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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수업 기적수업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구원과 바울의 기독론의 차이와 공통점 본문
기적 수업
기적수업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구원과
바울의 기독론의 차이와 공통점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공히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잘못된 자기 인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결백과 무죄의 영적 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단지 인간이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시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인식이 구원의 시발점임을 가르친다.
기적수업에서 ‘죄’를 ‘분리’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재정의한다.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아담의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사건을 상징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분리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분리 이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홀로 이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인간은 에덴 동산의 기쁨과 평화가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사는 존재가 되었는데, 교회에서는 이 태고에 일어난 분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는데, 이는 두번째 아담인 예수가 첫번째 아담이 지은 원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죄로 인한 분리의 삶을 벗어나게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친다.
예수님이 직접 1인칭 화자가 되어 말씀하시는 기적수업은 속죄에 대해서 동일한 비전을 가르치고있지만,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신화같은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가르치는 대신에 분리의 해제와 치유라는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구속을 설명하고 있다.
기적수업 2장의 분리의 기원(19페이지)에 따르면,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에서 인간이 경험했던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경험은 인식의 차원에서 일어난 것일 뿐이지 실재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일은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경험했던 분리의 경험은 아담이 생각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착각한 인식의 오류일 뿐이지 실제로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실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원죄 의식을 해제하는 일은십자가의 희생과 같은 속죄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믿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뿐이라고 설명한다.
기적수업의 이러한 설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 기독교적인 해석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확립시킨, 인간의 올바른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기독론의 교리는 구원은 바른 인식의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적수업처럼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즉 믿음으로만 죄 사함을 받는다는 단순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예수를 의지해서 너의 무죄를 주장하라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인식 차원에서 마음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는 영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원은 인간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고, 그러한 사실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운 진리이고, 구원은 바로 이러한 진리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수업은 전후 맥락없이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믿을 것을 요구하지 않고,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 위에 세워졌다고 가르칠 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하는 듯한 기적수업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무척 분노하거나 황당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기적수업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하나님은 그러한 분리를 결코 허락치 않는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비전을 가르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공히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잘못된 자기 인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결백과 무죄의 영적 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단지 인간이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시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인식이 구원의 시발점임을 가르친다.
사도 바울의 비전을 따라서 십자가의 희생을 믿어서 구원의 영적 비전을 나의 것으로 삼아 여정을 시작하거나 기적수업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듯 처음부터 분리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영적 비전을 받아들이면서 구원의 길을 달려가기 시작하거나, 상관없이 두개의 각기 다른 형식은 하나의 동일한 목적지와 결과에 이르게 해 준다.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존재로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구원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다른 두가지 설명은 그 형식 논리가 하나는 신화적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이라는 의미에서 다를 뿐이지 본질적 의미와 목적지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기적수업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에 있지 잠시 있다가 썩어 사라지는 육체에 있지 않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예수의 성스런 육체의 희생을 통해서 죄가 사해진다는 논리는 영적인 관점에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 21세기의 인간들에게 기적수업의 논리는 사도 바울의 신화적 해석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2천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수난을 구원의 상징으로 삼아온 기존 기독교 교회에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의 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육체의 죽음 그 자체로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일인지는 4대째 내려오는 모태 신앙인으로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적수업은 그 같은 교리의 형식 논리 자체를 무조건 받들지 않는다.
나는 기적수업을 기독교 교리에 대해 각을 세우기 위해 읽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의 문지방이 닳고 닳도록 다니면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기쁨이 없고 늘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삶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기적수업을 만났고 읽을 뿐이다.
기적수업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구원은 어떤 특별한 교리에 대한 확신이나 고백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적수업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두렵고 불안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운 삶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하고 준비한 것이 결코 아님을 깨우치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완벽하고 영원하게 축복받은 존재로서 창조하셨는지를 인지하고 깨닫는 지점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식으로 구원에 대한 영적 비전을 가르치실 이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성령 외에는 누가 있겠는가? 기적수업은 기독교를 초월하여 모든 다른 종교인 들 뿐 만 아니라 무종교인들에게 즉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구원이란 무엇이고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창조했고, 인간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도록 창조되었는지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서, 완벽하고 영원한 존재가 누리는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도록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기적수업 2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는 에덴 동산에서 실제 일어난 원죄의 기원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아담이 깊은 잠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쫓겨났다는 단순한 악몽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야기한 실재 사건의 기원처럼 인식하는 일은 뱀의 거짓말에 귀 기울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담이 ‘뱀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을 때 그가 들은 모든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너는 거짓을 계속 믿기로 선택하지 않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잘못된 지각에 지나지 않기에,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 꿈에서 보는 것은 생생한 실재처럼 보인다. 성경에서 아담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기록은 있지만 잠에서 깨어났다는 구절은 그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아직 포괄적인 재각성 또는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했다. 네가 투사를 계속하는 한, 즉 계속 잘못 창조하는 한 거듭남은 불가능하다.”(기적수업 19페이지-3)
기적수업은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분리되고 추방되었다는 잘못된 확신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원하고 완전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절대로 변할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했다는 사도 바울의 비전은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신화적 언어로 선포하고 있다. 기적수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직설적이고 분명한 언어로 구원의 영적 비전을 선포하고 있는데,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관계를 가진 존재이니 너희는 마음을 바꾸어 이를 인정하고 너를 축복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가르친다. 이를 인정하는 일은 분리라는 거짓된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며, 이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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