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5) 본문

영성수행 비전/신과 나눈이야기

신과 나눈 이야기 3 (5)

柏道 2018. 2. 7. 12:28


신과 나눈 이야기 3 (5)


8  

삶은 정말 한없이 영원히 진행되는 거군요.

 

그것은 가장 확실하게 그렇다.

 

거기에 끝 같은 건 없군요.

 

끝은 없다.

 

환생은 사실이고요.

 

그렇다. 너희는 필멸(必滅)의 형상으로, 다시 말해 죽을수 있는 물질형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너희가 원할 때마다, 너희가 원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때를 우리가 정합니까?

 

너희가 돌아가고 싶다면”, 그리고 너희가 돌아가고 싶을 라면, 그렇다.

 

그럼 떠나고 싶은 때도 우리가 정하는 겁니까? 언제 죽고 싶은지를 우리가 선택하는 겁니까?

 

영혼의 의지를 거스르는 어떤 체험도 영혼을 찾아오지 않는다. 체험을 창조하는 주체가 영혼이니, 그렇게 하는 건 규정상 불가능하다.

영혼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영혼은 모든 걸 다 갖고 있다. 모든 지혜와 모든 앎과 모든 힘과 모든 영광을. 영혼은 결코 잠들지 않고 결코 잊지 않는 네 부분이다.

몸이 죽기를 영혼이 바라느냐고? 아니다. 너희가 절대 죽지 않는 것이 영혼의 바램이다. 그럼에도 영혼이 그 형상으로 남아 있는 데서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는 순간, 영혼은 곧바로 몸을 떠날 것이다. 말하자면 육신의 대부분을 뒤로 하고, 자신의 몸 형상을 바꿀 것이다.

 

우리가 절대 죽지 않는 게 영혼의 바램이라면서, 왜 우리가 죽습니까?

 

너희는 죽지 않는다. 그냥 형상을 바꿀 뿐이다.

 

우리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영혼의 바램이라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합니까?

 

형상을 바꾸지 않는 건 영혼의 바램이 아니다!

너희는 변신자!

특정 형상으로 머물러봤자 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을 때, 영혼은-기꺼이, 자발적으로, 즐겁게-형상을 바꾸어 우주 수레바퀴 위를 계속 옮아간다.

 

즐겁게라구요?

 

크나큰 기쁨으로.

 

애석해하면서 죽는 영혼은 없단 말씀입니까?

 

영혼은 죽지 않는다, 결코.

 

제 말은 현재의 신체 형상이 바뀌는 걸 어떤 영혼도 애석하지 않느냐는 거죠. “죽으려는것을요.

 

몸은 결코 죽지않는다. 다만 영혼과 함께 형상을 바꿀 뿐이다. 하지만 나는 네 말의 의미를 이해하니, 당분간은 네가 설정한 어휘를 쓰도록 하겠다.

소위 사후라는 것과 관련해서 창조하고 싶은 게 뭔지 너희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혹은 신과 재결합하는 사후 체험을 뒷받침할, 일련의 명확한 믿음을 너희가 갖고 있다면, 아니다, 영혼이 소위 죽음을 애석해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그런 경우의 죽음은 영광스런 순간이고 멋진 체험이다. 이제 영혼은 자신의 자연스런 형상, 자신의 정상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믿기 힘든 경쾌함, 절대 자유의 느낌, 무한함이 있고, 더없이 황홀하고 웅장한, ‘하나됨의 자각이 있다.

그런 변화를 영혼이 애석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당신은 죽음이 행복한 체험이라는 겁니까?

 

죽음이 그렇기를 원하는 영혼에게는, 그렇다, 언제나.

 

글쎄요, 만일 영혼이 그토록 탐탁잖게 여기는 몸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영혼은 왜 그냥 가버리지 않습니까? 왜 영혼은 몸 주위를 떠도는 겁니까?

 

나는 영혼이 몸에서 벗어날 때 기뻐한다고 했지, 영혼이 몸에서 벗어나길 원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둘은 다른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을 하면서도 행복하고, 저 일을 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 너희가 두 번째 일을 하면서 기뻐한다고 해서, 첫 번째 일을 하면서 불행했던 건 아니다.

영혼은 몸으로 있는 것이 불행하지 않다. 천만에, 영혼은 너희가 지금 형상인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혼이 그 형상에서 벗어남 또한 똑같이 기뻐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죽음에 관해서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군요.

 

그렇다. 그것은 너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든 너희가 그 순간의 삶을 알아차리는 그 찰나, 너희는 곧바로 죽음과 상실을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너희는 삶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반쪽만을 알 것이다.

각각의 순간은 그것이 시작되는 그 찰나에 끝난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한, 너희는 그 속에 든 절묘함을 보지 못할 것이니, 그 순간을 평범하다 일컬을 것이다.

각각의 상호작용은 그것이 시작하기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시작한다”. 이것을 진실로 응시하고 깊이 이해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순간과 삶 자체에 가득한 보물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삶은 너희에게 자신을 줄 수 없다. 아니, 너희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너희는 죽음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삶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너희가 개개인과 갖는 시간을 그 사람과의 마지막 시간이라 생각할 때, 그 시간은 찬미받을 것이고, 너희가 개개 순간에 갖는 체험을 마지막 그런 순간이라 생각할 때, 그 체험은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너희의 거부가 자신의 삶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너희의 거부를 불러온다.

너희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너희는 그 순간과, 순간이 너희를 위해 붙잡고 있는 모든 걸 놓치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곧장 꿰뚫어보지 않고, 곧장 지나쳐본다.

뭔가를 깊이 살펴볼 때, 너희는 그 순간을 곧장 꿰뚫어본다. 뭔가를 깊이 응시한다는 건 그것을 곧장 꿰뚫어본다는 것이다. 그럴 때 환상은 존재하기를 그치고, 그럴 때 너희는 어떤 것이든 그 참모습대로 본다. 오직 그럴 때만 너희는 그것을 진실로 즐길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속에 기쁨을 집어넣을 수 있다. (“즐긴다”en-joy는 건 뭔가를 기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럴 때 너희는 환상까지도 즐길 수 있다. 너희는 그것이 환상임을 알 것이고, 이 앎 자체가 그 기쁨의 반을 차지하리니! 너희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너희가 그것을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짜가 아님을 아는 어떤 것도 너희에게 고통스럽지 않다. 이 문장을 한번 더 말하자구나.

진짜가 아님을 아는 어떤 것도 너희에게 고통스럽지 않다.

그것은 너희 마음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다. 너희가 상황과 배우들을 만들어내고, 너희가 대사를 쓴다.

그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님을 이해하는 순간,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이것은 삶의 경우에 그러하듯, 죽음의 경우에도 사실이다.

죽음 역시 환상임을 이해할 때, 너희는 , 죽음이여, 네 가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죽음을 즐길 수도 있다! 너희는 다른 누군가의 죽음까지도 즐길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이런 이야기를 말하는 게 이상한가?

오직 너희가 죽음-과 삶-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오직 그럴 때만 그럴 것이다.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작이다. 죽음은 문 열림이지, 문 닫힘이 아니다.

삶이 영원하다는 걸 이해할 때, 너희는 죽음이 환상, 계속해서 너희가 몸을 무척 염려하도록 만듦으로써 너희 몸을 너희라고 믿게 만드는 환상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너희는 몸이 아니니, 몸의 파멸은 너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죽음은, 너희에게 진짜인 건 삶임을 가르칠 테고, 삶은 피할 수 없는 건 죽음이 아니라 무상성(無常性)impermanence임을 가르친다.

무상성만이 유일하게 진리다.

항상 그대로인 건 없다. 천지만물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항상 그대로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성permanence이라는 개념 자체도 뭔가가 의미를 가지려면 무상성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성조차 무상하다. 이것을 깊이 살펴보고, 이 진리를 응시하라. 그것을 이해하라, 그러면 신을 이해하리니.

이것이 법()이요, 이것이 부처다. 이것은 부처 법이다. 이것은 가르침이자 스승이요, 교훈이자 선각자다. 이것은 둥글게 말려서 하나가 된 대상이자 관찰자다.

그것들이 하나 아니 다른 것이었던 적은 없다. 삶이 눈앞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그것들을 펼친 건 너희였다.

그러나 너희 앞에 펼쳐진 자신의 삶을 볼 때, 너희 자신이 끌러지게 하지는 마라. 자신을 묶어둬라! 환상을 보고 그것을 즐겨라! 하지만 환상이 되지는 마라!

너희는 환상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다.

너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너희의 환상을 이용하라. 그것을 이용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삶의 더 많은 것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게 하라.

꽃을 죽어가는 것으로 보면 그 꽃이 슬퍼보이겠지만, 그 꽃을 바뀌고 있고 얼마 안 가 열매 맺을 나무 전체의 일부로 본다면, 그때 너희는 그 꽃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꽃의 피고 짐을 나무가 열매 맺을 준비를 갖추는 표식으로 이해할 때, 그때 너희는 삶을 이해하리니.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봐라. 그러면 너희는 삶이 그 자체로 비유임을 이해할 것이다.

언제나 잊지 마라. 너희는 꽃이 아니며, 그렇다고 열매도 아니다. 너희는 나무다. 너희의 뿌리는 내 속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너희가 싹을 틔운 흙이니, 너희의 꽃과 열매는 내게로 돌아와 더 비옥한 흙을 낳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생명을 낳으니, 그것은 영원히 죽음을 알지 못한다.

 

이건 정말 아름답군요. 진짜 아름답군요. 고맙습니다. 그럼 이젠 저를 괴롭히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전 자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거든요. 왜 자기 삶을 자기가 끝내지 못하게 하는 그런 금기들이 있는 걸까요?

 

그러게, 왜 그런 게 있지?

 

자살하는 게 잘못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 질문 자체에 두 가지 잘못된 개념이 들어 있으니, 나는 네가 만족할 만큼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 질문은 두 가지 잘못된 가정을 근거로 하고, 두 가지 오류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잘못된 가정은 옳고” “그름따위가 있다는 가정이고,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죽임이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따라서 네 질문을 분석하는 순간, 질문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이 대화 곳곳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지적했듯이 옳고” “그름은 궁극의 현실과 전혀 관계없다. 인간의 가치관으로만 존재하는 철학상의 양극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너희의 체계에서조차 불변의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시각각 변해가는 가치들이다.

너희는 그런 변화가 너희를 만족시킬 때 이 가치들을 놓고 너희 마음을 바꾸면서도(진화하는 존재로서 너희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 길을 따라 이어진 단계마다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노라고, 너희 사회의 핵심 통합력을 이루는 것은 불변의 가치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자기당착 위에 너희 사회를 세웠다. 너희 사회의....... 어쩌구저쩌구는 불변의 가치들이라고 선포하는 그 사이에도, 너희는 쉬지 않고 가치들을 바꾼다. 오호 통재라, 가치여!

이 자기당착이 제시하는 문제들의 답은, 모래를 콘크리트로 만들려고 모래에 찬물을 끼얹는 데 있지 않고, 모래의 변화를 축하하는 데 있다. 모래가 너희가 만든 성 모양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는 동안, 그것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 하지만 그러고 나서 밀물이 쓸려들어 왔을 때 그것이 취하게 되는 새 형상과 새 모습 또한 찬미하라.

바뀌는 모래들이 너희가 오를 새 산을 쌓을 때 그것들을 찬미하라. 그러면 너희는 그 꼭대기에-그리고 그것을 가지고-너희의 새 성을 세우리니. 하지만 이 산과 이 성들은 변화의 기념비들이지, 항상성의 기념비들이 아님을 이해하라.

오늘의 너희를 찬미하되, 어제의 너희를 비난하지 말고, 내일 될 수 있는 너희를 배제하지도 마라.

옳고” “그름이 너희 상상이 지어낸 허구고, “괜찮고” “괜찮지 않음이 너희 최근 선호와 짐작에서 나온 선에 불과함을 이해하라.

예컨대 사람의 생명을 끝내는 문제에서는, 그렇게 하는 건 괜찮지 않으리란게 현재 너희 행성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짐작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너희 중 다수는 자기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게 괜찮지 않다고 주장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너희는 이것이 계율에 어긋남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너희가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은 십중팔구, 상대적으로 빨리 삶을 끝내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긴 시간에 걸쳐서 삶을 끝내는 행동들은 똑같은 결과를 이뤄내더라도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너희 사회에서는 권총으로 자살한 사람의 가족들은 보험혜택을 상실하지만, 담배로 그렇게 한 사람의 가족들은 보험혜택을 상실하지 않는다.

