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0장 사랑의 십계명 본문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0장 사랑의 십계명
사랑
2021. 10. 5. 11:38
이천 년 전 바리새인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율법 중 어느 계명이 가장 크나고 물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가 지금까지도 지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을 시작했던 건 기존 계명들에 대한 이 같은 명확화와 단순화를 가지고서 였다. 바로 이 선언 속에서 예수는 덕성과 행동, 삶의 시행과 교정이 율법의 목적임을 밝혔다. 그와 함께 예수는 율법이 지배 일정을 설정하고 유지하는 권위화된 힘이라는 관념을 던져버렸다. 우리가 사회와 우주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수는 여러번 내게 상기시겼다.
"유일한 권능은 오직 사랑뿐이오. 따라서 사랑에 뿌리를 둔 법칙만이 유효할 수 있소, 그런데 삶의 법칙과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진리의 탁월성이오. 진리는 모든 삶에서 항상적인 요소요. 당신이 완성을 향한 나름의 길을 발견하고 환상을 초월하도록 해주는 건 오직 진리뿐이오. 그리고 사랑과 진리의 확실성은 둘 다 성스런 가슴속에서 찾을 수 있소.
그건 가슴이 삶의 온갖 감정과 느낌과 자각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완벽하고 순수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당신의 모든 삶 체험은 이 과정을 통해서 강화되거나 당신의 서약 및 삶의 목적에 따라 재편성되어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성스런 가슴은 당신의 영혼 한가운데에 있소, 그것은 마음이 보듯이 당신 존재의 오른편에 있거나 왼편에 있는 것이 아니오. 왜냐하면 마음은 비교하고 검토하기 위해 모든 걸 두 부분으로 나누니까요. 아니, 당신의 가슴은 합일을 구하고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고 정직과 공경과 정의와 친절로 삶을 확장하는 삶의 중심, 달아오르고 타오르고 열정적이고 균형 잡힌 당신 삶의 중심이오. 이런 잠재력이 있기에 권능 있는 불굴의 선이 있게 되는 거고요.
성스런 가슴은 진실로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자 영감에 찬 삶의 원천이오. 인류가 완전한 자기 실현으로 나아갈 때 지상에는 이 가슴의 지성이 대세를 이룰 것이요. 분리되거나 약화된 자아로는 누구도 행복을 찾을 수 없는 법이오.
가슴에 비교하면 마음의 지성은 고작해야 비교와 통제를 위한 경계선과 기준을 설정하는 데 골몰할 뿐이죠. 마음에 관한 한, 도덕의 추구는 삶을 개선하는 방식도 삶을 통제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친절하고 북돋우는 형제애를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도덕이란 기준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워낙 경직되고 엄격한 규율이 지정되다보니 사람들을 향상시키기 보다는 좌절시키는 경우가 더 많죠, 이것은 마음이 삶 자체가 아니라 판단 근거를 세우기 위해 가슴의 권능에 개입하고 그것을 도용하기 때문이오.
비록 마음을 다스리는 윤리 분야들이 있긴 하지만 도덕과 윤리에 대한 참된 이해는 마음의 지배 영역을 훨씬 뛰어넘죠. 우리가 마음과 관계하는 면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해봤자 정확한 우선순위의 원리 정도요. 마음은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가 마음이 무구한 인식에 도움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 무구한 인식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것이고요. 자기 나름의 계획을 지원하거나 확정하기 위해 현실을 발명하거나 재창조하는 건 마음의 권리나 특권이 아니오.
윤리를 위한 모든 기준은 결국 '실행력workavility'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소. 마음이 우주법칙과 통합되는 건 이 기능을 통해서요. 또한 이것은 순응을 강하게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오. 순응이란 삶과 노력을 실행력에 적용하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실용공학의 원리에 따르는 다리 건축가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지탱하면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오.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효용성들이 있소, 그것들을 부지런히 찾아내고 성실하게 적용하는 게 마음의 의무요.
많은 사람들이 순응이라고 하면 억압적인 느낌을 받는 건 그것이 옳은 권위든 잘못된 권위든 권위에 대한 굴종으로 해석되기 때문이오. 이건 비극이오. 왜냐하면 신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완성과 권능을 가져다주니까요. 반면에 거짓된 순응은 언제나 힘과 벌로 유지되고, 그것에 굴종하는 사람의 자부심을 저하시키기 십상이죠"
'우리가 그런 거짓된 원위에 대항해서 그것을 개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물었다.
예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당신 자신이 실행력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보여주시오. 그런 다음 권위에게도 똑같이 하길 요구하시오"
윤리와 도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수는 그 용어를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하고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하는 것 같았기에, 내가 물어보았다. "윤리와 도덕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윤리는 고귀한 지성의 원리들을 집단의 실존 문제들에 계속해서 적용하는 과정으로, 모두의 안녕에 도움되는 가치들을 삶에 부여하죠. 윤리란 우리가 남들의 삶을 건드리면서 보여주는 배려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이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가장 큰 가치를 놓는가에 대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윤리는 균형 잡힌 인과로 요약될 수 있고, 최고선에 적용될 수 있소,
반면에 도덕이란 본질적으로 더 낫게 바꾸고자 할 때 나타나는 헌신이요. 도덕에는 살면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대한 책임감과 그것들을 솔직하게 마주하여 직접 개선해보겠노라는 자발성이 포함되죠.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감정과 생각과 영을 깨끗이 하는 것도 도덕의 일부요. 사실 깨끗함은 신성의 이웃이요. 하지만 도덕이란 결국 개인적 성취여서, 그것이 외부에서 강요될 때는 한 개인의 '참나'를 약화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소"
"당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삶을 더 낫게 만들려는 의식과 책임감의 중요성을 확인해주는군요. 그렇다면 이것이 모세의 계명이나 기본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고치기 위해 선포되었던 행위 규율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우선 모세가 지상에서 밟아나간 역사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인간의 가슴은 여전히 비슷하지만, 그 당시 인간이 처해 있던 외부현실은 지금과 아주 달랐소. 이것은 그 댱시 이슬람 민족의 특별한 운명과 관련해서 특히나 그러하오. 신의 안내와 모세의 노력으로 이슬라엘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이집트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났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또 하나의 강요된 속박에 지나지 않았소.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무슨 수로 해방될 수 있겠소? 강한 책임감과 높은 지혜가 있었던 모세는, 사람은 있을 곳과 거기에 있으려는 목표가 있기까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모세가 40년 동안 이슬라엘 민족을 데리고 사막을 떠돈 이유가 이것이오 적어도 두 세대는 경과하여 노예 신분의 경험이 없는 전혀 새로운 장로계층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거요.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소. 만일 그들이 노예 신분에서 곧바로 예전의 고국으로 돌아갔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말았을 거요. 몇백 년 간에 걸친 노예생활은 개개인에게서 책임감과 자결성 윤리의식을 완전히 치워버렸소, 노예는 교육도 못 받고, 결정과 결단과 식별을 내릴 권리도 갖지 못하죠. 노예는 명령을 받드는 것말고는 달리 무엇도 할 수 없소. 그들 선조들이 아무리 지혜롭고 위대했다 해도 마찬가지요. 선조들의 연속성이 사실상 끊어지고 말았으니까요. 자신의 손에 이런 엄청난 문화적 문제를 쥐게 된 모세는 자기 민족의 통합성을 회복하는데 포괄적인 책임감을 느꼈소, 그리하여 모세는 지속 가능한 현실의 토대를 창출하기 위한 여분의 조치를 취했소."
예수가 모세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느끼고 있는 건 분명했다 또 예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오늘날 서양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세에게 얼마나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예수는 이 위대한 지도자가 내릴 수밖에 없었던 몇몇 중요한 결정들에 조명을 비추면서 모세가 어떻게 히브리 민족에게 새로운 윤리의식과 자부심, 자결의식, 그리고 개인절 집단적 권리들에 대한 이해를 심었는지 설명했다. 사실 먼저 이런 것들을 이루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하나의 문명이 다시 세워질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모세의 계명에는 보편 진리와 원칙들만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는 규율과 책임을 확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개개의 계명들은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 계명들은 신에게서 신성한 영감을 받아나온 것들인 데다. 모세는 신의 가슴과 깊이 교감하여 얻은, 사랑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로서는 영혼이 성스런 가슴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할때 예수가 사용했던 비유 중 하나가 길 옆에서 불타는 관목이었던 것이 흥미로웠다. 예수가 이것을 말하는 순간, 나는 모세를 떠올리면서 십계명을 전해받은 그 산에서 모세는 신이 자신에게 말하기 전에 가슴의 관문을 통과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십계명은 태고적의 도덕 계명들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것이 추구하던 사회적 목적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고대사회와 이후 시대를 통해 이 법률들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권능이 자배하는 지속 가능한 현실 공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지향들이 모이고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을 그 힘의 근원에서 존중할 때 우리는 도덕이라는 제한 공리를 넘어설 통찰력과 자유를 얻는다. 예수는 말했다.
"신에게 봉사하는 법들은 계시적이고, 언제나 위쪽 방향으로의 지향성을 갖습니다. 법이란 삶을 지원하는 것이고, 필요하다면 삶을 교정하는 것이요. 법을 오직 판단을 위한 강령으로만 사용하는 사회는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법이 뿌리박고 있는 사랑을 매개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정당성도 없기 때문이요. 사랑의 권능이 유용한 행위법규를 대신하거나 짓밟는 일은 없소. 오히려 사랑은 법을 위한 근거를 드러냄으로서 강요 대신 참된 깨달음이 들게 히주죠"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십계명 각각에 들어 있는 사랑의 뿌리를 설명해주시겠어요?"
예수는 주저 없이 설명에 들어갔다.
"모세의 첫 번째 계명은 '너희는 나 앞에 다른 신을 놓지마라'요 이건 우리의 한 근원을 드높이고 모두의 합일을 일궈내는 계명이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고, 이 한 근원의 인식 가능한 현존이 사랑이오. 신의 사랑은 첫 번째 동인이어서 다른 무엇도 그것에 앞설 수 없소, 모든 것이 사랑에서 창조되었소, 신의 자녀로서, 혹은 신의 한 측면으로서 당신은 아버지를 빼고는 우선 원인을 가질 수 없소. 따라서 당신의 이름은 '사랑'이니, 사랑은 당신이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의 우선 원인이요.
