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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이 제시하는 환상적이고 경이로운 속죄의 비전 본문

영성수행 비전/초인생활. 기적수업

기적수업이 제시하는 환상적이고 경이로운 속죄의 비전

柏道 2020. 2. 16. 23:19

기적 수업

기적수업이 제시하는 환상적이고 경이로운 속죄의 비전

 


기적수업이 제시하는 속죄의 비전은 인간의 이해와 논리를 뛰어 넘기에 단지 환상적이고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서 속죄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속죄를 죄를 용서받아 깨끗해진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기적수업에서 속죄는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개념들과 연계되어 설명되고 있어서 단순한 정의가 쉽지 않다.

 

 

기적수업 2장에서 속죄에 관한 여러 문구를 통해 속죄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너는 속죄를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속죄는 너의 오류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담이 깊이 잠든 후에야 악몽을 꾸게 되었다. 무서운 꿈을 꾸는 사람에게 사람에게 갑자기 빛을 비추면 처음에는 그 빛마저도 꿈의 일부로 해석해서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깨어나면, 빛이 꿈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바르게 지각되면서 꿈은 더 이상 실재가 아니게 된다. 이 해방은 허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명(無明)을 밝히는 지식은 너를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네가 자유롭다는 것을 너에게 명확히 보여준다.” (기적수업 p.19-4)

 

 

먼저 속죄는 ‘네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되었다’고 믿는 악몽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기적수업은 원죄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육체로 인식하며 살게 된 상황으로 그려내는데, 이것이 ‘분리’라는 꿈이다. 그런데 이는 말 그대로 꿈일 뿐이지 실재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온전하게 다시 하나로 결합하는 방법은 단순하게 그 악몽으로부터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너를 옥죄고 눌러 대는 악몽으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은 네가 만들어낸 잘못된 상상이며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고, 이것이 속죄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수업의 속죄는 인식의 전환을 의미할 뿐 희생을 통한 대속을 요구하지 않는다. 기적수업은 육체의 희생을 통해 속죄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음 같이 분명히 한다.

 

 

“마음이 떠올리는 육체에 대한 수 많은 환상은 육체가 ‘속죄’를 얻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왜곡된 믿음에서 나온다. 육체를 사원으로 지각하는 것은 왜곡의 일부만을 바꾸기에 교정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적인 차원에서 속죄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기적수업 p.22-1)

 

 

인류의 역사에서 육체의 희생에 대한 환상은 다양한 종류의 희생제사 의식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유대 기독교의 전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특별히 유대교는 희생제의 중심의 종교로서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1500년 동안 해마다 동물의 피를 대속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 유대교 전통 속에 있었던 바리세파 출신의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동물의 피를 대신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의 피 흘림으로 해석했다. 어찌 보면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유대교 관점에서 희생 제사로 해석한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보인다. 그 해석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가장 설득력 있게 예수의 삶과 죽음을 이해시킬 수 형식 논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라는 흠 없는 육체의 희생이라는 가치는 유대 종교 전통이라는 한계 속에 있었던 바울과 유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있었던 가장 합리적이고 대중적인 이해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기적수업은 바울이 설파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의라는 개념을 그 당시 종교적 인식의 한계가 만들어낸 오류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20세기에 등장한 기적수업은 2천년 전의 신화적이며 유대 전통적인 상징 체계로 속죄를 설명하지 않고, 현대의 논리 언어체계를 통해서 신약 성경을 재해석하고 탈신화화 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기적수업의 새로운 해석은 기독교를 공격하고 해체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기독교의 계시와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 주기 위함이다.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성과 논리의 언어에 의해 교육받았고, 이를 통해 모든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기적수업이 성경의 신화적 상징적 언어의 부분적 오류를 교정하고, 보편적 이성과 논리 언어로 재해석해주는 일은 기독교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부활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기적수업이 보편 이성의 논리와 과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점은, 그 설명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을 제시하지 않고, 반대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이롭고도 초월적인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수업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속죄, 구원, 영, 천국, 하나님, 예수, 성령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열어준다.

