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1)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신과 나눈 이야기 3(1)
book3
1
오늘은 1994년 부활절이다. 나는 지시받은 대로 지금 손에 펜을 들고 신을 기다리고 있다. 신은 지난 두 번의 부활절에 그랬듯이, 일년여에 걸쳐 이루어질 또 한번의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나겠노라고 약속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번의 대화를 위해.
1992년부터 시작된 이 과정, 이 놀라운 교류는 1995년 부활절 무렵이면 끝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3년간에 걸쳐 세 권의 책이 완결되는 것이다.
그중 첫 번째 책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문제들, 연인관계, 자신에게 맞는 일 찾아내기, 돈과 사랑과 섹스와 신이라는 강력한 에너지들과 이 에너지들을 우리의 일상 삶 속에서 어떻게 소화시킬지를 다룬 반면,
둘째 권에서는 이런 주제들을 더 넓혀서 주요한 지정학적 고찰들, 즉 정부의 성격과 전쟁 없는 세상 만들기, 국제 사회의 통일을 위한 토대 놓기 따위로 뻗어갔다. 그리고 나는, 3부작의 마지막 부분인 이
세 번째 책은 인간이 마주한 가장 큰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 다른 영역들, 다른 차원들을 다루는 개념들과 그 복잡한 전체 짜임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가에.
따라서 이 책들은,
개인 차원의 진리
지구 차원의 진리
우주 차원의 진리
로 단계를 밟고 있다.
처음 두 원고의 경우, 나는 그것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원고를 쓰는 절차는 간단하다. 먼저 펜을 들고 종이에 질문을 적은 다음, 마음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살핀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으면, 다시 말해 내게 아무런 말도 주어지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모든 걸 치워버린다. 1권의 원고를 완성하는 데는 대략 1년 정도가 걸렸고, 2권은 1년 이상이 걸리고 있다. (2권 원고는 이 3권을 시작하는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세 번째 원고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 일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이런 식의 절차에 강한 자의식을 느끼고 있다. 위의 첫 네다섯 단락을 쓴 지가 벌써 두달 전이다. 부활절 이후로 두달이 지났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의식을 빼고는 아무것도.
나는 지난 몇 주일을 이 삼부작 중 식자화된 1권 원고를 다시 살펴보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데 보냈다. 그리고 이번 주에 와서야 비로소 1권의 마지막 교정본을 받았지만, 고쳐야 할 곳이 43군데나 있어 다시 수정하도록 출판사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지난 주에 와서 드디어 두 번째 책이 끝났다. 본래 “예정시간”보다 두달 늦게. (이것은 1994년 부활절에 끝맺기로 되어 있었다.) 이 2권은 아직 식자화되지 않은 수기 상태의 원고로 있다.
2권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금년 부활절에 시작된 이 3권은 그때 이후 계속해서, 자신에게 신경을 좀 써달라는 비명을 지르면서 홀더 속에 방치되어왔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된 1992년 이후 처음으로, 나는 이 과정에 화를 낸다고까지는 못해도 어쨌든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숙제에 얽매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실 나란 인간은 지금까지 해야 한다고 주어진 일치고 좋아하면서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게다가 1권의 미수정 원고를 몇몇 사람에게 돌려읽게 하여 그들의 반응을 듣고 난 지금, 나는 이 세 권 모두가 앞으로 몇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세세히 검토되고, 신학과의 상관성이 분석되고, 격렬한 토론대상이 되리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그 동안 이 펜을 친구로 여기면서 3권 원고에 접근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 원고가 완결되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감히 이런 정보를 세상에 내민 데 대해-이것을 감히 신이 내게 직접 보내준 것이라고 선언한 데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사람들이 퍼부을 무자비한 공격과 경멸, 나아가 증오에 나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음도 알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지금까지의 내 삶과 내 행동을 특징지어온 그 끊임없는 실수와 비행(非行)들을 놓고 볼 때, 신의 “대변자”가 되기에는 아무래도 부적절하고 부적합한 인물이 나란 사람임이 드러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전처(前妻)들과 내 자식들을 포함하여 예전에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앞장서서 이 글들을 부정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남편과 아버지라는 그 간단한 기본 역할들에서조차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불성실한 인간이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는 이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상함과 진솔함, 근면, 책임감 따위와 관련된 삶의 다른 측면들에서도 비참할 정도로 실패했다.
