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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해설 ㅡ 제 1장, 마고대성과 마고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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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해설 ㅡ 제 1장, 마고대성과 마고
2017.04.22 15:48
수한 (水漢)
카테고리 부도지 해설
이제 떨리는 가슴으로 율려의 창세기, 그 문을 열고 들어간다.
< 부도지 해설 ㅡ 제1장,마고대성과 마고 >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큰 성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지키며 선천을 계승하엿다.
성중 사방에 네 명의 천인이 자리하여 악기(관,피리)를 만들고 음을 조절하고 있었으니
첫째는 황궁씨요,
둘쨰는 백소씨며,
셋째는 청궁씨요,
넷째는 흑소씨라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니
두 희씨는 모두 마고의 딸이었다.
마고는 짐세에서 나서 희노의 감정이 없으니 선천을 남자로 하고
후천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두 희씨를 낳고
두 희씨 역시 그 정기를 받아 배우자 없이 두 천인과 두 천녀를 낳았으니
합하여 네 천인과 네 천녀라.
해설 ,
마고성의 존재와 마고의 기원, 그리고 마고의 계보를 소개한다.
마고성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크고 높은 성이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지키며 선천을 계승한 성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네 천인이 사방에 위치하여 악기(관,피리)를 만들고 음을 조절하고 있었는데
황궁,백소,청궁,흑소의 순이다.
짐세로부터 출생한 마고는 어떤 감정이 없는 존재로
선천과 후천을 매개로 하여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는다.
그리고 궁희는 황궁과 청궁을, 그리고 소희는 백소와 흑소를 낳았다.
황궁과 청궁, 백소,흑소는 모두 남성적 천인들이고, 이름은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배우자로 여겨지는 네 천녀가 있어 모두 네 천인과 네 천녀가 된다.
아주 흥미로운 시작이다.
물론 이보다 더 이전 시기에 대한 서술이 2장에서 나오니 순서상으로는 1장이 2장 뒤로 가야 한다.
하지만 일단 기록된 순서대로 먼저 내용을 풀어보고 그 의미를 새겨보자.
일단 마고(麻姑)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자를 그대로 풀면 '麻' 는 삼이라는 식물을 뜻하고 삼베, 대마 등이 바로 이 식물에서 나온다.
'姑'는 구체적으로는 '시어머니, 고모' 등을 지칭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마고'는 일단 성별로는 여성이고, '베옷을 입은 여성' 이라고 하든지,
'베를 짜는 어머니' 라 하든지 상관없다.
문자를 그대로 풀이한다면 베를 짜는 이미지는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촘촘하게 홑실과 날실을 엮고, 나중에 무늬와 색을 넣는 작업이 베를 짜는 작업이다.
그런가 하면 한자어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소리,
즉 발음에 의미를 두고 해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니까 한자어는 그냥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차용된 것이지 문자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라고 비슷한 소리를 따온 것처럼
'마고'도 글자와는 상관없이 소리를 따왔다는 것이다.
그도 일리가 있는 것이 '마'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어머니'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엄마. 마더,마마 등 ... 그래서 이 어머니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마'를 글자로 표기하기 위해
'麻'를 차용한 것 뿐이라 한다.
어떻게 해설하든 부도지의 창조자는 '여성성'으로 표현된다.
남성, 여성도 사실은 창조 후에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남성, 혹은 여성으로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래서 '여성성'으로 말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이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은 남성성을 띠고 있다.
히브리어는 어미를 통해 남성형과 여성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엘, 혹은 엘로힘은 남성형이다.
여기서 일단 창조주의 속성이 두드러지게 차이가 난다.
성경의 창조주는 남성성으로 '하나님 아버지' 라 불리며,
부도지의 창조주는 여성성으로' 마고 어머니'로 불린다.
물론 이와 함께, 혹은 이보다 먼저 존재하는 어떤 무성(無性)적, 무인격적 개념이 있다.
성경에서는 '로고스(진리,말씀)요, 부도지에서는 '율려'다.
카발라에서는
창조주보다 위에 있는 어떤 근원을 '아인소프(AIN SOPH,무한함)'라 부른다.
불교나 도교 등에서는 '法.道,理' 등을 사용하는데
무인격적,무성적이라는 차원에서는 다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격이 존재하기 전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진리,이치,원리 등인데
천부경에서는 이를 '無'라고 했고, 반야심경은 '空'이라 하여 우리의 이성으로는 완전히 알 수도 없고,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창조주가 인격으로 계시될 때는 이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왜 그럴까?