너희의 자살을 도와주는 의사는 인간백정이라 불리지만, 담배 회사가 그렇게 하는 건 상업이라 불린다.

이처럼 너희에게는 그것이 그냥 시간의 문제여서, 자기 파괴의 합법성, 그것의 올바름이나 그릇됨은 그런 행위를 누가 하는가 뿐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빨리 이뤄지는가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죽음이 빠를수록 그것은 더 잘못된것처럼 보이고, 죽음이 느릴수록 그것은 좀 더 괜찮은쪽으로 기운다.

재미있는 건, 이것이 진짜 인도적인humane 사회라면 내렸을 결론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어떤 것을 인도적이라고 일컬을지에 대한, 모든 근거 있는 규정들에 따르면, 죽음은 짧을수록 좋다. 그럼에도 너희 사회는 자비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벌하고, 미친 짓을 하려는 사람들은 상 준다.

신이 요구하는 게 끝없는 고통이고, 그 고통을 인도적으로 빨리 끝내는 걸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 미친 짓이다.

인도적인 자를 벌하고, 미친 자를 상 줘라.”

오직 한정된 이해를 가진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좌우명이 이것이다.

그러기에 너희는 발암물질들을 들이켜서 너희 체제를 독살하고, 너희를 서서히 죽게 만들 화학약품들로 처리된 음식물을 먹어서 너희 체제를 독살하며, 너희가 쉬지 않고 오염시킨 공기를 마셔서 너희 체제를 독살한다. 너희는 천번이 넘는 순간들에 백 가지 다른 방식으로 너희 체제를 독살하는데, 이런 물질들이 너희에게 전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너희를 죽이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니, 덕분에 너희는 벌받지 않고 자살할 수 있다.

반면에 너희가 더 빨리 듣는 뭔가로 자신을 독살한다면, 너희는 도덕률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받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게 부도덕하지 않듯이, 자신을 빨리 죽이는 것도 부도덕하지 않다.

 

그럼 자살하는 사람도 신한테서 벌받지 않겠군요.

 

나는 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자살로 곤경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상황을 끝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고 나서도 똑같은 곤경이나 상황에 직면하게 될 뿐, 어디서도 벗어날 수 없고, 무엇도 끝낼 수 없다고 하는 게 사실입니까?

 

소위 사후세계에서 겪는 너희 체험은, 거기로 들어가는 시점에 너희가 지녔던 의식의 반영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언제나 자유의지의 존재니, 원할 때마다 자신의 체험을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가족 중에 자살로 속세 삶을 끝낸 사람도 괜찮다는 거죠?

 

그렇다. 그들은 아주 잘 있다.

 

이 주제를 다룬 책으로 앤 퍼이어가 쓴 <스티번은 살아 있다>라는 멋진 책이 있습니다. 10대의 나이로 자살한 자기 아들에 대한 이야기죠. 무척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앤 퍼이어는 멋진 사자(死者). 그녀의 아들 역시 그러하고.

 

그렇담 당신이 그 책을 좀 추천해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중요한 책이다. 그 책은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경험을 둘러싼 논란들에서 떠나지 못하거나, 그런 경험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치유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깊은 상처를 입거나 논란을 벌인다는 게 슬픈 일이죠. 하지만 제 생각엔, 그 중 상당부분이 우리 사회가 자살을 둘러싸고 우리에게 지운 짐이 빚어낸 결과인 것 같습니다.

 

너희가 너희 사회의 도덕체계가 지닌 모순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인간체험의 하나가, 너희 생명을 단축시키겠지만 서서히 그렇게 하리란 걸 아주 잘 아는 일들을 하는 것과, 너희 생명을 빨리 단축시킬 일들을 하는 것 사이의 모순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당신이 곱씹어주고 나니까 아주 명백해 보이는군요. 왜 우리는 그토록 명백한 진리들을 혼자 힘으로는 보지 못할까요?

 

너희가 이 진리들을 본다면, 그와 관련해 뭔가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뭔가를 쳐다보긴 하면서도 그것을 보지 않는 것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 진리들을 본다면, 왜 그와 관련해 뭔가를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것들과 관련해 뭔가를 하려면, 너희 자신의 즐거움을 끝내야 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 즐거움을 끝내는 것이다.

너희를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것들 대다수가 너희를 즐겁게 해주거나, 거기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너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대부분이 몸을 만족시키는 것들이다. 사실 너희 사회를 원시사회로 특징짓는 것이 이것이다. 너희 삶은 주로 몸의 즐거움을 구하고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물론 만방의 모든 존재들이 즐거움을 추구한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원시적인 건 없다. 사실 그것은 사물의 자연질서다. 다만 각각의 사회와 그 사회들 속에서 사는 존재들을 차이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어떤 걸 즐겁다고 규정하는가다. 주로 몸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짜인 사회는 영혼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짜인 사회와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너희 청교도들이 옳았고, 몸의 모든 즐거움을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님을 이해하라. 그것은 승격한 사회에서는 육신의 즐거움이 누리는 즐거움들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서는 육신의 즐거움이 1순위가 아니다.

사회나 존재가 더 많이 승격할수록elevated 그 즐거움도 더 고상해진다elevated.

 

잠깐만요! 그 말씀은 확실히 가치판단처럼 들리는데요. 전 신인 당신은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

 

에베레스트산이 매킨리산보다 더 높다고 말하는 것이 가치판단이냐?

사라 숙모가 조카 토미보다 더 늙었다고 말하는 게 가치 판단이냐?

이런 것들은 가치판단이냐, 아니면 관찰이냐?

나는 그 사람의 의식이 더 승격한 것이 더 낫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1학년보다 4학년이 더 낫지않은 것가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4학년이란 게 어떤 건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행성의 우리는 4학년이 아니고 1학년에 속하겠죠. 그렇죠?

 

얘야, 너희는 아직 유치원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너희는 영아원에 있다.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모욕으로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왜 그 말이 제게는 당신이 인류를 얕잡아보는 것처럼 들릴까요?

 

너희가 너희 아닌 것이 되는 데, 그리고 너희인 것이 되지 않는 데 너무 깊이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찰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지 않은 때, 그냥 관찰만 하는데도 모욕으로 듣는다.

하지만 뭔가를 붙잡지 않고서는 그것을 놓아줄 수도 없는 법이고, 한번도 소유해보지 않고서는 제것이 아니라고 팽캐칠 수도 없는 법이다.

 

인정하지 않고서는 바꿀 수도 없는 법이다.

 

맞았다.

깨달음은 있는 것을 판단 없이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있음Isness 속으로 옮아간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자유를 찾게 될 곳이 바로 이 있음에서다.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 다시 말해 그것은 환상적 형태를 갖기를 그만두니, 너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리고 있는 건 언제나 바뀔 수 있다. 바뀔 수 없는 건 있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니 있음을 바꾸려면 그 속으로 옮아가라.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그것을 부정하지 마라.

너희는 자신이 부정하는 것을 선언하고, 자신이 선언하는 것을 창조한다.

뭔가를 부정하는 행동 자체가 그것을 거기에 자리잡게 하니, 어떤 것을 부정하는 건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인정할 때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지만, 부정하는 건 그것이 거기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니, 너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너희가 부정하는 것이 되려 너희를 통제하게 된다.

너희 중 대다수는 자신들이 아직 유치원으로도 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인류가 아직도 영아원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인정하지 못함 자체가 그들을 그곳에 붙잡아두고 있다.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고도로 진화된 존재)이 되는 데 너무 깊이 몰두한 나머지, 너희인 것(진화하는 존재)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에 맞서 움직이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셈이니, 그 때문에 무척 느리게밖에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

진화로 가는 지름길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받아 들이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있는 것이 묘사되는 걸 듣더라도 더 이상 모욕당한다고 느끼지 않을 때, 자신이 인정했음을 알 것이다.

 

정확하다. 내가 너더러 푸른 눈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너를 모욕하는 것이겠느냐?

그러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회나 존재가 더 많이 승격할수록 그 즐거움도 더 고상해진다.

너희가 무엇을 즐거움이라 부르는지가 너희의 진화수준을 선언한다.

 

승격한이란 이 용어를 좀 설명해주십시오. 당신은 이 용어를 무슨 뜻으로 사용하십니까?

 

너희 존재는 미시우주 안의 우주다. 너희와 너희의 육신 전체는 일곱 중심, 즉 일곱 차크라(요가에서 말하는 에너지 중심으로 각 차크라마다 명칭이 있지만, 여기서는 대략적인 신체 부위만을 말하면, 아래쪽부터 회음부의 선골 신경총, 하단전의 전립선 신경총, 위 뒤쪽을 태양 신경초, 심장 주변의 심장 신경총, 인후 부위의 후두 신경총, 양미간 사이의 동굴 신경총, 정수리 부분의 송과선을 가리킨다-옮긴이)를 중심으로 하여 뭉쳐진 생짜raw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차크라 중심들과 그것들이 의비하는 바를 공부하라. 이것들을 다룬 몇백 권의 책들이 있다. 이것은 내가 예전에 인류에게 전해준 지혜다.

너희의 아래쪽 차크라들을 즐겁게 하는 것, 혹은 자극하는 것이 위쪽 차크라들에게도 똑같이 즐거운 건 아니다.

너희가 신체를 거쳐 생명 에너지를 더 높이 끌어올릴수록 너희 의식은 더 많이 승격된다.

 

, 다시 이리로 왔군요. 그 말씀은 독신을 옹호하는 듯이 들리는데요. 성욕을 표현하는 것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주장처럼요. 모름지기 의식이 승격한사람들이라면 그들의 뿌리 차크라-그들의 첫 번째 혹은 최하위 차크라-“에서 비롯되어남과 교류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식으로요.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대화에서 줄곧 인간의 성욕을 축하해야지, 억눌러선 안 된다고 말씀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것도 맞다.

 

, 여기서 절 좀 도와주십시오. 우린 모순에 부딪힌 것 같거든요.

 

내 아들아,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모순 없음이 진리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때때로 위대한 진리는 모순 속에 있다.

우리가 여기서 부딪히고 있는 것은 신성한 이분법이다.

 

그렇다면 제가 그 이분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는 평생동안 뿌리 차크라에서 쿤달리니 에너지(뿌리 차크라에서 잠자는 우주 에너지로 이것이 명상이나 수련을 통해 깨어나 정수리 차크라에 이르면 삼매에 들 수 있다고 한다-옮긴이)를 끌어올리는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얼마나 많이 승격하는건지 들어왔거든요. 섹스 없이도 무아경 속에서 사는 신비론자들에게는 이것이 주요한 정당화가 되어왔고요.

그러고 보니 우린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고 말았군요. 이야기를 이렇게 옆길로 새게 해서 죄송하지만-

 

뭐가 죄송하다는 거냐? 이야기는 이야기가 가는 곳으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이 대화 전체에서 다루는 화제는 온전히 인간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와 이 우주에서의 삶이란 게 어떤 것인가다. 화제는 오직 이것뿐이고, 이 주제 역시 그 범위 안에 들어간다.

내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죽음을 알고 싶어하는 건 삶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제 교체가 생명을 창조하고 그것을 장엄하게 찬양하는 행위 자체를 포함할 정도로 우리의 탐구 범위를 확대해준다면, 그렇게 되도록 놔둬라.

이제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해 두자. 모든 성적 표현을 닫아버리고 모든 성적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이 고도로 진화된존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고도로 진화된존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진화가 멈출 것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시군요.

 

그렇다. 그러니 진짜 거룩한 이들은 섹스를 하지 않으며, 그것이 그들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삶이란 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기로 되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선명한 조건 속에 담아보자. 만일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종족에게 좋은지 아닌지 판단할 잣대를 원한다면, 아래의 간단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봐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지?

이것은 대단히 손쉬우면서 대단히 정확한 기준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했는데, 인간종에게 궁극적으로 이로운 결과가 나왔다면, 그 일은 진화된것이다. 만일 모두가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인간종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추천하기에 그리 승격된일이 아니다. 동의하느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방금, 진짜 선각자라면 성적 독신을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란 사실에 동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적 표현을 부끄럽게 만들고, 그것을 둘러싸고 온갖 종류의 죄의식과 기능장애를 발달시킨 것이, 어쨌든 성적 절제가 더 고상한 길이고, 성적 표현은 더 저급한 욕구라는 이런 관념이다.

 

하지만 종족번식을 막으리란 게 성적 금욕에 반대하는 근거라면, 섹스가 일단 이 역할을 끝내고 나면 더 이상 섹스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잖습니까?

