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4)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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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이제 주제를 바꿔서 지구 재난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은데요. 그런데 그러기 전에 잠시 살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이상 듣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때로는 제가 같은 걸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주 좋다! 너는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이건 설계에 따른 것이다.
이 메시지는 용수철과 같다. 용수철은 감겨 있을 때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한 원이 다른 원 위에 포개져서, 그것은 말 그대로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듯이 보인다. 용수철이 풀렸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그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나선을 그리며 뻗어나간다는 걸 알 것이다.
그렇다. 네가 옳다. 나는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 중 상당수를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아니 때로는 같은 방식으로도. 네가 본 게 정확하다.
네가 이 메시지를 끝낼 때가 되면 너는 그것의 핵심사항들을 아마 글자 그대로 암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좋습니다. 됐습니다. 이제 앞으로 나가서요. 제가 “신과 직통회선”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듯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우리 지구의 운명을 알고 싶어하고요. 제가 전에도 이런 질문을 했다는 건 알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듯이 지구는 대격변을 겪게 됩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 많은 심령술사들이 보는 건 뭡니까? 만들어낸 환영인가요?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변해야 합니까? 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안됐지만 그래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겁니까?
나로서는 그런 물음들을 다루게 돼 기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앞으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고요?
그렇다. 나는 전에 시간에 대해 몇 번 설명하면서 이미 그 답들을 네게 주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다”고 하셨던 부분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모든 일”이란 게 뭡니까?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 일어났습니까? 그리고 뭐가 일어난 겁니까?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모든 가능성이 사실로 존재한다. 완료된 사건들로.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저는 아직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것을 너희가 더 잘 연상할 수 있는 상황으로 표현해주마. 이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되는지 보자. 너는 컴퓨터 비디오게임을 하기 위해 CD-ROM을 쓰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
예.
그렇다면 너는 그 아이가 조이스틱으로 만들어내는 온갖 동작들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컴퓨터가 어떻게 아는지 자문해본 적이 있느냐?
그럼요. 사실 전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디스크에 있다. 컴퓨터가 아이가 만들어내는 온갖 동작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아는 건 모든 가능한 동작이 그에 따른 적합한 반응과 더불어 디스크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하군요. 거의 초현실적인데요.
뭐가? 모든 끝냄과 그 끝냄을 불러오는 모든 전환과 변형이 디스크에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게? 거기에 “무시무시한” 건 전혀 없다. 그건 그냥 기술이다. 그리고 비디오게임의 기술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건 우주의 기술을 볼 때까지 미뤄라!
우주 수레바퀴를 그런 CD-ROM으로 생각하라. 모든 끝냄이 이미 존재한다. 우주는 그냥 이번에는 너희가 어느 쪽을 택할지만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이기든 지든, 아니면 비기든 간에 게임이 끝나고 나면, 우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계속할까요?”
네 컴퓨터는 네가 이기든 지든 신경 쓰지 않기에, 네가 “그것의 감정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네게 다시 게임할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모든 끝냄이 이미 존재하니, 네가 어떤 끝냄을 체험하는가는 네 선택에 달렸다.
그렇다면 신은 CD-ROM일 뿐이란 겁니까?
꼭 그런 식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 대화 전체를 통해서 나는 누구라도 나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들을 써서 개념들을 구체화시키려고 해왔다. 그런 점에서 나는 CD-ROM이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많은 점에서 삶은 CD-ROM과 비슷하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고, 모든 가능성이 이미 일어났다. 이제 너희는 어느 것을 체험할지 고를 시점에 이르렀다.
이것은 지구 격변에 대한 네 질문과 곧바로 연결된다.
많은 심령술사들이 지구 변화에 대해 말하는 건 사실이다. 그들은 “미래” 쪽의 창문을 열어 그것을 보았다. 문제는 그들이 본 것이 어느 “미래”인가다. CD-ROM에서 게임의 끝냄이 그러하듯, 하나 이상의 버전version이 있다.
한 버전에서는 지구가 대격변에 처하겠지만, 다른 버전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모든 버전이 이미 일어났다. 잊지 마라, 시간은-
-압니다, 알아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맞았다. 그리고?
따라서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또 맞았다. 지금껏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바로 지금 존재하고 있다. 컴퓨터 게임에서 그 모든 동작이 지금 이 순간 디스크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니 심령술사들의 지구 종말 예언이 실현되면 재미있겠다고 여긴다면, 너희의 모든 주의를 그것에 맞춰라. 그러면 그것을 너희에게 끌어올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너희가 다른 현실을 체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초점을 맞춰라. 너희가 자신에게 끌어올 결과가 그것이 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당신은 지구 변동이 일어날지 아닐지 말씀해주시지 않을 작정이군요. 그렇죠?
나는 너희가 내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로 너희가 결정할 일이다.
2,000년 컴퓨터 문제는 어떻습니까? 요즘 와서 소위 “Y2K”고장이 우리 사회경제 체제에 엄청난 재난을 불러오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너는 무엇을 말하느냐? 너는 무엇을 선택하느냐? 너는 자신이 이런 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느냐? 네게 말하건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 당신이 말씀해주시 않으시렵니까?
나는 너희 미래를 예언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할 수 있는 최대치다. 이것은 누구라도 너희에게 말할 수 있는 최대치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지금 가는 바로 그곳에 이를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가고 있는 그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바꿔라.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무슨 수로 제가 그런 엄청난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심령사들이나 영적 “권위자”들이 예언하는 이 모든 재난을 마주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내면으로 가라. 너희 내면에 있는 지혜의 자리를 찾아라. 이것이 너희에게 뭘 해달라고 부탁하는지 알아보고, 그런 다음 그것을 하라.
만일 그것이 지구 격변을 불러올 수 있는 환경남용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하라고 너희 정치가와 산업가들에게 요구하는 걸 뜻한다면, 그렇게 하라. 만일 그것이 Y2K 문제를 함께 해결하도록 너희 공동체 지도자들을 불러모으는 걸 뜻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만일 그것이 그냥 네 길을 걸으면서, 날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보내 문제를 일으킬 돌연한 공포 속에 네 주위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걸 뜻한다면, 그렇게 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사건으로도 “죽을” 수 없으니, 아무것도 겁낼 필요가 없다. 펼쳐져가는 ‘과정’을 자각하면서 만사가 너희를 위해 괜찮아지리란 걸 차분히 알라.
모든 것들의 완벽과 접하길 구하라. 너희가 ‘참된 자신’을 창조하기 시작할 때,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는 바를 정확히 체험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 정확히 있게 될 것임을 알라.
모든 것에서 완벽을 보는 것, 이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것에서 “벗어나려” 애쓰지 마라.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된다. 나는 1권에서 여기에 대해 이미 말했고, 그건 사실이다.
미래에서 “보는” 것이나 미래에 대해 “들은” 것을 놓고 슬퍼하는 건 “완벽 속에 머물지” 못해서다.
