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3)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3)
그러면 당신은 다음 순간에 당신이 뭐가 될지 정말 모른단 말씀입니까?
잠시 전의 나는 유쾌해하고 있는 존재였다. 물론 나는 안다. 나는 너희의 모든 결정을 이미 알고 있기에. 내가 누군지, 내가 항상 누구였는지, 내가 언제나 누구일지 알고 있다.
내가 다음 순간에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가지려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인류 전체가 뭘 선택할지는 말할 것도 없고요.
간단하다. 너희는 이미 그것들을 선택했다. 너희가 되려하거나 하려 하거나 가지려 하는 것들, 그 모두를 너희는 이미 했다. 너희는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을 하고 있다!
이해하겠느냐? 시간 같은 건 없다.
이것도 전에 이야기하셨는데요.
여기서 다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좋습니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과거 현재 미래란 너희의 현재 체험을 짜 넣을 문맥을 만들어내기 위해, 너희가 지어낸 개념들이고, 너희가 발명한 현실들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너희의(우리의) 모든 체험들이 중첩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중첩되고 있다. 다시 말해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있다. 단지 너희가 이 사실을 모를 뿐이다. 너희가 ‘전체 실체’Total Reality의 윤곽을 그려줄 인식껍질 속에 자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2권에서 여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문맥 속에 제대로 놓으려면 그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일지” 무엇 “인지” 무엇“이었는지” 아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항상always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면에서all ways.
그러니 보다시피, 너희는 어떤 식으로도 나를 놀래킬 수 없다.
너희 이야기,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너희가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또한 그것은 너희가 ‘자신이 누군지’ 잊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서 너희가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군지’ 기억해내고, 그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도록.
내가 누구인지 아미 체험하고 있다면, 나 자신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만일 내 키가 이미 180센티미터라면, 나는 180센티미터인 나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키가 180센터미터가 되지 않거나 적어도 생각에서라도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아야 하는거죠.
정확하다.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창조자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영혼(신)의 가장 큰 바램이지만, 삼라만상이 이미 창조되어 있는 상황이니,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는 것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법을 찾아냈다는 게 놀랍군요. 우리 모두가 ‘하나’one이고, ‘하나’인 우리는 신이라는 사실을 “잊으려는” 건, 흡사 방안에 분홍 코끼리가 있는 걸 잊으려는 것과 같을 테니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정도로 최면상태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자, 너는 이제 막 모든 물질 삶의 비밀스런 이치를 건드렸다. 너희를 그토록 심한 최면에 걸리게 한 게 바로 물질계에서의 삶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건 어쨌든 놀라운 모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잊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너희 중 일부가 ‘기쁨 원리’Pleasure Principle라 부르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성질의 기쁨은 너희더러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바로 지금 여기서 체험으로 창조하게끔 만들고, 다음 번의 가장 높은 장대함의 수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재창조하고, 재창조하고, 다시 또 창조하게끔 만드는, 바로 그런 측면의 기쁨이다. 신의 가장 큰 기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가장 저급한 성질의 기쁨은 너희더러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잊게끔 만드는, 바로 그런 측면의 기쁨이다. 그러니 그 저급함을 비난하지 마라. 그것이 없었다면 고귀함도 체험할 수 없었을 테니.
그 말씀은, 처음에는 우리더러 ‘자신이 누구인지’ 잊게 만드는 육신의 기쁨이, 나중에 가서는 우리가 기억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통로가 되리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드디어 이해했구나. 네가 말한 그대로다. ‘자신이 누군지’ 기억해내는 통로로서 물질의 기쁨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기본 에너지를 몸을 통해 끌어올림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너희가 이따금 “성 에너지”라 부르는 에너지다. 그 에너지는 소위 ‘제3의 눈’이라는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너희 존재의 내부 경혈을 따라 끌어올려진다. 제3의 눈은 이마 바로 아래, 눈과 눈 사이엣 약간 위쪽에 있는 지점이다. 에너지를 끌어올릴 때, 너희는 그것이 너희 몸 전체를 훑으면서 지나게 한다. 그것은 내면 오르가슴과 비슷하다.
어떤 식으로 해서 이렇게 됩니까? 어떻게 하는 겁니까?
너희는 “그걸 고안해낸다”. 내 말은 말 그대로 그렇다는 것이다. 너희는 말 그대로 소위 “차크라”의 내면 통로를 “고안해낸다.” 누구나 섹스에 대한 갈증을 갖게 되듯이, 생명 에너지가 일단 되풀이해서 끌어올려지고 나면, 누구나 이 체험을 구하는 취향을 갖게 된다.
에너지가 끌어올려지는 체험은 굉장한 것이어서, 그것은 재빨리 너희가 가장 바라는 체험이 된다. 그렇더라도 너희는 에너지를 낮추려는-기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갈망을 완전히 잃지는 않을 것이고, 내가 여러 번 지적했듯이 낮은 체험 없이는 높은 체험도 존재할 수 없으니, 그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일단 높은 체험에 이르고 나면, 너희는 높은 것으로 옮아가는 즐거움을 다시 한번 체험하기 위해 낮은 체험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성스런 리듬이다. 너희는 너희 몸 안에서 에너지를 돌리는 것으로 이렇게 할 뿐 아니라, ‘신의 몸’ 안에서 더 큰 에너지를 돌리는 것으로 이렇게 한다.
너희는 저급한 형상으로 육화하여 높은 의식상태로 진화한다. 말하자면 너희는 그냥 신의 몸 안에서 에너지를 끌어 올리고 있을 뿐이다. 너희 자신이 바로 그 에너지다. 그리고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러 그것을 충분히 체험하고 나면, 너희는 다음 번에 무엇을 체험하고 싶은지와,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 상대성 영역에서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정한다.
너희는 자신으로 되어가는 자신을 다시 체험하고 싶어서-사실 이건 굉장한 체험이다- ‘우주 수레바퀴’ Cosmic Wheel 위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게 “업보의 수레바퀴”karmic wheel와 같은 겁니까?
아니다. “업보의 수레바퀴” 같은 건 없다.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너희 중 다수는 자신이 수레바퀴 위가 아니라 디딜방아식 바퀴 위에 있다고 상상해왔다. 그러기에 너희는 그 속에서 과거 행위들이 빚어낸 업을 갚고, 어떤 새로운 업도 빚어내지 않으려고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너희 중 일부가 “업보의 수레바퀴”라 불러온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몇몇 서양 신학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쪽 패러다임이나 너희를, 다음 번 영적 수준으로 옮아가기 위해 정화되고자 애쓰는 무가치한 죄인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반면에 나는, 내가 여기서 묘사해온 체험을 우주 수레바퀴라 부른다. 무가치함이나 업보, 처벌이나 “정화” 따위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우주 수레바퀴란 너희라면 그냥 궁극의 실체, 혹은 삼라만상의 우주철학이라 불렀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순환, 혹은 내가 이따금 ‘과정’ Process이라 이름 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 삼라만상 모든 것이 서로 한없이 연결되는 길, 그것을 따라 영혼이 영원토록 즐겁게 여행하는 길을 묘사한 의태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성스런 리듬이다. 이 리듬에 따라 너희는 신의 에너지를 움직인다.
우와! 이런 이야기를 이처럼 쉽게 설명해주시다니! 이런 걸 이렇게 명확하게 이해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음, 여기서 너희가 자신더러 체험시키려고 가져오는 것이 명확성이다. 이 대화의 목적은 또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네가 그것을 얻었다고 하니 기쁘구나.
사실 우주 수레바퀴에는 “높고 낮은” 곳이 있을 수가 없죠.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거 바퀴지, 사다리가 아닌데요.
아주 훌륭하다. 뛰어난 심상imagery이자 뛰어난 이해라는 게 그런 것이다. 그러니 소위 인간의 저급한 동물적 기본 본능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것들을 축복하고, 그것들을 너희가 집으로 돌아올 길을 찾아내기 위해 거쳐야 하고 써먹어야 할 길로서 존중하라.
이런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섹스와 관련된, 허다한 죄의식들에서 벗어나게 해줄 겁니다.
내가 섹스와, 나아가 삶의 모든 것을 즐기고, 즐기고, 또 즐기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너희가 성스럽다고 칭하는 것들을 신성모독과 뒤섞어라. 너희가 자신의 제단을 사랑을 위한 최고의 장소로 보고, 자신의 침실을 예배를 위한 최고의 자리로 볼 때까지, 너희는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리니.
너희는 “섹스”가 신과 별개라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밤마다 너희 침실에 있다!
그러니 그대로 계속하라! 소위 불경스러움을 이른바 심오함과 뒤섞어라. 아무런 차이도 없음을 보고, 그 모든 걸 너희가 하나로 체험할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진화해갈 때, 너희는 섹스를 놓아버리는 자신이 아니라, 그냥 그것을 더 높은 수준에서 즐기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S.E.X, 다시 말해 에너지의 종합 교환Synergistic Energy eXchange 이기에.
섹스를 놓고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삶의 모든 것을 놓고, 심지어 너희가 “죽음”이라 부르는 삶의 종말을 놓고도, 이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죽음의 순간에도 삶을 놓아버리는 자신을 보지 않고, 그것을 그냥 더 높은 차원에서 즐기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너희가 신의 세계에는 어떤 분리도 없음을 이해할 때, 즉 신이 아닌 건 아무 것도 없음을 이해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소위 사탄이라는 이 인간의 발명품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만일 사탄이 존재한다면, 그건 나와의 분리에 대해 지금껏 너희가 지녔던 온갖 생각들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존재하는 전부’니, 너희는 내게서 떨어질 수 없다.
남자들이 악마를 발견했던 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하도록 을러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에게 분리되리라는 위협을 휘두르면서. 그중에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길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선고는 최고의 협박전술이었다. 하지만 이제 너희는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다. 그 무엇도 너희는 내게서 떼놓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기에.
너희와 나는 하나‘다 내가 나라면, 내가 존재하는 전부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거늘 왜 내가 나 자신을 심판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하겠는가? 나 자신이 ‘존재 전체’고 그밖에 다른 건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내게서 분리할 수 있겠는가?
내 목적은 진화에 있지 심판에 있지 않고, 성장에 있지 죽음에 있지 않으며, 체험에 있지 체험하지 못함에 있지 않다. 내 목적은 존재함에 있지, 존재하기를 그침에 있지 않다.