 

사람들이 섹스를 하는 건 인간종을 번식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섹스를 하는 건 그것이 하기에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전자 속에 심어져 있다. 너희는 생물학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맞아요! 그것은 종의 생존 문제로 몰고 가는 유전 신호입니다. 하지만 종이 생존이 보장되고 나면, “그 신호를 무시하는승격된행동 아닐까요?

 

네가 신호를 잘못 해석했다. 그것은 종의 보존을 보장하라는 생물학적 명령이 아니라, 너희 존재의 본성인 하나됨을 체험하라는 생물학적 명령이다. 새 생명의 창조는 하나됨이 이뤄졌을 때 우연히 이어나는 일이지, 그것이 하나됨을 추구하는 이유는 아니다.

만일 성적 표현의 유일한 이유가 번식이라면, 그것이 단지 전달 체계일 뿐이라면, 너희는 더 이상 상대방과 섹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생명의 화학요소들을 배양접시 속에서 결합시키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영혼의 가장 기본되는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단순한 번식보다 훨씬 더 큰 욕구이면서도, 참된 자신의 재창조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 영혼의 기본 욕구를.

생물학적 명령은 더 많은 생명life을 창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삶life을 체험하라는 것, 다시 말해 하나됨의 발현이라는 그 본모습대로 삶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섹스하는 걸 당신이 막지 않겠노라는 이유가 이거군요. 그들이 아이 갖는 걸 오래 전에 중단했다 해도 말입니다.

 

물론이다.

 

하지만 아이 갖는 걸 중단하면 섹스도 그만둬야 하고, 그런데도 이런 행위를 계속하는 그런 쌍들은 저속한 육신의 충동에 빠진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그리고 이건 승격된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귀한 천성보다 못한, 그냥 동물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이것은 우리의 주제를 다시 차크라, 즉 에너지 중심으로 되돌린다.

나는 앞에서 너희가 신체를 거쳐 생명 에너지를 끌어올릴수록, 너희 의식은 더 많이 승격된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래서 섹스 불가를 말씀하시는 듯이 보였고요.

 

아니다. 그렇지 않다. 네가 이해하는 식으로는 아니다.

앞서 네가 언급했던 것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음 사실을 명확히 해보자. 섹스하는 것에서 천하거나 추잡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너희는 너희 마음과 너희 문화로부터 그런 관념을 얻었을 뿐이다.

열정적이고 욕망에 찬 성적 표현의 어떤 것도 비천하거나 저속하거나 품위 없지않다(성스럽지 않은 건 물론이고). 육신의 충동은 동물적 행위의 발현이 아니다. 그 충동들을 체계 속에 심은 건 나다.

너희는 그것을 그런 식으로 창조한 이가 나 아닌 다른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육신의 충동은 너희 모두가 서로에 대해 갖기 마련인, 복잡하고 혼잡한 반응 중 단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하다. 잊지 마라, 너희는 일곱 차크라를 가진 3중의 존재다. 너희가 세 측면 모두와 일곱 중심 모두로부터 동시에 서로에게 반응할 때, 그때 너희는 마침내 갈구하던 그 절정의 체험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창조된 목적인 바로 그 체험을!

이런 에너지들 중 어떤 것도 저속하지unholy 않지만, 너희가 그중 딱 하나만 선택한다면, 그것은 완전하지 않다” un-whol-y. 그것은 온전치whole 못하다!

온전치 못한 너희는 본래의 자신보다 못한 존재다. 바로 이것이 저속하다고 할 때의 의미다.

 

우와! 이해했어요. 이해가 되요!

 

승격하기로작정한 사람들에게 주는 섹스 금지의 훈계는 절대 나한테서 나온 훈계가 아니다. 그건 권유였다. 권유는 훈계가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것을 훈계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권유는 섹스를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라 온전치 못함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너희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섹스를 하든, 아침을 먹든, 일하러 가든, 해변을 걷든, 줄넘기를 하든, 좋은 책을 읽든, 그야말로 뭘 하든, 온전한 존재로서, 너희의 온전한 존재로서 그 일을 하라.

너희가 아래쪽 차크라 중심에서만 섹스를 한다며, 너희는 뿌리 차크라에서만 움직이면서 훨씬 더 영광스런 체험부분을 놓치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이고,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되고 있는 동안, 일곱 에너지 중심 모두로부터 오고 있다면, 그때 너희는 절정을 체험할 것이다. 이것을 어찌 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렇겠죠. 그런 체험이 성스럽지 않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그러니 생명 에너지를 네 몸을 거쳐 정수리 차크라로 끌어오리라는 권유는 너희더러 회음부에서 떨어지라는 제안이나 요구가 되고자 했던 게 아니다.

너희가 가슴 차크라, 나아가 정수리 차크라로까지 에너지를 끌어올렸더라도, 이것이 너희 회음부 차크라에는 에너지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사실상 끊어지고 만다 disconnected.

생명 에너지를 너희의 위쪽 중심들로 끌어올렸을 때, 너희는 다른 사람과 소위 성적 체험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너희가 그런 체험을 갖지 않는다 해도, 성스러움에 대한 어떤 우주법칙을 어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그런 체험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너희를 더 승격시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희가 다른 사람과 섹스하기를 택한다 해도, 그것이 너희를 뿌리 차크라 수준만으로 낮추지도않을 것이다. 너희가 회음부에서 끊어지는 것과 반대로 정수리에서 끊어지지 않는한.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권유, 훈계가 아닌 권유를 너희에게 하고자 한다.

너희의 생명력인 에너지를 매순간마다 가능한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희는 승격될 것이니, 이것은 섹스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너희가 뭘 하든 의식을 끌어올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아하! 이해가 갑니다. 의식을 어떻게 끌어올리는지는 모르지만요. 사실 저로서는 어떻게 해야 차크라 중심들을 거치면서 생명 에너지를 끌어올리게 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이 중심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 태반일 겁니다.

 

영성의 생리학에 대해 진심으로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아주 명확한 용어들로 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다른 저자들을 통해서 다른 책에서 그렇게 하셨다 말씀이시죠?

 

그렇다. 디팍 초프라의 저서들을 읽어봐라. 그는 지금 이 순간 너희 행성에서 가장 명석한 해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영성의 신비와 그것의 과학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멋진 전달자들이 있다. 그들의 책은 몸을 거쳐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법만이 아니라, 육신을 떠나는 법까지도 설명해준다.

이러 책들을 추가로 읽고 나면 너희는 몸을 놓아버리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기억해낼 수 있고, 그러고 나면 어째서 두 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너희는 어째서 몸과 함께 있는 것도 기쁨이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기쁨인가라는 이분법을 이해할 것이다.

 

9

 

그러고 보면 삶은 일종의 학교 같은 건가 봅니다. 해마다 개학 첫날이 되면 무척 들뜨곤 하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학년이 끝날 때는 끝난다는 사실에 흥분했고요.

 

맞다! 정확하다! 네가 핵심을 찔렀다. 그게 바로 그런 것이다. 다만 삶은 학교가 아니다.

 

, 기억합니다. 1권에서 당신이 자세히 설명하셨죠. 그때까지만 해도 전 삶이 학교, 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여기에 와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권에서 당신은, 제가 이것이 그릇된 교리란 걸 이해하는 데 크나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기쁘구나. 너희를 명료함으로 데려가는 그것이 이 삼부작을 가지고 우리가 여기서 하려는 일이다. 그리고 너는 이제 어째서 죽고나면 영혼이 굳이 을 애석해하는 일없이 기쁨에 겨워할 수 있는지도 확실하게 이해한다.

하지만 네가 앞에서 더 큰 질문을 했으니, 우리는 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죄송하지만 제가 무슨 질문을 했나요?

 

너는 영혼이 몸 안에서 그토록 불행하다면, 왜 그냥 떠나 버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 .

 

, 영혼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내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죽을때만 그렇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불행해서 몸을 떠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영혼은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기운을 되찾고 싶어서 몸을 떠난다.

 

영혼은 자주 이렇게 합니까?

 

날마다

 

날마다 영혼이 몸을 떠난다고요? 언제요?

 

영혼이 더 큰 체험을 갈망할 때마다. 영혼은 어떤 체험이 기운을 회복해준다는 걸 안다.

 

그냥 떠나는 겁니까?

 

그렇다. 영혼은 항상 너희 몸을 떠난다. 너희 생애 내내 줄곧. 이것이 우리가 잠을 발명한 이유다.

 

잠을 자면 영혼이 몸을 떠납니까?

 

물론이다. 그게 잠이란 거다.

너희가 그렇게 하려고만 하면, 영혼은 너희 생애 내내 주기적인 재충전으로 기운을 되찾을 한다. 몸이라 부르는 이 탈것을 자신이 계속해서 끌고 다닐 수 있도록.

너는 영혼이 몸에 깃드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간단할지는 모르지만, 쉽지는 않다! 그건 기쁨일지는 모르지만, 쉽지는 않다. 그것은 너희 영혼이 지금껏 해온 일들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너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가벼움과 자유를 아는 영혼은, 다시 한번 그런 존재상태가 되기를 갈망한다.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라도 여름방학을 애타게 기다릴 수 있고, 남들과 어울리기를 원하던 사람이라도 어울리는 동안 혼자이기를 갈망할 수 있듯이. 영혼은 가벼움이자 자유고, 평화이자 기쁨이며, 무한함이자 고통 없음이고, 완벽한 지혜이자 완벽한 사랑이라는 자신의 참된 존재상태를 추구한다.

영혼은 이 모든 것인 동시에 그 이상이다. 그럼에도 영혼은 몸을 갖고 있는 동안 이 소중한 것들을 거의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은 자기하고 의논했다. 영혼은 지금 선택하는 대로의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오래 몸을 가진 채 머물겠노라고 자신에게 통고했다. 다만 원할 때마다 몸을 떠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영혼은 소위 잠이라는 체험을 통해서 날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 영혼이 몸을 떠나는 체험이라고요?

 

그렇다.

 

전 우리가 잠을 자는 건 몸이 휴식을 필요로 해서라고 생각했는데요.

 

네가 잘못 알았다. 그 반대다. 영혼이 휴식을 원하기에, 몸더러 잠에 빠지게만드는 것이다.

영혼이 몸을 가진 데서 오는 그 한계들에 지치고, 그 힘겨움과 자유 없음에 지쳤을 때, 영혼은 말 그대로 몸을 쓰러뜨린다(때로는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혼이 재충전하려할 때, 영혼이 그 모든 비진리와 거짓현실과 상상으로 그려낸 위험들에 지쳐 기진맥진해졌을 때, 영혼이 다시 한번 연결되고, 확인 받고, 휴식하고, 마음을 위해 다시 깨어나고자 할 때, 영혼은 그냥 몸에서 떠나버린다.

몸을 처음 받아들이는 영혼은 그것이 극히 힘든 체험이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은 특히나 새로 도착한 영혼에게는 대단히 피곤한 체험이다. 아기들이 잠을 많이 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한번 몸에 소속되는 최초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면, 영혼은 그 면에서 참을성을 키워가기 시작한다. 이제 영혼은 좀 더 오래 몸에 머문다.

이와 동시에 마음이라 불리는 너희 부분은,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대로 망각 속으로 옮아간다. 이제는 덜 빈번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체로 하루를 주기로 해서 이루어지는 , 몸을 벗어나는 영혼의 비행조차 마음을 항상 기억으로 데려가 주지는 못한다.

사실 이 시기 동안 영혼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 있고, 이 때문에 너희 존재 전체로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여기서 뭘 창조하고 있지?”라고 묻게 된다. 이런 탐색은 변덕스런 여행, 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여행, 너희가 악몽이라 부르는 여행을 불러올 수 있다.

때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 영혼이 위대한 회상remembering의 자리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제 마음은 각성을 얻게 되니, 덕분에 영혼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몸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몸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의 전존재가 이 같은 원기회복을 더 많이 자신할수록, 그리고 그것이 몸을 가지고 하는 것과 하려는 것이 뭔지 더 많이 기억해낼수록, 이제 자신이 이유가 있어서, 목적을 갖고 몸으로 왔음을 아는 너희 영혼은 몸에서 벗어나기를 덜 원하게 된다. 이제 영혼의 바램은 그 목적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 자신이 지닌 몸을 가지고 그 모든 시간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다.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잠을 잘 필요가 거의 없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잠을 필요로 하는가로 그 사람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거의 그렇다. 거의 그렇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영혼은 이따금 순전히 몸에서 벗어나는 기쁨만을 위해 몸을 떠나기도 한다. 마음을 위해 다시 깨어나고, 몸을 위해 기운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임을 아는 황홀경을 다시 창조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일수록 덜 진화되었다고 말하는 게 항상 타당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자신이 몸을 가지고 뭘 하는지와 자신은 몸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임을 더 많이 자각하게 될 때, 그들은 몸과 더불어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하고 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그만큼 잠을 덜 필요로 하는것처럼 보이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나아가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망각과 영혼의 하나됨둘다를 한꺼번에 체험하려는 존재들도 있다. 이런 존재들은 여전히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부를 몸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훈련시킴으로써, ‘참된 자신을 아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굳이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잃거나 하는 일 없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죠? 어떻게 해야 이렇게 할do 수 있나요?

