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심우도, 십우도 자료 모음|작성자 배천장 본문
작성자 배천장
심우도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데 비유하여 10단계로 그린 그림을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十牛圖)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는데 이 불성을 소에 비유한 것이다.
좌선을 통해 불도를 터득하려는 선종(禪宗)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12세기경 중국 북송(北宋)의 곽암이라는 승려가 지은 것과 보명이 지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이 중 보명의 것은 목우도(牧牛圖)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엔 이 두 가지가 다 전해졌는데 마지막 그림에만 원상(圓相)으로 그려진 것을 보명의 목우도로 보면 된다. 곽암의 것은 모두 원상에 그려진다. 중국에는 소 대신 말을 묘사한 십마도(十馬圖)도 있고, 베트남에는 코끼리를 묘사한 십상도(十象圖)도 전해진다.
곽암의 심우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우(尋牛)
인간이 소, 즉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하여 원심(願心)을 일으키는 단계이다.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매는 모습이다.
견적(見跡)
깊은 마음속으로 들어가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단계이다. 그 발자국을 보느냐 못 보느냐는 오로지 목동의 마음에 달려 있다.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정진하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우(見牛)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마음 깊은 숲 속에 방목되고 있는 소를 발견한다. 즉 자신의 성품을 보아 견성함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득우(得牛)
마음속에 있는 소를 보았으니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소는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 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하는데 땅 속에서 제련되지 않은 금들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로 많이 표현된다. 이때의 소는 실제로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삼독(三毒)에 물든 거친 본성을 의미한다.
목우(牧牛)
소의 야성을 길들이기 위하여 소의 코에 코뚜레를 한다. 삼독의 때를 벗겨내는 과정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단계이다. 소가 유순하게 길들여지기 전에 달아나버리면 다시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소가 차차 흰색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잘 길들여진 소를 타고 마음의 본향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번뇌와 망상, 욕망이 끊겨서 소는 무심하고, 그 위에 있는 목동도 무심하다. 이때의 소는 완전히 흰색이다. 목동이 구멍 없는 피리를 부는 것은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에서 나오는 소리를 의미한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와보니 소는 간데없고 자신만 남았다. 결국 소는 자신의 심원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방편은 잊어야 함을 보여준다. 곧 자신이 깨쳤다는 자만을 버리는 경지이다. 자만의 병은 수행자가 뛰어넘어야 할 가장 무서운 덫이다. 이를 넘지 못하면 부처에도 걸리고 법에도 걸린다. 이것을 불박법박(佛縛法縛)이라 한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소가 사라진 뒤에는 자기 자신도 잊어야 한다. 깨침도, 깨쳤다는 법도, 깨쳤다는 사람도 없는 이것이 공(空)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하였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반본환원(返本還源)
텅 빈 원상 속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비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다.
입전수수(入廛垂手)
이제는 거리로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경지이다. 이것이 부처에 이르는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이때의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줄 복과 덕을 담고 있으며,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우도 (한국의 박물관: 불교, 2000. 4. 20., 한국박물관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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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란?
마음의 본성(즉, 진짜 나)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년이 소를 찾아가는 과정에 비유하여 묘사한 그림이다.
선 수행과 깨달음의 단계를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열 가지로 나타낸 것으로 중국 송나라 시대의 곽암 스님이 그린 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이 명언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지난 몇년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기도 하다.
"너" 즉 나 자신은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너무 다르다.
생각하는 나, 행동하는 나, 지친 나, 방황하는 나, 갈팡질팡하는 나, 등등
자신을 알지 못해 힘들어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종교적, 철학적으로 접근해도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는 "나" 이었다.
과거의 무엇 때문에 또는 미래의 삶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
그리고 왜 나를 알아야 하는지?
종교에서도 못 찾은 나를 간절히 찾길 바라는 마음이다.
기독교에서 "자기를 부인하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거듭(변화)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구절들을 암송하고 있을 정도이지만
진정 무엇을 부인해야 하는지?
새로운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믿음을 발하면 되는 것인지?