나로서는 나 자신을 너희에게서, 아니 다른 어떤 것에서도 분리시킬 방도가 없다. 그냥 이것을 모르는 것, 그것이 “지옥”이고, 이것을 완벽하게 알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이제 너희는 구원받았다. 너희는 더 이상 “죽은 다음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놓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3
잠시 이 죽음이란 걸 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이 3권이 더 높은 진리들, 보편 진리들을 다루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다 훑어봐도 죽음과 죽고 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다룬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그 문제로 한번 가보면요.
좋다. 네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이냐?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너는 무슨 일이 벌어지길 택하겠느냐?
당신 이야기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우리 선택에 달렸다는 건가요?
너는 단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너희가 창조를 멈춘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 묻는 거구요.
그렇다면 됐다. (덧붙이자면 너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잊었음-이건 굉장한 일이다-도 이해한다. 그 모든 것이 계획에 따른 것이다)
죽더라도 너희는 창조를 멈추지 않는다. 이건 확실하게 이해가 되느냐?
예.
좋다.
그런데 너희가 죽어서도 창조를 멈추지 않는 건, 너희는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생명 자체이니 죽을 수가 없다. 생명이 생명이 아닐 순 없기에, 너희는 죽을 수 없다.
따라서 너희가 죽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너희가 계속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죽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들은 죽는 체험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훨씬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이 느낀다(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자기 육신을 볼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순식간에 방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흔히 온 방안을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체험을 한다. 그런 다음에는 공간 속 어떤 곳이든,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것이 특정한 조망지점을 바라기라도 할라치면, 그것은 순식간에 그런 체험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일 그 영혼soul(앞으로 우리가 그것에 붙이려는 이름인)이 “아니, 내 몸이 왜 움직이지 않지?”라고 궁금해하면, 영혼은 바로 그곳에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몸 바로 위에 둥둥 떠서 그 부동의 상태를 신기한 듯이 지켜보는 자신을.
만일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영혼이 “저게 누구지?”라고 생각하면, 영혼은 당장에 그 사람의 바로 코앞이나 바로 옆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영혼은 자신이 생각의 속도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걸 금세 깨닫는다.
믿을 수 없는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그 영혼을 휘어잡는다. 그 실체가 온갖 생각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 튀어다니는 데 “익숙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개 잠깐만으로 충분하다.
만일 그 사람에게 자식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자기 아이들을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그 애들이 어디에 있든 영혼은 순식간에 아이들 앞에 가 있게 된다. 따라서 영혼은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생각의 속도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두 곳이나 세 곳, 혹은 다섯 곳이라도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영혼은 곤란이나 혼란을 겪는 일 없이, 이런 여러 장소들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관찰하며 행동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그것은 그냥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 한 곳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재결합할” 수 있다.
그 영혼은 이승에서 기억해냈더라면 좋았을 사실, 즉 온갖 결과를 창조하는 건 결국 자신의 생각이고, 드러남을 가져오는 건 자신의 의지intent라는 사실을 저승에서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초점을 맞추면, 그게 내 현실이 된다는 거군요.
맞았다. 유일한 차이는 너희가 그 결과를 체험하는 속도다. 물질 삶에서는 생각과 체험 간에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어떤 지연(遲延)도 없다. 결과는 즉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새롭게 몸에서 벗어난 영혼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조심스럽게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을 그대로 체험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배운다”는 말을 아주 느슨하게, 사실 묘사라기보다는 구어(口語)투로 쓰고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기억해낸다”는 용어가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만일 물질화된 영혼이 영성화된 영혼만큼 빠르고 효율적으로 자기 생각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개인 현실의 창조는 생각의 조절, 혹은 기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기도요?
기도의 최고 형태가 생각의 조절이다. 그러니 오직 좋은 것, 바른 것만을 생각하라. 부정과 어둠 속에 머물지 마라. 그리고 상황이 암울해 보이는 순간들이라도, 아니 특히 그런 순간들일수록, 오직 완벽만을 보고 오직 감사만을 표현하라. 그런 다음에는 너희가 다음 번에 드러내고 싶은 완벽이 무엇일지만을 상상하라.
이 공식 속에 차분함이 있고, 이 과정 속에 평온함이 있으며, 이 깨달음 속에 기쁨이 있다.
이건 정말 굉장하군요. 정말 굉장한 정보입니다. 이걸 절 통해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걸 보내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네가 다른 때보다 더 “깨끗한” 때가 있고, 다른 순간보다 더 많이 열린 순간이 있다. 이제 막 헹궈낸 체처럼 그것은 더 넓게 “뚫려 있다”. 더 많은 그물눈들이 열려 있는 것이다.
아주 멋지게 표현하십니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럼 다시 재생시켜보자. 몸에서 벗어난 영혼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조심스럽게 제어하고 조절하는 법을 재빨리 기억해낸다. 그가 뭘 생각하든, 바로 그것을 창조하고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혼들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다만 대체로 그 결과가 즉각적이 아니란 사실만 빼고. 자기가 상황을 벌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상황이 벌어진다는 환상, 그 문제에서 자신이 원리임을 잊게 만드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생각과 창조간의 이 “시간” 간격-며칠이나 몇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될 수도 있는-이다.
내가 이미 여러 번 서술했듯이, 이 잊어버림은 “그 체계 속에 심어져” 있다. 그것은 과정의 일부다.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고서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으니, 잊음을 불러오는 그 환상은 일부러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니 몸을 떠났을 때, 생각과 창조 사이의 공공연하고도 즉각적인 연결관계를 보는 건 너희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충격적인 놀라움이겠지만, 그러고 나서 자기 체험의 창조에서 자신이 그 결과가 아니라 원인임을 기억해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대단히 즐거운 놀라움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는 생각과 창조 사이에 그런 지연이 있는데, 왜 죽고 나면 아무런 지연도 없는 겁니까?
너희가 시간이라는 환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몸을 떠나면 시간이라는 매개변수에서도 떠나게 되니, 생각과 창조 사이에 어떤 지연도 있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그토록 자주 말씀하셨듯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너희가 이해하는 식으로는 아니다. “시간”이라는 현상은 실제로는 관점perspective의 작용이다.
우리가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왜 시간이 존재하는 겁니까?
그것을 있게 한 것은 너희가 지금 관점 속으로 들어오고, 지금 관점을 가정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관점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체험들을 단일 사건이 아니라 개별 조각들로 나눔으로써, 그것들을 훨씬 더 충분히 탐구하고 검토할 수 있게 만든다.
삶은 단일 사건, 지금 이 순간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모두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모든 곳에서.
지금말고는 어떤 “시간”도 없고, 여기말고는 어떤 “공간”도 없다.
여기와 지금이 존재하는 전부다.
그럼에도 너희는 여기와 지금의 장대함을 낱낱이 체험하고, 성스런 자신을 바로 지금 여기서 그 현실을 창조하는 자로서 체험하기를 원했다.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단 두 가지 방식, 단 두 가지 체험 영역이 존재했으니, 시간과 공간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멋진 생각이어서 너희는 말 그대로 기뻐서 폭발했다!
그 기쁨의 폭발로 너희 부분들 사이에 공간이 창조되었고, 너희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아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너희는 자신의 조각들을 바라보기 위해 그야말로 너희 자신을 찢었다. 너희라면 아마 너무나 행복해서 “펑 터져 버렸다”고 말하겠지만.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너희는 그 조각들을 주워들고 있다.
제 삶이 완전히 그래요! 전 그냥 그 조각들을 함께 모으고 있는 겁니다.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보려고 애쓰면서요.
그리고 너희는 소위 시간이란 장치를 써서, 조각들을 떼어내고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 자신이 뭔가를 창조하는 동안, 그것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고 체험하려고 애써왔다.
너희는 단단한 물체란 게 기실 전혀 단단하지 않고, 사실 백만 가지 다양한 결과들-모두가 한꺼번에 벌어지기에 더 큰 결과를 빚어내는 다양한 상황들-의 덩어리임을 알면서도 현미경을 통해 그것을 살펴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시간을 너희 영혼의 현미경으로 사용한다.
바위의 우화를 생각해보라.
옛날에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는 무수한 원자와 양자와 중성자와 아(亞)분자 물질 미립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미립자들은 어떤 패턴을 이루면서 쉬지 않고 빙빙 돌고 있었다. 각각의 미립자들은 “여기”서 “저기”까지 가고 있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빨리 움직여서 바위 자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그냥 있었다. 그 자리에 드러누운 채 햇빛에 취하고 비에 젖으면서 꿈쩍도 하지 않고.
“이게 뭐지?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게?”
바위가 묻자 아득히 멀리서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건 너다.”
“나라고? 맙소사,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잖아.”
바위의 대꾸에 목소리는 동의했다.
“그래, 떨어져서 보면. 이 위에서 보면 너는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듯이 보이지.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이야, 내 눈에는 너란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게 보여. 그것들은 너를 ‘바위’라는 물체로 만들어주는 특정한 패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속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 너는 마치 요술 같아! 너는 움직이면서 또한 움직이지 않아.”
“그렇다면 환상은 어느 쪽이지? 바위의 일체성, 부동성인가? 아니면 부분들의 분리와 운동인가?”
바위의 물음에 목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환상은 어느 쪽이지? 신의 일체성, 부동성인가? 아니면 부분들의 분리와 운동인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건대, 이것은 만세반석Rock of Ages이니,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사원을 짓겠노라. 이것은 백방으로 구해야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영원한 진리다. 나는 너희를 위해 여기 이 짧은 이야기에서 그 모든 걸 설명했다. 이런 게 우주철학이다.
삶이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미세한 일련의 운동이다. 이 운동들은 존재 전체의 부동성과 존재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위의 원자들이 그랬듯이, 그것은 바로 너희 눈앞에서 부동성을 창조하는 운동이다.
이만큼 떨어져서 보면 분리 따위는 없다. 존재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나는 ‘부동의 동인’ Unmoved Mover이다.
하지만 너희가 존재 전체를 바라보는 한정된 관점에서 보면, 너희는 나눠지고 분리된 존재들이다. 부동의 한 존재가 아니라, 쉼 없이 움직이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들.
둘 다 정확한 관찰이다. 두 현실 다 “진짜”다.