또한 아버지를 사랑과 첫째 원인으로 존중하는 것은 당신 안의 사랑을 키워 행위의 참된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요. 사랑이 낳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당신은 자기 권능에서 벗어나 있는 거요. 잊지마시오. 사랑은 금강입자들을 지휘하고, 한 영은 사랑에 공명한다는 사실을. 사랑이 있는 곳에는 잠재력이 있고, 희망이 있고 신이 있소. 모든 창조에서 일차적인 실재이자 고려 대상이 이것이오 그 중요성과 권능과 진리란 면에서 다른 어떤 것도, 그것 보다 앞서지 않소. 우리의 한 근원이 모든 합일의 토대요.
모든 선은 합일을 그 도구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분리는 악의 도구요. 당신의 모든 체험 속에서 이 진리를 살피는 것이 현명할 거요. 평생 동안 성장과 변화의 여러 단계들을 거치다 보면 옛 유형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합일의 개념을 세워야 하는 혼란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오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지고 이전 요소들은 빠지게 되죠. 그럴 때 합일은 신의 것이지,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는 게 좋을 거요.
합일은 역동적이어서, 끊임없이 더 큰 잠재력을 형성하죠. 이렇게 되면 많은 구조들이 무너지고 해체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조화로운 삶 속에 끼어든 분리가 가져오는 파괴와는 다르오. 분리는 성장에 저항하고, 합일의 권능을 지연시키는 판단과 갈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구별되죠.
분리의 주도자들은 변화를 위협적인 것으로 보기에, 그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적의와 곡해를 변화 요소들 속에 주입하죠 분리는 전쟁과 호전적인 범죄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소, 물론 분리가 미치는 영향들 대부분은 이보다 훨씬 더 미묘하지만요.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건, 세상이 침체하는 것이 복잡성 때문도, 심지어는 혼란 때문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그런 상황들도 잠재력의 역동성을 억누를 수 있지만 세상의 구태의연함은 그보다는 수동적 균형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분리의 여러 측면들 때문이요. 다시 말해 합일을 위조하는 거죠"
모세의 두 번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이다. 이 계명은 나를 약간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화가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인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에게 물었다. "이건 예술적 모사도 잘못되었다는 뜻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소. 예술적 모사는 실재의 본질을 표현하는 찬미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오. 예술은 실재를 키우려는 시도이지, 그것을 대신하려는 시도가 아니오"
"그렇다면 이 계명이 어떻게 해서 사랑에 속하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신은 사랑이오. 이말은 그 모든 형상 속의 사랑을 우주의 참된 권능으로 존중한다는 뜻이오. 이 권능을 잘못 전하거나 왜곡하거나 부정하거나, 아니면 사랑의 현존을 위조하는 구조로 그것을 대신하여 약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말했던 건 어떤 형상의 꾸며낸 개념이나 내용이나 구조를 가지고도 신을 위조하지 말라는 거요.
어떤 수준의 구조도 신을 대변할 수는 없소.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자기 내면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잘못 알게 될 거요. 질서나 생활의 지침 역할을 위해서는 구조가 필요하지만, 구조는 절대 신성의 측면이 아니요. 구조는 그냥 하인이고, 존재를 이루는 벽돌이 지나지 않소.
과도적이거나 임시적인 어떤 방식으로도 신의 현존을 상징하거나 개념화하지 마시오. 거룩한 아버지의 현존을 어떤 형상으로도 위조하지 마시오. 어떤 환상도 신의 권능으로 돌리지 말고, 신의 어떤 것이 환상처럼 유약하리라고 여기지는 마시오. 이런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언제나 사랑의 권능을 존중하고 아는 동시에 환상의 덧없음을 인식하라.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위조'와 '환상'을 비슷한의미로 사용하시는 것 같은데. 이 두 용어를 사용하실때 어떤 구별을 두시는 건가요?"
"그렇소. 환상과 위조된 현실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소. 당신이 상황에 맞춰 다른 옷을 입을 때. 당신은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환상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오. 또 어떤 계획이 눈에 보이는 현실로 드러나기 전에 그 계획을 세세하게 개념화할 때, 당신은 일종의 예비적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오. 당신이 자신 속에 있는 다른 차원의 느낌을 발견하기 위해 좋은 책 속으로 달아날 때, 당신은 신뢰할 만한 환상들을 가지고 그 여행을 편성하고 있는 것이오.
반면에 당신이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그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그 사람처럼 옷을 입을 때 당신은 위조된 창조를 하고 있는 셈이오. 당신이 진실로 삶을 사는 대신에 환상에 따라 살 때, 당신은 실존을 위조하고 있는 셈이오. 환상 차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소. 다만 문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요.
환상을 실재와 혼동하고, 그것에 권위를 부여할 때, 위조된 실존이 있게 됩니다. 세상은 위조된 가능성들로 가득하죠. 만일 당신의 삶과 열정을 그것들에 주게 되면, 당신은 결국 완전히 기진맥진하고 말 것이오. 하지만 이런 일들이 굳이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니오. 당신이 사랑을 위조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내거나 그것을 환상으로 여기기만 해도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사랑은 모든 현실의 토대요. 당신이 모든 면에서 이 진리를 존중하고, 공허한 개념과 의식으로 신과의 관계를 위조하지 않는다면,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요. 누구라도 현실을 확신하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는 창조적 표현을 위해 환상과 안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소"
이 계명의 본질은 사랑을 왜곡하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사랑의 권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 이것을 깨닫자 성 바울이 남긴 불멸의 미문이 떠올랐다.
"비록 내가 인간의 혀와 천사의 혀로 말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나는 웅웅거리는 놋쇠나 딸랑거리는 심벌이 되고 만 것이고, 비록 내가 예언의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신비와 그 모든 앎을 이해한다 해도 또 내게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이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내가 내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내 몸이 불살리게 내놓는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내게 유익하지 않다"
"세 번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요.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이요. 사랑이 존재에 작용하면 생명이 태어나죠.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소. 왜냐하면 생명이란 움직이는 사랑이니까요.
사랑을 가치절하하거나 헛되이 사용하지 마시오. 당신이 사랑의 권능이나 효용성을 부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오용한다면, 혹은 잘못된 대변이나 불신, 부정적으로 그것의 영예를 더럽힌다면, 당신의 삶은 크게 고통받을 거요. 신의 권능은 사랑을 통해 작용합니다. ..... 이것을 잊지 마시오! 만일 당신이 삶을 조작하기 위해 사랑을 가장하거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위해 신의 허가를 구한다면, 삶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은 줄어들 거요. 이것은 생명 및 삶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계명이오.
모세의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오. 안식일은 활동, 즉 창조의 엿새 뒤에 오는 은혜의 날이오. 이것은 구조를 만드는 노고에서 벗어나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의 내적 정당성은 당신의 사랑이 나온 신성을 찬양할 때 좀더 충분히 안식될 수 있소. 가슴속에 들어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성스런 유대를 체험하는 것으로 이 날을 거룩히 지키시오. 온전함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사랑하고 기뻐하시오. 동시에 이 성스런 시간 동안 한 영을 사랑하고 그것의 온전함을 찬양하시오.
안식일의 기초와 고귀한 지성은 '공경'이오. 이것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든 생명과 창조유형들, 우주에 대한 공경으로 넓혀집니다. 우주에는 신성한 질서의 멜로디를 포괄하는 리듬이 있소. 이 리듬은 여섯 박자마다 한 박자 쉬고, 여섯 점마다 한 중심을 가지며, 여섯 단계마다 한 외피를 이루고, 여섯 사람마다 한 지도자를 내며, 여섯 요소마다 한 목적을 이루고, 여섯 번의 행동마다 한 번의 휴식으로 연주되죠. 이 리듬을 지키는 것도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는 것의 일부요. 우주에서 인간의 탄생이 창조의 여섯 번째 주요한 사건으로 표현되는 건 우연이 아니오. 인간의 참된 본질을 이루는 사랑과 믿음과 의식은 우주 최정점의 영광을 대변하죠. 당신들은 삶의 한가운데 놓여 있으면서 삶을 지휘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오.
이 주기적인 안식일을 확실히 함으로써만 당신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맛보고,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의미 없는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소. 이 주기적인 인식 속에서 온전함의 권능은 기적을 발휘하고, 신성은 더 위대한 축복을 가져옵니다. 이 간격을 받드는 것으로 당신은 당신이 그리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권능과 더 높은 의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셈이요. 말하자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당신은 순응의 참된 의미가 신의 섭리와 고귀한 지성의 원리들과 무위의 권능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라는 걸 배웁니다.
휴식할 수 있는 이 쉼표가 없다면, 삶은 휴식이나 평화나 충전을 취할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한 채 6일 주기로 계속 이어지는 일직선적인 진행이자 의무적 활동일 뿐이고, 끝없는 고역이 되고 말 거요. 한 사회 내에서 안식일로 대변되는 참된 원리들이 무시당할 때, 그 사회는 억압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낮을 뒤이어 밤이 찾아오는 것처럼 명약관화한 결과요. 우리 아버지가 활동 주기사이에 이런 막간을 두신 것은 창조의 열매들을 헤아리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축복을 위한 이런 막간이 없다면 무슨 수로 영혼이 받아들임의 과업을 해낼 수 있겠소? 무슨 수로 영혼이 평화로울 수 있겠소?"
이 지점에서 나는 예수에게 일주일 중 어느 날을 일곱 번째 날로 삼는지가 중요한 문제인지 물었다.
