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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14장 본문

영성수행 비전/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14장

柏道 2021. 11. 15. 15:07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14장

 

트락체(Tragtse) 곰파1)는 티베트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들 중 하나였다. 트락체 곰파는 산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토빙 추 강의 계곡을 계곡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저 멀리에는, 라사에 있는 포탈라 사원의 금색 지붕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지붕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1) ‘Gompa’는 수도원을 뜻한다

일 년 중 이 시기가 되면, 밤에는 엄청 추웠으며 해가 지고 나면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밤이 되면) 하늘은 대체적으로 구름 없이 푸르렀으며, 수 백 만 개나 되는 별들은 하늘을 밝히며 바삭바삭 부서지는 수정같이 맑은 눈에 반사되면서, 계곡 전체로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시기도 있었는데, 그때에는 강한 눈보라(blizzard)를 일으킬 정도의 모진 바람을 동반하였고, 어떤 지역에서는 10 피트(9m)도 넘게 눈이 쌓이곤 했다. 이러한 강한 눈보라가 몰아칠 때면, 바로 몇 야드 앞도 거의 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야크와 당나귀의 줄지어 가는 행렬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계곡을 터벅터벅 오르내리며 티베트 안팎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겨울과 여름은 마치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이렇게 흘러갔다. 강한 눈보라가 몰아치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이런 것들에 관계없이 말이다.

때가 되면 어느 날 나는 오크 계곡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는 200 마일(320km) 가량 떨어져 있는 링마탕과 칼림퐁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오크 계곡까지 가려면 2 주일가량 소요될 것인데, 거기에 가려면 얼음과 눈으로 덮인 강과 산길(passes)을 넘어야 한다.

게쉬 림포체는 겨울에 여행을 할 때면, 수많은 야크들을 같이 데리고 갔다. 야크 떼가 앞서 가면서 길을 내게 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눈길을 가르며 가는 데 있어 야크는 최고의 쟁기 역할을 해주었다. 몇 마리의 야크가 쌓여 있는 눈을 가로 질러가다보면, 이내 그 위험천만한 눈 위로 길을 만들곤 했다.

우리는 이미, 돌아가는 길에 라사(Lhasa)는 들리지 않고 지나쳐가기로 동의했다. 자기들이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는 관료들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한다 해도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as nothing could be gained by wasting time on a few officials who thought themselves Christmas)!

그렇게 마침내 우리의 여행을 시작할 날이 왔을 때 우리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in high spirits). 우리는 수도원으로부터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물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무역로는 캬 추 강이 토빙 추(Tobing Chu) 강에 합류하는 지점부터 캬 추 강을 따라 나 있었다. 우리는 가다가 오른쪽으로 빠졌으며, 얼음을 찍어가며 토빙 추 강과 키 추 강 사이에 있는 삼각지를 통과하면서 길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남파(Nampa)라 부르는 곳까지 눈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길에 쌓여 있는 눈을 파헤치며 갔다. (무역로로 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갔던 이 길은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니었으나 꽤 좋은 편이었다2). 그리고 그 길은 토빙 추 강과 키 추 강이 합류하는 삼각형 모양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라사(Lhasa)에서 끝이 나 있었다. 우리는 룽상 관문(Lungsang Pass)을 통과하였으며, 라사보다 10 마일(16km) 가량 더 먼 곳에 있는 키 추 강에 도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20 마일(32km) 여행을 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무역로는 겨울이 되면 길이 질퍽해져 상당히 그 위로 걷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2) 번역 도중 ‘Kya Chu’‘Kyi Chu’가 번갈아 나오기에 처음에는 같은 강의 이름이 실수로 잘못 기재된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강을 뜻하는 듯하다.