그러니까 내가 “죽더라도”, 나는 전혀 죽는 게 아니군요. 단지 “시간”이나 공간, 지금과 그때, 전과 후가 전혀 없는, 거시우주에 대한 인식으로 바뀌는 것뿐이군요.
맞다. 이해했구나.
제가 그 점을 당신에게 도로 설명해드릴 수 있을지 한번 해볼께요. 제가 그걸 묘사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렇게 해라.
거시 관점에서 보면 어떤 분리도 없습니다. “저 멀리서 보면” 만물의 모든 미립자들이 그냥 하나인 듯이 보이는 거죠.
발치에 놓인 바위를 쳐다볼 때, 당신은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바위를 온전하고 완전하고 완벽한 것으로 보지만, 당신이 바위를 의식하는 그 한 찰나의 순간에도 바위 속에서는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는 바위 미립자들의 엄청난 운동이 있는 거죠. 그리고 그때 그 미립자들이 하는 일은, 존재하는 그대로의 바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아무리 당신이 그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당신에게는 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설사 개념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해도, 당신에게는 그 모든 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거죠. 바위는 바위가 되어가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바위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바위 속 한 아분자 미립자의 의식이라면, 당신은 처음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에는 “저기” 있으면서, 광란의 속도로 움직이는 자신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위 바깥의 어떤 목소리가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를 거짓말쟁이나 협잡꾼이라 부르겠죠.
하지만 바위에서 떨어져서 보면, 바위의 일부가 다른 부분과 분리되어 있고, 게다가 그것이 광란의 속도로 돌고 있다는 발상 쪽이 되려 거짓으로 보입니다. 그 거리에서는, 그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 즉 모두가 ‘하나’이며, 그 모든 운동을 가지고도 무엇 하나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거죠.
네가 해냈구나. 너는 그것을 이해했다. 네가 말하는 건-그것은 정확하다-, 삶이란 결국 관점의 문제란 것이다. 만일 네가 계속해서 이 진리를 이해한다면, 너는 신의 거시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 모두가 같은 것이라는 우주 전체의 비밀을 풀게 될 것이다.
우주는 신의 몸 속에 든 분자다!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소위 “죽을‘ 때, 우리가 돌아가는 의식이 이 거시현실이고요?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돌아가는 거시현실조차도 훨씬 더 큰 거시현실의 미시현실일 뿐이다. 그리고 그 거시현실은 다시 더 큰 현실의 소부분이고....... 또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한 세계다.
우리가 더 이상 그것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면서, 끊임없이 지금의 우리가 되고 있는 신, “존재” 자체다.
심지어 바위조차도 영원히 바위이지는 않으리니, 다만 “영원할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바위이기 전에 그것은 다른 뭔가여서, 몇십만 년이 걸리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바위로 굳어졌다. 그것은 한때 다른 뭔가였고, 앞으로 다시 다른 뭔가일 것이다.
너희 역시 마찬가지다. 너희가 언제나 지금의 “너희”였던 건 아니다. 너희는 다른 뭔가였다. 그리고 너희가 완벽한 장대함으로 그곳에 서 있는 지금, 너희는 진실로....... “다시 다른 뭔가”다.
우와, 정말 놀랍군요. 뭐라 말할 수 없이 굉장해요! 이런 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삶의 우주철학을 통째로 집어들어서는 그걸 내 머리에 쏙쏙 박히는 용어들로 표현해주셨습니다. 정말 굉장해요.
오,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당신은 끔찍할 정도로 잘 하고 계십니다.
네가 거기서 택했어야 할 용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차.
그냥 장난이다. 이쯤에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좀 웃자고 한 소리다. 사실 나를 “화나게” 만들 순 없다. 그런데도 네 동료인간들은 자주 나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화나게 만들곤 한다.
저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가서요. 이제 막 제가 뭔가 붙든 것 같습니다.
그게 뭐냐?
이 모든 설명은, 제가 “혼이 몸에서 벗어났을 때는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왜 시간이 존재합니까?”라는 단 한 가지 물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씀하시는 건, 사실 “시간”이란 관점이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존재하기를 그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영혼이 자신의 과점을 바꾸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의 실체를 체험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다! 너는 이해했다!
그리고 당신은, 거시우주에서는 영혼이 생각과 창조, 다시 말해 발상과 체험 간의 직접적인 연결관계를 깨닫는다는 더 큰 측면을 지적하셨구요.
그렇다-거시차원에서 그것은 바위를 보고 바위 내부의 운동을 보는 것과 같다. 분자 운동과 그것이 창조해내는 바위라는 외관 사이에는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도, 바위는 그냥 “있다”. 아니 사실 운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바위는 있는 것이다. 이 원인과 결과는 즉각적이다. 운동은 일어나고 있고, 바위는 “존재하고” 있다 완전히 “동시”에
소위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깨닫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그냥 관점의 변화다. 너희는 더 많이 보기에 더 많이 이해한다.
죽고 나면 너희는 더 이상 자신의 이해로 한정되지 않는다. 너희는 바위도 보고 바위 안도 본다. 그때 너희는 지금이라면 삶의 가장 복잡한 측면처럼 보였을 것을 보고도 “당연하지”라고 말할 만큼, 그 모든 것이 너희에게 너무나 명확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새로운 수수께끼들이 나타나리니, 우주 수레바퀴를 따라 돌면서 너희는 훨씬 더 큰 현실들, 훨씬 더 큰 진리들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자신의 관점이 생각을 창조하고 생각이 만사를 창조한다는 이 진리를 기억해낼 수 있다면, 몸을 떠난 다음이 아니라 떠나기 전에 이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너희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의 조절 방식이 관점을 바꾸는 거군요.
맞다. 다른 관점을 가졌다고 해봐라. 그러면 모든 걸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너희는 자기 생각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리니, 체험을 창조하는 데는 조절된 생각이 전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상시 기도constant prayer라 부른다.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한번도 기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왜 보지 못하느냐? 생각을 조절하고 이끄는 걸 최고의 기도형태로 여길 때, 너희는 오로지 좋은 것, 바른 것만을 생각하리니, 부정과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물론 너희가 거기에 잠시 빠져들 수는 있지만. 그리고 상황이 암담해 보이는 순간이라도, 아니 특히 그런 순간들일수록 너희는 오직 완벽만을 보게 되리니.
당신은 계속해서 그리로 돌아가시는군요.
나는 너희에게 도구들을 주고 있다. 너희가 너희 삶을 바꾸는 데 사용할 도구들을. 나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을 몇 번이고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되풀이는 너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재인식하게, “다시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벌어지는 모든 일,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자신이 누구고 누가 되기를 택하는가’와 관련된, 너희 내면 깊은 곳의 생각과 선택과 발상과 결단들이 외부로 드러난 물질 표현이다. 그러니 너희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의 측면들을 비난하지 마라. 대신 그것들과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을 바꾸고자 하라.
어둠을 보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는 마라. 그보다는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 그것을 바꿔라. 눈부신 네 빛의 광휘를 사람들 앞에 던져,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네 존재의 빛으로 밝아지게 하라. 그러면 마침내 너희 모두가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보게 되리니.
네 빛은 네 길을 밝히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으니, 빛을 가져오는 자가 되라. 네 빛으로 온 세상이 밝아질 수도 있다.
그러니 비추어 밝게 하라! 비춰라! 칠흑 같은 어둠의 순간이 오히려 네가 받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도록. 그러면 너희는 선물을 받을 때조차, ‘자신’이라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물을 남들에게 주는 것으로, 그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되리니.
사람들을 그들 자신으로 되돌려주는 것, 이것을 너희의 과제로 삼고, 이것을 너희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아라. 그들이 가장 암울해 하는 시간들에도, 아니 특히나 그런 시간들에.
세상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으니 세상을 치유하라. 바로 지금 너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너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다.
내 양이 길을 잃었으니, 이제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니 너희는 뛰어난 목자가 되어 그들을 다시 내게로 데려와라.
4
고맙습니다. 그런 부름과 그런 과제를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앞에 그런 목표를 설정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가 진짜로 원했던 길이 자신을 항상 그 방향으로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었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당신에게 온 이유고, 제가 이 대화를 사랑하고 찬미해온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안의 신성(神聖)을 발견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보기 시작한 게 당신과의 대화를 통해서니까요.
내 지극히 사랑하는 자여, 네가 그렇게 말하니 하늘이 기뻐하는구나. 바로 이것이 내가 네게 오고, 나를 부를 모든 사람에게 가게 되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 있다. 이 대화는 결코 너 혼자하고만 나누려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 몇백만 명의 사람들을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자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때로는 그럴 수 없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이 책을 손에 넣은 그들은, 자기 삶의 그 순간에 딱 들어맞는 방식으로, 스스로가 불러들인 그 지혜를 받고 있다.
너희 각자가 혼자 힘으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여기서 벌어지는 일의 경이로움이다. 너희에게는 그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책을 주고, 자신을 이 대화로 데려오고, 자신더러 이 대화집을 펼치게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너희를 여기로 데려온 건 너희 자신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 마음에 지녀온, 남은 문제들을 함께 탐구해보자.
죽은 후의 삶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죽은 후 영혼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능한 최대한 그 점에 대해 많이 알고 싶고요.
그렇다면 네 갈증이 채워질 때까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앞에서 나는, 벌어지는 일 모두가 너희가 원해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다. 너희는 몸을 지니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몸에서 벗어나 있을 때도,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
처음에는 너희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자신의 현실을 의식하면서 창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에너지인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이나 집단의식 중 하나가 너희 체험을 창조할 것이다.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이 집단의식보다 강한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반면에 너희가 집단의식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내면화하는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지금 삶에서 소위 현실이란 걸 창조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는 삶에서 언제나 자기 앞에 다음 세 가지 선택을 마주한다.
1.너희는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들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고
2.창조력을 지닌 자기 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으며,
3.집단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지금 삶에서 너희는 개인의 자각을 의식하면서 창조하는 쪽이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그 모든 걸 전제로 하면, 너희는 자신의 이해(理解)를 틀린 걸로 치곤 한다. 이 때문에 집단의식에 굴복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안 되든, 너희는 그렇게 한다.
반면에 처음으로 소위 사후(死後)라는 순간으로 들어갔을 때,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모든 걸(아마 너희로서는 믿지 못할) 전제로 한다면, 너희는 아마도 집단의식에 굴복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해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것들에 매달리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낮은 의식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자기 개인의 이해에 머무는 편이 너희에게 이롭고, 높은 의식에 휩싸여 있을 때는 집단의식에 굴복하는 편이 너희에게 더 이롭다.