"안식일이란 본래 사람들 사이에서 작업과 수고를 잠시 중단하는 걸 나타내는 만치, 그 사회에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그 날을 안식 일로 동의하는 한 어느 요일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소. 안식일은 한 영에 대한 전일적 찬양이오"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모세가 남종과 여종과 가축에게까지 안식일을 적용시켰던 것을 떠올렸다.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이 사랑과 완전한 한영의 품에 안겨 휴식하고 회고하는 날이 이 날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날을 개인적으로 경배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체험할 수도 있지만, 그 축복을 남들에게로 넓히지 않고는 그것의 충분한 권능을 체험할 수 없다.
이 날은 모든 사람이 조건 없이 사랑받고 구조에 대한 그들의 얽매임을 용서받는 자비의 날이다. 또 안식일은 가슴의 날, 즉 기도와 숙고와 자발적 선물과 친절한 말과 거룩함에 대한 소박한 공경을 위한 시간이다. 이런 실천 속에서 우리는 한 영과 신성한 질서를 불러오는 그것의 권능에 대해 변치 않는 공경을 닦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지상에서의 네 시간들이 길고 풍요로우리라'요"
당장에 내 머리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부모 자식간에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이 떠올랐다. 가정 밖에서 받는 부정적인 영향들로 일탈과 혼란을 겪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갖가지 도전적인 과제들을 던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잘못된 관계와 상황 속에서 헤매는 부모들 때문에 무시되거나 학대받는 아이들도 있다.이런 아이들은 그런 영향에서 벗어나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예수는 지적했다.
" 이 계명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행해야 할 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소, 모세 시대에는 가족 단위가 철저히 전제적이었고, 인구도 작았으며, 부족의 지향성도 가족의 역할을 그 중심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계명이 협소하게 표현되더라도 그것의 본래 취지를 전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훨씬 더 많소. 사회와 가족 단위 모두에 훨씬 더 많은 다양성과 복잡성이 있게 된 거죠. 따라서 이 계명의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적용범위를 더 넓게 밟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계명을 권능 있게 하는 사랑은 사실, 이전에 당신에게 다가왔던 그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요. 예전에 당신에게 뭔가를 가져오거나 주었던 사람들을 공경할 때,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모두를 자신의 양분으로 바꿀 수 있소, 어떤 사람보다 나아지려면 먼저 그 사람을 공경해야 하오, 역사란 이런 각 개인의 장점들을 모은 것 중 일부에 다름 아니오.
개개 삶의 자취에는 인정할 만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있는 뭔가가 있기 마련이오. 내가 당신더러 몸 속에 받아들이는 음식을 축복하라고 말했을 때, 당신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건 음식이 아닌 사랑임을 당신이 좀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이건 당신 개인의 문화 유산에도 똑같이 적용 됩니다. 이 지상에 당신보다 먼저 도착했던 것들에 대한 사랑과 공경 없이는 삶에서 어떤 진보도 이룰 수 없소. 과거를 부정할 때, 그사람은 바퀴를 다시 발명해내는 데 인생을 소비할 수밖에 없소. 그런 사람은 '무에서 시작하는것'이 더 많은 개인적 성취를 가져다주리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연속성을 깨뜨리거나, 아니면 자신이라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답시고 오히려 자신이 받은 것을 망가뜨리는 셈이오. 당신이 뭔가를 쌓아올리면서 정작 그 토대가 되는 것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시간이 어떻게 길고 풍요로울 수 있겠소?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 이것이 형제애와 번영을 위한 열쇠요.
당신이 쌓아올리는 것의 토대가 되어주는 그것을 존중함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나갈 근거를 만들어내는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존중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대체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소."
나는 예수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로서의 내 경력을 떠올렸다. 나는 세 살밖에 안 되는 이른 나이에 내가 화가로서 살게 되리란 것을 알았다. 아직 글자를 읽기도 전에 우리 어머니가 소장하고 있던 중근세 유명화가들의 화집에 정신 없이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내가 그 화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어머니는 그 책을 내게 주셨다. 그때는 내가 네 살밖에 안 됐을 때였는데. 그 책은 이미 닳아서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그 화집에 실린 그림들은 내 영감의 원천이었고, 그 화가들은 내 영웅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능가하고 싶은 화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런 깨달음 때문인지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고, 남들보다 앞서 내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동안 나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이전에 그려둔 내 작품들을 원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곤 했다.
그래서 내가 예수에게 이 원리와 거기서 끌어낸 확신이 내게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꾸했다.
"모든 것이 한 문맥 안에 존재하니, 자신의 문맥을 인정할 때, 정직만이 아니라 양분까지도 끌어오게 됩니다. 있었던 사실과 자신의 의도를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이 정직의 전부는 아니요. 정직의 힘은 공경에서 나오니, 여기에는 문맥을 인정하고 감시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문맥을 바꾸거나 숨기거나 비틀어서 왜곡되지 않을 사실이나 주제나 사람은 없소 . 따라서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건 모든 상황 속에서 문맥의 상관성을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의 첫 문맥은 가족이요. 치유되어야 하거나 나중으로 미뤄둬야 할 문제와 곤란들이 있을 수도 있소. 이런 경우들도 이따금 있소, 하지만 이해되고 처리되지 않은 문맥이라면 뒤에 남겨질수가 없소.
유감스럽게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문맥을 부정하는 데서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 무구한 시작에서 쌓아올리기로 선택하지 않는 거죠. 대신 '우선 여기서 벗어난 다음에 내 인생을 시작할 거야'고 선언하거나 아니면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다른 가족들과 절대 닮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그들 식의 삶에 반발하죠. 크나큰 반발심을 가지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다른 사람들이 겪였던 실수를 자기만은 되풀이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는 거죠.
하지만 삶이란 에너지와 체험과 사랑의 흐름에 다름 아니오. 남들의 위기와 단점에서 배우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특징이죠. 그런데도 자신에게 체험을 안겨주는 삶의 흐름을 거부하는 건 장차의 이해와 해결을 위한 문맥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오.
게다가 문맥을 부정하는 사람 대부분이 진공을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주는 환상이라면 얼마든지 용납하지만 진공의 존재는 그렇지가 않소, 그런 존재는 한 영과 그것의 온전한 통합을 훼손할 테니까요. 따라서 진공이 형성되자마자 그 진공은 그 진공을 만들어낸 바로 그것으로 가득 차버리고 맙니다. 진공을 만들기 위해 품었던 그 생각이 현실에서 드러나게 되는 거죠. 이 때문에 당신이 비판하는 어떤 것과 같아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가 그것에서 자신을 떼어낸 다음 공백을 만들어내는 거요.
세대에서 세대로 역사가 되풀이되는 건 삶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비판과 부정 때문이오. 우주는 그 단절을 당신이 반대하고 부정했던 바로 그것을 가지고 순식간에 메꿔버리고 마니까요. 원치 않는 요소들은 그 비극의 순환주기를 따라서 재검토를 요구하며 몇 번이고 다시 떠오르죠. 따라서 인류로서는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정화하는 가슴의 권능을 이해하고, 완벽하지 못한 상황들이 나름의 목적에 기여하면서 전개되어 가도록 뇌두는 편이 훨씬 이롭소.
삶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랑과 창조와 의식과 행동의 흐름이오. 그 흐름이 당신의 가슴과 삶을 통해 나아갈 때, 당신은 나름의 노력과 사랑을 그것에 보태고, 당신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체험들을 그것에서 얻습니다. 그런데도 그 흐름을 멈추려고 하면, 흐름은 가로막혔다가 넘쳐흐르는 시냇물마냥 훨씬 불어나서 되돌아오게 되죠.
좋은 일이 당신 삶을 거쳐가도록 하기는 아주 쉽소, 찬탄은 조화와 해결을 가져오거든요. 그보다 덜 유쾌한 상황이라면 더 적합한 다른 장소로 그 흐름이 순탄하게 옮겨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오, 삶이 진행되는 데 따라 이루어지는 나름의 문맥 변화가 삶을 다듬고 정화하기 마련이오. 어떤 문맥에서는 잘못된 듯이 보이는 행동이 다른 문맥에서는 대단히 이로운 것이 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지 않소?
성스런 가슴은 삶을 거쳐가면서 삶의 불꽃을 완벽하게 다듬어주는 매체이자 도관이요. 삶이 흐르는 건 막을 수가 없소, 삶은 살아가고 참여하고 체험하고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거요. 신의 자녀로서 당신은 계속되는 창조의 일부요 따라서 성장하고 번영하면서 앞으로 나가자면, 삶이 당신에게 가져다준 세대 유형들을 사랑과 공경으로 인정해야 하오. 이것은 신성한 질서의 일부요"
여섯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물리적 폭력이 휘두르는 위험이 우리 사회의 특정 분야들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상 여러 부분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계명을 떠올려본 적은 거의 없다. 추측컨데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이 계명을 별달리 숙고해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은 남의 목숨을 빼앗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쪽을 선택하리란 데 있다. 형제애가 지구 차원에서 높아지고 공공방어 제도가 강화되는 세상이다 보니 우리는 너무 일찍 속 편하게 이제 생명은 다른 무엇보다 존중되고 있으며, 살인이란 건 야만적인 세상에나 있는 일이라는 식의 성급한 결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 주제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살인 위험이 줄어들수록, 모세의 훈계가 환기시키는 지적 깊이를 의식하는 일도 그 만큼 줄어들고 있지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숙고가 시간 낭비인 경우는 없는 법이다. 예수는 이 계명이 단순히 살인행위에 대한 제한 이상의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눈부시도록 분명하게 이해시켜주었다.
"정의의 기본 권능은 문제나 불공정을 개선하고 균형 잡을 수 있는 보편적 풍요에 있소, 예를 들어 밀 한 줄기에서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만들어지고 벼룩 한 마리가 얼마나 많은 알을 낳는지 생각해보시오. 자연 속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팽창하는 생명현상들 속에서 자신을 풍요롭게 배가합니다. 그런 생명에 위해가 가해지면, 생명은 자신의 씨앗을 배가하고요.