 

 

기적수업은 속죄는 육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제단에서 분리를 해제시키는 영적 차원의 일이라 한다. 다시 말해 속죄는 인간이 마음 안에서 잘못 받아들인 분리를 부정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전혀 손상되지 않은 전일한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사원의 진정한 거룩함은 구조물로 둘러싸인 내면 제단에 있다. 아름다운 구조물을 강조하는 것은 속죄를 두려워하고 내면 제단에 도달하기를 꺼려한다는 표시이다. 사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반면에 영적인 눈은 완벽한 비전이므로 구조물을 전혀 볼 수 없다. 하지만 내면의 제단은 완전히 명백히 볼 수 있다. 완벽한 효과를 위해 속죄는 내면 제단의 중앙에 있으며, 그곳에서 속죄는 분리를 해제하여 마음의 전일성을 회복시킨다.”(기적수업 p22-2)

 

 

이는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구원이 아니라, 분리 즉 원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네가 그렇게 인식함으로써 너 스스로가 분리를 기정사실화 시키는 오류를 범했을 뿐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바울은 첫 번째 아담이 원죄를 짓고 두번째 아담인 예수가 그 죄를 해결했다고 신화적인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석했지만, 기적수업은 원죄라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일종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구속론과 기적수업의 속죄에 대한 가르침은 동일한 목적지에 도달한다. 즉 인간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사랑과 은혜의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죄로 인한 심판 아래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과 기적수업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죄는 인간에 대해 어떠한 권능도 갖고 있지 않다는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대속을 가져온다는 신화적 형식을 입은 교리는 그 희생을 믿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속죄를 얻을 수 없으므로 영원한 심판 아래 놓인다는 관념을 형식 논리로 만들어 낸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믿는 자에게는 은혜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양날의 칼이 되어 버린다.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신화적 언어로 쓰여진 기독교의 교리는 2천년간 예수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 전통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말살하는 폭력을 구원의 명분으로 합리화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적수업은 속죄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어느 누구도 공격하거나 파괴하는 데 사용하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없고, 오직 사랑의 선포와 치유만을 위해 사용되는 장치라 한다.

 

 

그 이유는 기적수업이 가르치는 속죄는 예수의 희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외면적인 고백과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원래부터 하나님과의 분리되지 않았고, 분리될 수도 없기 때문에 너와 하나님 사이의 전일성을 바라봄으로써 치유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죄는 이러한 영적 비전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죄 많은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는 잘못된 망상을 부수는 일이다.

 

 

“속죄는 네가 만든 장치가 아니기에 파괴적으로 이용될 수 없는 유일한 방어다. 속죄의 원리는 속죄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발효되었다. 그 원리는 사랑이었고 속죄는 사랑의 행위였다. 분리가 일어나기 전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행위가 필요 없었다. <…> 속죄는 거부되더라도 공격에 쓰이는 무기로 돌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방어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속성이 있다. 따라서 속죄는 유일하게 양날의 칼이 아닌 방어가 된다. 속죄는 오직 치유한다. ( 기적수업 p. 21-4)

 

 

 

이런 의미에서 속죄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다시 기억하라는 가르침이다. 속죄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받는 존재로 창조했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에게 적대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죄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지만 망상속의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서 분리된 채 살게 됐다고 철썩 같이 믿는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이런 잘못된 지각에서 비롯되는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에 대하여 죄 지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고, 바로 여기에 인간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한다.

 

 

“모든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너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찬탄할 능력이 있다는 잘못된 지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너는 그럴 수 없고 그럴 수 있었던 적도 없다.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너는 속죄를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고, 속죄는 너의 오류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준다.” (기적수업 p.19-4)

 

 

기적수업이 제시하는 속죄의 진정한 근거는 이 세상에서 네가 경험하고 지각하는 일은 가상적인 꿈의 세계에서 일어났을 뿐이지 실재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의 육체의 경험과 지각은 좋든 나쁘든 꿈 속의 환영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물론이고 ‘그 꿈을 꾸고 있는 너’라는 실재에 어떠한 위험이나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네가 긴급히 인식해야 하는 일은 꿈은 단순히 꿈일 뿐이기에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다.