그러니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을 찾는 게 현명하리니, 너희가 교제하는 동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소위 사후에는 너희가 이런 등급표를 놓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순식간에, 그야말로 자동으로,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높은 의식 차체에 둘러싸일 것이기에.
그럼에도 자신이 그토록 크나큰 사랑에 둘러싸인 걸 너희가 모를 수는 있다. 당장에는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너희에게는 그런 상황을 자신이 “벌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이 그 순간에 아무 운이나 작용하게 하는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너희가 체험하는 건 죽는 상태에서 너희가 지녔던 의식이다.
너희 중 일부는 죽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하면서도 기대를 갖는다. 너희는 평생 동안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왔다. 너희가 “죽으면” 그런 생각들이 뚜렷이 드러나리니, 너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갑자기 깨닫는다realize(현실로 만든다make real). 그것은 너희의 가장 강력한 생각들, 너희가 가장 열렬하게 지녀왔던 생각들, 즉 삶에서 항상 그러했듯이 우세해질 생각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 수도 있겠군요. 그 사람이 평생 동안 지옥을 가장 확실하게 존재하는 장소로 여겼고, 신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며, “겨에서 밀을”, “양에서 염소를” 가려낼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온갖 일들이 다 신을 화나게 했으니, 자신은 당연히 “지옥으로 가리라” 믿었다면, 그는 지옥으로 가겠군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천벌의 불길 속에 던져질 테고요. 무슨 수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 대화를 진행하면서 몇 번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우리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현실이라도 창조할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니 지옥불과 천벌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게 되는 거죠.
‘궁극의 현실’ 에서는 ‘존재’ 자체를 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하는 식의 지옥 체험을 포함해서, 너희가 원하는 모든 하위 현실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네 지적은 정확하다. 나는 이 대화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너희가 지옥을 체험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희가 체험하는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희는 그것들을 체험한다.
이건 정말 믿기 힘들군요. 바네트 베인이라는 제 친구가 얼마 전에 이 문제를 다룬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정말 딱 이 문제입니다. 제가 이 문단을 쓰는 지금은 1998년 7월입니다. 저는 지금 이 문단을 2년전에 적은 문단들 사이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전에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지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려고 마지막으로 또 한번 읽고 있자니 생각이 나더군요. ‘가만 있어봐! 얼마 전에 로빈 위리암스가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바로 이 문제를 영화에서 다루었잖아.’ 그 영화 제목은 <꿈은 뭘 이룰 수 있나What Dreams May Come>인데, 놀랍게도 방금 당신이 말씀하신 걸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도 그 영화를 알고 있다.
당신이 아신다고요? 신이 영화관에도 갑니까?
신은 영화도 만든다.
우와!
그렇다. 너는 <오, 신이시여Oh, God>(조지 번스 주연의 영화-옮긴이)를 못 보았느냐?
글쎄요, 아 물론, 하지만.......
어째서 너는 신이 오직 책만 쓴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로빈 윌리암스 영화는 말 그대로 사실입니까? 제 말은, 그게 진짜냐는 겁니다.
아니다. 신성을 다룬 어떤 영화도, 어떤 책도, 혹은 인간의 다른 어떤 설명도, 말 그대로 사실인 건 없다.
성경도요? 성경도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닙니까?
아니다. 나는 네가 그걸 안다고 생각하는데.
저, 이 책은요? 이 책은 당연히 글자 그대로 사실이겠죠!
아니다.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싫지만, 너는 이 책을 너 개인이라는 체filter로 걸러서 가져오고 있다. 네 체의 그물눈이 이제 갈수록 더 엷어지고 더 가늘어진다는 건 인정하마. 너는 아주 좋은 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체다.
저도 압니다. 다만 그걸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책과 <꿈은 뭘 이룰 수 있나> 같은 영화를 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말리고 싶고요.
그 영화의 작가와 제작자들은 불완전한 체로 거르긴 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굉장한 진리들을 제시했다. 그들이 그려 내려던 핵심은, 너희는 체험하고 싶어하는 꼭 그대로를 죽고 나서 체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자, 이제 본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다만 그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걸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지옥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지옥을 체험한다면, 이 지옥은 뭐가 다른 겁니까?
너희 스스로 창조한 현실에 남아 있는 한, 아무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런 현실을 영원히 창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소위 “나노세컨드”(10억분의 1초-옮긴이)라 부르는 극히 짧은 순간밖에는 그것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의 상상이라는 은밀한 영역에서조차 슬픔이나 고통의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평생동안 그런 자리가 있고, 제가 저지른 어떤 짓 때문에 그런 자리에 던져져도 마땅하다고 믿어왔다면 무엇이 영원히 그런 곳을 창조하는 저 자신을 막아줄 수 있습니까?
네 앎과 이해가.
이승에서 너희의 다른 번 순간이 너희가 지난번 순간에 얻은 새로운 이해들에서 창조되듯이, 소위 저승에서도 너희는 앞서 알고 이해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순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거기서 금방 알고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너희는 언제나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후에는 결과들이 즉각 나타나기 때문이니, 너희라도 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런 생각이 창조해내는 체험 사이의 연결관계를 놓칠 리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자신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행복한데,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무서운지, 또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의미심장한데,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실상 무의미한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직후의 순간들에 벌어지는 상황을 놓고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도요.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한 임사(臨死)체험을 하고 돌아와 두 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겁에 질려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을 만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요.
영혼은 마음의 가장 강력한 제안에 반응하고 그것을 재창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빚어낸다.
어떤 영혼들은 그런 체험 속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것을 아주 현실처럼 만든다. 심지어 몸을 가진 동안의 체험들-똑같이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지만-에 머무를 때조차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반면에 재빨리 자신을 적응시켜 그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새로운 생각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당장에 새로운 체험들로 옮아가는 영혼들도 있다.
당신 말씀은 사후라고 해서 상황이 존재하는 무슨 특별한 방식 같은 건 없다는 건가요? 우리 마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 같은 건 없다는 겁니까? 죽음을 거쳐 다른 현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신화와 전설과 가상 체험들을 만들어간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구속에서 풀려나는 건 언제입니까? 언제쯤에야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까?
너희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할 때, 이것이 바로 로빈 윌리암스 영화의 핵심이고, 여기서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존재 전체의 영원한 진리를 알고, 그 위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며, 그 웅장한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바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아니다, ‘위대한 유일 진리’는 있고, ‘종국의 실체’Final Reality는 존재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런 현실에 관계없이 언제나 너희가 택하는 바를 가질 것이다. 신성한 피조물인 너희는 너희의 현실을 성스럽게 창조하고 있다는 것-때로는 그것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비로 이것이 그 실체이기에.
하지만 너희가 개별 현실을 창조하길 그만두고 더 큰 현실, 통일된 현실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싶어한다면, 너희는 당장에 그렇게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런 선택과 그런 바램과 그런 의지와 그런 앎의 상태로 “죽는” 사람들은 당장에 ‘하나됨’Oneness(‘하나임’으로도 번역-옮긴이)의 체험 속으로 옮아간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경우에만, 바라는 만큼만, 또 바랄 때만, 비로소 그런 체험 속으로 옮아갈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몸을 지니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램의 문제, 선택하고 창조하는 문제, 궁극에 가서는 창조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하는 문제, 다시 말해 이미 창조된 것을 체험하는 문제다.
이것은 ‘창조된 창조자’The Created Creator요 ‘부동의 동인’이다. 그것은 알파요 오메가며, 전이자 후이고,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삼라만상의 지금-그때-항상의 측면이다.
나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너희에게 나 자신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원할 때마다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다. 너희가 몸을 지니고 있든, 아니면 몸에서 벗어난 다음이든, 당장 그 자리에서. 너희는 개별 자아의 상실이 너희를 기쁘게 할 때마다 ‘하나’One로 되돌아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또 너희는 원할 때마다 개별 자아의 체험을 다시 창조할 수도 있다.
그것이 존재 전체의 가장 미세한 부분이든 아니면 가장 큰 부분이든, 너희는 원하는 모든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는 미시우주를 체험할 수도 있고, 거시우주를 체험할 수도 있다.
나는 미립자를 체험할 수도 있고, 바위를 체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 잘했다. 너는 이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너희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머물 때, 너희는 전체보다 작은 부분, 즉 미시우주의 부분을 체험한다. (물론 그렇다고 가장 작은 부분이란 의미는 아니다.) 반면에 너희가 몸에서 벗어나 있을 때(일부에서 “영계”라 부르는 상태에 있을 때), 너희의 시야는 기하급수로 확대된다. 갑자기 뭐든 알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진다. 그때 너희는 거시우주 관점을 가질 것이고,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너희가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다시 또 더 큰 거시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 전체는 너희가 그 시점에서 체험하는 현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게 갑작스례 분명해지리니, 이것은 당장에 너희를 경외심과 기대감, 경탄과 흥분, 기쁨과 들뜸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알고 이해하는 것, 즉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도 알고 이해할 것이기에.
제가 과연 참된 지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을까요?
너희가 “죽고” 나면, 너희는 지금껏 자신이 답했던 온갖 물음들을 다시 제기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존재하리라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질문들에 자신을 여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혹은 존재 전체와 하나되는 체험을 선택할 수도 있다. 또 너희는 자신이 다음 번에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게 뭔지 정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너는 가장 최근의 육신으로 돌아가길 원하느냐?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인간형상으로 삶을 다시 체험하길 원하느냐?
혹은 그 당시 체험 수준에서 네가 있는 “영계”의 그 위치에 그대로 머물길 원하느냐? 너는 자신의 앎과 체험이 계속해서 더 나아가길 원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이제 ‘하나임’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나는 언제나 너희에게 이것을 물을 것이다. 너희가 가장 아끼는 소망, 너희의 가장 큰 바램을 주는 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주가 알고자 하는 것 역시 언제나 이것이다. 사실 우주는 날마다, 순간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너희와 나의 차이는, 너희는 이것을 의식으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나는 자각한다는 것이다.
말해주십시오. 제가 죽고 나면 몇몇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하듯이 제 친척들, 제 가족들이 절 만나러 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게 이해시켜주는지요. 우리는 “먼저 간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나요?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나요?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너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길 원하느냐? 그러면 그렇게 될 것이다.