 

그것은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자각의 문제, 완전 자각 상태에 도달하는 문제다. 너희가 자각을 할do 수는 없다. 너희는 오직 완전한 자각일be 수만 있다.

 

어떻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이 제게 줄 수 있는 도구들이 있을 텐데요.

 

이런 체험을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들 중 하나가 날마다의 명상이다. 이 도구를 써서 너희는 생명에너지를 정수리 차크라로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깨어 있는동안에 몸에서 떠날 수도 있다.

명상을 하면, 몸이 깨어 있는 동안에 자신을 완전 자각을 체험하기 위한 준비상태로 만들 수 있다. 이러 준비된 상태를 참된 각성tue wakefulness이라 부른다. 이것을 체험하자고 굳이 명상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명상은 그냥 장치, 네가 말했듯이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체험하고자 반드시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너희는 앉아서 하는 명상이 존재하는 유일한 명상이 아니란 사실도 알아둬야 한다. 멈춰서 하는 명상도 있고, 걸으면서 하는 명상도 있으며, 일하면서 하는 명상, 섹스하면서 하는 명상도 있다.

참된 각성 상태에서 멈출 때, 그냥 너희가 가던 길에서 멈출 때, 가던 곳으로 가길 멈추고, 하던 일을 멈출 때, 잠깐만 멈출 때, 그냥 너희가 있는 바로right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너희는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대로right 된다. 아주 잠깐만 멈추는 걸로도 축복받을 수 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봐라, 못보고 지나치던 것들을 알아차릴 것이니. 비 내린 직후의 짙은 흙 냄새와, 사랑하는 사람의 왼쪽 귀를 덮은 곱슬머리를.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건 또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걸을 때, 너희는 온갖 꽃들 속에서 숨쉬고, 온갖 새들과 함께 날며, 발 밑의 온갖 버석거림을 느낀다. 너희는 아름다움과 지혜를 찾아낸다. 아름다움을 이룬 곳 어디서나 지혜를 찾을 수 있고, 아름다움은 어디서나 이뤄지기 때문이다. 삶의 온갖 것들이 다 아름다움의 소재다. 그것이 너희를 찾아오리니, 너희는 그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그리고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뭔가를 할 때, 너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명상으로, 따라서 그것을 너희가 자기 영혼에게 주고, 너희 영혼이 전부에게 주는 선물, 즉 공물로 바꾼다. 설거지를 하는 너희는 손을 타고 흐르는 물의 온기를 즐기면서, 물과 온기, 양쪽의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너희는 손가락의 명령에 따라 눈앞의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보면서, 너희 분부를 따르는 심신의 작용에 흐뭇해한다. 저녁을 준비하는 너희는 이 양식을 너희에게 가져다준 우주의 사랑을 느끼면서, 너희 존재의 사랑 전부를 이 요리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그 선물에 보답한다. 사랑은 스프까지도 진주성찬으로 바꿀 수 있으니, 그 요리가 호사스럽든 소박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성적 에너지를 교환할 때, 너희는 자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진실을 알게 되니, 연인의 가슴은 너희의 집이 되고, 연인의 몸은 너희의 몸이 된다. 너희 영혼은 자신이 더 이상 무엇과도 분리되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이것을 체험하려고 굳이 너희 몸을 떠날 필요는 없다.

준비되어 있을 때 너희는 깨어 있다. 한번의 웃음, 가벼운 웃음만으로도 너희를 거기로 데려갈 수 있다. 그냥 한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웃어봐라.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냥 너희 가슴이 신비를 알아서, 너희 영혼이 그 신비가 뭔지 알아서. 그 사실에 웃어라. 많이 웃어라. 그 웃음이 너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치유해주리니. 이런 게 참된 각성 상태다.

네가 나더러 도구를 달라고 하니, 내가 그것들을 주겠노라.

숨쉬기, 이건 또 다른 도구다. 길고 깊게 숨쉬고, 느리고 부드럽게 숨쉬어라. 에너지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그득한 삶, 그 삶의 부드럽고 달콤한 무()를 숨쉬어라. 너희가 쉬는 숨은 신의 사랑이니, 깊이 숨쉬어라.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아주 깊이 숨쉬어라. 그 사랑이 너희를 울게 하리니.

기쁨에 겨워 울게 하리니.

이제 너희는 신을 만났고, 너희 신이 너희를 너희 영혼에게 소개했으니.

일단 이런 상태를 체험하고 나면, 삶은 절대 예전 같지 않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랐거나장엄한 황홀경에 빠졌던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상태가 영원히 변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이해합니다. 그건 간단한 행위군요.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순수한 행위요.

 

그렇다. 하지만 알아둬라. 몇 년을 명상해도 이걸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열려 있고, 얼마나 기꺼이 하는가에 달렸다. 그리고 어떤 기대든 기대에서 얼마나 떨어질 수 있는가에도.

 

날마다 명상해야 합니까?

 

만사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해야하거나 하지 말아야하는 건 없다. 그것은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의 문제다.

어떤 영혼들은 자각하면서 걷고자 한다. 그들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가 잠자면서 걷고 있음을, 의식 없이 걷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의식 없이 삶을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자각하면서 걷는 영혼들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들은 다른 방식을 택한다.

그들은 하나됨이 가져다주는 온갖 평화와 기쁨을, 온갖 무한함과 자유를, 온갖 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자 한다. 몸을 떨어뜨려 넘어졌을”(잠잘) 때만이 아니라,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도.

그런 체험을 창조하는 영혼을 두고 흔히들 그의 혼이 깨어났다”His is risen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 소위 뉴에이지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의식상승과정이라고 부른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말은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교류형태다). 그 모두가 자각 속에서 사는 것으로 귀착되니, 그렇게 해서 그것은 완전 자각이 된다.

그러면 너희가 마침내 완전히 자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너희는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자각하게 된다.

매일의 명상은 너희가 이것을 이룰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행과 헌신을 요구하고, 외부 보상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추구하겠노라는 결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비밀을 쥐고 있는 건 침묵임을 잊지 마라. 그러기에 침묵의 소리는 가장 달콤한 소리고 영혼의 노래다.

자기 영혼의 침묵보다 세상의 소리를 믿을 때, 너희는 길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명상은 좋은 아이디어군요.

 

좋은 아이디어? 그렇다. 하지만 내가 방금 여기서 말한 것을 이해하라. 영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달콤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우는 많다.

기도 속에서 침묵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다. 고요한 명상에서 비밀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번잡한 환경 속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깨달음에 이르거나 이따금이나마 그것을 체험할 때, 세상의 소음은 입을 다물고, 산란함은 가라앉는다. 설사 소음과 산란함의 한가운데 있을 때라도, 삶의 모든 것이 명상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것이 명상이다. 그 속에서 너희는 신성을 명상하고 있다. 참된 각성, 혹은 정신차림mindfulness이란 게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체험될 때, 삶의 모든 것이 축복받는다. 더 이상의 투쟁이나 고통이나 염려는 없다. 오직 체험만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방식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 체험만이. 너희는 그 모두를 완벽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희 삶과 그 속의 모든 사건들을 명상을 이용하라. 잠자면서 걷지 말고, 깨어서 걷고, 무심하게 움직이지 말고, 정신차려 움직이며, 의심과 두려움에 묵지 말고, 죄의식과 자기 비난에도 묵지 마라.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무척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영원의 광휘 속에 거하라. 너희는 언제나 나와 하나이니 나는 너희를 영원히 환영할 것이다. 나는 너희의 귀가(歸家)를 환영할 것이다.

너희 집은 내 가슴속에 있고, 내 집은 너희 가슴속에 있으니, 나는 너희가 죽음에서 확실히 보게 될 이것을 삶에서도 보도록 너희를 초대한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죽음 따위는 없다는 것, 그리고 소위 삶과 죽음은 결코 끝나지 않는, 같은 체험의 양면임을 알게 되리라.

우리는 존재하는 전부고, 지금껏 존재했던 전부며, 앞으로 존재할 전부, 끝없는 세상이다.

 

아멘.

 

10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아시죠?

 

그렇다. 그리고 나도 너를 사랑한다. 너는 그걸 아느냐?

 

이제 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좋다.

 

11

 

제게 영혼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너희의 한정된 이해영역 안에서 설명하려고 애써보마. 하지만 어떤 것들이 의미가 통하지않는다고 해서 좌절하지는 마라. 너는 이 정보를 특별한 체로 걸러서 가져오고 있음을 잊지 마라. 네가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내지 못하도록 너 자신이 직접 설계했던 바로 그 체로 걸러서.

 

제가 그렇게 한 이유를 다시 일깨워주십시오.

 

너희가 모든 걸 기억해낸다면 게임은 끝날 것이다. 너희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온 것이니, 전부가 어떤 식으로 맞춰지는지 이해하는 건 너희의 신성한 목적자체를 훼손할 것이다. 지금의 의식수준에서 일부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고,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좋다.

그러니 모든 수수께끼를 어쨌든 한꺼번에 풀려고 하지 마라. 우주에게 기회를 줘라. 우주가 적절한 진행과정 속에서 자신을 펼쳐가도록.

되어가는 체험을 즐겨라.

 

느긋하게 서둘러라.

 

맞는 말이다.

 

저희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현명하고 멋진 남자였다.

 

저희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걸요.

 

그를 정말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 그녀는 그랬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고요.

 

그래, 그녀는 그랬다.

 

그래서 아버지를 용서하셨던 거구요.

 

그래, 그녀는 그랬다.

 

어머니를 상처 입힌 아버지의 행동 전부 다를요.

 

그렇다. 그녀는 이해했고 사랑했고 용서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녀는 멋진 본보기, 축복받은 스승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영혼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실 겁니까?

 

그래야지, 너는 뭘 알고 싶으냐?

 

첫 번째 질문은 뻔한 거에서 시작할게요. 전 이미 답을 알지만, 우리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당한 것 같아서요. 인간의 영혼soul 같은 게 있습니까?

 

그렇다. 그것은 너희 존재의 세 번째 측면이다. 너희는 몸과 마음과 영spirit으로 이루어진 3중의 존재다.

 

제 몸이 어디 있는지는 저도 압니다. 그건 보이니까요. 그리고 제 마음(정신-옮긴이)이 어디 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그건 머리라는 제 몸 부분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는 도무지-

 

잠깐 거기서 멈춰라. 너는 뭔가 잘못 알고 있다. 너희 마음은 머리 속에 있지 않다.

 

아니라고요?

 

그렇다. 너희 두개골 속에 있는 건 뇌지, 마음이 아니다.

 

그럼 그건 어디에 있습니까?

 

너희 몸의 세포들 하나하나마다에.

 

우와.......

 

너희가 마음이라 부른 건 사실은 에너지다 그것은....... 생각이다. 그리고 생각은 물체가 아니라 에너지다.

너희 뇌는 물체다. 그것은 물질 메커니즘, 생화학 메커니즘이다. 인간 몸 속에서 가장 크고 가장 정교하지만, 그렇다고 유일하지는 않는 메커니즘. 몸은 이 메커니즘을 가지고 생각 에너지를 물질 자극으로 변형시킨다, 즉 바꾼다. 너희 뇌는 변형자transformer. 너희 몸 전체가 그러하다. 너희는 세포 하나하나마다에 작은 변형자를 가지고 있다. 생화학자들은 개별 세포들, 이를테면 혈액세포들이 나름의 지성을 지닌 듯이 보인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해왔다. 사실 세포들은 그렇다.

 

그건 세포들만이 아니라 몸의 더 큰 부위들에도 해당됩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따금 자기 나름의 마음을 가진 듯이 보이는 몸의 특정부위를 알고 있죠........

 

그렇다. 그리고 여자라면 누구나 남자들의 선택과 결정들이 몸의 그 부위에서 영향받을 때, 남자들이 얼마나 불합리해지는지 안다.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을 통제하는 데 이 지식을 써먹기도 하죠.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남자들은 거기서 내린 선택과 결정들로 여자들을 통제한다.