간단히 말해 나는 자신을 신의 사람, 혹은 진리의 전달자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 내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는 절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그런 역할을 맡는다고 가정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다. 내 삶 전체가 내 나약함을 증거하는 마당에, 감히 진리를 말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나는 진리를 손상시키고 있다.
그러니 제발, 신이시여, 청컨대 당신 필경사로서의 의무에서 절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발 그런 영예를 받을 만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을 찾아내십시오.
나는 우리가 여기서 시작한 일을 마쳤으면 싶다. 물론 네가 꼭 그래야 한다고 강제하는 않겠지만, 네가 나한테나 다른 사람한테 져야 하는 “의무” 따위는 없다. 그런 네 사고 방식이 네게 많은 죄의식을 불러왔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저는 제 자식들까지 포함해서 사람들을 저버렸습니다.
네 삶에서 일어난 일들 모두가, 너나 너와 관련된 영혼들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로 했고 원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너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어났던 완벽한 사건들이다.
뉴에이지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불쾌한 결과들을 회피하려 할 때, 완벽한 “출현”이라고 내세우는 게 그런 거죠.
전 거의 항상 이기적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이기적이었죠.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들만 하면서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는 데 잘못된 것 없다.......
하지만 무척 많은 사람들이 상처 입고 버림받았습니다.
무엇이 너를 기쁘게 하는가라는 물음만 있을 뿐이다. 내 보기에 너는, 지금 너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남에게 거의 혹은 전혀 상처 입히지 않는 처신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부드럽게 표현한 거구요.
부드럽게가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표현했다. 너는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심판하는 짓도 그만두고.
그게 힘듭니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심판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상황에서는요. 저는 진리인 당신에게 무척 곤혹스런 요소가 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이 삼부작을 완결하고 출판하는 일을 제가 계속하다가는 당신의 메시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대리인인 나 때문에 메시지 자체를 불신하게 만들고 말리라는 예감말입니다.
네가 진리를 불신하게 만들 순 없다. 진리는 그냥 진리일 뿐이니, 그것은 증명될 수도 논박될 수도 없다. 그것은 그냥 있는 것이다.
내 메시지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고, 영향받을 수도 없다.
사실 너는 가장 좋은 대리인 중 한 사람이다. 네가 이른바 불완전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네게 자신을 빗대볼 수 있다. 그들이 너를 심판할 때조차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네가 참으로 진지하다는 걸 알고 나면, 네 “지저분한 과거”까지도 용서해줄 수 있다.
하지만 네게 말하노니, 여전히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하는 한, 너는 그 사람들의 것이다.
자기 외부에서 어떤 인정도 구하지 않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일 수 있다.
제가 염려하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메시지입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손상될까 봐 염려스러운 거죠.
만일 메시지가 걱정된다면, 그것을 밖으로 몰아내라. 그것이 손상될까 봐 걱정하지 마라. 메시지 스스로가 이야기할 테니.
내가 가르쳐준 것을 기억하라. 메시지를 얼마나 잘 받아 들이는가는 그것을 얼마나 잘 보내는가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잊지 마라, 너희는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법이다.
완벽을 이야기하자고 굳이 완벽해져야 하는 건 아니고,
깨달음을 이야기하자고 굳이 깨달아야 하는 건 아니며,
가장 높은 진화를 이야기하자고 굳이 가장 높이 진화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진심이길 구하고, 진지하길 힘써라.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모든 “상처”를 되물리고 싶다면, 그렇다는 걸 네 행동으로 보여줘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이 알아서 하도록 놔둬라.
말하긴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게 그런 겁니다. 이따금 전 심한 죄의식을 느낍니다.
죄의식과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유일한 적이다.
죄의식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못했던 때가 언젠지 말해주니까요.
네게 도움되지 않는 것, ‘자신이 누구고 누가 되고자 선택하는지’ Who You Are and Who You Choose to Be에 관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게 있을 뿐이지, “잘못했던” 것 같은 건 없다.
죄의식은 너희를 자기 아닌 것에 묶어두는 느낌이다.
하지만 죄의식은 적어도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걸 알아채게 해주는 느낌이잖습니까?
네가 이야기하는 건 죄의식이 아니라 자각awareness이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죄의식은 땅을 자욱하게 뒤덮은 안개고, 식물을 죽이는 독극물이다.
너희는, 죄의식으로는 시들고 죽어갈 뿐 자랄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두려움과 죄의식이야말로 너희의 유일한 적이다. 너희의 참된 친구는 사랑과 자각이다. 전자를 후자와 혼동하지 않도록 하라. 전자는 너희를 죽이고 말겠지만, 후자는 너희에게 생명을 준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에도 “죄의식”을 느껴선 안 된다는 겁니까?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해서 뭐 좋은 게 있는가? 죄의식은 너희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기회를 빼앗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요?