재미있는 공부가 될 것 같다.
특히 성경이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고,남성성이 너무 강하여
상대적으로 성차별과 여성폄하의 부정적 요소가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과연 부도지의 창조주 '마고 어머니' 가 이러한 이미지를 상쇄해 줄 수 있을까?
한 번 기대를 걸고 도전해 보자.
성경의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하다' '만들다' 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온통 창조하고, 있게 하고, 나누고, 만들고, 짓고, 내도록 하고......가 반복된다.
반면 부도지의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온통 '生' 즉 '낳음'으로 가득하다.
성경에서도 비로소 신약의 첫 장,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온통 '낳는 이야기' 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낳고,낳고...'에서 지쳐 버린다고 하는데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만듦에서 낳음으로 변화되는 것이 사실 위대한 복음의 핵심이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바 되신 자다.
구약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지만,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확인된다.
'만들기' 와 '낳기'...바로 여기에 성경과 부도지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에서 낳음의 개념으로 새롭게 정립이 되어
충분히 그 의미를 보완해 주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고,
구약도 사실은 제대로 읽게 되면 '창조한 것' 이 아니라 '낳은 것임'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복음으로 눈이 열리면 비로소 보이게 되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창조하고 만드는 하나님이 더 쉽게 이해가 되고, 받아들이기도 무리가 없다.
눈이 열리지 않고, 의식이 확장되지 못한 사람에게 '낳음'의 개념을 내어 놓으면
무슨 소린지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만과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신약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만드는 일은 남자의 일이요, 낳는 일은 여자의 일이다.
물건을 만들든지. 집을 짓고 농사를 짓든지, 정자를 자궁에 넣어 자식을 만들든지
전부 남자가 하는 일이다.
만드는 일에는 힘과 능력이 강조된다.그런데 낳는 일은 여자의 일이다.
그리고 낳는 일에는 사랑과 유대감이 강조된다.
사실 만드는 일과 비교하면 낳는 일은 훨씬 고차원적인 생산활동이다.
만드는 일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꼭 같을 수 없다.
그러나 낳는 일은 그야말로 자기복제이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사실 만든 것이 아니라 '낳는 것' 이라고 해야 맞다.
그래서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으로 묘사된 부분도 사실은 '낳았다' 고 해야 이치가 통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한다고 할 때
만일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불완전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는 것은 이해부족의 차원에서 나온 표현일 뿐
제대로 깨닫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낳은 존재' 라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예수가 계속해서 '너희 천부' 라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마고 어머니'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 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한 부분을 강조하다 보니 오해와 왜곡이 일어나
지금껏 인류역사가 남녀의 성적 차별과 대립을 빚어온 것이지,
제대로 깨닫게 되면 정확하게 동일한 한 존재의 양면성임을 알게 된다.
창세기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빛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창조사역을 진행하면서
반드시 그 순간마다 감정의 표현을 일으킨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러한 '좋았다' 란 표현은 계속 반복된다.
특히 마지막 인간을 창조한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 고 하여 아주 감격하여 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부도지의 창조주 마고는 전혀 감정의 표현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그런 감정적 기능까지 없다고 한다.
'기쁨과 분노' 등이 감정이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마고는 선천과 후천 사이의 시기, 즉 '짐새'라는 특별한 시기에 출생하여 후천세계를 여는 창조주인데
2장을 보면 율려가 마고와 마고성을 낳았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만들어진 피조물' 이 아니라 '낳아진 존재'들이다.
그런데 왜 마고는 여호와 하나님과는 달리 기쁨과 분노 등의 감정이 없을까?
바로 여기서 큰 흐름의 차이를 일으킨다.
기뻐하는 여호와는 동시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여호화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나누어진 감정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이미 한 편으로 기운 존재가 된다.
이미 '선악'의 이원론이 그 안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선한 쪽에 자신의 존재를 두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히브리어 '좋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미 창세기는 '악'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빛을 창조하는 것도 사실은 그 전에 어두움이 있기 때문이요,
모든 것을 나누고 구분하는 이유도 그전에 '혼돈과 공허' 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어둠과 무질서를 물리치고 빛과 질서를 가져오는 창조주로 나타나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그 이전에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고 마는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유일신 종교가 바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곳이 바로 여기다.
