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2)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2)
그렇다면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네가 되고자 선택하는 모든 존재가 다 ‘너’고, 네가 되고 싶어하는 신성의 모든 측면이 다 ‘너’다. 그게 바로 너희다. 그것은 어느 때라도 바뀔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시시때때로 자주 바뀐다. 하지만 너희 삶이 자리잡길 원한다면, 그런 광범한 변수의 체험을 그만두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그냥 ‘자신’과 ‘되고자 원하는 자신’을 놓고 그렇게 자주 마음을 바꾸는 걸 그만두면 된다.
그것도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나는 너희가 여러 다양한 차원에서 이런 결정들을 내리고 있음을 본다. 차도에 나가 놀겠다고 작정하는 아이는 죽겠다고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 애가 다른 여러 가지 선택을 하고 있을 순 있지만, 죽는 건 그중 하나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안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가 죽기로 선택한 데 있지 않고, 죽는 걸 포함해서 하나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택들을 내렸다는 데 있다. 아이에게는 이 점이 명확하지 않다. 그 애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빠뜨린 자료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이는 명확한 선택, 더 나은 선택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시피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신인 나는 너희의 선택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지만, 그 선택들이 어떤 것일지는 항상 알 것이다.
따라서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너는 그 일이 그런 식으로 일어난 건 완벽하다고 보아도 좋다.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완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 삶의 설계-그 속의 사람과 장소와 사건들-모두가 완벽 자체의 완벽한 창조자인 너희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너희에게서, 너희로서, 너희를 통해서의....... 나에 의해서.
그런데 우리는 이 공동창조 과정을 의식하면서 함께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한 채 함께할 수도 있다. 너희는 자각하면서 삶을 거쳐갈 수도 있고, 자각하지 못한 채 거쳐갈 수도 있다. 너희는 너희 길을 자면서 걸어갈 수도 있고, 깨어서 걸어갈 수도 있다.
너희가 선택하라.
잠깐만요. 여러 다양한 차원들에서 결정을 내린다고 하셨던 부분으로 돌아가서요, 당신은 제가 삶을 자리잡게 하고 싶다면, ‘자신’과 ‘되고자 원하는 자신’을 놓고 마음을 바꾸길 그만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자, 당신은 우리 모두가 여러 다양한 차원에서 선택하고 있음을 본다고 하셨고요. 여기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가 뭐죠?
너희가 오로지 너희 영혼soul이 바라는 건만을 바랐다면, 만사는 아주 간단했을 것이다. 너희가 오로지 자신의 순수한 영spirit 부분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너희의 모든 결정들은 손쉬웠을 테고 모든 결과들은 즐거웠을 것이다. 그건....... 영은 언제나 가장 고귀한 것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들은 재고될 필요도 없고, 분석되거나 평가될 필요도 없다. 너희는 그냥 그 선택들을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너희는 영만이 아닌, 몸과 마음과 영으로 이루어진 ‘3중의 존재’다. 너희의 영광과 경이가 여기에 있다. 너희는 대게 세 차원 모두에서 동시에 결정과 선택들을 내리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서로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이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저것을 구하고, 영은 또 영대로 다른 것을 바라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이것은 특히나 아이들의 경우에 그러해서, 그들 대부분은 영혼에 공명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몸에 “재미있을” 것 같은 것과 마음에 의미 있는 것을 구별할 만큼도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이는 얼결에 찻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신인 나는 너희가 잠재의식으로 내리는 선택까지 포함해서 너희의 모든 선택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것들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반대로 너희가 선택한 것을 갖게끔 조장해주는 것이 내 일이다. (사실 그것들을 너희에게 주는 것은 너희다. 내가 해온 일은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체계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창조과정이라 부르는 이 체계에 관해서는 1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너희의 선택들이 충돌할 때, 몸과 마음과 영이 하나로 움직이지 않을 때, 창조과정은 모든 차원에서 작동하여 잡다한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너희 존재가 조화롭고, 너희 선택이 통일되어 있을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너희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통일된 존재상태를 묘사할 수 있는, “합쳐서 하면 되지”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너희가 결정을 내리는 차원들 속에는 또 하위 차원들이 있다. 이것은 특히 마음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너희 마음은 내면의 갈등을 한층 심화시킬 가능성을 낳으면서, 하위의 세 차원, 즉 논리와 직관과 감정 차원 중 적어도 한 차원에서, 때로는 세 차원 모두에서 결정과 선택을 내릴 수 있고, 실제로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차원들 중 하나인 감정 차원 속에는 다시 또 다섯 가지 차원들이 있다. 이것들이 서러움과 노여움, 부러움, 두려움, 사랑이라는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 속에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마지막 두 차원이 있다.
사랑과 두려움은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 안에 포함되는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된다.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 중 나머지 셋은 모두 이 두 감정의 부산물들이다.
모든 생각이 결국에는 사랑 아니면 두려움에 뒷받침된다. 이것은 위대한 양극성이자, 으뜸가는 이원성이다. 궁극에 가서는 모든 것이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된다. 모든 생각과 관념, 개념, 이해, 결정, 선택, 행동들이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근거로 한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니,
사랑이 그것이다.
사실 존재하는 건 사랑뿐이다. 두려움조차 사랑의 부산물이어서, 효과적으로 쓰여지면 사랑을 표현한다.
두려움이 사랑을 표현한다고요?
그것의 가장 고귀한 형태에서는, 그렇다. 모든 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 가장 고귀한 표현 형태에서는.
아이가 차에 치여 죽지 않도록 구해내는 부모는 두려움을 표현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표현하는가?
글쎄요. 제 생각엔 둘 다 같은데요. 아이의 생명에 대한 두려움과 아이를 구하려고 자기 생명까지 무릅쓰는 사랑요.
맞았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가장 고귀한 형태의 두려움은 사랑이 됨을......., 두려움으로 표현된....... 사랑임을 본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런 감정들인 서러움과 노여움과 부러움도 눈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모두가 이런저런 형태의 두려움이면서, 또한 이런저런 형태의 사랑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져온다. 이해하겠느냐?
문제는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이 왜곡되기 시작할 때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아주 이상야릇해져서 전혀 사랑의 부산물로 인식할 수 없다. 사랑의 존재인 신으로 인식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예전에 이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와 멋진 협력관계를 맺고 있을 때요. 그녀가 그것들에 대해 가르쳐줬습니다.
그렇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걸 가르치라고 부추긴 건 나였다.
그래서 제가 선택할 때, “내가 어디서 나오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된다는 것과, 제가 “나오는” 곳이 깊이가 다른 여러 층일 수 있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실제 상황이다.