거듭난 삶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면서
오직 믿음이라는 강압적인 종교에 발을 담그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 말씀하신 구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라(마 4:17)
가장 먼저 전파한 것이 회개하라는 말씀이었다.
지금의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회개란? 죄를 용서 받는 행위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은 그리스 원어로..
"메타노이아" 생각과 마음의 변화 즉 의식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즉, 속사람을 변화시켜서 진정한 나를 찾아 마음의 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갈팡질팡한 마음을 다 잡고
소(나)를 찾는 십우도 여행길을 가보자!
1.소를 찾아 나섬(심우)
성찰의 시작--혼란, 헤매다
하나님은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집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안락하고 안정된 그곳을 떠나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또, 소년은 왜 소를 찾아 떠나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부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는 것을 "발심"이라고 한다.
이처럼 혼란과 두려움이 가득 찬 내가.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같이, 소를 찾아 나서는 발심이 의식의 변화의 첫걸음인 것이다.
"연금술사"의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으러 이집트로 가는 것처럼.. 용기와 결의로 나서는 것이다.
참조할 책
파울루 코엘류 『연금술사』
오강남 『예수는 없다』
2. 자취를 봄(견적)
본성 찾기---실마리를 찾다.
여행길에서 소의 발자국을 찾았다. 그러나 소는 보지 못했다.
발자국을 보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안에 고착된 고정관념,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큰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옳고 그름, 진리와 허위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혼돈 상태"는 여전하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을 발견하기 위해 절망하지 말고 계속 의식 변화의 발걸음을 내디어 보자.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모르는 마음을 쫓다 보면 어느 모퉁이에서 내 본성의 자취를 볼 수 있다.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최소한 다른 악행을 하지 않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선한 일이다"
69페이지
참고할 책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유상강설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숭산 『오직 선의 나침반』
3. 소를 봄(견우)
명상하기---알아차리다.
이제 소의 발자국만이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소 자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깨닫게 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소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가감 없이 여실한 나. 진정한 나.
둘째, 본래의 나와 어떤 사물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뜻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 강가의 푸른 버드나무 이 모든 것이 실로 나와 하나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명상은 참나를 알기 위한 바른 길이며,지름길이다.
참조할 책
윌리엄 하트 『고엔카의 위빳사날 명상』
존 카밧진 『처음 만나는 마음 챙김 명상』
스즈키 순류 『선심초심』
4. 소를 얻음(득우)
의식이해---나와 하나 되다.
이제 소를 찾아 고삐를 붙잡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잡았지만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소의 야성과 근성 때문에 달아난다.
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채찍과 고삐를 단단히 잡아 소를 길들일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의식혁명"에서 의식의 임계점은 200으로 이 지점은 비난을 멈추고 자신의 행동, 느낌, 신념에 대한 책임을 수용하는 지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류의 85%가 200이하의 의식 수준으로 평생 살아간다고 한다.
의식을 고양하겠다는 선택과 수행 의지로 무한대로 열려 있는 잠재력을 키워보자.
참고할 책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 혁명』
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
켄 윌버 『무경계』
5. 소를 길들임(목우)
뇌와 마음---뇌로 마음을 보다.
소를 잡을 때 사용한 "채찍과 고삐"를 아직 몸에서 뗄 수가 없는 상태이다.
아직도 이기적인 나 자신의 거칠고 거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인 것이다.
고삐를 느슨하게 잡아도 소가 순순히 따라오는 기쁨도 느낀다.
수행의 힘들고 긴 여정을 거쳐 본래의 나와 하나 됨을 체감하게 되었다.
충격적인 경험을 위한 책이 있다.
"마음 챙김 명상을 통해 알아차림, 정서 조절, 자기 조절, 학습 및 기억, 공감이나 연민 같은
심리적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부위들. 전전두피질, 편도체등 7개의 뇌를 활성화하여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다"
142페이지 "명상이 뇌를 바꾼다"
이 내용은 뇌과학 논문에 실린 글이라고 한다.
참고할 책
장현갑 『명상이 뇌를 바꾼다』
페터 슈포르크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옴(기우귀가)
심리 이해 ---걸림 없이 하다.
