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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수업
기적수업이 해석하는 최후 심판의 진정한 의미
기적수업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인간이 잘못 생각하는 첫 번째 오해는 인간은 마지막 심판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행하는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 너 자신이라고 한다.
기독교를 특징 짓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기독론(Cristology)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역사가 종말을 고하면서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종말론(Eschatology)이다.
최근에 유튜브를 통해 도올의 도마복음 강해를 모두 들었다.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이후 최근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검증되고 공개되고 연구되고 있다는 도마복음서에 대한 강해였다. 이 강의의 핵심 내용은 기독론과 종말론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가 된 것은 바울과 사도들이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예수를 인식하고 이해했던 방식이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4복음서와 다르게 예수의 행적이 아니라 예수의 어록만을 편집없이 기록한 도마복음서를 분석해보면, 예수는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이 내세웠던 기독론과 종말론을 의식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기독론과 종말론은 그 저자들이 예수의 생애를 드라마틱하고 박진감 있게 알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여러 사건들과 장면들을 그리스도의 수난 드라마로 재구성시켰던 편집과 해석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적수업은 명확하게 바울과 사도들의 기독론과 종말론을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하지, 문자 그대로의 교리로서 인정치 않는다는 의미에서 도마복음과 일맥 상통한다. 기적수업 2장 말미에서 ‘최후의 심판의 의미’라는 소제목으로 신화적 비유나 상징적언어를 사용치 않고 최후 심판의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적수업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인간이 잘못 생각하는 첫 번째 오해는 인간은 마지막 심판을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행하는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 너 자신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최후의 심판은 네가 행한 일을 네가 바르게 평가하는 일이지,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이 시행하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나의 도움을 받아 나의 형제들이 최후의 심판을 관장한다. 너는 비록 벌이 마땅하다고 여길지라도, 최후의 심판은 형벌이라기 보다는 최후의 치유이다. 최후의 심판은 너에게 바른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벌은 바른 마음과는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 최후의 심판은 바르게 평가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은 마침내 모두가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가치 없는 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야 선택 능력을 합리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구분하기 전에는 자유의지와 속박된 의지 사이에서 계속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적수업 p.35-3)
기적수업에 따르면 심판은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마침내 벌하시는 시간의 도래라는 관념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의 사랑도 알지 못하며, 구원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마음이 상상해낸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던 것처럼 인간들도 자신의 창조물을 보고 좋은 것 만을 선택하고 잘못된 것은 버리게 되는 것이 심판이라한다. 그 때서야 인간도 하나님처럼 자신이 창조한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보기에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보시며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아셨던 것처럼 결국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창조물을 보고 좋은 것 만을 보존하기로 선택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마음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으니, 그것은 사랑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마음은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잘못된 창조물은 버리게 될 것이다.” (기적수업 p.35-4)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처럼 창조하는 마음을 주셨고, 인간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마음을 통해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마음의 창조력을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두려움, 불안, 공격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 냈고, 그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실재하지 않는 거짓된 것에 불과한데, 인간의 눈에는 생생한 사실로 보인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네 스스로가 만든 잘못된 생각과 감정들이 모두 틀린 것이라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관념 즉 사랑과 평화만을 창조하기로 선택하는 단계를 지칭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은 네가 잘못 창조한 것을 버리고 바르게 창조하기 시작하는 일이므로 두려운 사건이 아니라, 열망해야 하는 사건이다. ‘최후’와 ‘심판’이라는 용어가 결합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관념을 교리처럼 여겨왔던 기독교 역사는 두려움에 갇힌 인간들이 성경의 말씀을 얼마나 뒤 집혀진 관점에서 해석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한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용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했을 뿐 아니라 ‘최후’가 죽음을 연상시기키 때문이다. 그것은 뒤집힌 지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최후의 심판이 의미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는 참으로 생명으로 이어지는 입구임에 분명하다.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너 자신의 창조물이 아니기에, 네가 내리는 최후의 심판이 너에 대한 심판일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네가 만든 것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미 있게 최후의 심판을 내릴 수 있고, 창조적이고 좋은 것 만을 기억에 간직할 수 있다. 너의 바른 마음은 그것 만을 지시할 수 있다. 시간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이 심판을 내리도록 너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너의 완벽한 창조물들에 대한 너의 완벽한 심판이다. 네가 간직한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 때, 너에게 두려움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속죄에서 네가 맡은 역할이다.” (기적수업 P.36-1)
기적수업은 시간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이러한 심판을 내리도록 너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라 한다. 시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육체에게만 실재하는 것일 뿐이지, 영에게는 시간 뿐 만 아니라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완벽하게 창조되었기에, 완성을 위해 달려가는 시간이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에게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는 양 존재하는 이유는 최후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가르치기 위함이라한다. 시간의 목적은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단축시켜서 육체의 갈등에서 해방되고, 영의 온전한 평화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심판은 전체 계획에 세워진 수많은 학습도구 중의 하나로서 분리 이후에 존재하게 되었다. 분리가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났듯이, 최후의 심판도 그와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폐지하지는 않지만 단축하는 장치인 기적이 그 기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기적을 지향한다면, 사실상 시간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단축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으로 평화를 가져오려면 너 자신이 갈등에서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너 자신을 속히 두려움에서 해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적수업 p.35-2)
세상 종말이라는 관념은 모든 종교가 갖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의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하는 창세기부터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는 종말을 예언한 요한 계시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가 오신 이후의 역사를 임박한 종말의 때로 해석해왔다. 따라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2천년전 사도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중세 유럽 천년의 기독교 시대를 지나서, 최근의 현대 기독교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예언되었던 종말의 날들은 한결같이 허황된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그러나 기적수업이 해석해주는 최후 심판의 진정한 의미를 따른다면, 심판의 날은 개개의 인간이 바른 마음으로 바른 창조를 시작하는 날이 되므로, 각기 사람마다 최후 심판의 날이 다르며, 모든 인간은 빠짐없이 최후 심판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가까이 갈수록 더 많은 시간을 절약하여 바른 마음과 바른 창조라고 불리는 영의 기쁨을 더 누리게 된다. 사도 바울은 최후의 심판을 임박한 것으로 보았고 이를 가르쳤기에, 기독교는 종말론적 종교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기적수업의 관점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인식한 임박한 종말은 시간을 절약하여 바른 선택을 내려야 할 임박성에 대한 강조로 해석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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