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3장 예수와 과학 본문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3장 예수와 과학
사랑
2021. 10. 5. 11:45
예수의 이름을 과학과 결부시켜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실천적인 대답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십중팔구 예수가 과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종교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현존에서 경험한 가장 놀라운 계시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그의 사랑과 현실에 대한 그의 지휘를 직접 보는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그 많은 날들 동안. 예수는 한번도 현실을 분리된 범주로 떼어내지 않았다. 또 그는 신학을 한쪽 구석에 과학을 반대쪽 구석에 놓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 모두가 현실이었다. 공중과 마루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체조선수처럼 예수의 은혜는 고정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한 덩어리였다.
이 장에는 일부 독자들에게 비과학적인 듯이 보일 신과 영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에게 과학은 모든 현실에 내재된 실행력에 대한 연구, 그것의 근원이 고려되어야만 완결될 수 있는 연구다. 또 순수물리학의 영역에서도 예수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것에 놀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출간하기에 앞서 나는 그 중 일부를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는 영적인 진리를 듣게 되리라 기대했는데 이건 순수과학이야!'라는 식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모든 기간에 결쳐 예수는 몇 번이나 싦의 작동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이 설명들 대부분은 그 설명들이 이루어진 본래의 문맥, 즉 그것들이 예수의 다른 메시지들과 더 깊은 관계를 갖는 지점들에 남겨두어야 했다. 따라서 내가 이 장에 모든 것들이 그가 실존의 구성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한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장에서 과학적 이해의 장래와 그런 이해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우선순위와 발달에 조명을 비춰준 그런 계시들을 주로 모았다. 과학을 놓고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내게 가장 큰 가치는 그 주제에 대해 그의 시각을 받아들인 것에 있다.
"과학은 진리와 현실간의 대화요" 예수는 말했다. "당신은 자신앞에 우주 전체를 가지고 있지만, 당신이 진리와 현실간의 결정적인 관계를 이해할 때까지 과학을 가진 것은 아니오"
예수가 내게 폈던 그 모든 가르침들 중에서 진리라는 주제보다 삶의 영역 전체와 더 관계 깊은 주제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독점하려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진리의 역사는 피와 전쟁의 자국을 남기면서 흘러왔다. 그럼에도 예수는 '진리를 아시오. 그러면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심오한 계시가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과학적 발견의 형태로 있게 될 것인가? 말하자면 법칙을 다룬 학술논문들과 놀랄 만한 몇몇 새로운 현상들 속에서 발견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진리 자체의 본성'에 대한 최종적 명확화로 있게 될 것인가? 나는 후자쪽이 좀더 가능성이 크다고 믿고 싶다. 게다가 외적 현실이라는 우주 배경에 비추어 진리의 본성을 설명한 예수 자신의 가르침도 나의 이런 선호를 강화해주고 있다. 예수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하고,
바로 이것이 실존 전체를 통해 발현된 신의 본질이자 현존이오"
이 현실은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감각과 모든 감정, 과학에 알려진 모든 수단으로 인식할 수 있다. 현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의 통합된 일관성 덕분에 어떤 지각상의 접근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눈과 코, 입천장까지 모두가 맛있는 체리파이의 현존을 확인해준다. 이것은 과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수학적으로 확장된, 보완하는 여러 근거에서 나온 자료의 비교가 우리가 증거 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실이란 현실의 특정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의 끊임없는 과제들을 이행하는 일관되고 측정가능하고 편향되지 않고 균일하게 예견할 수 있는 성격의 실존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현실에 대해 갖는 유일한 의무는 그것을 정직하게 체험하고 인식하고 보고하는 거요.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있으니, 그것을 정직하게 보고 그것과 상호 작용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활용할 수 있소, 지적 엘리트나 특권층이라고 해서 현실을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는 없소. 그것은 오직 체험과 관찰과 비교와 통합과 정직으로만 확인할 수 있소, 현실 이해는 그가 삶 속으로 더 많이 뻗어나갈수록 자라죠. 현실은 모든 생명과 인간에게 창조주가 민주적으로 나눠준 선물이오. 이 선물이 효력을 다하는 건 그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나름의 관점에 상용하도록 현실을 바꿀 수 있을 때요.
반면에 진리란 현실을 초월하여 그것을 단순한 이해로 증류해내는 의식의 넓이와 깊이요. 말하자면 외적 의존과 조건의 한계성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진리요. 이 때문에 진리는 항상적이지만, 그것의 항상성은 체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하오. 그러기에 개개인이 초월적 자각에 이르는 길은 모두가 다르다오.
진리는 공통의 현실에 그 뿌리를 갖지만, 어떤 원형이 있는 것은 아니오. 알다시피 진리는 그것이 봉사하는 현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소. 진리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소. 신은 성스런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고, 우주 또한 자신의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나는 내 진리로부터 당신은 당신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소. 궁극의 통합이라는 이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존중이오.
당신들이 진리가 다른 어딘가에 있거나 완벽하게 질서 잡힌 원초영역에 모셔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오랜 기간에 걸친 인간의 부정직 때문이오. 진리는 실존의 살아 있는 부분이고, 당신들 항해의 컴퍼스(나침판)로서 의미와 확실성과 목적을 항상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존재요. 진리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아마도 먼저 진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현명할 거요.
진리를 당신들의 상아탑에서 해방시키시오. 진리는 현실을 앞서나가지도 않고 현실을 형성하지도 않으며 근원으로서의 신을 대신하지도 않소"
예수는 진리에 원형이 있다는 철학적 오해보다 더 우리를 현실에서 떼어놓거나. 진리를 향한 진솔한 추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오해가 갖는 문제는 고정된 발상들이 뒤이어 나타나는 현실의 새로운 측면들을 검토하는 '진리의 기준자'가 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무구한 인식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과학적 절차에 관해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출발한 그 자리가 현실이라면, 진리는 항상성의 유형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당신이 증류해내는 것이오. 진리는 삶에 대해 쓸모 있고 유용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해의 완성이오"
이런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예수의 논의에 불가피한 서론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에 따르면 "다른 모든 이유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많이 과학의 진전을 가로막는 데 기여한 것이 진리에 대한 오해나 오적용"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토에 대해 언급할 때였는데. 예수는 플라톤을 분리의 논리를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원형이고, 현실은 쉽게 변하는 불완전한 대용물이라고 낙인찍은 바 있다.
플라톤 논리의 예술적 아름다움과 그의 정신적 통찰력의 지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철학이 서양과학사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은 막대하다. 또한 그 철학은 완벽 속에 거하는 창조자는 불완전한 현실의 고밀도를 통ㅇ해 '피조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식의 몇몇 잘못된 가정들을 지적으로 강화해주었다. 하지만 현시리과 무관하게 생겨난 이데아(관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현실을 존중치 않고 형성된 관념들은 진보와 참된 실행력이란 면에서 부정적이고 정체시키는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예수는 말했다.
"이상주의 철학의 문제는 그것이 진리를 원형적 관념으로 여기면서 현실은 이 원형적 관념에서 약간 불완전한 형태로 유래된다고 보는 데 있소."
이런 관점에 따르면, 현실은 무작위적이고 근사치적이고 불완전하게 밖에 이상에 조응하지 않는다. 지적 이상주의는 진리를 원초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현실을 파생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식으로 우주에 접근하는 것은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합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우주에 대한 선입견이기에 객관성을 파기한다. 둘째로, 현실은 불완전하다는 전제가 부주의한 관찰과 부정직한 보고와 이기적인 정당화의 구실이 된다. 이것은 떠받들고 있는 '고정관념'과 관련하여 불일치가 예견할 수 있는 오차범위로 무시될 수 있을 때 특히나 두드러진다.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전쟁은 둘 이상의 고정관념들 사이에 존재하는 풀리자 않는 갈등 때문에 벌어졌다. 다른 모두를 지배할 수 있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야생거위 쫓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지성과 시간이 낭비되어온 것이다.
"그런 추구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진리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말죠. 왜냐하면 진리란 예전에는 갈등이 존재하던 곳에 평형과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항상적 요소이니까요. 배움은 끝이 없고, 그 길은 천국과 지상 모두에서 완성을 이루는 길이요. 하지만 미화된 앎으로 들어가는 미끄러운 높은 선반들은 위험스런 추락만을 불러와 분리를 초래할 수 있소.
진리는 원형이 아니오. 신도 원형이 아니오 ! 현실이 기본이오! 진리란 체험에서 그것이 갖는 항상성과 그것이 삶에 가져오는 평형력으로 구체화되는 이해의 완성이오.
이것이 신과 과학을 통합하는 등식이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현실에 접근하여 거기서 진리를 증류해내는 건 올바른 과학적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다음 예수는 덧붙였다.
"진리나 이론을 이상적인 개념으로 규정한 다음. 현실에서 그 이론을 구체화하기에 적합한 증거를 뽑아내는 쪽으로 나가는 건 부정확한 과학 방법이오. 과학의 목적은 현실을 입증하는 것이지. 이론을 증언하는 게 아니오! 현실은 워낙 방대해서 충분한 증거를 도외시하고 오차범위를 충분히 넓게 둘 수만 있다면 이론에 부합하는 현실은 언제라도 찾아낼 수 있소"
그는 이론에 지배되는 과학은 유독물 배출산업과 짝을 이루는 무신론적 개념을 불가피하게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수의 이말을 듣는 순간, 나 역시도 과학으로 하여금 현실 대신 이론을 확정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도록 몰아가는 지배 동기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론은 '지적 재산'을 대표한다. 따라서 거기에서 유래하는 모든 행위도 독점권을 갖는다! 만일 신이 모든 생명에게 미주적으로 나눠준 선물이 현실이라면, 현실에 대한 확인은 우리의 공동 소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방법은 오늘날의 과학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긴 하지만 1세기 이상에 걸쳐 프라톤의 이상주의가 점차 사라져가자. 이제 과학의 정신이 현실을 직접 대면하고 있다. 우선적 실존으로서 현실과의 직접 대면을 중심응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20세기의 기념비적 도약들 중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20세기에 와서야 지작된 것은 아니다. 플라돈의 이상주의 철학과 나란히 자연을 '진리의 어머니'로 여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는 원초적이고 편향되지 않은 현실 체험에서 증류된다고 말했다. 현실은 우리의 이해를 위한 토대이고, 현실에 대한 조심스런 연구는 자연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과거에도 실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방법론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끌어낸 반면, 이론 과학자들은 플라톤에게서 자신들의 방법론을 끌어내곤 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후 과학의 이론부분과 실험부분은 그경계가 사실상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객관성과 과학적 지성이 커질수록 플라토의 이상주의가 뽑혀져간 것이다. 이렇게 이상주의가 제거되자 과학에서 신을 포함하는 중요한 논리 지점도 함께 제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신성에 대해서는 죽음 같은 침묵만이 견지되었고, 학술 집단내에서는 무신론이 뚜렷한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역설의 경이로움은 사이비 이상주의가 제거되자. 신의 실재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5년 무렵, 과학은 무한성의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 미세하게는 입자물리학에서 그리고 우주적으로는 은하 확장론에서 과활하고 이루 다 포괄할 수 없는 실존으로서 현실의 현존을 이보다 더 숭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5년부터 작은 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형이상학적 함축을 가진 무게 있는 과학 서적들은 그 후로 눈에 띄는 덩어리가 되었다가 지금은 작은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따금씩이긴 하지만 과학문헌들이 신의 개념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들도 있다. 물론 이 경우 신은 질서의 신이다. 왜냐하면 기적의 신은 과학영역에서 여전히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신에게로 데려다주는 것이 진리의 역할이어서. 진리가 바로 이일을 해내는가 아닌가에 따라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내가 이런 발달경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설명은 과학적 과정에 신학을 도로 끼워넣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는 건 플라토의 이상주의만큼이나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 게다. 이해를 위한 핵심은 신이 현실로부터 분리되지 않느니만치 현실을 정직하게 관찰했을때 증류되는 진리는 결국 신과 우주 모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키우리라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도 동일한 이 진리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 진리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질의 삶을 모양 짓는 데 이진리와 이상들을 결합할 수 있다.
다음의 그림은 진리를 삶에 실용적으로 적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과 관련해서 예수는 우리를 신에게로 다시 데려다주는 진리는 성스럽고, 우리더러 더 나은 세상을 세우게 해주는 진리는 이해의 실제 적용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예술가라 그런지 나는 이 도해에 이상과 미가 이런 식으로 들어맞는지 알고 싶었다. 예수는 이상과 미는 감각이 인식하고 가슴이 조화와 생명을 키워주는 유형에 초점을 맞춘 진리의 측면들이라고 설명했다. 진리는 과학만이 아니라 삶이 영역 전체에 속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과학은 일차 현실로부터 기능적 진리들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가다가 그 다음에는 실제적 적용으로 나아갑니다. 이상화를 과학의 세계 속으로 도입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많지만, 그건 적용을 완성시키고 그것들의 내재된 성질을 규정할 대만 그렇소 고전 공학의 원리를 받아들여 이상주의적 세련화로그것들을 완성시킨 멋진 예가 버크민스터 플러의 업적이오.
'이상'이 과학과 관계하는 또 하나의 상황이 있소. 하지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과학에 이상을 부과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오. 그렇게 하는건 원형적 진리에 대한 추구만큼이나 어리석고 퇴보적인 일이 될것이오.
지금 시점에서 과학은 여전히 외적으로 객관성이라는 기준들을 지향하고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소, 이건 과학방법의 현재 수준에 비추어 올바르고 필요한 일이오. 하지만 과학이 이제 진리에 대한 더 위대한 정의로 도약하는 문턱에 와 있는 거도 사실이오. 그때가 되면 이상은 과학에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될 것이고. 이상이 현실을 유산시키거나 할 위험은 전혀 없을 것이오"
잠시 망설인 끝에 내가 물었다.
