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하라! 본문
오늘은 단제강세(檀帝降世) 사천사백(四千四百) 칠십(七十) 오년(五年)(4475년),
배달 사천삼백(四千三百) 오십(五十) 일년(一年)(4351년),
양력(陽曆) 12월 2일, 음력(陰曆) 10월 스무닷새(10월 25일),
일요일(日曜日), 이 시간은 12월 첫째 주(週) 경일경배(慶日敬拜) 시간이다.
이번 주에 한배검께서 주신 말씀은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우리 삼일신고(三一神誥) 진리훈(眞理訓)을 보면
밝은이가 행해나가는 길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밝은이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燭)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 발대신기(發大神機) 성통공완시(性通功完是)”라고 나온다.
밝은이가 행해나가는 것은
느낌을 그치고 숨 쉼을 고루하고 부딪침을 금(禁)해서
“일의화행(一意化行)” 한뜻으로 변화되어 나간다 하셨고
“반망즉진(返妄卽眞)” 그렇게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참함으로 나간다고 하셨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뭇사람들,
다른 많은 사람들 또 만물(萬物)들이 행해나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행해나가는 것이 바로 밝은이의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뭇사람은 “중(众)은 선악(善惡) 청탁(淸濁) 후박(厚薄) 상잡(相雜)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 타생장소병몰고(墮生長肖病歿苦)”라고 하셨다.
고통(苦痛)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선악(善惡) 청탁(淸濁) 후박(厚薄) 상잡(相雜)”
착하고 악(惡)함과 맑고 흐림과 후(厚)하고 박(薄)함을
서로 섞어서 제 마음대로 달리다가
“타생장소병몰고(墮生長肖病歿苦)”
나고 자라고 늙고 병(病)들고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만다고 하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 누구든지 겪게 되는 것은 삶의 고통(苦痛)이다.
그것을 그렇게 표현해주셨다.
착하고 악(惡)함과 맑고 흐림과 후(厚)하고 박(薄)함을
서로 섞어서 제 마음대로 달리다가
“타생장소병몰고(墮生長肖病歿苦)”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삶의 고통(苦痛)이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겪는 고통(苦痛),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이들 중에
그 삶의 고통(苦痛)을 겪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삶의 고통(苦痛)은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그 삶의 고통(苦痛)이다.
편안하게 있으면 배가 고프고 움직이면 피곤하고
그러나 배가 고프기 때문에 움직여 일하지 않으면 안 되고
움직여 일하며 먹고 살 것과 살 집을 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대끼면
좌충우돌(左衝右突)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人生)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안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고
그렇게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요즘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얘기가 나온다.
금수저는 왜 금수저인가?
태어날 때부터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노력하지 않아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살 집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일자리를 구하고 일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태어난 그 집이 부잣집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지위(地位)를 보장받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장님과 다름없는 삶이 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재벌(財閥) 그 큰 회사에 회장의 아들이니
태어날 때부터 부잣집에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상무(常務)요 태어날 때부터 전무(專務)요
태어날 때부터 사장(社長)님인데 누가 건드리겠는가?
그것을 금수저라고 한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려움 없이,
삶의 고통(苦痛) 없이 누리며 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많은 서민들은 살아갈 일이 걱정이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벌 수 없고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날마다 먹고 살 것과 입을 것과
살 집을 위해서 싫어도 가서 숙이고 싫어도 일하고
피곤해도 일하며 삶의 고통(苦痛)과 맞서서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어려움을 감수(甘受)하며
내가 일한 만큼 편안함을 얻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면서 조금 힘들어지면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거기서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이 삶의 고통(苦痛)이 언제쯤 끝날까?
그러다가도 돌아서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그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려움과 힘든 삶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그래!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저 사람들을 행복(幸福)하게 해주는구나!”
그것을 위해서 살아간다. 어떤 삶이 옳은 삶일까?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자신의 지위(地位)를 태어날 때부터 보장받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집을 걱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다른 모든 이들이
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 말이 옳다고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러나 금수저를 물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소위 흙수저들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을 옳다고 해주지 않는다.