둘째 날 4 시 정도에 우리는 종토 곰파에 도착했으며, 이 날은 거기서 쉬면서 밤을 묵었다. (곰파란 수도원을 뜻한다.) 이렇게 수도원을 거쳐 가는 길 역시 우리가 키 추 강을 가로지는 수고를 덜게 해 주었다. 키 추 강은 겨울에 상당히 위험한데, 어떤 부분은 얼어있고 어떤 부분은 얼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사를 거치지 않고 가는 길을 골라 가고 있었는데, 이는 그 지역 관리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길이었다(We had taken a completely unorthodox route by by-passing Lhasa).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관리들보다, 시간과 정력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전통과 예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진리(Truth)란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우리는 추-수르 계곡(Chu-Sur Valley)이라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이 지점에서 키 추 강은 옆으로 넓게 퍼졌으며, 수심이 얕아지고 물살이 약해지면서 수많은 섬들을 만들어냈고, 장소에 따라서는 그 폭이 2 마일(3.2km)도 넘었다. -수르에 있는 마을에는 기도의 벽(prayer wall)이 있었는데, 그 벽은 50 야드(45m) 가량 되었으며 거기에는 갖가지 색으로 색칠된 각종 신들(deities)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계곡도 상당히 기름진 땅이지만, 우리가 갔던 그 때에는 눈으로 만들어진 겨울 담요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캄바 라(Kamba La) 관문을 지나갔는데, 그 길은 강가로부터 시작되어 지그재그로 왔다갔다하면서 오르내림이 심한 길이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우리는 착삼 나루터(Chaksam Ferry)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에 있는, 초코량체 곰파(Chokoryangtse Gompa)라 부르는 언덕 위쪽으로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수도원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 수도원장은 게쉬 림포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꽤 아늑한 방을 제공받았다. 나는 밤 동안 푹 쉴 수 있어 너무 기뻤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나루터를 건너 창 포(Chang Po) 강의 오크 계곡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냡소 라(Nyapso La) 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길은 17,000 피트(5.2km)의 높이에 이르렀다. 냡소 라 길의 정상에 오르자 우리는 창 포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온 세계에서 가장 성스럽다고 불리는 저 위대한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이 눈에 아랑곳하지 않고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고, 그 강의 양 쪽에는 산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과묵한 파수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빠른 속도로(this swift-flowing river) 흐르는 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였다.

이곳에서부터 몇 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얌드록(Yamdrok)이라 부르는 청록색 호수와 페데 드종 마을이 보였다. 게쉬 림포체는 나에게, 그 날 저녁을 저곳에서 묵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동안 내가 사용했던 조랑말을 그곳 이장에게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 주었다. 스승님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환대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게쉬 림포체가 받는 환대는 그보다 훨씬 더 했다. 우리는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그날 밤을 거기서 묵을 수 있도록 숙박 시설도 제공받았다.

참으로 친절하게 빌려주셨던 조랑말을 다시 가져왔다고 그 마을 이장에게 말을 했더니, 그는 그 조랑말은 나중에 어떻게든 돌아올 테니, 일단은 내 여행이 끝날 때까지 타고 다니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느낌을 최소한도로 표현하자면, 매우 기뻤는데, 블랙 프린스는 여행하는 동안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으며, 나도 이 시점에서 다른 조랑말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게쉬 림포체는 이장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의 조랑말은 다시 너에게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나도 알겠네.”

참으로 화려한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요리가 나왔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열 개는 넘었던 것 같다.

우리는 먼저, 잘게 다진 고기를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으로 싸 먹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얇게 뜬 생선을 소금으로 절인 양파와 함께 먹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민달팽이 수프(slug soup)를 먹었다. (이 수프는 맛이 참 좋았다. 그러나 내가 먹은 것이 민달팽이 수프라는 것은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삶을 계란을 잘게 부순 것을 먹었고, 그 뒤로는 건포도가 들어있는 쌀밥을 먹었다. 다음으로는 잼으로 만든 푸딩(jam dumpling)을 들었다. 그 뒤로는 삶은 돼지고기와 얇게 썬 양고기를 먹고 다른 음식들도 먹었다. 티베트 맥주인 창(Chang)은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오늘날 만약에 내가 그때처럼 식사를 한다면 소화하느라고 엄청 애를 먹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때 당시로는 딱 적당했다.

페데 드종은, 내가 지난번에 여름이 끝날 무렵에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마을은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으며, 땅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풀을 뜯기 위해서 눈을 파고 있는 야크들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호수는 여름보다 훨씬 더 짙은 청록색(turquoise)을 띠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장관이었으며, 지금 이 순간도 그때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 여름이면 이곳은 다양한 색깔의 꽃들로 뒤덮이는데, 겨울인 그때 그 순간은 하얀 담요로 덮여 있었다. 물고기들은 여전히 호수 안에서 여기저기 헤엄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물에 소금기가 많아 얼지 않기 때문이다.

