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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하라! 본문

천지인 공부/삼일신고

제목;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하라!

柏道 2019. 7. 30. 10:21



제목;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하라!




오늘은 단제강세(檀降世) 사천사백(四千四百) 칠십(七十) 육년(六年)(4476년),

배달 사천삼백(四千三百) 오십(五十) 이년(二年)(4352년),

양력(陽曆) 2월 10일, 음력(陰曆) 정월(正月) 초엿새(1월 6일),

일요일(日曜日) 이 시간은 2월 둘째 주(週) 경일경배(慶日敬拜) 시간이다.

이번 주(週)에 한배검께서 주신 말씀은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우리 신사기(事記)를 보면

조화기(造化紀), 교화기(敎化紀), 치화기(治化紀)가 있다.

그 신사기(事記)에는 삼신(三)이 나온다.

삼신(三)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세 자리로써 베풀어 행하시면서 삼신(三)이 되신다.

조화주(造化主)께서 모든 만물(萬物)을 창조(創造)하셨고

교화주(敎化主)께서 삼일신고(三一誥)를 가르쳐 베풀어주셨다.

그리고 치화주(治化主)께서 다스려 베풀어주셔서

우리 인생의 모든 도덕(道德)과 질서(秩序)가 바로 잡혔다.

그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다.

한배검께서 치화(治化)하여 다스리실 때

교화주(敎化主)께서 베풀어주신 그 삼일신고(三一誥)를

제일 먼저 베풀어 가르쳐주셨다.

제왈(曰) 원보팽우(元輔彭)아

창창(蒼蒼)이 비천(非天)이며 현현(玄玄)이 비천(非天)이라

천(天)은 무형질(無形質)하며 무단예(無端倪)하며

무상하사방(無上下四方)하고” 

이렇게 삼일신고(三一誥)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삼일신고(三一誥)의 말씀이 교화주(敎化主)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베풀어주셨다.

그것은 한배검께서 치화(治化)하여 다스리실 때

그 삼일신고(三一誥)를 기준으로 하여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삼일신고(三一誥)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 삼일신고(三一誥)를 통해서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다.

그것이 무엇인가?

삼일신고(三一誥) 천궁훈(天宮訓)을 보면

“성통공완자(性通功完者)라야 조(朝)하야 영득쾌락(永得快樂)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천궁(天宮)에 계시고

천궁(天宮)은 대길상(大吉祥) 대광명처(大光明處)인데

오직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한 이라야

하느님께 나아가 조회(朝會)하고 길이 쾌락(快樂)을 누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진리훈(眞理訓)을 통해서

“바로 이것이 성통공완(性通功完)이다”

“성통공완시(性通功完是)”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이 “성통공완(性通功完)”인가?

“철(嚞)은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시(性通功完是)”

이렇게 말씀하셨다.

밝은이는 느낌을 그치고 숨 쉼을 고루하고 부딪침을 금(禁)하여

“일의화행(一意化行)” 일의(一意)로 변화되어 나가고

“일의(一意)”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중광가(重光歌)를 보면

현현(玄玄)코 정일(精一)하면 한울, 사람 한 지취(旨趣)”

지극하고 또 정밀(精密)하고 한결같으면

한울, 사람 한 지취(旨趣), 하느님과 사람의 그 뜻이 같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받들면

일의화행(一意化行)이 된다.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

그렇게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되어나가고

우리의 망령(妄靈)됨을 다 돌이켜 참함으로 나가서,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참함으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망령(妄靈)됨은 우리의 마음과 기운과 몸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망령(妄靈)됨이다. 

참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받고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받아서

살아나가는 것이 참함이다.

그래서 우리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반성하고 돌이키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받고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반망즉진(返妄卽眞)”이다.

그렇게 반망즉진(返妄卽眞)하여 “발대신기(發大機)”

하느님의 기틀을 연다.

“발(發) 대신기(大機)”다.

