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9장 해설 본문
조셉머피 요한복음 9장 해설
요한복음 9장
(1)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주의 제자들이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가 죄를 지은 것이니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아니면 그의 부모니이까?” 라고 하니, (3)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4) 때가 낮일
동안에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들을 행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니라. (6)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주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라.”고 하시니라(실로암은 해석하면 “보냈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씻고 보면서 왔더라. (8) 그때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소경이었던 것
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 아니냐?”고 하더라. (9)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닮았다.”고도 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니
라.
여기서 우리는 선천적 소경의 이야기와 “이렇게 된 것이 그의 죄인가 아니면 그 부모의 죄가?”라는 질문을 보게된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삼차원 세계에서 태어날 때 모든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무형의 상태를
떠나, 외부환경과 조건을 지배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의 제한과 한계를 보게 되었다. 우리의 출생은 인간의 상태로 추락된 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은ㅈ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지혜를ㅈ가지면 정신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인간은 하루 종일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심리적, 정신적
으로 앞을 못 보는 소경이라 할 수 있다. 에머슨*미국의 사상가. 시인.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었으나 회의를 품고 사직하였다. 편협한 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자신을 신뢰하며 인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사상을 설명했다은 “인간은
그가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성
서에서도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한즉*잠언 23:
7이라고 말하고 있다.
증오하고 분노하고 질투한다면 정신적 소경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파괴하는 지적인 독을 분비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해결할 방법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정신적 소경이다. 당신 내부에 무한한 지성이 있고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당신 사고에 응답한다는 것을 깨달아, 마음의 새로운 인식을 가질 때 당신은 보기 시작한다. 지금 새로운 빛이 당신 마음을 비추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해주고 또한 완벽한 해결책을 알려준다고 주장하면 자동적으로 옳은 일을 하도록 인도를 받고 길은 당신을 향해 열린다. 예전에는 이러한 진리를 보지 못한 소경이었지만 지금은 건강과 부, 행복과 평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소경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보자. 옛날에는 과거의 업業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나 속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은 부모의 죄가 자식들에게도 전해 진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만약 부모가 정신 이상자이면 자식들 역시 정신 이상자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트라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어떤 것이 진실이면, 그것이 진실이 되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성서에서 말한 죄란 지적태도, 분위기, 부모의 느낌을 말한다. 모든 죄는 신체적인 행위보다는 마음의 행위를 말한다. 부모는 그들의 습관적인 사고와 공포, 긴장과 잘못된 믿음을 신체가 아닌 마음을 통해서 자식들에게 전달한다. 우리의 느낌과 분위기는 창조력이 있다. 당신의 분위기는 무엇인가? 당신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부부관계 시 어떤 상태에 있는가? (Great Bible Truths for Human problem
12장 참조)
예를 들어 부부 중에 보기 싫은 것과 다시 듣기 싫은 목소리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이 태어난다. 소경과 귀머거리 아이는 그에 상응한 상태, 즉 앞 못 보고 들을 수 없는 의식 상태에서 나온다. 부부가 연주했던 음조는 상호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그에 합당하는 모습이 나오게 된다.
에스겔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땅에 관하여 이 잠언을 들어 말하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더니 그 자식들의 이가 시큰거린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이냐?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
에게는 이스라엘에서 이 잠언을 쓸 경우가 다시는 없으리라.에스겔 18: 2-3
자식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부모의 분위기, 지적상태, 또는 믿음이다. 따라서 부모의 분위기 또는 수태受胎 순간의 그들의 의식 상태에 따라 셰익스피어나 베토벤, 링컨, 예수님 같은 자식을 낳을 수 있다. 예수님 또는 계몽된 이성은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이 그의 업業 때문이라는 대중적인 미신을 거부한다. 여기서 업이란 전생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거나 다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속죄하기 위해서 지금 이 세상에 다시 와서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중적인 미신은 소경으로 태어난 자는 그의 부모가 소경이거나 죄를 지었거나, 어떤 육체적 질병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다. 물론 알다시피 부부가 천성적 소경이거나, 사고로 소경이 되더라도 완벽한 시력을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수태受胎 당시의 의식의 분위기나 상태가 태어날 아이의 본성을 결정한다. 임신한 어머니가 기도로써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의 지적, 육체적 본성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머니의 기도로써 완벽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다. 하나님의 눈에 그 아이는 완벽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 모두를 완벽한 것으로 본다.