페데 드종에서 날씨는 몹시 추웠는데, 그나마 날씨가 좋아 다음날 다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데 태양이 떠오르자,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매우 더웠다. 그리고 이 시간 전후로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지게 된다. 기온차가 심한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이 내리거나 돌풍이 불지 않을 때는, 날씨가 상당히 좋은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 날 걸은 길은 나에게 새로운 길이었는데, 지난번에 내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할 때에는 랑 추(the Rang Chu) 지역을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낭가르체 관문(the Nangartse Pass)을 통과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날씨가 몹시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거의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홍고(Hongo)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 이장은 숙박을 제공하겠다면서 우리를 초대하였다. 그의 집 정중앙에는 커다랗고 둥그런 난로가 있었고, 우리는 밤에 그 난로 주위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앉았던 자리에서 별로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15000 피트(4600m) 높이에 있는, 카로 관문(Karo Pass)이라 부르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했다. 정상에 서자 우리는 저 멀리에 하얀 눈을 바탕으로 빨간 지붕을 이고 있는 집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강이 계곡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며 굽이쳐 흐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양쪽으로는 20000피트(6100m) 높이에 달하는 산들이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게쉬 림포체는 여행 계획에 대해 말해주었는데, 그날 저녁에는 곱시(Gobsi)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 날 저녁에 쟌체(Gyantse)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고, 거기에 있는 수도원에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기뻤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겨울 날씨인 것을 특별히 감안하고, 가는 길의 일부가 매우 험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딱 하루만 여행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아들아.”
그는 말했다.
세상의 지붕이라 부르는 이곳을 겨울에 너 혼자서 여행하지 않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를 너도 이제 알았겠지.”


나는 말했다.
이 여행을 마치고 나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여행의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으며 이 여행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 내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날 밤에 쟌체에 도착하였고 그곳 수도원장도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내 스승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번에는 게쉬 림포체와 함께 있게 되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는 같은 방들을 제공받았으며 집에 있는 듯 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음 날도 거기서 하루를 쉬었다. 나는 오전 10시에 일어났으며, 오크 계곡까지 남은 여행을 무리없이 할 수 있을 듯 원기가 회복된 것을 느꼈다. 휴식을 취하고 나자 여행길은 쉽게 느껴졌다.

야크와 당나귀의 수많은 행렬들이 길 위로 오가는 통에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낮 동안은 길이 진창이었지만 해가 지고 나면 서리가 내려 날카롭게 굳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티베트를 겨울에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소풍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 일만 더 여행하면 오크 계곡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다. 최소한 한동안은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서 게쉬 림포체와 몇 주 동안 지내게 될 것이고, 내가 완전히 이곳을 떠나기 전에 다른 친구들도 여기에 도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나보고 또 한 번의 경이로운 만남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수도원장은 우리를 보고는 기뻐했다. 그때 그는 매우 기뻐하며 나를 환영해주었고, 자신이 얼마나 나를 보고 싶어 했는지 말해주었다.

게쉬 림포체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전에 말했지 않나?. 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도대체 뭘 하기에 이토록 다들 다시 너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가?(I told you so. What do you do to people you meet when they are so eager to see you again?)”

그러고 나서 그는 진심으로(heartily) 따뜻하게 웃었다. 나는 그가 노르부를 두고 나에게 농담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를 기억할 거란다. 내 아들아.”

그곳에서 나는 매우 행복했다. 날마다 게쉬 림포체는 더 많은 가르침을 주곤 했으며, 수도원장은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 스스로 엄청나게 영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스승님이 그에게 해주었던 말들은 그를 변하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던 것이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7장을 보라).

게쉬 림포체는 종종 수도원장에게 우리와 함께 걷고, 자신의 말도 같이 듣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수도원장이 그렇게 해주어서 기뻤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도 우리에게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개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곤 하였다. 그러면 게쉬 림포체는 이야기를 풀어놓곤 하였다.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며 우리 셋은 모여 앉았고, 하루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완고한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What can you do with a rigid mind?)”

그는 대답했다:
전에 우리가 그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네가 질문을 다시 던졌으니, 다시 한 번 대답하도록 하겠네.”