정의의 두 번째 권능은 교환이오. 만물의 일차 본질은 같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요소와 환경들 사이에 균형과 조정을 가져다줄 교환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정의의 세 번째 권능은 모든 대립, 모든 불화를 넘어서 계속될 수 있는 생명의 적응력이오. 대립해봤자 소용 없소. 전멸시켜봤자 무의미한 낭비일 뿐이오. 생명은 모든 비판, 모든 저항, 그 저항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를 넘어서 계속되니까요.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생명에 파괴적인 태도로 접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되고 맙니다.
당신이 사랑으로 팽장을 지켜볼 때, 당신은 자신의 삶에 퐁요의 권능을 주는 셈이요. 반대로 삶을 다투고 부족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여기는 건 당신 자신의 고귀한 권능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요. 팽창은 삶의 방식이지만, 자신이 더 위대한 전체 존재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이 두려운 것으로 보일 수 있소. 그런 사람에게 타인의 팽창은 자신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되죠. 그래서 상대방을 공격하고요.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람을 실제로 죽인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목적이나 재능이나 꿈이나 아이디어나 사랑이라면 얼마든지 스스럼없이 죽일 수 있소, 상대방의 생명력을 방해할 작정으로 무효화하는 것. 이런 게 바로 살인이오! 그렇게 하는 동기가 기껏해야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거나, 아니면 유리한 위치에 서기위해서라고 해도 말이오.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 죽이려는 충동이 이는 건 두려움 때문이오. 그 보다는 팽창이 간련 당사자 모두의 이해관계에 얼마나 잘 기여할 수 있는지를 연구해보는 쪽이 훨씬 더 나은 접근인데 말이오. 두 기업이 같은 대중을 놓고 다투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이 경우에도 그 두 기업이 서로 협력한다면 더 다양한 시장 속으로 더 크게 뻗어갈 수가 있소, 또 경쟁자들이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기술이 집단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도 자주 있는 일이죠. 지식을 함게 하는 편이 어느 한쪽이 단독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경우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텐데 말이오. 가슴의 높은 수준에서는 삶의 목적 전체가 팽창이오. 우리가 팽창에 대한 이런 사랑을 받아들일 때, 당신의 영향력과 자격은 한없이 넓혀져갈 수 있소, 종교와 철학이 갈등의 토대가 된다면 그것들은 잘못된 목적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오. 사실 지금까지 치워진 대다수 전쟁들이 종교 문제나 철학 문제에서 기인했죠. 당신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부 분쟁을 막을 방어장치와 자유를 함께 성정했던 것도 이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오. 덕분에 당신들은 만인에게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환경 안에서 의사표현의 자유와 자신의 의도대로 살아갈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게 된 거요. 이런 권리 이상의 많은 권리들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 우리 아버지의 우주고요"
이처럼 신성한 질서에 순응하고, 삶의 여러 가능성드을 받아들이고 통합하고서야 우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그 계명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이 계명이 팽장하는 현상으로서 삶을 존중하는 법칙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파괴는 우리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기여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류의 성장 때문에 우리 삶이 밀려나거나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그 팽창을 뒤집기 위해 시도되는 절망적인 헛된 시도에 다름 아니다.
내가 예수에게 각 요소가 똑같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 삶의 모든 것에는 나름의 주기가 있소, 밀물과 썰물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나무가 새 잎과 새 가지를 한꺼번에 낼 수 없듯이요. 신성한 질서를 존중한다는 건 함께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기다려준다는 의미일 때도 많습니다. 이건 성장을 완성하지면 먼저 발휘되어야 하는 쪽의 힘이 발휘도도록 허용해주는 순응의 정신과 더불어 인내와 관용을 필요로 할 수 있소.
국가가 전쟁에 뛰어드는 건 갈등 없이 확장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인데. 어쨌든 생명을 파괴하는 건 공존의 정신에서 나온 해결책이 아니오. 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될 것이고, 갈등을 겪는 사람의 좌절도 그가 삶을 아버지의 의지가 펼쳐지는 것으로 이해할 때까지는 계속될 것이요.
모든 정의의 토대는 생명의 풍성함과 선이요.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삶에 정의를 가져갈 수 있소.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폭력과 적대가 아닌 다양한 해결책을 이용할 수 있소, 예를 들어 변방에 사는 두 형제가 의견이 다르다면,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서 그들의 차이점을 소화해낼 새로운 대지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요. 모두가 가능성을 넓힐 수 있도록 함께 일하시오. 그러면 인종 말살 따위는 과거지사가 되지 않겠소?
일곱 번재 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거요. 혼인제도는 가볍게 맺어졌다가 쉽게 부서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거룩한 결합이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의지요. 혼인의 거룩함은 자신의 권능을 속세 차원에서 끌어오는 게 아니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만나서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창조하는 건 아버지 및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과 결합했음을 상징하고, 불멸의 영혼이 자신의 소중한 가슴과 결합했음을 상징하며, 사랑 속에서 일하기 위해 함께 맻어진 창조의 제반 측면들이 성스럽게 결합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다른 모든 것들의 결합을 드높이고 확인시켜주니까요. 그것이 애정 깊고 순수한 결합이라면, 그것은 또한 지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친절과 온화함의 표현이기도 하죠. 자비는 모든 생명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요. 사람으로 충만한 성소에 친절이 가득할 때, 그것은 나머지 존재들 전체로 퍼져나갈 희망과 토대를 갖게 됩니다.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 그 관계가 어떤 것이든, 그 결합이 어떤 것이든 둘 이상이 사랑으로 함께 모일때, 한 영 속에는 합일이 창출됩니다. 사랑의 관리를 받으면서 금강입자들 간에 아주 긴밀한 상호교환이 일어나는 거요.
혼인처럼 깊고 의미심장한 결합은 순수해야 하고 부적절하거나 저질이거나 부정직한 요소들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결혼 후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건 그 기본 원인을 사랑의 불순함에서 찾을 수 있소, 헌신의 정도가 약하고 그 동기 또한 그다지 영예롭지 못한 혼인은 관계를 지속시킬 만큼의 강인함과 진지함을 갖지 못합니다. 또 그 결합이 순수하지 않을 때에도 실패로 끝나는 관계가 되기 쉽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그 관계에 이미 불손함이 섞여 있기 때문이오. 그 정도에 관계 없이 외적인 동기나 진실되지 못한 이유나 십중팔구 부적절한 방식으로 결합이 이루어졌던 거죠. 만일 돈이나 편의나 사회적 지위만을 위해서 이루어진 혼인이라면 그 관계 속에 이미 불순함이 내장되어 있는 셈이오. 그렇다면 그런 불순함이 나중에 부정함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이겠소?"
"지금 사회에서는 불안정한 부부관계와 이혼이 흔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결혼관계를 끝내는 편이 더 나은 상황과 조건이란 게 있나요?"
"합일의 진짜 중심은 존중과 진지함과 깊은 헌신을 가지고 자신들의 결합을 서로에게 영예로운 것으로 만들려는 두 사람의 사랑이오. 만일 이 사랑이 다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존재하지 않거나,사랑의 불순함이 그 부부의 해결능력보다 더 클 때는 사랑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말고 혼인관계를 끝내는 편이 나을 거요.
그렇다 하더라도 혼인관계를 가볍게 해체하거나 일시적인 스트레스와 압력에서 비롯된 이유를 때문에 해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혼인이란 신이 설정한 결합이니까요. 모든 혼인은 아버지의 것이어서. 그의 의지에 따라 권능 있게 되기도 하고 해지되기도 하죠. 이건 어떤 인간의 삶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설사 그것이 부부관계라는 결합을 통해서라고 하더라도요.
혼인관계가 잘 유지된다 해도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더 큰 서약이 맺어짐으로써 서로 헤어져서 기여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고요. 따라서 구조에게는 단순히 기존의 이해관계나 결속의 외적 징표들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기여 정도를 넘어서 사랑을 가두거나 할 권위가 주어져 있지 않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됨은 어떤 것이든 간에 둘이 함께 모여 이룬 다른 모든 결합의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상징이요.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그것이 다른 관계들에도 심오한 의미를 가져다줄때 가장 잘 실현됩니다. 모든 관계의 상징이 혼인의 원리들이오. 당신이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어떤 직업이나 소명에 헌신하는 것. 이런 게 혼인 아니겠소? 또 당신이 자신의 동포나 형제나 가족이나 한 영과 맺고 있는 관계 또한 혼인이 아니겠소?"
"그럼 가장 위대한 혼인은 어떤 건가요?"
"신과 인간의 하나됨이오. 이것이 바로 다른 모든 혼인들 뒤에 깔려 있는 권능이오. 신부가 자신의 신랑에게 하듯이 인류가 신의 의지에 공명할 때, 땅에도 하늘나라가 있게 될 것이오"
이 강력한 진술이 있고 나서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예수가 이어서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근 한 시간 동안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이야기를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강력한 통찰이 내 의식을 흝고 지나간 것은 내가 메모해둔 공책을 펼쳐서 다시 읽어보았을 때였다.
앞의 일곱 계명들이 자례로 반영한 건 바로 가슴 안에 존재하는 일곱 차원의 지성들이 아닌가! 이 계명들 뒤에 놓인 근거들은 각각 합일과 사랑, 삶.공경, 정직, 정의, 친절로 볼 수 있고, 각 계명들 안에는 고귀한 지성이 지닌 동일한 추진력들이 들어 있었다. 내게 이런 깨달음이 밀려들어왔을때 우리의 눈은 다시 마주쳤고, 예수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내가 얻은 새로운 이해에 내리는 축복처럼 울려퍼졌다.
"지금 당신은 이 계명들 뒤에 놓인 더 큰 진리를 보았소, 그렇소 그 계명들은 가슴의 지휘도구요!"
"그럼 남은 세 계명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신성한 질서에 '사족'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이 문제가 자못 궁금했다.
예수는 기꺼이 호의를 베풀었다.