아, 제가 혼동했군요.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우리는 누구나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이 자유의지는 우리가 죽고 나서까지 이어질 거란 거죠?
그렇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 가족들의 자유의지가 내 것과 일치해야 하겠군요. 내가 그런 생각과 바램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과 바램을 가져야겠군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죽더라도 그들은 날 위해 거기 있지 않겠군요. 더구나 저는 앞으로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은데, 그중 한두 사람은 계속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또 개중에는 점점 더 높은 체험, 당신 표현대로 ‘하나임’과 다시 합쳐지는 체험 속으로 옮아가고 싶어할 사람도 있을 테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우주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모순 같아 보이는 상황들은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한 식의 상황이 일어난다 해도(그런데 이건 아주 좋은 질문이다), 너희 양쪽 다 자신들이 택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양쪽 다요?
양쪽 다.
어째서 그런지 여쭤봐도 됩니까?
된다.
그럼, 어째서.......
너는 신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내가 한 곳, 오직 한 곳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뇨. 전 당신이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걸 믿습니다.
음, 네 말이 맞다. 내가 없는 곳은 없다. 이건 이해하겠느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너는 뭣 때문에 그게 너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느냐?
당신은 신이니까요. 전 다만 인간일 뿐이지요.
알겠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식의 “다만 인간일 뿐인” 것에 붙들려 있구나.......
좋습니다. 좋아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저도 신이라고, 혹은 적어도 신과 같은 재질로 이루어졌다고 해두죠. 그렇다면 당신 말씀은 저도 어디나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그냥 의식이 자신의 현실 속에 무엇을 붙잡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소위 “영계”에서 너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네가 한 “때”에 한 곳에서 한 영혼soul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체험하고 싶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그보다 더 큰, 한 “때”에 두 곳 이상에서 존재하는 네 영spirit을 체험하고 싶다면, 너는 그렇게도 할 수 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때”든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서 너희 영을 체험하리니, 이것은 실제로는 오직 한 “때”와 한 “곳”만이 존재하며, 너희는 언제나 그 모두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선택할 때마다, 자신이 원하는 그것의 어떤 부분, 혹은 어떤 부분들도 체험할 수 있다.
저는 제 가족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 있는 “전체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면요? 그럴 때는 어떻게 되죠?
너와 네 가족이 같은 것을 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너와 나, 그리고 네 가족과 나,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같은 존재다.
뭔가를 바라는 네 행동 자체가 뭔가를 바라는 내 행동이다. 너희는 바램이라는 체험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나 자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가 바라는 것을 바란다.
네 가족들과 나 역시 같은 존재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바라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네 가족들 또한 바라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너희 모두는 같은 것을 바란다. 너희는 평화를 바라고, 풍요를 바란다. 너희는 기쁨을 바라고, 성취를 바란다. 너희는 만족을 바라고, 일을 통한 자기 표현과, 삶에서의 사랑과, 몸의 건강을 바란다. 너희 모두가 같은 것을 바란다.
너는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삶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네게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상의 방식과 소위 영계의 방식에서 유일하게 다른 한 가지는, 지상에서는 너희 모두가 같은 것을 바라면서도,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갖게 될지를 놓고는 모두가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것을 추구하는데도 너희는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지닌 이런 다른 견해들은 너희에게 서로 다른 결과들을 가져다준다. 이런 견해들은 ‘받침생각’Sponsoring Thoughts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1권에서도.
너희들 다수가 공유하는 그런 생각들 중 하나가 충분치 못하다는 관념이다. 너희들 다수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냥 충분치 못한 게 있다. 뭐든 충분치 않다고 믿는다.
사랑이 충분치 않고, 돈이 충분치 않으며, 먹을거리가 충분치 않고, 옷이 충분치 않으며, 잠 잘 곳이 충분치 않고, 시간이 충분치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갈 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충분치 않고, 그리고 당연히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기에는 너희 자신이 충분치 않다고.
이런 받침생각 때문에 너희는 “충분치 않다”고 여기는 걸 손으로 넣으려 할 때, 온갖 종류의 전략과 전술들을 채택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너희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히 존재한다는 걸 확신하고 나면, 당장 그 자리에서 내던지고 말 접근방식들에 불과하다.
너희가 “천국”이라 부르는 곳에서는 자신과 자신이 바라는 것 사이에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음을 자각하게 되니, 너희가 지닌 “충분치 않음”의 관념은 사라진다.
너희는 충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너희가 있음을 자각한다. 너희는 자신이 어떤 특정 “시간”에 둘 이상의 장소에 있을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네 형제가 원하는 것을 네가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네 자매가 택하는 것을 네가 택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만일 그들이 죽는 순간에 자신들의 공간 속에 네가 있기를 원한다면, 너에 대한 그런 생각 자체가 너를 그들에게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고 네가 거기로 가는 것이 네가 하고 있을 다른 일에서 너를 벗어나게 하는 게 아니니, 너로서도 그들에게 달려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안 돼’No라고 말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 이런 상태가 내가 항상 머무는 상태다.
너는 예전에 신은 절대 ‘아니’No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나는 너희가 바라는 꼭 그대로를 항상 너희에게 줄 것이다.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내가 항상 그래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특정한 어떤 순간에 각자가 바라는 꼭 그대로를 모두에게 항상 주고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내 사랑하는 자여, 그렇다.
네 삶은 네가 바라는 바와, 자신이 바라는 걸 가질 수 있으리란 네 믿음의 반영물이다. 네가 아무리 간절히 바라더라도 가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그걸 줄 수가 없다. 나는 그것에 관한 네 생각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그것을 침해할 수 없는 것, 이것은 법칙이다.
자신이 뭔가를 가질 수 없다고 믿는 건 그걸 갖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같은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바란다고 해서 뭐든 다 가질 순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꺼번에 두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랄 수는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건 이것 말고도 많습니다. 지상에서의 우리는 하나같이 대단히 제한된 존재들이니까요.
나는 네가 그걸 그런 식으로 본다는 걸 안다. 그래서 네게는 그것이 그런 식인 것이다. 영원히 진리로 남을 한 가지 사실은, 너희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지리라고 믿는 체험을 받으리란 것이다.
따라서 네가 자신은 한꺼번에 두 곳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너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네가 생각의 속도로 네가 원하는 어디든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아가 주어진 순간에 둘 이상의 장소에서 물질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당신도 보시다시피 제가 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이런 겁니다. 저도 이 정보가 신에게 직접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때면 저는 속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거든요. 제 말은 당신이 앞에서 말한 걸 도무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 체험도 이런 걸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천만에. 모든 종교의 성자와 현인들이 이 두 가지 다를 해냈다고 일컬어져왔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수준의 믿음이 있어야 할까? 놀라운 수준의 믿음이? 한 존재가 천년은 걸려야 도달할 그런 수준의 믿음이? 그렇다. 그럼 그건 불가능하다는 뜻일까? 아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믿음을 지닐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제가 그런 수준의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너는 거기에 이를 수get there 없다. 단지 거기에 있을 수be there만 있다. 나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그렇다는 뜻이다. 나라면 ‘완벽한 앎’Complete Knowing 이라고 불렀을 이런 종류의 믿음은 너희가 손에 넣으려고 애쓸 수 있는 뭔가가 아니다. 사실 손에 넣으려고 애쓴다면 너희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그냥 너희 자신인 뭔가다. 너희 자신이 그냥 이 앎이다. 너희가 이런 존재being다.
그런 있음beingness은 완전 자각total awareness의 상태에서 나온다. 그것은 오직 그런 상태에서만 나올 수 있다. 만일 너희가 자각하게 되기를 구한다면, 그렇다면 너희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것은 너희 키가 150센티미터일 때 180센터미터“이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너희는 180센티미터일 수 없다. 너희는 오직 있는 그대로, 150센티미터“일” 수만 있다. 180센티미터로 자랐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180센티미터“일” 것이다. 너희가 180센티미터일 때, 그러면 너희는 180센티미터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완전 자각의 상태에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완전 자각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으려 애쓰지” 마라. 대신 완전 자각의 상태로 옮아가고자 하라. 그러면 믿음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고, ‘완벽한 앎’이 자신의 경이로움을 펼치리니.
예전에 명상을 하다가 완전한 ‘하나됨’, 완전 자각을 경험했더랬습니다. 정말 멋졌어요. 황홀경이었지요. 저는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그 체험을 다시 가져보려고 애써왔습니다. 앉아서 명상하면서 그 완전 자각을 다시 가져보려고요. 그런데 안 되더군요. 그러니까 그 이유가 이거란 거죠. 그렇죠? 당신 이야기는 뭔가를 가지려고 애쓰는 한,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 애씀 자체가 내가 지금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진술이기 때문이란 거죠. 당신은 이 대화 전체에 걸쳐서 제게 계속 같은 지혜를 주고 계시는군요.
그래, 그렇다. 이제 너는 그것을 이해한다. 이제 네게는 그것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계속 원을 따라 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상황을 다시 찾는 이유다. 너는 세 번, 네 번, 때로는 다섯 번을 돌고서야 이해한다.
그러고 보니 제가 그런 질문을 한 게 잘됐군요. “너는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다”거나 “너는 네가 원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위험한 소재일 수 있거든요. 이건 사람들을, “나는 신이다! 나를 봐! 난 날 수 있어!”라고 외치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뛰어내리게 만들 그런 소잽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완전 자각 상태에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임을 과시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라면, 너희는 자신이 신임을 모른다는 것이기에, 너희 현실 속에서 이 “알지 못함”이 자신을 과시할 것이다. 결국 너희는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말 것이다.
신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그냥 있다, 그리고 신이란 게 그런 것이다. 자신이 신과 ‘하나’임을 아는 사람들이나 내면의 신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한테도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고,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했기에 그들이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라며 그를 조롱했을 때, 예수라 불린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3일 후, 어떤 목격자도, 어떤 관중도, 뭔가를 증명해줘야 할 어떤 사람도 없을 때, 그는 놀랍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부족한 엄청난 일을 가만히 소리 없이 해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은 두고두고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가 구원을 찾을 곳이 이런 기적에서다. 예수만이 아니라 ‘너희 자신’에 관한 진리를 너희에게 보여주는 이런 기적은, 너희가 지금껏 들어왔고 진리로 받아들였던 너희 자신에 관한 거짓말에서 너희를 구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너희를 ‘자신’에 관한 가장 고귀한 생각으로 초대한다.