두려움과 조심은 다르다. 조심하라, 다시 말해 의식하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마라. 의식은 움직이게 하지만, 두려움은 마비시킬 뿐이니.
마비되지 말고 움직여라.
저는 항상 신을 두려워하라고 배웠는데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너는 나와의 관계에서 줄곧 마비되어왔다.
네가 나를 두려워하길 그만뒀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는 나와 뭔가 의미 있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나를 찾아내게 해주는 어떤 선물, 어떤 특별한 은총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다면, 겁 없음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겁 없는 자들에게 축복 있기를, 그들은 신을 알게 되리니.
이것은 자신이 신에 관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 놓을 만큼 충분히 겁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너희는 남들이 신에 관해 너희에게 말해준 것에서 비켜설 만큼 충분히 겁이 없어야 한다.
충분히 겁이 없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감히 자기 나름의 신 체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너희는 그걸 놓고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자기 나름의 체험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긴 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해준 신과 어긋나더라도, 너희는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과 죄의식이야말로 인간의 유일한 적이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대로 하는 걸 악마와 거래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직 악마만이 그런 걸 제안할 거란 거죠.
악마는 없다.
그 또한 악마나 함직한 주장이고요.
악마라면 신이 말하는 건 뭐든지 말할 것이다, 이런 이야긴가?
단지 좀 더 영리하게요.
악마가 신보다 영리하다고?
아니, 좀 더 교활하죠.
그래서 악마는 신이 함직한 말을 하는 것으로 악마가 “아닌 체”하고?
단지 약간만 “비틀어서”요 그 사람을 길에서 벗어나 헤매게 하기에 충분할, 딱 고만큼만요.
내 생각엔 우리가 “악마”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글쎄요, 그 문제라면 1권에서 많이 다루었는데요.
그걸로 충분치 않았던 게 확실하다. 게다가 1권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이라면 2권도 마찬가지고. 따라서 여기서는 1, 2권에서 찾아낸 몇 가지 진리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성싶다. 그것들은 이 세 번째 책에서 다룰 더 큰 보편 진리들을 위한 무대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차피 조만간에 악마 문제에 다시 부딪히게 될 것이기에, 나는 너희에게 왜, 어떻게 해서 그런 실체가 “날조되었는지” 알려주고 싶다.
그래요, 좋습니다. 당신이 이겼어요. 전 이미 대화 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 대화는 분명히 계속 진행되겠군요. 하지만 제가 이 세 번째 대화로 들어서는 지금, 사람들이 알아둬야 할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을 쓰고 나서 반년이 지났다는거요. 오늘은 1994년 11월 25일 추수감사절 다음날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위에 받아 적은 당신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 문단의 내 글까지 오는 데, 25주가 걸렸다는 이야깁니다. 이 25주 동안에 많은 일이 일어났죠.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한 가지는 이 책이 단 한 줄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책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겁니까?
네가 어떻게 자신을 가로막을 수 있는지 알겠느냐? 네가 어떻게 자신을 사보타지할 수 있는지 알겠느냐? 자신의 인생행로에서 뭔가 좋은 것에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네가 어떻게 자신을 멈출 수 있는지 알겠느냐? 너는 평생 이런 식으로 해왔다.
아니, 잠깐만요! 이 프로젝트를 오도가도 못하게 붙잡은 쪽은 제가 아닌데요.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 한마디도 쓸 수 없어요.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이 노란 종이철로 와서 계속해야겠다는........ 이런 말을 쓰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군요....... 영감을 받지 않으면요. 그리고 영감은 당신 분야지, 내 분야가 아니라고요!
알겠다. 그러니까 너는, 오도가도 못하게 붙잡은 쪽이 네가 아니라 나라고 생각하는구나.
그 비슷한 거죠. 그래요.
내 멋진 친구여, 정말 너-그리고 다른 인간들-다운 생각이다. 너는 지난 반년 동안 네 최고선(善)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그걸 네게서 밀어내고 나서는, 자신이 아무데도 이르지 못한 걸 놓고 네 외부의 누군가나 뭔가를 비난해왔다. 너는 여기서 어떤 유형을 보지 못하겠느냐?
글쎄요........
네게 말하건대,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는 때는 없고, 내가 “준비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예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않느냐?