"뒤의 세 계명은 가슴의 서약에 속합니다. 자력을 매개로 하는 가슴의 첫번째 서약은 당신 자신인 사랑의 확장으로서 당신의 삶을 펼치겠다는 거요. 따라서 당신이 하게 되고 갖게 될 모든 것이 가슴이 내적 생명력과 외적 생명력 사이에서 이룬 균형의 직접적인 결과요. 가슴의 두번째 서약은 삶을 무구하게 인식하겠다는 것이고요. 이것은 창조의 증인으로 현존할 수 있고, 모든 것들 속에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당신의 권리요. 가슴의 세 번째 서약은 당신과 당신의 성스런 근원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목적을 견지하고 그것을 권능 있게 하겠다는 것이요"
여덟 번재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지어다'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도둑질은 경제적 협박이자 사회적 위험요소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만연된 도덕적 해이의 표식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좀더 동정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경제적 유동성이 빠른 속도로 상실되어가는 세상에서 부를 재순환시키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 해도 사실 도둑질에 대한 대부분의 관찰과 결론들이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사람들은 도둑질을 금지하고 그것을 처벌하는 법률에 너무 신경을 쏟다 보니, 소유권을 존중해야 하는 근거 자체에 대해서는 무시해왔다 어린 시절에 받은 학습의 영향으로 나는 사람들 각자가 훔칠지 말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믿고 있었다. 일단 선택이 내려지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선택에 근거해서 처신한다고 계명의 의미에 대한 이런 식의 협소한 관점은 이해라는 면에서 지성이 숙고해보거나 영혼이 음미해볼 여지를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좀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줄 수 있는 다른 시각에서 그 주제를 접근하기로 마음먹고, "정당한 소유란 건 뭔지'를 묻는 것에서 시작했다.
"정당한 소유관계는 그 사람의 사랑과 그 사람의 진정한 소유들간의 관계에서만 존재합니다 소유를 존중하는 건 권리를 존중하고 개인을 존중하는 문제요. 이 계명은 개인에 대한 존중과 각 개인이 자기 나름의 지정된 장소와 시간을 가질 권리와 정당한 그의 소유물들을 공급받을 권리를 중심으로 삼고 있소.
그 소유물이 무형이나 유형이냐에 관계없이 그것을 끌어오는 건 가슴의 권능을 매개로 한 사랑이오. 기실 만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것이오. 다만 생존과 책임과 기쁨을 위해 그 자녀들에게 관리권이 주어질 뿐이지요. 뭔가를 소유하게 되는 방식은 벌어서 얻는 것에서 선물 받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뭔가를 손에 넣고 지니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당신 가슴 속의 사랑이요. 소유에 대한 존중은 사로와 서로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상징에 지나지 않소."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내 머리 속에는 여러 해 전에 내가 고용한 한 젊은 여성과 겪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그녀가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있게 되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내 파일 캐비넷에서 노트 몇 권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챘다. 내 색상이론에 대한 연구들을 모아놓은 그 노트들은 나한데는 달리 대용물을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무가치하달 수 있었다. 나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그녀를 추궁할 만큼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계속 여기저기를 찾아보면서 뭔가 더 확실한 실마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틀 후 나는 그 노트들이 파일 캐비넷 속의 본래 위치로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빠지거나 잃어버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연유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던 데다가, 부하직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하지고 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해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순전히 호기심에서 그 노트들을 자신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인정했지만, 재빨리 이렇게 덧붙였다.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아냐. 넌 훔쳤어 넌 나의 프라이버시와 이 정보에 대한 내 소유권을 훔친 거야" 이것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발상이었고, 서로가 배워야 할 교훈이었다. 그녀는 사죄했고, 나는 용서했다. 그후로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더 많이 존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함께 나눔 또한 더커졌다.
이런 생각에 예수가 논평했다.
"함께 나눔은 삶을 완성하고 삶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질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결과요. 존중심이 모자란 경우에는 물질 소유가 사람들의 삶을 분리하는 장벽이되고 말지만요. 한 사람은 너무 많이 갖고 있고 한 사람은 너무 적게 갖고 있는데. 어느 쪽도 그런 편중을 깨기에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거나. 어째서 그게 그런 식이어야 하는지 알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는 거죠"
"정말로 가난해서 줄을 만큼 배가 고픈 사람이라면요? 그런데도 아무도 자비를 베풀거나 일거리를 주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음식을 조금 훔치는 것도 잘못인가요?"
예수는 눈에 한없는 자비심을 담고 대답했다.
"그렇소. 그건 잘못된 행동이오. 비록 그건 아버지의 더 넓은 관점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쌍방 범죄이긴 하지만, 그 범죄 자체에 대해서는 징계가 내려져, 자포자기 상태인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행동이 그의 성격 중에 지울 수없는 부분으로 되고 말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그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궁핍의 상황 또한 처리해야 합니다. 그가 그런 부족상태를 겪는 데 어떤 탐욕과 매점매석이 일조했는지도 해명되어야 하고요 탐욕은 도둑질의 또 다른 행태에 지나지 않소.
부족과 과잉 모두가 참된 소유의식을 잃은 데서 나오는 결과요. 가슴의 내적 확신에서 나오는 정당한 자기 소유에 대한 앎은 돈으로 살수 없는 앎이오. 그런 확신이 없는 소유는 한계를 설정하고 서약을 제한 하는 것으로만 증대하죠"
예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소유란 행위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대한 내 깨달음도 커져갔다. 반드시 참된 소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또 우리가 공동체와 활동과 직업과 학교 따위와 함께 나누는 집단 소유란 것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함게 사랑하고 함께 나눈다. 자주 포트 위쓰 보타니컬 공원에서 강의 준비를 하는 나는 이 공원을 '나의 또 다른 사무실'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물론 내가 이 공원의 소유자인 건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한 영 안의 특별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가 소유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개인적으로 구입하고 지닐 수 있는 것 이상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시라는 공간이 그들의 영혼에 의해 공유되는 곳이다. 또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산을 아끼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록키산맥을 노래 부르는 존 덴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산맥을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모든 존재 속에는 눈으로도 관찰할 수 있는, 창조의 밀물과 썰물이 있소, 만물이 다 신에게서 나와서 결국 이 근원으로 되돌아가죠. 그럼에도, 존재하는 그 동안에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오. 이것은 창조를 지탱하는 존재의 우월성을 말하는 거요. 당신이 소유의 법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깊은 이해는 모두에게 그 자신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거요. 신에게는 신의 것을 주고, 땅에게는 땅의 것을 주시오. 그리고 당신의 형제에게는 그의 것을 주고, 당신 자신에게는 당신의 것을 주시오. 이것은 숭고한 진리이자 철저히 실제적인 공식이요.
세상에서 가장 흔한 도둑질이 바로 비생산적인 대상을 지원하기 위해 당신 삶의 일부를 훔치는 것이요 예를 들어 집세를 다른 용도로 쓰고 나면, 가계 예산이 구멍이 나는 형국처럼요. 우주에는 에너지의 흐름을 끌어당기는 것과 그것을 받는 것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일종의 '기금 계정'이란 게 있소. 그래서 각각의 할당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면 에너지의 확장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무시될 때는 지원을 잃고 말죠.
지휘하고 끌어당기는 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존중될 때 부에는 한계가 없소 참된 소유는 사랑이요. 당신이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면 도둑들도 더 이상 당신의 것을 가로채거나 훔칠수 없을 거요"
모세의 아홉번째 계명은 '너희는 거깃으로 증언하지 말라'이다.
이 계명의 의미가 특히나 자신의 동료 인간이나 자신이 목격하거나 본 것에 대해 거짓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임은 명확하다. 하지만 예수는 좀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잘못 보거나 누구에게도 잘못 전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깊이 있게 현실을 사랑하시오. 현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정직의 핵심이고 무구한 인식의 본질이오. 속임수를 쓰는 건 일종의 배신행위요. 왜냐하면 그건 당신을 당신 자신과 신에게서 떼어놓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정직의 완전한 의미는 현실에 대한 사랑, 당신 눈앞의 현실에 온전히 현존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붉은색 안경을 끼고 삶을 살아가지요"
우리는 자주 불라인드를 치고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부정한다. 예수가 말하는 무구한 인식이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능력이다. 무구한 인식은 발견하고 깨닫고 자비롭게 살고자 하는 가슴의 열망이다. 예수는 "정직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오. 그건 지혜와 지성의 토대요"라고 목박았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면 상처 입는다고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진실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건 왜 그런가요?"
"그건 그들이 솔직함과 정직함을 심히 혼동하기 때문이오. 워낙 솔직해서 미주알고주알 온갖 일을 다 이야기하면서도 달이 떠오르는 건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런 삶들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불분명할 때도 자기 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솔직함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고, 실제로 자주 상처를 입히지요. 반면에 정직은 언제나 현실로 돌아가 조회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위안과 지원과 결단의 요소가 들어 있소.
진실은 보편상수요.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현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 있소. 진실을 밝히는 건 대단히 온화하고 친절한 일일 수 있소, 다른 사람의 이해방식을 관용하고 동정하는 마음과 함께 말이오.
나는 자주 우화를 써서 진실을 이야기하곤 하죠. 우화와 비유가 좋은 점은 듣는 사람마다 제각각인 가슴과 마음과 기대 수준에 맞출 수 있다는 거요. 이런 식으로 하면 하나의 진리라도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각자가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자각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소, 진리는 말하고 듣는 그 내용이 있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지 않소"
모세의 마직막 계명은 "너희는 탐하지 말라"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탐욕은 심각한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동료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외부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하리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온갖 상품들을 슈퍼스타들이 나와서 광고하는 배경에는 그 물품을 소비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세뇌적인 암시가 깔려 있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말했다.
"당신의 완성을 외부에서 구하지 마시오.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에게 사랑과 능력의 재능을 주었소, 이건 외적인 우월성을 닦거나 자신의 이득과 곤란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오. 이 계명 뒤에 놓인 사랑이란 자신의 목적과 하나됨을 사랑하는 것이어서, 내적 실현을 사랑하고 자기 나름의 존재 이유를 거둘 수 있게 해주죠.
