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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6장 해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조셉머피

조셉머피 요한복음 6장 해설

柏道 2022. 8. 21. 17:02

조셉머피 요한복음 6장 해설

(1) 이런 일들 후에, 예수께서는 티베랴 바다인 갈릴리 바다로 건너가시더라. (2) 큰 무리가 그를 따라가니 이는 그들이 주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그의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 (3) 그리하여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과 더불어 거기에 앉으시더라. (4)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더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겠느냐?” 고 하시니 (6)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라. 이는 주께서 하실 일을 친히 알고 계심이더라.


이 이야기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다 란 심리적으로 우리를 종일 따라 다니는 배고프고 혼란스럽고 비탄에 빠지고 두려움을 주는 사고를 상징한다. 큰 무리는 외부 오감으로부터 온 소식들로이루어져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눈멀고 절뚝거리고 배고프고 불구인 사고에 정신적 음식과 지식을 공급해 주어야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 위 어딘가에 있고, 지옥은 땅 속 어디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그들의 천국(화합, 평화, 그리고 기쁨)과 지옥(고통, 불행,
그리고 시련)은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때 앞 못 보는 사고는 보게 되면서 그들의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장님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외부적인 것과 독립해서 힘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자리 잡게 하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감각이 보여주는 실체만을 믿는다. 그들은 외부 세상의 사건
들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외적조건이나 감각이 포착捕捉한 징표徵表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천성적 능력이 있음을 모른다면 정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모든 제한을 뚫고 지나가고, 어떤 저항도 알지 못하는 전능이다.

나는 1955년 세계 강연 여행 중에 뉴질랜드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강연장에 참석한 한 청중이 자신의 아들이 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장님 이었지만 무한한 치유력Infinite Healing Power이 자신의 아들을 변
화시키고 있다고 단언함으로써 자신의 앞 못 보는 상태에게 올바른 것을 공급했다. 그는 이전에는 진리에 대해서 귀머거리였지만 이제 그의 귀는 트여, 무한한 치유 지성the
Infinite Healing Intelligence의 본성은 항상 응답을 하기에 인간의 생각에 반응을 한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은 치유되었다. 그는 자신이 단언한 진리를 느꼈다. 기도가 경이로운 치유를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달콤한 풍미風味를 맛보았던 것이다. 통찰력은 그의 코를 통해 들어왔다.

마음속의 잘못된 믿음과 오류에서 빠져나와 아들이 완벽하고 완전하다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것은 성서의 정신적, 심리적 의미에서 오천 명(틀린 생각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준 것이다.
이 훌륭한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련과 병마, 고통과 결핍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자신에 대한 진실을 보게 될 것이고, 이로써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내면의 고요를 겪게 될 것이다. 이사람은 자신 안의 거짓을 말하는 사고들을 보았고,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서 손 쓸수 없어.” “희망이 없어.” “애쓸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도 이 병으로 죽었어.” 등. 나는 그에게, 마음 안의 잡동사니를 보면서 그것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만든 살아있는 지성과 힘이 또한 아들의 신체를 고칠 수 있다는 앎을 전해주라고 말했다. 기만하고 거짓말하고 어리석고 무지하고 미신적이고 두려움을 주는 마음속 사고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러한 사고들의 노예였고 그들이 나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주인이고 나의 마음을 보살피고 있다. 나는 나의 하인들(사고들)에게 할 일을 명령한다.” 이로써 그는 주인이 되는 것을 결심했고 허기에 찬 모든 상태에게 먹을 것을 주었
다.

오감을 올바르게 교육시킬 때 우리는 오천 명에게 먹을것을 공급 하기 시작한다. (4장에서 5명의 남편을 둔 여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미 다루었다. 의미는 동일하다.) 6장에 나온 이 이야기의 요점은 당신 의식을 바꿔서 높이 오르라고 가르친다. 현재의 당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상태가 똑같은 상황, 즉 해결할 수 없는 똑같은 문제를 끌어 당긴다. 만약 자신을 바꾸면 당신의 모든 삶은 변하게 된다.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할 때면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당신 태도와 지적 기능들을 올바른 정
신적, 지적 과정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5)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겠느냐?
이것은 천국의 빵, 즉 우리가 화합, 건강, 평화, 그리고 모든 옳은 것들을 지적으로 먹는 침묵의 빵을 표현하고 있다.
(7) 빌립이 주께 대답하기를 “각자가 조금씩 먹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부족하리이다.” 라고 하니 (8) 제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9) “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 라고 하더라.