이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에 대해 한번 쭉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엘리자베스에게 배운 것을 많이 잊어버려서 다시 한번 듣고 싶거든요.
서러움grief은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것은 잘 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너희더러 잘 가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너희 부분, 어떤 종류의 상실이든 상실을 체험할 때, 내면의 슬픔sadness을 표현할 수 있게-밀어내고 몰아낼 수 있게-해주는 너희 부분이다. 그 상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든, 아니면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리는 것이든.
자신의 서러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때, 너희는 서러움에서 벗어난다. 슬플 때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슬픔에 대해 아주 건강한 태도를 갖게 되고, 그만큼 자신의 슬픔을 쉽사리 극복한다.
반면에 “자, 자, 울지 마”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울음을 삼키는 힘든 시간을 갖는다. 어쨌든 살아오는 동안 줄곧 그렇게 하지 말라고 들어온 그들로서는 자신의 설움을 억누르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억눌린 서러움은 대단히 부자연스런 감정인 만성 우울로 된다.
사람들이 살인을 하고, 전쟁이 시작되고, 국가가 무너지는 건 만성 우울 때문이다.
노여움anger은 자연스런 감정이다. 이것은 너희더러 “아냐, 됐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하지만 노여워한다고 해서, 반드시 남을 남용하게 되는 건 아니고,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게 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노여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노여움에 대해 아주 건강한 태도를 갖게 되고, 그만큼 자신의 노여움을 쉽사리 극복한다.
화내는 건 좋지 않다. 그것을 표현하는 건 잘못이다. 아니 그것은 체험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느끼도록 길러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노여움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든 힘든 시간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억눌려진 노여움은 대단히 부자연스런 감정인 분노rage가 된다.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시작되고, 국가가 무너지는 건 분노 때문이다.
부러움envy은 자연스런 감정이다. 이것은 다섯 살짜리 꼬마더러 자기도 누나처럼 문고리에 손이 닿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만드는 감정이다. 부러움은 너희더러 그것을 다시 해보고, 더 열심히 해보고, 성공할 때까지 계속 노력해보고 싶어하게 만드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부러워하는 건 대단히 건강하고 자연스런 행동이다.
부러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부러움에 대해 아주 건강한 태도를 갖게 되고, 그만큼 자신들의 부러움을 쉽사리 극복한다.
부러워하는 건 좋지 않다, 그것을 표현하는 건 나쁘다, 아니 그것을 체험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느끼도록 길러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부러움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힘든 시간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억눌려진 부러움은 대단히 부자연스런 감정인 질투jealousy가 된다.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시작되고, 국가가 무너지는 건 질투 때문이다.
두려움fear은 자연스런 감정이다. 모든 아기들은 딱 두 가지 두려움만을 가지고 태어난다. 즉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 그 외의 다른 모든 두려움들은 환경이 가져다주고, 부모가 가르친 학습된 반응이다. 자연스런 두려움의 목적은 약간의 주의를 심어주는 데 있다. 주의는 몸이 계속 살아 있게 도와주는 도구다. 그것은 사랑의 부산물,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두려워하는 건 좋지 않다, 그것을 표현하는 건 나쁘다, 아니 그걸 체험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느끼도록 길러진 아이들은 어른 되었을 때, 자신의 두려움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힘든 시간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억눌러진 두려움은 대단히 부자연스런 감정인 공포panic가 된다.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시작되고, 국가가 무너지는 건 공포 때문이다.
사랑love은 자연스런 감정이다. 아기가 한계나 조건 없이, 위축되거나 당황하지 않고, 평소에 자연스럽게,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랑은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표현되고 받아들여진 사랑의 기쁨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약당하고, 한정되고ㅡ 규칙과 규제와 관습과 제한들로 뒤틀리고, 통제되고, 조작당한 사랑은 부자연스러워진다.
자연스런 사랑은 좋지 않다. 그것을 표현하는 건 나쁘다, 아니 그것을 체험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느끼도록 길러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랑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힘든 시간을 갖게 된다.
계속해서 억눌러진 사랑은 대단히 부자연스런 감정인 소유욕possessiveness이 된다.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이 시작되고, 국가가 무너지는 건 소유욕 때문이다.
이처럼 억눌려진 자연스런 감정들은 부자연스런 반응과 대응들을 낳는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들 대부분을 억누르면서 살지만, 사실 이 감정들은 너희 동무고 너희가 받은 선물이다. 이것들은 너희가 체험을 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성스런 도구들이다.
너희는 태어날 때 이 도구들을 받는다. 이것들은 너희가 삶을 뚫고 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감정들을 억누릅니까?
그들은 그것들을 억누르라고 배웠다. 그들은 그렇게 하라고 들어왔다.
누구한테서요?
자신들을 길러준 부모한테서.
왜요?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 역시 자기 부모한테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 부모들은 또 자기 부모들한테서 그렇게 들었고.
그래요, 그래요. 하지만 왜요? 그렇게 계속되게 하는 원인이 뭐죠?
계속되게 만드는 원인은, 너희가 부모노릇 하기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가졌다는 데 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누구 말입니까?
너희의 어머니 아버지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식들을 기르기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고요?
그 부모들이 젊을 때는,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사실 그들 중 많은 수가 지금 하는 만큼이라도 잘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젊은 부모보다 아이 기를 채비가 덜 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어쨌든 젊은 부모들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쥐꼬리만한 인생체험밖에 없는 상태에서 육아업무를 맡게 된다. 당사자인 자신들조차 아직 다 길러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들도 아직 답을 찾는 중이고, 그들도 아직 실마리를 구하는 중이다.
그들은 아직 ‘자신’조차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취약한 다른 사람들(자식들을 말함-옮긴이)에게서 발견한 것들을 지도하고 키워주려 애쓰고 있다. 그들은 자신조차 규정하지 못했으면서, 남들을 규정하도록 떠밀리고 있다. 그들 자신이, 자기 부모들이 심히 잘못 규정해온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려고 아직 애쓰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아직 자신이 누군지조차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너희에게 너희가 누구인지 말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너희를 바르게 이해시켜야겠다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지만, 사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삶조차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 전부를 잘못 이해한다.
그들이 운이 좋다면, 자식들에게 입히는 해악이 그리 크지 않을 수 있고, 자손들도 그걸 극복하게 되겠지만, 그렇다 해도 아마 십중팔구 자기 자손들에게 그 해악의 일부를 물려주기 전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 대다수가 멋진 부모가 될 수 있는 지혜와 인내, 이해와 사랑을 갖게 되는 건, 너희의 지금 육아 연배가 끝나고 난 다음이다.