당신이 진실로 당신 자신으로 있을 때, 당신은 자신이 신의 자녀임을 압니다. 그렇게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소. 당신은 신의 창조를 촉진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니, 당신이 하는 일 중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소 따라서 당신에게는 목적이 있고, 살아가는 과정이 그 목적을 펼쳐갈 것이오. 하지만 탐하는 것은 자신의 성스런 목적을 순전히 외적인 동기로 대신하는 것이오. 외적인 동기는 자기 나름의 목적을 인식하거나 존중할 그 사람의 능력을 결국 파괴하고 맙니다. 다른 사람이 이룬 것을 질투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승리를 자괴감으로 대하게 만들고요 질투에 내몰린 삶을 사는 건 거짓된 목적에 따라 삶을 사는 거요. 하지만 실현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일으키는 참된 과정을 존중하면 참된 목적의식을 다시 되살릴 수 있소
실현의 참된 과정은 벽돌을 하나하나씩 쌓아가는 것과 같소. 먼저 별돌 하나가 회반죽 위에 놓이면, 다시 다른 벽돌이 그 옆에 놓입니다. 이렇게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에는 하나하나의 벽돌이 똑바로 놓이고 다른 벽돌과 잘 붙도록 만드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되죠. 숙련된 벽돌공은 벽돌선 하나하나가 그 집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걸 잘 앎니다 마침내 벽돌공은 뒤로 물러서서 벽이 제대로 완성되었는지를 보고 나아가 건물 전체를 조망하죠. 그 동안에 필요한 것은 세우는 과정에 대한 믿음과 헌신이오. 그런 내적 확신 없이는 본래의 큰 그림을 놓치고 말 테지요. 또 헌신하는 그 작업에서 얻는 기쁨보다 개개 작업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마음이 더 커질 태고요.
살아가는 과정에 사랑을 순응시키는 건 강력한 효과를 갖습니다. 외적인 성과만을 바라보면서 그 과정을 존중하길 이지을 때, 당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처럼 되고 맙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보고 싶었던 이카루스는 왁스로 주조한 거대한 날개 한 쌍을 만들어냈지요. 그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날개를 자신의 팔에 묶었습니다. 지금의 행글라이더처럼 그는 절벽에서 바람의 기류를 타고 날아가기 시작했고. 점점 더 태양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급했던 관계로 태양 가까이 가면 그 열기로 그의 날개가 녹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지요. 그는 순식간에 바다로 떨어졌고, 파도에 밀려 해변으로 떠내려갔습니다.
이카루스가 잊고 있었던 건, 그것이 태양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목적지든 간에 우리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번에 한걸음씩 그 목표에 적합한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는 점이요. 이카루스는 업적을 달성해서 다른 사람들이 놀라자빠지도록 만들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이루는 과정을 경시했지요.
사람들이 이룸의 과정 자체를 사랑하면, 자신의 업적을 남들의 것과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계획에 따라 활동합니다. 한 사회 안에 노인이 있는가 하면 젊은이도 있듯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마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오. 또 누구나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그것을 완성하는 과정을 밟게 되고 , 그 다음에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지요.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보다 앞서서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삶의 주기가 그런 것에 지나지 않소.
자신이 이룬 대작의 마지막 벽돌을 놓는 이웃 사람이 뿌듯한 자부심을 경험하고 남들의 찬탄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요. 그런데 같은 이웃 중에 장차 세워질 건물의 첫 벽돌을 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감도 없고 막연해서 자신의 초라한 시작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감출 테죠.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하등 다르지가 않소 왜냐하면 어느 쪽이나 목적의식적인 삶의 계속되는 과정 속에서 그냥 하나의 벽돌을 놓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탐하는 행위는 당사지로 하여금 자신의 동기를 외부에서 구하게 함으로써 이런 깊은 이해에 이르지 못하게 하죠. 이 마지막 계명이 진실로 토대로 삼는 건 이룸의 과정을 사랑하고 자신의 목적을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이니까요.
[출처] 끝없는 사랑 378쪽 예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소유란 행위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는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제 10장 사랑의 십계명
사랑
2021. 10. 5. 11:38
이천 년 전 바리새인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율법 중 어느 계명이 가장 크나고 물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가 지금까지도 지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을 시작했던 건 기존 계명들에 대한 이 같은 명확화와 단순화를 가지고서 였다. 바로 이 선언 속에서 예수는 덕성과 행동, 삶의 시행과 교정이 율법의 목적임을 밝혔다. 그와 함께 예수는 율법이 지배 일정을 설정하고 유지하는 권위화된 힘이라는 관념을 던져버렸다. 우리가 사회와 우주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수는 여러번 내게 상기시겼다.
"유일한 권능은 오직 사랑뿐이오. 따라서 사랑에 뿌리를 둔 법칙만이 유효할 수 있소, 그런데 삶의 법칙과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진리의 탁월성이오. 진리는 모든 삶에서 항상적인 요소요. 당신이 완성을 향한 나름의 길을 발견하고 환상을 초월하도록 해주는 건 오직 진리뿐이오. 그리고 사랑과 진리의 확실성은 둘 다 성스런 가슴속에서 찾을 수 있소.
그건 가슴이 삶의 온갖 감정과 느낌과 자각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완벽하고 순수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당신의 모든 삶 체험은 이 과정을 통해서 강화되거나 당신의 서약 및 삶의 목적에 따라 재편성되어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성스런 가슴은 당신의 영혼 한가운데에 있소, 그것은 마음이 보듯이 당신 존재의 오른편에 있거나 왼편에 있는 것이 아니오. 왜냐하면 마음은 비교하고 검토하기 위해 모든 걸 두 부분으로 나누니까요. 아니, 당신의 가슴은 합일을 구하고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고 정직과 공경과 정의와 친절로 삶을 확장하는 삶의 중심, 달아오르고 타오르고 열정적이고 균형 잡힌 당신 삶의 중심이오. 이런 잠재력이 있기에 권능 있는 불굴의 선이 있게 되는 거고요.
성스런 가슴은 진실로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자 영감에 찬 삶의 원천이오. 인류가 완전한 자기 실현으로 나아갈 때 지상에는 이 가슴의 지성이 대세를 이룰 것이요. 분리되거나 약화된 자아로는 누구도 행복을 찾을 수 없는 법이오.
가슴에 비교하면 마음의 지성은 고작해야 비교와 통제를 위한 경계선과 기준을 설정하는 데 골몰할 뿐이죠. 마음에 관한 한, 도덕의 추구는 삶을 개선하는 방식도 삶을 통제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친절하고 북돋우는 형제애를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도덕이란 기준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워낙 경직되고 엄격한 규율이 지정되다보니 사람들을 향상시키기 보다는 좌절시키는 경우가 더 많죠, 이것은 마음이 삶 자체가 아니라 판단 근거를 세우기 위해 가슴의 권능에 개입하고 그것을 도용하기 때문이오.
비록 마음을 다스리는 윤리 분야들이 있긴 하지만 도덕과 윤리에 대한 참된 이해는 마음의 지배 영역을 훨씬 뛰어넘죠. 우리가 마음과 관계하는 면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해봤자 정확한 우선순위의 원리 정도요. 마음은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가 마음이 무구한 인식에 도움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 무구한 인식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것이고요. 자기 나름의 계획을 지원하거나 확정하기 위해 현실을 발명하거나 재창조하는 건 마음의 권리나 특권이 아니오.
윤리를 위한 모든 기준은 결국 '실행력workavility'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소. 마음이 우주법칙과 통합되는 건 이 기능을 통해서요. 또한 이것은 순응을 강하게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오. 순응이란 삶과 노력을 실행력에 적용하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실용공학의 원리에 따르는 다리 건축가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지탱하면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오.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효용성들이 있소, 그것들을 부지런히 찾아내고 성실하게 적용하는 게 마음의 의무요.
많은 사람들이 순응이라고 하면 억압적인 느낌을 받는 건 그것이 옳은 권위든 잘못된 권위든 권위에 대한 굴종으로 해석되기 때문이오. 이건 비극이오. 왜냐하면 신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완성과 권능을 가져다주니까요. 반면에 거짓된 순응은 언제나 힘과 벌로 유지되고, 그것에 굴종하는 사람의 자부심을 저하시키기 십상이죠"
'우리가 그런 거짓된 원위에 대항해서 그것을 개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물었다.
예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당신 자신이 실행력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보여주시오. 그런 다음 권위에게도 똑같이 하길 요구하시오"
윤리와 도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수는 그 용어를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하고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하는 것 같았기에, 내가 물어보았다. "윤리와 도덕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윤리는 고귀한 지성의 원리들을 집단의 실존 문제들에 계속해서 적용하는 과정으로, 모두의 안녕에 도움되는 가치들을 삶에 부여하죠. 윤리란 우리가 남들의 삶을 건드리면서 보여주는 배려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이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가장 큰 가치를 놓는가에 대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윤리는 균형 잡힌 인과로 요약될 수 있고, 최고선에 적용될 수 있소,
반면에 도덕이란 본질적으로 더 낫게 바꾸고자 할 때 나타나는 헌신이요. 도덕에는 살면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대한 책임감과 그것들을 솔직하게 마주하여 직접 개선해보겠노라는 자발성이 포함되죠.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감정과 생각과 영을 깨끗이 하는 것도 도덕의 일부요. 사실 깨끗함은 신성의 이웃이요. 하지만 도덕이란 결국 개인적 성취여서, 그것이 외부에서 강요될 때는 한 개인의 '참나'를 약화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소"
"당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삶을 더 낫게 만들려는 의식과 책임감의 중요성을 확인해주는군요. 그렇다면 이것이 모세의 계명이나 기본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고치기 위해 선포되었던 행위 규율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우선 모세가 지상에서 밟아나간 역사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인간의 가슴은 여전히 비슷하지만, 그 당시 인간이 처해 있던 외부현실은 지금과 아주 달랐소. 이것은 그 댱시 이슬람 민족의 특별한 운명과 관련해서 특히나 그러하오. 신의 안내와 모세의 노력으로 이슬라엘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이집트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났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또 하나의 강요된 속박에 지나지 않았소.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무슨 수로 해방될 수 있겠소? 강한 책임감과 높은 지혜가 있었던 모세는, 사람은 있을 곳과 거기에 있으려는 목표가 있기까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모세가 40년 동안 이슬라엘 민족을 데리고 사막을 떠돈 이유가 이것이오 적어도 두 세대는 경과하여 노예 신분의 경험이 없는 전혀 새로운 장로계층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거요.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소. 만일 그들이 노예 신분에서 곧바로 예전의 고국으로 돌아갔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말았을 거요. 몇백 년 간에 걸친 노예생활은 개개인에게서 책임감과 자결성 윤리의식을 완전히 치워버렸소, 노예는 교육도 못 받고, 결정과 결단과 식별을 내릴 권리도 갖지 못하죠. 노예는 명령을 받드는 것말고는 달리 무엇도 할 수 없소. 그들 선조들이 아무리 지혜롭고 위대했다 해도 마찬가지요. 선조들의 연속성이 사실상 끊어지고 말았으니까요. 자신의 손에 이런 엄청난 문화적 문제를 쥐게 된 모세는 자기 민족의 통합성을 회복하는데 포괄적인 책임감을 느꼈소, 그리하여 모세는 지속 가능한 현실의 토대를 창출하기 위한 여분의 조치를 취했소."