또 다른 충고는요?
찬양하라! 삶을 찬양하고, 자신을 찬양하라! 예언들을 찬양하고, 신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게임을 즐겨라.
그 순간이 무엇을 가져올 것처럼 보이든, 그 순간에 기쁨을 가져와라. ‘너희 자신’이 기쁨이고, 너희는 언제나 기쁨일 것이기에.
신은 불완전한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만일 신이 불완전한 뭔가를 창조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너희는 신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니 찬양하라. 완벽을 찬양하라! 웃고 찬양하고, 오직 완벽만을 보라. 그러면 남들이 불완전이라 부른 것이 너희에게 불완전한 어떤 방식으로도 너희를 건드리지 않으리니.
제가 지구 자전축이 바뀌거나, 운석에 짓뭉개지거나, 지진으로 짜부라지거나, 혹은 Y2K의 히스테리컬한 혼란에 휘말리는 걸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너는 그중 어떤 것이든 그것이 주는 모든 부정적인 영향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다.
그건 제가 당신에게 물었던 게 아닌데요.
하지만 내가 대답했던 건 그것이다. ‘과정’을 이해하고, 그 모든 것의 완벽을 보면서, 미래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라.
그 평온함, 그 태연함, 그 고요함이, 다른 사람들이라면 “부정적”이라고 불렀을, 대부분의 체험과 결과들에서 너를 벗어나게 해주리니.
이 모든 것에서 당신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죠? 당신이 전혀 “신”이 아니라면요? 단지 내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데서 나온 과잉작품에 불과하다면요?
아, 다시 또 그 문제냐?
글쎄, 그렇다면 어떻게 하냐고?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너는 이보다 더 낫게 사는 법을 생각할 수 있느냐?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건, 행성 범위의 재난을 말하는 이들 긴박한 예언들을 마주해서 고요히 머물고, 평온하게 머물고, 태연하게 머문다면, 너희는 가능한 최상의 결과를 얻으리라는 게 전부다.
설사 내가 신이 아니라 해도, 내가 그 모든 걸 꾸며내는 그냥 “너”라 해도, 네가 이보다 더 나은 충고를 얻을 수 있겠느냐?
아뇨, 그럴 것 같지 않군요.
그러니 여느 때처럼 내가 “신”이든 아니든 아무 차이도 없다.
그냥 이것을 가지고, 이 세 권 모두에 실린 정보들을 가지고, 지혜롭게 살아라. 아니면 네가 나아갈 더 나은 길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라.
설사 이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진짜로 그냥 닐 도널드 월쉬일 뿐이라 해도, 너는 여기서 다루는 그 모든 주제에서 이보다 더 나은 충고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런 식으로 봐라, 내가 말하는 신이거나, 이 닐이라는 친구가 아주 영리한 녀석이라고 말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는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가 진짜 신이라고 확신했더라면, 제가 좀 더 새겨들었을 거란 거죠.
오, 정말 우스운 이야기군. 나는 백 가지 다른 형태로 천번에 걸쳐 메시지를 보냈건만, 너는 그 대부분을 무시했다.
예,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랬을 거라고?
좋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시하지 마라. 너는 자신을 이 책으로 데려온 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바로 너다. 그러니 네가 신에게 귀 기울일 수 없다면, 자신에게 귀 기울여라.
아니면 내 친애하는 심령술사에게나.
아니면 네 친애하는 심령술사에게나.
이젠 절 놀리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덕분에 제가 논의하고 싶었던 또 다른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알고 있다.
아신다고요?
물론이다. 너는 심령술을 논의하고 싶어한다.
당신이 어떻게 아시죠?
내가 심령술사다.
맞아요. 전 당신이 그렇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심령술사들의 어머니입니다. 당신이라면 그 분야 최고수고, 왕초고, 일인자고, 위원회 의장감이죠.
내 아들아, 너는....... 잘....... 이해하고 있다.
이제 5달러 주십시오.
멋지군, 형제. 계속해보게.
그러니까 제가 알고 싶은 건 “심령력(心靈力)”이 뭔가라는 겁니다.
너희 모두가 소위 “심령력”이란 걸 갖고 있다. 사실 그것은 육감이다. 그리고 너희 모두가 “온갖 것에 대해 육감”을 갖고 있다.
심령력이란 너희의 한정된 체험에서 빠져 나와 더 넓은 시야 속으로 들어가는 능력에 불과하다. 물러서는 능력, 너희가 자신이라 여기는 한정된 개인으로서 느꼈을 것보다 더 많이 느끼는 능력, 그 혹은 그녀가 알았을 것보다 더 많이 아는 능력, 그것은 너희 주위 어디에나 널려 있는 더 큰 진리 속으로 물길을 뚫는 능력, 다른 에너지를 느끼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발달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달”이 맞는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근육과 같은 것이어서, 너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너희 중 일부만이 그것을 발달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그것은 발달되지 않은 채, 훨씬 쓸모 없이 방치된다.
심령 “근육”을 발달시키려면, 그것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것을 써라. 날마다, 끊임없이.
그 근육은 지금 거기에 있지만, 작고 약하다. 그것은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따금 직관이 너희를 “때려도” 너희는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뭔가에 대한 “예감이 들어도” 너희는 그것을 무시한다. 꿈을 꾸거나 “영감”을 느껴도, 빈약한 주의만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그것을 그냥 흘려 보낸다.
고맙게도 너는 이 책에 대해 가졌던 그 직관의 “때림”에는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 이 문장들을 읽고 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자신이 우연히 이 글들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어쩌다가?
그러니 심령“력”을 발달시키는 첫 번째 조치는, 네가 그것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쓰는 것이다. 네가 갖는 모든 예감, 네가 느끼는 모든 느낌, 네가 경험하는 모든 직관의 “때림”에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를!
그런 다음에는 네가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하라. 네 마음이 거기서 벗어나라고 속삭이지 못하게 하고, 네 두려움이 너를 거기서 끌어당기지 못하게 하라.
네가 두려워하지 않고 직관에 따라 더 많이 행동할수록, 네 직관은 너를 더 많이 도와주리니.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거늘, 너는 이제야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구나.
하지만 저는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주차공간 식의 심령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진짜 심령력을 말하는 겁니다. 미래를 내다보거나,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관해서 알려주는 그런 능력 말입니다.
내가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그거였다.
이 심령력은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그걸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합니까? 어떤 심령술사가 예언을 했을 때, 제가 그 예언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내 미래는 바위처럼 고정되어 있습니까? 생판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사람에 대해 아는 심령술사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겁니까? 만일-
잠깐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네 가지 질문이 있다. 좀 속도를 늦추어서 한번에 하나씩 다루도록 하자.
좋습니다. 심령력은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심령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네게 이해시켜 줄, 심령 현상의 법칙 세 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복습해보자.
1. 모든 생각이 에너지다.