 

부정할 수 없죠.

 

그 곡예를 멈추게 할 방법을 알고 싶으냐?

 

꼭요!

 

앞에서 일곱 차크라 중심 모두를 포함시킬 수 있게 생명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에 대해 했던 그 모든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너희의 선택과 결정들이 네가 묘사한 그 한정된 지점보다 더 넓은 곳에서 나올 때, 여자들이 너희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너희 또한 그들을 통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여자들이 그런 식의 조작과 통제수단에 의지하려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다른 통제수단, 적어도 그만큼 효과적인 통제수단은 없는 듯이 보였고, 그런 통제수단 없이는 남자들이 자주 심한 통제불능 상태가 된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자신의 고귀한 천성을 더 많이 보여줬더라면, 그리고 여자들이 남자들의 그런 측면에 더 많이 호소했더라면, 소위 ()간의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너희 행성의 다른 전쟁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내가 전에 말했듯이,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포기해야 한다거나, 섹스는 인간 존재의 저급한 천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상위 차크라들로 끌어올려지지 않고 그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 다른 에너지들과 결합되지 않은 성 에너지만으로는 온전한 인간을 반영하는 선택과 결과들을 낳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런 선택과 결과들은 대체로 장대하지 못하다.

온전한 너희는 장대함 그 자체지만, ‘온전한 너희보다 못한 것은 모두가 장대하지 못하다. 그러니 너희가 장대하지 못한 선택이나 결과를 만들겠다고 장담하고 싶다면, 오직 너희 뿌리 차크라 중심에서만 결정을 내리고, 그런 다음 그 결과를 살펴봐라.

그 결과는 예언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예측 가능하다.

 

흐음,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물론 너는 알고 있었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언제 배우는가가 아니라, 이미 배운 것을 언제 실행하는가다.

 

그러니까 마음은 세포마다 있군요.......

 

그렇다. 그리고 너희 뇌에는 다른 어느 부위보다 더 많은 세포가 있다. 그래서 너희 마음이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주요한 처리 중심이지, 유일한 중심은 아니다.

 

됐습니다.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런 영혼은 어디에 있죠?

 

너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3의 눈 뒤에?

 

아니.

 

가슴 가운데? 심장 오른쪽, 갈비뼈 바로 밑에요.

 

아니다.

 

좋습니다. 전 손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디나 있다.

 

어디나요?

 

어디나.

 

마음처럼 말이군요.

 

아차, 잠깐만. 마음은 어디나 있지 않다.

 

마음이 어디나 있지 않다고요? 전 당신이 방금 마음은 몸의 모든 세포에 있다고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요.

 

그것이 어디나는 아니다. 세포들 사이에는 빈 공간들이 있다. 사실 너희 몸은 99퍼센트가 공간이다.

 

이 공간이 영혼이 있는 곳입니까?

 

영혼은 너의 안in you 어디에나 있고, 너희를 거치며through you 어디에나 있으며, 너희 둘레around you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너희를 담고 있다.

 

잠깐만요! 이번엔 당신이 잠시 멈춰주세요. 전 지금까지 몸이 내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네 몸은 네 존재의 사원이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건 비유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자기 몸 이상이고, 자신보다 더 큰 뭔가가 있다는 걸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말 그대로 더 큰 뭔가가 있다. 영혼은 몸보다 크다. 그것은 몸 안에서 옮겨지지 않고, 몸을 자기 안에서 옮긴다.

 

당신 말씀을 들어봐도 전 여전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데요.

 

너는 오라”aura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럼요, 그럼요. 그게 영혼입니까?

 

그것은 거대하고 복잡한 실체에 대한 상()을 너희에게 주면서, 너희 언어로, 너희 이해로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말이다. 영혼은 너희를 붙들어주는 것이다. 우주를 담고 있는 신의 영혼이 우주를 붙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와, 이건 제가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것들을 완전히 뒤집는군요.

 

기다려라, 내 아들아. 뒤집는 건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영혼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둘레에 있는 공기라면,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영혼도 그러하다면, 한 영혼이 끝나고 다른 영혼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딥니까?

, 맙소사, 아니, 말하지 마십시오.

 

알겠느냐? 너는 답을 이미 안다!

 

다른 영혼이 끝나고우리 영혼이 시작하는지점 따위는 없는거군요! 거실의 공기의 멈추고부엌의 공기가 시작하는지점 같은 건 없는 듯이요. 그 모두가 똑같은 공기입니다. 그 모두가 똑같은 영혼이고요!

 

너는 방금 우주의 비밀을 풀었다.

 

그리고 우리 몸을 달고 있는 것이 우리듯이, 우주를 담고 있는 게 당신이라면, 당신이 끝나고우리가 시작되는지점도 없군요!

 

(으흠)

 

헛기침하고 싶으시면 하십시오. 이건 저한테는 기적 같은 계시예요! 제 말은 제가 이걸 항상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야 그게 이해가 되다니!

 

그건 굉장하다. 그렇지 않느냐?

 

당신도 보다시피, 예전의 제 이해에서 문제는, 몸을 몸과 몸을 구별해주는 분리된 용기로 보았던 데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까지 영혼이 몸 안에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혼과 영혼도 구별했던 거죠.

 

당연히 그렇게 되지.

 

하지만 영혼이 몸 안과 바깥 어디에나 있다면-당신 표현대로 자신의 오라-, 그렇다면 어떻게 한 오라가 끝나고다른 오라가 시작되는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저는 난생 처음으로, 한 영혼이 끝나지않았는데 다른 영혼이 시작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진짜로-물질적인 의미에서요-알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게 물질 차원에서 사실이란 것도요.

 

만세! 지금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다. 만세!

 

전 항상 이게 형이상학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게 형이하학적 진리란 걸 알겠습니다. 성스런 안개(영혼의 오라를 말함-옮긴이), 이제 막 종교가 과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마라.

 

그런데 여기서 잠깐만요. 한 영혼이 끝나고 다른 영혼이 시작되는 지점이 없다면, 그건 개별 영혼 같은 건 전혀 없다는 뜻입니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정말 신한테 어울리는 대답이군요.

 

고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전 좀 더 명확한 답변을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게 잠깐 여유를 다오. 우리는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다. 너는 지금 손을 상해가면서 쓰고 있다.

 

미친 듯이 갈겨쓴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그러니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도록 하자. 모두들 긴장을 풀어라. 그 모든 걸 너희에게 설명할 테니.

 

좋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전 준비됐습니다.

 

내가 신성한 이분법이란 이름 붙인 것에 대해서 내가 지금껏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는지는 기억하느냐?

 

.

 

, 이것도 그중 하나다. 사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알겠습니다.

 

너희가 우리 우주에서 은혜롭게 살아가려면, 신성한 이분법을 배우고 철저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신성한 이분법은 명백하게 모순되는 두 진리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너희 행성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들은 질서 잡기를 좋아해서, 자신들의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동으로 거부한다. 이런 까닭에, 자신들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두 현실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들은 당장 그 자리에서 그중 하나는 틀린 것, 잘못된 것, 사실 아닌 것이라고 가정한다. 사실 그 둘 다가 참일 수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크나큼 성숙이 필요하다.

하지만 너희가 사는 상대계와 대립하는 절대계에서는, 존재 천체인 하나의 진리가, 상대적인 의미로 보면 이따금 모순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으리란 건 지극히 당연해보인다.

이것이 신성한 이분법이다. 이것은 인간 체험 중에서 대단히 참된 부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은혜롭게 살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늘상 헛되이 정의를 구하거나, 절대 화해하기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 사이의 긴장이라는 성질 자체로 인해 바라던 바로 그결과를 낳는, 대립하는 힘들을 화해시키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툴툴거리고 화내고 엎지락뒤치락한다.

하지만 사실은 바로 그런 긴장들이 상대계를 붙들고 있다. 그런 긴장의 하나로 선과 악의 긴장이 있지만, 궁극의 현실에서는 선과 악 같은 건 없다. 절대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상대계에서 너희는,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체험을 창조했다. 너희가 그렇게 한 건 매우 건전한 이유에서다. 너희는 사랑이 존재 전체임을 그냥 아는것이 아니라 사랑을 몸소 체험하길 원했다. 하지만 뭔가를 체험하려면 그것말고 다른 것들도 있어야 하기에, 너희는 너희 현실 속에 선과 악의 양극성을 창조했다. (그리고 날마다 계속 그렇게 한다.) 한쪽을 이용하여 다른 쪽을 체험할 수 있도록.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성한 이분법, 즉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외관상 모순된 두 가지 진리를 갖는다.

선과 악은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이것을 제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도 신성한 이분법에 대해 언급하셨지만, 이번에는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그런데 내가 말했듯이,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신성한 이분법은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보려는 것이다.

오직 한 존재’, 따라서 오직 한 영혼만이 있다. 그리고 그 한 존재속에 많은 영혼들이 있다.

이분법의 작용하는 방식은 이렇다. 너는 방금 이분법이 영혼들 사이에 분리가 없다는 사실을 네게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영혼이란 모든 물체(의 오라로서) 안과 둘레에 존재하는 생명 에너지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물체를 제자리에 잡아두는것이다. “신의 영혼은 우주를 잡아두고,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몸을 잡아둔다.

 

영혼은 몸을 담는 용기지, 몸이 영혼을 담는 용기나 주택은 아니니까요.

 

맞다.

 

하지만 영혼들을 나누는 선같은 건 없는 거죠. “한 영혼이 끝나고 다른 영혼이 시작되는 지점 따위는 없으니, 실제로는 한 영혼이 모든 몸을 다 잡아두는 거군요.

 

정확하다.

 

그럼에도 그 한 영혼은 개별 영혼들의 다발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그것은-실제로는 내가-설계에 따라 그렇게 한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영혼들 사이에 사실상의 분리는 없지만, ‘한 영혼을 이루는 소재는 물질 현실 속에서 다양한 밀도를 낳으면서 다양한 속도로 자신을 드러낸다.

 

다양한 속도요? 언제 속도가 들어왔습니까?

 

삶의 모든 것이 진동이다. 너희가 삶이라 부르는 것(너희는 그것을 그냥 손쉽게 신이라 부를 수도 있다)은 순수 에너지다. 이 에너지는 쉼 없이 항상 진동한다. 그것은 파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파동은 다양한 속도로 진동하여 다양한 밀도, 즉 다양한 빛을 낳고, 이것은 다시 너희라면 물질계의 다양한 결과들이라고 불렀을, 다양한 물체들을 낳는다. 그 물체들은 서로 다르고 구별된다. 하지만 그것들을 낳는 에너지는 어느 것이나 똑같다.

네가 사용한 거실과 부엌 사이의 공기 예로 돌아가 보자. 너는 불현 듯 떠오른 그 심상(心象), 영감을 멋지게 사용했다.

 

그게 어디서 왔는지 맞춰보십시오.

 

그렇다. 그걸 네게 준 건 나다. 그런데 너는 거실의 공기가 끝나고 부엌의 공기가 시작되는 특정한 지점 같은 건 그들 두 물리적 위치 사이에 없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거실의 공기밀도가 낮아지는 지점, 즉 그것이 흩어지고 엷어지는지점은 있다. “부엌의 공기역시 마찬가지여서, 네가 부엌에서 멀어질수록 저녁 냄새는 약해진다!

하지만 집안의 공기는 다 같은 공기일 뿐, 부엌 속에만 있는 별개의 공기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부엌의 공기는 확실히 다른 공기같아 보인다. 그 하나로 냄새가 다르다!

이처럼 그 공기들은 다른 특징들을 지니니, 그것은 마치 다른 공기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달라 보여도 그 모두가 같은 공기다. 다만 거실에서는 난로 냄새가 나고, 부엌에서는 음식 냄새가 난다. 심지어 너희는 어떤 방에 들어 가서 공기가 전혀 없기라도 한 듯이, “으휴, 숨 막혀. 여긴 공기를 좀 넣어야겠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공기는 많다. 너희가 하고 싶어하는 건 공기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약간의 공기를 밖에서 안으로 들인다. 하지만 그 또한 같은 공기니,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 둘레에, 모든 것을 거쳐서, 움직이는 오직 하나의 공기만이 있다.

 

이건 정말 끝내주는군요. 전 완전히 접수했습니다.” 전 당신이 우주를 설명해주시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제가 완전히 접수할수 있게 해주시니까요.

 

, 고맙다. 나는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계속할 수 있게 해다오.

 

그러십시오.

 

너희 집안의 공기가 그러하듯, 생명 에너지-너희가 신의 영혼이라 부르게 될 것-도 자신이 둘러싸고 있는 물체에 따라 다른 성질을 지닌다. 사실 이 에너지는 그런 물체들을 이루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한다.