예수가 모세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느끼고 있는 건 분명했다 또 예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오늘날 서양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세에게 얼마나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예수는 이 위대한 지도자가 내릴 수밖에 없었던 몇몇 중요한 결정들에 조명을 비추면서 모세가 어떻게 히브리 민족에게 새로운 윤리의식과 자부심, 자결의식, 그리고 개인절 집단적 권리들에 대한 이해를 심었는지 설명했다. 사실 먼저 이런 것들을 이루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하나의 문명이 다시 세워질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모세의 계명에는 보편 진리와 원칙들만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는 규율과 책임을 확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개개의 계명들은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 계명들은 신에게서 신성한 영감을 받아나온 것들인 데다. 모세는 신의 가슴과 깊이 교감하여 얻은, 사랑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로서는 영혼이 성스런 가슴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할때 예수가 사용했던 비유 중 하나가 길 옆에서 불타는 관목이었던 것이 흥미로웠다. 예수가 이것을 말하는 순간, 나는 모세를 떠올리면서 십계명을 전해받은 그 산에서 모세는 신이 자신에게 말하기 전에 가슴의 관문을 통과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십계명은 태고적의 도덕 계명들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것이 추구하던 사회적 목적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고대사회와 이후 시대를 통해 이 법률들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권능이 자배하는 지속 가능한 현실 공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지향들이 모이고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을 그 힘의 근원에서 존중할 때 우리는 도덕이라는 제한 공리를 넘어설 통찰력과 자유를 얻는다. 예수는 말했다.
"신에게 봉사하는 법들은 계시적이고, 언제나 위쪽 방향으로의 지향성을 갖습니다. 법이란 삶을 지원하는 것이고, 필요하다면 삶을 교정하는 것이요. 법을 오직 판단을 위한 강령으로만 사용하는 사회는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법이 뿌리박고 있는 사랑을 매개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정당성도 없기 때문이요. 사랑의 권능이 유용한 행위법규를 대신하거나 짓밟는 일은 없소. 오히려 사랑은 법을 위한 근거를 드러냄으로서 강요 대신 참된 깨달음이 들게 히주죠"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십계명 각각에 들어 있는 사랑의 뿌리를 설명해주시겠어요?"
예수는 주저 없이 설명에 들어갔다.
"모세의 첫 번째 계명은 '너희는 나 앞에 다른 신을 놓지마라'요 이건 우리의 한 근원을 드높이고 모두의 합일을 일궈내는 계명이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고, 이 한 근원의 인식 가능한 현존이 사랑이오. 신의 사랑은 첫 번째 동인이어서 다른 무엇도 그것에 앞설 수 없소, 모든 것이 사랑에서 창조되었소, 신의 자녀로서, 혹은 신의 한 측면으로서 당신은 아버지를 빼고는 우선 원인을 가질 수 없소. 따라서 당신의 이름은 '사랑'이니, 사랑은 당신이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의 우선 원인이요.
또한 아버지를 사랑과 첫째 원인으로 존중하는 것은 당신 안의 사랑을 키워 행위의 참된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요. 사랑이 낳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당신은 자기 권능에서 벗어나 있는 거요. 잊지마시오. 사랑은 금강입자들을 지휘하고, 한 영은 사랑에 공명한다는 사실을. 사랑이 있는 곳에는 잠재력이 있고, 희망이 있고 신이 있소. 모든 창조에서 일차적인 실재이자 고려 대상이 이것이오 그 중요성과 권능과 진리란 면에서 다른 어떤 것도, 그것 보다 앞서지 않소. 우리의 한 근원이 모든 합일의 토대요.
모든 선은 합일을 그 도구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분리는 악의 도구요. 당신의 모든 체험 속에서 이 진리를 살피는 것이 현명할 거요. 평생 동안 성장과 변화의 여러 단계들을 거치다 보면 옛 유형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합일의 개념을 세워야 하는 혼란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오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지고 이전 요소들은 빠지게 되죠. 그럴 때 합일은 신의 것이지,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는 게 좋을 거요.
합일은 역동적이어서, 끊임없이 더 큰 잠재력을 형성하죠. 이렇게 되면 많은 구조들이 무너지고 해체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조화로운 삶 속에 끼어든 분리가 가져오는 파괴와는 다르오. 분리는 성장에 저항하고, 합일의 권능을 지연시키는 판단과 갈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구별되죠.
분리의 주도자들은 변화를 위협적인 것으로 보기에, 그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적의와 곡해를 변화 요소들 속에 주입하죠 분리는 전쟁과 호전적인 범죄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소, 물론 분리가 미치는 영향들 대부분은 이보다 훨씬 더 미묘하지만요.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건, 세상이 침체하는 것이 복잡성 때문도, 심지어는 혼란 때문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그런 상황들도 잠재력의 역동성을 억누를 수 있지만 세상의 구태의연함은 그보다는 수동적 균형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분리의 여러 측면들 때문이요. 다시 말해 합일을 위조하는 거죠"
모세의 두 번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이다. 이 계명은 나를 약간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화가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인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에게 물었다. "이건 예술적 모사도 잘못되었다는 뜻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소. 예술적 모사는 실재의 본질을 표현하는 찬미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오. 예술은 실재를 키우려는 시도이지, 그것을 대신하려는 시도가 아니오"
"그렇다면 이 계명이 어떻게 해서 사랑에 속하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신은 사랑이오. 이말은 그 모든 형상 속의 사랑을 우주의 참된 권능으로 존중한다는 뜻이오. 이 권능을 잘못 전하거나 왜곡하거나 부정하거나, 아니면 사랑의 현존을 위조하는 구조로 그것을 대신하여 약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말했던 건 어떤 형상의 꾸며낸 개념이나 내용이나 구조를 가지고도 신을 위조하지 말라는 거요.
어떤 수준의 구조도 신을 대변할 수는 없소.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자기 내면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잘못 알게 될 거요. 질서나 생활의 지침 역할을 위해서는 구조가 필요하지만, 구조는 절대 신성의 측면이 아니요. 구조는 그냥 하인이고, 존재를 이루는 벽돌이 지나지 않소.
과도적이거나 임시적인 어떤 방식으로도 신의 현존을 상징하거나 개념화하지 마시오. 거룩한 아버지의 현존을 어떤 형상으로도 위조하지 마시오. 어떤 환상도 신의 권능으로 돌리지 말고, 신의 어떤 것이 환상처럼 유약하리라고 여기지는 마시오. 이런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언제나 사랑의 권능을 존중하고 아는 동시에 환상의 덧없음을 인식하라.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위조'와 '환상'을 비슷한의미로 사용하시는 것 같은데. 이 두 용어를 사용하실때 어떤 구별을 두시는 건가요?"
"그렇소. 환상과 위조된 현실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소. 당신이 상황에 맞춰 다른 옷을 입을 때. 당신은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환상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오. 또 어떤 계획이 눈에 보이는 현실로 드러나기 전에 그 계획을 세세하게 개념화할 때, 당신은 일종의 예비적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오. 당신이 자신 속에 있는 다른 차원의 느낌을 발견하기 위해 좋은 책 속으로 달아날 때, 당신은 신뢰할 만한 환상들을 가지고 그 여행을 편성하고 있는 것이오.
반면에 당신이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그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그 사람처럼 옷을 입을 때 당신은 위조된 창조를 하고 있는 셈이오. 당신이 진실로 삶을 사는 대신에 환상에 따라 살 때, 당신은 실존을 위조하고 있는 셈이오. 환상 차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소. 다만 문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요.
환상을 실재와 혼동하고, 그것에 권위를 부여할 때, 위조된 실존이 있게 됩니다. 세상은 위조된 가능성들로 가득하죠. 만일 당신의 삶과 열정을 그것들에 주게 되면, 당신은 결국 완전히 기진맥진하고 말 것이오. 하지만 이런 일들이 굳이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니오. 당신이 사랑을 위조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내거나 그것을 환상으로 여기기만 해도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사랑은 모든 현실의 토대요. 당신이 모든 면에서 이 진리를 존중하고, 공허한 개념과 의식으로 신과의 관계를 위조하지 않는다면,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요. 누구라도 현실을 확신하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는 창조적 표현을 위해 환상과 안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소"
이 계명의 본질은 사랑을 왜곡하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사랑의 권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 이것을 깨닫자 성 바울이 남긴 불멸의 미문이 떠올랐다.
"비록 내가 인간의 혀와 천사의 혀로 말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나는 웅웅거리는 놋쇠나 딸랑거리는 심벌이 되고 만 것이고, 비록 내가 예언의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신비와 그 모든 앎을 이해한다 해도 또 내게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이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내가 내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내 몸이 불살리게 내놓는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내게 유익하지 않다"
"세 번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요.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이요. 사랑이 존재에 작용하면 생명이 태어나죠.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소. 왜냐하면 생명이란 움직이는 사랑이니까요.