'당신이 제게 그 위대한 진리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제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소 난 그렇게 생각하오. 왜냐하면 당신은 화가로서 당신의 작업 속에 이미 그것을 쓰고 있으니까요. 사실 이 위대한 진리는 과학의 외부에 있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인지하고 활용하여 그것의 권능을 입증하게 될 것이요"
그렇다면 그게 뭐죠?"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진리의 궁극점은 내면과 외부가 하나가 되는 지점이오. 당신이 어떤 상황의 외적 요소들을 아무리 완벽하게 연구하고 관찰하더라도, 내적 자극력이 위치한 지점과 그것이 외부와 맺는 관계를 알아낼 때까지, 당신은 완벽한 진리를 알 수 없소. 반면에 당신이 내적인 것을 아무리 잘 이해하더라도 그것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까지 당신은 완벽한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오
우주는 안팎으로 한 덩어리요. 안과 밖 사이의 완벽한 균형 지점에 물질과 에너지와 공간과 시간이 무한 잠재력의 '비저항'속으로 옮아가는 초공시성의 상황이 있소, 이것은 물질의 붕괴가 아니요. 이것은 완벽한 균형이라는 '제로점'에 그것을 동조시키는 것이오(예수는 균형이 초공시성의 완벽한 정지상태라고 설명했다)'제로점'이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시오. 그것은 무한을 나타내는 거요. 이것을 알 때 0이 수학에 대해 했던 역할을 물리학에 대해 하게 될 것이오 모든 경계를 넘어서 그 ㅡ잠재력을 확대하는 역할 말이오.
초공시성은 당신이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유형과 리듬과 비(比견줄비)와 조화들의 궁극 근원이오. 이것을 알면 이상이란 개념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가 부여될 텐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정신이 만들어낸 외적 원형으로서 이상을 우주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은 우주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도 이해하게 될 것이요"
그런 다음 그는 단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신은 참된 이상을 창조할 수 없소. 정신은 원인물이 아니라 파생물이오. 그것은 당신들이 피조물로 여기는 것과 똑같은 이상적인 상태에서 유래되었소. 그런 혼동의 원인은 초공시성의 상태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데 있소. 그 성스런 지점에서 자각이 떨어져나오고 나서야 원인과 결과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게 되죠. 정신은 그 전형적인 양극성 때문에 실제로는 결과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원인 요소로만 기억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는 내가 다음에 무엇을 질문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상하게도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소. 원초 원인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의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하는 보편정신이란 게 있소.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정신과 달리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면서 작동하지 않소. 그건 절대로 초공시성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나눈 많은 대화들 중에서 그가 보편정신, 혹은 우주정신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대목이 이것이었다. 아마도 말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이 단 하나의 문장 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리라. 어쩌면 그건 예수가 내 마음이 자신을 권능 있게 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주제에서 내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수는 내 주의가 성스런 가슴의 위대한 지성으로 돌아가도록 끊임없이 환기시키곤 했다. 실제로 예수는 우리 대화의 이 부분도 각 사람 내에서 내면과 외부가 하나 되는 지점이 성스런 가슴임을 내게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맺었다.
"당신 개인의 진리가 담겨 있는 곳이 여기요. 성스런 가슴 속에는 어떤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성이 있소,"
나는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과학적 함축으로 무르익어간 에수의 메시지를 곰곰이 숙고하는 것으로 그날 오전을 보냈다. 그날 늦게 우리가 보편 현실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갔을 때, 나는 그 주제를 더 깊이 탐구해보려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왜 인과가 우주의 근본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하는 현상의 파생적 발현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싶었다. 초공시성의'제로점'이 완벽한 균형이라면, 그렇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인과가 일어날 수 있는가?
예수는 설명했다
'완벽한 균형은 완벽한 평형인 성스런 지금이오. 모든 것이 이 성스런 지금에서 모습을 취하지요. 그러고 나면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에게 반응하는 전체의 다양한 부분들이 상호교환을 일으킵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상호작용은 모든 부분이 서로를 지원하는 단순한 조화에서부터 밀도가 쌓이는 모순과 부조화의 발달까지를 포괄할 수 있소, 이렇게 되면 조화를 유지하는 데 더많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게 되죠. 이것이 인과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가로질러 상호작용하고 다시 균형잡는 보편 수단이 이것이니까요. 상호작용의 세 양식 모두가 우주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완벽한 균형 속에는 완벽한 동시성이 있고, 분리의 극단에서는 인과의 법칙이 우세하요. 그리고 이 두극단 사이에서의 실존 경향은 상호성이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나는 사랑과 금강입자들과 영으로 이루어진 대삼각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가 그려냈던 완벽하고 멋진 통합이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는 사랑이 근원이라고 즉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생명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권능이라고 설명했다. 금강입자들은 모든 실존의 총괄적이고 보편적인 몸체를 이룬다.
영과 관련해서 예수는
"오직 한영, 연속되고 쪼개지지 않는 모든 실존의 바탕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영은 모든 것 속에 있고, 만물 주위에 있으며 만물과 더불어 있고, 만물을 이루고 있다. 영이 있지 않은 곳은 없으니, 만물은 떼어낼 수도 나누어질 수도 없다. 그건 궁극의 결합이고 참된 통일장이다.
20세기 과학의 발견과 가설들은 우주 및 창조과정에 내재된 정연성과 함게 여전히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그들은 기본적으로 특정 조건들하에서만 개별의 물질 발현으로 펼쳐지는 잠재력의 쉼 없는 흐름으로 실존을 보고 있다. 통일장 이론이란 개념이 과학 집단들내에서 워낙 논란이 되고 있던 터라 나는 예수에게 물었다. "단일성이란게 타당한 개념인가요?"
"한 영과 모든 실존의 고도로 통합되고 동시적인 성격 때문에 단일성의 측면이 존재하긴 합니다. 비록 그것이 입자나 점은 아니지만요. 실존의 한 부분이나 모든 부분을 무한한 잠재력의 단일 상태로 압축할 수 있는 것이 초공시성의 기능이요. 따라서 분리의 한 측면으로서 절대적 '단일성'은 존재하지 않소. 분리는 그 정도로 존중받지 않소"
우리가 분리에 대한 관념을 버리는 것으로 상대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이제 쉽다. 또 한 영이란 개념이 신성과 실제성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 고리인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는 문제는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사랑의 권능이 어떻게 입자 물리학의 영역으로 확장될까? 예수는 몇 번이나 말했다.
"사랑이 첫째고 우선이고 항상이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불러모으니까요. 사랑은 결합을 점화시키고, 입자들을 결합시키며,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것의 물리적 대리인이 자기(磁氣)요 이 힘이 물질 실존에 적용된 것이 압축이고요"
일차 자기(磁氣 끌어당기는 힘)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간에 예수가 그것을 사랑의 권능과 밀접하게 연관시켰던 건 분명하다. 예수가 물리적이자 창조의 근원이고 그것의 유지자로서 사랑의 성질을 밝혀준 건 사전의 많은 대화가 있고 난 며칠 후였다. 예수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힘이 남녀간의 애정 깊은 결합의 달콤함이나 세상이 흔히 사랑이라고 여기는 '초콜릿과 장미'로 상징되는 감정이 아님을 내게 여러 번 주지시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감정들이 사랑의 현실적 권능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이런 것들뿐이라면 우리는 삶을 설명하지도 완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랑의 권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수는 언제나 지극히 공경하는 태도로 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권능에는 이 문맥에서 함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과학적 요소가 있다. 나는 이제 비할 바 없는 공경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경이로운 정보를 나누고자 한다.
"당신이 사랑의 역할에 대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역전, 즉 두 보완력이 제3의 안정요소가 나타남으로써 서로 양식을 바꾸어 상대방이 되는 작용점으로 생각하시오. 일차 자기와 압축이란 게 이런 것이오. 그것은 일차 입자와 에너지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작용이오. 유기생명체 내의 DNA는 복잡하고 신비로운 작용을 끌어가도록 짜여져 있소, 이것은 모든 유형의 구조에 앞서고, 그것을 대신하고 능가하며 그것을 단순한 유동성으로 바꿔버리는 역설의 신비이기도 하오"
나중에 예수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했다.
"사랑의 이 일차권능은 자신 안에 '자기 인식'과 '자기 인정' '자기 대화'의 작용을 가지고 있소, 이것은 당신이 사랑을 있음으로 여기든 에너지로 여기든 상관없이 사실이오. 그것을 '참나 I AM'의 힘이라 부를 수도 있소,
전체가 내면화된 교감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알아채게 되면, 잠재력의 차이가 설정되고 그것의 활성화가 시작되죠. 이와 동시에 정태적(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의 것) 영역, 중립성 속에 존재하는 상수를 고립시켜 활동적인 변수가 되게 하는 수축과 이완행동이 있습니다. 이 영역을 에너지를 기능적으로 압축하고 확장하기 위한 '제로점'이 작용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소.
한 요소가 다른 요소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의 외부 원주는 결코 결정될 수 없소. 전체는 그것의 경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특성과 자질에 의해 표시되죠. 하지만 그것의 중심은 '0'으로 나타낼 수 있소. 이 지점에서 확장하는 힘들은 방출되는 에너지를 제곱으로 증가시키죠. 이와 동시에 활기찬 긴장의 측면을 매개로 에너지는 확장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이전됩니다. 이런 역전에 의해 회전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자기의 스프링 힐을 움직이죠."
나는 오늘날까지도 이런 사상의 경이로움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설명은 내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창조의 또 다른 측면에 그윽한 풍부함을 보태주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유용한 것으로 드러난 한 가지 놀라운 사상은 이것이다.
"자기는 일차 에너지에 내재되어 있소, 당신 자신이 이 에너지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기술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자기 인식과 자기인정을 통해 그것과의 연결을 안정되게 하는 거요"
이런 설명은 우리가 사랑을 자기인식의 토대로 인정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에너지의 일차 원인들인 사랑과 자기와 압축은 창조된 발현의 먼기슭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준다. 그럼에도 효과적인 기술적 접지선을 통해 잠재력의 이들 원천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능력 밖이다. 그 순간에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사고와 작용의 구조들이 이 경계선 안으로까지 확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체 우주가 압축 위에 세워졌고 이것이 에너지의 법칙이라는 그의 설명에 특히 관심이 끌렸다. 간단히 말해, 압축이 에너지를 낳고 확장이 에너지를 발산한다. 나아가 그는 모든 압축은 새로운 에너지를 낳는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관련된 의문을 불러왔다
"고정된 양으로 존재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될 수 있나요?"
" 우주 에너지가 쌓여져 있는 압축도는 어마어마합니다. 이것은 흔히 '빅뱅'이라 불리는 대폭발로 발산되죠. 이 대폭발로부터 광자가 발산되는데. 이것은 창조되고 있는 열역학 영역 내에서 운동상수로서 빛을 나타냅니다. 압축의 이런 발산을 통해 사람들이 공간이라고 여기는 눈에 보이는 거리와, 사람들이 물질이라고 아는 유형요소들이 형성됩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들은 물질과 에너지와 공간과 시간을 갖게 된 거요. 이것이 창조 과정에서 핵심이었소, 폭발을 통해 발산된 에너지는 사실상 그것이 형성될 때의 기본방식이 역전된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때 이후로 발산된 이 에너지는 비슷한 역전들을 통해 자신을 재생시키도록 조건지워진 '고정된 양'으로서 자신을 유지해왔소.
실존하는 가장 큰 구조가 보존 에너지의 통일장이오. 이 장은 고정된 에너지 양으로 이루어져 있소 왜냐하면 이 장은 파생물이고, 영구히 안정적으로 매달려 있으니까요. 그것을 구성하는 구조들은 엄밀하고 유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에너지의 끝이거나 에너지의 유일한 공급인 건 아니오. 사랑에 의해 활성화되는 금강입자들의 자유롭고 무한한 영역이 더 많은 에너지 공급을 나타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무한한 유통과 미래의 압축에 이용되죠"
예수는 이 입자들은 자주 '무한입자들'이라고 표현했고 과학이 금강입자들의 성질을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한의 성질과 통합된 전체성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는 보존영역 내에서 전기로 발생됩니다. 게다가 특정량의 자력이 유지되려면 전하된 입자들의 동일한 운동량이 요구되고요 따라서 이런 구성 내에서는 에너지의 근원으로서 잠재 자력에 직접 접근할 수가 없으니, 이런 한정된 구조에서는 일차 자기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할 거요. 그런데 전자기는 보존영역 내에서 일어나지만, 그런 극성화된 배열을 뛰어넘어 순수에너지로서 자기의 또 다른 기능이 있소, 자기는 더 큰 스펙트럼 내에서 무한 정렬로 활성화됩니다.
마음은 보존이 제공하는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소, 그 설명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요. 마음 또한 기본적으로 전기적이고 구조적이니까요. 당신들의 계산과 실험, 자료 수집 수단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소, 이 모두가 본디부터 전기적 우선순위와 극성쪽을 선호합니다. 나는 관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소.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통찰력'이라부를 수도 있소. 알다시피 인간의 관점이 지구 중심적인 한,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소. 태양 중심적 운동을 밝힌 관점의 변화가 있고서야 은하로 들어서는 문이 열렸지요.