소년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또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요한, 베드로, 그리스도 등의 이름은 각각 특정한 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 요한이 복음서를 썼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다. 어떤 역사적 증거도 없고, 실제로 요한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조차 아는 이가 없다. 그의 이름은 이 복음서에 나와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복음서가 언제 쓰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서의 심리적 진리는 그것들이 쓰인 2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온 빵과 물고기의우화를 다룰 때는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해서는 안되고, 세상 각지에서 항상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이란 분열된 상태를 말하고, 이것은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다. 혼란된 상태나 결핍감을 상징한다.
안드레를 부르다 란, 당신에게는 하느님의 영원한 원천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안드레란 말은 인지 또는 어떤 상황에도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
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빌립은 끈기이고,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겨우 빵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은 옳게 단련되지 않은 감각을 의미하고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사고와 느낌 또는 기도할 때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의 조화114
로운 결합을 말한다.

(10)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시니, 그 자리에는 풀이 많더라. 사람들이 앉으니 그 수가 약 오천 명이더라. (11) 예수께서 빵을 가지고 감사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니 제자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더라. 또 물고기도 같은 방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더라. (12) 그들이 배부르게 먹은 후에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은 조각들을 한
데 모으고 아무 것도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시니라. (13) 그리하여 그들이 한데 모으니, 보리빵 다섯 덩어리로 먹고 남은 조각들이 열두 광주리를 채우니라.


사람들을 앉게 하라 라는 것은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태도를 가지라는 뜻이다. 이 드라마의 모든 등장인물은 당신 안에 있다. 기도로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의 기능과 태도를 불러 모을 때 당신은 예수이다. 이 기도 과정에서 세상과 감각의 힘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격리시켜야 한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책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오감을 내부로 향하게 하고, 당신의 모든 기능과 사고를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강연에서 ‘성찬의 의미’라는 주제에 참석한 한 젊은이의 일화를 이야기해보고 그가 어떻게 자신의 빵과 물고기를 늘렸는지 설명해보겠다. 그는 위궤양을 앓고 있었고 실업기금에 의지해 매주 25달러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먹을 것조차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병과 고통, 비참한 삶과 부정적인 상像 속에서 살았다. 이 젊은이는 무한한 치유력이 자신 안에 있다는것을 배웠고 매일 수차례 마음을 차분히 하고 고요함을 유
지한 채, 하나님의 평화와 화합의 강이 자신의 신체 모든 원자에 가득 차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건강했을 때 했던 일들과 그때 즐겨 먹었던 음식들을 상상함으로써 사고를 건강에 집중시켰다. 그는 건강에 대해서 명상했고 자신이 원하는 건강상태로 그의 전념과 주의를 주었다. 그는 명상할 때 자신의 완벽한 건강과 승진, 게다가 증가된 수입을 축하하는 아내를 상상했고, 이것으로 안드레를 호출呼出했다.

이 지적, 정신적 작업을 자주 행했다. 이것은 끈기를 의미하는 빌립을 호출하는 것이다. 또한 신은 내부에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베드로, 즉 믿음을 호출했다. 트라우드는 “무한한 지성인 신의 본성은 응답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처럼 그도 그 기도를 한 결과 건강과 풍요,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들을 확연하게 가능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와 같은 지적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을 혼란과 번뇌, 그리고 오감의 소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고 고요함과 신의 치유력을 받아들였다. 그는 마음속의 오천 명, 즉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고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신과 그의 법칙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켰다.

다섯 덩어리 빵을 제자들에게 나눠 주다 의 의미는 지금 오감은 평화, 화합, 그리고 원하는 것을 가진 느낌으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들은 신의 지혜를 공급받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은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다. 세상의 근심, 걱정으로부터 빠져나와 당신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신은 고요 속에서 존재한다는 긍정적 느낌을 가져야 한다. 이로써 두려움을 주고 투쟁을 일삼는 오감의 지배력을 파괴하게 된다.
소망하는 목표와 이상을 생각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손이 그 위에 얹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요와 내적 평화가 당신에게 밀려올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수함에 따라 하나님의 힘과 권위를 통해서 해결책을 받게 되고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남은 조각들을 한데 모으다 란 하나님의 측정법은 항상 꼭꼭 누르고 잘 흔들어서 넘치게 한다*누가복음 6:38 참조라는 것을 상징한다. 자비로운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자비를얻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7 참조

타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다른 이의 성공을 즐기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성공을 가져다준다. 어떤 이에게 향기로운 꽃을 선물한 후 당신 손의 냄새를 맡아 본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 손에 남아 있는 향기를 기억할 것이다. 당신이 다른 이에게 이익이 있기를 요구하고 느끼고 믿으면, 물론 그들의 삶 속에서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이고, 또한 당신도 여러면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열두 광주리가 남았
다 의 의미이다.

