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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4장 해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조셉머피

조셉머피 요한복음 4장 해설

柏道 2022. 8. 21. 07:27

요한복음 4장 해설
조셉머피


(1)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이 제자를 삼고 침례를 준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것을 주께서 아시고 (2) (예수께서 친히 침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이지만) (3)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리리로 가시니라. (4) 그런데 주께서는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만 하였더라. (5) 그리하여 주께서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수칼이라 하는 사마리아의 한 성읍에 오셨는데

예수가 갈리리(현재의식)로 들어간다 함은 내면 깊은 곳(유대)으로부터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점차 커지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인종적, 국가적, 종교적 편견을 제거하는가를 가르치는 놀라운 교훈이다. 수칼이란 우상숭배, 잘못된 신들을 경배하는 것, 즉 우리의 주의를 부정적인 것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 할 때면 우리의 의식을 신과 그의 전능에만 두고 그 외의 것에는 사고를 분리시키고, 또 그것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병의 상태, 환경 그리고 외부의 원인으로 힘을 부여하는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요셉은 올바르게 단련된 상상력, 혹은 원하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것의 실체를 느끼는 능력을 의미한다.
(6)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여행으로 피곤하시므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는데 때는 제육시 쯤이더라.

야곱의 우물은 인간의 내부, 즉 인간의 내면인 영혼과 감정적인 활동을 일컫는다. 이 우물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힘이 있다. 그것은 만물 모두가 비물질적인 형체로 저장되어 있는 무한한 창고이다. 주관적 자아, 즉 이 영혼으로부터 인간의 모든 경험들이 생겨난다. 우리는 내부의 위대한 무의식으로부터 모든 경험들을 받게 된다.

(7)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실 물을 좀 달라.” 고 하시더
라. (8) (이는 그의 제자들이 음식을 사기 위하여 성읍으로 갔음이라.)
사마리아 여인은 결핍과 제한의 느낌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파적 믿음과 편견으로 가득 찬 마음이다. 예수, 즉 우리의 소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실 물을 좀 달라. 이것은 높은 자아, 신적인 자아가 제한이나 문제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을 가질 때마다 그 해결책은 항상 소망의 형태로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영감inspiration, 인도guidance, 힘, 그리고 활기를 마셔야 한다. 그의 제자들이란 우리가 마음의 도시 안에서 기도를 할 때 취해지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일반적인 마음태도를 말한다. 그 마음의 도시 안에서 편재하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양식을 사고, 보다 더 강해진다.

(9)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 고 하시나이까?” 라고 하니, 이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는 교제가 없기 때문이더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너에게 말한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으리라.” 고 하시니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의 소망을 말한다. 만약 인간이 그의 인식이 바로 신이고 그의 소망은 단순히 생명이 자신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내부의 원천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이상이 지금 실제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란 신이 경이로운 무의식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면서 바깥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마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오감에 의해 전달된 외부현상에 지배된다. 심리적 변화와 정신적 깨달음의 과정은 다음 절에서 나온다.

(11) 그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나이까?

여기에서 언급한 여인은 우리 안에 있다. 즉 우리의 의심, 그리고 신과 그의 법칙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기인起因한 공포를 의미한다.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란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의지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징한다. 물을 길을 그릇이 필요하다고 생각
한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어떤 교회나 종파에 가입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자신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왕국을 외부에서 찾으면서 어디서 생수를 얻겠나이까?라고 항상 묻는다. 생수는 고무鼓舞, 진리, 치유, 인도, 또는
인간의 정신적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

경배하고 기도하고 탄원하기 위해서는 의식과 제단과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오래된 인류의 믿음과 전통, 그리고 교리와 독단이 그들의 머리를 쳐들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우리에게는 우연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우리가 싸워야 할 외부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오
래된 사고가 있다. 이런 것들은 죽어 사라져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생수, 즉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경험하게 된다.

진리는 우리의 잘못된 개념, 개인숭배에 대한 믿음과 전통을 절단시키는 칼이다. 가끔 이런 낡은 사고와 결별하는 것에는 통렬한 아픔이 따르기도 한다. 역사적 인
물에게 힘을 부여하기 보다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 항상 반응하는 창조적 매개체인 주관적 자아에 의지하고 확신해야한다.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그와 그의 자손들과 가축들이 여기서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나이까? 라고 하니라.
도전은 계속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애원하고 탄원해야 하는 의인적인 신이 있다는 오래된 개념, 즉 전통적인 믿음의 우물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자비하고 독재적인 분노의 신이다. 인류는 신이 무형無形의 존재로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거
부한다. 숨결보다 가깝고 손, 발보다 가깝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와 성인, 순교자, 예언자들의 기록과 그들의 독단과 의식, 화려한 형식, 그리고 힘을 강조한다. 또 그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경배를 드렸고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면서 미신을 버린다. 많은 이들은 제한, 갈등, 고통, 그리고 여러 종류의 불
행들로부터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자신의 심리적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잘못된 견해나 이미 옛날에 죽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에 의해서 조정되고 지배 받는다. 그들은 성서의 무덤 속에서 살다 라는 구절처럼 죽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박사님의 책 How to use your healing power 60페이지 참조