보존의 법칙처럼 열력학의 법칙도 열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밀도영역과 관계가 있소, 그런 밀도영역들에서는 이 법칙들이 모든 실제적 목적에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열역학에는 실존 전체를 논리적으로 통합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무능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에너지를 초연한 무한의 '불가지'와는 따로 덜어진 거시체계내에 존재하는 물질작용으로규정하죠. 그것이 무한에 대해 보이는 일차적 배려는 -그런 배려가 좀이라도 있다면-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머지 실존을 위한 '잡동사니 포대'로 서요. 이것에는 주로 '암흑물질'이란 명칭이 붙죠.
불가지를 따로 떨어진 특수분야에 할당하는 죄를 범한 건 과학만이 아니요. 많은 종교들도 신을 먼 과거와 아득한 미래로만 국한 시켜왔소. 현재는 다른 사안들이 지배하도록 놔두고요. 이런 게 바로 창조주는 거룩한 현재 속에 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아올리는 '모래포대'요!"
이런 설명을 듣고 보니 왜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는 그토록 많은 것을 알면서도 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듯이 보이는지 더 잘 애해 할 수 있었다.
"꿰뚫을 수 없는 원초 잠재력 영역에서 따로 떨어진, 물질과 에너지의 거시체계로 우주를 규정하는 건 무한에 맞서 똑같은 종류의 '모래포대'를 쌓는 거요. 게다가 그것은 동시성과 초공시성을 과학 원리에서 배제하는 반면, 압축이란 주제를 열역학의 '충돌과 폭발' 공식에만 한정시키죠"
"수는 어떤가요? 우리가 과학을 적용할 때, 과학은 수를 운용하죠" 내가 물었다.
"무한과 원초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수학은 사실 각(角)과 비례요. 왜냐하면 비례와 비율만이 무한성을 꿰뚫고 질을 확률량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비례라면 부정 잠재력을 보유한 정지 중심의 고립을 허용하면서 '0'으로 환원할 수 있죠. 참된 정지상태의 작용력은 구조나 절대량으로 절대 규정될 수 없다는 걸 이해해야 하오. 왜냐하면 그건 구조 영역 밖에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것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는 있소, 게다가 보존영역 내에서 입자와 에너지에 접근하는 경우에는 상수에 절대치의 수자가 할당될 수 있소.
하지만 이 영역 바깥에서는 '정지'가 상수요. 정지상태가 진동하는 잠재력과 압축 혹은 잠재력의 추진 토대를 제공하죠. 그런 잠재력은 각과 비례에 의해 자리 잡히고 예견되고 영향받을 수 있는 소용돌이를 활성화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규정할 수 없는 더 큰 영역내에서 따로 떠도는 거시체계가 아니오. 그것들은 대단히 단순해서. 입자와 여타 요소들이 그것들과 통합할 때 제로 방향으로 가면 단순화가 터지고 제로 방향에서 멀어지면 복잡성이 커집니다. 물질 차원에서는 어떤 단일성도 존재하지 않소. 정지상태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건, 그것은 규정되지 않는 고로 고립된 의미에서 원초적 단일성이 될 필요 없이 단일성이 통합력으로 작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거요. 비규정성과 관련해서 가장 경이로운 일은 환경의 필요에 조건지워지지 않으면서 그것들에 적응하는 능력입니다. 거의 모든 것이 허공임을 자각하는 게 좋은 시작일 수도 있소....."
그가 더 말을 잇기 전에 내가 끼어 들었다. '물리학 분야에서 바뀔 필요가 있는 가장 중심적인 관점은 뭔가요?"
"그건 에너지를 질량으로 보는 거요. 에너지는 사실 잠재력(전위)이오 아인슈타인 등식의 완벽성은 그것이 E=M (상수인 빛의 제곱에 조건지워지면서)이 아니라 E=mc2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있소. 이정도의 차이야 문제 삼기에 너무 사소하지 않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단언컨대, 그건 태양계를 지구 중심으로 설명하는가 태양 중심으로 설명하는가와 맞먹는 차이요. 잠재력은 양과 상수와 질로 이루어져 있소, 아인슈타인은 보존영역에서의 에너지의 핵심 요소들을 자신의 공식에서 떼어냈소, 질량은 양을 제공하고, 빛은 상수를 제공하고, 제곱은 질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보존영역에서 복제와 한정이 '질'이오. E=mc2은 세 요소 모두에 똑같은 무게를 싣기 때문에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 거요.
보다시피 에너지는 차원간의 , 또 위치간의 전위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만들어진 많은 외삽법들은 에너지가 질량과 동일하고 그런 사고방식 뒤에 놓인 일차적 욕구는 보존 여역내에서 최대한의 독점적 지배를 낳을 수 있는, 우주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쓸모있는 규정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것이오.
(외삽법: 함수값이 변수가 있는 영역 내에서만 알려져 있을때에 영역 밖에서의 값을 추정하는 방법 함수의 형을 알수 있는 경우에는 함 중에 포함되는 상수를 그 영역 내의 함수값으로부터 예를 들어 최소 제곱법에 의해 결정하고 그것을 영역 밖으로 확장하는 것도 그리 곤란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함수형의 가정 방법에 따라 큰 오차를 조래하는 일도 있다.)
코페르니쿠그의 사례 또한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어졌소, 따라서 지구를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우주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졌소, 모든 고대 정복자들의 추진동기는 독점적 지배였소, 갈릴레오가 박해받은 건 그의 사상이 그런 거창한 전망을 무효화했기 때문이오. 이것은 인간 잠재력의 그토록 엄청난 해방이 왜 그 사상에서 연유했는지를 설명해주죠.
에너지가 양과 상수와 질로 구정된 잠재력임을 이해하고 나면, 보존 영역 내와 그 영역 너머의 여러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는 공리가 발전될 것이오. 이런 이해를 가지면 무한의 조건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구요"
이 계시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간과 무한간의 차이에 대한 내 혼란을 말할까 말까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한이 물질과 에너지와 시간과 공간의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건가요?"
"규정할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는 있소, 무한은 크기 면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질적이기도 합니다. 무한은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에 의해 결정 되지는 않소"
예수의 대답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단순했지만, 아직도 나는 물질입자의 세계 속에서 무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시오. 두 입자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소. 만일 당신이 그것들의 출발 위치를 고정된 '지구 중심'질량으로 간주한다면, 그 입자들은 질량과 관련하여 운동상수인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출발하는 두 입자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연결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데 그건 입자들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것들의 집단적 실행충동으로 정해지는 균형점이요. 이것을 '0'점으로 나타낼 수도 있소. 이 점에서 보면 입자들은 광속의 두배로 확장하는 셈이되죠.
그러고 나면 본래의 이 두 입자들은 '충돌'하여 더 많은 입자들을 활성화함으로써 이 과정의 다중 증식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것은 양적 요소나 상수와 무관하게 질적 전송과 복제를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핵심은 참된 정지이고 그로부터 무한각이 펼쳐질 수 있는 '0'점이오. 우주가 그토록 순식간에 창조되었던 건 이 때문이오"
예수의 이런 이야기는 내게 카오스 이론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고 그 이론은 공시성 및 질적 복제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한걸음 나간 것이오. 왜냐하면 무한은 질의 유사성을 통한 잠재력의 동시 전송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오스의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단일상수를 구하려는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할 거요"
여기에 그가 제시한 무한의 두 예가 있다.
"각도는 무한의 질을 표현하오. 함축상으로도 각도는 무한하게 확장하지 않소? '반감기'의 진행이 '0'에 접근하긴 하지만 절대'0'에도달하지는 못하듯이 무한량은 비례로 진행됩니다"
반감기: 어떤 특정 방사성 핵종의 원자수가 방사성 붕괴에 의해서, 원래의 수의 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
"상수는 절대수인가요?"
상수(常數): 변수에 대하여 항상 일정한 값을 취하는 양
"아니오. 궁극의 의미에서는 아니오. 상수는 특정 문맥 내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나 차원이나 참재력이나 점이오. 모든 상수는 평형지수요. 그 문맥에서의 모든 변수와 가속이 출발하고 그것들이 측정될 수 있는 지점 말이오. 예를 들어 빛의 속도를 봅시다. 빛의 상수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 공식의 뛰어난 점은 에너지 상수로서 운동에서의 평형을 입증했다는 점이오. 사실 우주 전체는 운동에서 평형이오. 평형요소들이 위치를 잡아보시오. 그러면 당신은 상수의 위치를 잡은 것이오.
이 정도를 깨닫기는 간단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에 좌우되는 많은 발견들이 현재로서는 금지되거나 간과되고 있소, 평형을, 행동과 생명과 작용이 상대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둔하고 움직이지 않는 '죽은 점'과 잘못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오. 이건 시소의 지렛목이나 바퀴축이나 정지한 물체의 관성처럼 구조 안에서 평형을 관찰하기 때문이오.
참된 평형은 필수적이고 상호적이고 동시적이오. 그것은 그것의 상수가 주변 변수들에 대해 '정지점'을 나타낸다 해도 잠재력에서 최고치를 낳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는 살짝 웃음을 머금는 것으로 단선적인 구조 영역 밖에서도 마음 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같은 역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변수를 안정시키는 것이 상수의 역할이므로, 상수를 동결된 절대치로 보는 건 잘못이오. 이따금 빛의 경우처럼 상수의 역할이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에 지정 수치가 측량되어 할당되는 경우도 있소, 하지만 보통의 경우 상수는 변수영역 내에서의 상호 요소들에 매개로 따로 떼내어져야 하오."
나로서는 '0'점의 성격을 좀더 명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진공은 에너지와 공간의 한 측면인가요? 아니면 그냥 가설적 위치인가요?"
"그 모두요. 그것은 진공일 수도 있고, 식별할 수 없게 진동하는 에너지장일 수도 있고, 확장하는 잠재력(전위) 영역 내의 승선 지점일 수도 있으며, 명백한 평형지점일 수도 있소. 그 문제의 핵심은 '0'점은 초공시성의 완벽한 정지상태인 대상수에 할당된 기준치란 사실이오. '0'점 요소는 특정 양을 할당받은 광속 같은 다른 모든 상수의 권능을 보증하죠. 최고 상수가 '0'이 아니라며, 양적 가치를 할당받은 상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도입되었을 대 참이 아니게 될 것이오"
그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덧붙인 건 틀림없이 내가 좀 당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시기에 이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당신들이에너지를 잠재력과 동일시한다는 것이고, 잠재력은 양과 상수와 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이오 상수에 할당된 가치에 관계없이 그것은 모든 현상들에 존재하는 초공시성의 '0'점에서 자신의 안정과 평형을 끌어내죠"
"이것을 이해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죠?"
그는 신성한 비밀을 함께 나눈는 기쁨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환하게 웃고 나서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비밀을 털어놓았다.
"초공시성이 자신을 은폐하기 때문이오. 합일의 언어로 쓰여진 이것은 외부관찰을 허용하지 않소 진리처럼 초공시성도 이해하려면 그 안에 있어야 하오"
침묵 속으로 움츠러든 나는 그림 그리는 일로 되돌아갔다.
다른 날 오후 늦게 내가 약간 피곤해하고 있노라니, 예수가 뒤뜰에 나가서 해를 잠시 쳐다보라고 권했다. 해가 땅 쪽으로 많이 내려와 있었고, 하늘도 맑아서 나는 거의 똑바로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해쪽으로 잠깐 눈길을 준 것뿐이었는데도 아주 편안해지는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화실로 돌아오자 예수는 무한으로의 여행을 잘 즐겼는지 묻고 나서 이제 내가 다시 자화(磁자석자化될화)되었으니만치 집중력도 커질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럼 해가 자석이란 말씀인가요?"
"해는 강력한 압축 소용돌이로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태양계 전체를 관통하는 자기력이요. 태양은 수소가스의 압축에서 나온 전자들이 모인 것이오. 그런 압축에서 생겨난 열이 결국 오늘날 당신이 보는 것들을 가져온 핵융합 반응의 심지를 점화시킨 것이고요"
[나는 최근에 이런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를 받고 기뻐했다. 한 친구가 내게 워싱턴 '데이트라인'의 한 신문기사를 오려 보내준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태양의 '담요'는 자석이라고 말한다>
천문학자들은 에제 (97년11월5일) 왜 태양의 내부보다 외부가 몇백 배 더 뜨거운가 하는 55년 묵은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선언했다. 해답은 우주의 극심한 냉기로부터 태양을 포근하게 유지하는 전기 담요같은 것에 대양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 담요를 덥히는 것은 전기가 아니라 자기다. 스탠포드-록히드 우주연구소의 소장이자 다국적 연구팀의 팀장인 알란 타이틀은 그것을 '태양의 자기카펫'이라고 불렀다. 태양 표면 전체에 걸쳐 드문드문 존재하는 약 5만개의 자기 지점들이 내부로부터 태양 대기의 최상층인 코로나 속으로 끊임없이 열과 에너지를 퍼올린다는 것이다" 나는 더 많은 확증들이 나오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태양의 자기적 성격에 대한 예수의 설명에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자기 과정이 불랙홀과도 연관이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불랙홀이란게 물질과 에너지가 완전히 무너져 게걸스런 식욕을 가진 무한 밀도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인지를 물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완전히 무너진 물질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 이 소용돌이들은 죽음의 장치가 아니오. 오히려 그것들 대부분은 결국에는 충분한 질량을 얻어 새로운 별이나 우주물질의 또 다른 성단으로 바뀌는 탄생의 장치요. 사실 지금의 과학은 상이한 세현상을 합쳐서 불랙홀이라고 통칭하고 있소, 무한과 참된 정지를 좀더 잘 이해하고 나면 이 형태들 간의 차이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오.
첫째로 에너지 격자 중에는 균열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참된 정지 상태의 현상적 권능과 자력을 낳는 능력을 드러내죠. 이것들은 탄생장들이어서 장차 별들로 변할 수 있소.