글쎄요. 그래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지만 나는 결코 내 의지를 네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위해 네 최고선을 택하지만, 그에 앞서 나는 너를 위해 네 의지를 택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사랑방식이다.
너희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내가 너희를 위해 원할 때, 그때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너희지만, 내가 너희를 위해 원하는 것을 내가 너희를 위해 원할 때, 그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다. 너희를 통해서.
그러니 너희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남들이 자신을 사랑하는지와 자신이 진실로 남들을 사랑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택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선택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기에.
이건 당신이 1권에서 말한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 같은데요. 거기서 당신은, 사랑이란 남이 어떤 상태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태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와만 관계가 있다고 하셨어요.
게다가 이건 다른 문제들도 제기합니다. 예를 들면....... 애한테 “차도에서 나와!라고 고함지르는 부모의 경우요. 아니, 자기 목숨까지 무릅쓰고 복잡한 차도로 뛰어들어가 애를 잡아채오는 경우라고 하는 게 더 낫겠군요. 이런 부모라면 어느 쪽입니까? 이 엄마는 자기 애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까? 어쨌든 그녀는 자기 의지를 애한테 강요했으니까요. 아이가 차도에 있었던 건 아이 자신이 그걸 원했기 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모순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무 모순도 없다. 그런데도 너는 그 조화로움을 보지 못한다. 이 신성한 사랑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너는 나를 위한 내 최고 선택과 너희를 위한 너희의 최고 선택이 같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너희와 내가 하나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그 ‘신성한 교리’는 동시에 ‘신성한 이분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 자체가 이분법, 즉 확연히 모순되는 두 진리가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확연히 모순되는 진리들이란 너희와 내가 나눠져 있으면서 또한 하나라는 것이다. 이 확연한 모순은 너와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나는 1권에서 말했던 것을 고수할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다른 사람이 원하고 있고, 되고 있고, 하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에 마음쓴다는 데 있다. 오직 자신에게만 마음써라. 자신이 되거나 하거나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고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가에.
나는 또한 내가 그 책에서 말했던 다음 진술도 고수할 것이다. 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은 남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된다.
따라서 잘못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 모른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누가 되려고 하는지는 물론이고,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하겠는데요.
자, 예를 하나 들어주마. 만일 인디아나 폴리스 500(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경주-옮긴이)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시속 240킬로미터의 속도를 차를 모는 것이 네게 가장 좋겠지만, 야채가게까지 안전하게 가려고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게 완전히 문맥관계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 삶 전체가 그러하다. 무엇이 “가장 좋은가”는 네가 누구고 누가 되려고 하는지에 달렸다. 너희는 자신이 누구고 어떤 존재인지 지혜롭게 판단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신인 나는 내가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 안다. 따라서 나는 내게 “가장 좋은”게 뭔지 안다.
그렇담 그게 뭡니까? 말해주십시오. 신에게 “가장 좋은” 게 뭔지. 무척 흥미롭군요.......
내가 가장 좋은 것은 너희가 자신에게 가장 좋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표현된 나 자신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통해서 이렇게 되고 있다.
내 이야기를 따라오고 있는가?
그럼요. 그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를 제쳐둔다면요.
좋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에게 믿기 힘든 사실을 말하려 한다.
나는 너희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다....... 물론 너희가 그걸 언제나 아는 건 아니란 사실은 나도 인정하지만.
이 수수께끼는 이제 조금은 명료해져서, 너희는 내가 무엇에 맞먹는 존재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이자,
여신이다.
나는 ‘지고의 존재’고, 나는 ‘전부의 전부’다. 나는 시작이면서 끝이고, 알파이면서 오메가다.
나는 총합이면서 본질이고, 질문이면서 대답이다. 나는 위이면서 그것의 아래고, 왼쪽이면서 오른쪽이며, 여기면서 지금이고, 전이면서 후다.
나는 빛이면서, 빛을 창조하고 그것이 빛이게 만드는 어둠이다. 나는 끝없는 “좋음”이면서, “좋음”을 좋게 만드는 “나쁨”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 전부의 전부이니, 내 전부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도 체험할 수 없다.
너희가 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것이다. 너희는 나를 저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낮음이 아니라 높음으로, 악이 아니라 선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내 반(半)을 부정하는 건 너희 자신의 반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절대 ‘참된 자신’이 될 수 없다.