질병과 어려움이 기도하는 사람이나 과학적 사고를 가진자*미신을 걷어낸 자에 의해서 해결될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 때가 낮일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들을 행해야 하리라. 이 구절의 의미는 진리의 빛이 비춰져 있는 동안 의식적으로 법칙을 지휘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눈을 낫게 했다. 절대적인 것은 결코 비난하거나 심판하지 않는다.
잡지나 신문을 통해 많은 성지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을 읽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치유력이 우리가 믿음과 신뢰로써 그에게 향한다면 응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치유가 일어난 이유는 그곳이 성지였기 때문에 또는 어떤 의식儀式이나 의례 때문이 아니라 치
유된 자들의 믿음 때문이다. 아프리카나 호주 정글의 무속인들도 믿음에 의해서 치유를 일으킨다. 어떤 물이나 연못에서 목욕을 하거나 성인의 유골을 만져서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치유가 일어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공포, 걱정에서 믿음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런 맹목적 신앙으로 치유를 얻은 것에는 법칙에 대한 이해란 없다. 이러한 방법이 고통, 어려움, 질병을 덜어주는 면에서 좋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재발은 흔히 일어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정신적인 힘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예전의 지적 틀로 되돌아간다. 과학적이고 신성한 치유는 특정한 목표를 위하여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의 일치에 있다.
아버지의 일이란 그분의 본성인 선의, 진실, 미美를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란 마치 어린 아이가 캔디를 먹고 싶어 입에서 침을 흘리는 것 같이 침을 흘리는 상태를 상징한다. 이것은 마치 샘물처럼 솟아나는 기쁨의 상태이다. 당
신은 온천溫泉에서 물거품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온천 바닥 흙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흙이란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 안에 보고寶庫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내적 잠재력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죽은 상태이다.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점차 신을 깨닫고 신
을 찬양하면 신과 함께 살아나고, 이것이 바로 주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의 의미이다. 이 구절은 과거의 제한된 상태, 즉 앞 못 보는 상태를 거부하고 지금 우리가 원하는 상태에 있다는 깊은 내적 확신을 의미하는, 독특하고 뛰어난 상징적 표현이다. 어린 학생이 칠판에 쓰인 삼각법 문
제의 해답을 알게 되듯이 우리는 지금 진리를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린 학생이 삼 더하기 삼은 칠이라고 칠판에
쓰더라도, 선생님은 수학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 의해서 삼 더하기 삼은 육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삼 더하기 삼은 육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항상 그래왔다. 선생님은 그 진리를 확신하고 있고, 결국 그 어린 학생은 진리에 순응하여 칠판에 썼던 숫자를
정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진실한 것은 인간에게도 진실하다. 하나님은 눈이 멀거나 귀가 먹던가 말을 못하거나 아프지 않다.