이제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절을 다루겠다.

(18) 바다에 강풍이 불므로 파도가 일더라. (19) 그때 그들이 노를 저어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온쯤 갔을 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로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20)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니라. (21) 그때 그들이 주를 기118
꺼이 배 안으로 영접하니 배가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닿았더라.

배 속으로 들어가다 란 새로운 지적 태도와 분위기, 즉 당신 마음속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즉 의식의 높은 경지로 가는 느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의 마음의 물 위를 걷고 있다. 예수란 당신이 얻으려고 애쓰는 소망 혹은 문제의 해결책이다. 강풍이 불다 란 각 개인에게 있는 감정적 혼란, 부정적 사고를 상징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른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것은 당신 마음의 물속으로
예수님이 들어가는 것이다.

19절에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가끔 우리는 내부의 힘을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해결책을 알면 좋을 텐데.” 또는 “이 딜레마를 빠져 나갈 길은 없어.”처럼. 우리가 배웠던 진리를 곰곰이 생각하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망은 마치 우리가 사는 방 안에 있는 가구처럼 실제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음의 또 다른 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그 자체의 구조, 모양,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삼차원 세계에서는 만질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당신 내부의 음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나다.” 즉 당신 안에 있는 무한한 존재가 당신 소망이나 이상은 거짓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당신에게 말한다. 꿈
이나 이상에게 당신의 주의, 사랑, 헌신을 주어서 실현시킬 때 당신은 공포와 의심의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인 것이다. 당신이 그들 위에 서 있다.
이제 당신의 시선을 목표에 두었고 당신은 당신 지혜가 가는 곳으로 가게 된다. 믿음과 확신은 당신을 안전이라는 부두로 인도하는 배이다. 기꺼이 예수님을 당신 배 안으로 영접迎接하고 다음과 같은 진리를 실현시키게 된다. 배가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닿았더라. 공포를 버리고 당신 소망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지닌 채 마음속을 걷는다면 구원자를 받아들인다. 이 때 예수님은 당신의 배 안으로 들어오신다. 당신이 도착할 땅이란 당신의 목표가 현실이 된 것을 의미 한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27) 썩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을 이르는 음식을 위하여 일하라. 인자가 너희에게 그것을 주리니,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인치셨기 때문이라.” 고 하시니라.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란 항상 결실을 이루려는 속성이 있는, 소망과 사고와 개념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 그 자체를 위하여 진리를 찾아야지 빵과 물고기만을 위해서 찾아서는 안 된다. 유형有形적인 것은 우리에게 안정을 주지 못한다. 진정한 안정은 신에 대한 우리의 앎, 그리고 신과 하나됨에 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신에 대해 신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인자한 신이 항상 그를 지켜보고 계신다.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정부가 전복되고, 또는 자연재해가 자신의 것을 휩쓸고 가더라도 믿음을 가진 자는 항상 신 안에서 안전하다. 그러면 신의 원천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가 서있는 반석이 된다. 이것은 결코 그를 버
리지 않는다. 그는 얼마가지 않아 자신이 다시 신의 부유와 평화 속에서 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물질적 소유물, 부富, 돈은 정신적 성장이나 계몽을 이루는데 방해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안전을 이런 것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안전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있다.