너희 행성에도 지금 이 순간, 이런 여러 고귀한 생각들을 드러내온 사람들이 있다. 물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게 하고, 그들 자신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게 하며, 나아가 몸을 하고 “영원히 살거나”, 몸으로 돌아와 다시 사는 것을 포함해서, 이 모든 것, 이 모두가 그들의 믿음, 그들의 앎, 세상과 세상 이치에 대한 그들의 변치 않는 명료함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육신형상을 한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해낼 때마다, 너희는 그 사건들을 기적이라 부르고 그 사람들을 성자와 현인으로 삼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너희보다 더 성자와 현인인 건 아니다. 너희 모두가 성자이고 현인이기 때문이니, 그들이 너희에게 전해주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제가 어떻게 그런 걸 믿을 수 있습니까? 저도 진심으로 그걸 믿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럴 수가 없어요.
그렇다, 너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너는 다만 그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네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남에게 주어라. 그러니 네가 그렇게 될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되도록 도와줘라. 다른 누군가에게 그가 이미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그가 그것을 지녔음을 칭찬하고, 그가 그것을 지녔음을 존경하라.
구루guru(영적인 면에서의 지도자-옮긴이)를 갖는 진가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서구에서는 “구루”라는 용어에 대단히 부정적인 에너지를 실어왔기에, 이제 그 말은 거의 비아냥거림이 되고 말았다. “구루”가 된다는 건 어쨌든 협잡꾼이 되는 것이고, 구루에게 네 정성을 바치는 건 어쨌든 네 힘을 내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너희 구루를 존경하는 건 힘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는 것이다. 너희가 구루를 존경할 때, 너희가 자신의 선각자 스승을 찬미할 때, 너희는 “나는 당신을 본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너희가 남에게서 보는 것이라면, 너희는 자신에게서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은 너희 내면 실체가 외화된 증거물이다. 너희가 구루에게서 보는 것은 너희 내면의 진실, 너희 존재의 진실에 대한 외화된 증명이다.
네가 쓰는 이 책들에서 너를 통해 주어지는 진리가 이것이다.
저는 이 책들을 제가 쓰는 걸로 보지 않는데요. 저는 신인 당신이 저자이고, 저는 단지 필경사라고 보는데요.
저자는 신이다........ 그리고 너 역시 저자다. 내가 쓰든 아니면 네가 쓰든 아무 차이도 없다.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 한, 너는 네가 쓰는 내용의 핵심을 놓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대다수 인류가 이 가르침을 놓쳐왔다. 그래서 나는 옛스승들과 똑같은 메시지를 가진 새로운 스승들, 더 많은 스승들을 너희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가르침을 너 자신의 사사로운 진리로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너를 이해한다. 만일 네가 이 글들을 말하거나 쓰면서, 신과 ‘하나’라거나 심지어 신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돌아다녔다면, 세상은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이야 자기들 멋대로 생각할 수 있겠죠. 제가 아는 건, 나는 여기 이 책들에서 주어지는 정보의 수령자가 될 자격이 없고, 자신의 이 진리의 전달자가 될 만큼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 세번째 책을 적고 있지만, 이것을 세상에 내놓기전에는 내가 저지른 온갖 실수와 온갖 이기적인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 멋진 진리의 전달자가 되기에 가장 부적합한 인물이 나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이 삼부작의 가장 위대한 메시지겠죠. 신은 누구한테서도 숨지 않고 모두에게 말한다는 거요. 심지어 우리 중에 가장 무가치한 사람에게까지요. 신이 저 같은 사람한테도 말씀하신다면, 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남녀노소 모두의 가슴에 대고 직접 말씀하실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는 거죠. 우리 중 누구도 신이 저버릴 만큼 끔찍하지 않고, 신이 외면할 만큼 용서할 수 없지는 않은 셈이니까요.
너는 이걸 믿고 있느냐? 네가 방금 적은 것들 전부를?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럴지어다. 그것이 너와 함께 하리니.
하지만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하겠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너도 가치 있다. 무가치함은 지금까지 인간 종족을 찾아온 것 중에서 최악의 고발장이다. 너는 과거에 근거해서 네 가치를 평가하지만, 나는 미래에 근거해서 네 가치를 평가한다.
미래, 미래, 언제나 미래다! 너희 삶은 미래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고, 너희 진리 역시 미래에 있지, 과거에 있지 않다.
너희가 한 일은 너희가 하려는 일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고, 너희가 얼마나 잘못했는가는 너희가 얼마나 창조할지에 비하면 무의미하다.
나는 네 잘못을 용서한다, 그 전부를. 나는 네 잘못된 열정을 용서한다, 그 전부를, 나는 네 그릇된 관념과 오도된 이해와 상처 주는 행동과 이기적인 결정을 용서한다. 그 전부를.
남들은 너를 용서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용서한다. 남들은 너를 죄의식에서 풀어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풀어준다. 남들은 네가 잊고 앞으로 나가 새로운 뭔가가 되게 놔두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예전의 너가 아니라 지금의 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죄인이라도 한 순간에 성인으로 될 수 있다. 단 일초만에, 단숨에.
사실 “죄인” 같은 건 없다. 적어도 내게는 아무도 죄지을 수 없기 때문이니,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용어를 쓰는 건 그것이 너희가 이해할 것 같은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용서할 게 없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방면시켜줄 수는 있다. 그러기에 나는 그렇게 한다. 내가 그 많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해 예전에 그토록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여기서 다시 한번.
왜 우리는 그런 가르침들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왜 우리는 그걸 믿지 않았을까요? 당신의 가장 큰 약속을.
너희가 신의 선함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선함을 믿는 건 놔두고, 대신 단순 논리를 믿어라.
내가 너희를 용서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너희는 나를 화나게 할 수도, 위태롭게 하거나 해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자신들이 나를 화나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나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상상한다. 이 무슨 망상인가! 이 무슨 과대망상이란 말인가!
나는 해 입지 않는 자니, 너희는 어떤 식으로도 나를 해치거나 위태롭게 할 수 없다. 그리고 해 입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도 없고, 입히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내가 비난하지 않고, 벌주지 않을 것이며, 나로서는 보복할 필요도 없다는 진리 뒤에 있는 논리를 이해한다. 어떤 방식도 나를 화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나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너와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누군가가 너희를 다치게 하고, 위태롭게 하며, 해칠 수 있는고, 또 그래 왔다고 너희 모두가 상상하더라도.
너희는 피해봤다고 상상하기에 복수를 필요로 하고, 고통을 체험하기에 그 보복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요구한다. 하지만 남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에 도대체 어떤 정당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너희는 누군가가 너희에게 상처를 입혔으니(라고 너희는 생각한다) 거꾸로 그를 상처 입히는 게 옳고 정당하다고 느끼는가? 너희가 입으로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런 짓이라도 정당화만 할 수 있다면, 자기가 하는 건 괜찮다는 이야기냐?
이런 게 광기다. 그리고 이 광기에서 너희가 보지 못하는 건, 남에게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쪽이 옳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그 사람 자신은, 그가 추구하고 바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자신이 취하는 모든 행동을 올바른 행동으로 이해한다.
너희 규정에 따르면 그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 글렀겠지만, 그들의 규정에 따르면 그르지 않았다. 그들의 세상형과 도덕적 윤리적 해석과 신학적 이해는 물론이고, 그들의 결정과 선택과 행동들에 너희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해서 그것들에 동의한다.
너희는 그들의 가치관이 “글렀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너희 가치를 “옳다”고 말하는 건 누군가? 오직 너희뿐이다. 너희 가치관은 너희가 그것을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그렇다 해도 너희가 그 평가를 계속 유지한다면 이것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을 “옳고” “그르다”고 여기는지를 놓고 너희 스스로도 계속해서 마음을 바꾸고 있지 않는가? 너희는 개인으로서도 이렇게 하고 사회로서도 이렇게 한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너희 사회가 “옳다”고 여기던 것을, 너희는 지금 “틀렸다”고 여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너희가 “틀렸다”고 여기던 것을, 너희는 이제 “옳다”고 단정한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짠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너희는 무슨 수로 선수 일람표도 없이 선수들을 알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감히 서로를 심판하면서 앉아 있군요. 우리는 감히 비난하죠. 용납되는 것과 용납되지 않는 것에 대한, 우리의 변화하는 관념들을 몇몇 사람들이 따라잡지 못했다고 해서요. 휘유~ 우린 진짜 대단합니다. 심지어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는 것에 대해서조차 우리 마음을 계속 유지하지도 못하면서요.
그건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옳고 그른” 것에 대해 견해를 바꾸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견해를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너희는 절대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변화는 진화의 산물이다.
아니다, 문제는 너희가 변했거나, 너희 가치가 변한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자신이 지금 지닌 가치관이 옳고 완벽한 것이니,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신봉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고집한다는 데 있다. 너희 중에는 지극히 독선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믿음이 너희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고수하라. 붙들고 포기하지 마라. “옳고 그름”에 대한 너희의 견해는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규정이다. 하지만 남들에게 너희식으로 규정하라고 요구하지는 마라. 그리고 너희의 지금 믿음과 관행들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진화 과정 자체를 멈추게 하지는 마라.
사실 삶이란 너희가 있든 없든 계속되기 마련이니, 그렇게 하기를 원하더라도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떤 것도 똑같이 남아 있지 않으며, 어떤 것도 변화지 않고 그대로일 수 없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는 건 죽은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운동이다. 바위조차 운동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운동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한 순간에서 그 다음 순간까지 똑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똑같이 남는 것, 혹은 똑같이 남으려 하는 것은 삶의 법칙에 맞서는 것이니, 이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 투쟁에서는 언제나 삶이 이길 것이다.
그러니 변하라! 그렇다, 바꾸어라! “옳고” “그름”에 대한 너희의 견해를 바꾸고, 이것과 저것에 대한 너희의 관념을 바꿔라. 너희 뼈대를 바꾸고, 너희 체계를 바꾸고, 너희 모델을 바꾸고, 너희 이론을 바꾸어라.