악을 전제한 상황에서 하나님(여호와,알라)은 그 악을 물리치고,인간을 죄에서 건져내는 사역을 하는
선한 신인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고맙고 감사하며 위대한 구원자는 될지 모르나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 '악과 대립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현존하는 유일신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끊임없는 투쟁을 일으키는 속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을 나누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 전쟁은 중단할 수 없다.
이 상황을 중단할 수 있는 존재는 선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이 분화되기 이전의 존재여야 하고,
선과 악을 함께 주관하고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존재여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리게 된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속이 상할지 모르나 어쩌겠는가?
그렇게 나타나 있는 것을...
그래서 사실 기독교에서도 창조주 하나님 이전의 존재,
바로 이러한 이원론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로고스'로 표현된 진리이다.
유대교에서도 카발라 전통에서는 창조주 위의 존재를 말하면서
'아인소프'로 알려진 '무한자'는 바로 이 양면성이 없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떠나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 여호와와 예수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예수를 볼 때 이원성을 초월한 '로고스'를 보지 못하면 여전히 헛일이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악을 정복하고 심판하는 승리자로 환호하고 있는데
그렇게 대우하는 것 자체가 예수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용서한 것은 '가장 큰 선'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선과 악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선과 악을 나누어 놓고 예수를 자기 편에 끌어들이는 짓을 하고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악이라는 것을 자신들은 모르고 있다.
지금 나라가 싸우고, 세상이 온통 두편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서로를 악이라고 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이 싸움은 여호와나 알라는 끝낼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예수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참모습, 그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여준 선과 악을 초월하고,
둘 다 품고 사랑하는 '로고스'로서의 본질을 깨우치고
그의 의식과 연합된 자라야 세상을 하나로 연합시킬 수 있다.
이처럼 '기쁨과 분노' 등의 감정이 없는 마고...
여성성 때문에 무언가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 같은 느낌이 사라지는 바람에
좀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지금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다.
깨닫고 보니 마고를 어머니라 부르고,
여성성이 강조된 이유는 성품 때문이 아니라 정체성 때문이다.
즉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낳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머니' 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며,
우리에게도 창조주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고 바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창조주를 오해하면 우리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되어 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무엇을 창조하고, 또 흙이나 무엇으로 만드는 창조주는 상호 분리를 낳고,
또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왜곡시킨다.
반면에 낳는 창조주는 모두를 자녀로, 같은 본질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우주 만물 그 누구도, 그리고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의 자녀가 아닌 존재가 없고,
창조주의 본질을 소유하지 않는 존재가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비로소 대립과 싸움을 멈추고 형제애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바울도 이를 깨닫고 크게 부르짖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이 외침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이원론이 깨어졌다.
선과 악의 구분도 사라지고, 천국과 지옥의 나눔도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선과 악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선악으로 나누는 것이 악이요, 하나로 보는 것이 선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기를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죄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의다'(로마서 14:23)라고 했다.
이를 또 다른 말로 예수는 '무지하여 하나님은 제대로 모르고 섬기면 헛된 일이요,
하나님은 제대로 알고 바로 섬겨야 참된 예배'라고 말했다.(요한복음 4:22)
믿어도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하고, 예배를 드려도 합당하게 드려야 참된 예배가 된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바르게 예배하지 못하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도리어 모독이 되고 마는데
오늘날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이 말이 오늘날 기독교나 이슬람,유대교 전부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바울의 이 깨달음의 외침이 이미 2000년 전에 울려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주님'은 만물의 반쪽,
그것도 자기들 입장에서 좋아 보이는 반쪽짜리 '주님'으로 축소시켜 놓고는
사랑한다고 주장하고, 그런 '주님'이 만들어 놓은 나라에 들어가서 자기들끼리만 잘 살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 어찌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짓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 오늘날 기독교나 이슬람, 유대교가 나서는 일마다 온통 싸움뿐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 알라,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자아와 그 욕심을 믿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믿고 좋아하는 하나님은 딱 정해져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 주고,
바라는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존재인데.
알고보면 그 존재는 어리석고 두려움과 욕심에 가득찬 거짓된 자기 자아인 것이다.
마고는 두 딸을 낳는다.
마고도 여성성을 가진 존재인데 마고가 처음으로 낳은 두 소생도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이상하고 묘하다.
先天爲男(선천위남)하고 後天爲女(후천위녀)하여 無配而生二姬(무배이생이희)하고
이를 자세히 보면 마고가 궁희와 소희, 두 딸을 낳는 과정에 '남성'과 '여성'이 등장을 한다.