이제 소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소를 타고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집에 도착했다는 뜻이 아니라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뒤로 미끄러질 위험이 없이 유유히 가는 것이다.
"멈추고, 살펴보고, 보듬고, 껴안아 봐" 나를...무조건
나 자신을 조건 없이 집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융의 고백처럼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 역사다"
그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참고할 책
머리 스타인 『융의 영혼의 지도』
토머스 헤리스『아임 오케이 유어 오케이』
타라 브랙 『자기 돌봄』
7. 소는 잊고 사람만 남음(망우존인)
서양사상의 이해---방편은 잊고 삶에 집중하다.
이제 완전히 집에 도착했다.
이 단계에서 "소를 잊었다" "소가 안 보인다"고 했다.
소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참나가 바로 소인 것이다.
내가 "소"임을 알고 사람만 남았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186페이지
비로소 걸림 없이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할 책
김상환 『왜 칸트인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8. 사람도 소도 다 잊음(인우구망)
과학의 이해---텅 비다.
8장은 "채찍도 고삐도 사람도 소도 다 헛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없음, 비었음)으로 파악되는 상태이다.
"우주는 붙박이처럼 존재하는 물건들의 창고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크고 작은 사건들의 합이라는 말이다."
208페이지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한 양자역학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변화하고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다가도 다시 존재하는 우주의 신비를 말하고 있다.
색즉시공,
현상은 헛것이며, 불변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과 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참고할 책
김성구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김용호 『제 3의 눈』
루퍼트 셀드레이크 『과학자인 나는 왜 영성을 말하는가』
9. 근본으로 돌아옴(반본환원)
동양사상의 이해---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
무척이나 공을 들였는데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즉, 바깥세상에서 헤맸지만 결국 "내 안의 참나"임을 알고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주라는 큰 집으로 돌아와 나와 우주가 그리고 나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유유자적 자유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참고할 책
류영모 『제나에서 얼나로』
석지연 『우타니샤드』
10. 저잣거리로 들어가 도움의 손을 드리움(입전수수)
대안적 삶---회향하다.
이제 저잣거리로 들어가 베풀고 돕는 마지막 단계이다.
자기의 종교적 깨달음의 체험을 남을 돕는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체험이 실천으로 열매 맺는 것이다.
바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재물을 나눠주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해 주고, 진리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처럼, 마하트마 간디처럼...
"이처럼 자기희생적인 도움으로 사회에 들어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 사회를 위해 일할 때 "고목 같은 사회도 다시 꽃이 필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십우도는 끝을 맺는다."
254페이지
참고할 책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성소은 『경전 7첩 반상』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나를 찾아가는 여행길을 마치면서..
나는 어떤 단계의 여행길에 있는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소 발자국은 본 것 같은데....
소는 발견했는지 알 수 없는 단계?
갈팡질팡하면서도 마음공부 책을 주로 읽고 있는 나에게 정갈하게 말해주는 책이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 책이었다.
참고할 책 중에서 명상에 대한 책은 읽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면 읽어 봐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본다.
[출처]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오강남,성소은|작성자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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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찾았습니까, 심우십도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01-03 14:48
곽암의 십우도송
곽암(廓庵, 송나라 승려 곽암사원 廓庵師遠)의 十牛圖頌(십우도송, 십우도를 노래함). '열 장의 소그림(혹은 심우십도(尋牛十圖)라고도 한다)'을 보며 쓴 10편의 칠언절구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는 것은 도(道)를 찾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찾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그 잃어버린 것을 얼른 채워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그 찾는 대상에 대해 지나치게 의미를 두고 가치를 매겨 오히려 마음의 평안함을 해치기 쉽다.
소는 중요한 것이고, 소는 목표이며 문제의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은 그냥 '내'가 아닌 소일 뿐이며 그것이 내게로 들어온다 해도 내 손에 없었을 때와 달라진 건 없다. 찾아야할 것은 소가 아니라, 소를 찾아야 한다는 그 마음을 놓는 일이다. 잃어버린 것을 찾고나면 그것을 긴요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곁에 둔 채 다시 잊어버린다.
