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6)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6)

柏道 2021. 3. 3. 13:13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6)

 

박사논문

2015. 8. 25.

, 나가나주, 다석사상, 없이 계시는 하느님, 용수, 유영모, 윤정현, 중관파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6)

 

나중에 논하겠지만 공(空)의 기원은 부처님의 생애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부처의 출가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침묵(沈默)이 그 기원이다. 적어도 부처의 실존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에서 그 출발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불교 사고체계는 중도론(中道論, a doctrine of the Middle-Way, via media)으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중도론(中道論)이 불교교리의 양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모든 것이 실재이다’ 라는 교리와 ‘의식(vijñāna) 만이 실재’라는 양극단의 교리, 즉 극단적인 실재론(實在論)과 극단적인 공설(空說)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이 중도설(中道說)이다.

 

니르바나(nirvana, 涅槃)나 공(空)은 경험적인 감각의 세계에 고유하게 있는 실재를 넘어 있는 것이라고 나가주나(龍樹, Nāgārjuna)는 주장한다. 공(空)은 그 자체 실재(實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바나의 비실재(非實在)의 경험 속에서 깨달아 지는 것이다. 용수(龍樹)는 이 공설(空說)이 부처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스스로 자각 하고 있었다. 용수는 근본중송(根本中頌, Mūlamadhyamakakārikās)의 말미에서 부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일체의 관점을 끊기 위해서 자비심을 가지시고 정법(正法)을 가르치신 부처님께 나는 귀의한다. ... (27:30).” 철저한 자기 방하(放下)와 침묵(沈默)의 명상을 통하여 추구되는 진정한 무(無)는 소위 사구(四句, tetralemma)를 매개로 해서 얻어진다. 모든 문제를 논의하게 되는 이 사구(四句) 논리는 반대자의 명제 자체가 오류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논리전개 방법이다. 이 논리는 존재(存在)와 비존재(非存在),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이라는 네 가지의 조건을 조합(組合)한 논리이다. 두 논리는 긍정되고 동시에 부정된다. 존재와 비존재가 긍정되고, 동시에 존재도 비존재도 부정된다. 이 사구(四句) 논리는 어떠한 주제(主題)를 논의하더라도 적용할 수 있다고 불교학자 무르티(Murti)는 말한다. 사구(四句) 논리는 양 극단 (極端)의 주장을 극복하는 데 사용됨으로, 모든 문제에 있어 양 극단의 중도(中道)의 길을 취하게 한다.

 

이와 같이 중관파(中觀派, Mādhyamikas)는 모든 입장에서 등거리의 위치에 선다. 다시 말해, 중관파(中觀派)는 양 극단의 주장의 중도(中道)의 입장을 취한다. 이 중도(中道)의 관점은 본래의 어의가 의미하는 입장이 아니고, 개념이나 언어를 넘어 있는 입장이다. 중관파가 말하는 입장은 그 자체가 입장이기를 바라지 않는 관점이다.

오히려 ‘중’(中)은 모든 개념과 언어를 넘어 있는 초월적인 것이며, 모든 사물을 개관(槪觀)함에 있어 초월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무르티(Murti)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을 확립하는 일에 용수(龍樹)가 전력을 다하였다는 것은 근본중송(根本中頌)의 다음의 문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즉 근본중송(根本中頌)에서 용수(龍樹)는 또한 ‘공’ (空)에 얽매어서 논증하는 것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공성(空性)에 대하여 논쟁할 때마다, 논파에 관해 말한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모든 것이 논쟁을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논파되지 않는다. 여전히 논파해야 할 것이 나타난다. 공성에 의해서 해설을 할 때, 증명되어야할 것이 있다면, 증명을 하는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증명해야 할 것이 나타난다”(4:8-9).

 

“공성은 일체의 관점으로부터 떠난 것이라고 승자, 불타 (佛陀)들에 의해 설(說)해졌다. 하나의 관점으로서 공관 (空觀)을 가진 사람은 불치자(不治者)라고 불리운다”(13:8).

 

공사상(空思想)을 근본중송(根本中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이라고 말해서도 안되고 불공(不空)이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동시에 공과 불공이 존재한다고 해서도 안되고,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도 안된다. 공을 말하는 것은 올바른 인식을 전달하기 위한 가설(假說)로서 말해졌다(22: 11). 부정신학에서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긍정을 위한 이중부정 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석 유영모도 하느님을 이해하는데 있어 양극단을 피한다. 예를 들면, 다석에 있어 하느님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없음은 더없이 크고 옹근 것을 말해, 있음은 뭇 작게 나눠진 것을 말해,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것은 수효가 많아, 무극태극은 하나이며 으뜸자리이다. 유영모의 하느님 개념은 절대개념에서 ‘없음’을 말하므로 이 세상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없음’ (無)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절대(絶對)이기 때문에 절대(絶對)인 무(無) 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앞에서 말한 다석 유영모의 시(詩)에 나타나는 ‘없음’이 절대이기에 단지 ‘없음’ 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위의 시에 나오는 ‘무극’(無極)이라는 말은 도덕경(道德經) 28장에 나오는 말이다. 무극(無極)의 개념은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주렴계에 의해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채택되고 수정보완 되었다. 또한 태극(太極)이라는 말은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 서두에 나온다. 태극(太極)은 존재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현상화된 절대(絶對)를 뜻한다. 이와 같이 ‘없음’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이 어떤 존재의 개념으로 말할 수 없다고 유영모는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