2.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
3. 모든 시간이 지금이다.
심령술사는 이런 현상들이 만들어내는 체험-진동-에 자신을 연 사람이다. 그것은 마음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때도 있고, 말의 형태로 생각을 이룰 때도 있다.
심령술사는 이런 에너지들을 느끼는 데 숙달되어 간다. 이 에너지들은 워낙 가볍고, 워낙 순식간에 스쳐가고, 워낙 엷어서, 처음에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여름밤의 부는 듯 마는 듯한 산들바람이 네 머리카락을 건드렸는가 싶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듯이, 아득히 멀리에서 뭔가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는가 싶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듯이, 눈가를 휙 하고 스쳐가는 흐릿한 영상이 거기 있었노라고 맹세라도 하고 싶지만 머리를 들어 쳐다보면 이미 없어졌듯이, 사라졌다! 그게 과연 거기에 있기나 했던가?
초보 심령술사들이 항상 하는 질문이 이것이다. 하지만 숙달된 심령술사는 절대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대답을 내쫓는 것이고 정신mind을 끌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령술사들이 절대 하고 싶지 않는 일이 이것이다. 직관은 정신 속에 살지 않는다. 심령술사가 되려면 너희 정신에서 벗어야 한다. 직관은 심령psyche 속에, 영혼 속에 살기 때문이다.
직관은 영혼의 귀다.
영혼이야말로 유일하게 생명의 가장 희미한 진동들까지 “잡아내고”, 이 에너지들을 “느끼며”, 즉석에서 이 파장들을 감지하고, 그것들을 해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예민한 도구다.
너희는 오감이 아니라 육감을 가지고 있다. 육감이란 후각과 미각, 촉각, 시각, 청각, 그리고........ 지각sense of knowing이다.
“심령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렇다.
네가 생각을 할 때마다, 생각은 에너지를 내보낸다. 생각은 에너지다. 심령의 영혼이 잡아내는 것이 이 에너지다. 하지만 진짜 심령술사는 그 에너지를 해석하려고 멈춰서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그 에너지가 뭣처럼 느껴지는지 그냥 불쑥불쑥 뱉어내기만 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심령술사는 너희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줄 수 있다.
너희가 지금껏 가졌던 모든 느낌이 너희 영혼 속에 들어 있다. 너희 영혼은 너희가 느낀 모든 느낌들의 총합이다. 그것은 저장소다. 너희가 그 느낌들을 그곳에 저장하고 나서 몇 년의 세월이 지났더라도, 진짜로 열린 심령술사라면 이 “느낌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느낄” 수 있다. 그건 모두가 지금이기 때문이고-
시간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심령술사는 너희 “과거”를 너희에게 말해줄 수 있다.
“내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 일어난 모든 일이 에너지 파장을 내보내, 우주감광판 위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을 남긴다. 심령술사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이건 사실이다- “내일”의 영상을 보거나 느낀다. 이것이 일부 심령술사가 “미래”를 말하는 방식이다.
생리학상으로 어떻게 이렇게 되느냐고? 아마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심령술사는 강렬한 집중을 통해 사실상 자신의 아(亞)분자 성분을 파견하고 있다. 그의 “생각”-네가 이 표현을 원한다면-은 몸을 떠나 공간 속으로 쌩~하고 날아간다. 그것은 빙 돌아서, 네가 아직 체험하지 않은 그 “지금”을 멀리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충분히 빨리 날아간다.
아분자의 시간여행이군요!
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아분자의 시간여행이라구요!
좋~았어. 우린 이걸 버라이어티 쇼로 바꾸기로 결정한거다.
아노, 아뇨. 얌전히 있을게요. 약속합니다........ 진짜로요. 계속하시죠. 전 정말로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었거든요.
좋다. 심령술사의 그 아분자 부분이 집중으로 얻은 상(像)의 에너지를 흡수한 다음, 그 에너지를 가지고 다시 심령술사의 몸으로 쌩~하고 돌아오면, 심령술사는 이따금 전율하면서 “영상을 얻거나” “느낌을 느낀다”. 그는 아무런 자료 “처리”도 하지 않고, 단지-그리고 즉석에서-그것을 묘사하는 데만 온힘을 기울인다. 그 심령술사는 자신이 “생각하거나” 갑자기 “보거나” “느끼는” 것이 뭔지 묻지 않으면서, 그것이 가능한 한 건드려지지 않고 그냥 “빠져나가게” 놔두는 법을 배운 것이다.
몇주가 지나 영상으로 보였거나 “느껴진”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 사람들은 그 심령술사를 족집게라 부른다. 그리고 물론 그건 사실이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어째서 “틀린 예언들”이 나올 수 있는 겁니까? 다시 말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심령술사는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에 관찰된,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 중 하나를 흘끗 보고 내놓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읽는 것이야말로 심령술의 영원한 화두다. 그는 얼마든지 쉽사리 또 다른 선택, 예언과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순간은 모든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포함한다. 지금 와서는 이미 여러 번 설명한 셈이지만,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백만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남은 건 오직 너희가 어떤 인식perception을 선택하는가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식의 문제다. 인식을 바꿀 때, 너희는 생각을 바꾸고, 생각은 너희의 현실을 창조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너희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결과가 이미 너희를 위해 거기에 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 아는 것뿐이다.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대답해주리라”고 했을 때의 의미가 이것이다. 사실 너희의 기도는 기도를 내놓기도 전에 “응답받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도한 것을 전혀 얻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까?
이 문제는 1권에서 다루었다. 너희가 얻는 건 너희가 청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너희가 창조한 것이다. 창조는 생각을 뒤따르고, 생각은 인식을 뒤따른다.
마음을 뜨끔하게 하는 이야기군요. 이 문제는 전에도 다뤘는데 그래도 여전히 뜨끔해지는군요.
그래도 그렇지? 계속해서 그 문제로 가는 게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 번 듣다보면 너는 그것을 마음으로 감쌀 기회를 갖게 되고, 그러고 나면 네 마음이 “뜨끔거리지 않게” 된다.
만사가 지금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다면, 그 모든 것들 중에서 내 “지금” 순간에 내가 체험하는 부분을 정해주는 건 뭡니까?
네 선택들, 그리고 네 선택들에 대한 네 믿음이. 그런 믿음을 만들어내는 건 특정 주제에 대한 네 생각들이고, 그런 생각들은 네 인식에서, 다시 말해 “네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러기에 심령술사들은 네가 “내일”을 놓고 지금 어떤 선택을 내리고 있는지를 보고, 그 선택이 마지막까지 펼쳐졌는지를 본다. 하지만 참된 심령술사라면 그게 꼭 그런 식으로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 결말을 바꿀 수 있다.
사실 전 이미 가졌던 체험을 바꿀 작정입니다.