이것이 소유의 정체이며 이것이 득물(得物)의 진상이다. 진리는 소유나 득물에 있지 않고, 소유와 득물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의 양상에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은, 그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필요하다는 마음의 진상을 보고 그 동요를 진정시켜 평화를 얻는 것에 있다.
소도 사람도 새끼줄도 다 잊어버려라
소도 사람도 새끼줄도 다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득물이며 인간사의 진리가 머무는 곳이라는 통찰을 담고 있는, 흥미로운 수행시다. 흰소의 해 아침에, 올해 마음이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가만히 일러주는 시다. 이참에 시를 한번 곰곰이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1 '심우']
제1편 심우(尋牛, 소를 찾아서)
忙忙撥草去追尋(망망발초거추심)
水濶山遙路更深(수활산요로경심)
力盡神疲無處覓(역진신피무처멱)
但聞楓樹晩蟬吟(단문풍수만선음)
부랴부랴 풀을 헤치며 찾아 나섰다
강은 넓고 산은 아득하고 가는 길은 깊구나
힘은 빠지고 정신은 지치고 찾을 곳이 없구나
다만 단풍나무 늦저녁 매미 우는 소리뿐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2 '견적']
제2편 견적(見跡, 발자국을 보다)
水邊林下跡偏多(수변임하적편다)
芳草離披見也麽(방초리피견야마)
縱是深山更深處(종시심산경심처)
遼天鼻孔怎藏他(요천비공즘장타)
물가 나무 밑에 발자국이 유난히 많은데
풀꽃이 떨어져나갔으니 보았도다 작은 자취
쭉 이어진 이 깊은 산 더 깊은 곳이라 한들
먼하늘 콧구멍을 어찌 따로 숨기겠는가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3 '견우']
제3편 견우(見牛, 소를 발견하다)
黃鸝枝上一聲聲(황례지상일성성)
日暖風和岸柳靑(일난풍화안류청)
只此更無回避處(지차경무회피처)
森森頭角畵難成(삼삼두각화난성)
노란 꾀꼬리 가지에 앉아 한 울음 우나니
햇살 따스하고 바람 좋은데 물가버들 푸르다
오롯이 이곳이 더없이 돌아숨을 자리인데
깊은 숲숲 드러낸 뿔 그려내기 어렵구나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4 '득우']
제4편 득우(得牛, 소를 얻다)
竭盡神通獲得渠(갈진신통획득거)
心强力壯卒難除(심강역장졸난제)
有時纔到高原上(유시재도고원상)
又入烟雲深處居(우입연운심처거)
온힘을 다해 신통하게 개울에서 붙잡아 얻었으나
마음은 굳세고 힘은 억세어 끝내 다루기 어렵구나
때가 되어 겨우 높은 언덕 위에 오르니
다시 안개구름 속 깊은 곳에 들다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5 '목우']
제5편 목우(牧牛, 소를 키우다)
鞭索時時不離身(편삭시시불리신)
恐伊縱步入埃塵(공이종보입애진)
相將牧得純和也(상장목득순화야)
羈鎖無抑自逐人(기쇄무억자축인)
새끼줄을 언제나 몸에서 못 벗기는 건
걸음을 곧장 딛어 티끌 속으로 들까 두려워서네
서로 잘하여 장차 길이 들고 부드러워지면
굴레로 가두지 않고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6 '기우귀가']
제6편 기우귀가(騎牛歸家, 소 타고 집에 오다)
騎牛迤邐欲還家(기우이리욕환가)
羌笛聲聲送晩霞(강적성성송만하)
一拍一歌無限意(일박일가무한의)
知音何必鼓脣牙(지음하필고순아)
소 타고 흔들흔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피리소리가 울려퍼지며 저녁노을에 흐르네
한 박자 한 구절 끝없는 뜻이 담겨있으니
노래를 아는데 북의 가죽과 채가 필요하리오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7 '망우재인']
제7편 망우재인(忘牛在人, 소를 잊고 사람만 있구나)
騎牛已得到家山(기우이득도가산)
牛也空兮人也閑(우야공혜인야한)
