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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5장 해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조셉머피

조셉머피. 요한복음 5장 해설

柏道 2022. 8. 21. 12:19

조셉머피. 요한복음 5장 해설

(1) 이 일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시장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 라고 하는 못이 있고 행각 다섯이 있더라. (3) 그 안에는 수많은 병든 사람이 누워 있는데, 소경과 절름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더라. (4) 이는 천사가 어떤 때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 있든지 낫게 됨이라. (5) 그런데 삼십팔 년 동안 병을 앓던 한 사람이 거기 있더라. (6) 예수께서 이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시니, 그가 오랫동안 병든 줄 아신지라,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낫기를 원하
느냐?”고 하시니 (7) 그 병든 사람이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다 밀어 넣어 줄 사람이 없나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내 앞에 내려가나이다.” 라고 하니라.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서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명절은 원하는 것을 명상하는 심리적 향연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상징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니라 의 의미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평화를 명상하는 것이다. 베데스다는 안식처를 의미한다. 의식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신과 그의 법칙을 명상할 때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가게 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내부의 살아있는 전능한 영에 대해서 생각하라. 바로 그때 당신은 베데스다 연못 안에 있다.
다섯개의 행각은 우리의 오감을 의미한다. 오감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부정한다. 게다가 오감은 잘못된 믿음과 여러 종류의 제한을 우리에게 주입시킨다. 실현시키는데 실패한 우리의 희망, 꿈, 야망, 이상은 우리 안에 있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과 같은 병자이다.

양시장은 기도가 마치 시장 같이 서로 교환하는 장소란 뜻이다. 양은 우리가 실현시키려고 하는 사랑스런 상태이다. 결국, 우리는 결핍에 대한 분위기를 부유의 분위기로 바꿔야 하고, 질병에 대한 느낌을 완벽한 건강의 상像과 느낌으로 바꿔야 한다. 현재의식을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사고, 개념, 소망, 잘못된 믿음, 의심 등을 교환하고, 사고 팔수 있다.

오감의 지배를 받는 보통 사람들은 외부현상을 기초로 판단하면서 자신 내부의 창조적인 힘이 자신의 사고와 소망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한다 라는 말을 듣는다. 천사angel라는 단어는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소망이나 새로운 사고,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는 angelus라는 단어로부터 왔다. 당신 소망이 마음을 의미하는 못을 움직인다. 소망이 실현되어야만 비로소 평화가 온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에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소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장애를 보고 의심과 걱정에 휩싸일 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에 낙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누구라도 먼저 들어간 사람은 낫게 된다 라는 말을 듣는다.
아무도 당신보다 먼저 못(신의 존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고가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암시, 대중적 믿음은 당신을 압도할 힘이 없다. 외적조건과 타인의 암시는 원인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먼저 부정적인 암시에 영향을 받게끔 자신을허용해야만 가능하다.


신이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못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다. 신의 세계에는 분리나 분쟁은 없다. 게다가 전능에 도전하는 것은 없다. 당신의 사고를 하나님과 그의 치유력에 두면 당신은 전능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러면 이것은 실제로 신의 사고가 되고 당신의 사고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세상의 모든 공포와 부정적인 사고는 지금 당신 마음속을 파고들어올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유일한 전능인 신에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어떻게 당신의 이익을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과 하나인 자는 승리한다.’ 라는 의미이다. 원천은 사랑이다. 거기에는 공포란 없다. 트라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개의 무한이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른 하나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존 때문이야.” “메리와 수잔 때문에 난 승진할 수 없었어.”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불행과 어려움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린다. 성서의 언어를 빌려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내가 가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내 앞에 내려가나이다.

당신 몸이 치유되기를 기도할 때, 혹시 저 하늘의 별들이 당신이 가는 길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별자리 때문에 지금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에게 우선권을 주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분리된 마음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힘에 대해 최고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분리되고, 따라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은 마음속에서 분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우주에 있는 원자, 분자의 집합체를 경배하는가? 별들을 만든
하나님을 믿어라. 이것이 바로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성한 연못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것은 당신 가슴속에서 사랑의 등불을 켜, 당신이 가는 길에 영원히 그 빛을 밝힌다. “나는I AM”이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인칭이고 현재시제이다. 당신 누이에게 말할 때는 “당신은”이라 말하고 제 삼자를 말할 때는 “그는 또는 그들은”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편篇에 관한 우리 강좌에 참석한 한 여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나만이 ‘나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나대신 이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원하는 상태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지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움직이고 나의 실체를 두고 있다. 어떤 사람, 어떤 것도 내 앞에 끼어들어올 수 없고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와 같은 기도를 행함으로써 괄목할 만한성과를 이루었다.