신에 대해서 신뢰를 두면 우리는 물질적 손실을 겪지 않고, 만약 겪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곧바로 되찾게 될 것이다.
평화, 완전, 행복, 고무鼓舞, 그리고 화합은 영혼의 보물이다. 이것들은 만질 수 없는 무형이다. 비록 백만 불을 가지고 있어도 건강과 평화와 기쁨, 혹은 여인의 진실한 사랑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과 신의 속성들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할 것은 믿음, 확신, 그리고 변치 않고 모퉁이 그림자도 없는 빛의 아버지에 신뢰를 두는 것이다.
우리는 우호적이어야 한다. 친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호적인 것은 신이 부여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단체에 들어가서 상당한 성과를 얻고 이내 떠난다. 그러다가 다시 어려움에 봉착逢着했을 때 되돌아온다. 우리는 진리 그 자체를 위해서 진리를 찾아야 하고 그 밖에 다른 이유는 버려야 한다. 평화, 일치, 사랑의 의식속에 머물고 하나님의 사고와 원천은 항상 이용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결코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요한 모든 것은 그에게 공급되기 때문이다. 썩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아야 한다. 영생에 이르는 음식은 신성한 사고, 영원한 진리이다.

(30) 그러면 주께서 우리가 보고 주님을 믿을 무슨 표적을 보여 주시겠나이까?
인간은 항상 표적을 찾는다. 요나의 표적 외에 아무 것도 그에게 줄 것이 없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느낌, 우리의 내적 확신 또는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실체를 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적상태의 실체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 것처럼 불렀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는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와 대화를 나눴다. 그가 1차 대전 중에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만나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실제로 달콤한 물질을 받아서 먹었다고 한다. 믿는 대로 그에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밀가루, 빵, 케이크와 같은 것은 진실한 양식이 아니다. 진실한 양식은 평화, 행복, 기쁨에 대한 사고와 선의이다. 우리가 위대한 신의 진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이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어느 때나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당신이 맛을 보게 되는 하늘의 양식은 우리 자신의 의식 또는 내부의 정신적인 힘이다. 지금 당신 마음의 은밀한 장소에 들어갈 수 있고 거기서 온갖 훌륭한 것들에 대한 연회를 베풀 수 있다. 내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연회를 베풀면 외부 세계에서 결코 결핍을 겪지 않는다. 하나님 또는 법칙의 연회장 탁자는 항상 당신 앞에 있다. 우리가 먹는 빵은 신적인 사고이고 우리가 먹는 고기는 신의 힘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즐거운 느낌이고, 과일은 이루어진 기도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 내부의 정신적인 힘을 발견했을 때 다음과 같이 외친다. 황야는 지금 지상 낙원으로 변했다!

주께서 당신에게 먹으라고 주었던 빵, 즉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늘나라의 음식인 만나에 관해서 필로는 이렇게 적었다. “그대는 영혼의 양식을 보지 못하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로고스(빛, 진리, 신성한 사고)이다. 마치 이슬처럼 영혼의 모든 부분 속으로 스며들어 영혼의 어떤 부분도 모자람 없게 로고스를 공급한다.”

정신적인 만나는 지혜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에 물을 적시고 달콤함과 기쁨을 우리의 입 안에 넣어준다.

(32) 모세가 하늘에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만나를 공급해주었을 때 그것은 내부의 정신적 힘으로부터 오는 정신적 음식이 아니었다. 모세는 십계명과 그에 관한 성서의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하늘나라의 양식을 주었다. 만나란 의료적으로도 사용되는 물푸레나무의 수액樹液이다. 나는 어렸을 때 이것을 즐겨 먹었다. (나는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가 공중에서 만나 같은 물질을 먹었고, 구조될 때까지 이 신비스런 음식으로써 견디어 냈다는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양식이 아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갖 부를 다 가져도 평화, 기쁨, 건강, 행복, 사랑 그리고 웃음에 대해서는 굶주릴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내부에 계신 신으로부터 오고 명상과 기도로써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서를 읽어야 할
이유이다.

(34) 그러자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이 빵을 우리에게 항상 주소서.” 라고 하니 이것은 당신의 외침이고 세상 사람들의 소망이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우리는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만을 외부세상에서 경험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의식 상태가 우리에게 모든 경험, 조건, 사건들을 끌어온다. 마음 상태를 바꾸지 않는 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오래된 상태가 파괴되기 전에 먼저 새로운 것을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숭고한 기준에 따라 지적형태와 상을 바꾸게 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새롭고 대단한 경험을 할 것이다. 외부세계는 항상 마음의 내부세계를 반영한다. 왜냐하면 “안에서와 같이 밖에
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이란 제한과 좌절감에 대해서는 죽게 되는 때를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살아나고 정신적으로 깨어난다. 깊은 잠 속에 빠지기 직전 우리자신에 대한 평가가 마지막 마음의 형상이란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이 마지막 날을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관념이고,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환경들과 경험, 그리고 사건들로 부활하고 깨어날 것이다.