“대신기(大機)”를 큰 하느님의 기틀을 “발(發)” 연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기틀을 열어서

“성통공완(性通功完)”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한다.

그렇게 성품(性品)을 통(通)하고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한 자(者)는

하느님께 조회(朝會)하여 영원(永遠)한 쾌락(快樂)을 누린다.

“공완(功完)”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시는 바를

온전히 받들어 다 행하여 이루어내는 것을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성통(性通)”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바를 온전히 받들어서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이 같아져야

하느님의 주시는 뜻을 온전히 받들어 이루어나갈 수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왼쪽으로 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일을 온전히 이루어낼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하시면 알아듣고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하시면 알아듣고 왼쪽으로 가야한다.

그렇게 되는 것, 하느님께서 주시는 뜻을

온전히 헤아려 알게 되는 것이 “성통(性通)”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통(性通)”을 한 상태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나가서

그 모든 뜻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명(命)하시는 뜻을

남김없이 받들어 순종(順從)했을 때

그것을 “공완(功完)”이라고 한다.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하는 것이다.

“성통(性通)”이라는 것은 발대신기(發大機)가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 “발대신기(發大機)”는 하느님의 기틀이 열린 것이다.

하느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시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고 하시면 왼쪽으로 가는

하느님의 주시는 뜻을 온전히 받들어 행하여 나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기틀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틀을 연다고 하는 것은

“보고 듣고 알고 행함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하였다.

그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해서 방종(放縱)하는 것을

자유로워진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모습하시는 것,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발대신기(發大機)다. 

그렇게 발대신기(發大機)가 되어야

발대신기(發大機)를 바탕으로 해서 성통(性通)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통(性通)이 되어야 그 성통(性通)을 바탕으로 해서

공적(功績)을 완성(完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발대신기(發大機)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반망즉진(返妄卽眞)” 

우리가 망령(妄靈)됨으로 달려서는 발대신기(發大機)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하느님께서 주신 성명정(性命精)을

온전히 받들어야 발대신기(發大機)가 된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당연한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려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야 된다.

내 마음대로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든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신 바를 온전히 받들어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발대신기(發大機)”다.

그리고 그 힘을 얻어서 제대로 깨달아 알게 된 것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서

하느님의 뜻에 그대로 통(通)한 것이 바로 “성통(性通)”이다.

그렇기 때문에 밝은이가 행하여 나가는 것은 바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 일의화행(一意化行)

반망즉진(返妄卽眞)”이다. 

반망즉진(返妄卽眞)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참함을 온전히 이루어내기 위해서

내 심기신(心氣身) 삼망(三妄)의 망령(妄靈)됨으로 달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성명정(性命精)” 성품(性品)과 목숨과 정기(精氣)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온전히 받들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바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 일의화행(一意化行)”이다.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 일의화행(一意化行)을 통해서

반망즉진(返妄卽眞)을 이루는 것이다.

일의화행(一意化行)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한결같은 정성(精誠),

한결같은 뜻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한결같은 정성(精誠)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받들고

망령(妄靈)됨을 돌이키고 참함으로 나가기 위해서 쓰는

특별한 법(法)이 바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이다.

그럼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은 무엇인가?

느낌을 그치고 숨 쉼을 고루하고 부딪침을 금(禁)한다고 하셨다.

“지감(止感)” ‘감(感)’을 ‘지(止)’ 그친다는 것이다.

“조식(調息)” ‘식(息)’을 ‘조(調)’ 고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촉(禁)” ‘촉()’을 ‘금(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절하게도 삼일신고(三一誥)에는

“감식촉(感息)”이 무엇인지 설명해놓으셨다.

느낌과 숨 쉼과 부딪침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설명해주셨다.

느낌은 무엇인가? 숨 쉼은 무엇인가? 부딪침은 무엇인가?

이것을 “삼도(三途)”라고 하셨다.