바로 남성이 선천이 되고, 여성이 후천이 되어 궁희와 소희를 낳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기가 낳은 두 딸인데도 부모격인 남성과 여성은 선천과 후천으로 따로 있다.
그러니까 궁희와 소희는 그 부모가 '선천'과 '후천'인데, 그러면서도 또 어머니는 '마고'다.말이 안된다.
선천과 후천을 남성과 여성으로 삼아서 딸들을 낳는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두 딸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다.
바로 여기서 비유적으로 묘사한 미스테리를 풀어내어야 한다.
일단 궁희와 소희의 부모격으로 등장하는 '선천'과 '후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인격이 아니다. 시기요 시대이다
마고의 시점에서 보면.
선천은 이미 지난 시기요,후천은 이제 열리는 시기이다.
마고 자신은 선천과 후천의 중간인 짐세(朕世)시기에 출현하여 지금 후천시대를 열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선천'을 남자로 삼고, '후천'을 여자로 삼는다는 말의 의미는
과거역사와 미래역사를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다.
과거는 기원, 씨앗이지만 미래는 목적,열매이다.
남자는 씨앗이요,여자는 열매를 내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마고가 출현하고 활동하는 짐세시기는 금방 지나간 과거, 혹은 현재(당시)를 말하며
씨앗으로부터 시작하여 잎과 줄기를 내는 시기요,열매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2장을 보면 이미 짐세 이전에 여러번 부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천시대가 마무리되는 과정 중에 몇 번의 창조와 파멸의 과정이 있었고,
마고의 등장과 활동은 마지막 짐세, 그러니까 후천을 여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창세기를 풀이할 때 접하게 되는 매우 곤란한 상황은 바로 빛 창조 이전에 나오는
'혼돈과 공허'(창세기 1:2)에 대한 것이다.
도대체 이 혼돈과 공허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학자들은 무리하게 이 부분을 '형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거주자가 없는 상태' 라고 해석을 하여
부정적인 요소를 없애보려고 하지만
성경 자체가 이 '혼돈과 공허'는 심판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예레미야 4:23)
아주 정확하게 창세기 1장 2절의 상황과 같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에서는 풀이를 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중조론'(gap theory,재창조설)을 말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보니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다른 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답답함 속에서 벗어날 길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있다.
왜 부도지 등을 통해 한 번 풀어보려고 하지 않는가?
무슨 근거로 부도지는 엉터리고 성경만 진리라고 주장하는가?
진리인지 아닌지는 겸손하고 진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면 드러날 일이지,
교만하게 확인도 해보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어떻게 정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지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유기적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하는 이론은 기독교 안에서 그렇게 하자고 받아들인 것이지 객관적 증거나 보증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독교인들끼리야 서로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다른 종교나 비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려면 그런 입장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고 하니 싸움이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야 어떻게 평화를 말하고, 화목과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나?
이런 독선과 배타성은 진리와 상반되는 모습인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비판과 정죄만 하고 있다면 이보다 안타깝고 불쌍한 모습은 없다.
진리는 자유케 하고, 사랑은 용납하는 것이 그 속성이다.
용납은 커녕 자기편 끼리도 결국 교파로, 교단으로 나뉘어 싸우고 경쟁하고 있으니
진리나 사랑을 말할 자격도 이미 상실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부도지의 창세기 풀이가 매우 흥미롭다.
그 이유는 정답이 없다는 점이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과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풀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주와 인류의 기원을 파고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어떤 학문이나 역사보다 진지함과 신중함을 요구한다.
이처럼 자유와 신중함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이 연구가 그렇게 흥미로운 것이다.
따라서 혹시 관심을 가지고 읽으시는 분이 있다면 이 점을 유의해 주시기 부탁드린다.
이 풀이는 권위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정통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되는대로 함부로 풀이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함보다 나 자신이 우주만물과 인간의 기원에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부도지를 펴 든 것이지, 한 낱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나는 부도지에서 성경 창세기에서 만난 의문이 풀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제 궁희와 소희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들의 소생들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궁희와 소희는 각각 두 천인과 두 천녀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합 네 천인과 네 천녀가 된다.
네 천인은 남성성을 가지 존재들이고, 네 천녀는 여성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들 가운데 네 천인은 이미 이름이 밝혀졌다.
황궁,청궁이 궁희가 낳은 아들들이요, 백소와 흑소는 소희가 낳은 아들들이다.