나는 ‘장대한 전부’이고, 내가 추구하는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을 통해 이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내리는 선택을 통해 장대함으로서 나 자신을 체험하고 있다. 선택들 하나하나가 다 자기 창조고, 선택들 하나하나가 다 자기 규정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선택이 다 ‘지금 이 순간 되고자 선택하는 나 자신’으로서 나를 표현한다represent, 즉 다시 나타낸다 re-present.
하지만 선택한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장대함이기를 선택할 수 없다. 내가 장대한 내 일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의 어떤 일부는 반드시 장대함보다 못한 것이어야 한다.
이건 너희 역시 그러하다.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하고 있는 신이다.
그리고 너희 역시 그러하다.
너희 영혼soul이 하고자 갈구하는 것, 너희 영spirit이 목말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너희가 선택하는 것을 내가 갖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건 내가 선택하는 것을 내가 갖지 못하도록 막는 게 될 것이다. 내 가장 큰 바램은 나 자신을 ‘나’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1권에서 공들여 자세히 설명했듯이, 나는 ‘내가 아닌 것’의 공간 속에서만 이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나’인 것을 체험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을 정성 들여 창조했다.
그럼에도 내가 창조하는 모든 것이 나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나 아닌 것이 나다.
어떻게 자기 아닌 것이 그 사람일 수 있습니까?
쉬운 일이다. 너희는 항상 그렇게 하고 있다. 그냥 너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만 살펴봐라.
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나인 것도 나고, 나 아닌 것도 나다.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라.
이것이 바로 신성한 이분법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가장 탁월한 정신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신성한 수수께끼’다. 나는 여기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너희에게 그것을 밝혀주었다.
1권에서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가 이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 3권에 나올 훨씬 더 장엄한 진리들을 이해하고 깨달으려 한다면, 너희가 반드시 이해하고 깊이 깨달아야 할 기본 진리가 이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그런 장엄한 진리들 중 하나로 가보자. 네 질문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답변 안에 그것이 담겨 있으니.
안 그래도 우리 이야기가 제가 한 그 질문 부분으로 돌아가길 바라던 터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아이 자신의 의지를 가로막아서까지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걸 말하거나 행하는 부모는 과연 아이를 사랑하는 겁니까? 아니면 아이가 차도에서 놀게 내버려두는 것으로 부모의 참된 사랑을 과시해야 하는 겁니까?
멋진 질문이다. 육아란 게 시작된 이후로, 부모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형태로 제기해온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부모인 너희에게나 신인 나에게나 같다.
그렇다면 그 대답은 어떤 겁니까?
참아라, 내 아들아, 참아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느냐?
예, 우리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죠. 전 그 말을 싫어했습니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너 자신에게 참을성을 갖도록 해라. 특히나 네 선택이 네가 원한다고 여기는 걸 가져다주지 않을 때는. 예컨대 네 질문이 뒷부분에 대한 대답처럼 말이다.
너는 대답을 원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너는 대답을 갖는 체험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대답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사실 너는 대답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줄곧 가지고 있었다. 단지 네가 대답을 선택하지 않을 뿐이다. 너는 자신이 그 대답을 모른다고 믿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너는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요. 당신은 1권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셨죠. 신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포함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이 내게 있지만, 그것을 갖고 있음을 내가 알 때까지는 그것을 갖는 체험을 하지 않을 거라고요.
정확하다!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내가 체험하고 있음을 체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내가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체험하지 않은 걸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모든 앎은 체험”이라고 말했던 유명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가 틀렸다.
앎은 체험을 뒤따르지 않는다. 앎이 체험을 앞선다.
세상의 반이 그것을 거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제 질문이 뒷부분에 대한 답을 제가 갖고 있으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란 건가요?
맞았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걸 모른다면, 그건 어쨌든 모르는 거죠.
그렇다. 그게 바로 역설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경우를 빼고는.
사실이다.
그럼 “자기가 안다는 걸 모르는데”, “자기가 안다는 걸 아는” 이 자리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안다는 걸 알려면, 자기가 아는 듯이 행동해라.”
당신은 1권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셨더랬죠.
그러다. 이 책에서도 이전 가르침에서 진행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성싶다. 게다가 너는 “어쩌다보니” 마침맞은 질문들을 하여, 우리가 이전 책들에서 어느 정도 자세하게 논의했던 정보를 이 앞부분에서 짤막하게 요약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고 있다.