돈이 있고 가진 것이 있는 자들에게만 옳다고 해주지
없는 자들은 옳다고 해주지 않는다.
어떤 얘기를 해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한다.
왜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옳고 그름의 구분이 이익에 있다.
이익이 되면 그것이 옳은 것이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불합리(不合理)와 부조리(不條理)를 주장하며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불이익(不利益)이 있어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아무리 이익(利益)이 있어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그것을 주장하고 나오면
“어! 저 사람 왜 저래? 뭣 때문에 그래?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그냥 이익 따라 가면 되는 것이지 왜 저래?
뭐 그렇게 잘났어?” 그렇게 한다.
그래서 있는 자(者)들은 그렇게 옳음을 주장하고 나오는 자들을
“없는 것이 어디서 감히 옳음을 주장하고 나오나!” 하고
짓밟으려고 하고 없는 자(者)들은
“뭐 그렇게 잘났어? 네가 그렇게 잘났냐?” 하고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잘못됐다고 한탄을 한다.
“이놈의 세상이 잘못돼서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잘 먹고 잘살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아무리 아등바등 노력해도 못사는 이 세상!
이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
그렇게 세상을 원망(怨望)하고 자신의 운명(運命)을 한탄(恨歎)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무엇이 잘못되어있을까?
분명히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하느님께서 이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創造)하셨고
티끌만큼도 빠트리심이 없으시며
모든 것을 주관(主管)하고 다스리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늘 한으로 듣고 보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느님은 아쉬울 것이 없으니까
정말 금수저 중에 금수저니까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니까
어려울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 장난삼아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까?
하느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재미삼아 인간들을 가지고 노시는 것일까?
우리는 그럼 하느님의 장난감인가?
우리의 인생(人生)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느냐고 하면 나도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이 낳았으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고
내 운명(運命)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부딪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다. 부딪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리고 삼일신고(三一誥)에 나오는 그 말씀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관(主管)하시고 다스리시며
티끌만큼도 빠트리심이 없다는 것도 맞는 말씀이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왜 하느님은 우리의 인생(人生)을 이렇게 하시나?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잘 먹고 잘살고 누구는 가진 것이 없어서
아등바등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불공평(不公平)하게 만들어놓으셨을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생각의 기준(基準)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기운, 우리의 몸이다.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아! 저 사람은 마음이 편안할거야!
그리고 항상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늘 몸이 편안할 것이다.” 그것이 기준이다.
내 인생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이 힘들고 기분이 좋지 않고 몸이 괴롭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내가 금수저가 되면 마음 편하고 기분 좋고 몸 편한 삶을
살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러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느님은
왜 우리를 창조(創造)하셨을까?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 편하고 기분 좋고 몸 편한 것을 위해서?
아니면 마음이 괴롭고 기분이 좋지 않고 몸이 괴롭게 만들기 위해서?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을까?
그 부분에 대한 뚜렷한 말씀을 삼일신고(三一誥)에 주셨다.
“성통공완(性通功完)”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하는 것
그리고 천궁훈(天宮訓)에
“성통공완자(性通功完者)라야 조(朝)하여 영득쾌락(永得快樂)이니라”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한 자(者)만이
하느님께 조회(朝會)하여 영원(永遠)한 쾌락(快樂)을 얻는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목적(目的)은 우리의 영원(永遠)한 쾌락(快樂)을 목적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영원(永遠)한 쾌락(快樂)을 얻을 것인가?
“성통공완(性通功完)”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해야
영원(永遠)한 쾌락(快樂)을 얻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 삶의 목적(目的)은 바로 그 성통공완(性通功完)에 있다.
마음 편하고 기분 좋고 몸 편한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성통공완(性通功完)에 있다.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하는 길
그렇다면 금수저가 되면 성통공완(性通功完)을 할 수가 있을까?
흙수저가 되면 성통공완(性通功完)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떤 길이 성통공완(性通功完)하는 길이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소위(所謂) 삶에 부대끼는 것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는 것
그 이유(理由)는 바로 하느님의 목적(目的)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성통공완(性通功完)을 목적(目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의 문제(問題)를 만난다.