둘째로, 발달한 거대 소용돌이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워낙 빨리 커져서 완전히 굳는 일 없이 에너지의 거대원천으로 바뀐 것들이요. 이것들은 한 은하만큼 먼 거리에 있는 것들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퀘이샤(준항성)들이요
셋째로 나이든 별이 자기 주변을 도는 균형 잡힌 운동체계 속에 물질과 에너지와 시간과 공간을 유지할 능력을 잃게 되면 붕괴된 에너지장이 생기죠 이것은 초신성이 되는 젊은 거대항성의 핵웅합 붕괴와는 다르오 이 경우에는 자기장이 계속해서 주변의 에너지와 물질에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행성들이 예전에 제공하던 균형체계 없이요. 이것은 붕괴된 물질이 아니라 무한 밀도로 나아가는 붕괴된 체계요"
예수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장대해서 나는 우주의 놀라운 잠재력에 그저 탄복할 밖에 없었다. 예수의 눈을 통하면 어떤 실존에서도 팽창과 수축의 끝없는 유형을 보기가 지극히 쉬웠다. 이 점이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우리가 물리적 속성에 대해 자세하게 나눴던 마지막 대화에서였다. 그가 불랙홀이라는 주제를 워낙 쉽게 대할 수 있게 해준 탓에 나는 흥미를 돋구는 또 다른 우주 요소 반물질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반물질은 불안정한 요소이다. 반물질과 물질이 충돌할 때마다 그것들은 서로를 소멸시킨다. 과학자들은 반물질 입자는 물질 입자와 정반대라고 말한다.
"반물질과 물질은 둘 다 순수에너지에서 동시에 창조되었소. 그들 관계의 결정적 측면은 반물질은 압축할 수 없는 에너지 측면을 나타낸다는 거요. 따라서 압축도가 높은 영역에서는 물질이 밀도를 쌓아갈수록 반물질은 줄어듭니다. 물질이 질량을 쌓아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서로 떨어져야 하거든요 모든 에너지가 질량에서 풀려나오는 건 그 둘이 다시 만날 때뿐이오. 그 두 에너지가 가 접축할 때, 모든 압축물질들은 순수에너지로 바뀌어 발산됩니다.
순수에너지가 창조될 때 그것은 두 선의 전위로 갈라집니다. 한 선의 전위는 압푹에 반응하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조의 의미에서 이것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오. 왜냐하면 물질은 양자하와 음지하 둘다를 포함하는데, 반물질은 질량을 미세하고 우연적으로만 쌓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의 보완작용이 평형의 역동성이오.
이 두 전위는 보통 때는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소. 사실 그것들은 압축이 반물질에 반발하는 보존영역을 만들 만큼 밀도 높은 상황이 생기기까지는 서로를 무시하는 타고난 속성에 의해 보호됩니다. 그런데 압축을 끌어당기는 방아쇠가 반물질의 방출 미수 자체요. 왜냐하면 반물질은 무엇보다 물질을 형성케 해준 우선적 요인이니까요. 방축 미수는 끌어당김을 낳고, 끌어당김은 압축의 발산을 낳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대규모의 빅뱅일 수 있소. 이런 게 바로 우주의 영원불변하는 리듬이오!"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잠시 말을 중당함으로써 내가 우주 창조의 단순성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과학의 목적이 "생명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생명을 작동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내 자각과 외식이 얼마나 넓혀지고 있는지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런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들을 나와 함게 나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대화에서나 조심스럽게 통합된 의미 유형들을 엮어내고 정보를 실제 삶에 적용할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가 우리 세계에서의 에너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내렸던 가장 적절한 요약 중의 하나가 에너지가 부족상태 및 세력과 맺는 관계이다.
"사람들은 보존원리가 규정하는 에너지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을 부족으로서만 이해하죠. 사람들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에너지의 일차 공급원이 태양이라는 사실도 이런 이해를 북돋웁니다. 이 에너지는 태양계 전체에 걸쳐 넘쳐흐르는데, 모든 유형의 생명에 작용하죠. 이 체계 내에는 한계와 의존이 존재하기 때문에 경쟁도 있소, 따라서 강하고 공격적이고 보존력이 강한 힘이 자배합니다 인간의 일차 에너지 공급이 그런 부족에 좌우되는 한, 지상에서 오래 지속되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란 있을 수 없겠지요. 인간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의 형제애를 가져오고자 한다면 자신의 관점을 바꾸어 물리적 무한과 신의 실재쪽을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관점이 변해야만 인간은 그가 지금껏 찾아오던 물리적 영적 해답 모두를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예수는 분명히 강조했다. "과학은 삶의 작동방식에 대한 의식을 발달시키고, 이 읫기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적용하는 효용성의 추구요. 이런 태도와 과정을 취한다면 어떤 행동도 과학이 될 수 있쏘. 최근 몇십 년 동안 고도 기술과 군비 경쟁이 워낙 우세하다 보니, 과학은 정밀기례와 지적 엘리트주의의 마법에 빠지고 말았소, 참된 과학성은 이런 게 아니오. 그런 식의 투자는 정신적 엘리트주의가 실제로 기여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는 잘못된 인상을주어왔소,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가 사실이오. 무릇 참된 과학은 삶에 기여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런 다음에야 마음은 우리의 타고난 걸출함을 요약하는 것으로 자신의 종속성을 표현할 수 있고요.
우주의 문을 열 열쇤가 있소, 모든 해답이 바로 당신 앞에 있소, 당신이 할 일은 질문을 짜는 거요. 질문이 부적절하면 대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니 겸손하고 탐구하는 마음으로 열린 가슴과 인식으로 그리고 판ㄴ단 없이 현실에 접근하시오. 당신이 적절하게 질문하면 모든 것이 계시될 것이오!
참된 지성은 본디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무구하게 인식하고 현실을 쓸모 있게 식별하죠. 삶의 문제들은 전체 동그라미에서 떨어져나온 점들과 같소, 그것들은 성격상 워낙 특수해서 정확하게 평가할 때만 고쳐질 수 있소,
의식의 초창기부터 인간은 모든 실존에 타당한 어떤 온전한 자극을 찾아내, 그것을 기술로서 관리할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서 '장대한 청사진'을 찾아왔소, 그런 것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모든 질병에 듣는 만병통치약을 갖게 될 것이요. 그건 '황금담요처럼 지상에 장대한 청사진을 그냥 덮씌우면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는 발상이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지상에서 가장 값비싼 상품이 될 거요!
온전한 자국은 있소. 하지만 그건 하나의 청사진으로 요약될 수도 없고 기술로 독점할 수도 없소, 그 자국은 바로 사랑이오. 그 모두를 잡아낼 정도로 충분히 큰 바탕이나 격자판이나 청사진은 없소. 그렇더라도 만병통치약 같은 건 없소, 사랑조차도 주어져야 하고 현실의 세목들을 존중하면서 양육되어야 하며, 그것이 부서졌던 지점에서 복구되어야 하오. 질서의 모든 균열이나 붕괴가 그 종류나 사건면에서 대단히 특수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관련 요소들은 다양하고 많을 수 있소, 만병통치약이라는 개념 자체가 효용성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오.
만병통치약으로 대표될 수 있는 원형적 개념들에 기우는 것은 순진함이나 자포자기나 황금만능주의의 특징이오. 그런 걸 바라는 것은 감춰진 질병을 인정하거나 파고들지도 않고서 그것들을 고치겠다고 약속하는 일반론으로 토대 전체를 덮겠다는 것과 같소. 오래 전에 낸가 자신의 질병을 자인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질병에서 회복될 수도 없다고 말했을 때. 비난하거나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오. 사실 이 말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학적인 진술이었소. 그건 자신의 삶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시니 구체화된 주체여야 한다는 뜻이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위치에서나 원을 부술 수 있지만, 내가 장담컨대 그 원이 다시 연결되는 건 잘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뿐이오.
문제를 드러내고 명확하게 하지 않고서 고상한 일반화 속에 주저앉아 그것들을 원상복구해주는 마법의 원이란 건 없소 집의 토대가 허물어졌는데, 새 지붕을 덮어서 집을 고치거나 조경으로 그것을 가릴 사람은 없을 거요. 이것은 손상된 관계와 어긋난 계획, 무너진 가슴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실제로 균열이 발생한 지점을 찾아내, 그곳에서 그 균열을 수리하시오.
식별과 확인과 효용서을 갖는 건 겸손한 자세일 뿐 아니라, 이런 자세들 없이는 과학을 가질 수 없소. 그것들을 통해서만 사랑의 연결, 즉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특이성을 배려하고 사랑의 일차 충동인 효용성을 견지할 수 있소,
개별 사항의 효용성을 다루고 공동 개연성의 범주들 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과학이 할 일이오. 이것이 주제넘은 목표는 아니지만 대단히 고귀한 목표인 건 사실이오. 왜냐하면 그건 사람들을 무한의 문턱으로 데려가니까요. 그런 마음가짐이 삶과 무한과 실존의 모든 개별사항들을 존중하게 해주죠"
무한이란 개념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개별 사항들과 공동 현실 모두를 포함하는 식으로 확장되었다. "당신 말씀은 무한이 영처럼 여기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뜻인가요?" 나는 어쩌면 무한이 그리 멀리 있지 않으리란 생각에 또 그럴 가능성을 미리 피하기 위해 그 문제를 내멋대로 해석해왔다는 생각에 약간 몸을 떨었다.
"무한은 양을 질로 바꾸고 질을 양으로 바꾸는 보편 요소소. 따라서 무한은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잠재력의 전송에 관계합니다. 금강입자들(무한입자들)이 사랑의 권능과 공시성을 갖는 건 이런 작용을 통해서요. 사람들이 만병통치약에 경도되는 이유도 틀림없이 이 때문일 거고요. 인간은 공통성과 예견가증성의 문맥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니까요. 이건 건강한 본능이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생명의 본원적 속성과 참된 경향성에서 추출되지 ㅇ낳고 작위적으로 생명에 부과한 원형 공리에 의존하는 데 있소.
오늘날의 모든 기술에서 임계질량은 과학 자체에 있지 않고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있소. 예를 들면 첨단 의약분야는 인류에게 무수히 많은 축복들을 가져다주었소.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모든 질병을 고칠 새로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으로 대단히 현혹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제시하죠.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환상이오. 왜냐하면 뭔가를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과 관계가 없는 재해들도 이영역으로 징후를 옮기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경제적인 실패를 겪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그문제를 대면하거나 다루는 대신 심장마비를 겪는 쪽을 택하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가 믿는 만병총치약이 자신을 구원해주러와서 그가 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해줄 테니까요.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학약품들을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하죠. 인간의 질병 대개가 화학적 성격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제 고난으로 가득한 세상은 자신의 징후를 화학약품에의 의존성으로 옮겨가고 있소.
불법 이전을 조장하는 것이 모든 만병통치약의 속성이오. 결국에는 약속했던 모든 해결채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그 사이에는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다뤄져야 할 모든 질병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는 거죠. 어떤 문제라도 그것이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믿는 것으로 자신의 징후를 이전한다는 사실이 당신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을 테지만, 진리는 실제 원인과의 관계에서만 해결책이 발견된다는 거요. 모든 과학적 방법 속에는 이 사실에 대한 배려가 심어져 있소, 이곳은 무한히 쓸모 있는 우주지만, 문제를 피하거나 당신에게 아침 나절의 무지개를 약속하는 일반론 뒤로 숨는 것으로는 이 우주를 쓸모 있게 만들 수 없소.
이런 현상들은 신체의 건강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만병통치책은 위험한 환상이오. 모든 만병통치책은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교육은 대단히 유용하지만, 공적 규제로 강요되는 일반 교육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사회병리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책이 아니오. 그런 환상은 교육이 다룰 수 없는 모든 병리의 징후를 공교육 제도로 옮기게 하죠.
만병통치책의 위험성을 놓고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예가 돈이오. 돈은 삶을 위한 경이로운 윤활유요. 그건 바퀴가 돌아가게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리란 희망 탓에 세상의 약들이 돈의 영역 속으로 들어갔소.
이곳은 만물 속에서 창조주의 현존을 경배하는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우주요"
삶의 작동방식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단순함의 한 본보기였다. 내가 그것을 소화하고 나자, 내 의식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가만히 물었다.
"신이란 관념도 일종의 만병통치 처방으로 여겨질 수 있지 않나요?"
나는 그의 눈이 반짝이고 그의 웃음 속에 기대가 묻어 있는 것에서 예수가 이 질문을 기다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모든 건 그들이 신을 관념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현실로 여기는가에 달렸소! 현실 속에서 신은 모든 존재 속에 존재하는,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인도력이오. 현실 속의 신을 아는 사람은 모든 해답을 잠재적으로 그의 앞에 가지고 있는 것이오. 신이 없는 곳이 어디 있소?"
그의 대답은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닫혔던 문이 열렸을 때 처럼 갑자기 나는 예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깊이의 느낌과 이해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체험을 통해 직접 신을 알지" 않고 오직 관념을 통해서만 '신에 대해" 아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관념을 통해서는 신을 오직 보편성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불현듯 세상의 모든 기능장애들을 자신들에게로 끌어온 만병통치책들을 양서해온 보편서의 여사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또 왜 역사상 과학과 신학이 그토록 상반되는 관점에서 반목해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 가장 중요한 점은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끝없는 사랑 474쪽 예수의 대답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단순했지만...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요한복음 10:34와 시편 82:6절을 참고 “예수께서 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너희는 神들이다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 느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神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였도다” 너희는 신의 아들과 딸로 태어 났다. 왜냐하면 네 안에 그리스도 신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깨달아 질 때, 네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고요하라. 그리고알라. 내가 곧하나님임을(시편 46:1
제 13장 예수와 과학
사랑
2021. 10. 5. 11:45
예수의 이름을 과학과 결부시켜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실천적인 대답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십중팔구 예수가 과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종교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의 현존에서 경험한 가장 놀라운 계시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그의 사랑과 현실에 대한 그의 지휘를 직접 보는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그 많은 날들 동안. 예수는 한번도 현실을 분리된 범주로 떼어내지 않았다. 또 그는 신학을 한쪽 구석에 과학을 반대쪽 구석에 놓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 모두가 현실이었다. 공중과 마루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체조선수처럼 예수의 은혜는 고정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한 덩어리였다.