이건 왜 그런 거죠? 이해가 안 되는군요. 많은 경우에 당신 관찰이 정확하다는 건 알지만, 이건 왜 그렇죠?
본래 젊은 친부모들이 양육자가 되기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아이를 기르는 연배는 사실 지금으로 치면, 그것이 끝나는 시기에 시작되어야 한다.
전 여전히 그 점을 잘 모르겠는데요.
인간은 생체상으로 자신도 아이인 동안에 아이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너희가 놀랄 사실은 이 아이인 기간이 무려 40~50년에 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40~50년 동안 “아이”로 있다고요?
어떤 관점에서는, 그렇다. 이것이 너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진리란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네 주위를 둘러봐라. 아마도 너희 종(種)의 행동방식이 내 논점을 밝혀줄 테니.
너희 사회에서는 21살이 되면 “다 자라서”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여기에다 너희를 기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가 21살보다 그다지 많지 않았던 어머니 아버지가 너희들 대다수를 길렀다는 사실을 보태 보라.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되기 시작할 테니.
친부모가 양육자가 되기로 되어 있었다면, 적어도 50살이 될 때까지 너희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는 건 잘 발달되고 튼튼한 신체를 가진 젊은이가 하기로 되어 있었던 반면, 아이를 기르는 건 잘 발달되고 튼튼한 정신을 가진 연장자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너희 사회는 계속해서 아이 양육에 대한 책임을 친부모에게 지우고자 해왔다. 그 결과 너희는 육아과정을 대단히 힘겹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성적(性的) 행동을 둘러싼 여러 에너지들까지도 왜곡하고 말았다.
호오.......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내가 여기서 살펴본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많다. 즉 그들이 아주 괜찮은 사람들이라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연배 정도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아니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 전혀 잘못된 해결책을 내놓았다.
너희는 젊은이들이 섹스를 즐기게 놔두는 대신에, 섹스 때문에 아이가 생기고 연장자들이 아이를 길러야 한다면, 아이 기를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젊은이들은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너희는 그 시기 전에 젊은이들이 성(性)을 체험하는 걸 “나쁜 것”으로 만듦으로써, 삶의 가장 즐거운 축하의식 중 하나이기로 되어 있던 것을 금기(禁忌)로 온통 도배하고 말았다.
따라서 따르기엔 너무 부자연스럽다는 훌륭한 이유로, 너희 자식들이 이 금기에 별 신경을 안 쓰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인간 존재는 자신이 준비되었음을 말해주는 내면 신호를 느끼자마다, 짝짓고 교미하기를 바라게 되어 있다. 이건 인간의 천성이다.
하지만 자신의 천성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자기 내면에서 느끼는 것보다 부모로서 너희가 그들에게 말해준 것과 더 깊은 관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너희 아이들은 삶이란 게 도대체 어떤 건지 말해달라고 너희를 쳐다보곤 한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서로를 훔쳐보고, 천진하게 서로 놀고, 서로의 “차이”를 탐색해보려는 충동을 느낄 때, 그들은 이에 관한 신호를 찾아 너희를 쳐다보게 된다. 자기 천성의 이 부분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허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억누르고 삼가고 단념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많은 부모들이 인간 천성의 이 부분에 대해 자기 자식들에게 이야기해준 것이 온갖 종류의 것들, 말하자면 자신들이 들은 것, 종교가 말하는 것, 사회가 생각하는 것 등등, 사물의 자연스런 질서만 빼고 그야말로 온갖 것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목격한다.
너희 인간종의 자연스런 질서에서 보면, 성욕은 9살부터 14살까지의 어딘가에서 발육하기 시작해서, 15살이 넘으면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시간에 맞서는 경주가 시작된다. 기쁨에 찬 자신의 성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내기 위해 우르르 달아나는 아이들과 이들을 막기 위해 우르르 쫓아가는 부모들의 경주가.
부모들은 이 투쟁에서 자신들이 찾아낼 수 있는 지원과 동맹이면 뭐든 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어느 모로 보나 천성의 일부인 일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식들에 대한 부자연스런 요구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른들은 온갖 종류의 가족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압력과 제한과 한계들을 발명해냈고,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자신의 성욕을 부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러졌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어떻게 그토록 수치스럽고, 그토록 항상 제지당하고, 그토록 통제되고, 궁지에 내몰리고, 억제되고, 구속되고, 부정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저, 제 생각엔 여기서 약간 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정말이냐? 그럼 너는 부모가 자기 몸의 특정 부위에 정확한 이름조차 사용하지 않을 때 네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받을 충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그렇게 하는 데서 위안을 느끼는 너희 수준에 대해 아이에게 뭐라고 말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어디서 위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음........
그래....... 정말로....... “음”이다.
저, “우린 그런 말들은 그냥 안 씁니다.” 우리 할머니가 말씀하셨듯이요. “지지”나 “네 아랫도리”라고 하는 게 왠지 듣기에 더 낫거든요.
그런 오로지, 일상 대화에서 그 말들을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너희가 이 신체 부위들의 실제 명칭에 너무 많은 “혹”들을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이 왜 이런 식으로 느끼는지 모른다. 다만 그들은, 몸의 어떤 부위들은 “괜찮지 않다”, 그 부위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잘못”까지는 아니더라도 당혹스럽다는 인상, 대개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이들이 자라 10대가 되면,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그들은, 성욕과 임신의 관계와, 자신들이 낳은 아이는 자신들이 길러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아주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걸 듣게 되고, 따라서 이제 아이들은 성적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낄, 또 다른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순환은 완결된다.
이것은 너희 사회에 혼란과 적지 않은 재난을 불러왔다. 천성을 가지고 농락할 때, 으레 나타나는 결과는 재난이다.
너희는 성적 당혹과 억압과 수치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성적 위축과 성기능 장애, 그리고 폭력을 불러왔다.
하나의 사회로서 너희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위축되기 마련이고, 억누른 행위에 대해서는 기능장애를 겪기 마련이며, 가슴으로는 전혀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음을 알면서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심에서라도 폭력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프로이드가, 인간종이 지닌 그 엄청난 양의 분노는 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신체의 자연스럽고 기본적인 본능과 관심과 욕구들을 억눌러야 하는 데서 나온 뿌리 깊은 분노일 거라고 한 건 나름대로 정확했군요.