紅日三竿猶作夢(홍일삼간유작몽)
鞭繩空頓草堂間(편승공돈초당간)
소를 타고 이윽고 산골 집에 이르니
소는 벌써 마음에 없어 사람은 한가롭다
붉은 해는 세 줄기 긴 빛인데 오히려 꿈을 꾸고 있구나
채찍은 쓸 일 없어 초가집 안에 가만히 놔뒀나니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8 '인우구망']
제8편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다 잊었다)
鞭索人牛盡屬空(편삭인우진속공)
碧天寥廓信難通(벽천료곽신난통)
紅爐焰上爭容雪(홍로염상쟁용설)
到此方能合祖宗(도차방능합조종)
새끼줄도 사람도 소도 모두 텅빈 곳에 들었으니
푸른 하늘 허공 너른 곳 소통하기가 어렵구나
붉은 화로 불꽃 위에 다투며 눈발이 녹아내리듯
이쯤 이르면 옛사람 뜻과 맞아질 수 있다네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9 '반본환원']
제9편 반본환원(返本還源, 근본을 돌이켜 뿌리로 돌아감)
返本還源已費功(반본환원이비공)
爭如直下若盲聾(쟁여직하약맹롱)
庵中不見庵前物(암중불견암전물)
水自茫茫花自紅(수자망망화자홍)
근본 돌이켜 뿌리로 돌아가려니 이미 애쓴 바가 있어
바로 내려가려는듯 다투니 눈먼 자 귀먼 자와 같구나
암자에 앉아 암자 앞의 것도 못 보니
물은 스스로 아득아득하고 꽃은 저절로 붉었구나
[밀양 만어사의 심우도 제10 '입전수수']
제10편 입전수수(入廛垂手, 손을 놓고 세상에 들다)
露胸跣足入廛來(노흉선족입전래)
抹土塗灰笑滿腮(말토도회소만시)
不用神仙眞秘訣(불용신선진비결)
直敎枯木放花開(직교고목방화개)
맨가슴과 맨발로 집에 들어와서
흙과 회로 벽을 바르니 웃음이 뺨에 가득하다
신선도 진리의 비결도 쓸 곳 없구나
죽은 나무를 직접 가르치니 바로 꽃이 피도다
[필자 번역]
[만해 한용운 초상화.]
만해 한용운의 시 '심우장'
스님이었단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시를 남겼다. '소를 찾는 집'이란 뜻이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1'
심우장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옛집에 붙은 당호(堂號)다. 1933년 집을 지을 무렵,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는지라 그것을 피하여 등돌려 산비탈 쪽인 북향으로 지었다는 그 집이다.
그 때문에 응달이 되어 겨울엔 한없이 춥고 여름엔 습기로 후덥지근해 살기엔 더없이 불편한 거처였으나, 그는 이 불편당(不便堂)을 심신의 자리로 삼는다. 1944년 중풍으로 숨을 거둘 때에도 이 방에 있었다. 심우장은 선불교의 '깨달음 열 과정'을 은유로 표현한 심우십도에서 땄다. 현판은 서예가 독립운동가 오세창(1864~1953)이 썼다.
만해는 이 집을 '심우장'이라 이름하였으나, 도(道, 진리)라는 것이 어디 특별한 곳에 있어서 그것의 고삐를 잡아 끌고 온다는 다소 기계적인 은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심우의 뜻을 곱씹는 시를 남겼다. 마음에 한 도가 있었는데 그걸 잃어버렸다는 상황이 우스꽝스럽고, 잃어버린 도를 굳이 찾아나선다는 것 또한 얄궂다고 생각했다.
찾음 속에 잃음의 강박이 있다
아마도 곽암스님의 10편 시보다 만해의 한 줄 핀잔이 훨씬 수(手)가 높지 않나 싶을 만큼 진리에 직핍한다.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건, 잃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찾음 속에 잃음의 강박이 들어있는 것이기에 찾았다 하더라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통찰이다. 잃고 찾음의 경계를 놓아버리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다시 잃어버릴 일이 없으니 찾은 것보다 더 제대로 찾은 것이 아니냐는 일갈이다. 이래서 고수는 고수다.
