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11장 해설 본문
조셉머피 요한복음 11장 해설
(1) 이제 어떤 사람이 병들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녀의 언니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 사람 나사로라.
(2) (마리아는 주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의 발을 닦
았던 그 여인인데 그녀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든지라.)
(3) 그러므로 그의 누이들이 주께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주여, 보소서, 주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하니 (4)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 하시니라. (5) 예수께서 마르다
와 그녀의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니라. (6) 주께서 그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셨으나 머무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계시더라. (7) 그 후에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180
를 “유대로 다시 가자.” 고 하시니라. (8) 제자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최근에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
로 치려 하였는데 다시 그 곳으로 가시려나이까?” 라고
하니 (9)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낮은 열두 시간이 아니냐? 누구나 낮에 다니면 넘어지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이라. (10) 그러나 사람이 밤에 다니면 넘어지나니, 이는 빛이 그 사람 안에 없기 때문이
라.” 고 하시더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의식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상징한다. 마리아는 삶의 내적, 주
관적인 면을 의미하고 마르다는 삶의 객관적인 면을 의미한다. 또한 마리아는 삶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고 마르다는 병자와 가난한 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려는 소망을 상징한다.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식의 두 가지 면인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을 상징함)의 오라비(소망)인데, 우리 안의 죽음의 상태를 상징한다. 우리의 소망이나 이상은 죽은 상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살리지 못했고 우리 내면
에서 사실이라고 느끼고 주장한다면 의식이 그것을 되살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던 소망이 실현되지 못하고, 위축되고 죽어서 굳어버린 것을 상징한다. 질병을 가진 자에게는 건강이란 소망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건강은 죽지 않고 단지 병자 안에서 잠자고 있다.
예수께서 죽은 상태를 깨우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정신적 인식을 상징한다. 외부 감각들은 육체가 병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깨어있는 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건강에 대해서 잠들어 있었지만, 이제 인류의 믿음이란 이름의 마력에 휩싸여 있던, 이 최면의 잠에서 빠져나와서 깨어나고 있다.”
5절은 사랑은 하나됨unity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감정적 일체감이다. 그것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의 실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실체를 느끼고 소망하는 것과 결합한다. 기도의 첫 번째 단계는 정신적 힘을 인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우리 소망을 받아들이는 것, 세 번째는 보이지 않는 사고의 실체에 대한 확신이다.
(14)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도다. (16) 그때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더라.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그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 되었더라. 도마는 의심하는 자이다. 이런 마음태도는 우리 모두 안
에 있다. 이것은 두 개의 길을 보면서 의식이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 당신이 낙담하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라고 체념적으로 말하게 된다. 그때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자아와 낮은 자아, 또는 삼차원 자아와 사차원 자아와
의 논쟁, 또는 우리의 오감과 정신적 인식의 싸움이 일어난다. 기도할 때 감각들이 당신 내부의 정신적 힘이 유일한 원인이자 최고 주권자라는 진실을 믿지 못하게 훼방 놓고 있는지 살펴보라. 당신은 이 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23) 예수(당신의 계몽된 이성)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고 하시더라.
(24) 마르다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마지막 날에 부활로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하니
마르다(우리의 현재의식, 이성적, 논쟁적인 마음)는 우리 소망의 부활 가능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위대한 진리는 우
리 개개인 모두의 나는(의식)은 내부에서 사실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을 부활시킬 수 있고 외부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의식 안에는 한계 속에서 위축된, 자신을 소생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24절에서 마르다는 우리 안의 세속적 의식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먼 미래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젠가
는 나의 목표를 실현시킬 거야.” “언젠가는 행복하게 될 거야.” 이런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기만 하면 우리 소망을 의식 속에 두어서 지금 바로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3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신음하시며 무덤에 오시니라. 그 곳은 굴인데 돌이 그 위에 놓여 있더라.
(39)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을 치우라.” 고 하시니, 우리 모두가 문제나 어려움 때문에 신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 여기서 돌은 인류의 믿음과 공포, 인간이 만든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찾고 있는 건강, 기쁨, 평화는 생명력을 구속하는 작고 제한적인 사고에
의해 무덤 속에 감금되어 있다. 믿음으로써 돌은 치워져야 한다. 조화, 힘, 활기의 내적 삶을 원하는 사람은, 정신적 것에 최상의 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믿어야만 한다. 그러면 그의 믿음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전능한 하나님의 존재를 불러낸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40)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외부현상과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계획의 완성과 실체를 확언確言한다. 성서에서 천사가 돌을 굴려내고*마태복음 28:2 참조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천사란 모든 현현에 앞서 존재하는 새로운 마음태도나 느낌 혹은 확신이다.
(4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아버지께서 항상 내게 들으시는 줄 내가 알았나이다.
이 구절들은 기도의 중요한 공식을 주고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개념을 높여
서, 빛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모피 코트를 사기 위해 점원에게 돈을 지불했다면 그 물건이 곧 당신에게 도착할 것에 대해
감사할 것이다. 아직 물건을 받지 않았지만 점원을 신뢰하기 때문에 주문한 코트를 곧 받게 될 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에게 향할 때, 당신은 하나님 안에 머물러 고양된다.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퉁이 그림자도 없고 변하지 않는 빛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하나님)이 항상 당신의 요청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분에게 향할 때 그분도 당신에게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 당신이 사고와 느낌으로써 내부에 있는 신에게 가서 건강과 조화에 의식을 집중할 때 신의 창조력은 의식이 놓인 곳으로 흐르게 된다. 이것이 신의 활동이고 이 힘은 전능하다.
세 번째 단계는 그렇게 되었다는 인식, 수용, 확신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큰 음성으로 외쳤다 란 이루어진 기도
의 소리 또는 권위에 찬 분위기를 의미한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란 우리의 내적 믿음에 항상 자동적으로 응답하는, 불변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상징한다.
이것이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는 것을 알고 있는자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명령이다. 44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죽은 자의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져 있다. 길을 걷다가 만약 아는 사람의 얼굴이 가려져 있다면 그 사람을 알아볼 수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식 속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볼 수 없다. 마치 물을가득 머금은 구름이 결국 비가 되어서 떨어지듯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지적 분위기는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안에 모시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면은 볼 수 없다. 당신은 분위기, 영혼, 사고, 느낌, 믿음, 희망, 소망, 이상, 포부 등을 볼 수 없다. 바로 인간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는 수건이다.
내가 헐 벗었을 때에 입혀 주었으며 마태복음 25:36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이고 내부에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면서 이 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인정한다면 수건을 제거하게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라.” 이것의 의미는 모든 고뇌로부터 해방된 채 자유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자유롭고 즐겁게 땅 위를 걷는 것을 말한다. “나무들의 이야기, 돌들의 설교, 흐르는 시냇물의 노래,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50절에서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한다. 죽어야 할 자는 우리의 소망이다. 만약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죽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좌절한 상태에 있게 된다. 궁핍에 대한 믿음이 죽은 후에 건강이 온다. 고통에 대한 믿음이 죽
은 후에 평화가 온다. 평화는 하나님의 힘이다.
“평화가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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