너희 정신과 의사들 중 단 한 사람만이 그 정도로 과감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좋게 느끼는 것에는 전혀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실제로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낄 때, 사람들은 으레 화를 내기 마련이다.
우선 사람들은 그렇게 명백하게 “나쁘기로” 되어 있는 것에 그렇게 좋은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를 낸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기만당해온 것일 뿐, 성욕은 멋지고 존경스럽고 영광스런 인간 체험이기로 되어 있었다는 걸 마침내 깨달을 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게 된다. 성욕을 억누르게 만든 부모와, 그것을 수치스러워 하게 만든 종교와 그런데도 감히 성욕을 느끼게 만든 모든 이성(異性)들과, 그것을 통제하는 사회 전체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런 것들이 성욕을 금지하도록 내버려둔 자신에게 화를 낸다.
이 억눌린 분노의 상당부분이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의 왜곡되고 오도된 도덕적 가치관들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기념비와 동상, 기념우표, 영화, 사진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일부 폭력 행위들은 찬미하고 칭송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부 사랑 행위들은 감추는, 아니 더 나쁘게 싸구려로 만드는 사회 속으로.
이 모든 것, 정말 이 모든 게 친부모가 육아까지 다 책임져야 한다는 단 하나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하지만 친부모가 육아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누가 책임진다는 겁니까?
공동체 전체가, 그 중에서도 특히 연장자들elders이.
연장자들요?
대부분의 진보된 종과 사회들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먹이고 훈련시키고, 지혜와 가르침과 그들 나름의 전통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주는 건 연장자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진보된 문명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부족의 연장자들이 아이를 기르는 덕분에, 짓누르는 책임감이나 부담감 같은 게 전혀 없고, 어린 나이에 자식 낳는 걸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 사회는 성적 억압이 뭔지 모른다. 또 그런 사회는 강간과 성도착증, 사회적-성적 기능장애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행성에 그런 사회들이 있습니까?
그렇다. 비록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런 사회들을 야만이라 여기는 너희들은 그것을 뿌리째 뽑아내고 동화시키려 해왔다. 하지만 소위 비야만적이라는 너희 사회는 아이들(그리고 같은 차원에서 아내와 남편들)을 재산, 개인 소유물로 여긴다. 따라서 친부모들은 아이 양육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소유물”이니 만치, 자신들이 보살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너희 사회가 지닌 문제들 중 다수의 근저에 깔린 뿌리 생각이 배우자와 자식들을 개인 소유물, 말하자면 “내 것”으로 보는 이런 관념이다.
나중에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 사이에서의 삶을 탐구하고 논의할 때, “소유권”이라는 이 주제 전반을 다루게 되겠지만, 여기서는 잠시 다음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신체적으로 아이 가질 준비가 된 연령대에 정말 감정적으로도 아이 기를 준비가 된 사람이 과연 누가 있는지.
진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3,40대가 되어도 아이 기를 경륜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길 기대해서도 안 된다. 사실 그들은 아직 자식들에게 심오한 지혜를 전해줄 만큼 충분히 어른으로 살지 않았다.
전에 그런 종류의 견해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도 그 중 한 사람이죠. 그는, “내가 19살이었을 때, 우리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35살이 되었을 때, 나는 노인네들이 그토록 많은 걸 깨우친 것에 감탄했다”고 했다더군요.
그가 완벽하게 포착했다. 너희의 젊은 시절은 진리를 모아들이기로 되어 있지, 절대 진리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아직 모아들이지도 못한 진리를 무슨 수로 너희 자식들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니 너희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진리인 남들의 진리, 즉 너희 아버지 어머니의 진리, 너희 문화의 진리, 너희 종교의 진리들을 그들에게 말해주는 것으로 메꾸려 할 것이다. 아직 찾고 있는 중인 자신의 진리만 빼고는 뭐든 가리지 않고.
너희가 이 행성에서 반세기 가량을 살 때까지도 너희는 여전히 자신의 진리, 자신에 대한 견해를 추구하고 시험하고 찾아내고 실패하고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너희는 자신의 진리에 자리잡고 안주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때 너희가 고개를 끄덕일 가장 큰 진리는, 아마도 불변의 진리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 삶 자체가 그러하듯 진리도 변하고 자라고 진화한다는 것, 그리고 너희가 진화과정이 멈췄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사실 그것은 멈춘 게 아니라 그제서야 참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 이미 그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50이 지났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좋다. 너는 이제 지혜로운 이, 연장자다. 이제 너는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 아니, 지금부터 10년쯤 후가 더 낫겠지. 자손을 길러야 하는 사람은 연장자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연장자들은 진리와 삶을 안다. 그들은 중요한 게 뭐고 중요하지 않은 게 뭔지 안다. 그들은 진실함과 정직함, 충실함, 우정, 사랑 같은 용어들이 뜻하는 바가 참으로 무엇인지 안다.
당신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을 알겠군요. 그걸 받아들이긴 어렵지만요. 하지만 우리가 자식들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해야 한다고 느낄 때, 우리 대부분이 “아이”에서 “학생”으로도 옮아가지 못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가르친 걸 자식들에게 가르치기로 마음먹는 거구요.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죄는 아들에게 이어진다. 심지어 7대 손까지도.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을 바꿀 수 있죠? 어떻게 해야 그런 순환을 끝낼 수 있나요?
육아를 존경스런 너희 노인네들 손에 맡겨라. 부모들에게는 원할 때마다 아이를 보게 하라. 원한다면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있지만, 아이를 보살피고 기르는 일을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지는 않게 하라. 연장자들이 제공하는 교육과 가치관을 가지고, 공동체 전체가 아이들의 신체적, 사회적, 영적 필요들을 채워주게 하라.
나중에 이 대화에서 우주의 다른 문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몇몇 새로운 생활모델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델들이 너희가 현재 짜놓은 생활방식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말은, 단순히 육아만이 아니라 너희의 생활방식 전체가 비효율적인 모델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서로에게서 멀어져왔다. 너희는 가족을 잘게 쪼갰고, 거대도시를 선호한 나머지, 소규모 공동체들을 해체했다. 이 대도시들에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책임 속에 전체에 대한 책임도 들어 있다고 보는 “부족”이나 집단, 혹은 씨족의 구성원들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사실 너희에게는 연장자가 없다. 어쨌든 손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전혀 없다.