이 장에는 일부 독자들에게 비과학적인 듯이 보일 신과 영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에게 과학은 모든 현실에 내재된 실행력에 대한 연구, 그것의 근원이 고려되어야만 완결될 수 있는 연구다. 또 순수물리학의 영역에서도 예수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것에 놀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출간하기에 앞서 나는 그 중 일부를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는 영적인 진리를 듣게 되리라 기대했는데 이건 순수과학이야!'라는 식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모든 기간에 결쳐 예수는 몇 번이나 싦의 작동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이 설명들 대부분은 그 설명들이 이루어진 본래의 문맥, 즉 그것들이 예수의 다른 메시지들과 더 깊은 관계를 갖는 지점들에 남겨두어야 했다. 따라서 내가 이 장에 모든 것들이 그가 실존의 구성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한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장에서 과학적 이해의 장래와 그런 이해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우선순위와 발달에 조명을 비춰준 그런 계시들을 주로 모았다. 과학을 놓고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내게 가장 큰 가치는 그 주제에 대해 그의 시각을 받아들인 것에 있다.
"과학은 진리와 현실간의 대화요" 예수는 말했다. "당신은 자신앞에 우주 전체를 가지고 있지만, 당신이 진리와 현실간의 결정적인 관계를 이해할 때까지 과학을 가진 것은 아니오"
예수가 내게 폈던 그 모든 가르침들 중에서 진리라는 주제보다 삶의 영역 전체와 더 관계 깊은 주제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독점하려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진리의 역사는 피와 전쟁의 자국을 남기면서 흘러왔다. 그럼에도 예수는 '진리를 아시오. 그러면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심오한 계시가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과학적 발견의 형태로 있게 될 것인가? 말하자면 법칙을 다룬 학술논문들과 놀랄 만한 몇몇 새로운 현상들 속에서 발견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진리 자체의 본성'에 대한 최종적 명확화로 있게 될 것인가? 나는 후자쪽이 좀더 가능성이 크다고 믿고 싶다. 게다가 외적 현실이라는 우주 배경에 비추어 진리의 본성을 설명한 예수 자신의 가르침도 나의 이런 선호를 강화해주고 있다. 예수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하고,
바로 이것이 실존 전체를 통해 발현된 신의 본질이자 현존이오"
이 현실은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감각과 모든 감정, 과학에 알려진 모든 수단으로 인식할 수 있다. 현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의 통합된 일관성 덕분에 어떤 지각상의 접근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눈과 코, 입천장까지 모두가 맛있는 체리파이의 현존을 확인해준다. 이것은 과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수학적으로 확장된, 보완하는 여러 근거에서 나온 자료의 비교가 우리가 증거 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실이란 현실의 특정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의 끊임없는 과제들을 이행하는 일관되고 측정가능하고 편향되지 않고 균일하게 예견할 수 있는 성격의 실존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현실에 대해 갖는 유일한 의무는 그것을 정직하게 체험하고 인식하고 보고하는 거요.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있으니, 그것을 정직하게 보고 그것과 상호 작용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활용할 수 있소, 지적 엘리트나 특권층이라고 해서 현실을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는 없소. 그것은 오직 체험과 관찰과 비교와 통합과 정직으로만 확인할 수 있소, 현실 이해는 그가 삶 속으로 더 많이 뻗어나갈수록 자라죠. 현실은 모든 생명과 인간에게 창조주가 민주적으로 나눠준 선물이오. 이 선물이 효력을 다하는 건 그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나름의 관점에 상용하도록 현실을 바꿀 수 있을 때요.
반면에 진리란 현실을 초월하여 그것을 단순한 이해로 증류해내는 의식의 넓이와 깊이요. 말하자면 외적 의존과 조건의 한계성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진리요. 이 때문에 진리는 항상적이지만, 그것의 항상성은 체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하오. 그러기에 개개인이 초월적 자각에 이르는 길은 모두가 다르다오.
진리는 공통의 현실에 그 뿌리를 갖지만, 어떤 원형이 있는 것은 아니오. 알다시피 진리는 그것이 봉사하는 현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소. 진리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소. 신은 성스런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고, 우주 또한 자신의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나는 내 진리로부터 당신은 당신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소. 궁극의 통합이라는 이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존중이오.
당신들이 진리가 다른 어딘가에 있거나 완벽하게 질서 잡힌 원초영역에 모셔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오랜 기간에 걸친 인간의 부정직 때문이오. 진리는 실존의 살아 있는 부분이고, 당신들 항해의 컴퍼스(나침판)로서 의미와 확실성과 목적을 항상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존재요. 진리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아마도 먼저 진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현명할 거요.
진리를 당신들의 상아탑에서 해방시키시오. 진리는 현실을 앞서나가지도 않고 현실을 형성하지도 않으며 근원으로서의 신을 대신하지도 않소"
예수는 진리에 원형이 있다는 철학적 오해보다 더 우리를 현실에서 떼어놓거나. 진리를 향한 진솔한 추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오해가 갖는 문제는 고정된 발상들이 뒤이어 나타나는 현실의 새로운 측면들을 검토하는 '진리의 기준자'가 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무구한 인식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과학적 절차에 관해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출발한 그 자리가 현실이라면, 진리는 항상성의 유형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당신이 증류해내는 것이오. 진리는 삶에 대해 쓸모 있고 유용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해의 완성이오"
이런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예수의 논의에 불가피한 서론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에 따르면 "다른 모든 이유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많이 과학의 진전을 가로막는 데 기여한 것이 진리에 대한 오해나 오적용"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토에 대해 언급할 때였는데. 예수는 플라톤을 분리의 논리를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원형이고, 현실은 쉽게 변하는 불완전한 대용물이라고 낙인찍은 바 있다.
플라톤 논리의 예술적 아름다움과 그의 정신적 통찰력의 지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철학이 서양과학사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은 막대하다. 또한 그 철학은 완벽 속에 거하는 창조자는 불완전한 현실의 고밀도를 통ㅇ해 '피조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식의 몇몇 잘못된 가정들을 지적으로 강화해주었다. 하지만 현시리과 무관하게 생겨난 이데아(관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현실을 존중치 않고 형성된 관념들은 진보와 참된 실행력이란 면에서 부정적이고 정체시키는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예수는 말했다.
"이상주의 철학의 문제는 그것이 진리를 원형적 관념으로 여기면서 현실은 이 원형적 관념에서 약간 불완전한 형태로 유래된다고 보는 데 있소."
이런 관점에 따르면, 현실은 무작위적이고 근사치적이고 불완전하게 밖에 이상에 조응하지 않는다. 지적 이상주의는 진리를 원초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현실을 파생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한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식으로 우주에 접근하는 것은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합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우주에 대한 선입견이기에 객관성을 파기한다. 둘째로, 현실은 불완전하다는 전제가 부주의한 관찰과 부정직한 보고와 이기적인 정당화의 구실이 된다. 이것은 떠받들고 있는 '고정관념'과 관련하여 불일치가 예견할 수 있는 오차범위로 무시될 수 있을 때 특히나 두드러진다.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전쟁은 둘 이상의 고정관념들 사이에 존재하는 풀리자 않는 갈등 때문에 벌어졌다. 다른 모두를 지배할 수 있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야생거위 쫓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지성과 시간이 낭비되어온 것이다.
"그런 추구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진리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말죠. 왜냐하면 진리란 예전에는 갈등이 존재하던 곳에 평형과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항상적 요소이니까요. 배움은 끝이 없고, 그 길은 천국과 지상 모두에서 완성을 이루는 길이요. 하지만 미화된 앎으로 들어가는 미끄러운 높은 선반들은 위험스런 추락만을 불러와 분리를 초래할 수 있소.
진리는 원형이 아니오. 신도 원형이 아니오 ! 현실이 기본이오! 진리란 체험에서 그것이 갖는 항상성과 그것이 삶에 가져오는 평형력으로 구체화되는 이해의 완성이오.
이것이 신과 과학을 통합하는 등식이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현실에 접근하여 거기서 진리를 증류해내는 건 올바른 과학적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다음 예수는 덧붙였다.
"진리나 이론을 이상적인 개념으로 규정한 다음. 현실에서 그 이론을 구체화하기에 적합한 증거를 뽑아내는 쪽으로 나가는 건 부정확한 과학 방법이오. 과학의 목적은 현실을 입증하는 것이지. 이론을 증언하는 게 아니오! 현실은 워낙 방대해서 충분한 증거를 도외시하고 오차범위를 충분히 넓게 둘 수만 있다면 이론에 부합하는 현실은 언제라도 찾아낼 수 있소"
그는 이론에 지배되는 과학은 유독물 배출산업과 짝을 이루는 무신론적 개념을 불가피하게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수의 이말을 듣는 순간, 나 역시도 과학으로 하여금 현실 대신 이론을 확정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도록 몰아가는 지배 동기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론은 '지적 재산'을 대표한다. 따라서 거기에서 유래하는 모든 행위도 독점권을 갖는다! 만일 신이 모든 생명에게 미주적으로 나눠준 선물이 현실이라면, 현실에 대한 확인은 우리의 공동 소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방법은 오늘날의 과학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긴 하지만 1세기 이상에 걸쳐 프라톤의 이상주의가 점차 사라져가자. 이제 과학의 정신이 현실을 직접 대면하고 있다. 우선적 실존으로서 현실과의 직접 대면을 중심응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20세기의 기념비적 도약들 중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20세기에 와서야 지작된 것은 아니다. 플라돈의 이상주의 철학과 나란히 자연을 '진리의 어머니'로 여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는 원초적이고 편향되지 않은 현실 체험에서 증류된다고 말했다. 현실은 우리의 이해를 위한 토대이고, 현실에 대한 조심스런 연구는 자연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과거에도 실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방법론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끌어낸 반면, 이론 과학자들은 플라톤에게서 자신들의 방법론을 끌어내곤 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후 과학의 이론부분과 실험부분은 그경계가 사실상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객관성과 과학적 지성이 커질수록 플라토의 이상주의가 뽑혀져간 것이다. 이렇게 이상주의가 제거되자 과학에서 신을 포함하는 중요한 논리 지점도 함께 제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신성에 대해서는 죽음 같은 침묵만이 견지되었고, 학술 집단내에서는 무신론이 뚜렷한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역설의 경이로움은 사이비 이상주의가 제거되자. 신의 실재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5년 무렵, 과학은 무한성의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 미세하게는 입자물리학에서 그리고 우주적으로는 은하 확장론에서 과활하고 이루 다 포괄할 수 없는 실존으로서 현실의 현존을 이보다 더 숭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5년부터 작은 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형이상학적 함축을 가진 무게 있는 과학 서적들은 그 후로 눈에 띄는 덩어리가 되었다가 지금은 작은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따금씩이긴 하지만 과학문헌들이 신의 개념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들도 있다. 물론 이 경우 신은 질서의 신이다. 왜냐하면 기적의 신은 과학영역에서 여전히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신에게로 데려다주는 것이 진리의 역할이어서. 진리가 바로 이일을 해내는가 아닌가에 따라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내가 이런 발달경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설명은 과학적 과정에 신학을 도로 끼워넣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는 건 플라토의 이상주의만큼이나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 게다. 이해를 위한 핵심은 신이 현실로부터 분리되지 않느니만치 현실을 정직하게 관찰했을때 증류되는 진리는 결국 신과 우주 모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키우리라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도 동일한 이 진리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 진리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질의 삶을 모양 짓는 데 이진리와 이상들을 결합할 수 있다.
다음의 그림은 진리를 삶에 실용적으로 적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과 관련해서 예수는 우리를 신에게로 다시 데려다주는 진리는 성스럽고, 우리더러 더 나은 세상을 세우게 해주는 진리는 이해의 실제 적용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예술가라 그런지 나는 이 도해에 이상과 미가 이런 식으로 들어맞는지 알고 싶었다. 예수는 이상과 미는 감각이 인식하고 가슴이 조화와 생명을 키워주는 유형에 초점을 맞춘 진리의 측면들이라고 설명했다. 진리는 과학만이 아니라 삶이 영역 전체에 속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과학은 일차 현실로부터 기능적 진리들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가다가 그 다음에는 실제적 적용으로 나아갑니다. 이상화를 과학의 세계 속으로 도입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많지만, 그건 적용을 완성시키고 그것들의 내재된 성질을 규정할 대만 그렇소 고전 공학의 원리를 받아들여 이상주의적 세련화로그것들을 완성시킨 멋진 예가 버크민스터 플러의 업적이오.
'이상'이 과학과 관계하는 또 하나의 상황이 있소. 하지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과학에 이상을 부과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오. 그렇게 하는건 원형적 진리에 대한 추구만큼이나 어리석고 퇴보적인 일이 될것이오.
지금 시점에서 과학은 여전히 외적으로 객관성이라는 기준들을 지향하고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소, 이건 과학방법의 현재 수준에 비추어 올바르고 필요한 일이오. 하지만 과학이 이제 진리에 대한 더 위대한 정의로 도약하는 문턱에 와 있는 거도 사실이오. 그때가 되면 이상은 과학에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될 것이고. 이상이 현실을 유산시키거나 할 위험은 전혀 없을 것이오"
잠시 망설인 끝에 내가 물었다.
