을 형성하게 되면, 바로 그 행동 때문에 너는 더욱 큰 불행과 혼란만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그러나 네가, 어느 순간에 자신의 행동이 관념이나 기억에 근거해 있지 않음을 알아보게 될 때,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오늘날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식처럼, 모든 것을 뒤엎거나 새로 지을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단다.”
“너는, 이러한 상태가 어떤 관념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관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관념의 틀이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mould)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라야 그 상태는 가능해진단다.”
“관념이라는 틀에 따라 주형된(moulded) 행동은 참된 행동을 해친단다(detrimental).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따름이야. 변혁이란 스스로 항상-새로워지며, 다툼(struggle)으로부터 자유롭고, 서로 갈등되는 관념들이 갖게 만드는 적개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데, 관념에 근거하지 않은 행동이라야 이러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단다. 아들아, 내 말을 이해하겠니?”
“네.”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power)에 대한 욕망이나 계획을 품는 것이 전적으로 사악하며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너도 알 수 있을 것이란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생각하길 바라면서, 남들에게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앙을 초래하게 된단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사람들은(you) 미래에 어떤 비전이 있다고 자처하는 책략가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그들이(you) 혼란스럽기 때문이지. 그리고 자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들은(you) 지도자와 책략가를 갈아치우고 색깔을 나누곤(rend) 하는 것이지.”
“유일한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며, 이해와 친절함과 자비의 힘이란다. 실재의 이런 힘만이 홀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계획(scheme), 권력(power)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은 결코 사랑(Love)을 알 수 없단다.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야.
너는 이해(understanding)를 미룰 수도 있고, 머리를 써서(intellectually) 가슴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회피하려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그 공간 위로 일시적으로 관념이라는 다리를 지어 건너뛰려고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나 가슴에 선의(goodwill)가 없다면 불행과 파괴는 계속해서 늘어갈 수밖에 없게 된단다.
이것은 지각 있는 사람(man of sense)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지.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관념도, 미래에 대한 더 많은 청사진도, 더 위대하거나 더 나은 지도자가 아니야. 다만 선의(goodwill), 애정(affection), 사랑(Love) 그리고 친절이 필요할 뿐이지.”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란, 바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너,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야.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만 그렇게 변하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 만약 너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고 친절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이들보고 사랑하고 친절하라고 기대할 수 있겠니?”
“사랑이란 특정한 신(a God)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란다. 왜냐하면 사람들(you)이 모두 다 똑같이 특정한 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사실 신이라 하는 것도 사람들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렇게 신을 숭배하는 태도는 또 하나의 관념이 되어버리고, 이는 다른 신을 숭배하면서 다른 믿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더냐?”
“어떤 이들은 성화(an image)를 숭배하기도 하고, 돌이나 나무로 만든 상(statue)을 숭배하기도 하고, 신성(deity)에 대한 어떤 개념(conception)을 숭배하기도 하지.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잔인함 또는 다른 이들의 잔인함으로부터 회피하려는 기가 막힌 시도일 뿐이야.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단다.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야(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그리고 네 이웃이란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리란다(That is Truth). 아들아...
이는 단순한 관념에 그쳐서는 결코 안 되고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역동적인 변혁이어야만 한단다. 내면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바깥 역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for what the inner is, so the outer shall be).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란다.”
게쉬 림포체와 수도원장이 건물 바깥으로 나와 우리 옆에 앉았을 때 그는 말을 끝마쳤다. 잠시 뒤에 다른 이들도 따라 나왔다. 이 시간이면 해가 떠올랐고, 해가 높이 솟아오르면 언제나 그러하듯 꽤 따뜻해지고 있었다.
