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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당신안의 평화. 요한복음 2장 해설-잠재의식을 바꿔라!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조셉머피

조셉머피, 당신안의 평화. 요한복음 2장 해설-잠재의식을 바꿔라!

柏道 2022. 8. 15. 19:51

잠재의식을 바꿔라!

조셉머피, 당신안의평화
요한복음 2장 1절

리그파
공식블로그

2장에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약 천 년 전, 술의 신 바커스도 비슷한 일을 행했다. 그래서 신약의 컵과 바커스의 술잔은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고대인들은 포도즙을 바커스의 피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것들은 의식의 변형을 통해 소망을 이룰 수 있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물을 술로 변화시킴 은 기도가 응답되어 기쁘다는 것을 나타낸다.
건강에 대한 의식이 건강을 가져오고, 부에 대한 느낌이 부를 가져온다. 의식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에 당신은 당신이 자신이라고 받아들인 것을 경험한다. 포도를 짓눌러서 포도즙을 얻듯이, 당신은 자신이 소망하는 그 모습이라고 느낌으로써 소망을 실현한다. 당신이 갈망하는 상태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산다면, 이 지적 분위기는 점차 채워져, 마치 흠뻑 물을 머금은 구름이 비가 되어 떨어지듯이, 소망의 강우降雨도 이 땅에 쏟아질 것이다.
바커스는 환호와 즐거움의 신으로 묘사된다. 시인들은 이 신화적인 존재에 대해서 많이 찬미해 왔다. 바커스(그리스. 로마신화 주신酒神), 오사이리스(고대 이집트의 저승을 지배하고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신),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에서는 바커스라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고 또한, 포도재배와 관련하여 술의 신이 되기도 한다), 힌두교의 크리슈나, 그리고 하늘의 신과 하나님 그리고 빛의 신을 의미하는 아도니스는 내부에 있는 신의 존재를 의미하는 용어들이다. 위에 언급한 이름들은 진리가 쓰고 있는 외형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물 항아리를 신의 석상 발밑에 두는 의식이 있었다. 하루 밤이 지나면 그 물은 술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술을 대중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바커스의 피라고 불렀다. 물론 이 장에서 포도주는 정신적 양식, 신의 지혜를 말한다.
오마르하아얌(페르시아의 시인, 수학자, 천문학자)의 루바이야트(4행시집)에서는 술과 빵의 연회를 언급하고 있다. 지혜, 진실, 그리고 미美에 대한 인간의 연회에 대한 이야기가 신의 양식으로 일컬어진다.
포도주를 마시다 라는 구절은 신의 진리를 되새겨봄으로써 마음 안에서 고무鼓舞, 기쁨, 그리고 사랑이 솟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내적변화가 일어나면 새로운 인간이 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술(How to attract Money 2장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내용 참조), 즉 삶의 새로운 관점을 마시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는 기도를 결혼식 연회에 비유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다.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무한한 존재의 사랑과 힘, 지성이 있다. 여기서 모든 문제는 그 해결책을, 갈등으로 가득 찬 마음은 평화를, 지친 이에게는 힘을, 병자에게는 건강을, 혼란스러운 사람에게는 빛과 지혜를 발견한다.
지금 우리는 마음속에서 카나에서의 혼인식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카나에서의 혼인식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드라마이다. 당신은 내부에서 이런 모든 심리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

(1) 셋째 날에 갈릴리 카나에서 혼인식이 있었는데 예수의 모친도 거기에 있더라.

갈릴리는 당신 마음, 의식을 의미하고 카나는 줄기, 가지, 당신의 소망을 의미한다. 여기서 혼인은 당신 소망의 정신적, 감정적 결합이다. 예수의 모친은 당신의 이상과 소망에 도전하고 의심을 상기시키는 결핍과 공포이다. 당신은 아마 이 글을 읽는 중에도 어떤 것에 대한 기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그것에 대한 도전이나 반대는 없는가? 이것이 예수의 모친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아이엠(I AM), 즉 당신의 의식이다.

(2)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혼인식에 초대되었는데
여기서 제자들이란 모든 혼인식에 꼭 참석해야 할 마음의 기능이다. 당신은 소망, 목적을 가지고 마음의 혼인식에 참석하고 있다.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신부, 즉 올바른 느낌을 불러내야 한다. 트라워드는 “느낌은 법칙이고 법칙은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3) 그들에게 포도주가 부족하므로 예수의 모친이 그에게 말하길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고 하니
요한복음 2장 53