인간에 대한 진리는 살아있는 전능의 영靈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성, 축복, 기쁨, 완벽, 일치, 그리고 평화이다. 당신이 이제껏 위대한 것, 경이
로운 것이라고 들었던 것 모두가 바로 우리 안의 전능의 살아있는 영이다. 이 끝없는 지혜 속에서는 어떤 분쟁이나 분열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 마음을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두고 지적으로 그것들과 동일시하면 마음속에서 생각의 틀의 재조정이 일어나, 하나님의 완벽성과 완전성은 나타난다. 해답으로 썼던 숫자를 수학의 원리에 순응하여 바꿔야 했던 어린 학생처럼, 당신은 조화의 원리에 따라서 사고의 틀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 신체의 원소들은 상호작용의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여기서 말하는 흙은 굳고 메마르고 잘못된 믿음이다. 진
흙투성이인 이 혼란스런 마음은 깨끗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이루어진다.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라 의 의미는 그만두고 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 상태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분리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잘못된 사고를 씻어내고 모든 실체의 영성靈性을 느끼고, 단언할 수 있다. 보지 못하는 상태란 우리를 축복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함을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이 그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 소경인 셈이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죄를 모른다. 심지어 우리가 결핍과 여러 종류의 제한을 표현하더라도. 이런 상태에서는 대중적 마음이 우리 사고를 대신한다. 하지만 우리 눈이 떠졌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내부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생각하면서, 더 이상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편견, 공포, 무지 등 인위적으로 부가된 것으로부터 사고를 하는 한, 우리는 분쟁, 질병, 폭력을 경험할 것이다. 진정한 사색가가 되자. 그러면
마치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듯이 우리 앞에 떨어지는 은혜를 경험할 것이다.
죄란 평화, 건강, 그리고 행복의 과녁을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준해서 맞춰야할 과녁이 없다면 당연히 죄를 지을 수도 없다. 진정한 죄란 우리의 목표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장의 나머지는 많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절만을 다루겠다.
(14)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더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다시 물으니,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 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시기에 그 후
에 내가 씻고 보게 되었노라.”고 하니라.
바리새인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오감에 의존하고, 신을 경배함에 있어서 의식, 의례, 형식 등 외형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일주일 중 특정 하루라고 생각할 뿐, 마음을 우리 이상과 소망에 두어서 결국 외부세상과 그 평결이 더 이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 없는 고요한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고, 우리의 내적 깨달음에 의지한다. 바리새인은 해결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외부에 나타나는 것은 결과이다. 바리새인은 항상 외적인 것을 원인으로 생각하면서 율법의 문자를 경배하고, 생명을 주는 영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 내부의 힘을 깨달았을 때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내가 전에는 소경이었다가 지금은 본다는 것이라.
(41) “만일 너희가 소경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나, 이제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다’ 고 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고 하시니라.
인간의 이론, 견해, 가르침을 뜻하는 바리새인의 사고는 심지어 기도할 때도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이 장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나온 질문과 논쟁은 오직 의식, 의례, 형식에만 관계가 있는 의식상태를 보여준다. 이 세상 모든 도시를 활보하고 있는 이 바리새인들에게 종교생활의 실천
은 오직 전통과 미신에 대한 집착뿐이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기도로 암을 치료할 수 있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의 평결評決과 세상의 견해만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의 상징을 조사하고 그 배후의 원리를 보아야 한다. 그 배
후의 원리를 보는 것이 다음 절의 의미이다.
(39) “내가 심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으니, 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니라.
당신은 심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에 의해서 당신은 심판을 한다. 생각하는 것은 바로 비교하는 것이다. 당신은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할 수 있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부정적이거나 잘못된 믿음은 거절할 수 있다. 당신은 분별
하고 선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당신이 내부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했다면 하나님의 보고寶庫 안에 있는 것만을 선택한다. 당신은 진리를 깨닫고 있다. 과거에는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몰랐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힘에 대한 인식과 앎에 의해서 치유와 고양과 축복만을 선택한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졌다면 질병, 부족, 불행, 고통 등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오감의 지배를 받고, 평범한 법칙 속에 사는 당신은 예전의 이론, 믿음, 전통, 독단에 대해서는 소경이 되고 하나님과 그의 전능에 대해서는 살아나야 한다. 그러면 진정으로 보게 된다. 기도할 때 기도에 도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귀머거리와 소경이 되어야 한다. 외부세계와 외부현상을 보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응답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조준해서 맞추려는 표적이 없다면 목표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따라서 죄를 지을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목표를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앎이란 우리의 생각과 소망을 지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내부의 시야를 통해 보는 것, 혹은 고요한 내적 확신을 갖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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