그러고 나서 게쉬 림포체는 말을 계속 이었다: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고정된 관념들로써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지. 이러한 마음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란다. 왜냐하면 굳어버린 마음은 아무 것도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또한 그 마음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에 사로잡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은 진리는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만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완고한 마음은 참으로 무지한데, 왜냐하면 그 마음은 자신의 관념, 자신의 믿음을 넘어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이들의 생각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완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을 재빨리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란다.

완고한 마음이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란다. 따로 애쓰지 않아도, 흔히 배웠다 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기만(look into) 한다면, 그들이 다른 이들의 생각들로 얼마나 많이 꽉 채워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다른 이들의 생각이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고.

그래, 그들은 많이 배운(well read) 자들 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많이 배웠다는 것이 도대체 뭘 뜻하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이 배워 알게 된 것에 의해 묶여있게(conditioned) 된 것이야. 그리고 새로운 것은 하나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는 이제, 소위 지식인(the intellectuals)이라 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결코 할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언제나 권위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단다, 아들아. 맞는 말이야. 마음에 유연성이 없다면 이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 사람이 고정된 생각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굳어버린 마음을 알아보기란 정말 쉬운 일이란다(When one is freed from fixations, it is easy to detect the mind that is rigid). 그리고 완고해진 마음 안에 진리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

진리는,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자신의 조건을 자각하고 있는 마음을 언제나 펼쳐내고 있단다(Truth is always unfolding the mind that is aware of its own conditioning). 진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으로써 우주 안에 있으며, 또한 사람 안에서도 사람을 활기 있게 하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실하단다. 우주를 활기 있게 하는 생명(Life)과 인류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생명 사이에 분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사람이 스스로의 제한된 생각으로부터 풀려나게 되면, 생명은 사람의 신성한 본성을 펼쳐내게 된단다. 그 본성이란 바로 영원하고 항상-현재에 존재하며 죽음도 질병도 모르는 그리스도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대립된 상태 안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for It does not live in opposites).

그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할 따름이야(This is 'Being' now). 그러나 마음 안에,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있게 되지. 생명-죽음, 건강-질병, 성공-실패와 같은 것들 말이야. 이러한 다툼이 그치게 되면, 실재는 그 즉시 들어서게 되는데, 왜냐하면 실재는 항상-현재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for It is Ever-Present).


나는 말했다.
의식(the Consciousness)이 제한된 생각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롭게 될 때라야, 그때야 비로소,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자’(‘Being’)되어감’(‘becoming’)의 과정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 된다는 것은 언제나 미래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되어감’, 그것은 언제나 내일에 있으며,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자가 깨달아지기 전에 반드시 그쳐야만 하는 마음의 갈등인 것입니다.

라는 독립된 개체는 사라지고 온전한 존재자가 그저 있게 되는 것은, 내가 제한된 생각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것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제한된 생각으로부터 풀려날 때라야 가능합니다.”

맞는 말이로구나, 아들아.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는 존재자를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바깥세상을 보며 마음이 향해 있구나. 너는 신체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신으로 만들어낸 관념과 생각들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네 눈을 감으면, 생명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 이것은 바로 마음에 알려진 것들이야. 이것은 상대적인 것(the relative)이지, 실재(Reality)는 아니야.
이러한 모든 것들, 즉 알려진 것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라야 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단다. - 이것이 곧 마음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이지.

네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이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존재자가 그 즉시 있게 된단다(Being now is). 그러면 마음으로 결코 설명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각이 있게 되지(then there is an awareness that is Unknowable). 그 자각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자각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성 그 자체야!(It is now! And is not the created but is Creative!)”

너도 알고 있듯이, 존재자를 자각하고 있는 자와 그저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단다. 소위 진리를 공부한다고 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단계에 놓여 져 있단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에서 무엇인가로 되고 있지.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있는 자는 시간(time)에 사로잡혀 있지만, 존재자를 자각하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시간(Time)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지.

왜냐하면 그는 시간(time)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난 자유로움 안에서만 항상-현존하고 있는 그것(the Ever-Present)이 드러나게 되지.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 찰나의 순간 안에서 항상-현존하는 그것이 깨달아지게 된단다.”

흔히들 요가를 수행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깥 세상에 대해 감각의 문을 닫고 내면의 감각에 집중하는 방식 중 하나를 뜻한다지만, 이러한 방식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야.”