무덤은 과거의 기록을 상징한다. 인간이 자신의 견해들을 조사
하고 옳은 해결책을 찾는 것을 거부하면, 이런 죽은 독단이나 인간이 만든 전통 속에서 속박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더욱 더 높은 위치로 이끄는 진리를 찾을 수 있다. 건강, 행복, 그리고 평화를 소유할 수 있는 지혜, 지식, 생명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먼저 자신의 진
정한 위치를 빼앗아가는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제거해야 한다.
화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화학 방정식, 화학 반응 등의 화학법칙을 공부해야 한다.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얻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화학을 모르는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경우와
같다.*마태복음 15: 14 자신의 종교는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라고자문해보라. 그 기원을 추적해보고 이런 믿음들을 조사하고 탐구해 보라. 그것들을 추적해 보면 힘에 대한 탐욕과 인간이 만든 횡포가 있는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9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리라.” 고 하시니라.

많은 이들은 생명의 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마시는 걸로만 생각하고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힘이 있는 정신적 가치에 관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안전, 완전성, 평화, 그리고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내부에서 나온다.
우스펜스키의 내적 가르침에 관한 나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언급했다. 어떤 이가 의사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을 치유시켜주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의사 선생님은 현대의학으로 가능한 것은 모두 했고 아드님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라고 말
했다. 그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목말라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지 모르고 또한 생명의 샘이 자신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믿음, 확신, 무한한 치유력에 대한 신뢰를 마시는지를 모른다. 그 의사 선생님은 그에게 어떻게 기도해야만 그의 아들이 살아 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지혜, 마음
의 평화, 건강, 기쁨, 또는 신에 대한 믿음은 돈으로 살 수가
없다. 생명의 진정한 선물은 만질 수 없는 무형이다. 그것들은 영혼으로부터 온다.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성서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의 의미를 다른 관점으로 보자. 올바른 지식과 과학적인 지적활동*미신과 선입견을 사라지게 하는
정신적 활동에 의해서 우리는 높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
모두는 내부에 있는 높은 잠재력까지 도달할 수 있다. 지금 평화, 안전, 행복에 대한 생각들이 당신 마음을 차지하도록 하라. 이런 생각들이 주관적 실체가 될 때까지 그것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은 내부에 살아있는 전능의 영혼이다. 명상과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영혼의 결실을 영원히 맛볼 수 있다.

(15) 그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 물을 나에게도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여기에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도록 하옵소서.” 라고 하니

(16)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로 오라.” 고 하시니라.
우리의 남편은 하나님God 또는 우리의 이익Good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의식 안으로 오직 존귀하고 사랑스럽고 현명한 개념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오감은 잘못된 지식, 잡다한 개념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오류 등을 주입받아서 마음의 수용매체에 계속적인 영향을 준다. 주변의 상황과 소리, 잘못된 믿음과 공
포 등의 쇄도殺到가 오감을 통해서 우리 마음으로 전달되어 다섯 개의 잘못된 남편이 된다. 그러나 항상 지혜가 우리의 남편이 되게끔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계몽되지 않은 오감은 인간의 감정적 본성 속에 한계를 계속 각인하고, 인간의 감정적 본성은 또 끊임없이 그렇게 새겨진 한계를 경험으
로 재생산한다.

너를 만든 이는 너의 남편이다. 남편은 아내를 주관할 것이다 라고 성서는 말한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당신이 품은 사고는 당신의 감정적 또는 주관적인 면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 사고가 신의 사고가 될 때, 우리는 남편을 부르게 된다.

(17) 그 여인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에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 ‘나에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한 네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는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며, 또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므로 네가 이 점에 관하여 참말을 하였도다.” 라고 하시니 결핍과 한계라는 혼돈 상태에 있는 자는 신GOD, 즉 이익
Good을 자신의 배우자로 삼지 못하고 있다. 마음에 공포와
걱정을 잡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남편, 배우자(정신적으로 고상하고 옳게 단련된 현재의식)가 없다. 당신의 종교가 만족을 주는가? 위안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내적 성장을 주는가?
나의 모든 사고는 하나님의 진실에 기초되어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보라.

(19) 그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선지자
이신 것을 내가 아나이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경
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경배드려야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하나이다.” 라고 하니
(21)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아, 나를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않을 그 때가 오리라.