城中四方(성중사방)에 有四位天人(유사위천인)이 堤管調音(제관조음)하니 長曰黃穹氏(장왈황궁씨)요
次曰白巢氏(차왈백소씨)요 三曰靑穹氏(삼왈청궁씨)요 四曰黑巢氏(사왈흑소씨)라
네 천인은 마고성의 사방에 위치하여 제관조음을 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애서 풀기 위해서는 율려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데 율려에 대한 설명은 2장에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반적인 설명만 하고 넘어간다.
'堤(제)'는 둑, 혹은 둑을 쌓다, 기초를 튼튼하게 쌓는다는 의미다.
흔히 제방을 쌓는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그리고 '管(관)'은 피리나 관으로 만든 악기를 의미한다.
앞에서 이 부분을 번역할 때 '악기를 만든다' 고 의역을 했는데
풀이를 하면 '소리를 잘 조절하기 위한 어떤 악기나 기계 같은 것을 만들고,
또 그것들로 음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일' 을 의미하지 않는가 생각이 된다.
이 음은 단순한 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창조의 소리, 혹은 파동에너지를 의미하며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낸 '소리'
혹은 '말씀'과 맥이 통하고, 하늘 보좌 주위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거룩하다'고 외치는 특별한 존재의
노래와도 연관이 있는데 그야말로 창조의 원음이요, 우주 기운의 始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상식이 된 소리 AUM(옴,혹은 아움)이라는 음은 우주의 소리, 혹은 최초의 진동이라고 한다.
이 소리의 파동이 에너지로 나타나 마고를 비롯한 마고성,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만물을 존재케 한 그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태초에 있었던 말씀이요, 창조주가 낸 생명과 능력의 소리였을 것이다.
사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나중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최초의 창조주가 소리를 발했을 때는
그냥 '진동'이요 에너지의 파동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 부분은 율려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해야 나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네 천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장에서는 이들의 이름과 그 순서만 밝히고 있지만 3장과 4장에 들어가면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3장에서는 황,청,백,흑의 색깔의 의미가 나오고,
4장에서는 이들이 각 네 씨족의 시조임을 밝히면서 각 가문의 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일단 1장에서는 이들의 이름과 함께 개략적으로 맡은 엄무와 출생서열만 밝히고 있다.
이들의 차서는 궁희의 두 아들이 첫째와 셋째를, 그리고 소희와 두 아들이 둘째와 넷째이다.
그러니까,황궁>백소>청궁>흑소의 순서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조상이면서도 혼인관계에 의한 직접적인 혈통으로 이어지는 시조들이 아니다.
이미 이들의 출생은 '선천의 精"에 의하여 궁희와 소희로부터 낳은바 되어
그 기원이 다분히 영적, 혹은 신적이다.
음양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면서도 결혼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은 출생이기에
어떤 신비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로부터 소위 남녀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을 통해 자녀들이 생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이 이들이 자녀들을 낳는 방식이다.
오늘날과 같은 출산방식이 아니라 마고가 천녀들의 옆구리를 통해 출산하게 하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마침내 남녀의 혼인관계를 통해 잉태는 하였는데 출산을 옆구리로 하다니...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는데 여전히 신비한 요소를 품고 있다.
성경 창세기에도 아담은 순전히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그러니까 옆구리를 열어서 만든 것으로 나온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인류의 시조이면서도 지금 우리와는 뭔가 다른 존재인 것이다.
부도지도 바로 이런 변화를 말하고 있다.
완전한 영적인 존재에서 대를 더해가면서
조금씩 물질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되짚어 들어가 볼 수 있다.
현재 우리 인간은 거의 영적인 면은 잊고 순전히 물질적인 요소만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고 짐승처럼 변해가는 타락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
점점 우리의 본질이 영적인 속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시조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존재요, 창조주에게까지,
아니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위 견성이요, 깨달음 아니던가?
이렇게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렇고,
공간적으로 우리 속 깊이 들어가도 바로 이런 영적인 본질을 만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의식하고 느끼는 감각은 가장 피상적인 것이다.
여기에 속아서 유혹과 타락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면 점점 우리의 본성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에테르체를 넘어, 아스트랄체, 맨탈체,코잘체 등 점점 영적인 존재,
즉 창조주와 같은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갈래 중 어느 길로 들어가도 같은 결론을 만난다.
시간적으로 역사를 되짚어 들어가도 우리는 결국 창조주로부터 나온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고,
공간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도 마찬가지 창조주를 만나고 진리 자체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길이든 좋다, 시간을 거슬러 근원을 발견하든,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우리의 본성을 발견하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푸른 오솔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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