포도주는 당신 이상의 실현을 상징한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란 결핍이나 의심을 암시한다. 이것은 외부의 현상과 세상 사람들의 판단, 그리고 타인의 견해로 초래된 긴장, 걱정, 마음을 사로잡는 공포이다. 이런 것들이 당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당신은 이런 의심과 공포를 어떻게 정복하는가? 그 해답은 다음 절에 나온다.
(4) 여인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은 모든 부정적 사고를 완전히 거부하고, 오직 하나의 힘이 있고 공포는 그것을 지속시켜주는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뛰어나고 독특한 표현이다. 당신은 공포와 의심이 실체가 없는 사악한 그림자들의 잡동사니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사고의 힘이 전능인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만끽滿喫할 때, 당신의 승리는 확실시 된다.
당신이 인식하는 모든 부정적 사고와 암시는 환상에 불과하고 결국 오직 하나의 힘인 신, 바로 내부의 살아있는 전능의 영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기도에도 사용되는 논쟁 방식이고 100년 전 큄비*큄비 (1802-1866) 신사상 운동의 아버지. 행복은 믿음에
의해서 결정되고, 생명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고, 우리 내부에는 우주적인 영혼(지혜)이 존재하며,
이 완벽한 지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함.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행함에 의해서도
행해졌다. 이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도 항상 신의 전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공포가 사라지고 믿음과 확신이 마음을 채우면 당신은 소망과 하나가 되고 그 실현과 축복이 삶 속에서 일어난다.
(4)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아직 마음속에서 확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5) 주의 모친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 고 하더라.
종들은 우리의 사고와 느낌, 다시 말해서 마음의 기능과태도이다. 기도할 때 자신이 달성하려는 것을 향해 자신의 사고의 주의와 전념을 명한다. 다른 쪽으로 빠지게 해서는안 된다. 마치 당신 가게에서 점원들에게 일을 시킬 때와 같은 방식이다. 당신이 자신의 높은 소망, 예를 들면 건강이나 원하는 지위 등과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종들(생각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실패하면 기도는 무력화 될 것이고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 마치 제자리걸음을 걷는 군인
같이 마음속에서 어떤 목적을 향해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시간은 오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자신의 목표와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주관적으로는 사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이 치유되기를 기도한다고 가정하자. 아직 눈은 낫지 않았지만 지금 당신의 마음과 신체에서 활동하는 치유의 존재에게로 헌신을 다하고 계속 기도하면 결국승리한다. 처음에는 이 기도의 모친(느낌)은 당신에게 결핍을 되새기게 한다. 하지만 당신이 명상하고 기도함에 따라, 당신의 모친(분위기)은 확신과 믿음, 오직 하나의 힘에 대한 신뢰로 변한다. 승리와 만족의 느낌은 다음 절에 표현된다.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
(6)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따라 한 통에 두세 메트레타를 담는, 돌로 된 물통이 여섯 개 놓여 있는데


니콜 박사는 여기의 물은 진리(돌)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라고 말한다. 그는 정신적 지식과 인식에 대해서 언급한다. 돌은 진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물은 그 문자 뒤의 심리학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포도주는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해서 일어나는, 내적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내적 기쁨임을 언급한다. 여섯은 창조의 6일 또는 인간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창조적인 일을 지시하는 명령이다. 이것은 정화되고 깨끗하게 되는 과정의 발생 또는 오래된 과거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섯six과 성교sex는 동의어이다. 여섯개의 물 항아리는 소망의 주관적 실현을 가져오는 심리적 주기이다. 이것은 그의 의식의 상태나 믿음에 따라 한 순간 또는 몇 시간, 며칠, 또는 몇 달이 걸린다.
(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통을 물로 채우
라.” 고 하시니, 그들이 아구까지 채우더라.
기도할 때는 외부세계와 자신을 완전히 격리하고,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아는 내적확신에 도달할 때까지 원하는 결말이나 해결책을 명상해야 한다. 이런 지적mental, 감정적 행위가 끝난 후에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기도할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것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것이 그들이 아구까지 채우더라 의 의미이다.
당신은 실제 당신이 갈망하는 상태에 있다는 느낌으로가득 채워져 있다. 당신이 응답받은 기도의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울 때, 해결되지 않은 분쟁, 적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것 등이 끼어들어 올 공간이 없다. 당신의 모든지적 태도mental attitude는 당신 소망의 실체 속으로 흡수된다.
(8)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떠다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가져다주라.” 고 하시니 그들이 가져다주더라.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란 현재의식을 말하는데, 그것은어떤 착상이나 소망을 주관적 마음속에 심는다. 그러면 그것은 암흑 속에서 잉태되어 자라나 적당한 시기에 외부의세계로 튀어나온다.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간 것은 외부로 나타나게 된다.

(9) 그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나 (그 물을 떠 온 종들은 알더라.)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신랑을 불러서.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현재의식과 그의 오감五感이다.
현재의식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볼 때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은 물론 정형화 되지 않은 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포도주는 당신의 믿음에 따라 정형화된 의식을 의미한다. 그 물을 떠온 종들은 평화와 확신의 분위기를 상징하고 당신은 당신 기도가 이루어지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신랑을 불러서 의 의미는 원하는 이상이 마음속에서 하나로 결합된 상태의 스릴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가장 높은 이상과 결합 되었다.
(10)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나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었다가 사람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해 두었도다.” 라고 하니라.