연장자들에게서 멀어진 것보다 더 나쁜 건 그들을 제쳐버렸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힘을 빼앗고, 그들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렇다, 너희 사회의 구성원들 중 일부는 고령자들에게 화까지 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 수입에서 점점 더 많은 비율로 지불해야 하는 혜택들을 고령자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그들은 어쨌든 체제에 붙어 피를 빨고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건 사실입니다. 지금 사회학자들 중에는 기여는 점점 더 적게 하면서 요구는 점점 더 많이 한다고 노인들이 비난받는 걸 가지고 세대간의 전쟁을 예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인들은 이제 갈수록 많아질 겁니다. “베이비 붐” 세대가 경로우대층에 들어서고 있는데다가, 사람들의 수명도 더 길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희 연장자들이 기여를 하지 않는 건 너희가 그들더러 기여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들이 기업에 진짜로 뭔가 도움될 만한 일을 할 수 있는 바로 그때, 그들더러 직장에서 물러나길 요구했고, 그들의 참여가 삶의 진행에 뭔가 의미를 가져올 수 있었을 바로 그때, 그들더러 가장 능동적이고 의미 있는 삶의 참여에서 물러나길 요구했다.
육아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연장자들이 발판이나마 갖고 있던 종교에서까지, 너희 사회는 젊은이 우선주의와 노인 해고주의를 관철하는 사회가 되어왔다.
또한 너희 사회는 다원 사회라기보다는 단일 사회, 다시 말해 집단이라기보다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되어왔다.
너희는 사회를 원자화시키고 젊게 만든 대가로 그것의 풍요한 자원을 왕창 잃고 말았다. 지금 너희는 이 두 가지 없이 살고 있다. 감정적 심리적 빈곤과 박탈감 속에서 살아가는 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할게요. 우리가 이 순환을 끝낼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첫째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인정하라.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면서 살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게 그냥 그렇지 않은 체하고 있다. 너희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건 물론이고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이런 부정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니,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의 문명을 살펴볼 때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참으로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제발 너희 자신이 내 말을 듣게끔 그냥 내버려두어라. 내가 바라는 건 이것 하나뿐이다.
자, 평이하고 단순한 진리를 말할 시간이 왔다. 준비되었느냐?
예, 전 준비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당신에게 온 이유니까요. 이 모든 대화가 시작된 방식이기도 하구요.
진리란 대체로 편치 않은 것이다. 진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편안한 것일 수 있다. 그럴 때 진리는 편안케 해줄 뿐 아니라 영감을 준다.
저한테는 이 세 편의 대화 모두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부디 계속하십시오.
가슴을 두근거려도 좋을 만한, 낙관적으로 느껴도 좋을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나는 상황이 이미 변하기 시작했음을 보고 있다. 최근 들어 그 어느 때보다 인간종들 사이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대가족을 세우는 것에 더 많은 강조가 두어지고 있다. 너희는 점점 더 연장자들을 존경하면서, 그들의 삶에서, 또 그들의 삶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들을 끌어내고 있다. 이것은 무척 쓸모 있는 방향으로 큰 걸음을 내딛은 것과 같다.
그리하여 상황이 “바뀌고” 있다. 너희 문화는 이미 그 결음을 내딛었다. 이제 그것은 거기서 앞으로 나가고 있다.
이런 변화들을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너희는, 지금 식의 이런 사고행렬이 시작되는 육아방식 전체를 일거에 바꿀 순 없다. 그럼에도 한걸음 한걸음 미래를 바꿔갈 여지는 충분히 있다.
이 책을 읽는 것도 그런 걸음들 중의 하나다. 이 대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중요한 여러 지적들로 몇 번이고 되돌아 갈 것이다. 이런 반복은 우연이 아닐 것이니, 그것은 강조하기 위해서다.
너는 너희의 내일을 건설할 발상들을 내게 청했다. 이제 너희의 어제를 돌아보는 것으로 그것을 시작해보자.
2
과거와 미래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과거를 알 때, 너희는 가능한 모든 미래들을 더 잘 알 수 있다. 너는 내게 와서 너희 삶을 더 낫게 만들 방법을 물었다. 그렇다면 너희가 어떤 식으로 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는지 아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힘power과 강함strength,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또 나는 너희가 발명한 이 사탄 현상에 대해, 너희가 어떻게, 또 왜 그를 발명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신을 “그녀”가 아닌 “그”로 결정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너희 신화들이 나라고 말해온 존재가 아니라,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를, 너희더러 신화 대신 우주철학-삼라만상에 대한 참된 우주철학과 그것과 나와의 관계-을 기꺼이 집어들게 만들, 그런 방식으로 ‘내 존재’를 묘사하려 한다. 나는 너희에게 삶과, 그것의 작동 방식,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를 알려주려 한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이 모두를 다룰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알고 나면, 너희는 너희 종(種)이 창조한 것 중에서 무엇을 버리고 싶은지 결정할 수 있다. 우리 대화의 이 세 번째 부분, 이 세 번째 책은 새로운 세상 건설, 새로운 현실 창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아, 너희는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 안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다. 이제 자신을 풀어줄 때가 왔다.
너희는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들을 가두고, 누르며, 대단히 부자연스런 감정들로 바꿔왔고, 이런 왜곡된 감정들은 역으로 너희 세상에 불행과 죽음과 파괴를 가져왔다.
이 행성에서 오랜 세월, 너희 행동방식의 모델이 되어온 건 ‘자기 감정에 “빠지지” 마라’였다. 너희가 느끼는 게 서러움이라면 극복하고, 노여움이라면 틀어막아라. 너희가 느끼는 게 부러움이라면 부끄러워하고, 두려움이라면 넘어서라. 그리고 너희가 느끼는 게 사랑이라면, 통제하고 한정짓고 미뤄두고, 거기서 달아나라. 그것을 드러내는 상황을 막기 위해 너희가 해야 할 일이면 뭐든지 하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든.
이제 너희가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가 왔다.
사실 너희가 가둬온 건 성스런 너희 자신이다. 이제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가 왔다.
전 벌써 흥분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린 어떤 식으로 출발할 겁니까? 어디서 시작할 건가요?
그 모든 게 어떻게 해서 이런 식으로 되고 말았는지에 관한 짤막한 연구에서, 그러기 위해 너희 사회가 자신을 재조직하던 시기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지배종이 되어가면서, 감정을 드러내거나 때로는 감정을 지니는 것까지도 부적절하다고 결정했을 때가 이 시기다.
“사회가 자신을 재조직하던 시기”라뇨? 뭘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너희 역사의 전반부에 너희는 이 행성에서 모권제 사회로 살았지만, 그 후 그것이 부권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너희는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면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도 멀어졌다. 너희는 그런 건 “나약한 짓”이라고 규정했다. 남자들이 악마와 남성 신을 발명한 것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남자들이 악마를 발명했다고요?