(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
(23)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
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 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 고 하시니라.
많은 이들은 경배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 건물이나 어떤 특정 성지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위 성경구절에서는 하나님을 영혼과 진리로 경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배하다 란 주의를 가치 있는 것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지혜와 사랑과 진리에 바친 지적, 감정적 상태를 상징한다.
당신의 교회는 당신 영혼의 내부 신전이다. 성가대는 하나님을 조용히 명상한 후에 일어나는 고양高揚된 분위기와 내적 기쁨을 상징한다. 교회는 내부에 있다(신에게 집중된 신성한 사고와 태도, 정신적 기능). 사제는 내부(느낌)에 있다.
하나님은 내부(우리 의식이나 나는)에 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 이것은 어떤 특정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라는 단어는 빛에 의해 밝혀진 지성을 말한다. 자신의 지성이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졌을 때 구원과 해결책이 주어진다. 진정한 유대인은 메시아가 자신 안에 있고, 신에 대한 믿음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무한한 지성을 신뢰한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메시아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것, 혹은 해결책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서 설명한 진리를, 살아있는 신선한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들어서 자신 안에서 살아있게 하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샘물의 생수를 마시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고 당신은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장의 하이라이트를 다루겠다.

(29) “와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을 나에게 말한 그 사람을 보라.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라고 하니 그리스도란 진리에 대한 깨달음 또는 계몽된 이성을 의미한다. 당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들은 오감에 의해 부여된 제한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과거의 삶을 보면 이렇게 잘못 주입된 것들을 목격하게 된다.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서외부현상, 즉 오감이 전하는 것과 그들이 소망하는 것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도전이 있다.
높은 자아는 다음과 같이 당신에게 말한다. “만약 지금 당신이 원하는 상태에 있다고 믿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작은 자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게 좋은 것이 사실일리 없다. 외부상황을 보라.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은 없어.” 당신 감각의 활동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당신이 갈망하는 상태를 느끼기 시작하라. 당신의 의식에 그런 성질들이 부여될 때까지 계속하라. 그러면 평화롭고 편안한 느낌이 올 것이다. 당신이 주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객관화된다.
(35) 너희가 아직도 넉 달이 있어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말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는 곡식이 추수하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음이라.
우리가 먹을 음식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정신적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소유하게 하는 풍요로운 삶이다. 넉 달이 있어야 추수할 때가 된다
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익Good을 연기延期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이익, 소망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 즉 높은 의식상태 속에서 지금 존재한다. 평화, 건강, 화
합, 지혜 등은 모두 당신 안에 있다. 평화를 연기延期하지 말고 지금 잡아라!
예를 들어 집을 팔려 한다고 가정하자. 집은 신적인 마음Divine Mind 속에서 이미 팔렸다고 깨닫고 그것을 지적mental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무한한 지성은 당신과 구매자를 연결시켜 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고가 모든 것의 실체이다.
이것이 왜 추수할 때까지 넉 달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지에관한 이유이다. 의식의 모든 상태, 모든 지혜, 모든 지식은 당신 안에 지금 존재한다.
가끔씩 우리는 “그는 나의 과거에 대해서 모두 말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무당이나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타인의 과거는 펼쳐진 책과 같다. 부분적 주관적 상태에서 그들은 타인의 잠재의식과 파장을 맞춰서 과거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잠재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44)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는 자신의 고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시니라.
성서에서 고장은 의식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현재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서 정신적 과정과 기능을 명상하는 곳인 다른 마음의 왕국으로 떠나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만들
고 우리의 이익Good에 의식을 집중할 때 하나님의 힘은 이 의식이 놓인 곳으로 흐르게 된다. 지금 우리는 다른 고장으로 이주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의식상태, 자신에 대
한 새로운 개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50) “가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52) “어제 제 칠시에 열이 떨어졌나이다.”

위의 인용문은 이 장의 정수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재치료不在治療에 대한 교훈을 얻는다. 유일한 하나의 존재 안에서 타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는 실제로 부재不在라는 것
은 없다. 인류의 견해나 공포를 당신 마음속에서 제거해야한다. 이것을 단호하게 행해야 한다. 다음 단계는 내부에 있는 치유의 존재에게 향해서, 환자의 잘못된 믿음과 견해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건강, 평화, 행복에 대한 생각은 신이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 내부에서 화합, 건강, 평화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환자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선물은 환자의 마음속에서 부활한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을 고치셨으며.*시편 107:20
다른 이가 아프고 도움을 요청할 때 당신은 그가 치유됐음을 확신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제 칠시, 안식일, 마음의 평화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 기도가 이루어짐을 알게된다. 이것이 성서에서 나온 제 칠시에 열이 떨어졌나이다 의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