1권에서 우리는 ‘존재-행동-소유 Be-Do-Have의 패러다임과 사람들이 이걸 어떤 식으로 뒤집었는지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더 많은 시간, 돈, 사랑 혹은 다른 뭔가)를 “가진다면”, 비로소 자신들이 뭔가(책을 쓰고, 취미를 키우고, 휴가를 가고, 집을 사고, 관계를 감당하는 따위의)를 “할” 수 있고, 그것은 자신을 뭔가가 “되게”(행복하게, 평온하게, 만족스럽게, 애정 깊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사실상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고 있다. 본모습대로의 우주에서는 (너희 생각과는 반대로) “가짐”은 “됨”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먼저 소위 “행복한”(혹은 “알”거나 “현명하”거나 “자비로운” 따위의) 상태가 “되고” 나서, 이 되어 있음의 자리에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라. 그러면 얼마 안 가 너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너희가 항상 “갖고” 싶어하던 그것을 가져다주면서 끝맺는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이 창조하는 과정(바로 이런 게....... 창조과정이란 것이다)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먼저 너희가 “갖고” 싶은 게 뭔지 살펴보고, 그것을 “가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자문해본 다음, 곧 바로 그런 되어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너희는 지금껏 써오던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어-실제로는 그것을 바로 세워-, 우주의 창조력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진술하는 지름길은 이렇다.
너희가 삶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있는가뿐이다.
우리 대화가 끝날 즈음에 가서 내가 다시 언급하려는 세 가지 메시지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가지고 이 책을 끝맺을 작정이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시간이나 돈이나 사랑을 조금만 더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이 진짜로 행복해질 걸로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과 그가 원하는 돈이나 시간이나 사랑을 갖지 않았다는 것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맞는 말이다. 반면에 행복해하고 “있는” 사람은 진짜로 중요한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필요한 모든 돈과, 평생 지속되기에 충분할 만큼의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두를 가졌다는 걸 발견하겠죠....... 행복해져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걸로요!
맞았다. 너희가 미리 무엇이 되기로 정하는가가 그것을 너희의 체험으로 만들어낸다.
“될 것이나to be, 안 될 것이냐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바로 그거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니, 모든 마음상태가 으레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을 물질형상으로 재생산한다.
여기 냉장고 자석용으로 붙여둘 문구가 있다.
“모든 마음 상태는 자신을 재생산한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나 다른 어떤 되려는 것들, 예를 들면 더 풍족해지거나 더 사랑받게 “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듯이 행동하라. 그러면 너는 그것을 자신에게 끌어올 것이다.
너는 네가 그런 체하는 것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며, “성공할 때까지 성공한 척하라”는 거군요.
그래, 그 비슷한 것, 다만 너희가 진짜로 “척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진지하게 행동해야 한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을 진지하게 하라. 그러지 않고서는 그 행위가 가져다줄 이로움을 잃고 말리니.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상 주려”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신은 “상도 벌도 주지” 않지만, 자연법칙이 창조과정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spirit이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통일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마음을 속일 순 없는 법이니, 너희가 진지하지 않다면, 너희 마음은 그걸 알 것이고, 그러면 그걸로 끝이다. 너희는 창조과정에서 마음이 너희를 도울 모든 기회를 그냥 잃고 만다.
물론 훨씬 더 힘들긴 하지만, 마음 없이도 창조할 수는 있다. 너희는 마음이 믿지 않는 일을 몸더러 하도록 시킬 수는 있다. 그리고 너희 몸이 충분히 오랫동안 그렇게 한다면, 너희 마음은 그것에 관한 이전 생각을 놓아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뭔가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나면, 너희는 그냥 한번 해본 것으로가 아니라 그것을 너희 존재의 지속되는 측면으로 창조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것은 힘들게 일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도 행동은 진지해야 한다. 너희가 사람을 가지고 그럴 수 있는 것과 달리, 우주를 조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대단히 미묘한 균형이 존재한다. 마음이 믿지 않는 일을 몸이 하더라도, 몸의 행동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이 거기에 진지함이라는 요소를 보태야 한다는.
몸이 하는 것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마음이 진지함을 보탤 수 있습니까?
사리사욕이라는 이기적 요소를 빼버리는 것으로.
예?
몸의 행동만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걸 가칠 수 있다는 데 마음이 진지하게 수긍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은, 신이 너를 통해 남들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리란 데 대해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남에게 주어라.
방금 한 말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남에게 주어라.
네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고,
네가 풍족해지기를 원하면, 남을 풍족하게 만들어라.
또 네가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원한다면, 남들이 그들의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갖게 만들어라.