그렇다. 사탄은 불가피하게 남자의 발명품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가서는 사회 전체가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감정기피와 “약자”Evil one의 발명은 전적으로 모권제에 맞선 남성 반역의 일부였다. 모권제 시기 동안 여자들은 만사를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지배했고, 모든 정부 공직과 모든 종교 요직, 상업과 과학과 학계와 의료계에서 모든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남자들은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무 권력도 없었다. 남자들은 자기 존재가지 정당화해야할 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의 난자를 수정시키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능력말고는 거의 중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개미나 일벌과 흡사하게 힘든 육체노동을 했고, 아이들을 생산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자들이 사회라는 직물 속에서 자신들이 설 더 넓은 자리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데만도 몇백 년의 시간이 걸렸고, 자기 씨족의 일에 참여하여, 공동체의 결정사항에 발언권을 갖거나 표결권을 갖는 데만도 몇 세기가 걸렸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그런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맙소사, 단지 어떤 성(性)을 가졌느냐에 따라, 한쪽 성의 구성원 전체에게 심지어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하게 한 사회가 실제로 있었다니, 정말 상상하기 힘들군요.
이런 문제에 대한 네 유머 감각이 마음에 든다. 사실 나도 그렇다. 계속해도 되겠느냐?
그럼요.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투표해서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또 몇 세기가 지나갔다. 그들은 문화면에서도 영향력 있고 유력한 모든 지위들에서 배제당해 있었다.
마침내 남자들이 그 사회에서 권위 있는 자리들을 차지했을 때, 그들이 마침내 아이 생산자와 사실상의 육체노예로서의 예전 지위를 넘어섰을 때 말입니다. 그때 그들은 여자들에게 불리하게 형세를 역전시키거나 하지 않고, 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받아야 할 존경과 힘과 영향력을 여자들에게도 당연히 그대로 인정했겠죠?
또 그런 식의 유머가 나오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끼여든 건가요?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런데 “악마”의 발명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힘power에 대해 몇 마디 얘기하고 넘어가자. 사탄을 발명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당신이 지금 지적하시려는 게 요즘 사회에서는 모든 힘을 남자들이 다 갖고 있다는 거죠. 그렇죠? 그렇다면 당신 이야기에 앞서 이런 일이 왜 생겼다고 보는지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당신은 모권제 시기의 남자들이 여왕벌에게 봉사하는 일벌과 흡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남자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고, 아이들을 생산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하셨고요. 그 순간 저는, “그래서 바뀐 게 뭐지? 남자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장담하지만 별로 바뀌지 않았노라고 말할 남자들이 아마 많을 겁니다. 남자들이 자신들의 “알아주지 않는 역할”을 계속하는 대가를 건져냈다는 사실만 빼고요. 지금 남자들은 그때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 있죠.
사실상 대부분의 힘을 갖고 있다.
좋아요. 대부분의 힘이라고 합시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보는 아이러니는 남자와 여자 양쪽 다가 남이 안 알아주는 일을 하는 쪽은 자신들인데, 온갖 즐거움을 다 누리는 쪽은 상대방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남자들은 자신들이 지닌 힘의 일부를 도로 가져가려는 여자들에게 화를 냅니다. 그 문화를 위해서 온갖 일을 다 하는 건 자기들인데,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힘까지 갖지 못하다니, 그건 저주받은 거라면서요.
여자들은 또 여자들대로 남자들에게 화를 냅니다. 자신들은 그 문화를 위해서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할 텐데,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 힘도 못 갖다니, 그건 저주받은 거라면서요.
네가 정확하게 분석했다. 남자와 여자 양쪽 다가 스스로 불러들인 비참이라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자신들의 실수를 반복하리라는 저주를 받고 있다. 그 저주는 남자나 여자 어느 한쪽이 삶이란 힘이 아니라 강함과 관련된 것임을 깨달을 때까지, 그리고 그 양족 다가 삶이란 분리가 아니라 합일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할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내면의 강함 (內强)은 합일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분리된 내강(內强)은 흩어져서 사람들이 자신을 약하고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따라서 힘을 찾아 투쟁하게 만든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사이의 골을 메워 분리의 환상을 끝내라. 그러면 너희는 자기 내면의 강함이라는 근원으로 되돌아가리니, 너희가 참된 힘,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으며 뭐든 가질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될 곳이 바로 여기다. 창조력은 합일이 만들어내는 내강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것은 너희와 너희 동료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너희와 너희 신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여기길 그만둬라. 합일의 내강에서 나오는 모든 참된 힘이 너희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너희 것-세상 전체로서, 그리고 그런 전체의 개별 부분으로서-이 되리니.
하지만 다음을 잊지 마라.
힘은 내강에서 나오지만, 내강은 설익은 힘raw power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거꾸로 알고 있다.
내강 없는 힘은 환상이고, 합일 없는 내강은 거짓이다. 인간종에게 도움되지 않았으면서도, 너희 종의 의식 깊숙이 새겨진 거짓. 너희는 내강이 개별성과 분리됨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실 신에게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분리된 것이야말로 너희가 겪는 모든 기능장애와 고난의 원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분리는 스스로 강함인 체해왔고, 너희 정치와 경제, 나아가 너희 종교까지도 그 거짓을 지속시켜왔다.
이 거짓이 온갖 전쟁과, 전쟁을 불러오는 온갖 계급투쟁의 발단이고, 인종간 성(性)간의 온갖 증오와, 증오를 불러오는 온갖 권력투쟁의 발단이며, 사사로운 온갖 분쟁과 분란들, 그리고 분란을 불러오는 온갖 내부투쟁의 발단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 거짓에 악착같이 매달린다. 그것이 아무리 너희를 익히 보던 곳으로 다시 데려간다 해도, 아니 때로는 그것이 너희를 몰락으로 데려갈 때조차도.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진리를 알라.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어떤 분리도 없다. 서로에게서도, 신에게서도, 존재하는 어떤 것에게서도.
나는 이 책에서 이 진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몇 번이고 관찰할 것이다.
무엇에서도, 누구에서도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 보라, 내일이면 세상이 치유되리니.
이것은 통서고금을 통틀어 최대의 비책(秘策)이다. 인간이 몇천 년 동안 찾아왔던 대답이 이것이고, 인간이 이루려고 애써왔던 해결책이 이것이며, 인간이 갈구해왔던 계시가 이것이다.
어떤 것과도 분리되지 않은 듯이 행동해보라. 그러면 너희는 세상을 치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함께 하는 힘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하라.