물질을 이루기 위해 에너지 미립자들이 함께 결합할 때, 그것들은 대단히 응축되고 짓이겨지고 함께 밀쳐진다. 이제 그것들은 별개의 단위들인 것처럼 보이고심지어 그런 것처럼 느껴지기시작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다른 모든 에너지와 다른 별개의 에너지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 모두가 같은 에너지, 다르게 처신하지만 같은 에너지다.

전부인 것다수의 것으로 드러나도록 해주는 것이 다르게 처신하는 바로 이 행동이다.

내가 1권에서 설명했듯이, 자신을 분화시키는 이 능력을 발달시킬 때까지, ‘존재하는 것은 자신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체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부인 것이것인 것저것인 것으로 나누어졌다. (나는 지금 이것을 극히 단순하게 만들려 애쓰고 있다.)

너희가 영혼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 바로 구별되는 단위로 합쳐져서 물체를 붙들고 있는 이 에너지 덩어리.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수의 너희가 된 내 부분들이다. 따라서,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있으면서,

많은우리가 있다는, 신성한 이분법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와- 이건 굉장해요.

 

나도 알고 있다.

계속해도 되겠느냐?

 

아뇨, 여기서 멈추세요. 좀 지쳤어요.

됐어요. 계속하세요!

 

좋다.

그런데 내가 말했듯이, 에너지가 합쳐질 때 그것은 대단히 응축되지만, 이 응축점에서 멀어질수록 에너지는 더 많이 흩어진다. “공기는 더 엷어지고오라는 흐려진다.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절대 없다. 에너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에너지는 만물을 이루는 재질이고, 존재하는 전부다. 그럼에도 그것이 아주 아주 옅어지고 대단히 엷어져서 거의 있지 않게될 수는 있다.

그러다가 에너지는 다시 다른 곳에서(이것을 그것의 다른 부분이라고 읽어라), 너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 별개의 단위 처럼 보이는것을 다시 한번 이루기 위해 함께 뭉쳐서합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서로 별개인 두 개의 단위가 나타나지만, 사실 분리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이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차원에서 물질우주 전체의 근저를 설명한 것이다.

 

우와, 하지만 이게 진짜일까요? 이 모든 걸 제가 꾸며낸 게 아니란 걸 어떻게 알죠?

 

너희 과학자들은 이미 모든 생명의 건축용 벽돌들이 동일하다는 걸 발견해가고 있다.

그들은 달에서 가져온 돌에서 나무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재질을 찾아내고, 나무를 분석하여 너희에게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재질을 찾아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는 모두 같은 재질이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형상과 다양한 물질들을 창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합쳐지고 압축된, 같은 에너지다.

그 자체로 저절로 중요한”matters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완전히 혼자 힘으로 물질matter이 될 수 있는 건 없다. 예수는 아버지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만물의 아버지는 순수사고다. 이것이 생명 에너지다. 너희가 절대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던 것이 이것이고, 신이고 여신이며, 알파이고 오메가며, 시작이자 끝인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전부의 전부All-in All이고, 부동의 동인이며, 1근원이다. 태초 이래로 너희가 이해하고자 해왔던 위대한 신비, 끝없는 수수께끼, 영원한 진리가 이것이다.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너희다.

 

12

 

이 글을 읽는 제 마음은 지금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와 함께 여기에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벌써 몇백만 명이 이 책을 읽었고, 또 앞으로 몇백만 명이 더 그렇게 할 테니까요. 사실 당신이 우리 가슴에 와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숨이 막힐 만큼 크나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여, 나는 언제나 네 가슴속에 있었다. 다만 이제 네가 거기서 나를 실제로 느낄 수 있다니 기쁘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었다. 나는 한번도 너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너희고, 너희가 나다. 앞으로도 우리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가능하지 않기에.

 

하지만 정말 몹시 외롭다고 느끼는 날들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저 혼자서 이 전쟁을 치루는 것처럼 느끼곤 하죠.

 

내 아이야, 그것은 네가 나를 떠났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자각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내 존재를 자각한다면, 너는 결코 외로울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제가 자각 속에 머물 수 있습니까?

 

네 자각을 남들에게 주어라. 개종시켜서가 아니라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삶 속에서, 사랑의 발단-바로 나-이 되어라. 너는 남들에게 주는 것을 너 자신에게 주고 있다.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기에.

 

고맙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전에도 이런 실마리를 주셨더랬죠. 발단이 되어라. 네가 자신에게서 체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남들의 삶에서 그것의 발단이 되라고요.

 

그렇다. 네가 너 자신에게 되게 하려는 그것을 남들에게 하라. 이것은 위대한 비책이고, 성스런 지혜다.

너희 행성에 평화와 기쁨의 삶을 창조하는 데 있어, 너희가 겪는 모든 문제, 너희가 겪는 모든 갈등, 너희가 겪는 모든 곤란이 이 간단한 지침을 이해하고 따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다시 한번 그렇게 평이하면서도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니 이해가 됩니다. 이제 다시는 그것을 잃지않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내주는 것을 잃는법은 없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라.

 

고맙습니다. 이제 영혼에 관해서 두세 가지 더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네가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해서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언급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러십시오.

 

너는 방금 너 혼자서 이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

 

무슨 전쟁?

 

그건 비유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네가(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삶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 머리 속에서 그것은 전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일종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 저한테는 삶이 이따금 그런 식으로 여겨집니다.

 

삶이 본래부터 그런 식인 건 아니다. 그리고 삶을 그런 식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죄송하지만, 그건 저로서는 믿기 힘들군요.

 

바로 그 때문에 네 현실이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는 현실이라고 믿는 바로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삶은 절대 투쟁이 되기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너희에게 장대한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도구들을 주었다. 너희는 그냥 그것들을 쓰지 않아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는 그것들을 잘못 사용해왔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도구란 세 가지 창조 도구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오면서 그것들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너는 그것들이 무엇 무엇인지 아느냐?

 

생각과 말과 행동요.

 

잘했다. 기억하고 있구나. 나는 예전에 내가 보낸 영적 스승 중 한 사람인 밀드레드 힌클리에게 영감을 주어, “너희는 혀끝에 우주의 창조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게 했다.

이것은 놀라운 의미를 함축한 진술이다. 내가 보낸 스승들 중 또 한 사람에게서 나온 다음과 같은 진리가 그러하듯이.

너희가 믿는 대로 그렇게 너희에게 되어질지니.”

이 두 진술은 생각과 말에 관한 것이다. 행동과 관련해서는 내가 보낸 또 한 사람의 스승이 한 말이 있다.

시작은 신이고 끝은 행동이다. 행동은 창조하는 신, 즉 체험된 신이다.”

 

그건 1권에서 당신이 말씀하신 겁니다.

 

내 아들아, 1권을 가져온 것은 너고, 너를 통해서다. 모든 위대한 가르침들에 영감을 준 것이 나라 해도, 인간의 형상을 통해서 그것들을 가져왔듯이, 그런 영감을 행동에 옮긴 사람들과 그것들을 두려움 없이 공개하여 함께한 사람들 누구나가 다 내가 보낸 위대한 스승들이다.

 

제가 그런 범주에 들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군요.

 

네가 영감을 받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그 말들은 몇백만 명을 감동시켰다.

내 아들아, 몇백만 명이다.

그것들은 24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갔다.

너희는 어떤 잣대로 위대한 스승이라는 자격을 주느냐?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을 잣대로 삼죠.

 

그건 아주 현명한 대답이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제가 한 일들은 절 좋게 말해주지 않죠. 그려니 제가 스승으로서 자격이 없는 건 당연한 거구요.

 

너는 방금 지금껏 살았던 스승들의 반을 지워버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내가 <기적 수업>에서 주디스 슈크만을 통해 말했던 것, 즉 너희는 너희가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기 마련이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는 네가 완벽에 이르는 법을 가르칠 수 있으려면, 완벽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느냐?

그리고 네가 소위 잘못이라 불리는 것들에서 네 몫을 해내기도 했지만-

 

-제 몫 이상이었죠-

 

-너는 또한 나와 나눈 이 대화를 세상에 내놓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

 

아니면 엄청난 무모함이거나요.

 

왜 너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길 고집하느냐? 아니, 너희 모두가 그렇게 한다! 너희들 한사람 한사람이 다! 너희가 자신의 위대성을 부정하는 건, 자신 안의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전 아닙니다! 전 한번도 그걸 부정하지 않았어요!

 

정말이냐?

 

, 적어도 최근에는요.......

 

네게 말하노니,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정하리라.

너 자신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모든 생각이 사실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너 자신을 비하하는, 너 자신에 관한 모든 말이 나를 부정하는 것이며,

어떤 종류든 넉넉지 않음”, 즉 부족과 불충분함의 역할을 연출하는, 너희 자신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사실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생각에서만이 아니라, 말에서만이 아니라, 행동에서도.

 

전 사실-

 

-너희 삶이, 너희가 지금껏 자신에 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게 하라.

그렇다면 네가 지금껏 너 자신에 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은 무엇이냐? 그건 네가 언젠가 위대한 스승이 되겠다는 것 아니냐?

 

.......

 

그게 아니냐?

 

아뇨,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라. 그렇게 있어라. 네가 다시 한번 그것을 부정할 때까지.

 

전 다시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부정하지 않을 거라고?

 

.

 

그걸 증명해봐라.

 

증명하라고요?

 

증명해라.

 

어떻게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위대한 스승이다고 말하라.

 

.........

 

어서, 그렇게 말해라.

 

........ 아시다시피 문제는 이 글들이 출판될 거란 겁니다. 전 제가 종이철에 적고 있는 이 모든 내용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나올 거란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피오리아 사람들도 이걸 읽을 겁니다.

 

피오리아라고! ! 북경이라고 해라!

 

좋습니다. 중국에서도요. 제가 지적하려는 게 그겁니다. 사람들은 2권이 나오고 한달도 안 됐을 때부터 3권은 언제 나오냐고 묻고 있습니다. 3권이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쓰죠. 온 세상이 다 지켜보고 기다리는 걸 의식하면서 이 대화를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요. 12권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두 권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간 대화였습니다. 전 그것들이 책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했다. 네 가슴 깊은 곳에서 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글쎄요. 아마 그렇게 되길 바라긴 했겠죠. 하지만 이젠 저도 압니다. 그리고 그건 이 종이철에 적어나가는 것과의 별개의 문제입니다.

 

네가 적은 한마디한마디가 샅샅이 읽히리란 걸 이제 너도 알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내가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하길 원하십니다. 만인이 다 보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 말하긴 힘든 일이죠.

 

너는 내가 너한테 은밀하게 자기 선언을 하라고 요구했으면 좋겠느냐? 너는 그게 자신을 권능 있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더러 공개적으로 자신이 누군지 선언하라고 한 것은, 여기서의 너는 공개되어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그 발상은 너더러 공개적으로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공식 선언은 전망을 갖는 최고 형태다.

네가 지금껏 자신에 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에 따라 살아라. 그것을 선언함으로써 그렇게 살기 시작하라.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첫 단계는 그것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겸손은 어떡하구요? 또 예의는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가장 숭고한 발상을 선하는 게 점잖은 일입니까?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랬죠. 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생명이요 길이다는 얼마나 거만한가?” 이 정도면 너한테는 충분히 거만하지 않느냐?

, 너는 두 번 다시 나를 부정하지 않겠노라고 말해놓고도, 나를 부정하는 걸 정당화하는 데 벌써 10분을 낭비했다.

 

전 당신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나에 관한 가장 위대한 전망에 대해서입니다.

 

네가 갖는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전망은 나다! 그것이 바로 나다!

네가 네 가장 위대한 부분을 부정할 때, 너는 나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네게 말하노니, 오늘 새벽이 오기 전에 너는 세 번 이렇게 할 것이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를 빼면요.

 

네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를 빼면, 맞는 말이다. 오직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고,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너는 비공식적으로 위대한 스승이었던 위대한 스승을 알고 있느냐? 부처와 예수, 크리슈나 모두가 공개적으로 스승들이었다. 그렇지 않느냐?

 

그랬죠.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스승들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요. 당신 스스로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위대한 스승이 되는 게 꼭 널리 알려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너희 어머니는 선구자고, 사자(使者), 그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네게 그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네가 그 길을 위해 예비하게 했다. 하지만 너 또한 스승이다.

그리고 네가 알듯이 훌륭한 스승이었던 너희 어머니는 분명히 네게 자신을 부정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남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려 한다.