'당신이 제게 그 위대한 진리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제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소 난 그렇게 생각하오. 왜냐하면 당신은 화가로서 당신의 작업 속에 이미 그것을 쓰고 있으니까요. 사실 이 위대한 진리는 과학의 외부에 있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인지하고 활용하여 그것의 권능을 입증하게 될 것이요"
그렇다면 그게 뭐죠?"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진리의 궁극점은 내면과 외부가 하나가 되는 지점이오. 당신이 어떤 상황의 외적 요소들을 아무리 완벽하게 연구하고 관찰하더라도, 내적 자극력이 위치한 지점과 그것이 외부와 맺는 관계를 알아낼 때까지, 당신은 완벽한 진리를 알 수 없소. 반면에 당신이 내적인 것을 아무리 잘 이해하더라도 그것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까지 당신은 완벽한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오
우주는 안팎으로 한 덩어리요. 안과 밖 사이의 완벽한 균형 지점에 물질과 에너지와 공간과 시간이 무한 잠재력의 '비저항'속으로 옮아가는 초공시성의 상황이 있소, 이것은 물질의 붕괴가 아니요. 이것은 완벽한 균형이라는 '제로점'에 그것을 동조시키는 것이오(예수는 균형이 초공시성의 완벽한 정지상태라고 설명했다)'제로점'이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시오. 그것은 무한을 나타내는 거요. 이것을 알 때 0이 수학에 대해 했던 역할을 물리학에 대해 하게 될 것이오 모든 경계를 넘어서 그 ㅡ잠재력을 확대하는 역할 말이오.
초공시성은 당신이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유형과 리듬과 비(比견줄비)와 조화들의 궁극 근원이오. 이것을 알면 이상이란 개념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가 부여될 텐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정신이 만들어낸 외적 원형으로서 이상을 우주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은 우주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도 이해하게 될 것이요"
그런 다음 그는 단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신은 참된 이상을 창조할 수 없소. 정신은 원인물이 아니라 파생물이오. 그것은 당신들이 피조물로 여기는 것과 똑같은 이상적인 상태에서 유래되었소. 그런 혼동의 원인은 초공시성의 상태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데 있소. 그 성스런 지점에서 자각이 떨어져나오고 나서야 원인과 결과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게 되죠. 정신은 그 전형적인 양극성 때문에 실제로는 결과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을 원인 요소로만 기억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는 내가 다음에 무엇을 질문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상하게도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소. 원초 원인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의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하는 보편정신이란 게 있소.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정신과 달리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면서 작동하지 않소. 그건 절대로 초공시성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나눈 많은 대화들 중에서 그가 보편정신, 혹은 우주정신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대목이 이것이었다. 아마도 말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이 단 하나의 문장 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리라. 어쩌면 그건 예수가 내 마음이 자신을 권능 있게 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주제에서 내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수는 내 주의가 성스런 가슴의 위대한 지성으로 돌아가도록 끊임없이 환기시키곤 했다. 실제로 예수는 우리 대화의 이 부분도 각 사람 내에서 내면과 외부가 하나 되는 지점이 성스런 가슴임을 내게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맺었다.
"당신 개인의 진리가 담겨 있는 곳이 여기요. 성스런 가슴 속에는 어떤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성이 있소,"
나는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과학적 함축으로 무르익어간 에수의 메시지를 곰곰이 숙고하는 것으로 그날 오전을 보냈다. 그날 늦게 우리가 보편 현실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갔을 때, 나는 그 주제를 더 깊이 탐구해보려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왜 인과가 우주의 근본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하는 현상의 파생적 발현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싶었다. 초공시성의'제로점'이 완벽한 균형이라면, 그렇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인과가 일어날 수 있는가?
예수는 설명했다
'완벽한 균형은 완벽한 평형인 성스런 지금이오. 모든 것이 이 성스런 지금에서 모습을 취하지요. 그러고 나면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에게 반응하는 전체의 다양한 부분들이 상호교환을 일으킵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상호작용은 모든 부분이 서로를 지원하는 단순한 조화에서부터 밀도가 쌓이는 모순과 부조화의 발달까지를 포괄할 수 있소, 이렇게 되면 조화를 유지하는 데 더많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게 되죠. 이것이 인과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가로질러 상호작용하고 다시 균형잡는 보편 수단이 이것이니까요. 상호작용의 세 양식 모두가 우주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완벽한 균형 속에는 완벽한 동시성이 있고, 분리의 극단에서는 인과의 법칙이 우세하요. 그리고 이 두극단 사이에서의 실존 경향은 상호성이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나는 사랑과 금강입자들과 영으로 이루어진 대삼각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가 그려냈던 완벽하고 멋진 통합이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는 사랑이 근원이라고 즉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생명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권능이라고 설명했다. 금강입자들은 모든 실존의 총괄적이고 보편적인 몸체를 이룬다.
영과 관련해서 예수는
"오직 한영, 연속되고 쪼개지지 않는 모든 실존의 바탕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영은 모든 것 속에 있고, 만물 주위에 있으며 만물과 더불어 있고, 만물을 이루고 있다. 영이 있지 않은 곳은 없으니, 만물은 떼어낼 수도 나누어질 수도 없다. 그건 궁극의 결합이고 참된 통일장이다.
20세기 과학의 발견과 가설들은 우주 및 창조과정에 내재된 정연성과 함게 여전히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그들은 기본적으로 특정 조건들하에서만 개별의 물질 발현으로 펼쳐지는 잠재력의 쉼 없는 흐름으로 실존을 보고 있다. 통일장 이론이란 개념이 과학 집단들내에서 워낙 논란이 되고 있던 터라 나는 예수에게 물었다. "단일성이란게 타당한 개념인가요?"
"한 영과 모든 실존의 고도로 통합되고 동시적인 성격 때문에 단일성의 측면이 존재하긴 합니다. 비록 그것이 입자나 점은 아니지만요. 실존의 한 부분이나 모든 부분을 무한한 잠재력의 단일 상태로 압축할 수 있는 것이 초공시성의 기능이요. 따라서 분리의 한 측면으로서 절대적 '단일성'은 존재하지 않소. 분리는 그 정도로 존중받지 않소"
우리가 분리에 대한 관념을 버리는 것으로 상대성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이제 쉽다. 또 한 영이란 개념이 신성과 실제성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 고리인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는 문제는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사랑의 권능이 어떻게 입자 물리학의 영역으로 확장될까? 예수는 몇 번이나 말했다.
"사랑이 첫째고 우선이고 항상이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불러모으니까요. 사랑은 결합을 점화시키고, 입자들을 결합시키며,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것의 물리적 대리인이 자기(磁氣)요 이 힘이 물질 실존에 적용된 것이 압축이고요"
일차 자기(磁氣 끌어당기는 힘)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간에 예수가 그것을 사랑의 권능과 밀접하게 연관시켰던 건 분명하다. 예수가 물리적이자 창조의 근원이고 그것의 유지자로서 사랑의 성질을 밝혀준 건 사전의 많은 대화가 있고 난 며칠 후였다. 예수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힘이 남녀간의 애정 깊은 결합의 달콤함이나 세상이 흔히 사랑이라고 여기는 '초콜릿과 장미'로 상징되는 감정이 아님을 내게 여러 번 주지시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감정들이 사랑의 현실적 권능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이런 것들뿐이라면 우리는 삶을 설명하지도 완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랑의 권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수는 언제나 지극히 공경하는 태도로 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권능에는 이 문맥에서 함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과학적 요소가 있다. 나는 이제 비할 바 없는 공경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경이로운 정보를 나누고자 한다.
"당신이 사랑의 역할에 대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역전, 즉 두 보완력이 제3의 안정요소가 나타남으로써 서로 양식을 바꾸어 상대방이 되는 작용점으로 생각하시오. 일차 자기와 압축이란 게 이런 것이오. 그것은 일차 입자와 에너지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작용이오. 유기생명체 내의 DNA는 복잡하고 신비로운 작용을 끌어가도록 짜여져 있소, 이것은 모든 유형의 구조에 앞서고, 그것을 대신하고 능가하며 그것을 단순한 유동성으로 바꿔버리는 역설의 신비이기도 하오"
나중에 예수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했다.
"사랑의 이 일차권능은 자신 안에 '자기 인식'과 '자기 인정' '자기 대화'의 작용을 가지고 있소, 이것은 당신이 사랑을 있음으로 여기든 에너지로 여기든 상관없이 사실이오. 그것을 '참나 I AM'의 힘이라 부를 수도 있소,
전체가 내면화된 교감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알아채게 되면, 잠재력의 차이가 설정되고 그것의 활성화가 시작되죠. 이와 동시에 정태적(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의 것) 영역, 중립성 속에 존재하는 상수를 고립시켜 활동적인 변수가 되게 하는 수축과 이완행동이 있습니다. 이 영역을 에너지를 기능적으로 압축하고 확장하기 위한 '제로점'이 작용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소.
한 요소가 다른 요소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의 외부 원주는 결코 결정될 수 없소. 전체는 그것의 경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특성과 자질에 의해 표시되죠. 하지만 그것의 중심은 '0'으로 나타낼 수 있소. 이 지점에서 확장하는 힘들은 방출되는 에너지를 제곱으로 증가시키죠. 이와 동시에 활기찬 긴장의 측면을 매개로 에너지는 확장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이전됩니다. 이런 역전에 의해 회전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자기의 스프링 힐을 움직이죠."
나는 오늘날까지도 이런 사상의 경이로움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설명은 내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창조의 또 다른 측면에 그윽한 풍부함을 보태주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유용한 것으로 드러난 한 가지 놀라운 사상은 이것이다.
"자기는 일차 에너지에 내재되어 있소, 당신 자신이 이 에너지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기술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자기 인식과 자기인정을 통해 그것과의 연결을 안정되게 하는 거요"
이런 설명은 우리가 사랑을 자기인식의 토대로 인정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에너지의 일차 원인들인 사랑과 자기와 압축은 창조된 발현의 먼기슭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준다. 그럼에도 효과적인 기술적 접지선을 통해 잠재력의 이들 원천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능력 밖이다. 그 순간에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사고와 작용의 구조들이 이 경계선 안으로까지 확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체 우주가 압축 위에 세워졌고 이것이 에너지의 법칙이라는 그의 설명에 특히 관심이 끌렸다. 간단히 말해, 압축이 에너지를 낳고 확장이 에너지를 발산한다. 나아가 그는 모든 압축은 새로운 에너지를 낳는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관련된 의문을 불러왔다
"고정된 양으로 존재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될 수 있나요?"
" 우주 에너지가 쌓여져 있는 압축도는 어마어마합니다. 이것은 흔히 '빅뱅'이라 불리는 대폭발로 발산되죠. 이 대폭발로부터 광자가 발산되는데. 이것은 창조되고 있는 열역학 영역 내에서 운동상수로서 빛을 나타냅니다. 압축의 이런 발산을 통해 사람들이 공간이라고 여기는 눈에 보이는 거리와, 사람들이 물질이라고 아는 유형요소들이 형성됩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들은 물질과 에너지와 공간과 시간을 갖게 된 거요. 이것이 창조 과정에서 핵심이었소, 폭발을 통해 발산된 에너지는 사실상 그것이 형성될 때의 기본방식이 역전된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때 이후로 발산된 이 에너지는 비슷한 역전들을 통해 자신을 재생시키도록 조건지워진 '고정된 양'으로서 자신을 유지해왔소.
실존하는 가장 큰 구조가 보존 에너지의 통일장이오. 이 장은 고정된 에너지 양으로 이루어져 있소 왜냐하면 이 장은 파생물이고, 영구히 안정적으로 매달려 있으니까요. 그것을 구성하는 구조들은 엄밀하고 유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에너지의 끝이거나 에너지의 유일한 공급인 건 아니오. 사랑에 의해 활성화되는 금강입자들의 자유롭고 무한한 영역이 더 많은 에너지 공급을 나타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무한한 유통과 미래의 압축에 이용되죠"
예수는 이 입자들은 자주 '무한입자들'이라고 표현했고 과학이 금강입자들의 성질을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한의 성질과 통합된 전체성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는 보존영역 내에서 전기로 발생됩니다. 게다가 특정량의 자력이 유지되려면 전하된 입자들의 동일한 운동량이 요구되고요 따라서 이런 구성 내에서는 에너지의 근원으로서 잠재 자력에 직접 접근할 수가 없으니, 이런 한정된 구조에서는 일차 자기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할 거요. 그런데 전자기는 보존영역 내에서 일어나지만, 그런 극성화된 배열을 뛰어넘어 순수에너지로서 자기의 또 다른 기능이 있소, 자기는 더 큰 스펙트럼 내에서 무한 정렬로 활성화됩니다.
마음은 보존이 제공하는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소, 그 설명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요. 마음 또한 기본적으로 전기적이고 구조적이니까요. 당신들의 계산과 실험, 자료 수집 수단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소, 이 모두가 본디부터 전기적 우선순위와 극성쪽을 선호합니다. 나는 관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소.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통찰력'이라부를 수도 있소. 알다시피 인간의 관점이 지구 중심적인 한,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소. 태양 중심적 운동을 밝힌 관점의 변화가 있고서야 은하로 들어서는 문이 열렸지요.
