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10장 해설 본문
요한복음 10장 해설
(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들어 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
(2)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 (4)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 (5) 그러나 그들이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에게서 달아나나니, 이는 그들이 낯선 사람의 음성을 모르기 때
문이라.” (6) 예수께서 이런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더
라.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
엇인지 깨닫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라. (8) 내 앞에 온 자는 다 도둑이요 강도들이라.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나는 그 문이라. 누구든지 나를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 받을 것이며 또 들어가며 나오며 초장을 찾으리라.
(10)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
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문은 우리 의식의 문을 말한다. 나는 그 문이라.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우리 의식을 통해서 온다. 우리의 의식 상태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믿고 동의한 것이고, 그것은 항상 외부로 표현된다. 먼저 내부에서 생성되어야만 외부에서 나타난다. 건강, 평화와 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을 먼저 의식 속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서 그것을 이미 소유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즉,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소유하기 전에 소유했다는 의식상태에 있어야 한다. 옛날 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하는 상태를 이루려면 그 상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인간이 외부적인 수단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그를 피해 갈 것이다. 그는 강도이고 도둑인 셈이다. 왜냐하면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느끼지도 않는 그는,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기쁨을 자신에게서 강도짓하고 약탈하고 있기 때문이다.ㅈ우리는 먼저 이루고자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마음속에서 맛봐야만 한다. 그럴 때 그것은 현실에서도 뒤따르게 된다. 마음이나 의식은 밖으로 표현되는 것들에 대한 문이다.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삶의 즐거움을 거부할 때, 혹은 신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자세를 취할 때 자신이 성스러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채식을 고집하며 속세를 떠나 살아야만 성스럽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단식, 경직된 삶, 육체적 훈련, 이런 것들이 원하는 정신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들은 잘못된 길로 올라가려 했고,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외부적인 통로를 통해 높은 정신적 인식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런 사람들이 변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당신은 분노와 원한, 악의와 적의, 독
선과 영적인 오만, 그리고 자기정당화와 독선적 믿음과 같이, 잘못된 생각을 품으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바로 당신의 이런 모습들이 당신이 거부해야만 하는 자아이다. 사람들에 의해 종종 회자되는 위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순전히 심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봐야만 한다. 위 구절은 삶의 안락과 편의를 부정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서 오는가? 당신이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면 과거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부정하고 거절해야 한다. 예전과 똑같은 마음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더 높은 정신적 성장을 꿈꿀 수 없다.
내적변화가 찾아와야만 한다.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로마서 12:2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거나, 적어도 들어는 봤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겪어야 할 변화를 상징한다. 당신에게는 이제껏 사용하지 않았던 날개가 있다. 그 날개는 사고와 느낌이고, 이것으로 날아올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변형은 세포가 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심리적, 감정적 변화를 말한다.
어떤 이가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치유되었다.”라는 확언을 반복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그의 말이 단순히 기계적인 것에 그친다면 어떤 결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과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완벽히 건강하다는 느낌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반드시 자신의 의식 속에서 그 단언한 것들이 실체임을 주장하고 느껴야 한다.
영혼의 내적인 인식이 고요히 흔들리지 않을 때 치유가 뒤따른다.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부유의 의식을 가져야만 그것이 뒤따른다.
만약 정신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이 제시했던 훌륭한 원칙을 따르라. 무슨 일에든지 참되며, 무슨 일에든지 정직하며, 무슨 일에든지 의로우며, 무슨 일에든지 순결하고, 무슨 일에든지 사랑스러우며, 무슨 일에든지 좋은 평판을 얻고, 만일 무슨 덕이 있거나 무슨 칭찬이 있으
면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라. 당신의 사고, 느낌, 반응, 그리고 감정에게 영성靈性을 부여하라. 당신의 사고, 지적활동, 그리고 충동이 사도 바울이 제시한 정신적 원칙에 순응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라.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상응한다. 도둑과 강도들은 우리가 빠져있는 부정적 사고와 감정이다. 공포와 무지 그리고 미신이 진짜 도둑이다.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건강과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간다.
이 장에서 언급한 양은 우리를 축복하고 고귀하게 하는, 훌륭하고 고상한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좋은 것good에 대한확신과 이해가 우리의 양(정신적 상태)을 돌보는 양치기이다. 마치 장군이 군대를 통솔하는 것 같이 마음속의 주도적 상태는 지배를 하고 명령을 한다. 마음의 권위와 창조적 힘
에 대해서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양치기가 된다. 우리는 좋은 것을 선택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지적 음식물을 거부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등, 우리가 갈망하는 상태를 현실로 느낄 때 우리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분위기를 유지하면,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마치 젤처럼 형체를 띤다. 그리고 이런 주관적 상태는 객관적인 상태로 표현된다.
4절에서 우리는, 단언한 것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의 실체를 느끼고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적 동일성의 법칙을 배우게 된다. 다시 말해서 느낌은 모든 실현에 앞서는 것이다. 트라워드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표현된 믿음, 그 자체이다.” 낯선 사람의 음성이란 단언한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몸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불치라고 믿거나 별자리가 안 좋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마음태도는 마치 알칼리와 산성을 같이 섞은 것처럼 불활성不活性 물질을 얻을 뿐이다. 물론 결핍이란 대답으로 응답할 것이다.
기도하고자 하는 목표를 자신의 모습으로 진정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에 대해서 강도짓을 하게 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신이 위대한 배우가 되기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마음 속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도둑이고 강도이다. 양(구체화된 사랑스러운 상태)은
이런 부정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 양은 돌봐야 할 짐승이다. 내적확신 없이 외적으로만 그런 체하고 가식적이라면 실현이 불가능하다. 내 앞에 온 자는 다 도둑이요, 강도이라 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기독교 이전의 모든 종교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어리석다.