고맙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럼 되돌아가서, 처음에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할 힘을 가졌는데 지금은 그게 뒤바뀌었고, 남자들은 부족이나 씨족의 여성 지도자에게서 이 힘을 뺏아오기 위해 악마라는 걸 발명했다, 이런 이야긴가요?
그렇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이 지닌 유일한 도구가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별로 변한 게 없군요. 남자들은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때로는 이성에 호소해보려고 하지도 않고 아예 처음부터 두려움을 이용하죠. 특히나 덩치 크고 힘센 남자들(혹은 덩치 크고 힘센 국가들)이라면요. 어떤 때는 힘이 정의고, 강함은 힘이라는 게 남자들 몸속에 완전히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세포화된 것처럼요.
그렇다. 모권제가 전복되고 나서는 줄곧 그런 식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되었습니까?
이 짧은 역사가 이야기하려는 게 바로 그거다.
그렇다면 계속하십시오.
모권제 시기 동안 남자들이 지배권을 얻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할 더 많은 힘이 남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여자들에게가 아니라, 다른 남자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삶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고, 남자들이 자신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줄 몇 가지 육체노동을 하고 나서 성관계를 갖는 식으로 그럭저럭 그날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보낼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마당에, 힘없는 남자들이 다른 힘없는 남자들에게 권력을 추구하라고 납득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을 찾아낼 때까지는.
두려움은 여자들이 고려하지 못했던 것들 중 한 가지였다.
이 두려움이란 건 가장 불만 많은 남자들이 뿌린 의심의 씨앗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남자들 중에서 주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근력도 없고 별 매력도 없어서 여자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남자들.
그리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그들의 불평을 성적 좌절감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으로 보고 신경 쓰지 않았을 거란 건, 제가 장담하죠.
정확하다. 그럼에도 그 불평분자들은 자신이 지닌 유일한 도구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심의 씨앗에서 두려움을 키워내고자 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만일 여자들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지? 여자들의 세상 경영 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면? 그리고 실제로 그런 방식 때문에 사회 전체, 인간종 전체가 너무나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절멸되고 마는 결과에 이른다면?
이것은 대다수 남자들이 상상도 못했던 의문이었다. 여하튼 여자들은 여신에게 이르는 직통회선을 갖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그들은 신체상으로 여신을 그대로 본받지 않았는가? 게다가 여신은 선하지 않은가?
이 교의는 너무나 강력했고, 너무나도 속속들이 배어 있어서, 남자들은 모권제 사람들이 상상하고 숭배했던 위대한 어머니라는 한없는 선량함에 맞서기 위해, 악마, 즉 사탄을 발명하는 것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악자” 같은 게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납득시키려 했습니까?
그들 사회의 구성원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있던 한 가지가 “썩은 사과” 이론이었다. 여자들조차도 아무리 어떻게 해보려 해도 그냥 “못됐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알 듯이 특히 남자 아이들 중에는 그런 통제불능인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신화가 만들어졌다.
하루는 여신 중의 여신인 위대한 어머니가 착하지 않다는 게 드러난 한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는 착해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왕위를 놓고 자기 어머니에게 대항했다.
아무리 사랑 많고 용서 잘하는 어머니라도 이것만은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그 아이는 영원히 추방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더 교묘한 변장과 복장을 하고 계속해서 나타났다. 심지어 때로는 자신이 위대한 어머니인 체하면서.
이 신화는 남자들이 “우리가 숭배하는 여신이 진짜 여신인지 어떻게 알아? 그게 이제는 다 자라 우리를 농락하려는 그 나쁜 아이일 수도 있잖아?”라고 물을 근거를 마련했다.
이런 책략으로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이 불안해 하도록 만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여자들이 자신들의 걱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화를 내면서 남자들더러 모반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너희가 지금 사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이렇게 해서 창조되었다. “나쁜 아이”에 관한 신화를 창조하고, 그런 피조물의 존재 가능성을 씨족 여자들에게까지 확신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그 나쁜 아이가 남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남자는 열등한 종자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책략은 다음과 같은 신화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 “나쁜 아이”가 남자라면, 그 “못된 놈”이 사내라면, 누가 그를 제압할 수 있지? 여자인 여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건 분명하잖아?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남자들은 약삭빠르게도, 지혜와 통찰력, 명석함과 자비심, 계획성과 심사숙고라면 여자가 더 뛰어나다는 걸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하지만 야만스런 힘이 문제되는 상황이라면 남자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전의 여신 신화에서 남자들은 그냥 상대역이었다. 노복으로 봉사하면서, 여신의 장대함을 찬양하려는 자신들의 지지 않는 욕망을 육욕의 차원에서 충족시키곤 했던, 여자의 짝.
하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여신을 보호하면서 적을 막아낼 수도 있는 남자가. 이런 식의 변화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어났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사회들은 영적 신화들 속에서 남자들을 상대역인 동시에 보호자로 보기 시작했다. 이제 누군가에게서 여신을 지켜야 할 필요가 생긴 이상, 사회가 그 같은 보호자를 필요로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남성이 보호자에서, 이제 여신 옆에 나란히 서는 동등한 짝으로 뛰어오른 것은 별반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남신(男神)이 만들어졌고, 한동안은 남신들과 여신들이 함께 신화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다시 서서히 남신들에게 더 큰 역할이 주어졌다. 방어를 위한 필요, 힘을 위한 필요가 지혜와 사랑을 위한 필요를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화들 속에 새로운 종류의 사랑, 야만스런 힘으로 보호하는 사랑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보호하는 것을 탐내기도 하는 사랑, 자기 여신을 질투하는 사랑, 여자들의 욕정에 그냥 봉사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죽는 사랑이었다.
신화들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신들을 놓고 다투고 싸우는, 엄청난 힘을 지닌 남신들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질투하는 신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건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기다려라. 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중이니까. 하지만 아직 좀 더 남은 이야기가 있다.
오래지 않아 남신들의 질투는 여신들만이 아니라 온갖 영역의 온갖 창조물들로 넓혀져갔다. 이 질투 많은 신들은 요구했다. 다른 어떤 신도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라. 그러는 편이 좋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남자들은 가장 힘있는 종자였고, 남신들은 가장 힘센 남자들이었기에, 이 새로운 신화를 놓고 다툴 여지는 거의 없는 듯이 보였다.