정확하다! 이제 너는 그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이제 너는 역설 속에서 사는 법을 이해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이미 일어났다면” 그건 누구에게 “일어난” 겁니까? 그리고 제가 그걸 바꾼다면, 그 바뀜을 체험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시간선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 이상의 “너”가 있으니, 이 모든 게 2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너더러 그것을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구나. 그러고 나서 거기에 있는 것을 여기에 있는 것과 결합시켜라.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
좋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하지만 저는 이 심령술을 소재로 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많은 사람들이 심령술사라고 자처합니다. 어떻게 해야 사이비와 진짜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누구나 “심령술사”다. 그러니 그들 모두가 “진짜”다. 네가 살펴보고 싶어하는 건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이 너를 돕고자 하는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지.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심령술사들, 소위 “직업적 심령술사들”은 흔히 자신들의 심령력으로 어떤 일을 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잃은 애인을 돌아오게 하고”,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심지어는 살을 빼도록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복채를 낼 때만. 그들은 네 상사든 네 애인이든 네 친구든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읽어서”, 그들에 관한 온갖 이야길 다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거나 가져오시오. 목도리든 사진이든 필체 견본이든 말이오.”
누구나 흔적, “심령 지문”, 에너지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고, 진짜 민감함 사람이라면 이것을 느낄 수 있기 마련이니, 사실 그들은 그 사람들에 관해 네게 말해줄 수 있다. 종종 꽤 많은 것을.
하지만 믿을 만한 직관자라면 절대 다른 사람을 네게 돌아오게 해주거나, 어떤 사람의 마음을 바꿔주거나, 자신의 심령“력”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겠노라고 제안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재능을 발달시키고 사용하는 데 자기 인생을 바친 참된 심령술사라면, 다른 사람의 자유의지는 절대 간섭받게 되어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절대 침해받게 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심령 공간은 절대 훼손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전 당신이 “옳고 그른” 건 없다고 말씀하신 걸로 생각했는데요. 갑자기 이 “절대”들은 다 뭡니까?
내가 “언제나”나 “절대”란 표현을 쓸 때는 언제나 내가 아는 바, 너희가 이루고자 하는 것, 너희가 하려고 애쓰는 것이란 문맥 안에서다.
나는 너희 모두가 진화하려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려 하며, ‘하나됨’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걸 안다. 너희는 지금껏 자신이 자신에 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으로 자신을 체험하고자 한다. 너희는 개개인으로서도, 한 종(種)으로서도, 이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내가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 세계에는 “옳고 그른” 것,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없다. 그리고 “나쁜” 것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으니, 너희가 “나쁜” 걸 선택하더라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에서 불타는 일도 없다. 물론 너희가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물질계 속에 설정된 자연법칙들은 있으니, 그 중 하나가 인과법칙이다.
인과법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야기된caused 모든 결과는 결국에 가서 자신이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죠?
너희가 남더러 체험케 한 것이 무엇이건 간에, 언젠가는 너희가 그것을 체험하리란 뜻이다.
너희 뉴에이지 구성원들은 그것을 더 감칠맛나게 표현해 왔다.
“돌아가는 건 돌아오기 마련이다.”
맞다, 다른 사람들은 “너희는 남들에게 대접하기 바라는 대로 남들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훈계로 이 점을 알고 있다.
예수는 인과법칙을 가르친 것이다. 그것은 ‘일급 법칙’ Prime Law이라 불릴 만한 것이다. 커크와 피카르, 제인웨이에게 주어진 일급 지령과 비슷한.
이런! 신이 <스타트렉> 팬이라니!
놀리는 거냐? 그 에피소드의 반을 내가 썼다.
진이 당신의 그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할 텐데.
무슨 말을......... 진이 나더러 그렇게 말하라고 했는데.
당신이 진 로든베리와 만나고 있다고요?
그리고 칼 사간과 봅 하인라인도, 그 패거리들 모두가 여기 있다.
아시겠지만, 이런 장난을 쳐서는 안 됩니다. 이러다간 이 대화 전체의 신뢰성을 무너뜨리고 말 겁니다.
참, 그렇지, 신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진지해야지.
뭐랄까, 적어도 믿음이 가도록은 해야죠.
내가 제네와 칼과 봅을 바로 여기서 만났다는 걸 못 믿겠다고? 걔들한테 일러줘야겠군. 자, 어쨌든 진짜 심령술사를 “사이비”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로 돌아가 보자. 진짜 심령술사는 일급 지령이 뭔지 알고 그것에 따라 산다. 이 때문에 네가 그녀더러 “오래 전에 잃은 사랑”을 되돌아오게 해달라거나, 네가 지닌 다른 사람의 손수건이나 편지로 그의 오라aura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진짜 심령술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전 절대로 다른 사람이 걷는 길에 간섭하거나, 끼여들거나, 가로막거나 하지 않습니다.”
“전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거나, 그것을 끌어오거나, 그것과 충돌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전 누구에 대해서든지 사사롭거나 은밀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네게 이런 “서비스들”을 해주겠노라고 제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악덕업자라 불릴 만한 사람이다. 너한테서 돈을 짜내기 위해 너 자신의 인간적 약점과 유약함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유괴당한 아이라든지, 가출했다가 집에 연락하고 싶어도 자존심이 너무 세서 못하는 십대의 경우처럼, 잃어버린 가족이 있는 곳을 찾도록 도와주는 심령술사라면요? 아니면 죽었든 살았든, 어떤 사람이 있는 곳을 경찰에 알려주는 고전적인 경우라면요?
당연히 이 질문들 모두가 스스로 답하고 있다. 진짜 심령술사라면 절대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봉사하기 위해 거기에 있다.
심령술사더러 죽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건 괜찮습니까? 우리는 “앞서 가버린” 사람들과 접촉하려고 해야 합니까?
어째서 그렇게 하고 싶은 거냐?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이야기하게 하려고요.
“저승”에서 온 누군가가 너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다면, 그쪽에서 먼저 너희가 그것을 알도록 만들 방법을 찾아낼 테니 염려하지 마라.
“앞서 가버린” 너희 숙모와 삼촌,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연인은 다들 자기 나름의 여행을 계속하면서, 완벽한 기쁨을 맛보고 완전한 이해로 나아가고 있다.
너희가 잘 있는지 보기 위해서든, 너희에게 자신들이 무사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든, 너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그들이 하고 싶은 일 중 일부라면, 그들은 그렇게 하리란 걸 믿어라.
그런 다음엔 신경 써서 “표식”sign을 찾아보고 그것을 붙들어라. 그걸 그냥 네 상상이나 “희망사항”, 혹은 우연의 일치로 넘겨버리지 마라. 신경 써서 메시지를 찾아내 그것을 받아들여라.