이 발코니는 게쉬 림포체가 아침 해를 볼 때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으며, 그는 대개 여기서 아침 차를 들곤 하였다. 잠시 뒤에 몇 몇 라마승들이 티베트에서 보통 마시는 차를 들고 나왔다. 다른 이들이 이 차를 좋아하는 만큼 나 역시 이 차를 즐기게 되어 버렸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으며, 퉁 라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올 때(edged in), 나는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티베트어로 말을 시작했고, 나는 연습 삼아 영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게쉬 림포체가 우리에게로 오더니 웃음을 지으며 기쁘게 말했다.
“지금 또 서로 마음-읽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You two mind-reading again)?”
나는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마음-읽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대사님이십니다. 대사님도 알고 계시잖아요(It was you who started it, you know).”
이 말에 우리 모두는 웃었다. 이제 퉁 라와 내가 서로 마음을 상당히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저녁이 되면 종종 마음 읽기로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퉁 라나 내가 틀리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사람들로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 초인적 존재(superhuman being)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전에도 알고 있었듯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다. 초인적 존재라는 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진리(the truth)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자연(natural)스러웠다. 자신의 어리석은 자부심(conceit)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만이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으며, 이런 무지가 구체적 상황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이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that is ignorance personified).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침이었으며 우리는 해를 즐기며 발코니에 계속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오자 게쉬 림포체는 말했다:
“가자, 아들아. 점심을 들자꾸나.” 나는 항상 그의 오른편에 앉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앞서 먼저 나에게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탁자에 둘러 앉았으며, 지난번에 우리가 모였을(seance) 때처럼 각자 동일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리 배치는 우리가 다 함께 모일 때면 언제나 같은 상태로 유지되었다. 내 친구는 탁자의 반대편 끝에 앉았고, 다르 창은 그의 오른편에, 말라파는 그의 왼편에 앉았다. 게쉬 림포체의 왼편에는 수도원장이 있었다. 퉁 라는 내 오른 편에, 창 타파는 수도원장의 왼편에 있었다. (만약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9장을 보면 어떻게 자리가 배치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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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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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ng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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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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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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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shi Rimpo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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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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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T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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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bb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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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설명을 바탕으로 그려본 것으로, 원문에는 설명만 나와 있다.
마음이 둔감해질(dull)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깨어 있었으며,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명료하며 민감해(clear and sensitive)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식사 후에 게쉬 림포체는 대생명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점심식사 후 그는, 조만간 우리의 다음 번 모임을 갖게 될 것이며 지난번에 그러했듯이 그때에 우리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공지하였다. 우리는, 이미 몸을 떠나 있는 분들은 물론이고, 링-쉬-라 은수자처럼 아직 몸을 입고 계시는 분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만남은 삼일 뒤인 일요일 저녁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는데, 이는 전에 링-쉬-라 은수자와 그 사이에 일정을 잡아 놓은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쁨에 넘쳤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는 게쉬 림포체에게, 다음 번 우리의 만남이 언제 잡혀 있는지를 몇 번이고 물어보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곧 내가 떠나야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는 6일 밖에 남지 않았으며, 나는 내 친구들 모두와 함께, 특히 게쉬 림포체와 이 소중한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싶었다. 참으로 그는 이 목적을 위해 트락체 수도원(Tragtse Gompa)을 떠나 라사를 넘어 그 먼 거리를 여행한 후, 내가 잠사르로부터 내 친구와 함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 후 게쉬 림포체는 나를 그가 묶고 있는 숙소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오후가 되면 그는 이렇게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시간대에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이 날은 그가 나에게 뭔가 굉장히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들아, 이제 네가 우리를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구나. 한편으로는 슬프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쁘단다. 내가 슬프다는 것은, 이제 몸을 입은 상태(in flesh)로는 너를 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영 안에서(in spirit)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기쁜 것이란다.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육신(earthly body)을 떠나야 할 때가 나에게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슬펐다. 그러나 그가 몸을 입고 있든, 몸을 벗게 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죽음도 분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게도 나는 이렇다고 말을 했다. 내가 이것을 이야기할 때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나는 그를 매우 흠모하게(attached) 되었으며 그도 이를 알고 있었다.