외부환경, 날씨, 타인, 그리고 세상의 결과물에 힘을 주는 것을 멈춰야 한다. 결과를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이젠 멈춰야 한다. 오직 하나의 힘인 당신 안의 영혼, 당신의 인식과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자 한다면 알 수 없는 신들과 관념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향해 흐르던 당신 내부의 힘을 멈춰야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의 완전성, 완벽성을 받아들여라. 당신의 의식이라는 연못을 움직이게 하는 천사는 당신의 건강에 대한 소망이다. 병든 사
람은 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그것이 자신 바깥에 있다고 믿는다. 자신에 대한 실체의 진실을 점차 깨닫게 됨으로써, 치유력이 자신 내부에 있고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성서의 과학이나 숫자적 상징에서 삼십팔 년이란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정신적 성숙에 이르게 되는 나이를 의미한다. 숫자 삼십은 삼위일체 또는 마음속의 창조적 활동을 말하는 것이고, 숫자 8은 8개의 음조인 옥타브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정신적, 영적인 법칙에 대한 앎을 통해 더 높이 올라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상징한다.
치유에 대한 삼위일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정신적 힘이 최고이고 전능이라는 사실을 인정.
둘째 : 건강에 대한 당신의 소망.
셋째 : 완벽한 건강을 마음속에서 받아들이고, 당신의 믿음에 응답하는 전능한 힘에 대한 앎을 가지고 완벽한 건강에 대해서 느끼고 믿고 요구하는 것.
숫자 팔은 치유가 일어날 때 생겨난다. 팔은 두 개의 원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또는 사고와 느낌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상징한다. 소망과 감정적인 면이 일치되면 그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어떤 분쟁도 생기지 않아 치유가 일어난다. 이 장에서 나온 이 훌륭한 이야기를 지금 적용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인생에 경이로운 일이일어난다.
예수님, 즉 당신의 계몽된 이성의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는 명령은 당신이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내적인 확신이다. 이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명령이다. 당신은 침상(진리)을 들고 자유롭게 걷게 되었다. 이런 모든 일들은안식일 날 일어난다.

안식일이란 진정한 기도 후에 일어나는 내적확신 또는 고요함이다.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는 편안한 의식의 지점이다. 왜냐하면 내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당신 소망의 부활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음속 깊이 믿을 때 “언제”, “어떻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소망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묻지 않게 된다. 당신이 지적 여행의 끝 지점에 도착하면,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당신이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나는 여기에 있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거기 있다.
항상 이용 가능한 하나님 속에서 걷고 그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산다면 항상 안식일 속에 있는 것이다.

(9) 그 사람이 즉시 나은지라.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가니 그 날은 안식일이더라.
많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외적으로 거행한다. 그들은 안식일 날 나무에 못을 박는 일과 같은 것을 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터무니없다. 그들은 안식일이 내부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어느 때고 선의와 진리와 아름다움과 풍요라는 의식 속에 머문다면 안식일을 거행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가능한 반복은 피하고, 이 장에서 중요한 절만을 다루겠다.

(17)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
우리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의 협력과 조화가 필요하다. 지적인 면이나 감정적인 면에서
어떤 논쟁이나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둘은 일치하여야한다. 이 두 개가 어떤 것에 관해서 일치하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만약 당신이 자기 전에,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당신을 그때 깨울 것이다. 이것이 위 절의 의미를 단순하게 설명한 것이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나니 아들은 사고, 생각, 마음, 또는 표현을 의미한다. 우리 마음이 심판하고 비난한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한즉*잠언 23:7
우리 사고와 우리 자신에 대한 개념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
(30)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라. . .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좋은 소식을 듣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태도를 을 존경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아들을 존경해야 한다 의 의미는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높은 개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높
은 개념을 가지고 이것에 대해 스릴을 느끼고 사랑 속에 이
개념을 밀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만
약 우리가 행복하고 고양高揚되고 즐겁고 빛나는 상태에 있
지 못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라. 또 나의 심판이 의롭다.
이 절의 의미는 인간의 이성적 마음인 현재의식은 창조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주관적 자아가 해결책을 알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어떤 행동을 하면 그것과 상응한 것을 돌려 받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심판은 의롭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마음의 법칙을 작동시킨다. 결심과 논리적 사고 같은 지적행위는 현재의식에서 일어난다. 절대적인 것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도달한 결론, 즉 판단은 그렇게 내려진 생각과 결심에 따라 자동적으로 법칙을 작용시켜 결과를 만들어낸다.
판단이나 결심이 현명하다면 그에 걸맞은 반응을 경험할 것이다. 만약 판단을 잘못하고 심각한 실수를 했다면, 종종 복수라고 불리는 결과나 그에 걸맞은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법칙의 세계에서 불균형이나 편애는 없다. 작용과 반작용은 항상 같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고 또한 알아야 한다.
(39)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
많은 이들이 성서를 자세히 조사하고, 자유롭게 인용한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인 것에만 집착하면서, 생명을 주는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내적인식이지, 의식이나 의례 혹은 예배나 성서의 인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 있어서는 신비스런 내적고상高尙, 영적으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려는 진지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계시啓示는 분명히 뒤따른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라.
모세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소망과 목표와 이상을 끄집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의 소망, 이상이 마음의 다른 차원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믿으면 우리는 신God, 즉 이익God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망이 실현되면 우리는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되기에우리의 구원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