죽어가는 남편을 간호하던 한 부인을 아는데요. 그 부인은 남편에게, 정말로 먼저 가야 한다면 제발 자기한테 다시 돌아와서 그가 무사하다는 걸 알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남편은 그러겠노라고 약속하고 이틀 뒤에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날 밤에, 그 부인은 꼭 누가 자기 옆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다고 합니다. 눈을 뜨자, 정말 맹세컨대 침대 발치에 앉아서 자기를 보면서 웃는 남편이 보이더래요. 하지만 그녀가 눈을 깜박이고 다시 바라보자 남편은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그녀가 나중에 그 얘기를 저한테 하더군요. 그때는 자기가 흘린 게 틀림없다면서요.
그렇다, 그건 대단히 공통된 현상이다. 너희는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표식을 받고도 그것들을 무시해버린다. 아니면 너희 마음이 장난친 걸로 여기고 그냥 넘겨버리거나.
너희는 지금도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 이 책을 가지고.
왜 우리는 그렇게 할까요? 왜 우리는 이 세 권의 책에 실린 지혜처럼 뭔가를 청했다가, 막상 그걸 받으면 믿지 않으려 할까요?
너희가 신의 위대한 영광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도마(예수의 부활을 의심하여 직접 만져보고서야 믿었던 제자-옮긴이)처럼 너희도 보고 느끼고 만져야 믿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알고 싶어하는 건 보거나 느끼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른 영역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에 열려 있지 않다. 너희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조해하지는 마라.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은 나타나기 마련이니.
애초 질문의 출발선으로 돌아가서요,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저승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려고 심령술사나 무당을 찾아가선 안 된다는 건가요?
나는 너희가 어떤 일을 해야 된다거나 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나로서는 네가 뭘 알고 싶어하는지 잘 알 수가 없구나.
음, 그럼 그 사람에게서 듣고 싶은 뭔가가 아니라 그에게 말하고 싶은 뭔가를 자기가 갖고 있다고 치면요?
너는 그것을 말할 수 있는데, 그는 그것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너희가 이른바 “저승”에 있는 존재와 관련된 어떤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존재의 의식은 네게로 날아온다.
너희가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품었는데, 소위 “고인(故人)”의 본체가 그것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따라서 그런 교류를 하려고 영매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교류의 가장 좋은 “영매”는 사랑이다.
아 예, 하지만 쌍방교류라면요? 그럴 때는 영매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류가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아니면 그건 완전히 엉터리입니까? 그건 위험합니까?
너는 지금 영과의 교류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런 교류는 가능하다. 위험하냐고? 사실 너희가 겁낸다면 모든 게 “위험하다”, 너희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창조한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너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생각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너희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언제라도 권유하고 위로하고 충고할 수 있는 상태로,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만일 너희 쪽에서 사랑하던 사람이 “괜찮은지” 심히 불안해하면, 그들은 만사가 잘되고 있다는 걸 알려줄 표식이나 신호, 가벼운 “메시지”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너희는 그들에게 부탁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생에서 너희를 사랑했던 영혼들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너희의 오라 영역에서 곤란이나 동요를 느끼는 순간, 너희에게 끌려오고, 너희에게 당겨오고, 너희에게 날아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으뜸가는 기회들 중 하나가, 자신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로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진실로 그들에게 열려 있다면, 너희는 위안 주는 그들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맹세컨대” 죽은 사람이 방안에 있었노라던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듣는 이야기들이 사실일 수 있겠군요.
가장 확실하게 사실이다. 너희는 사랑하던 사람의 채취나 향수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그들이 피우던 담배 연기 한모금을 마실 수도 있으며, 그들이 즐겨 흥얼거리던 노래를 어렴풋이 들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의 이런저런 소지품들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불현 듯 나타날 수도 있다. 손수건이나 지갑, 커프스 단추나 장신구 같은 것이 “뜬금없이” 그냥 “불쑥 나오는” 것이다. 너희는 갑자기 그걸 의자 쿠션 안이나 오래된 잡지 꾸러미 밑에서 “찾아낸다”. 특별한 순간을 찍은 영상이나 사진이 거기 있다! 너희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를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일들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우연히 “마침 그때”, 어쩌다 “마침맞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주에는 어떤 우연의 일치도 없다.
이런 일은 아주 흔하다. 정말 아주 흔하다.
이제 네 질문으로 돌아가서, 몸에서 벗어난 존재와 교류하기 위해 소위 “영매”나 “통로”가 필요하냐고? 아니다. 그것이 이따금 도움이 되냐고? 이따금은. 거꾸로 그것은 그만큼 많이 심령술사나 영매, 그리고 그들의 동기에 좌우된다.
누군가가 대가 없이는 이런 식으로 너희와 일하길 거부한다면, 혹은 어떤 식의 “채널링”이나 “중개” 작업도 거부한다면, 한시바삐 뛰어서 다른 길로 가라. 그런 사람은 아마 돈을 위해서만 그 자리에 설 것이다. 그들이 “영계”와의 접촉에 대한 너희 필요나 바램을 이용할 때, 몇주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 동안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가는 “울가미에 걸리더라도” 놀라지 마라.
영이 그러하듯, 오직 남을 돕기 위해서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려는 일을 계속 하기에 필요한 것을 빼고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심령술사나 영매가 너희를 돕는다는 데 동의했을 때, 그녀가 참으로 이런 입장에 서 있다면, 그 보답으로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확실히 제공하라. 자신이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조금만 주거나 전혀 주지 않음으로써, 그토록 놀라운 영의 관대함을 이용하지 않도록 하라.
그가 진실로 세상에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 지혜와 지식, 통찰력과 이해, 보살핌과 자비를 진실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인지 살펴보라. 그런 사람들을 부양하라. 그들에게 넉넉하게 제공하라. 그들에게 최고의 영예를 지불하고, 그들에게 너희가 줄 수 있는 최대치를 주어라. 빛을 가져오는 자들이 이들이니.
7
우린 많은 걸 다뤘군요. 아, 정말 많은 걸 다뤘습니다. 이제 방향을 바꾸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겠냐고?
예, 전 지금 굴러가고 있어요. 전 마침내 굴렁쇠 위에 올라탔습니다. 게다가 전 지난 3년 동안 별려왔던 질문들을 몽땅 다 쏟아내고 싶거든요.
그건 나로서는 전혀 상관없다. 계속하라.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렇다면 전 지금 또 다른 비전(秘傳)상의 수수께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제게 환생에 대해 말씀해주시렵니까?
그러지.
많은 종교들이 환생을 잘못된 교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딱 한번의 생애, 한번의 기회만 갖는다는 거죠.
알고 있다. 그건 정확하지 않다.
어떻게 그토록 중요한 일을 놓고 그 많은 종교들이 생판 틀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기본되는 진실을 모를 수 있는 겁니까?
너는, 사람들이 지닌 많은 종교들이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 종교들의 가르침에서는 숭배하고 두려워해야 할 신에 대한 교리가 중심이다.