보존의 법칙처럼 열력학의 법칙도 열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밀도영역과 관계가 있소, 그런 밀도영역들에서는 이 법칙들이 모든 실제적 목적에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열역학에는 실존 전체를 논리적으로 통합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무능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에너지를 초연한 무한의 '불가지'와는 따로 덜어진 거시체계내에 존재하는 물질작용으로규정하죠. 그것이 무한에 대해 보이는 일차적 배려는 -그런 배려가 좀이라도 있다면-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머지 실존을 위한 '잡동사니 포대'로 서요. 이것에는 주로 '암흑물질'이란 명칭이 붙죠.
불가지를 따로 떨어진 특수분야에 할당하는 죄를 범한 건 과학만이 아니요. 많은 종교들도 신을 먼 과거와 아득한 미래로만 국한 시켜왔소. 현재는 다른 사안들이 지배하도록 놔두고요. 이런 게 바로 창조주는 거룩한 현재 속에 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아올리는 '모래포대'요!"
이런 설명을 듣고 보니 왜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는 그토록 많은 것을 알면서도 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듯이 보이는지 더 잘 애해 할 수 있었다.
"꿰뚫을 수 없는 원초 잠재력 영역에서 따로 떨어진, 물질과 에너지의 거시체계로 우주를 규정하는 건 무한에 맞서 똑같은 종류의 '모래포대'를 쌓는 거요. 게다가 그것은 동시성과 초공시성을 과학 원리에서 배제하는 반면, 압축이란 주제를 열역학의 '충돌과 폭발' 공식에만 한정시키죠"
"수는 어떤가요? 우리가 과학을 적용할 때, 과학은 수를 운용하죠" 내가 물었다.
"무한과 원초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수학은 사실 각(角)과 비례요. 왜냐하면 비례와 비율만이 무한성을 꿰뚫고 질을 확률량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비례라면 부정 잠재력을 보유한 정지 중심의 고립을 허용하면서 '0'으로 환원할 수 있죠. 참된 정지상태의 작용력은 구조나 절대량으로 절대 규정될 수 없다는 걸 이해해야 하오. 왜냐하면 그건 구조 영역 밖에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것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는 있소, 게다가 보존영역 내에서 입자와 에너지에 접근하는 경우에는 상수에 절대치의 수자가 할당될 수 있소.
하지만 이 영역 바깥에서는 '정지'가 상수요. 정지상태가 진동하는 잠재력과 압축 혹은 잠재력의 추진 토대를 제공하죠. 그런 잠재력은 각과 비례에 의해 자리 잡히고 예견되고 영향받을 수 있는 소용돌이를 활성화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규정할 수 없는 더 큰 영역내에서 따로 떠도는 거시체계가 아니오. 그것들은 대단히 단순해서. 입자와 여타 요소들이 그것들과 통합할 때 제로 방향으로 가면 단순화가 터지고 제로 방향에서 멀어지면 복잡성이 커집니다. 물질 차원에서는 어떤 단일성도 존재하지 않소. 정지상태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건, 그것은 규정되지 않는 고로 고립된 의미에서 원초적 단일성이 될 필요 없이 단일성이 통합력으로 작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거요. 비규정성과 관련해서 가장 경이로운 일은 환경의 필요에 조건지워지지 않으면서 그것들에 적응하는 능력입니다. 거의 모든 것이 허공임을 자각하는 게 좋은 시작일 수도 있소....."
그가 더 말을 잇기 전에 내가 끼어 들었다. '물리학 분야에서 바뀔 필요가 있는 가장 중심적인 관점은 뭔가요?"
"그건 에너지를 질량으로 보는 거요. 에너지는 사실 잠재력(전위)이오 아인슈타인 등식의 완벽성은 그것이 E=M (상수인 빛의 제곱에 조건지워지면서)이 아니라 E=mc2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있소. 이정도의 차이야 문제 삼기에 너무 사소하지 않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단언컨대, 그건 태양계를 지구 중심으로 설명하는가 태양 중심으로 설명하는가와 맞먹는 차이요. 잠재력은 양과 상수와 질로 이루어져 있소, 아인슈타인은 보존영역에서의 에너지의 핵심 요소들을 자신의 공식에서 떼어냈소, 질량은 양을 제공하고, 빛은 상수를 제공하고, 제곱은 질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보존영역에서 복제와 한정이 '질'이오. E=mc2은 세 요소 모두에 똑같은 무게를 싣기 때문에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 거요.
보다시피 에너지는 차원간의 , 또 위치간의 전위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만들어진 많은 외삽법들은 에너지가 질량과 동일하고 그런 사고방식 뒤에 놓인 일차적 욕구는 보존 여역내에서 최대한의 독점적 지배를 낳을 수 있는, 우주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쓸모있는 규정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것이오.
(외삽법: 함수값이 변수가 있는 영역 내에서만 알려져 있을때에 영역 밖에서의 값을 추정하는 방법 함수의 형을 알수 있는 경우에는 함 중에 포함되는 상수를 그 영역 내의 함수값으로부터 예를 들어 최소 제곱법에 의해 결정하고 그것을 영역 밖으로 확장하는 것도 그리 곤란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함수형의 가정 방법에 따라 큰 오차를 조래하는 일도 있다.)
코페르니쿠그의 사례 또한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어졌소, 따라서 지구를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우주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졌소, 모든 고대 정복자들의 추진동기는 독점적 지배였소, 갈릴레오가 박해받은 건 그의 사상이 그런 거창한 전망을 무효화했기 때문이오. 이것은 인간 잠재력의 그토록 엄청난 해방이 왜 그 사상에서 연유했는지를 설명해주죠.
에너지가 양과 상수와 질로 구정된 잠재력임을 이해하고 나면, 보존 영역 내와 그 영역 너머의 여러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는 공리가 발전될 것이오. 이런 이해를 가지면 무한의 조건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구요"
이 계시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간과 무한간의 차이에 대한 내 혼란을 말할까 말까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한이 물질과 에너지와 시간과 공간의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건가요?"
"규정할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는 있소, 무한은 크기 면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질적이기도 합니다. 무한은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에 의해 결정 되지는 않소"
예수의 대답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단순했지만, 아직도 나는 물질입자의 세계 속에서 무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시오. 두 입자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소. 만일 당신이 그것들의 출발 위치를 고정된 '지구 중심'질량으로 간주한다면, 그 입자들은 질량과 관련하여 운동상수인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출발하는 두 입자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연결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데 그건 입자들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것들의 집단적 실행충동으로 정해지는 균형점이요. 이것을 '0'점으로 나타낼 수도 있소. 이 점에서 보면 입자들은 광속의 두배로 확장하는 셈이되죠.
그러고 나면 본래의 이 두 입자들은 '충돌'하여 더 많은 입자들을 활성화함으로써 이 과정의 다중 증식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것은 양적 요소나 상수와 무관하게 질적 전송과 복제를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핵심은 참된 정지이고 그로부터 무한각이 펼쳐질 수 있는 '0'점이오. 우주가 그토록 순식간에 창조되었던 건 이 때문이오"
예수의 이런 이야기는 내게 카오스 이론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고 그 이론은 공시성 및 질적 복제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한걸음 나간 것이오. 왜냐하면 무한은 질의 유사성을 통한 잠재력의 동시 전송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오스의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단일상수를 구하려는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할 거요"
여기에 그가 제시한 무한의 두 예가 있다.
"각도는 무한의 질을 표현하오. 함축상으로도 각도는 무한하게 확장하지 않소? '반감기'의 진행이 '0'에 접근하긴 하지만 절대'0'에도달하지는 못하듯이 무한량은 비례로 진행됩니다"
반감기: 어떤 특정 방사성 핵종의 원자수가 방사성 붕괴에 의해서, 원래의 수의 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
"상수는 절대수인가요?"
상수(常數): 변수에 대하여 항상 일정한 값을 취하는 양
"아니오. 궁극의 의미에서는 아니오. 상수는 특정 문맥 내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나 차원이나 참재력이나 점이오. 모든 상수는 평형지수요. 그 문맥에서의 모든 변수와 가속이 출발하고 그것들이 측정될 수 있는 지점 말이오. 예를 들어 빛의 속도를 봅시다. 빛의 상수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 공식의 뛰어난 점은 에너지 상수로서 운동에서의 평형을 입증했다는 점이오. 사실 우주 전체는 운동에서 평형이오. 평형요소들이 위치를 잡아보시오. 그러면 당신은 상수의 위치를 잡은 것이오.
이 정도를 깨닫기는 간단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에 좌우되는 많은 발견들이 현재로서는 금지되거나 간과되고 있소, 평형을, 행동과 생명과 작용이 상대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둔하고 움직이지 않는 '죽은 점'과 잘못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오. 이건 시소의 지렛목이나 바퀴축이나 정지한 물체의 관성처럼 구조 안에서 평형을 관찰하기 때문이오.
참된 평형은 필수적이고 상호적이고 동시적이오. 그것은 그것의 상수가 주변 변수들에 대해 '정지점'을 나타낸다 해도 잠재력에서 최고치를 낳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는 살짝 웃음을 머금는 것으로 단선적인 구조 영역 밖에서도 마음 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같은 역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변수를 안정시키는 것이 상수의 역할이므로, 상수를 동결된 절대치로 보는 건 잘못이오. 이따금 빛의 경우처럼 상수의 역할이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에 지정 수치가 측량되어 할당되는 경우도 있소, 하지만 보통의 경우 상수는 변수영역 내에서의 상호 요소들에 매개로 따로 떼내어져야 하오."
나로서는 '0'점의 성격을 좀더 명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진공은 에너지와 공간의 한 측면인가요? 아니면 그냥 가설적 위치인가요?"
"그 모두요. 그것은 진공일 수도 있고, 식별할 수 없게 진동하는 에너지장일 수도 있고, 확장하는 잠재력(전위) 영역 내의 승선 지점일 수도 있으며, 명백한 평형지점일 수도 있소. 그 문제의 핵심은 '0'점은 초공시성의 완벽한 정지상태인 대상수에 할당된 기준치란 사실이오. '0'점 요소는 특정 양을 할당받은 광속 같은 다른 모든 상수의 권능을 보증하죠. 최고 상수가 '0'이 아니라며, 양적 가치를 할당받은 상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도입되었을 대 참이 아니게 될 것이오"
그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덧붙인 건 틀림없이 내가 좀 당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시기에 이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당신들이에너지를 잠재력과 동일시한다는 것이고, 잠재력은 양과 상수와 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이오 상수에 할당된 가치에 관계없이 그것은 모든 현상들에 존재하는 초공시성의 '0'점에서 자신의 안정과 평형을 끌어내죠"
"이것을 이해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죠?"
그는 신성한 비밀을 함께 나눈는 기쁨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환하게 웃고 나서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비밀을 털어놓았다.
"초공시성이 자신을 은폐하기 때문이오. 합일의 언어로 쓰여진 이것은 외부관찰을 허용하지 않소 진리처럼 초공시성도 이해하려면 그 안에 있어야 하오"
침묵 속으로 움츠러든 나는 그림 그리는 일로 되돌아갔다.
다른 날 오후 늦게 내가 약간 피곤해하고 있노라니, 예수가 뒤뜰에 나가서 해를 잠시 쳐다보라고 권했다. 해가 땅 쪽으로 많이 내려와 있었고, 하늘도 맑아서 나는 거의 똑바로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해쪽으로 잠깐 눈길을 준 것뿐이었는데도 아주 편안해지는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화실로 돌아오자 예수는 무한으로의 여행을 잘 즐겼는지 묻고 나서 이제 내가 다시 자화(磁자석자化될화)되었으니만치 집중력도 커질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럼 해가 자석이란 말씀인가요?"
"해는 강력한 압축 소용돌이로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태양계 전체를 관통하는 자기력이요. 태양은 수소가스의 압축에서 나온 전자들이 모인 것이오. 그런 압축에서 생겨난 열이 결국 오늘날 당신이 보는 것들을 가져온 핵융합 반응의 심지를 점화시킨 것이고요"
[나는 최근에 이런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를 받고 기뻐했다. 한 친구가 내게 워싱턴 '데이트라인'의 한 신문기사를 오려 보내준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태양의 '담요'는 자석이라고 말한다>
천문학자들은 에제 (97년11월5일) 왜 태양의 내부보다 외부가 몇백 배 더 뜨거운가 하는 55년 묵은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선언했다. 해답은 우주의 극심한 냉기로부터 태양을 포근하게 유지하는 전기 담요같은 것에 대양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 담요를 덥히는 것은 전기가 아니라 자기다. 스탠포드-록히드 우주연구소의 소장이자 다국적 연구팀의 팀장인 알란 타이틀은 그것을 '태양의 자기카펫'이라고 불렀다. 태양 표면 전체에 걸쳐 드문드문 존재하는 약 5만개의 자기 지점들이 내부로부터 태양 대기의 최상층인 코로나 속으로 끊임없이 열과 에너지를 퍼올린다는 것이다" 나는 더 많은 확증들이 나오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태양의 자기적 성격에 대한 예수의 설명에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자기 과정이 불랙홀과도 연관이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불랙홀이란게 물질과 에너지가 완전히 무너져 게걸스런 식욕을 가진 무한 밀도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인지를 물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완전히 무너진 물질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 이 소용돌이들은 죽음의 장치가 아니오. 오히려 그것들 대부분은 결국에는 충분한 질량을 얻어 새로운 별이나 우주물질의 또 다른 성단으로 바뀌는 탄생의 장치요. 사실 지금의 과학은 상이한 세현상을 합쳐서 불랙홀이라고 통칭하고 있소, 무한과 참된 정지를 좀더 잘 이해하고 나면 이 형태들 간의 차이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오.
첫째로 에너지 격자 중에는 균열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참된 정지 상태의 현상적 권능과 자력을 낳는 능력을 드러내죠. 이것들은 탄생장들이어서 장차 별들로 변할 수 있소.