사람이 진리 속으로 들어갈 때, 위의 절은 그에게 진실한것이 된다. 그는 높은 영혼과 야망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는 주위를 깨끗이 한 새 신랑이고 좋은 의도로 가득 찬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가끔 자신의 힘의 원천을 잊고 힘에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법칙을 오용해 동료들을 이기적으로 이용한다. 우리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만, 독단, 거만함에 빠져있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 모든 것은 법칙의 무지 때문이다. 힘, 안전, 그리고 부富는 외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의식으로부터 온다. 만약 당신이 무한한 존재와 파장을 맞추는 것을 계속 유지하면 항상 생명, 사랑, 기쁨, 그리고 행복의 술을 마실 것이다. 영적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Eternal Now이고 하나님의 존재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나 존재한다.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취해있다. 그들은공포, 슬픔, 그리고 다른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 취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소식은 하나님이 영원히 현재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사고를 바꿀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다.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지적 의복을 갖춰 입고 기쁨과 행복의 심리적 연회에 참석할 수 있다. 신은 당신의 사고에 즉시 반응하고 우리는 언제라도 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높은 정신 상태로 들어가라.
우리의 모든 이익Good은 지금 현재 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우리의 제한)를 떠나, 명상 속에서 우리의 소망의 실체를 상상해야 한다. 지금 의식 속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생활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의 객관적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외부로 표현된 믿음이다.(큄비)
(11) 예수께서 기적들 가운데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카나에서 행하시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더라. (12) 이 일 후에 주께서 그의 모친과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카퍼니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서 여러 날을 머물지는 아니하시더라.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14) 그런데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 모두를 양과 소와 함께 성전에서 몰아내고,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고 상들을 뒤엎으시며 (16)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고 하시니라. (17) 그때 제자들이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 라고 기록된 것을 기억하더라.

유월절은 의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인간이 무엇을 기도하든 간에, 그는 유월절을 거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어떤 분위기에서 다른 분위기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유월절 행사는 마음속으로 당신 이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기도가 응답 받을 때까지 충실히 유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에 올라가시니라 의 의미는 사고思考로써 내부에 있는 신의 존재에게 향하는 것을말한다. 당신이 기도할 때, 성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성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끔 거기서 당신의 이익을 빼앗아가는 도둑, 강도를 상징하는 환전상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할 때 잘못, 공포, 비난, 질투, 분노를 내몰아내고 모든 이를 용서해야 한다. 외부상황이나 타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라. 성서에서 언급한 노끈으로 만든 채찍인 진리의 칼로써 모든 공포와 의심과 걱정을 당신의 성전에서 쫓아내라. 하나님의 힘이 유일한 힘이고 지금 그것이 당신을 위해서 움직인다고 주장하라. 힘을 가지고 있는 체하는 그 외의 다른 사고들의 목을 베어라. 이런 부정적 사고는 어디서 왔고 그들의 원천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것들을 지지하고 유지시켜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 배후에는 원리原理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힘은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에 대한 명백한 결론을 가지면 확신으로 채워지고 당신의 심리적 여행은 성공이 확실시된다. 마음속 진리의 명백한 선언에 의해 만들어진 이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이용해, 부정적 상태를 자르고 그것들과 당신과의 관계를 완전히 절단시켜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느냐?” 고 하니

많은 이들은 항상 증거물, 즉 표적表迹을 찾는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고쳐주면 다시 가르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여인을 보았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그녀는 어떤 표적表迹을 구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제안했다. “손이 완벽히 치유되고자 하는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세요.” 그녀는 그대로따랐고 마비된 손은 정상이 되었다. 유일한 표적은 당신의내적 느낌, 믿음, 확신이다. 당신의 표적은 당신 내부에서솟아나는 평화와 확신의 내적 물결이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치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확신과같다. 이것이 내적 믿음의 표적이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일 만에 이것을 다시 일으키리라.” 고 하시니라.
삼일은 삼위일체 또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첫째 날은 소망, 둘째 날은 의식으로부터 모든 공포가 사라질 때까지의 당신 소망에 대한 기도, 셋째 날은 내가 원하는 상태의느낌이나 확신을 의미한다.
(21)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 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이 절에서 언급한 몸은 그의 의식의 외적 표출인 것이다.

(22) 그후 주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더라. (23) 유월절 명절날에 주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더라.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아니하시니,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다. (25) 또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시므로 누가 사람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시더라.
이 절의 요점은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내부에서 스릴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 기도가 응답되었고, 그것은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