너희 지구사회 전체가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개조된 것이 두려움을 통해서였고, 초기 성직자들이 사람들더러 “악한 행실을 회개하고 주의 말을 명심하게” 만든 것이 두려움을 통해서였으며, 교회가 교인들을 획득하고 통제한 방식 역시 두려움을 통해서였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하느님이 너희를 벌하시리라고 주장한 종파까지 있다. 그 종파는 교회에 가지 않는 게 죄라고 선포했다.
그렇다고 아무 교회나 가서는 안되고, 특정 종파의 교회에만 다녀야 했다. 다른 종파의 교회에 가는 것, 그것도 죄였다. 이것은 순전히 두려움을 이용해서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놀라운 건 그것이 들어먹혔다는 사실이다. 젠장hell, 지금도 들어먹히고 있다.
저, 당신은 신이십니다. 욕하지 마십시오.
누가 욕한다는 거냐?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젠장, 그건 아직도 들어 먹히고 있다”고 말했다.
신이 몰인정하고, 제 잇속만 챙기고, 용서하지 않고,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과 닮았다고 믿는 한, 사람들은 언제까지라도 지옥을 믿을 것이고, 신이 자신들을 그곳으로 보내리라 믿을 것이다.
옛날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 모든 걸 넘어설 수 있는 신이란 걸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의 무시무시한 복수를 두려워하기” 위해 여러 종파들의 가르침을 받아 들였다.
자신들이 선하고, 자기 나름으로 설정한 근거에 따라 혼자 힘으로도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마치 사람들 스스로가 믿지 못하는 듯이.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단속하기 위해, 분노하고 심판하는 신이라는 교리를 가르치는 종교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런데 환생이라는 개념은 이 모든 걸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어째서 그랬죠? 어떤 점이 그런 교리들을 그렇게 위태롭게 만들었습니까?
교회가 ‘너희는 착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을 선언하고 있는 판에, 윤회론자들이 나와서는, “너희는 이 다음에 다른 기회를 가질 것이고, 그 다음엔 또 다른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러고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얼어붙는 두려움에 그렇게 마비되지 마라. 더 잘하겠노라고 자신에게 약속하고 그 약속대로 해나가라”고 했다고 해봐라.
초기 교회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그래서 교회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우선 교회는 환생의 교리를 이단으로 내몬 다음, 고해성사를 만들어냈다. 고해는 교인들에게 윤회가 약속했던 것, 다시 말해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고 나서부터 우리는, 너희가 지은 죄를 고하지 않는다면, 그 죄로 하여 신은 너희를 벌하시겠지만, 죄를 고한다면, 신이 너희의 고해를 듣고 너희를 용서하셨음을 알리니, 너희는 편안하리란 설정을 갖게 된 거군요.
그렇다. 하지만 함정이 있었다. 이 면죄부는 신에게서 직접나올 수 없었다. 그것은 교회를 거쳐서 흘러나와야 했다. 교회 성직자들은 고백해야 할 “참회들”을 선포했고, 이것들은 죄인들에게 일상기도의 형태로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은 교인 자격을 유지해야 할 두 가지 이유를 갖게 되었다.
고해가 아주 괜찮은 인기프로란 걸 발견한 교회는 얼마 안 가 고해하러 오지 않는 건 죄가 된다고 선언했다. 누구라도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그렇게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이 화내실 또 다른 이유가 생기는 것이기에.
교회는 점점 더 많은 종규(宗規)들-그중 다수가 제멋대로였고 변덕스러웠다-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는데, 이 각각의 종규들이 정해진 대로 따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경우, 신의 끝없는 심판을 자신의 배후 권능으로 하고 있었음을 두말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어쨌든 고백하고 나면 그 사람은 신에게서 용서받아 심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은 이것을 고백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교회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두려움이 빠져나가고, 교회출석률과 교인수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일년에 한번씩 “고해하러” 와서 참회로 죄를 사면받고 나면, 다시 여전히 자기들 식대로 삶을 살아갔다.
이제 이건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가슴속에 두려움을 박아 넣을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발명된 것이 연옥이다.
연옥요?
그래, 연옥. 이것은 지옥과 뭔가 비슷하면서도, 영원하지는 않은 곳으로 묘사되었다. 이 새로운 교리는, 너희가 너희 죄를 고백하더라도 신은 그 죄로 하여 너희를 벌주시리라고 선언했다.
이 교리 하에서 신은 불완전한 개개 영혼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죄의 수와 종류에 따라 특정 양의 고통을 판결했다. “대”죄와 “소”죄가 있었다. 대죄는 죽기 전에 고해하지 않으면 곧장 지옥으로 보내질 그런 죄들이었다.
교회 출석률은 다시 한번 치솟았다. 모금액 역시 올라갔는데, 특히 기부금이 그러했다. 연옥의 교리에는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방안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은 특별면죄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직접 신에게서가 아니라 교회 성직자들에게서만. 이 특별면죄를 받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가 “벌어들인” 연옥의 고통에서-혹은 적어도 그 일부에서는-벗어날 수 있었다.
“선도(先導)를 위한 집행유예” 같은 건가요?
그렇다. 하지만 물론 이 집행유예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대체로 교회에 두드러지게 많은 기부를 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그중에서도 완전사면이라면 진짜 어마어마한 액수를 내고서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완전사면은 연옥에 전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천국행 직행표였다.
신이 내리는 이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당연히 훨씬 적어서, 기껏해야 왕족과 최상층의 부자들 정도였다. 완전사면을 얻는 대가로 교회에 주어진 돈과 보석과 토지의 양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하지만 이 모든 배타성은 대중들에게 심한 좌절과 분노를 불러왔고, 교회의 임장에서 보면 이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익살극이었다.
빈농들은 주교의 사면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었고, 대중은 체제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다시 한번 출석률은 추락일로를 밟았다.
이번에는 그들이 어떻게 했나요?
그들은 9일기도 양초를 들여왔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연옥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9일기도 양초를 켤 수 있었다. 그리고 9일기도문(특별한 순서로 된 일련의 기도문이어서 다 끝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을 암송하여 사랑하는 고인(故人)이 받은 “선고” 연한을 줄임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신이 허락하지 않았을 더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을 연옥에서 빼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고인을 위해서는 자비를 빌 수 있었던 것이다. 초 한 자루를 켤 때마다 갸름한 구멍 속으로 동전 한두 닢을 떨어뜨리는 게 이로우리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무수히 많은 작은 초들이 무수히 많은 빨간 유리 뒤에서 깜박거렸고, 무수히 많은 페소와 페니(화폐 단위-옮긴이)들이 무수히 많은 함석 상자들 속으로 들어갔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나를 “누그러뜨리려는” 시도로.
휘유! 이건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사람들이 이걸 꿰뚫어보지 못했다는 건가요? 사람들이 그걸, 자신들이 신이라 부른 이 무법자desperado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만큼 필사적인desperate 교인들을 유지하는 데 필사적이었던 교회가 벌이는 필사적인 시도로 보지 못했다는 겁니까? 말하자면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뇌물들을 가져왔다는 겁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다.