가장 심오한 너희 진실들도 바뀌게 놔둬라. 부디 그것들을 너희가 손수 바꿔라. 나는 완전히 말 그대로의 뜻으로 말하고 있다. 부디 그것들을 너희가 손수 바꿔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상 속에 성장이 있고, ‘있는 그대로“에 대한 새로운 발상 속에서 진화가 촉진된다. 그것이 누구고, 무엇이고, 어디고, 언제고, 어떻고, 왜 그런가에 대한 너희의 새로운 발상 속에서 수수께끼가 풀리고, 음모가 드러나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면 너희는 새로운 이야기, 더 멋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새로운 발상 속에는 흥분이 있고 창조가 있다. ‘너희 안의 신’이 뚜렷이 드러나 충분히 실현되는 지점 또한 여기다.
너희 생각에 아무리 “좋았다”고 보이는 상황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고, 너희 생각에 아무리 근사해보이는 신학과 이데올로기와 우주철학이라도 훨씬 더 큰 경이로 충만할 수 있다. “천지간에는 너희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려 있으라, 열려 있으라. 너희가 옛 진리로 편안했다 해서,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까지 닫아버리지는 마라. 삶은 너희의 안전지대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차라리 판단을 피하고자 하라. 다른 사람의 “그름”은 어제 아침 너희의 “옳음”이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지금은 바로잡은 과거의 너희 행동이며, 다른 사람의 선택과 결정들이 “상처주고” “해롭고” “이기적이고” “용서할 수 없”듯이 너희 자신의 허다한 선택과 결정들도 그러했으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때, 너희는 자신이 어디서 왔고, 자신과 그 사람 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고 있다.
그리고 너희 중에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하잘 것 없고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너희 중 영원히 길을 잃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너희 모두, 모두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고, 너희 모두, 모두가 진화를 체험해가는 중이기에.
이것이 내가 꾀하는 일이다.
너희를 통해.
5
어렸을 때 배웠던 기도가 생각나는군요. “주여, 저는 당신을 제 집안으로 들일 만큼 훌륭하지 않지만, 그냥 그렇다고 말씀해주시면 제 영혼이 치유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렇게 말해주셨고, 저는 치유된 걸 느낍니다. 저는 더 이상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면 제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지 아시는군요.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줄 수 있다면 이것일 겝니다.
너는 이 대화로 그들에게 그런 선물을 주었다.
이 대화가 끝나더라도 계속 그런 선물을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대화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 그러니까 이 삼부작이 완결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 무척 행복한 놈입니다. 내 영혼이 주고 싶어하는 선물이 이것이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있지요. 제 선물은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서 그것을 주어라. 내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 하라. 그 모두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참된 경이를 느끼게 하라. 이 선물을 주어라. 그러면 너는 세상을 치유하리니.
부디 당신이 도와주십시오.
너는 언제나 내 도움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친구다.
어쨌든 전 이 대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전에 말했던 것에 대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요.
나는 여기 있다.
“생애들 사이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말하자면 당신은, “너희는 원할 때마다 개별 자아의 체험을 다시 창조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건 너희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 새로운 “자신”이나 예전의 너희와 같은 자신으로 전체에서 떠오르리란 뜻이다.
그럼 제 개별 의식, “나”에 대한 자각을 제가 지닐 수 있고, 그것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너희는 언제든지 원하는 모든 걸 체험할 것이다.
그래서 제가 “죽기” 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이승으로, 땅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고요?
그렇다,
육신을 가지고요?
너는 예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느냐?
들었죠. 하지만 전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처럼 되겠다고 나서지도 않을 거구요.
그가 “너희 역시 이런 일들, 아니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죠. 하지만 예수는 그런 기적들을 말한 게 아닙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유감이구나.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유일한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라고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사람들이 또 있습니까?
그렇다.
맙소사, 그건 신성모독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게 신성모독이라고?
저, 그렇게 말할 사람들도 있을 거란 얘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성경요? 성경에서 예수 아닌 다른 사람이 죽고 나서 다시 몸으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고요?
라자로라고 못 들어봤느냐?
읍, 그건 억지예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진 건 그리스도의 권능 덕분이었습니다.
맞다. 그런데 너는 네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권능”이 단지 라자로만을 위해 예비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세상의 역사에서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그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네게 말하노니,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진 사람들은 많다. “삶으로 되돌아온”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것은 너희 병원들에서 날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다.
잠깐만요. 그것도 억집니다. 그건 의학이지 신학이 아닙니다.
호, 그러니까 신은 어제의 기적에만 관계하지, 오늘의 기적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구나.
흐음........ 좋습니다. 당신에게도 기술면에서 자격을 드리죠. 하지만 자기 힘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가 했듯이요! 아무도 그런 식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돌아오지 않았다구요.
자신할 수 있느냐?
음........ 꽤 자신할 수 있죠.......
마하바타 바바지Mahavatar Babaji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이 이야기 속에 동양의 신비주의자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 걸 구입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알겠다. 음, 물론 그들이 옳겠지.
다시 바로잡을게요.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영혼들이 영적 형상이나 물질형상으로 소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겁니까? 그들이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요?
이제 너는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런 이야기를 날마다 못 듣는 거죠? 이 정도 일이라면 세계 토픽감일 텐데요.
사실 영적 형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육신으로 돌아오길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하,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았군요! 왜 안 그렇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더 많은 영혼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건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한가 아닌가의 문제다.
무슨 말씀인지요?
예전 형상의 육신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혼이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영혼이 몸으로 돌아가길 택할 때는 거의 언제나 다른 몸으로 그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새로운 기억해냄을 체험하며, 새로운 모험들에게 부딪힌다.
영혼이 몸에서 떠나는 것은 대개 그 몸과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체험을 체험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이라면요? 그 사람도 자신의 체험으로 죽은 겁니까? 아니면 체험이 “잘린” 겁니까?
너는 아직도 사람들이 우연히 죽는다고 생각하느냐?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이 우주에서는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우연” 같은 건 없다. “우연의 일치” 같은 것도 없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제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 애도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겠군요.
그들은 네가 자신들을 위해 애도해주길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안다면, 그들이 자기 나름의 고귀한 선택으로 거기에 있다는 걸 네가 안다면, 너는 그들의 출발을 축하했을 것이다. 네가 한 순간이라도 소위 사후세계란 걸 체험했다면, 너 자신과 신에 관한 가장 근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와 봤더라면, 너는 그들의 장례식에서 가장 유쾌한 웃음을 웃었을 것이고 네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우리가 장례식에서 우는 건 우리의 상실감 때문입니다. 그들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란 걸 알기에, 사랑하던 이를 두 번 다시 붙들거나 껴안거나 만질 수 없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없으리란 걸 알기에, 우리는 슬퍼하는 겁니다.
실컷 운다는 게 그런 것이다. 그런 울음은 너희의 사랑과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광스럽게 한다. 하지만 기쁨에 차서 몸을 떠나는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과 체험이 얼마나 근사하고 경이로운지 안다면 이런 애도조차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사후세계의 모습은 어떤 겁니까? 실제로요. 제발 저한테 몽땅 다 이야기해주십시오.
내가 밝히지 않으려 해서 아니라, 말해준다 해도 너희의 지금 조건, 지금 이해수준으로는 너희가 그것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탓에 일부 밝혀질 수 없는 것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야기될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위 사후세계에서 너희는 지금 체험하는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중 하나를 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조절되지 않은 생각들을 창조하는 데 굴복할 수도 있고, 자신이 체험을 선택에 따라 의식하면서 창조할 수도 있으며, 존재 전체의 집단의식을 체험할 수도 있다. 이 마지막 체험을 재합일, 혹은 ‘하나’와의 재결합이라 부른다.
하지만 너희가 첫 번째 길을 택한다 해도, 너희 대다수는 그다지 오래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지상에서 너희가 처신하는 방식과 달리). 이것은, 자신이 체험하는 것을 싫어하자마자, 너희는 새롭고 좀 더 즐거운 현실을 창조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냥 멈추는 것으로 이렇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너희는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 한, 그토록 겁내는 “지옥”을 체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설사 그런 경우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점에서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것에 “행복해한다.”) 그러니 너희는 더 이상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것을 체험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대다수는 그 체험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그 순간에 이미 거기서 벗어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너희는 지상에서의 삶에서도 지옥을 없앨 수 있다.
너희가 두 번째 길을 택해 자신의 체험을 의식하면서 창조한다면, 너희는 의심할 여지없이 “곧장 천국에” 이르는 체험을 할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리고 천국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것을 창조하려 할 테니 말이다. 설령 천국을 믿지 않는다 해도, 너희는 체험하고 싶은 건 뭐든 체험하게 될 테고,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너희의 소망은 점점 더 나아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결국 너희는 천국을 믿게 될 것이다!
너희가 세 번째 길을 택해 집단의식의 창조에 자신을 맡긴다면, 너희는 순식간에 완전한 포용과 완전한 평온, 완전한 기쁨, 완전한 자각, 그리고 완전한 사랑 속으로 옮아갈 것이다. 이런 게 집단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하나임’과 하나될 것이고, ‘너희인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전부’를 빼고는,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너희가 결정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너희 다수가 명상상태에서 아주 잠깐씩 경험하곤 했던 “하나임과 하나되는” 체험인 열반nirvana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경이다.
이렇게 해서 너희가 무한시간-무(無)시간 동안 하나임을 체험하고 나면, 너희는 마침내 그 체험을 그만둘 것이다. ‘하나 아닌 것’도 함께 존재하지 않고서는, 또 그것이 존재할 때까지는, ‘하나임’을 ‘하나임’으로 체험할 수 없기에, 너희는 이것을 이해하면서 다시 한번 분리, 즉 분열이라는 발상과 생각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영원히 영원히, 끝없이 영원히, 우주 수레바퀴를 따라 여행하고, 가고, 돌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몇 번이고-무수히 여러 번, 그때마다 무한한 기간동안-다시 ‘하나됨’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주 수레바퀴의 어떤 지점에 있든 ‘하나됨’으로 돌아갈 도구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리라.
너희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내일이라도 명상 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가 죽을 때 지니고 있던 의식수준에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 너희는 원하는 만큼 재빨리 다른 수준으로 옮아갈 수도 있고, 너희가 하고 싶은 만큼 많은 “시간”을 들일 수도 있다. 만일 너희가 한정된 관점과 조절되지 않은 생각의 상태로 “죽는다면”, 너희는 더 이상 원하지 않을 때까지 그 상태가 너희에게 가져다주는 모든 걸 체험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깨어나”-의식하면서-자신의 현실을 손수 창조하는 체험을 시작할 것이다.