“자, 아들아.”
그는 말했다.
“다른 사람을 따르는 방식으로는 너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라. 이렇게 하는 행동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란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쉽게 그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지(the greater the personality, the easier it is to follow).
그러나 이렇게 되면 창조성을 막아버리게 된단다. 왜냐하면 추종자(the follower)는 결코 창조적일 수 없기 때문이란다.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더 이상 축음기에 올려놓은 레코드가 아니라 독창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나는 지금 너에게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단다. 이것이 변모(transformation)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란다. 그렇지 않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 말했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있을 때, 너는 자신이 무엇인지(what you are)를 알게 될 것이란다. 관계(relationship)란 자신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관계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것은 종종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고 그래서 너는 자신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된단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부터 회피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 이렇게 해서 너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단죄하고 비난하면서 다른 이의 그늘에 가려 살게 되는 것이지(and thus you live in the shadow of another while you condemn and criticise).
어떤 이들은 회피의 수단으로 새로운 사상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것들(the latest phase of new thought)을 찾아 거기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자기 자신을 보고자 한다면, 자신을 단죄해서도 안 되고, 무턱대고 수용해서도 안 되고, 정당화해서도 안 되며, 또한 거기에 동화되어서도 안 된단다(To see oneself there must be no condemnation, no acceptance, no justification, no identification).
네가 이러한 방식으로 하릴없이(impersonally)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다면, 너는 마음의 표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과, 그동안 네 앞에 가려져 있었으며 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반응들도 알아볼 수 있을 거란다. 이는 오로지 네가 생각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란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your thinking)은, 네가 그동안 축적해 놓은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너를 가두고 있는 조건(conditioning)인 것이지.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그때에는 자아와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자각(awareness)이 있게 된단다.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결코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지(for the thinker is not separate from his thoughts).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하지 않게 된단다. 이제 너는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지. 그리고 네 생각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자기 자신을,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조건(conditioning)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란다.”
“너는 왜 생각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isolate) 놓고 그것을 바라보길(look at) 원하는 것이냐? 왜 어떤 생각 하나만을 붙잡으려 하려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생각들로부터는 도망치려 애쓰는 것이냐? 만약 네가 네 마음 안을 들여다본다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야! 너는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고(dwell upon)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생각들을 억누름으로써 생각들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억압된 생각들은 네가 선택한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네 주의를 돌리기(distract) 위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신 혹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란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생각(right thinking)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다.”
“지난 날 너는 이렇게 하는 것을 명상(meditation)이라 불렀단다. 하나의 생각을 선택하고는 그것을 다른 생각들로부터 따로 떨어뜨려 놓은 후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말이야. 이렇게 하면서, 자신이 명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명상은 결코, 자신의 제한된 생각들(conditioned thinking)로부터 너를 결코 자유롭게 할 수 없단다.”
“왜 너는 집중해야겠다는(dwell upon) 특정한 생각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냐? 그것은 네가, 그렇게 하게 되면 그 결과로써 어떤 보상(reward)이나 만족(pleasure)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그 결과물 뒤로 숨어 다른 생각들로부터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하나의 생각에 집중(dwell on)하려는 바로 이 욕구(desire)가 자신의 마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다른 모든 생각들에 대한 저항(resistance)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이렇게 해서 네가 선택한 생각과 네가 억누르려고 애쓰는 다른 모든 생각들 사이에 끊이지 않는 싸움을 네 스스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란다.”
“바라건대,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야. 또한 이러한 방식은 네가 찾고 있는(looking for) 자유를 가져다 줄 수도 없단다.