이 구절에 대한 다음에 나오는 해석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만약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으로 인해, 혹은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내 나이 때문에, 혹은 인종적인 문제나 돈이 없다는 문제 등의 이유로 인해 목표를 이루지 못할 거라고 믿는다면 강도이자 도둑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갈망하는 상
태가 되는 기쁨을 당신 자신에게서 빼앗아가는 자가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힘이 있고,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당신의 확신은 철회될 수 없다. “하나님과 하나인 자가 승리한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 편이라면, 누가 당신에게 대적하리요?” 이것이 바로 다음 구절의 의미인 것이다. 내 앞에 온 자는 다 도둑이요 강도들이라.
1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 당신은 마음속의 소망에게 생명을 주어야 한다. 그것의 실체를 느끼고 그것(소망)에게 생명과 사랑을 쏟아부음으로써 생명을 준다. 마치 결혼한 한 쌍의 부부처럼 두뇌와 마음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 당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고와 감정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12절에서 나온 이리는 우리의 이상을 무효로 만들고 파괴하는 결핍과 의심, 그리고 공포의 분위기를 의미한다. 우리는 좋고 훌륭한 것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양이 없는 것
과 같기에 우리는 그저 삯꾼에 불과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의식 속의 사고를 가지지 않은 것이고, 비록 지성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다.
(16) 또 나에게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어 내가 그들도 데려와야 하리니, 그들도 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그리하여 한 양떼에 한 목자만 있으리라.
우리는 가장 큰 소망뿐만 아니라 다른 양들로 표현되는 다른 소망들도 가지고 있다. 어떤 이가 건강과 자기실현을 소망하면서 아들의 번영과 딸의 행복한 결혼을 원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망들을 이루기 위해서 소망들을 각각 다루고, 법칙을 하나하나씩 사용할 것이다. 침묵 속에서 환담을 함으로써 이 일을 한다. 그가 각각의 것을 끝냈을 때, 자신이 의식 속에서 주장한 모든 것들은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말(사고와 느낌)은 법칙이고,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즐거운 확신 속에서 잠이 든다. 한 무리의 양떼란 사랑에 완전히 둘러싸인 것 혹은 사랑의 분위기
를 말하고, 한 목자는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완벽한 확신을 말한다.
17절에서 내가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놓기 때문이니라 란 당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자신에 대한 과거의 개념과 평가에 대해서는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태어나기 전에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한다. 정신적인 마음이 깨어나기 전에 물질적, 유물론적 마음은 죽어야 한다. 지혜가 태어나기 전에 무지는 죽어야 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신이 하는 일에 태만하고 책임감이 없었지만 갑자기 열심히 노력하며 모든 면에서 개선되었다면, 새롭고 근면한 사람이 태어난 것이고
과거의 태만하고 게으른 인간은 죽은 것이다.
18절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계몽된 사람의 눈에는 단지 죽음에 대한 믿음일 뿐임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관 속에 있는 사람 안에 있지 않다.
아무도 생명을 당신에게서 빼앗을 자가 없으나. 이 구절에 관한 절대적 진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살해당했다면 실제로 자기 자신을 살해한 것과 같다. 비록 다른 이가방아쇠를 당겨 그를 죽였다고 해도 소위 살인자라는 자는 살해당한 자의 의식상태를 수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의식이 유일한 원인이고 인간 그 자신이 원인이고 결과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느리라. 즉 나의 아버지(나의 주도적 의식상태)가 이끌지 않는 한 어떠한 결과물이나 어떤 외적 표현도 나에게 일어날 수 없다. 인간의 내부가 항상 원인이고 외부로 나타난 것은 내부의 결과이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밀한 곳에 거한다고*시편 91참조 확신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고, 어떤 불행도 우리 앞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확신이다.
작년(1955) 일본에서 한 선생님이 어떤 중국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비행기가 폭격하고 있을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우산 속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폭탄은 그녀 근처에 떨어졌지만 어떤 해도 입히지 못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그
녀가 서 있는 곳이 성스러운 장소(하나님의 사랑과 실체에 대한 그녀의 의식)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지 않는 것은 듣지 말아야 한다.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
의식이 닿은 곳, 즉 의식이 축복을 내린 것은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영원하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과 진리의 영혼을 느껴보면 결코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새로운 인식과 함께 한다.
(33) 유대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한 일로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기 때문이라. 이는 네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 고 하니라.
여기서 유대인은 특정 민족을 말하지 않고 보통사람을 말한다. ‘인간이란 하나님이 인간화 된 것’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믿음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
지만 그들의 믿음은 어리석은 앎에 기초한다. 이런 보통 사람들은 마치 먼지 속에 있는 벌레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34) 너희의 율법에 너희는 신들이라고 내가 말했다고 기
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8) 비록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해도 그 일들을 믿으라.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며 또 내가 그 분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고 또 믿게 되리라. 고 하시니라.
실제로 모든 인간은 무한한 존재의 아들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특성, 자질, 그리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 빌립보서 2: 6
이제 깨어나서 우리의 신성을 주장하자. 성경 속 인물을 역사적 인물로 경배하는 것을 그만두고, 우리 내부 깊은 곳의 유일한 신을 경배하자. 내부에 있는 영이 신이고 우리가 그것과 파장을 맞추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완전히 믿을 때, 그 순간 모든 권능은 우리에게 부여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힘과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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