둘째로, 발달한 거대 소용돌이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워낙 빨리 커져서 완전히 굳는 일 없이 에너지의 거대원천으로 바뀐 것들이요. 이것들은 한 은하만큼 먼 거리에 있는 것들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퀘이샤(준항성)들이요
셋째로 나이든 별이 자기 주변을 도는 균형 잡힌 운동체계 속에 물질과 에너지와 시간과 공간을 유지할 능력을 잃게 되면 붕괴된 에너지장이 생기죠 이것은 초신성이 되는 젊은 거대항성의 핵웅합 붕괴와는 다르오 이 경우에는 자기장이 계속해서 주변의 에너지와 물질에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행성들이 예전에 제공하던 균형체계 없이요. 이것은 붕괴된 물질이 아니라 무한 밀도로 나아가는 붕괴된 체계요"
예수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장대해서 나는 우주의 놀라운 잠재력에 그저 탄복할 밖에 없었다. 예수의 눈을 통하면 어떤 실존에서도 팽창과 수축의 끝없는 유형을 보기가 지극히 쉬웠다. 이 점이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우리가 물리적 속성에 대해 자세하게 나눴던 마지막 대화에서였다. 그가 불랙홀이라는 주제를 워낙 쉽게 대할 수 있게 해준 탓에 나는 흥미를 돋구는 또 다른 우주 요소 반물질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반물질은 불안정한 요소이다. 반물질과 물질이 충돌할 때마다 그것들은 서로를 소멸시킨다. 과학자들은 반물질 입자는 물질 입자와 정반대라고 말한다.
"반물질과 물질은 둘 다 순수에너지에서 동시에 창조되었소. 그들 관계의 결정적 측면은 반물질은 압축할 수 없는 에너지 측면을 나타낸다는 거요. 따라서 압축도가 높은 영역에서는 물질이 밀도를 쌓아갈수록 반물질은 줄어듭니다. 물질이 질량을 쌓아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서로 떨어져야 하거든요 모든 에너지가 질량에서 풀려나오는 건 그 둘이 다시 만날 때뿐이오. 그 두 에너지가 가 접축할 때, 모든 압축물질들은 순수에너지로 바뀌어 발산됩니다.
순수에너지가 창조될 때 그것은 두 선의 전위로 갈라집니다. 한 선의 전위는 압푹에 반응하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조의 의미에서 이것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오. 왜냐하면 물질은 양자하와 음지하 둘다를 포함하는데, 반물질은 질량을 미세하고 우연적으로만 쌓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의 보완작용이 평형의 역동성이오.
이 두 전위는 보통 때는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소. 사실 그것들은 압축이 반물질에 반발하는 보존영역을 만들 만큼 밀도 높은 상황이 생기기까지는 서로를 무시하는 타고난 속성에 의해 보호됩니다. 그런데 압축을 끌어당기는 방아쇠가 반물질의 방출 미수 자체요. 왜냐하면 반물질은 무엇보다 물질을 형성케 해준 우선적 요인이니까요. 방축 미수는 끌어당김을 낳고, 끌어당김은 압축의 발산을 낳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대규모의 빅뱅일 수 있소. 이런 게 바로 우주의 영원불변하는 리듬이오!"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잠시 말을 중당함으로써 내가 우주 창조의 단순성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과학의 목적이 "생명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생명을 작동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내 자각과 외식이 얼마나 넓혀지고 있는지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런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들을 나와 함게 나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대화에서나 조심스럽게 통합된 의미 유형들을 엮어내고 정보를 실제 삶에 적용할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가 우리 세계에서의 에너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내렸던 가장 적절한 요약 중의 하나가 에너지가 부족상태 및 세력과 맺는 관계이다.
"사람들은 보존원리가 규정하는 에너지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을 부족으로서만 이해하죠. 사람들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에너지의 일차 공급원이 태양이라는 사실도 이런 이해를 북돋웁니다. 이 에너지는 태양계 전체에 걸쳐 넘쳐흐르는데, 모든 유형의 생명에 작용하죠. 이 체계 내에는 한계와 의존이 존재하기 때문에 경쟁도 있소, 따라서 강하고 공격적이고 보존력이 강한 힘이 자배합니다 인간의 일차 에너지 공급이 그런 부족에 좌우되는 한, 지상에서 오래 지속되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란 있을 수 없겠지요. 인간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의 형제애를 가져오고자 한다면 자신의 관점을 바꾸어 물리적 무한과 신의 실재쪽을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관점이 변해야만 인간은 그가 지금껏 찾아오던 물리적 영적 해답 모두를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예수는 분명히 강조했다. "과학은 삶의 작동방식에 대한 의식을 발달시키고, 이 읫기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적용하는 효용성의 추구요. 이런 태도와 과정을 취한다면 어떤 행동도 과학이 될 수 있쏘. 최근 몇십 년 동안 고도 기술과 군비 경쟁이 워낙 우세하다 보니, 과학은 정밀기례와 지적 엘리트주의의 마법에 빠지고 말았소, 참된 과학성은 이런 게 아니오. 그런 식의 투자는 정신적 엘리트주의가 실제로 기여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는 잘못된 인상을주어왔소,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가 사실이오. 무릇 참된 과학은 삶에 기여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런 다음에야 마음은 우리의 타고난 걸출함을 요약하는 것으로 자신의 종속성을 표현할 수 있고요.
우주의 문을 열 열쇤가 있소, 모든 해답이 바로 당신 앞에 있소, 당신이 할 일은 질문을 짜는 거요. 질문이 부적절하면 대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니 겸손하고 탐구하는 마음으로 열린 가슴과 인식으로 그리고 판ㄴ단 없이 현실에 접근하시오. 당신이 적절하게 질문하면 모든 것이 계시될 것이오!
참된 지성은 본디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무구하게 인식하고 현실을 쓸모 있게 식별하죠. 삶의 문제들은 전체 동그라미에서 떨어져나온 점들과 같소, 그것들은 성격상 워낙 특수해서 정확하게 평가할 때만 고쳐질 수 있소,
의식의 초창기부터 인간은 모든 실존에 타당한 어떤 온전한 자극을 찾아내, 그것을 기술로서 관리할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서 '장대한 청사진'을 찾아왔소, 그런 것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모든 질병에 듣는 만병통치약을 갖게 될 것이요. 그건 '황금담요처럼 지상에 장대한 청사진을 그냥 덮씌우면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는 발상이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지상에서 가장 값비싼 상품이 될 거요!
온전한 자국은 있소. 하지만 그건 하나의 청사진으로 요약될 수도 없고 기술로 독점할 수도 없소, 그 자국은 바로 사랑이오. 그 모두를 잡아낼 정도로 충분히 큰 바탕이나 격자판이나 청사진은 없소. 그렇더라도 만병통치약 같은 건 없소, 사랑조차도 주어져야 하고 현실의 세목들을 존중하면서 양육되어야 하며, 그것이 부서졌던 지점에서 복구되어야 하오. 질서의 모든 균열이나 붕괴가 그 종류나 사건면에서 대단히 특수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관련 요소들은 다양하고 많을 수 있소, 만병통치약이라는 개념 자체가 효용성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오.
만병통치약으로 대표될 수 있는 원형적 개념들에 기우는 것은 순진함이나 자포자기나 황금만능주의의 특징이오. 그런 걸 바라는 것은 감춰진 질병을 인정하거나 파고들지도 않고서 그것들을 고치겠다고 약속하는 일반론으로 토대 전체를 덮겠다는 것과 같소. 오래 전에 낸가 자신의 질병을 자인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질병에서 회복될 수도 없다고 말했을 때. 비난하거나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이 아니오. 사실 이 말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학적인 진술이었소. 그건 자신의 삶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시니 구체화된 주체여야 한다는 뜻이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위치에서나 원을 부술 수 있지만, 내가 장담컨대 그 원이 다시 연결되는 건 잘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뿐이오.
문제를 드러내고 명확하게 하지 않고서 고상한 일반화 속에 주저앉아 그것들을 원상복구해주는 마법의 원이란 건 없소 집의 토대가 허물어졌는데, 새 지붕을 덮어서 집을 고치거나 조경으로 그것을 가릴 사람은 없을 거요. 이것은 손상된 관계와 어긋난 계획, 무너진 가슴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실제로 균열이 발생한 지점을 찾아내, 그곳에서 그 균열을 수리하시오.
식별과 확인과 효용서을 갖는 건 겸손한 자세일 뿐 아니라, 이런 자세들 없이는 과학을 가질 수 없소. 그것들을 통해서만 사랑의 연결, 즉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특이성을 배려하고 사랑의 일차 충동인 효용성을 견지할 수 있소,
개별 사항의 효용성을 다루고 공동 개연성의 범주들 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과학이 할 일이오. 이것이 주제넘은 목표는 아니지만 대단히 고귀한 목표인 건 사실이오. 왜냐하면 그건 사람들을 무한의 문턱으로 데려가니까요. 그런 마음가짐이 삶과 무한과 실존의 모든 개별사항들을 존중하게 해주죠"
무한이란 개념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개별 사항들과 공동 현실 모두를 포함하는 식으로 확장되었다. "당신 말씀은 무한이 영처럼 여기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뜻인가요?" 나는 어쩌면 무한이 그리 멀리 있지 않으리란 생각에 또 그럴 가능성을 미리 피하기 위해 그 문제를 내멋대로 해석해왔다는 생각에 약간 몸을 떨었다.
"무한은 양을 질로 바꾸고 질을 양으로 바꾸는 보편 요소소. 따라서 무한은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잠재력의 전송에 관계합니다. 금강입자들(무한입자들)이 사랑의 권능과 공시성을 갖는 건 이런 작용을 통해서요. 사람들이 만병통치약에 경도되는 이유도 틀림없이 이 때문일 거고요. 인간은 공통성과 예견가증성의 문맥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니까요. 이건 건강한 본능이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생명의 본원적 속성과 참된 경향성에서 추출되지 ㅇ낳고 작위적으로 생명에 부과한 원형 공리에 의존하는 데 있소.
오늘날의 모든 기술에서 임계질량은 과학 자체에 있지 않고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있소. 예를 들면 첨단 의약분야는 인류에게 무수히 많은 축복들을 가져다주었소.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모든 질병을 고칠 새로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으로 대단히 현혹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제시하죠.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환상이오. 왜냐하면 뭔가를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과 관계가 없는 재해들도 이영역으로 징후를 옮기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경제적인 실패를 겪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그문제를 대면하거나 다루는 대신 심장마비를 겪는 쪽을 택하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가 믿는 만병총치약이 자신을 구원해주러와서 그가 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해줄 테니까요.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학약품들을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하죠. 인간의 질병 대개가 화학적 성격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제 고난으로 가득한 세상은 자신의 징후를 화학약품에의 의존성으로 옮겨가고 있소.
불법 이전을 조장하는 것이 모든 만병통치약의 속성이오. 결국에는 약속했던 모든 해결채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그 사이에는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다뤄져야 할 모든 질병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는 거죠. 어떤 문제라도 그것이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믿는 것으로 자신의 징후를 이전한다는 사실이 당신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을 테지만, 진리는 실제 원인과의 관계에서만 해결책이 발견된다는 거요. 모든 과학적 방법 속에는 이 사실에 대한 배려가 심어져 있소, 이곳은 무한히 쓸모 있는 우주지만, 문제를 피하거나 당신에게 아침 나절의 무지개를 약속하는 일반론 뒤로 숨는 것으로는 이 우주를 쓸모 있게 만들 수 없소.
이런 현상들은 신체의 건강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만병통치책은 위험한 환상이오. 모든 만병통치책은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교육은 대단히 유용하지만, 공적 규제로 강요되는 일반 교육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사회병리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책이 아니오. 그런 환상은 교육이 다룰 수 없는 모든 병리의 징후를 공교육 제도로 옮기게 하죠.
만병통치책의 위험성을 놓고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예가 돈이오. 돈은 삶을 위한 경이로운 윤활유요. 그건 바퀴가 돌아가게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리란 희망 탓에 세상의 약들이 돈의 영역 속으로 들어갔소.
이곳은 만물 속에서 창조주의 현존을 경배하는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우주요"
삶의 작동방식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단순함의 한 본보기였다. 내가 그것을 소화하고 나자, 내 의식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가만히 물었다.
"신이란 관념도 일종의 만병통치 처방으로 여겨질 수 있지 않나요?"
나는 그의 눈이 반짝이고 그의 웃음 속에 기대가 묻어 있는 것에서 예수가 이 질문을 기다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모든 건 그들이 신을 관념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현실로 여기는가에 달렸소! 현실 속에서 신은 모든 존재 속에 존재하는,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인도력이오. 현실 속의 신을 아는 사람은 모든 해답을 잠재적으로 그의 앞에 가지고 있는 것이오. 신이 없는 곳이 어디 있소?"
그의 대답은 내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닫혔던 문이 열렸을 때 처럼 갑자기 나는 예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깊이의 느낌과 이해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체험을 통해 직접 신을 알지" 않고 오직 관념을 통해서만 '신에 대해" 아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관념을 통해서는 신을 오직 보편성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불현듯 세상의 모든 기능장애들을 자신들에게로 끌어온 만병통치책들을 양서해온 보편서의 여사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또 왜 역사상 과학과 신학이 그토록 상반되는 관점에서 반목해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 가장 중요한 점은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끝없는 사랑 474쪽 예수의 대답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단순했지만...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요한복음 10:34와 시편 82:6절을 참고 “예수께서 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너희는 神들이다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 느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神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였도다” 너희는 신의 아들과 딸로 태어 났다. 왜냐하면 네 안에 그리스도 신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깨달아 질 때, 네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고요하라. 그리고알라. 내가 곧하나님임을(시편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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