진지하게 이렇게 하라. 사리사욕을 구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되기를 네가 진심으로 원해서. 그러면 네가 내주는 모든 것이 네게 되돌아오리니.
왜 그렇게 되죠?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되는 겁니까?
어떤 것을 내주는 행동 자체가 내주기 위해 그것을 갖는 체험을 너더러 하게 만든다, 내가 지금 갖지 않은 것을 남들에게 줄 수는 없는 법이니, 네 마음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결론, 새로운 생각에 도달한다. 즉 너는 이걸 가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걸 내줄 리 없다고.
그러고 나면 이제 이 새로운 생각이 네 체험이 되어, 너는 그렇게 “되어 있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일단 네가 뭔가가 “되어 있는” 데서 출발할 때, 너는 이미 신성한 너 자신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창조기의 기어를 넣은 것이다.
너희는 어떤 것으로 되어 있든, 너희는 그것을 창조하고 있다.
순환은 완결되어, 너희는 삶에서 그것을 점점 더 많이 창조할 것이고, 그것은 너희의 물질 체험으로 들어날 것이다.
이것은 삶의 가장 큰 비밀이다. 1권과 2권에서 너희에게 말해주려던 것이 이것이다. 이 모두가 1, 2권에 훨씬 더 자세하게 들어 있다.
부디 제게 설명해주십시오. 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원하는 것을 남에게 줄 때 진지함이 그렇게 중요한지.
만일 너희가 뭔가를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일종의 술책, 일종의 조작으로 남에게 준다면, 너희 마음은 이것을 안다. 너희는 자신이 지금 이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신호를 마음에게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주란 너희 생각을 물질형상으로 재생산하는 거대한 복사기에 불과하니, 바로 이것이 너희의 체험이 될 것이다. 즉 너희는 계속해서 “그것을 갖지 않는” 체험을 할 것이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
게다가 너희가 그것을 주려는 그 사람들도 이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그냥 뭔가를 얻으려 할 뿐이라는 것, 그런 마음에서 나온, 제 잇속만 차리는 천박함을 놓고 볼 때, 너희에게는 사실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너희의 줌은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리란 걸 알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끌어오려던 바로 그것을 밀쳐낼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말해 그들이 그것을 원하고, 필요로 하고, 가져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남에게 뭔가를 준다면, 그때 너희는 주기 위해 그것을 갖고 있다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굉장한 발견이다.
진짜로 그래요! 정말 그렇게 돼요!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워낙 상황이 안 좋아서, 저는 머리를 싸매고, 이제 더 이상 돈도 없고 양식도 거의 바닥났으니, 언제쯤 가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될지, 또 집세나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버스터미널에서 웬 어린 남매를 만난 겁니다. 부친 화물을 찾으러 갔는데 거기에 그 애들이 있더군요. 외투를 담요 삼아서 벤치에 서로 부둥켜안고서요.
걔들을 보자 제 마음은 온통 걔들한테로 쏠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가 떠오르더군요. 우리가 애들이었을 때 그런 식으로 떠돌아다니던 모습이요. 그래서 걔들한테 다가가서는, 우리 집에 같이 가서 따뜻한 난로가에 앉아 뜨거운 초콜릿을 좀 먹지 않겠느냐, 어쩌면 소파 겸용 침대를 펼쳐서 하룻밤 편히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걔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절 쳐다보더군요. 마치 크리스마스 날 아침의 아이들처럼요.
어쨌든 전 애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제가 저녁을 해줬지요. 우리 셋은 그날 밤 꽤 오래간만에 아주 잘 먹었습니다. 먹을 건 항상 거기에 있었더라구요. 냉장고 안 가득히요. 저는 그냥 몸을 젖혀서 거기에 처박아두었던 재료들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됐습니다. 나는 냉장고 안의 걸 “싹쓸이”해서 부침개를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황홀했어요! 이 재료들이 다 어디서 왔지?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이 나요.
다음날 아침, 저는 아침까지 먹이고 나서 애들을 데리고 나섰습니다. 버스터미널에 걔들을 다시 내려놓을 때는, 주머니를 뒤져서 “아마 이게 도움이 될 거야”라면서 20달러짜리 지폐도 주었고요. 그리고는 걔들을 껴안아주고 자기들 가던 길을 가게 했지요. 그날은 온 종일 제 상황이 훨씬 더 속 편하게 느껴지더군요. 아니 일주일 내내요. 게다가 저로서는 절대 잊지 못할 그 경험 덕분에 삶을 보는 제 시각과 분별력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이 풀려갔지요. 그리고 오늘 아침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전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나는 아직도 여기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건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리고 네가 옳다. 그것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너희는 뭔가를 원한다면 그걸 줘버려라. 그러면 너희는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순식간에 그것을 “갖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는 오직 정도의 문제만이 남는다. 심리적으로 보더라도 너희는 옅은 공기엣 창조해내기보다는 “덧붙이는” 게 훨씬 쉽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방금 여기서 제가 대단히 심오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요. 이제 이것을 제 질문의 두 번째 부분과 연결시켜 주시겠습니까?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건가요?