 

, 전 정말로 그렇게 하길 원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거라고요!

 

하길 원하지마라. 네가 원하는것을 갖지 못하리니. 너는 자신에게 그것이 부족함을 선언할 뿐이어서, 그곳이 네가 남겨질 곳이 되리니. 너는 부족한 채로 남으리니.

 

그래요! 좋습니다! 전 하길 원하지않고 그렇게 하길 택합니다!

 

그게 낫다. 그게 훨씬 낫다. 그런데 너는 무엇을 택하느냐?

 

저는 남들에게 자신을 절대 부정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좋다, 그리고 네가 가르치길 택하는 다른 게 또 있느냐?

 

저는 남들에게 신인 당신을 절대 부정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당신을 부정하는 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신을 부정하는 건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좋다. 그렇다면 너는 이것을 되는대로, “우연이다시피가르치는 쪽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이것을 당당하게 의도한 것처럼 가르치는 쪽을 택하겠느냐?

 

저는 그걸 의도하면서 가르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당당하게요. 저희 어머니가 그랬듯이요. 우리 어머니는 절대 나 자신을 부정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제게 날마다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지금껏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절 격려해준 사람이었지요. 어머니는 제게 자신과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제가 그런 스승이 되어야 할 텐데....... 전 어머니가 제게 가르쳐주신 그 모든 지혜를 가르치는 그런 스승이 되기를 택하겠습니다. 어머니는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가르침으로 만드셨죠. 그런 게 그 사람을 위대한 스승으로 만드는 겁니다.

 

네가 옳다. 너희 어머니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리고 더 큰 진리에서도 네가 옳다. 꼭 널리 알려져야 위대한 스승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너를 시험하고있었다. 네가 이 문제에서 어디로 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럼 제가 가길 되어 있던곳을 갔습니까?

 

너는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가는 곳으로 갔다. 너 자신의 지혜와 진리의 자리로, 네가 가야 할 자리는 언제나 바로 이곳이다. 그곳은 네가 세상을 가르칠 때 돌아가서 다시 나와야 할 자리다.

 

저도 압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러면 자신에 관한 네 가장 깊은 진리는 무엇이냐?

 

저는.......

.......... 위대한 스승입니다.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

 

드디어 네가 해냈구나, 조용하고 부드럽게. 드디어 네가 해냈구나. 네 가슴은 그것의 진실됨을 안다. 그리고 너는 단지 네 가슴을 말한 것뿐이다.

너는 뻐기지 않으니, 아무도 그것을 뻐김을 듣지 않을 것이고, 너는 자랑하지 않으니, 아무도 그것을 자랑으로 듣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네 가슴을 두드리지 않고, 네 가슴을 열고 있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누구나 자기 가슴속에서는 자신이 누군지안다. 그들은 위대한 발레리나고, 위대한 변호사며, 위대한 배우고, 위대한 1루수다. 위대한 탐정이고, 위대한 영업자며, 위대한 부모고, 위대한 설계사다. 위대한 시인이고, 위대한 지도자며, 위대한 건설업자고, 위대한 치유자다. 그리고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다 위대한 사람이다.

누구나 자기 가슴속에서는 자신이 누군지안다. 그들이 가슴을 연다면, 그들이 자기 가슴의 바램을 남들과 함께 한다면, 그들이 자신의 진심 어린 진실에 따라 산다면, 이 세상은 장대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너는 위대한 스승이다. 그런데 너는 그 선물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느냐?

 

당신에게서요.

 

그 때문에 네가 누군지선언하는 건 단지 내가 누군지를 선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나를 근원으로 선언하라. 그러면 네가 자신을 위대한 자로 선언해도 아무도 꺼리지 않으리니.

 

하지만 당신은 항상 나 자신을 근원으로 선언하라고 요구하셨는데요.

 

네가 근원이다. 나인 모든 것의. 네가 가장 잘 아는 위대한 스승은 나는 생명이요 길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게로 오는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아버지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고도 말했다.

이해하겠느냐?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

 

맞았다.

 

그건 우리 이야기를 다시 인간 영혼의 문제로 돌아가게 해주는군요. 이제 제가 영혼에 대해 몇 가지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시작하라.

 

좋습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까?

 

하나.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겠죠. 그런데 전체인 그 하나중에 얼마나 많은 개체들이 있습니까?

 

오호, 나는 거기서 그 말이 마음에 든다. 네가 그 말을 쓰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전체 에너지인 그 한 에너지가 자신을 여러 다양한 부분들로 개체화시켰다는 거지.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든다.

 

기쁘군요. 그래서 당신은 얼마나 많은 개체들을 창조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있는 겁니까?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는 대답할 수 없다.

 

어쨌든 해봅시다. 그건 불변수입니까? 변수입니까? 아니면 무한수입니까? 당신은 본래 가마이후로도 영혼들을 구워내셨습니까?

 

그렇다, 그건 상수다. 그렇다, 그건 변수다. 그렇다, 그건 무한수다. 그렇다, 나는 영혼들을 창조했다. 그리고 아니다, 나는 창조하지 않았다.

 

이해를 못하겠군요.

 

나도 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네가 진짜로 그렇게 말했느냐?

 

뭘 말입니까?

 

그러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신이여라고?

 

, 똑똑하시군요. 좋습니다. 제가 할 마지막 일이라면 전 이걸 이해하려 하오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신이여.

 

그렇게 하마. 네 결심이 그토록 굳으니, 내가 널 도와주겠노라. 하지만 네게 경고하건대, 유한한 관점으로 무한을 이해하거나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시도해보자구나.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렇다. 좋은 생각이다. 먼저, 네 질문들은 소위 시간이란 실체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해보자. 사실 그런 실제는 없다. 오직 한 순간만이 있으니,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이 그것이다.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이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다. 먼저란 건 없으니, 어떤 일도 먼저일어나지 않았고, 나중이란 건 없으니 어떤 일도 나중에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바로 지금이고, 오직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상황에서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자신을 개체화하는”(나는 네 용어가 마음에 든다!) 방식들의 가짓수는 언제나 다르면서 언제나 같다. 오직 지금만이 존재한다고 치면, 영혼의 수는 언제나 불변이다. 하지만 너희가 지금을, 지금과 그때now and then라는 의미의 지금으로 생각하는 쪽을 좋아한다고 치면, 그것은 언제나 변한다. 앞에서 환생과 저급한 생명 현상들, 그리고 영혼들이 되돌아오는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기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언제나 변하니, 영혼의 수는 무한하다. 그럼에도 어떤 주어진 시간 지점에서 그것은 유한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다,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러 궁극의 실체와 합치고 나면, 자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의미에서 새 영혼들은 있다. 그들은 우주 수레바퀴에서 새로운 자리로 옮아가기로 작정했으며, 일부는 다시 젊은 영혼들이 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모든 영혼들은 본래 가마의 일부다.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유일한 순간에 창조되고 있기에(창조되었고, 창조될 것이기에).

그러니 너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수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며,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궁극의 실체가 갖는 이런 성질 때문에 나는 종종 부동의 동인이라 불린다. 나는 항상 움직이고 있으면서 절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고, 항상 변하고 있으면서 절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요. 이해했습니다. 당신에게 절대적인 건 없군요.

 

모든 것이 절대적이란 사실만 빼고.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만 빼고요.

 

맞다. 정확하다. 네가 해냈다!” 아주 잘했다!

 

, 사실은요, 제가 이 소재를 항상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제가 이해하지 못했을 때만 빼고요.

 

맞는 말이다.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만 빼고요.

 

정확하다.

 

첫 번째는 누군가입니다.

 

아니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다. 누군가는 두 번째다.

 

기대하시라! 그러니까 당신은 아보트고 저는 코스텔로입니다. 이건 흡사 우주 버라이어티 쇼 같군요.

 

그렇지 않을 때만 빼고. 네가 몹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어할 순간과 사건들도 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만 빼고요.

 

네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만 빼고.

 

, 다시 한번 영혼의 주제로 돌아가서.......

 

, 그건 굉장한 책제목이잖느냐........ 영혼의 주제라.

 

우리가 그런 책을 내게 될지도 모르지요.

 

농담하는 거냐? 우린 이미 갖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는 경우만 빼고요.

 

그건 사실이다.

 

그게 사실이 아닌 경우만 빼고요.

 

너로서는 절대 알 수 없다.

 

당신이 알 때만 빼고요.

 

알겠느냐? 너는 이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이제 너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건지 기억해가고 있다. 게다가 너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너는 이제 가볍게 사는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너는 가벼워지고 있다. 깨달음이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화끈하군요.

 

아주 근사하지. 그건 네가 달아올랐다는 뜻이다!

 

. “모순 속에서 산다는 게그런 거죠. 거기에 대해서는 당신이 여러 번 말씀하셨고요. 이제 영혼의 주제로 되돌아가서요, 나이든 영혼과 젊은 영혼의 차이는 뭡니까?

 

에너지 몸체(말하자면 내 일부)는 궁극의 자각에 도달한 후에,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자신을 젊었다고여길 수도 있고 늙었다고여길 수도 있다.

우주 수레바퀴로 되돌아갈 때, 어떤 영혼들은 늙은 영혼이 되기를 선택하는 반면, 어떤 영혼들은 젊은영혼이 되기를 선택한다.

사실 젊었다고 일컬어지는 체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늙었다고 불리는 체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영혼들은 젊었다고 일컬어지기를 자원했고”, 어떤 영혼들은 늙었다고 일컬어지기를 자원했다. 진실로 존재 전체인 한 영혼이 자신을 완벽하게 알 수 있도록.

어떤 영혼들은 착하다고 일컬어지는 쪽을, 어떤 영혼들은 나쁘다고 일컬어지는 쪽을 선택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어떤 영혼도 절대 벌받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어떻게 한 영혼이 전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일부를 벌하고 싶어하겠는가?

어린이 그림책 <작은 영혼과 태양>에는 이 점이 무척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다. 그 책은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점을 단순화시켜 전개한다.

 

당신한테는 뭐든지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무슨 기술이 있으신가 봅니다. 끔찍할 정도로 복잡한 개념들을 그토록 명료하게 표현해내시다니 말입니다. 심지어 애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요.

 

고맙다.

 

그러고 보니 영혼에 관한 또 다른 문제가 여기 있군요. 소위 짝영혼”soul partners이란 게 있습니까?

 

있다.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뭐가 다릅니까?

 

너희는 짝영혼자신의 다른 반쪽을 뜻하는 것으로 낭만화시켰다. 하지만 인간 영혼, 다시 말해 개체화된내 부분은 사실 너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달리 말하면, 제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 제 생각보다 크다는 거군요.

 

훨씬 더 크다. 그것은 방 하나의 공기가 아니라 집 전체의 공기다. 그리고 그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다. “영혼은 하나의 정체성identity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실의 공기도 아니고, 짝영혼이라 불리는 두 개인으로 쪼개지지도않으며, 거실 겸 부엌의 공기도 아니다. 그것은 대저택 전체의 공기.

내 왕국에는 많은 대저택들이 있다. 그리고 모든 저택 둘레와 저택 안, 저택을 거쳐 떠다니는 다 같은 공기라도 어떤 저택의 공기가 더 가깝게”closer 느껴질 수 있다. 그런 저택의 방들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너희는 아마도 저기서랑 비슷한close것 같애라고 말하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때 너희는 오직 영혼만이 존재함을 이해한다. 하지만 소위 개별화된 영혼이라고 해도 몇백 가지 물질형상들의 위와 안, 또 그것들을 거쳐서 떠도는 거대한 존재다.

 

동시에요?

 

시간 같은 건 없다. 나는 단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 너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면, 너희 영혼이 감싸고 있는 물질 형상 중 일부는 지금 살고있고, 다른 형상들은 지금의 너희가 고인이라고 불렀을 형상을 개별화되어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너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 속에 사는 형상들을 감싸왔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라는 너희의 고안품이, 실현된 체험을 너희가 더 잘 느끼도록 해주는 도구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내 영혼이 감싸온”-당신이 쓴 용어는 재미있군요-이 몇백가지 물체들이 다 내 짝영혼입니까?

 

너희가 그 용어를 사용해온 방식보다는 그게 좀 더 정확한 쪽에 가깝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리고 내 짝영혼의 일부는 앞서 살았습니까?

 

그렇다. 너희의 표현 방식대로라면, 그렇다.

 

우와, 잠시만요! 방금 여기서 뭔가 접수된 것 같아요! “앞서살았던 이 내 일부들이, 지금 시점에서는 내 전생들이라고 표현했을 그런 건가요?