“감식촉(感息)”을 삼도(三途)라고 하셨다.

감식촉(感息) 삼도(三途)

“진망대자삼도(眞妄對作三途)” 

참과 가달됨이, 참됨과 망령(妄靈)됨이 서로 맞서서 세 길을 지었으니

이것이 “감식촉(感息)” 느낌과 숨 쉼과 부딪침이다. 그러셨다.

참됨과 망령(妄靈)됨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참됨은 “성명정(性命精)”이요

망령(妄靈)됨은 “심기신(心氣身)”이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정성(精誠)인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과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내 마음, 내 기운, 내 몸인

“심기신(心氣身) 삼망(三妄)”이 서로 맞선다는 것이다.

어떻게 맞서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뜻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정성(精誠)을

내가 내 것으로 내 것을 주장하면서 맞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주장하시면

내 마음이 더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주장하시면

내 기운이 더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주장하시면

내 몸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맞선다.

그렇게 해서 맞서면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내 마음이 더 중요해서

생기는 일이 바로 느낌이다. 감정(感情)이다.

감정(感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하게 받으면

감정(感情)이 일어날 것이 없다.

순종(順從)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지 않으면

내 감정(感情)이 중요하다. 내 마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감정(感情)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무엇을 요구하는가하면

내 감정(感情)을 즐겁게 해 달라! 편안하게 해 달라!

내 감정(感情)의 괴롭고 힘든 것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한다.

어디에 매달린 것인가? 내 마음에 매달린 것이다.

또 기운(氣運)도 마찬가지다.

기운도 하느님께서 분명히 뜻을 주신다. 그 ‘뜻’이 ‘목숨’이다.

그 ‘뜻’을 주시면 우리가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順從)하여

기운(氣運)을 순(順)하게 받들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잰다.

“이것은 마음에 드는 일,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이것은 되는 일, 이것은 되지 않는 일” 하고 재고 있다.

재고 따진다. 그러면 틀림없이 맞선다.

또 하느님께서 주신 “정성(精誠)” 정기(精氣)다.

그 정성(精誠)을 베풀어주셔도 내 몸을 정성스럽게 받들어서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내 몸을 박(薄)하게 한다.

내 몸을 게으르게 한다.

게으르게 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정성(精誠)을 온전히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 마음과 내 기운과 내 몸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하느님께서 주신 뜻과 하느님께서 주신 정성(精誠)에 맞서는 것이다.

좀 쉽게 예를 들면

내가 누군가를 상대하는데 그 사람을 상대해서 내 마음에 들기도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 감정(感情)이 일어난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성품(性品)과

내 마음이 서로 맞서서 생긴 감정(感情)이다.

그럼 맞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그 사람을 상대했을 때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들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기준(基準)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이 기준(基準)이다.

하느님께서 내가 상대하는 그 사람에게 뜻하시는 것,

그 사람을 상대했을 때 내가 가지게 되는 덕(德)과 사랑

그것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성품(性品)”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덕(德)과 사랑을 받으면

내가 상대하는 그를 용서(容恕)하고 용납(容納)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내 마음이 작동해서

그 용서(容恕)하고 용납(容納)함의 성품(性品)에 부딪치기 시작하면

감정(感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상대할 때

그 사람을 상대해서 내 마음에 들고 들지 않는 그 부분에 대해서

내 기분이 좋고 나쁨이 그 속에서 또 나온다.

내 마음에 들면 기분이 좋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다.

거기서 하느님의 뜻은,

그 사람을 상대할 때 하느님께서 내가 그 사람을 상대하게 하신 뜻이 있다.

목적(目的)이 있다. 해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을 빨리 깨달아서 그 일을 행해나가야 하는데

내 기분 때문에 내 생각 때문에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내 기운이 하느님의 뜻에 맞서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생기는 것이 숨 쉼이다.