,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도, 정신적 활동일 따름인 집중의 방식으로는 정신적 활동이 아닌 그것을,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집중의 방식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을 때 오는 자유의 느낌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의식(Consciousness)이 마음이 변하는 모든 양상과 국면을 관통하여, 삼매라 할만한 생각의 집중 상태도 경험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여전히 되어감의 과정이며, 마음에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존재자에 대한 자각은 여전히 아닌 것입니다. 마음에 알려져 있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은 그것을 결코 밝혀낼 수 없으며, 창조된 것은, 창조되지 않았으며 다만 홀로 창조할 따름인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습니다(The known can never reveal the Unknown, the created can never reveal the Uncreated, which is alone Creative). 여러 스승들의 도움으로 되어감의 허구성을 직접 보고 나서야, 항상-현존하고 있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건으로 묶여 있는 마음 안에 있는 관념이 아닙니다. 이는, 자아가 영원한-현존(Ever-present) 속으로 사라져 버린 자리에,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창조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빗방울이 바다에 합쳐지면 그 즉시 바다가 되어, 바다와 똑같은 성분을 포함하고 있듯이, 사람 안에 계신 영도 모든 곳에 계신 영과 똑같습니다. 영은 나누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just as Spirit in man is the same as all Spirit, for Spirit is not divided).”

그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거룩한 것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런 신성한 이성적 접근조차도 이성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내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이성적 접근(Divine reason)조차도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며, 마음이 자기 스스로는 결코 알려져 있지 않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고요해지기 전에, 이성은 멈추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적 활동이 멈추게 됨으로써 갈등(struggle)은 끝이 나게 됩니다. 갈등이 끝나게 될 때 마음은 한없이 고요해지며, 그 고요함 속에 실재가 존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재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항상-현존하는 것으로서, 시간에 걸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마음 스스로 자신은 결코 실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 즉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덧붙여 말했다:
마음이 생각을 지어내기를 멈추었을 때, 저는 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실재가 그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실재가 무엇인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나는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의 갈등은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토론을 가슴 깊이 귀 기울여 듣고 있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수도원장이 말했다.

변모(transformation)가 뜻하는 바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변모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며, 무엇이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내가 갖고 있던 믿음과 관념들의 허구성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얻은 이 자유의 느낌을, 저는 도저히 말로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저 제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는 내 오래된 생각과 믿음들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이 참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게쉬 림포체는 나와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아들아, 네가 수도원장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을 새겨 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네가 네 말에 귀 기울일 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인상을 새겨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잠시 침묵한 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아들아. 순수한 생각이란 과거나 미래에 의해서도, 건강이나 죽음, 성공이나 실패, 선과 악, 신과 악마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인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이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의 결과인 것이며, 이렇게 해서 마음은 서로 대립되는 이원성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지(caught up in opposites).

그리스도는 사람을 속박하는 이러한 모든 조건들로부터 자유롭단다.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로서, 그 무엇에도 어떠한 방식으로도 조건들로 묶여 있지 않단다. 아버지의 생명(the Life of the Father)은 아들(the Son)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은 지금 존재하고 있단다. 아들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지. 너는 이 생명이 네 안에서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아도 된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지금 현존하고(Present) 있기 때문이지.”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성(active Intelligence)이 있는데, 이 지성은 몸 안에 있고, 또한 모든 생명체의 몸 안에 존재하고 있지. 이 지성은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이란다. 그것은 몸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그러나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what It is)를 알지 못한단다. 다만 그것이 그러하다는 것(that It is)을 알고 있을 따름이지. 그렇지 않니?”

.”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I exclaimed).
그것에 의해(by It) 내가 먹은 음식을 소화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내 심장은 몸의 모든 구석까지 피를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세포들을 활기차게 하고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지성이 몸 내부를 조정함으로써 여름이든 겨울이든 몸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창조된 것들은 창조되지 않고 다만 창조하는 그것(the Uncreated-Creative)에 대해 언제까지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다른 도구들처럼 언젠가는 닳아 없어지겠지만, 실재인 그것, 의식(the Consciousness)이자 생명 자체(Life Itself)인 그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으며 항상-현존합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껏 만들어진 기계 가운데 사람의 몸에 대응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몸 바깥에는 이토록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는 힘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모든 일들은 몸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의해 창조된 가장 정교한 기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마음 그 안에서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된 것은 그것을 창조한 자(Creator)에 결코 비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The most intricate machine created by man is created from within man himself, and therefore we realise that the created can never match its Creator).