그러나 네가, 생각이 각각 일어남과 동시에 그 의미를 밝혀낸다면(uncover) 이러한 생각들이 다시는 결코 떠오르지 않게(come up)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이제 그것들은 다 마무리가 된 것이지(They are finished with).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생각들만이, 이해되지 못한 생각들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란, 자신의 생각들(your thoughts)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thought)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만약 너의 마음이 편협하고(narrowed down), 제한되어 있고(limited), 통제받고 있으면서, 스스로의 욕구와 마음이 속해 있는 환경의 영향과 마음 자신이 축적해 놓은 지식들에 따라서 틀이 형성되어 있다면, 너무나도 명백하게 마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란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for self-protection)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이러한 과정은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반드시 두려움을 일으키게 될 수밖에 없단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가득한 마음이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실재인 그것(which is Real)에 마음을 과연 열 수 있을까?”
“네가 곧 네 생각들이라는 것을 네가 이해하기 시작할 때, 너는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란다(When you see that you are your thoughts you will begin to understand). 그러나 만약 네가 자신의 생각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면, 너는 생각들은 너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무엇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된단다.
그러나 생각들이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네가 만들어낸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너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단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자유로움이 있게 된단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 안에 실재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때에는 생각하는 자와 그의 생각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다는 것을 너는 알아보게 될 것이란다(Then you will see that there is no conflict between the thinker and his thought).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게 된단다.”
“이러한 것이 이해되고 나면 마음은 고요해지게 된단다.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고요함이 아니란다.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어지거나 훈련에 의해 고요해진 마음은 결코 실재를 알 수 없단다. 그러한 마음은 실재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단다.”
“너는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제한되어 있는 마음을 식별(discern)할 수 있을 거란다. 그런 마음은 묶여 있으며, 보잘것 없단다(petty). 그리고 신 역시 그 보잘것없는 마음에 의해 보잘것 없게 되어 버린단다.
사고-과정(thought-process)이 끝장이 나고 자신 안에 대립되는 것들과 싸우지(fight) 않고 갈등(struggle)하지 않게 될 때라야, 마음은 자유로워지고 고요해지게(still) 된단다. 바로 그 멈춤(stillness) 속에 더 넓고 더 깊은 존재의 상태(the states of Being)가 있게 된단다.
그러나 만약 보다 깊은 그것을 그저 추구하려든다면, 그것은 상상(imagination)과 추측(speculation)에 의해 만들어낸 관념으로 되어버린단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실재가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그쳐야만 하는 것이지(and this must cease before the Real is).”
“그러므로 이해가 곧 명상의 시작이며, 참된 명상은 실재에 이르는 입구란다. 여기에는 배워야 할 기술(trick)도 없으며, 따라야 할 기법(technique)도 없단다. 어떤 방법을 찾게 되는 그 순간 그런 시도는 너를 자유로움과 자기-이해를 향한 제일원칙이라는 길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자기-이해가 없다면 자유로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단다(Therefore understanding is the beginning of meditation, and true meditation is the gateway to Reality. There are no tricks to learn, no technique to follow, for that would lead you away from the first principle of freedom and self-knowledge, and without self-knowledge there is no freedom).”
“너는 반드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단다.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 오직 이렇게 했을 때라야 마음이 멈추게 되는 것이며, 이 멈춤(stillness) 안에서 실재는 자신(Its)의 무한한 존재(Being)의 상태 안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란다.
“아들아, 이렇게 할 때 참된 영감(true inspiration)이 있게 된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이지.
자유로운 마음, 과거에 축적해놓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실재 즉, 새로운 그것(the New)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있는 그 마음 말이야. 너는 반드시, 과거(the past) 즉, 오래된 그것(the old)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새로운 그것을 만나야 한단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말들은 보다 깊은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 말들은 내 마음 속으로 보다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나는 전에도 어떤 단일한 관념이나 생각에 마음에 다양한 형태로 집중한 바 있으나 그때에는 결코 경험해본 바 없는 이해와 자유가 그 순간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모든 과거가 내 앞에서 떠오르는 듯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자아라는 것을 알았으며, 자아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으며, 내가 그것에 힘을 부여할 때에만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란 나 자신의 환상으로서, 그 환상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나의 조건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 자유로움은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 들어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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