숨 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분란한열진습(芬寒熱震濕)” 

“분(芬)” 생기(生氣)와 “란()” 살기(殺氣)와

“한(寒)” 찬 기운(氣運)과 “열(熱)” 더운 기운(氣運)과

“진(震)” 마른 기운(氣運)과 “습(濕)” 젖은 기운(氣運)이라고 나온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지 않고

내가 그 사람을 상대하면 때로는 생기(生氣)가 나오고

때로는 살기(殺氣)가 나온다.

때로는 그 사람을 살리고자 하고 때로는 그 사람을 죽이고자 한다.

그것이 하느님께 맞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데, 내가 해야 될 일을 구해야 하는데

내가 거기서 왜 생기(生氣)를 부리고 살기(殺氣)를 부리는가?

맞서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정성(精誠)을 베풀어주신다.

내가 그 사람을 상대할 때 내가 들여야 될 정성(精誠)이 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하느님의 뜻을 받들면 내가 들여야 될 정성(精誠)이 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정성(精誠)을 들이면

하느님께서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정성(精誠)이다.

그 하느님의 정성(精誠)은 받을 줄 모르고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저 사람이 나를 대접해주나? 대접해주지 않나?

이 사람을 상대했을 때 내가 이익(利益)이 있나? 없나?

그것을 따지고 있다.

그러면 하느님께 맞서는가? 맞서지 않는가? 맞선다.

그렇게 우리가 감정(感情), 숨 쉼, 부딪침으로 드러나는

하느님께 맞서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진망대자삼도(眞妄對作三途)”

우리의 망령(妄靈)됨인 심기신(心氣身)이

하느님의 주시는 참됨인 성명정(性命精)에 맞서서

감식촉(感息)의 삼도(三途)가 생겨난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밝은이는 그 감식촉(感息)의 삼도(三途)를 바로 잡는다.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

감정(感情)은 그치고 숨 쉼을 고르게 해서 기운(氣運)을 바로 잡고

부딪침은 금(禁)한다.

내가 상대에게 이익(利益)을 바라고

“이 사람이 나에게 이익(利益)을 주나? 주지 않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예 차단시켜버리는 것이다.

금(禁)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일의화행(一意化行)” 하느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구해서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뜻하시는 바를 구해서,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뜻하시는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뜻하시는 바라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을 상대해서 무엇을 하게 하실 것인가?

그것을 구해서 행한다. 그 말씀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만물(萬物)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고 대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바른 길을 추구해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 일의화행(一意化行)을 해서

반망즉진(返妄卽眞)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갈고 닦아서 바른 길을 추구해나갔을 때,

하느님의 뜻을 구했을 때 “발대신기(發大機)”가 이루어진다.

제대로 통(通)하게 된다.

“아! 하느님의 뜻이 이것이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받고

하느님의 정성(精誠)을 받아서 제대로 행해 나가는 것

그것이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길이다.

이번 주(週) 말씀은 그렇게 바른 길로 행해나가서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길로 나아가라! 그 말씀이다.

그래서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하라” 하신 것이다.

이 “발대신기(發大機)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길은

지난 주(週) 말씀 “인전지(人全之)”의 길이고

또 그것은 바로 인전지(人全之)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사람구실을 하는 길이다.

한배검께서 우리에게 삼일신고(三一誥)를 가르쳐주신 것은

오로지 삼일신고(三一誥)를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 때 우리는 사람의 길을 갈 수가 있다.

하느님을 모셔야 교화(敎化)의 힘을 받아서

지혜(智慧)의 문(門)이 열리고

하느님을 모셔야 치화(治化)의 힘을 받아서

능력(能力)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는가?

그러므로 항상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받들어서

사람구실하는 길을 열어 나가야 되겠다.

마치도록 하겠다.


한얼님 신()의 글자 뜻 ☞


[제()=제(帝)], [우()=우(虞)], [촉()=촉(觸)], [란()=란(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