우리 삶의 문제를 만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내가 내 욕심만큼 충분히 가지고
내 욕심대로 살아가는 삶보다 부족하고 모자라서
힘들고 어렵게 살지만 그 속에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배려(配慮)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렇게 작은 것을 위해서 정성(精誠)들여 나가서
그렇게 베풀어줄 수 있는 기쁨을 얻을 때
우리는 그때 진정한 행복(幸福)을 얻는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며 어떠한 큰 재산(財産)을 가지고
어떠한 큰 권력(權力)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자(者)도 그 어떤 천재(天才)도
그 작은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위해서 마음 쓰고 정성(精誠)들여
쌓아나간 자(者)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성품(性品)과 목숨과 정기(精氣)를
향한 길에서 얻는 기쁨이다.
그 작은 기쁨들이 모이고 쌓여서
“대길상(大吉祥) 대광명(大光明)”의 천궁(天宮)의 기쁨이 되고
하느님께 조회(朝會)하여 영원(永遠)한 쾌락(快樂)을 얻는
그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태어나며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해서
부러워할 것 없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이나 흙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이나
그 사람들이 얻어야 할 것은 그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다.
성통공완(性通功完)이다.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내가 마음 쓴 만큼
내가 노력하고 정성(精誠)들인 만큼 얻게 되는
성품(性品)의 완성(完成)이다.
그리고 더욱더 차원 높은 정신(精神)의 세계(世界)를 얻는 것이다.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린들
그 사람은 쓸모없는 인생(人生)을 사는 것이다.
아무런 값어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누리면 무엇을 하는가?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과연 누릴 수 있을까?
오히려 마약(痲藥)을 하고 도박(賭博)에 빠지는 자(者)는
더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이 더 많이 빠진다.
왜? 그만큼 갈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만큼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질(物質)만을 생각하는 그 풍요함이 결코 풍요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힘들고 어렵게 노력하고 정성(精誠)들여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는 그 작은 정성(精誠)이
참다운 기쁨이라는 것, 참다운 행복(幸福)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創造)해놓으셨다.
이 세상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몽땅 다 바뀌어서
이 세상이 누구든지 가만히 있어도 행복(幸福)해지고
누구든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며 사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무엇이든지 다 행복(幸福)하고
기쁜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그런 세상은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고 미래(未來)에도 그렇고
세상은 항상 지금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바뀌는 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自身)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바뀌었을 때 내가 “반망즉진(返妄卽眞)”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참함으로 나갔을 때
이 세상은 그만큼 나에게 가치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이 쓸모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잘못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탓이 아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목표가 인생의 목적이
우리의 성품(性品)을 바르게 가꾸고
정성(精誠)들여 삶을 옳게 살아가는 길로 행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탓하고 원망(怨望)한다.
이 세상은 내 마음 편하고 기분 좋고 몸 편하기 위해서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삶이 바른 삶이 아니다.
그 삶을 통해서는 한 순간의 기쁨도 참다운 기쁨은 가질 수가 없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지고 도리(道理)를 지키며
정성(精誠)들여 행했을 때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삶의 참다운 보람을 이루어냈을 때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하는 길로 나갔을 때
그때 얻는 그 기쁨이 우리의 참다운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통공완자(性通功完者)라야 조(朝)하야
영득쾌락(永得快樂)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번 주(週) 말씀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
오로지 한결같은 뜻으로
“반망즉진(返妄卽眞)”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참함으로 나가기 위해서
변화(變化)되어 나가야 된다.
그 길로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燭)의 세 법(法)이다.
우리의 마음과 기운과 몸으로 망령(妄靈)되게 달려 나가는 삶이 아니라
조심하고 삼가며 느낌을 그치고 숨 쉼을 고루하고
부딪침을 금(禁)해서 마음을 바로 잡고 기운을 바로 잡고
몸을 바로 잡아서 우리의 성품(性品)을 가꾸고
사명(使命)을 지키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정기(精氣)를 보전(保全)하는 삶
그렇게 하느님을 모시는 참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참다운 보람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는가?
마치도록 하겠다.
[제()=제(帝)], [촉(燭)=촉(觸)]
[출처] 일의화행 반망즉진하라!|작성자 chon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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