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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2)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2)

柏道 2021. 3. 3. 13:04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2)

 

박사논문

2015. 8. 25.

귀일, 다석사상, 서명,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장재, 장횡거, 탐진치, 합일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2)


2.3.5. 장횡거의 불교와 노장사상 비판
「서명(西銘)」에서 장횡거는 “살아서는 나는 일을 따르고, 죽게 되면 나는 편히 쉬련다” 고 하였다. 이 말은 장횡거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의 생사(生死)에 대한 태도는 불교와 도교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을「정몽(正蒙)」에 나오는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性)을 다하고 난 뒤에, 살아서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역시 죽어서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불교는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을 찾고 결국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반면에, 삶을 쫓아서 존재에 집착하는 도교는 불노장생을 추구한다고 장횡거는 비판한다. 이들 사상은 서로 다르나 자연의 일반원리를 깨는 가르침들이다. 그러나 우리 성리학자들은 응축된 기(氣)가 나의 몸을 이루고 팽창한 기(氣) 또한 나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삶이 얻어 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 또한 잃는 것이 아니다’는 자연적인 귀결에 이른다고 장횡거는 주장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삶을 무시하거나 생명을 연장하지 않아야 하는가?” 다시 말하여, 불교도나 도교인들의 삶의 태도와는 달리, 유학자들은 삶을 성실히 살아야 하고,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깨거나 장생(長生)을 추구하지 말고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해야 한다고 장횡거는 말한다. 따라서, 사람이 그날에 할 일을 성실히 하고, 죽움은 모든 것이 왔던 태허(太虛)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서는 인간사에 성실하고 죽어서는 평안히 쉰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장횡거는 강조한다.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를 다석 유영모는 자신의 일일주의의 종교생활에 적용한다. 사실, 이러한 성실한 일상 생활은 일반 성리학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 도교와는 거리를 두고 유가(儒家)로 자처했던 이유는 성리학자들의 이러한 삶의 태도이라고 풍우란(馮友蘭)은 말한다.

우주적 사랑으로서 인간애(人間愛)와 허공(虛空)으로서의 우주관 그리고 기(氣)의 수축과 팽창의 활동을 통해 ‘있음’(有)과 ‘없음’(無)으로서의 절대자를 이해하는 다석 사상은 장횡거의 생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유영모는 불교에 대한 비판을 제외하고. 장횡거의 거의 모든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석은 어느정도 가감을 통하여 장횡거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장횡거는 불교를 비판하고 반대하지만, 다석은 주희처럼 성리학의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사상도 긍적적으로 받아들인다. 다석의 이러한 시도에서 동양적 사고인 조화와 상호보완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상호보완화 화합의 사고에 입각하여 다석은 태극(太極)의 개념을 발전시켜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학 사고틀에 적용시킨다.

2.3.6. 하느님과 하나로서 천인합일(天人合一)
다석 유영모는 조화와 상호보완의 종교적 사고 바탕위에서 장횡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고를 자신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적용시킨다. 다석은 대동정신(大同精神)을 실천함으로서 하느님과 합일(合一)을 추구한다. 즉, ‘하나’로 귀일(歸一, return to the one)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하늘과 합일(合一)의 길이다” 라고 다석은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는 앞에서 말한 장횡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석은 ‘하나’인 하느님에게로 귀일(歸一)하고 합일(合一)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고, 탐(貪, desire, lobha) 진(瞋, hatred, dosa), 치(痴, delusion, moha)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석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삼독(三毒)을 하나의 원죄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 자아(眞我)를 얻기 위해서는 삼독을 제거해야 한다고 다석은 말한다. 영적이고 지적인 수신과정을 통해 삼독을 제거하고 얻어지는 깨달음의 신앙이 다석의 신앙의 길이다. 우리에게 욕심이 없을 때 마음은 안심되고, 마음이 안심되어야 우리의 생명이 힘차게 일어선다고 다석은 말한다. 그리고 몸의 고픔을 놓아 안심이 되고 얼을 이고 설 때 입명(立命)이 된다. 그러므로 유영모는 얼을 깨우쳐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나 석가처럼 도(道)를 꿰뚫을 관도(貫道)의 기량을 길러야 한다. 성경에도 불경, 도덕경처럼 관도(貫道)가 있다. 그걸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기량(器量)이 모자라서다. 예수, 석가는 기량이 높아서 이 우주라는 편지, 이 세상이라는 편지를 바로 읽고 바른 길을 걸었다.”

 

다석의 이러한 사상은 자기 수신을 통하여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참 자아 안에 있는 ‘하나’인 하느님과 합일(合一)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다석의 절대자와의 합일(合一)의 개념은 신비적 일치를 의미한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자나간 무지(無知)를 바로 보고 잊은 전체(全體)를 찾아야 한다. ‘하나’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이 하나를 얻다는(得一) 것이다. 어떻게 하면 득일(得一) 하나. 큰 내 속에(大我中) 이것이 있다. 그러나 마침내 한아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곧 대아중(大我中)이다. 큰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그리고 ‘나’ 이런 생각을 가끔 자주 아여볼 필요가 있다.

유영모의 합일(合一) 사상은 다음의 성경 귀절에서 유래한다. “성경은 하나에서 나와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은 하나로 돌아가자는 것을 외친 것이다. 예수는 늘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요한14: 10-11; 17:21).”


결과적으로 유영모가 추구한 종교적인 목적은 ‘하나’인 하느님과 합일(合一)하는데 있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철저한 자기 수행을 하였다. 간디가 하느님께 헌신한 삶을 산 것처럼, 불교과 유교전통 안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자기수행과 깨달음을 통해서 다석 유영모는 하나로 돌아가는 귀일(歸一) 신앙을 철저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