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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5)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5)

柏道 2021. 3. 3. 13:08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5)

 

박사논문

2015. 8. 25.

, 다석사상, ,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5)


3.2.1. 무(無, nothingness)와 공(空, emptiness)의 개념
동양사상가와 대화를 한 신학자 중에서 몇 안되는 한 사람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의 책,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존재(存在)에 대한 의문은 비존재(非存在)에 대한 이해 부족(不足)에서 온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비존재(非存在)에 대한 이해 부족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지만 극복할 수 있을 지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틸리히는 비존재(非存在)의 충격과 이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통하여 다음의 문제에 접근한다.

비존재(非存在) 는 문자적으로 존재와 관련해서 아무 것도 아닌 무(無)이다. 비존재(非存在) 라는 말 그 자체가 지시하듯이 존재론적 타당성의 차원에서 존재(存在)는 비존재(非存在)를 선행한다. 하느님은 ‘존재(存在) 그 자체’이다. ‘존재(存在) 그 자체’이기에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존재와 나란히, 그리고 다른 존재 보다 우월한, 어떤 존재자의 실존(實存)으로서 이해될 수 없다. 하느님과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서, 폴 틸리히는 존재(存在)의 힘이나 비존재(非存在)의 힘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은 ‘존재 그 자체’인 것 같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비존재(非存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비존재의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존재(存在)의 힘이나 비존재를 극복할 수 힘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은 ‘존재 그 자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름대로 틸리히는 ‘무’(無)를 본래적 존재자의 대립 개념으로서, 즉 본래적 존재자의 부정으로서 표현한다.

앞에서 다께우치가 지적했듯이, 서구 사상은 존재 개념의 바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양사람들은 존재의 입장에 선다는 좋은 예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틸리히는 대승불교의 ‘무’(無)라는 말이 ‘빈 것’이나 ‘의미없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무(無)를 절망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폴 틸리히는 불안과 같은 상태에서 만날 수 없는 ‘절대무’(絶對無)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이 동양인과 서구인의 무(無)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고 다께우치가 말하는 이유다. 여기에서 무(無) 는 무엇보다도 ‘절대무’(絶對無)로 간주되어야 한다.

종교철학자이며 카톨릭 철학자인 벨테(Bernhard Welte)는 이 문제에 대하여 틸리히 보다 더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 무(無)는 공허한 무(無)가 아니다. 윤리적으로 그리고 근복적인 결단을 통해서 이 무(無)를 사람들은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는 무(無)가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결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너 자신의 마음을 깨쳐 바닥이 없는 적막한 무(無)에 발을 내어디더라. 그리고 믿어라. 이 무(無)의 조용한 힘은 일반적으로 위대하고 강하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무(無)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교와 불교 사이의 서로 다른 인식에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궁극적 존재에 넓은 이해의 문을 여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벨테(Welte)의 말은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개념으로만 이해되는 신(神)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하도록 보완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無)를 아시아인들은 보다 명확하게 공(空)이라고 말하지만, 서양사람에게는 ‘공허(空虛)한 무(無)’로 이해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반론이 제기되면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이에 대화는 더욱 어렵게 된다고 발덴펠스(Waldenfels) 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언어라 할지라도 항상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인식아래 본 논문은 다음의 두 가지 관점에서, 절대자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해를 하고자 한다. 우선, 동양인과 불교도에게 절대무(絶對無)나 공(空)은 어떻게 이해되는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의 이해를 통해서 오늘날 서양 그리스도교의 사고의 지평에서는 절대무(絶對無)나 공(空)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절대무(絶對無)가 다양하게 전개되어온 역사나 배경을 여기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한국의 종교다원주의자인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통해서 무(無)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을 이해하고자 한다.

공(空)이나 절대무(絶對無) 그리고 전후의 문제에 앞서 있고, 이것과 저것을 넘어 있는 적막(寂寞)의 문제를 불교인들이 다루는 방법으로 조명하는 것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본다. 공(空, Sūnyatā)이라는 말은 무(無)라는 말이나 ‘상대성’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서양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혼돈(混沌, chaos)나 비실재(non-reality)의 개념으로, 또는 철학적이고 시적이거나 종교적 으로 표현되어지는 긍적적인 것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공(空)을 이해한다고 불교학자 스트렝(Frederick J. Streng)은 지적한다. 그러나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이 비어있다는 제법공상(諸法空相)의 이론으로서 공(空)과 무(無)의 사상은 불교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이다.

불교의 공(空)의 이해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본 논문의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무엇보다도 공(空)의 역사를 논할 때, 부처의 출가 이야기가 그 출발점이 된다. 또한 앞에서 말한 제법공상(諸法空相)에 대하여 말한 인도 불교철학가 용수(龍樹, Nāgārjuna) 의 이론을 알아보고, 공(空)의 논의에 초점을 맛추고자 한다. 한국에서 절대무(絶對無) 사상이 잘 적용되고 있는 곳은 선불교(禪佛敎)이다.


유영모는 말한다: “우리 생명이 피어 한없이 넓어지면 빔(空: 절대)에 다다를 것이다. 곧 영생하는 것이다. ‘빔’은 맨 처음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근원이다. 하느님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린 유영모의 절대무(絶對無) 이해를 마지막으로 알아본다. 다석 유영모가 새벽에 일어나 실천한 명상과 요가를 통하여, 다석 유영모는 절대무(絶對無)를 어떻게 하느님으로 생각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