다투다가 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노하는 신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신성(神性)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제 신성은 온갖 사랑의 근원이 아니라 온갖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주로 여자였던 사랑의 모델, 예를 들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고 그렇지, 그리 똑똑하지는 못해도 결국에 가서는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남편에 대한 부의 사랑처럼 끊없이 인내하는 사랑이라는 모델은, 어떤 간섭도 참지 못하고, 어떤 무관심도 용납하지 못하며, 어떤 불쾌함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요구 많고 참을성 없는 남신의 질투하는 사랑, 분노하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또한 한없는 사랑을 경험하고 자연법칙에 온순하게 복종하면서 흥겨워하던 여신의 웃음은, 사랑을 영구히 한정짓고 자연법칙을 정복하겠노라 선언하면서 전혀 흥겨워하지 않는 남신의 근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너희가 지금까지 숭배하는 신이고, 바로 이것이 너희가 지금 그 자리로 오게 된 과정이다.
굉장하군요. 흥미진진하면서도 굉장해요. 그런데 뭘 지적하시려고 제게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시는 겁니까?
너희 자신이 그 모든 걸 만들어냈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힘이 정의”라거나 “힘이 곧 강함”이라는 발상이 생겨난 건 너희 남자들이 창조해낸 신학상의 신화들 속에서다.
분노하고 질투하고 화내는 신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희가 뭔가를 충분히 오랫동안 상상하면 그것은 실재가 된다. 너희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실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의 실체, 혹은 실제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렇다면 실제로 벌어지는 건 뭔가요?
실제로 벌어지는 건, 너희 영혼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자기 체험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이 목적을 위해, 즉 체험으로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해(즉 자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다가 영혼은 육신의 즐거움들-섹스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즐거움들-을 찾아냈고, 이런 즐거움에 빠진 나머지, 점차 영적 즐거움을 잊고 말았다.
하지만 영적 즐거움 역시 즐거움이다. 그것은 몸이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인데도, 영혼은 이것을 잊고 말았다.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역사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당신이 대화에서 전에 언급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어요. 다시 역사로 되돌아가시면 안 될까요?
사실 우리는 역사에서 벗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든 걸 함께 묶으려 하고 있다. 보다시피, 그전 정말 아주 단순하다. 너희 영혼의 목적, 그것이 몸으로 오는 까닭은 ‘참된 자신’이 되고 ‘참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혼은 이렇게 하기를, 자신과 자신의 체험을 알기를 갈구한다.
알고자 하는 이런 갈구가 바로, 되기를 추구하는 삶이다 This yearning to know is life seeking to be. 이것은 표현하고 싶어하는 신이다. 너희 역사 속의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려는 게 이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체험하는 도구로 삼은 것은 너희 영혼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 체험이 너무 많이 제한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그렇지 않을 때를 빼고는 그렇겠지. 그건 너희에게 달렸다. 너희가 택하는 수준이 어떤 것이든, 그 모든 수준에서 너희는 내 표현이고 내 체험이 된다. 대단히 장대한 표현을 택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고귀한 표현을 택했던 사람은 없었다. 물론 똑같이 고귀한 표현을 택했던 사람들은 더 있지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한 예가 아니라고요? 그는 육화된 신이잖습니까?
그리스도는 가장 고귀한 예다. 그렇다고 그가 가장 고귀한 상태에 도달한 유일한 예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육화된 신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신이 된 유일한 인간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육화된 신”이다. 너희는 자신의 지금 형상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제한할까 봐 염려하지 마라. 그것이 나를 얼마나 제한할지 염려하지 마라. 나는 제한되지 않고 있고, 지금까지도 제한되지 않았다. 너는 내가 택한 형상이 오직 너희뿐이라 생각하느냐? 너는 내가 내 본질로 물들인 생물이 오직 너희만이라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꽃과 모든 무지개, 하늘의 모든 별 속에 내가 있고, 그 별들 둘레를 도는 모든 행성, 그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내가 있다.
나는 바람의 속삭임이고, 너희 햇볕의 따스함이며, 눈송이들마다의 믿기 힘든 독창성이자 놀라운 완벽이다.
나는 솟구쳐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당당함이고, 들녘 암사슴의 지순함이며, 사자의 용기고, 고대인들의 지혜다.
그리고 나는 너희 행성에서 볼 수 있는 표현 양태들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냥 알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나란 존재가 너희만으로 한정되거나, 내 ‘신성한 본질’, 이 가장 ‘성스런 영성’이 너희에게만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건방진 생각, 오해에서 나온 생각이리니.
나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한다. 모든 것 속에. 전부임은 내 표현이고 온전함은 내 본성이니, 나 아닌 것이 없고, 나 아닌 뭔가는 존재할 수 없다.
내 축복받은 창조물인 너희를 창조한 목적은 자기 체험을 창조하는 자로서 나 자신을 체험하기 위해서다.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오직 아주 특별한 생물만이 창조할 수 있는 신의 한 측면이 창조자로서의 내 측면이다.
나는 너희 신화 속의 신도 아니고 여신도 아니다. 나는 창조주다. 창조하는 자.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을 자신의 체험으로 알고자’ 한다.
내가 눈송이를 통해 내 디자인의 완벽함을 알고, 한 송이 장미를 통해 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알 듯이, 나는 너희를 통해 내 창조력을 안다.
나는 너희에게 내 체험을 의식하면서 창조할 수 있는, 내가 지닌 능력을 주었다.
너희를 통해 나는 내 모든 측면을 알 수 있다. 눈송이의 완벽함과, 장미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사자의 용기, 독수리의 당당함,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거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들에 보태 한 가지-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의식-를 더 심었다.
그러기에 너희는 자의식을 갖게 되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너희는 자신이 자신임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바로 그런 존재다.
나는 자신이 자신임을 자각하는 나 자신이다.
이것이 ‘나는 나다’ I Am That I Am라고 할 때의 의미다.
너희는 자각이라는 내 부분이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체험하는 것(과 내가 너희를 통해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을 창조하는 나다.
나는 쉬지 않고 나 자신을 창조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신이 불변이 아니란 뜻입니까? 다음 순간에 당신이 무엇이 될지는 당신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너희가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터놓고 말할게요. 이 모든 걸 제가 정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다. 너희는 ‘내’가 되기를 선택하는 나다.
너희는 나다. 나인 것이 되기를 택하고, 내가 되려는 것을 택하는.
너희 모두는 이것을 집단으로 창조하고 있다. 너희 각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고 그것을 체험할 때, 너희는 개인 차원에서 이렇게 하고 있고, 너희가 공동으로 창조하는 집단 존재일 때, 너희는 집단으로 이렇게 하고 있다.
나는 너희 다수의 집단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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