 

 

기적수업이 제시하는 이러한 비전은 인간의 이해와 논리를 뛰어 넘기에 환상적이고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마야 곧 허상이라고 하는 힌두교와 불교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적수업은 비실재인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오직 실재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 거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기적수업을 요악했던 에피그래프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 기적수업 서문 p.1)

 

 

이 세상을 비실재로 사라지게 하는 기적수업의 영적 비전은 인간이 경험했던 모든 과거들도 동일하게 비실재로 깨끗하게 지워 버린다.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서 속죄라는 장치는 네가 저지른 과거의 모든 잘못에서 너를 해방시키는 역할도 한다.

 

 

“속죄는 전진하면서 너 자신을 과거에서 해방하는 장치다. 속죄는 너의 과거에 이루어진 잘못을 해제하므로, 너는 귀환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옛 발자취를 추적할 필요가 없다. ( 기적수업 p.21-6)

 

 

따라서 인간이 속죄를 받기 위해서는 참되게 부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즉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잘못된 죄의식을 부인해야 하고, 내가 과거에 행했던 잘못들이 계속 나를 뒤쫓고 나를 벌할 것이라는 과거가 만들어낸 두려움을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참된 부인은 너와 진리를 보호하는 일이 된다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참된 부인은 강력한 보호 장치다. 너는 오류가 너를 해칠 수 있다는 믿음을 부인할 수 있고, 부인해야한다. 이러한 부인은 은폐가 아니라 교정이다. 참되게 부인할 때 너는 바른 마음에 있을 수 있다. 오류를 부인함은 진리를 강력히 보호하지만, 진리를 부인함은 잘못된 창조인 에고의 투사로 귀결된다.”(기적수업 p20-2)

 

 

속죄는 인간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열려 있고, 모든 인간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기조차 하다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그 이유는 먼저 인간이 무슨 꿈을 꾸든지 꿈 그 자체 일 뿐인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잘못 창조하는 능력을 제한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은 이 세상의 꿈에서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데, 그 때에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으며 이 보다 더 나은 길이 어딘 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인식이 생겨나면서 속죄의 비전을 찾게 될 것이라 한다.

 

 

“모든 사람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 너는 얼마든지 지체하거나 엄청난 시간을 미룰 수 있다. 그러나 너의 잘못 창조하는 능력을 제한하신 너의 창조주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 갇힌 의지는 극단적인 경우 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대단한 인내심으로 고통을 감수할 수 있겠지만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더 나은 길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며 그것이 전환점이 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영적 비전을 다시 일깨우고 동시에 육체적 시각에 대한 비중을 약화시킨다. 양쪽을 지각하는 비중이 서로 교체되는 것을 대개는 갈등으로 경험하며 갈등은 매우 격렬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다.” (기적수업 p.22-3)

 

 

속죄는 육안으로 지각되는 세상을 부정하고, 영안을 열어 하나님과 인간의 전일한 관계를 알게 하는 영적 비전을 복구하는 일이다. 이 비전은 워낙 강력해서 마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육안의 세상에 지체하는 일은 쓸데 없는 고통의 연장일 뿐임을 깨닫게 해준다.

 

 

영안은 문자 그대로 오류는 볼 수 없고 속죄만을 찾는다. 육안을 통해 추구하는 해결책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 영적 비전은 바른 방어를 완벽하게 인지하기에 다른 방어는 보지 않고 오류 너머의 진리를 바라본다. 영적 비전은 워낙 강력해서 마음은 그 비전을 따른다. 이로 인해 마음은 힘을 회복하고,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통만 더할 뿐임을 깨달아 지체하는 것을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된다. (기적수업 p.23.-4)

 

 

속죄는 너의 내면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하고, 그 평화가 바로 너 자신임을 알게 해준다. 내면의 평화는 네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고 있다는 속죄의 원리 속에 있는데, 기적수업은 이를 깨닫는 것이 곧 기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적수업은 속죄를 깨우치는 수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평화는 네 내면의 속성이다. 너는 바깥에서 평화를 찾을 수 없다. 병은 바깥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한 형태이다. 건강은 내면의 평화다. 내면이 평화로우면 외부에서 보이는 사랑의 결핍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기적을 받아들인 너는 사랑의 결핍이 초래한 사람들의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 “ (기적수업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