창조된 것들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반면, 창조하는 그것(the Creative)은 변치 않고 항구하게 남아있습니다. 창조된 것은 상대적인 반면, 창조하는 그것은 영원하며 항상-현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감과 창조성의 원천이자, 사랑과 지혜와 권능의 무한한 원천과 변함없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Thus we are in constant touch with the Source of inspiration, genius, the limitless Source of Love, Wisdom and Power).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부득이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는 절대적인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있지만, 말을 함과 동시에 그것을 상대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그것에 대해 말을 하는 것도 마음 안에 있는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생각을 지어내기를 멈추었을 때, 나는 이 영감(Inspiration)과 창조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과 지혜(Love and Wisdom)를 말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게쉬 림포체는 대답했다.
만약 네가 관념, 이미지, 믿음, 전통 (같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자신이 그것들에 묶여 있다는 것과, 따라서 더 이상 자유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너도 쉽사리 알게 될 것이야. 왜냐하면 그때 너는, 자신의 믿음, 관념, 전통, 한계(limitation) 같은 것들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 그 무엇보다 위대한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야.”

이제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을 창조하고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순하게 자신의 관념, 자신의 믿음 같은 것들만 바꾼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던 감옥을 다른 감옥으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동안 믿고 있던 종교를 다른 종교로 바꾸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 종교의 교리가 자신들을 가두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only because they find orthodoxy restricting).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형식의 종교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여전히 마음에 속해 있는 일이며, 또 다른 감옥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관념은 실재가 아닌 것입니다. 새로운 감옥이 이전의 감옥보다 조금은 더 편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감옥이며, 그 안에는 여전히 마음을 제한하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이루고 있는 내용물들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 자신이 만든 감옥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
게쉬 림포체는 그이께서 하시던 방식으로 말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자를 알고 있지 못하단다(most people are not aware of 'Being'). 숱한 사람들이 무지의 바다 위에 떠다니며 변덕스러운 마음, 생각,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방향을 바꾸며 표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그리고 결국은 그런 변덕스러운 마음, 생각, 감정의 결과들로 인해 무지의 바다에 빠져 잠기게 되는 것이지.

그들은 건강과 행복을 찾는다며 이곳저곳으로 달려들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환경을 바꾸기까지 한단다. 건강과 부를 얻으려는(demonstrate) 노력 속에 그들은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단다. 애초부터 그릇된 방향으로 잡힌 상황 속에서 분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건들은 더욱 강화된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자. 그러나 진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그들에게 온 사람들을 방향타가 부서진 배에 태우고는, 여전히 무지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우와 파도에 흔들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 전부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맞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저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신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말합니다. 그들의 신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존재(some Being)에 대한 관념에 불과하며, 그들의 신은 그들 자신과 분리되어 있고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네 말에 공감한단다. 내 아들아. 그들은 대립되는 것들에 사로 잡혀 있지. 신과 악마, 선과 악, 건강과 질병(health and ill-health), 성공과 실패, 소유와 소유하지 못함, 고통과 죽음 같은 것들 말이야.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들이 실재인 것이지.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류란다. 그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결코 무엇인가로 되어있지는 못한단다(They are always becoming and therefore never Become).

그러나 존재자안에는 죄책감도 감각의 오류도 없단다(But in 'Being' there is neither sense of error, nor error of sense). 따라서 파괴적인 요소도 하나 없는 것이지. 왜냐하면 존재자 안에는 대립되는 것이 없으며, 극복해야 할 것도, 정복해야 할 것도 없고, 따라서 두려움도 의심도 선도 악도 없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만약 네가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너는 마음 안에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야. 그러한 것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활개를 칠 수 있는데(flourish),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버림으로써 그것들에 먹이를 주어가며 키우고 있는 셈이지. 그러므로 그는 그것들에 의해 갇히게(conditioned) 되는 것이란다.”