너희는 첫 단계를 돌아보면서 그것을 정화(淨化)라 부를 것이고, 너희 생각의 속도로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단계를 천국이라 부를 것이며, ‘하나됨’의 희열을 체험하는 세 번째 단계를 열반이라 부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알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죽고 나서”가 아니라 몸 밖에서의 체험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게 그걸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냥 ‘자신’의 본체essence가 신체를 떠난 것이다. 이것은 꿈꾸는 동안에는 흔한 일이고, 명상 동안에는 자주 있는 일이며, 몸이 깊은 잠에 빠진 동안에는 숭고한 형태로 빈번히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 “이탈” 동안 너희 영혼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을 보고하는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들로서는 그것을 “그냥 내게 일어난 일”로서 체험할 수도 있지만, 무릇 영혼의 행동과 관련된 어떤 일도 저절로 일어나는 법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오직 발 가는 대로 창조하는 것뿐이라면, 만사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밝혀질”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만사가 우리에게 밝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우리와 떨어져서, 우리 창조물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존재할 때뿐인 것 같은데요. 이 문제를 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떤 것도 너희와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너희의 창조물이다. 확연한 네 이해 부족까지도 너 자신의 창조물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네가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다. 너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모른다고 상상한다. 그래서 너는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안다고 상상하는 순간, 너는 곧바로 알게 된다.
너는 자신이 이런 식의 상상을 하게끔 놔두는 것으로 그 ‘과정’Process이 계속될 수 있게 한다.
과정이라고요?
삶, 그 영원한 과정 말이다.
그것이 소위 유체이탈 체험이든, 꿈이든, 아니면 수정 같은 명료함이 너희를 찾아오는 신비스런 각성의 순간이든 간에, 너희가 자신에게 “밝혀지는” 체험을 하는 그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너희 자신이 그냥 “기억해냄”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뿐이다. 너희는 자신이 이미 창조한 것을 기억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해냄은 대단히 강력할 수 있어서, 개인 차원에서의 현현(顯現)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 장대한 체험을 한번 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현실”이라 부르는 것과 잘 융화하는 방식으로 “현실 생활”로 되돌아가기가 대단히 힘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너희 현실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뭔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늘어났고 자랐으며, 두 번 다시 오그라들 수 없다. 그것은 요정 지니를 병 속에 도로 집어넣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유체이탈 체험이나 소위 “임사”(臨死) 체험에서 돌아온 많은 사람들이 이따금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게 이 때문입니까?
바로 맞혔다. 그리고 그들은 달라졌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그만큼 훨씬 많이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체험들에서 멀어질수록, 시간이 더 많이 지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옛 태도로 더 많이 돌아간다. 자신들이 아는 것을 또 다시 잊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유지할”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있다. 순간마다 너희의 앎을 행동으로 표현하라. 환상의 세계가 너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하라. 겉모습이 아무리 너희를 미혹하더라도 너희가 아는 것에 머물러라.
모든 선각자들이 해왔고, 하고 있는 일이 이것이다. 그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들이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기억해내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예?
남이 기억하게 만들어라. 너희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남에게 주어라.
그건 제가 이 책들을 가지고 하고 있다고 여기는 거군요.
바로 그것이 네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더 오래 그렇게 할수록, 네가 그렇게 할 필요는 더 줄어들 것이다. 이 메시지를 남에게 더 많이 보낼수록, 네가 그것을 너 자신에게 보낼 필요는 더 줄어들 것이다.
나 자신과 남이 ‘하나’니,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주는 게 된다.
봐라, 지금 너는 내게 답을 주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와, 정말 제가 신에게 답을 주었군요. 근사해요. 이건 진짜 근사하군요.
너는 내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근사하다는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그 사실이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가 ‘하나’로 말하게 될 날이 오리라. 모든 사람에게 그런 날이 오리라.
저, 그런 날이 제게 오고 있는 거라면, 당신이 말씀하시는 걸 제가 정확히 이해하는지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딱 한번만 더 다른 문제로 되돌아갔으면 합니다. 이 점에 대해 당신이 여러 번 얘기했다는 건 알지만, 제가 정말로 그걸 이해하는지 진짜로 확실히 해두고 싶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열반이라 부르는 이 ‘하나상태’에 도달하고 나면, 근원으로 돌아가고 나면요, 우리가 거기에 계속 머물지 않으리라는 게 정말입니까? 제가 이걸 다시 묻는 이유는,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동양의 여러 비전(秘傳)들이나 신비주의 가르침들과는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그 웅장한 무no-thing의 상태, 즉 ‘전체와 하나됨’으로 남아 있는 상태 자체가 거기에 있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방금 설명했듯이, 존재는 비존재의 공간에서를 빼고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됨’의 완전한 희열조차 완전한 희열보다 못한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희열”로 체험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완전한 ‘하나됨’의 완전한 희열보다 못한 뭔가가 창조되어야 했던 것이고, 계속해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한 희열 속에 있을 때,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됨’에 녹아들어, 우리가 전부/무가 되었을 때 말입니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어떤 것도 없으니까요....... 모르겠어요. 전 이게 잘 이해가 안됩니다. 이건 제가 다룰 수 없는 문제인 것 같군요.
너는 내가 ‘신성한 딜레마’라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신이 항상 가졌고, 신이 신이 아닌 것(혹은 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의 창조로 해결했던 바로 그 딜레마다.
신은 자신의 일부를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더 못한 체험’에 내주어-그리고 순간마다 다시 내주어-자신의 나머지가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알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너희를 구원받게 했다.” 이제 너희는 이 신화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이다.
저는 우리 모두가 신이고, 우리 모두가 결코 끝나지 않는 원을 따라 계속해서 앎에서 모름으로 갔다가 다시 앎으로, 그리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갔다가 다시 있음을, 또 ‘하나됨’에서 분리로 갔다가 다시 ‘하나됨’으로 이어지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게 삶이 순환, 당신이 말하는 우주 수레바퀴라고요.
정확하다. 바로 그거다. 아주 잘 표현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준 0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까? 언제나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겁니까? 시작점,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서요? “계속”으로 건너뛸 수는 없나요? 200불을 모을 순 없는 겁니까?
이번 생애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생애에서도, 너희가 어떤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너희는 신 체험을 재창조함에 있어서,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질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자유선택권을 가질 것이다. 너희는 우주 수레바퀴의 모든 지점으로 옮아갈 수 있다.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도 “되돌아올” 수 있고, 선택하는 다른 어떤 차원이나 현실, 태양계, 어떤 다른 문명으로도 “되돌아올” 수 있다. 신성(神性)과의 완전한 합일 지점에 이르렀던 사람들 중 일부는 깨달은 선각자로 “되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다, 떠날 때 깨달은 선각자였다가 다시 그 모습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길” 선택한 사람들도 있다.
틀림없이 너도 몇십 몇백년에 걸쳐 되풀이되는 생김새를 하고서 너희 세상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온 구루와 선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오로지 이런 식의 보고에만 근거한 종교 하나가 있다.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라는 그 종교는, 자신을 예수라고 부르는 존재가, 그가 “마지막으로” 확실히 떠나고도 여러 세기가 지난 다음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왔고, 이번에는 미국에 나타났다는 조셉 스미스의 보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는 자신이 기뻐하며 되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면, 우주 수레바퀴 위의 어떤 지점으로도 되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도 절 맥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전혀 휴식을 갖지 않는 겁니까? 우리가 열반에 머물면서 그곳에 남아 있는 경우는 절대 없는 겁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영원히 “왔다 갔다” 해야 할 운명입니까?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이 쳇바퀴를 돌리면서요. 우리는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 바로 그것이 최대의 진리다. 가야 할 곳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으며, 지금 이 순간 너희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을 빼고는 누구도 “될” 필요가 없다.
진실은, 여행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것이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곳에 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선각자다. 그래서 그는 그 투쟁을 끝낸다. 그러고 나면 선각자는 너희가 투쟁을 끝내도록 도와주려 한다. 너희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남들의 투쟁을 끝내길 추구하게 되듯이.
하지만 이 과정, 이 우주 수레바퀴는 맥빠지는 쳇바퀴가 아니다. 그것은 신과 삶 전체의 완벽한 장대함에 대한 영광스런 재확인이고 끊임없는 재확인이다. 거기에 맥빠짐 따위는 없다.
그래도 제게는 맥빠지게 느껴지는데요.
네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 어디 보자. 너는 섹스를 좋아하느냐?
좋아하죠.
섹스에 대한 정말 괴팍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빼면, 누구나 그렇지. 그렇다면 내가, 너는 내일부터 시작해서 매력과 사랑을 느끼는 모든 사람과 섹스할 수 있다고 말하면 어떻겠느냐? 그것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것 같으냐?
이것이 그 사람들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되는 겁니까?
아니다. 네가 이런 식으로 사랑이라는 인간 체험을 더불어 축하하고 싶은 사람이면 그 사람도 너와 더불어 그렇게 하고 싶도록 내가 조정해주마. 그들은 네게 크나큰 매력과 사랑을 느낄 것이다.
우와! 그렇담- 좋고 말고요!
그런데 조건이 딱 하나 있다. 너는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넘어갈 때 멈춰야 한다. 중단 없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곧 바로 넘어갈 수는 없다.
그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자, 보다시피 이런 식의 신체 결합이 가져다주는 황홀경을 체험하려면, 너는 누군가와 성적으로 결합하지 않는 체험도 가져야 한다. 설사 아주 잠깐이라 해도.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것 같군요.
그렇다. 아무 황홀경도 없는 때가 없다면, 황홀경조차 황홀경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황홀경에서 그러하듯, 영적 황홀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순환과 관련해서 맥빠짐 따위는 없다. 오직 기쁨만이, 그냥 기쁨만이, 그리고 더 많은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참된 선각자들은 오로지 기뻐한다. 지금은 너희가 이런 깨달음의 차원에 머무는 걸 바람직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황홀경 속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으며, 그래도 여전히 항상 기쁠 수 있다. 너희는 기뻐하기 위해서, 황홀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냥 그런 황홀경이 있음을 알기에 기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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