보다시피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네가 이미 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자신이 그 대답을 모르지만, 대답을 안다면 자신이 지혜로워지리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너는 지혜를 구해서 내게 온다. 하지만 네게 이르노니, 지혜로워라, 그러면 너는 지혜로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로워 “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남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길 원한다고? 그렇다면 남에게 그 대답을 주어라.
그러니 이제 내가 네게 그 질문을 하겠다. 나는 “모르는” 체할 테니, 네가 내게 대답해다오.
남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네가 그 사람을 위해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아이를 차도 밖으로 끌어내는 부모가 어떻게 아이를 진실로 사랑하는 부모일 수 있는가?
전 모르겠는데요.
네가 모른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네가 안다고 치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글쎄요, 저라면 그 부모는 아이가 원했던 것, 다시 말해 살아남는 걸 아이를 위해 원했다고 했겠죠. 저라면 아이는 죽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차도에서 돌아다니는 게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라고 말했겠죠. 그러니까 아이를 거기서 끌어내려고 뛰어드는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기회를 뺏은 게 아니라, 다만 아이의 진짜 선택, 아이의 가장 깊은 바램에 닿았을 뿐이라고요.
그건 아주 멋진 대답이 되었을 게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신인 당신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일만은 하고 있어야 하잖습니까?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게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램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을 위태롭게 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 곁에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구요.
나는 언제나 너희의 가장 깊은 바램에 닿아 있고, 나는 언제나 그것을 너희에게 준다.
설사 너희가 자신을 죽게 할 일을 하더라도 그게 너희의 가장 깊은 바램이라면, 너희는 바로 그 “죽어가는” 체험을 가질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너희의 가장 깊은 바램에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데, 그게 우리가 하려던 거란 말씀입니까? 그게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램이라고요?
너희는 자신을 “위태롭게 할” 수 없다. 너희는 위태로워질 수 없다. “위험”이란 객관 형상이 아니라 주체의 반응이다. 너희가 어떤 만남이나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 자신에게 “위험한” 체험을 택할 순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의 결정이다.
이런 진리를 전제로 했을 때,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너희가 자신을 “위태롭게” 한 건 너희가 그렇게 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한 건 아주 높은 비전(秘傳)의 차원에서지, 사실 네 질문이 “나오는” 차원에서는 아니다.
네가 뜻하는 의미에서는, 말하자면 의식적인 선택의 차원에서라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너희가 자신을 위태롭게 할 때마다, 항상 너희가 “그러길 원해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차도에서 돌아다니다 차에 치이는 아이가, 차에 치이길 “원해서”(바라서, 구해서, 의식하면서 선택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포장은 달라도 계속해서 같은 유형-전혀 그에게 맞지 않는 유형-의 여자들과 결혼하는 남자가, 안 좋은 결혼관계를 되풀이하길 “원해서(바라서, 구해서, 의식하면서 선택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망치로 자기 엄지를 때린 사람이 그런 체험을 “원해서” 가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구하지 않았으며, 의식하면서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너희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온갖 객관 현상들을 끌어오고, 온갖 사건들을 창조한다. 너희는 진화 업무를 추진해가면서 다음 번에 체험하고 싶은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완벽하게 정확한 조건, 완벽한 기회를 자신에게 제공하기 위해, 삶의 온갖 사건과 장소와 물건들을 자신에게 끌어온다-원한다면 그것들을 너희 스스로가 창조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참된 자신’이기 위해서 너희가 치유하거나 창조하거나 체험하고 싶어하는 뭔가를, 치유하거나 창조하거나 체험할 완벽하게 정확한 기회가 아닌 어떤 일도 너희 삶에서 우연히 일어날 수 없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런 일은 생길 수 없다.
'영성수행 비전 > 신과 나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눈 이야기 3 (3) (0) | 2018.02.07 |
---|---|
신과 나눈 이야기 3 (2)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2 (8)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2 (7)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2 (6) (0) | 201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