(53)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 란 소망의 실체를 느낌으로써 소망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상징한다. 피는 생명이다. 우리의 소망, 사고, 계획, 목적을 향해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한다. 지성과 감성은 하나로 일치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소망을 마시게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이 없고 죽은 것이다. 우리는 창조를 하여야 하고 소망을 우리 경험으로 만들어야한다. 우리 의식상태는 믿고 동의한 모든 것들에게 생기를 주고 부활시킬 수 있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의 말은 심리적 의미이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살과 피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어리석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근육, 뼈, 조직, 피로 변한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음식은 신의 피와 신체로 변형된다. 음식은 또한 에너지 형태로 변하고 사고의 중심지인 뇌 속으로도 들어간다. 이러한 사실들은 얼마 전 어떤 과학자가 말했듯이, 우리가 먹은 음
식이 두뇌 속의 사고가 된다는 이유가 될 수 있다.

(70)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우리의 마귀는 우리의 한계이다. 또한 우리 소망은 우리가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 강좌에 참석한 어떤 예술가는 그림의 배경색으로 회색이나 검정을 쓰지 않는다면 색감과 농도를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회색, 검정색이 다른 것의 아름다움을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슬픔의 눈물을 흘려 보지 않고 어떻게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고통을 겪어 보지 않고 어
떻게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결핍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는 부유富裕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열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중 하나가 유다라고 불리
는 제한과 한계의 느낌이다. 결핍감을 충족감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결핍과 궁핍을 느껴봐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는 이루고 싶은 야망이 있을 것이다. 현재 상태가 한계 속에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야망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문제를 통해서 성장하게 된다. 당신이 어려움과 문제에 봉착했을 때가 내부에 있는 신성을 불러내서 그것을 정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당신은 정복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극복하려고 하는 장애물이 없으면 결코 당신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아마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과 같을 것이다. 당신은
무형적, 절대적 상태를 떠나, 삼차원 세계라고 불리는 이 제한의 정형화된 상태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제한된 상태가 바로 당신의 마귀이다.

(71) 주께서는 시몬의 아들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해 말씀 하셨으니, 이는 그가 열둘 가운데 하나로 주를 배반할 자 였음이라. 유다란 내적으로 완벽함을 가져오게 하는 상태를 상징한다. 아마 지금 당신의 유다는 당신이 건강, 자유, 부를 원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결핍 상태는 당신을 자극해서 이런 결핍 상태를 충족감으로 채우려고 노
력한다. 그러므로 유다는 당신의 구원자를 배신한다.*강의에서 ‘배신하다’와 ‘드러내다’는 동의어로 쓰인다. 뒤에 자세히 설명된다 소망의 성취는 항상 당신의 구원자이자 구조자이다. 이 이야기 속의 예수님(계
몽된 이성)은 자신을 배신하는 인물을 제거할 수 없듯이, 같은 이유로 당신 역시 유다를 추방할 수 없다. 이 이야기를 물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것의 심리적, 정
신적 가치를 이해할 때 이것은 아름답고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

성서에서는 우리가 항상 가난 속에서 살게 될 거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제한과 한계를 경험해야 한다.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속박 상태에 있으면 자유를 원하게 된다. 전기, 화학, 물리, 천문, 형이상학 등의 분야를 보자. 이러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모든 것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서의 숨은 지혜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치 대양 속에 있는 고기 중에는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사람 눈에도 띄지 않은 고기가 있듯이, 어떤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의미 있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무한함 속에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다 드러낼 수 없다. 히브리서에는 내부의 신의 세계, 절대적인 존재 안에서 행위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당신의 제한과 문제와 어려움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한된 상태를 통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혜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당신이 사도 바울, 모세, 예수만큼 현명하더라도 도전과 장애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정신적 성장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성장의 여정에서 세상의 도전을 받더라도 예전과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당신은 동요되지 않고, 평화로움과 침착함을 유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문제를 신에게 떠넘기고 신이 그 짐을 지고 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당신은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기도와 명상으로 우리 문제들을 극복함으로써, 행동하는 신의 힘을 의미하는 그리스도를 드러낼 것이다.

모든 제한감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을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신이 의도하는 사람이 되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우리의 것이었던 영광으로 되돌아간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
에 있어 모든 귀한 돌로 단정했었다.에스겔 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