교회가 환생을 진실이 아니라고 선언한 게 놀랄 일이 아니군요.
그렇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사실 우주의 나이에 비교하면 한 찰나에 불과한 한 평생만을 살면서, 불가피하게 저지르기로 되어 있는 온갖 실수들을 저지르고 난 후에, 마지막에 가서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너희를 창조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그걸 그런 식으로 짜 맞추는 상황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그렇게 되면 내 목적이 뭔가 될지 도무지 어림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 또한 그것을 어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너희는 계속해서 “주(主)는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일하시니, 신이 이뤄내는 경이로움이여”라는 식의 말들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는 까닭이 있고, 그것은 그럴 수 없이 명확하다. 이 삼부작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벌써 여러 번 너희를 창조한 까닭과 너희 삶의 목적을 설명했다.
환생은 내가 이 우주에 놓아둔 의식 있는 다른 몇백만의 창조물들과 너희를 통해, 수많은 생애에 걸쳐 ‘나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한다는 그 목적에 딱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다른 혹성에도 생명이 있-
물론 있다. 너는 정말로 이 거대한 우주에 너희만 있다고 믿느냐?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다룰 또 다른 주제다.......
약속하시는.......?
약속한다.
그리하여 한 영혼으로서 너희의 목적은 자신은 그 모든 것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되어가고 있다.
무엇이 되어가냐고? 우리는 모른다! 그곳에 닿을 때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여행은 기쁨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곳에 닿자”마자, 우리가 ‘자신’에 관한 가장 고귀한 다음 번 관념을 창조하자마자, 우리는 더 웅장한 생각, 더 고귀한 관념을 창조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 기쁨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있느냐?
예, 이젠 이 표현을 그대로 따라 욀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좋다.
그래서....... 너희 삶의 본질과 목적은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결정하고, 그것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날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온갖 행동과 온갖 생각과 온갖 말을 가지고. 바로 이것이 너희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것에 기뻐하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에게 기뻐하는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다소간 그 창조물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그것을 점점 더 완벽으로 이끌기 위해 여기저기에 오직 사소한 수정만을 가하면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자신에 관해 생각했던 것을 “완벽”에 가깝게 그려낸 사람의 본보기다. 그는 자신에 관해, 그리고 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주 명확한 관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그려내는 데” 자기 인생을 바쳤다. 그는 자신에 관한 관념을 자기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싶어했다. 체험을 통해 자신을 바로 그것으로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베이브 루스(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옮긴이) 역시 같은 일을 했다. 그는 자신에 관해, 그리고 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주 명확한 관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그려내는 데, 자신을 체험으로 아는 데 자기 인생을 바쳤다.
이 정도 수준으로 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선각자와 베이브는 자신에 대해 서로 전적으로 다른 관념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 똑같이 그 관념들을 장대하게 표현해냈다.
또한 그들 두 사람은 당연히 나에 대해서도 다른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와, 자신과 나의 참된 관계를 보는 의식수준이 다른 데서 연유한다. 그리고 그런 의식수준들은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반영되었다.
한 사람은 자기 삶의 대부분을 평화와 고요의 자리에 머물면서, 남들에게도 깊은 평화와 고요를 가져다준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초조와 소란과 간헐적인 분노(특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주변 사람들의 삶에도 소란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이 착했다. 사실 베이브보다 더 마음이 여린 사람은 없었다. 그 두 사람간의 차이라고 하면, 한 사람은 물질 소유의 측면에서 실상 아무것도 갖지 못했지만 한번도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원한 적이 없었던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걸 가졌는데”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전혀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지 헐먼(베이브 루스의 본명-옮긴이)에게 이야기의 결말이 이런 것이었다면, 우리 모두가 거기에 대해 약간의 슬픔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베이브 루스로 자신을 육화한 그 영혼은 소위 진화라는 이 과정을 아직 끝낸 게 아니다. 그 영혼은 자신이 자신을 위해 일으킨 체험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 일으킨 체험까지도 재검토할 기회를 가졌고, 이제 그 영혼은 더욱더 웅장한 해석으로 자신을 창조하고 재창조하고자 하면서, 다음 번에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영혼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만두자. 두 영혼 모두 자신을 지금 체험하고 싶은 것과 관련해서 다음 번 선택을 이미 내린 데다가, 사실 둘 다 지금 그것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당신 말씀은 두 사람이 이미 다른 육신으로 환생했다는 겁니까?
다른 신체로 되돌아가는 환생만이 그들에게 열린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오해일 것이다.
다른 선택이 뭐가 있습니까?
그들이 되고 싶다면 실제로 무엇이라도.
나는 이미 여기서, 소위 죽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했다.
어떤 영혼들은 자신들이 알고 싶은 게 더 많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로 가는 반면, 너희가 “나이든 영혼”이라 부르는 다른 영혼들은 그들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그 영혼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들이 배워야 하고 배워야 했던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들이 지금껏 해야했던 건 오직 기억해내는 것뿐이라는 것, ‘자신들이 참으로 누구고 무엇인지’ 기억해내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체험을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그것이 되는 데서 얻는다는 걸 “배운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차분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이것을 기억해낸다.
“저승”(나는 여기서 너희에게 익숙한 용어, 그러면서도 되도록 논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줄 일상어를 써서 말하고 있다)에 이를 즈음이나 그곳에 이르고 얼마 안돼 벌써 이것을 기억해내는 영혼들도 있다. 그리고 나면 이런 영혼들은 자신이 “되고” 싶은 모든 것으로 자신을 즉석에서 체험하는 기쁨을 추구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무한수의 내 측면들 중에서 고른 그것을 당장 그 자리에서 체험하고자 할 것이다. 걔중에는 그렇게 하기 위해 물질형상으로 되돌아가길 선택하는 영혼들도 있다.
어떤 물질형상이든요?
어떤 형상이든.
그렇다면 영혼이 짐승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신이 암소일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암소들은 사실 신령스럽다는 게? 거룩한 암소여!
(으흠!)
죄송합니다.
너는 평생을 일인 코미디를 하는 데 보냈다. 그리고 말이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 네 삶을 살펴보면 너는 그 역할을 꽤 잘해낸 편이다.
차앙! 이건 효과음입니다. 심벌즈가 여기 있었더라면 당신에게 차앙-하고 부딪혀드렸을 텐데.
고맙네, 고맙구먼.
하지만 여보게, 좀 진지해지세나.......
네가 기본원리 면에서 묻고 있는 질문-영혼이 동물로 되돌아올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질문은 영혼이 그렇게 하겠는가이고, 그 대답은 아마 그렇지 않으리란 것이다.
동물들도 영혼을 갖고 있습니까?
동물의 눈 속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동물이 우리 할머니, 우리집 고양이로 돌아온 할머니가 아니란 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과정’은 진화, 자기 창조와 진화다. 그리고 진화는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된다. 위로, 계속해서 위로만.