, 그런데 진리와 오류(Truth and error)가 뒤섞이게 되면, 그 결과로 건강과 질병, 선과 악, 삶과 죽음과 것들이 나오게 된단다. 그렇다면 진리와 오류 중에 무엇이 더 위대한지 말할 수 있는 자 그 누가 있겠는가?3) 그릇된 것을 알아볼(discernment) 때라야 그릇된 것은 떨어져 나간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건들로 갇혀 있는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
3) 한정된 마음으로는 진리와 오류를 가릴 눈이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진리는 마음 너머에 있으며, 자유로운 것이란다. 우리가 그릇된 것을 알아보고 이해하는 즉시 진리는 들어서게 된단다. 너는 지금 이 말을 이해하고 있지, 그렇지 않니?”
게쉬 림포체는 수도원장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대답했다.

그러자 게쉬 림포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힘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다(The power to see and hear does not originate in matter). 그 힘은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야. 그래서 마음이 조건들로 묶이게 되면, 몸 역시 그에 따라 묶이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나 마음은 물질에 대해 영향력을 전혀 없으며, 마음이 느끼는 것들을 나타낼 때에만 마음에 대해 몸이 반응하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란다(Yet there are those who will say that the mind has no say in the matter, and that the body talks back only when it reproduces what the mind feels).”

우리는 이를 몸과 관련된 문제라 말하지만, 나의 과학적 앎은, 몸은 이러한 것들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일 뿐이고, 에너지를 조정하며 형성 과정 배후에 있는 것은 바로 대생명(Life)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단다(We call the body matter, but my Science has proved that the body is energy in formation and the directing power behind this formation is Life).

무지한 자들은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시작하는 대신 가장 낮은 차원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지.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반대의 방향에서 생각하여, 모든 것들의 원천이 되는 그것에서부터, 형성되어 나온 것들을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꾸나.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언제나 무한한 존재자(Infinite Being)에 이르게 될 것이란다. 무한한 존재자 안에서는 분리도, 오류도, 대립되는 것도 없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류-환상이 존재하는 육체의 의식(the physical consciousness)은 사라져 버리고, 실재의 의식(the Consciousness of Reality)이 그 자리에 즉각적으로 들어서게 된단다.

몸은, 영원하며 항상-현존하고 있는, 한 생명(One Life)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단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몸에 집착하게 된다면, 실재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가 몸 안에 있는 동안에도 자유롭단다. ‘나는 생명이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나는 이제와 영원토록 그대의 신, 주이다('I am the Life'. He who sees me sees the Father, I am the Lord thy God now and forever).”

게쉬 림포체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이 빛에 휩싸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더니 우리와 세상을 축복하려는 듯 팔을 뻗었고, 그 순간 나는 수천 볼트나 되는 강력한 전기 에너지로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에게 하는 강론을 마쳤다:
오 무한하신 하나여, 당신께서는 모든 농작물에 물을 주시며, 그것들은 사람의 도움 없이 자라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그저 씨를 심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땅을 만드시고, 땅에 햇볕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당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지 못했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기에 나는 기쁨에 넘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무한하신 하나여.”


* * * * *


거기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변모의 과정 중에 있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고양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멈춰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움직이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느꼈던 환희의 상태 속에 머물러 있기만을 바랬다.

말로는 그이의 지혜와 사랑이 뿜어내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써놓은 말들은 그가 말했던 내용들의 향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 환희(ecstasy)를 다시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다소 흐른 후 그는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갔다. 해는 지기 시작했으며 우리도 그를 따라 발코니에 서서 계곡을 바라보았다. 코몰하리4)는 오렌지 빛으로 물 들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거대한 조각상처럼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해가 짐에 따라, 하늘은 영롱한 분홍빛과 빨간 빛이 어우러진 색깔로 변해갔다.
4) Chomolhari, 역자 주 : 산을 말하는 듯하다

계곡 전체를 덮어주고 있던 눈 위로 모여들고 있는 구름이 계곡을 감쌌다. 그리고 하늘빛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짙은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구름은 저 장엄한 코콜하리 산을 덮기 시작하더니 정상만 간신히 구름 위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수도원 뒤쪽으로 해는 완전히 넘어갔으며, 별들이 저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저 아래에 있는 구름에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게쉬 림포체의 말로부터 우리 안으로 빨아들인(gleaned) 황홀한 생각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그 모든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자연(Nature)이 그려내는 이 장엄한 광경이 뿜어내는 매력은,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렇다. 나는 그 순간 지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듯 느껴졌다.

[출처] 14장|작성자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