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7) 본문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7)
박사논문
2015. 8. 25.
공, 다석사상, 상대진리, 속체,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절대진리, 진체, 침묵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7)
예수회 사제인 발덴펠스(Hans Waldenfels)는「절대무」(Absolute Nothingness) 라는 책에서 무(無)에 관한 지식(知識)은 더 이상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고 지혜(般若, prajñā)이고, 절대진리(絶對眞理: 眞諦, paramārtha satya)라고 말한다. 절대무(絶對無)는 일체의 현상적이고 상대진리(相對眞理: 俗諦, samvrti satya) 의 배후에 존재하면서, 그 가운데 말없이 말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절대진리(絶對眞理: 眞諦)나 궁극적인 실체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 글로 묘사할 수도 존재이다.
“절대에 서야 상대는 끊어진다. 상대에 빠져 헤매지 말고 절대에 깨나야 한다. 자가가 무지(無知)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상대지(相對知)가 많아도 절대지(絶對知)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진리를 깨치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고 다석 유영모는 말한다. 이 절대진리(絶對眞理)의 깨달음의 직관(直觀)은 단지 부처의 위험있는 침묵(沈默)으로 표현되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모든 형태있는 것은 본래 공(空)이므로 완전한 지혜(智慧, prajñā)는 이에 대해 무관심하여 어떤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이 지혜(智慧) 로부터 받을 수 있는 단지 하나의 대답은 침묵(沈默)이다. 불자들에 있어서 지혜의 가장 심오한 표현은 부처의 침묵(沈默)으로 대변되는 침묵(沈默)이다.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E. Conze)는 공(空)이란 이론이 아니라 무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사다리라고 말한다. 콘즈에 의하면 ‘공’이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인 니르바나(涅槃, Nirvana)에 이르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존재를 묘사할 때, 일상적인 말로 궁극적인 존재를 적절하게 설명할 용어가 없다고 스트렝 (Streng)도 그의책, 「공」(Emptiness: A Study of Religious Meaning)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들이 역설적인 표현을 하듯이, 스트렝은 “공은 … 이다. 또한 공은 …아니다” 즉,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병행하는 논리로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용어 ‘공’은 상대적인 용어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스즈끼(Suzuki)는 주장한다. ‘공’은 상호관계, 주관(主觀)과 객관(客觀), 생(生)과 사(死), 신(神)과 세계,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긍정과 부정의 어떤 형상을 넘어서 있는 ‘절대공’(絶對空)이라는 것이다.
‘공’은 무진장(無盡藏)의 ‘한 데(空)’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정의한다면, 이러한 개념설명은 인식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의 ‘공’이론은 서구사람에게는 잘못 이해된다고 해방신학자, 피에리스(Aloysius Pieris)는 지적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空)이나 ‘허’(虛)라는 말을 서구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空)이나 허(虛)라는 말을 사용하면 서양사람들은 당황한다.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동양사람들은 종교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반면에, 서양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으로 피에리스(Pieris)는 이해한다. 이러한 ‘공’이나 ‘허’는 연구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직관적인 깨달음으로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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