영혼의 가장 큰 바램은 자신의 더 고귀한 측면들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혼은 진화 눈금을 따라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아래로 내려가려 하지 않는다. 영혼이 소위 열반이라 부르는 것-‘전체’인 나와의 완전한 ‘하나됨’-을 체험할 때까지는.
하지만 영혼이 자신을 더 고귀하게 체험하길 바란다면, 왜 굳이 성가시게 인간존재로 되돌아가려 하죠? 그건 분명히 “위로 가는” 걸음은 아닐 텐데요.
그 영혼이 인간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건, 언제나 더 많이 체험하고, 따라서 더 많이 진화하려는 노력에서다. 인간 중에도 구별 가능하고 증명 가능한 여러 진화 수준들이 있다. 누구라도 많은 생애-몇백 번의 생애-에 걸쳐 인간으로 되돌아가 위로 계속 진화해갈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의 가장 웅장한 바램인 상향운동은 저급한 생명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식의 돌아감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영혼이 존재 전체와 궁극의 재합일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렇다면 저급한 생명형상을 하고서 그 체계 속으로 들어오는 “새 영혼들”이 날마다 새로 생긴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지 않다. 지금껏 창조된 모든 영혼은 한꺼번에 창조되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설명했듯이 한 영혼(내 일부)이 궁극의 실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내고 다시 한번 자신을 새로이 재창조할 수 있도록, “다시 출발하는”, 말 그대로 “보든 걸 잊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신은 자신을 계속 다시 체험한다.
영혼은 또한 원한다면 몇 번이고, 특정수준에서 특정 생명현상을 “재활용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환생이 없다면, 물질 형상으로 되돌아갈 능력이 없다면, 우주 시계가 눈 한번 깜박이는 것보다 몇십억배 더 짧은 시간인 한 생애 안에, 영혼은 자신이 이루려는 모든 것을 이뤄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렇다, 환생은 당연히 사실이다. 그것은 진짜고, 그것은 유의미하며, 그것은 완벽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헷갈리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 같은 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요. 맞습니까?
그렇다.
거기다가 우리가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다양한 차원들, 혹은 다양한 지점들에 “항상” 존재한다고 암시하셨고요. 당신은 2권에서 이 문제를 깊이 다뤘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뒤죽박죽이 되고 마는 경우가 이런 때입니다. 만일 시공간 연속체 위에 있는 “나들” 중 하나가 “죽었다가” 다른 사람으로 이곳에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그때의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동시에 두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이 그럴 거라고 말했듯이 제가 한없이 계속 이런 식으로 해나간다면, 저는 동시에 백 사람으로 있게 됩니다. 아니, 천 사람, 백만 사람으로요! 시공간 연속체의 백만 곳에서 백만 가지 버전의 백만 명으로요.
그렇다.
전 그게 이해가 안됩니다.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너는 지금까지 잘해왔다. 그건 대단히 앞선 개념이었는데도, 너는 그걸 꽤 잘 다뤄왔다.
하지만....... 하지만요....... 그게 사실이라면, 불멸인 “나”의 일부인 “나”는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에, 우주 수레바퀴 위 몇십억 군데의 다른 지점들에서, 몇십억 가지 다른 형상들을 하고, 몇십억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겠군요.
또 맞았다.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전 그게 제가 하는 거라고 말씀드린 건데요.
그것도 맞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한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제가 말한 건-
네가 뭐라 했는지는 나도 안다. 너는 내가 네게 말했다고 했던 바로 그것을 말했다. 여기서 혼란은 네가 아직도 여기에 우리 중 하나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럼 아닌가요?
우리 중 하나 이상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니다. 절대로. 이제 너도 눈치챘느냐?
제가 여기서 저 자신에게 말해왔다는 뜻입니까?
그 비슷한 것이다.
당신이 신이 아니란 뜻입니까?
그건 내가 말한 게 아니다.
그럼 당신이 신이란 말씀입니까?
그게 내가 말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신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라면, 그럼....... 그럼....... 내가 신이군요!
그렇다, 너희가 부처다. 너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다.
하지만 저는 신이기만 한 게 아닙니다. 저는 다른 모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지만- 그건 나를 빼고는 다른 누구도, 다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그랬죠, 하지만.......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모두는 ‘하나’라고?
그랬죠. 하지만 저는 당신이 그걸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했다는 건 몰랐습니다. 당신이 비유로 그렇게 말한 걸로 생각했거든요. 말하자면 사실을 진실한 게 아니라 철학적인 표현이라고요.
그것은 사실을 진실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라고” 할 때의 의미가 이것이다.
이제 이해하겠느냐?
예.
오, 마침내. 드디어 마침내 이해했구나-
하지만-제가 좀 따져도 용서해주시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예를 들면 제 아내나 우리 애들과 있을 때, 전 제가 그들과 별개인 듯이 느낍니다. 그들은 “내”가 아니라고 느끼는 거죠.
의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그것은 자신을 천 조각, 만 조각, 억의 제곱 조각으로도 나눌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무수한 “조각들”로 나누어, 내 “조각”들 하나하나가 자신을 돌아보고, 나란 존재의 경이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제가 왜 이런 망각과 의심의 시기를 거쳐야 하는 겁니까? 지금도 완전히는 못 믿겠어요. 전 지금도 망각 속에 살고 있다구요!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마라. 그건 과정의 일부다. 그것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왜 지금 제게 이 모든 걸 말씀해주십니까?
네가 재미없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삶이 더 이상 기쁨이 아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는 과정에 너무 사로잡히기 시작한 나머지, 그것이 그냥 가정이란 걸 잊고 말았다.
그래서 너는 나를 불렀고 내게 와달라고 청했다. 너를 이해시켜 주고, 네게 신성한 진리를 보여주며, 최대의 비밀, 네 스스로 가로막아온 비밀, 자신이 누군가라는 비밀을 보여달라고.
이제 나는 그렇게 해왔다. 이제 나는 다시 한번 네가 기억해내게 만들었다. 자, 그렇다면 그게 의미가 있겠느냐? 그게 내일 네 행동방식을 바꿔주고, 그게 오늘밤 네가 상황을 다르게 보도록 만들어주겠느냐?
이제 너는 다친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두려워하는 이들의 불안을 잠재워주며, 헐벗은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이뤄낸 이들의 장대함을 축하해주면서, 어디서나 나를 그려보겠느냐?
진리에 대한 이번의 기억이 네 삶을 바꾸고, 너더러 남들의 삶을 바꾸게 해주겠느냐?
아니면 망각으로 되돌아가, 다시 이기심에 빠지고, 이 깨어남 전에 너 자신이라 여겼던 그 왜소함으로 다시 찾아가 그곳에 머물겠느냐?
자, 너는 어느 쪽을 택하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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