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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符都誌(부도지) 해설 3 본문

천지인 공부/부도지

符都誌(부도지) 해설 3

柏道 2019. 3. 14. 22:57


律呂(율려)의 創世記(창세기)를 풀다.
符都誌(부도지) 해설 3 
 
앞에서 내 소개를 비교적
장황하게 한 이유는 그만큼
기독교적 바탕이 튼튼함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누구보다 성경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해 왔고
진리에 대한 헌신이 강하기 때문에
어설픈 것에 미혹되거나 끌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성경의 창세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열정과 의문을 품고
도전하고 풀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동양의 창세기라 불리는 부도지와
성경의 내용을 자세하게 비교분석할
지격을 갖추었다고 자부한다.
이미 약 20년 전에 창세기 전체를
자세히 연구하여 바인더 6권,
총 1053페이지의 연구자료를
남긴 바 있다.
특히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많아 각 나라의 건국신화나
고대자료들을 조사하며 좀 더 분명한
지식을 얻기위해 노력했고,
빅뱅을 비롯한 진화론, 양자물리학 등
과학 이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왔다.
심지어 즈카라이야 시친(Zecharia Sitchin) 류의 책이나
영성관련 서적, 채널링 메시지,
유란시아서, UFO, 마법서, 카발라,
수피즘 등도 닥치는대로 찾아 읽으면서
탐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그 관심과 열정은 여전하여
한걸음 한걸음 근원적인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나는 진리에 대해 증거주의적
입장을 택하는데 남들이 말하는 것,
전통이나 학설이 주장하는 것을
그냥 따르지 않는다.
진리라고 하였을 때 반드시 거기에는
깊은 지혜와 힘이 있을 것이므로
반드시 나의 지성과 감정, 그리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는 힘이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권위도 그러한 체험 때문에
인정하게 되었지, 교회의 가르침이나
학자들, 권위있는 자들의 말 때문에
진리라고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주위 사람들과 이전
동료들을 보면 스스로 점검과 확증도
없이 단지 그 종교, 종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음을 확인한다.
그들의 특징은 말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유일한 권위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예 별로 가까이도 않는 자들이 많다.
그러면서 온통 세속적 성공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이런 맹목적인 추종자들의 또 하나
특징은 비교 분석하고 검증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해서는 무식할 뿐 아니라 읽는 것
조차 두려워 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것은 무지와 편견을 넘어
독선과 부정직함의 증거가 될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를 통해 남을
알고, 남을 통해 나를 아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내 것만 알고 주장하는 것은 내 것도,
남의 것도 모르는 증거일 뿐 그 누구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와 남에게
정직한 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비교 분석하여 확신을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얻게 된 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어제까지 푼 민족종교 3대 경전은
말 그대로 진리의 폭포수요
찬란한 생명의 빛으로 나에게
깨달음과 감격을 선사해 주었다.
감히 말하건대 어떻게 이렇게 좋은
말씀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지
만일 아직 모르고 있다면 심히
게으른 자요 편견에 갇힌 자라고
평할 수 밖에 없다.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좋으니 도전하여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참전계경의 시작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 중에 몇이나 알까?
그리고 그 내용들이 정확하게
성경과 맥이 닿아 있다는 것도
얼마나 발견한 자가 있는지 궁금하다.
자기 교세만 넓히고 지위를 높이기
위해 하나의 종교에 충성하는 것은
진리의 본질이 아니다.
진리는 모두를 포용하고 사랑하며
개개인을 일깨워 하나님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일깨우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특히 진리는 반드시 남들을 용납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데로 이끄는데
궁극적으로는 원수까지 불쌍히 여기고
품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지금 종교를 보라.
사랑과 포용은 커녕 정죄와 비방이
난무하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과
진리의 말씀을 들고서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진리를 수호한다고
떠들고 큰소리를 낸다.
무지가 만들어내는 교만의 극치다.
진리가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지
누가 감히 진리를 수호한다는 말인가?
지금 나라 판국도 그런 모습이다.
이념과 사상으로 철저히 양분되어
같은 민족끼리 서로 대적하며 죽여야
한다고 악을 쓰고 있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이 그런 의식의 근원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피상적인 위협만
강조한다.
진짜 무서운 적은 자신 속에 있는
무지요, 두려움이며,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 저런 이념과 사상으로
미혹하는 악한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의 입장은
'죽기 싫고 손해보기 싫다'는 것 아닌가?
말로는 가족, 민족의 안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나오는 두려움, 거짓과 위선이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의식을
가진 자들, 특히 목사들, 장로 권사들이
많은 것을 보는데 철저히 예수의
가르침을 거역하고 있다.
예수는 형제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며
먼저 그 증거를 보였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형제와 이웃, 민족이 죽건 말건
나는 살아야겠다고 난리들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는
다 없애야 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은 다 틀렸다고 정죄하며,
우리끼리 잘 살자고 한다.
이미 그 자체로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음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들은 도리어 진리 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현상은 전혀 낯설지 않다.
예수 때에도 만연했고 역사 속에서
항상 이런 부류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리와 하나님조차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 말은 상대편을 비난하는 입장이
아니다. 진리의 외침, 아주 상식적인
깨우침의 호소요, 진리로 돌아오고
하나님이 주신 참된 본성을 회복하라는
간절한 호소요 간청이다.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고 아주 상식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