[서울 성북동 '심우장'. (사진=연합뉴스)]
그리고 실우(失牛)와 심우(尋牛)로 도식화한 철학보다 '불실불심(不失不尋)'의 평정이 훨씬 부처의 뜻에 걸맞기도 하다. 만해에게는, 저 심우(尋牛)가 조국의 광복과 연결지어져 특히 간절해져 있던 상황인지라,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있던 일제 말기에 이를수록 저 심우의 강박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기분을 부른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끈을 끊어 놓아버리라는 건 곽암을 향한 불평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심리처방 같은 것이기도 했으리라. 그래도, 그는 그 심우의 방에서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한기를 오롯이 느끼며 살아냈다.
심우장 방안에 걸린 '마저위절(磨杵葦絶)' 만해의 네 글자는, 절망을 이기는 치열한 공부의 풍경을 드러낸다. 마저(磨杵)는 절굿공이를 바늘로 만들만큼 갈고 닦는 것이요, 위절(葦絶)은 주역의 가죽(韋, 여기서는 갈대 葦) 표지가 닳도록 공부한 공자의 집요함이 숨어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씨를 쓰고 생각을 다듬는 것이, 소를 잃고 찾는 공허한 경계보다 더 의미있고 절실한 수행처였는지 모른다. 만해에게는.
소를 찾던 사람. 소들이 사라진 빈 자리. 뒤늦게 마음이 따라 어슬렁어슬렁 거닐어 보는 흰소의 해 벽두.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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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도 ()
심우도 / 십우도
불교 작품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
내용 요약
심우도는 불교의 선종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이다.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 십우도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의 십우도와 곽암의 십우도 등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보명의 것은 소를 길들인다는 뜻에서 목우도라고 한 반면, 곽암의 것은 소를 찾는 것을 열 가지로 묘사했다고 하여 심우도라 하여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까지는 두 가지가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사찰 법당 벽화로 곽암의 심우도가 주로 그려진다.
정의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
내용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普明)의 십우도와 곽암(廓庵)의 십우도 등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대체로 곽암의 것을 많이 그리고 있으며, 주로 사찰의 법당 벽화로 많이 묘사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십우도 대신에 말을 묘사한 십마도(十馬圖)를 그린 경우도 있고, 티베트에서는 코끼리를 묘사한 십상도(十象圖)가 전해져 오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보명의 것은 소를 길들인다는 뜻에서 목우도(牧牛圖)라고 한 반면, 곽암의 것은 소를 찾는 것을 열 가지로 묘사했다고 하여 심우도라고 한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보명의 것에서는 마지막 열번째의 그림에만 원상(圓相)을 묘사하고 있는 데 대하여 곽암의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단계를 원상 안에 묘사한 점이 다르다. 이 두 가지의 제목을 비교하면 [표]와 같다.
[표] 보명 · 곽암의 심우도 제목비교
그림순서
|
보명의 목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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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암의 심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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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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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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尋牛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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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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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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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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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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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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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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廻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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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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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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馴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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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 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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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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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 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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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牛歸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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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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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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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牛存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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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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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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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牛俱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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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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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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返本還源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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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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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廛垂手
|
이 심우도의 대체적인 내용은 처음 선을 닦게 된 동자가 본성이라는 소를 찾기 위해서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되고 최후에는 선종의 최고 이상향에 이르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곽암의 심우도를 각 단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헤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써 공부에 임하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② 견적(見跡)은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는 것을 소의 발자국으로 상징한 것이다.
③ 견우(見牛)는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하고 있다.
④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주1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돌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라고 많이 표현된다. 실제로 이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아직 삼독(三毒: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이라는 뜻에서 검은색을 소의 빛깔로 표현한 것이다.
⑤ 목우(牧牛)는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 깨달은 것을 더욱 갈고 닦음)의 단계로, 선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한번 유순하게 길들이기 전에 달아나 버리면 그 소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준 것이다. 이때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차츰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어 가게 묘사된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때의 소는 완전한 흰색으로서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 주2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며, 그때의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게 된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소는 마지막 종착지인 심원(心源)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했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교종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빈 원상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주3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⑩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때의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주석
주1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앎.
주2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
주3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 또는 그런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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