 

좋은 생각이다! 너는 이해해가고 있다! 이것들 중 일부는 너희가 앞서살았던 다른 삶들이고, 일부는 아니다. 너희 영혼의 다른 일부들은 너희가 자신의 미래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살아갈 몸체들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 너희 행성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형상들로 구체화되고 있다.

너희가 이런 것들 중 하나와 마주칠 때, 너희는 즉석에서 친근감을 느낄지 모른다. 심지어 때로는 우린 전생을 함께 보낸 게 틀림없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너희 말이 맞을 것이다. 너희는 전생을 함께 보냈다. 같은 물질형상으로든, 아니면 시공간 연속체 속의 두 가지 형상으로든.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요. 이걸로 뭐든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렇다, 그건 그렇게 할 수 있다.

 

한 경우만 빼고요.

 

그게 뭐냐?

 

제 쪽은 누군가와 전생을 보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는데-전 그걸 그냥 알아차립니다. 뼛속에서 그게 느껴지는 거죠-그런데 제가 그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전혀 그걸 못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네가 과거미래를 혼동한 것이다.

 

?

 

너는 그들과 또 다른 생애를 함께 보냈다. 하지만 그게 꼭 전생인 것 아니다.

 

그럼 그건 후생”future life인가요?

 

맞았다. 그 모두가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에 일어나고 있기에, 너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자각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그 사람들도 같이 미래를 기억하지못합니까?

 

이것들은 대단히 미묘한 진동이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그것들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그건 상대방에 따라 다르다. 너는 어떤 사람과 함께한 네 과거미래체험을 다른 사람과 함께한 그것보다 더 민감하게느낄 수 있다. 이것은 대개 너희가 같은 몸체를 감싼 아주 거대한 영혼의 일부로서 그때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예전에 만났던느낌은 똑같지만 앞의 것만큼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면, 그것은 너희가 같은 시간을 함께하긴 했지만 같은 몸체는 아니었다는 뜻일 수 있다. 아마도 너희는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 부모와 아이, 그리고 연인이었을(혹은 앞으로 그럴) 것이다.

이것은 강한 인연이니, 너희가 그들을 생에서 처음으로 다시 만날, 그런 인연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당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제가 예전에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 이를테면 잔다르크나 모차르트, 혹은 과거의 다른 어떤 유명 인사로서의 기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번 생애에서 두 사람 이상인 현상이 설명이 되는 것 같군요. 전 지금까지 이런 현상이 환생을 엉터리 교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어떻게 두 사람 이상이 예전에 같은 사람이었노라고 나설 수 있느냐는 거죠. 하지만 전 이제 이것이 어째서 가능한지 알았어요! 말하자면 그건 지금 한 영혼에 감싸여 있는 여러 지각 존재들sentient beings이 잔다르크였던(지금 잔다르크인) 자신들이 단일 영혼 중 그 부분을 기억해내고”(다시 한번 그 부분의 구성원이 되고) 있을 뿐이군요.

게다가 보십시오. 이건 모든 한계를 날려버리고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줍니다. 앞으로 저는 그건 불가능해라면서 갑자기 멈춰서는 순간, 내 그런 행동은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이 있음을 증명할 뿐이라는 걸 알 겁니다.

 

그걸 기억해내는 건 좋은 일이다. 그걸 기억해내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둘 이상의 짝영혼을 가질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우리가 한 생애 동안에 둘 이상의 사람과 그토록 강렬한 짝영혼 느낌을 체험하는 것이 어째서 가능한지도 설명해줍니다. 심지어는 한번에 두 사람 이상과도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두 사람 이상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물론이다.

 

아뇨 아뇨. 제 말은 우리가 주로 한 사람만을 위해, 혹은 적어도 한번에 한 사람만을 위해 예비해둔, 그런 강렬하고 밀착된 사랑 말입니다.

 

왜 너희는 사랑을 예비해두고싶어하느냐? 왜 너희는 그것을 예비로잡아두고 싶어하느냐?

 

그런 식으로두 사람 이상을 사랑하는 건 옳지 않거든요. 그건 배신입니다.

 

누가 네게 그렇게 말했느냐?

 

모두 다요. 모두가 다 제게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내가 믿는 종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도 그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말해요!

 

이런 것들이 아들에게 전해지는, “아버지의 죄중 일부다.

너희는 모든 이를 최대한으로 사랑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임을 스스로의 체험으로 배운다. 그럼에도 너희 부모와 선생과 성직자들은 너희에게 다르게 말한다. 그들은 너희에게, “그런 식으로는한번에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건 섹스만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한 사람과 똑같이 특별하다고 여길 때, 너희는 대개 자신이 그 한 사람을 배신했다고 느끼도록 배웠다.

 

맞아요! 그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설정한 방식이라고요!

 

그러기에 너희가 표현하는 건 참된 사랑이 아니라, 어떤 모조변종(模造變種)이다.

 

인간 체험의 틀 안에서 참된 사랑을 표현하는 건 어느 정도로 허용되는 걸까요? 그런 표현에 어떤 한계를 설정해야 합니까?-사실 설정해야 한다고 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사회적 성적 에너지가 무제한으로 몽땅 풀려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요? 완전히 사회적 성적 자유란 모든 책임의 포기입니까? 아니면 모든 책임의 최고치입니까?

 

사랑의 자연스런 표현을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는 자유 체험을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영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영혼은 의인화된 자유기 때문이다. 신은 무한하고 어떤 종류의 한계도 없으며, 신은 그 정의에서 이미 자유다. 영혼이란 축소된 신에 다름 아니다. 영혼은 어떤 한계 설정에도 반발한다. 외부에서 부과하는 한계를 받아들일 때마다, 영혼은 새로운 죽음을 겪는다.

이런 의미에서는 탄생 자체가 죽음이고 죽음이 탄생이다. 영혼은 탄생에서 몸이라는 끔찍한 한계 속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고, 죽음으로 그런 갇힘에서 다시 벗어난다. 영혼은 잠자는 동안에도 같은 일을 한다.

영혼은 다시 자유를 향해 날아가고, 다시 한번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고 체험하면서 기뻐한다.

그런데 영혼이 몸을 갖고 있는 동안에도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고 체험할 수 있을까?

네가 묻는 질문이 이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삶 자체의 이유와 목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만일 몸을 가진 삶이 감옥이나 제한일 뿐이라면, 그것의 정당화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서 무슨 좋은 게 나올 수 있으며, 그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게는가라는 물음으로.

 

그래요, 그게 바로 제가 물으려던 것일 겝니다. 전 그걸 인간 체험의 그 끔찍한 제한성을 느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대신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지금 신체의 제한이 아니라-

 

-나도 안다-

 

-감정과 심리면에서의 제한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 나도 안다. 이해한다. 그런데 네 관심들은 모두 동일한 대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요. 맞아요. 하지만 먼저, 하던 이야기를 끝낼게요. 전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모두를 사랑하게 놔두지 않는 세상의 무능함에 무척 실망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게 낯선 사람에게 말 걸지 말고,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수다떨지 말란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한번은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푼돈을 구걸하는 거지 옆을 지나게 됐고, 저는 안된 생각이 들어 내 호주머니에 있던 잔돈 몇 푼을 그 사람에게 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막더니 서둘러 저만치 끌고 가시더군요. “쓰레기야, 저런 인간은 그냥 쓰레기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나름으로 설정한 사람답다는 규정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붙이는 딱지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우리 형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안에 발도 못 들어놓게 하는 바람에 그 후로 우리와 함께 살지 않았던 형이죠. 아버지와 말다툼을 좀 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던 형이어서 전 형이 그날 밤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현관에서 형을 가로막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망연자실해하셨고(형은 어머니의 전()결혼에서 얻은 자식이었거든요), 전 그냥 어리둥절해했습니다. 말다툼 좀 했다고,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형을 사랑하면 안 되고 함께 있으면 안 되다니?

크리스마에는 전쟁터에서도 24시간 휴전을 하는 판인데, 크리스마스를 망칠 만큼 심한 말다툼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이게 일곱 살짜리 어린애의 가슴이 알고 싶어하던 거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분노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사랑이 흐르지 못하게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거죠.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아이였을 때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요. 전 낯선 사람들과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만나거나, 그들에게 다가가면 못쓴다는 것과, 방금 소개받은 사람들을 대할 때는 따라야 할 어떤 예의범절이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어느 쪽도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요. 저는 새로 만난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었고, 제 모든 걸 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안 되죠. 관례는 우리더러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난 지금, 성행위가 그 속에 개입될 때는 그 관례가 훨씬 더 엄격하고 훨씬 더 많은 제한을 갖는다는 걸 배웠습니다. 전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요.

전 제가 단지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할 뿐이라는 걸 압니다. 그냥 내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기분 좋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모두를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걸요. 하지만 사회에는 이런 것들에 관한 관례와 규정들이 있기 마련이죠. 관련 당사자들이 체험하는 데 동의하더라도, 사회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 두 연인 잘못된걸로 낙인찍힐 만큼 엄격한 관례와 규정들이요.

왜 이런 겁니까? 이 모든 게 뭣 때문입니까?

 

, 네 입으로 직접 말했다. 두려움 때문이라고.

그 모든 게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요.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타당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의 행실을 생각하면, 이런 제한과 강제들이 오히려 적절한 방안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혹은 색욕에 빠져) 자기 아내를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건 단지 한 예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그 여자는 서른아홉이나 마흔셋의 나이에 아이들까지 딸린 채 이렇다 할 밥벌이 기술도 없이 남겨집니다. 아니 더 나쁜 경우는 자기 딸보다 더 어린 여자한테 홀딱 빠진 예순여덟의 할아버지한테서 버림받은 예순넷의 할머니겠죠.

 

네가 묘사하는 그 남자는 이제 예순넷인 자기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네 가정이냐?

 

글쎄요, 아마 그는 당연히 그런 식으로 행동하겠죠.

 

아니다. 그가 사랑하지 않아서 벗어나려는 건 자기 부인이 아니다. 그건 그가 자기한테 두어졌다고 느끼는 제한이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건 순전히 색욕입니다. 그는 자기 젊음을 되찾으려는 그냥 괴팍한 노인네일 뿐이라고요. 젊은 여자와 함께 있고 싶은 자기의 유치한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해온 자기 조강지처와 맺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노인네요.

 

물론이다.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네가 말한 어떤 것도 내가 말한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사실 어떤 경우든 그 남자는 자기 부인을 여전히 사랑한다.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건 자기 부인이 그에게 설정한 제한이거나, 그가 자기 부인과 계속 살기로 한다면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을 그 젊은 여자가 그에게 설정한 제한이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는 건, 그것이 어떤 종류의 제한이든 영혼은 제한에 반발하기 마련이란 점이다. 바로 이것이 한 남자가 자기 부인을 떠나건, 한 여자가 갑자기 자기 남편을 떠나는(어쨌든 이런 일도 일어난다) 반란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일어난 모든 반란들을 점화시켜온 요인이다.

 

설마 행동면에서 모든 제한을 완전히 철폐하자는 주장은 아니시겠지요? 그건 행실면에서 무정부상태를 불러올 겁니다. 사회 혼란이죠. 설마 당신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들, 다시 말해 놀랍게도 자유 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겠죠?

 

나는 어떤 것도 옹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않는다. 인류는 끊임없이 나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신으로 만들려 해왔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뿐이다. 나는 그냥 너희가 나름의 옳고 그른 체계, 나름의 찬성과 반대 체계를 창조하는 걸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한 종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선택하고 바란다고 말하는 것에 비추어볼 때, 그에 관한 너희의 지금 관념들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도 살펴본다.

자유 결혼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자유 결혼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는 너희가 결혼으로, 그리고 결혼에서 무엇을 원하기로 결정하는가에 좌우된다. 내가 말했듯이 모든 행동이 자기 규정의 행동이니, 결혼에 대한 그런 결정은, 소위 결혼이라는 그 체험과 관련하여 자신이 누군지를 창조한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질문이 올바르게 제기되었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소위 자유 결혼과 관련해서 그 질문은, “우리는 쌍방이 결혼관계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의 성적 접촉을 허용하는 자유결혼을 해야 할까?”가 아니다. 그 질문은 결혼이라는 체험과 관련해서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삶의 가장 큰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서 찾아질 것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과 관련해서, 그것과 관계에서 나는 지금 누구인가’-마침표-에 대한 대답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나는 누가 되기를 선택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서.

내가 이 대화를 통해서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듯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영성수행 비전 > 신과 나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눈 이야기 3 (7)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3 (6)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3 (4)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3 (3)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3 (2)  (0) 2018.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