사랑을 가치절하하거나 헛되이 사용하지 마시오. 당신이 사랑의 권능이나 효용성을 부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오용한다면, 혹은 잘못된 대변이나 불신, 부정적으로 그것의 영예를 더럽힌다면, 당신의 삶은 크게 고통받을 거요. 신의 권능은 사랑을 통해 작용합니다. ..... 이것을 잊지 마시오! 만일 당신이 삶을 조작하기 위해 사랑을 가장하거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위해 신의 허가를 구한다면, 삶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은 줄어들 거요. 이것은 생명 및 삶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계명이오.
모세의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오. 안식일은 활동, 즉 창조의 엿새 뒤에 오는 은혜의 날이오. 이것은 구조를 만드는 노고에서 벗어나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의 내적 정당성은 당신의 사랑이 나온 신성을 찬양할 때 좀더 충분히 안식될 수 있소. 가슴속에 들어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성스런 유대를 체험하는 것으로 이 날을 거룩히 지키시오. 온전함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사랑하고 기뻐하시오. 동시에 이 성스런 시간 동안 한 영을 사랑하고 그것의 온전함을 찬양하시오.
안식일의 기초와 고귀한 지성은 '공경'이오. 이것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든 생명과 창조유형들, 우주에 대한 공경으로 넓혀집니다. 우주에는 신성한 질서의 멜로디를 포괄하는 리듬이 있소. 이 리듬은 여섯 박자마다 한 박자 쉬고, 여섯 점마다 한 중심을 가지며, 여섯 단계마다 한 외피를 이루고, 여섯 사람마다 한 지도자를 내며, 여섯 요소마다 한 목적을 이루고, 여섯 번의 행동마다 한 번의 휴식으로 연주되죠. 이 리듬을 지키는 것도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는 것의 일부요. 우주에서 인간의 탄생이 창조의 여섯 번째 주요한 사건으로 표현되는 건 우연이 아니오. 인간의 참된 본질을 이루는 사랑과 믿음과 의식은 우주 최정점의 영광을 대변하죠. 당신들은 삶의 한가운데 놓여 있으면서 삶을 지휘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오.
이 주기적인 안식일을 확실히 함으로써만 당신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맛보고,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의미 없는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소. 이 주기적인 인식 속에서 온전함의 권능은 기적을 발휘하고, 신성은 더 위대한 축복을 가져옵니다. 이 간격을 받드는 것으로 당신은 당신이 그리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권능과 더 높은 의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셈이요. 말하자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당신은 순응의 참된 의미가 신의 섭리와 고귀한 지성의 원리들과 무위의 권능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라는 걸 배웁니다.
휴식할 수 있는 이 쉼표가 없다면, 삶은 휴식이나 평화나 충전을 취할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한 채 6일 주기로 계속 이어지는 일직선적인 진행이자 의무적 활동일 뿐이고, 끝없는 고역이 되고 말 거요. 한 사회 내에서 안식일로 대변되는 참된 원리들이 무시당할 때, 그 사회는 억압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낮을 뒤이어 밤이 찾아오는 것처럼 명약관화한 결과요. 우리 아버지가 활동 주기사이에 이런 막간을 두신 것은 창조의 열매들을 헤아리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축복을 위한 이런 막간이 없다면 무슨 수로 영혼이 받아들임의 과업을 해낼 수 있겠소? 무슨 수로 영혼이 평화로울 수 있겠소?"
이 지점에서 나는 예수에게 일주일 중 어느 날을 일곱 번째 날로 삼는지가 중요한 문제인지 물었다.
"안식일이란 본래 사람들 사이에서 작업과 수고를 잠시 중단하는 걸 나타내는 만치, 그 사회에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그 날을 안식 일로 동의하는 한 어느 요일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소. 안식일은 한 영에 대한 전일적 찬양이오"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모세가 남종과 여종과 가축에게까지 안식일을 적용시켰던 것을 떠올렸다.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이 사랑과 완전한 한영의 품에 안겨 휴식하고 회고하는 날이 이 날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날을 개인적으로 경배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체험할 수도 있지만, 그 축복을 남들에게로 넓히지 않고는 그것의 충분한 권능을 체험할 수 없다.
이 날은 모든 사람이 조건 없이 사랑받고 구조에 대한 그들의 얽매임을 용서받는 자비의 날이다. 또 안식일은 가슴의 날, 즉 기도와 숙고와 자발적 선물과 친절한 말과 거룩함에 대한 소박한 공경을 위한 시간이다. 이런 실천 속에서 우리는 한 영과 신성한 질서를 불러오는 그것의 권능에 대해 변치 않는 공경을 닦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지상에서의 네 시간들이 길고 풍요로우리라'요"
당장에 내 머리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부모 자식간에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이 떠올랐다. 가정 밖에서 받는 부정적인 영향들로 일탈과 혼란을 겪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갖가지 도전적인 과제들을 던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잘못된 관계와 상황 속에서 헤매는 부모들 때문에 무시되거나 학대받는 아이들도 있다.이런 아이들은 그런 영향에서 벗어나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예수는 지적했다.
" 이 계명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행해야 할 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소, 모세 시대에는 가족 단위가 철저히 전제적이었고, 인구도 작았으며, 부족의 지향성도 가족의 역할을 그 중심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계명이 협소하게 표현되더라도 그것의 본래 취지를 전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훨씬 더 많소. 사회와 가족 단위 모두에 훨씬 더 많은 다양성과 복잡성이 있게 된 거죠. 따라서 이 계명의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적용범위를 더 넓게 밟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계명을 권능 있게 하는 사랑은 사실, 이전에 당신에게 다가왔던 그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요. 예전에 당신에게 뭔가를 가져오거나 주었던 사람들을 공경할 때,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모두를 자신의 양분으로 바꿀 수 있소, 어떤 사람보다 나아지려면 먼저 그 사람을 공경해야 하오, 역사란 이런 각 개인의 장점들을 모은 것 중 일부에 다름 아니오.
개개 삶의 자취에는 인정할 만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있는 뭔가가 있기 마련이오. 내가 당신더러 몸 속에 받아들이는 음식을 축복하라고 말했을 때, 당신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건 음식이 아닌 사랑임을 당신이 좀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이건 당신 개인의 문화 유산에도 똑같이 적용 됩니다. 이 지상에 당신보다 먼저 도착했던 것들에 대한 사랑과 공경 없이는 삶에서 어떤 진보도 이룰 수 없소. 과거를 부정할 때, 그사람은 바퀴를 다시 발명해내는 데 인생을 소비할 수밖에 없소. 그런 사람은 '무에서 시작하는것'이 더 많은 개인적 성취를 가져다주리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연속성을 깨뜨리거나, 아니면 자신이라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답시고 오히려 자신이 받은 것을 망가뜨리는 셈이오. 당신이 뭔가를 쌓아올리면서 정작 그 토대가 되는 것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시간이 어떻게 길고 풍요로울 수 있겠소?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 이것이 형제애와 번영을 위한 열쇠요.
당신이 쌓아올리는 것의 토대가 되어주는 그것을 존중함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나갈 근거를 만들어내는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존중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대체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소."
나는 예수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로서의 내 경력을 떠올렸다. 나는 세 살밖에 안 되는 이른 나이에 내가 화가로서 살게 되리란 것을 알았다. 아직 글자를 읽기도 전에 우리 어머니가 소장하고 있던 중근세 유명화가들의 화집에 정신 없이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내가 그 화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어머니는 그 책을 내게 주셨다. 그때는 내가 네 살밖에 안 됐을 때였는데. 그 책은 이미 닳아서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그 화집에 실린 그림들은 내 영감의 원천이었고, 그 화가들은 내 영웅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능가하고 싶은 화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런 깨달음 때문인지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고, 남들보다 앞서 내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동안 나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이전에 그려둔 내 작품들을 원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곤 했다.
그래서 내가 예수에게 이 원리와 거기서 끌어낸 확신이 내게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꾸했다.
"모든 것이 한 문맥 안에 존재하니, 자신의 문맥을 인정할 때, 정직만이 아니라 양분까지도 끌어오게 됩니다. 있었던 사실과 자신의 의도를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이 정직의 전부는 아니요. 정직의 힘은 공경에서 나오니, 여기에는 문맥을 인정하고 감시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문맥을 바꾸거나 숨기거나 비틀어서 왜곡되지 않을 사실이나 주제나 사람은 없소 . 따라서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건 모든 상황 속에서 문맥의 상관성을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의 첫 문맥은 가족이요. 치유되어야 하거나 나중으로 미뤄둬야 할 문제와 곤란들이 있을 수도 있소. 이런 경우들도 이따금 있소, 하지만 이해되고 처리되지 않은 문맥이라면 뒤에 남겨질수가 없소.
유감스럽게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문맥을 부정하는 데서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 무구한 시작에서 쌓아올리기로 선택하지 않는 거죠. 대신 '우선 여기서 벗어난 다음에 내 인생을 시작할 거야'고 선언하거나 아니면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다른 가족들과 절대 닮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그들 식의 삶에 반발하죠. 크나큰 반발심을 가지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다른 사람들이 겪였던 실수를 자기만은 되풀이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는 거죠.
하지만 삶이란 에너지와 체험과 사랑의 흐름에 다름 아니오. 남들의 위기와 단점에서 배우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특징이죠. 그런데도 자신에게 체험을 안겨주는 삶의 흐름을 거부하는 건 장차의 이해와 해결을 위한 문맥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오.
게다가 문맥을 부정하는 사람 대부분이 진공을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주는 환상이라면 얼마든지 용납하지만 진공의 존재는 그렇지가 않소, 그런 존재는 한 영과 그것의 온전한 통합을 훼손할 테니까요. 따라서 진공이 형성되자마자 그 진공은 그 진공을 만들어낸 바로 그것으로 가득 차버리고 맙니다. 진공을 만들기 위해 품었던 그 생각이 현실에서 드러나게 되는 거죠. 이 때문에 당신이 비판하는 어떤 것과 같아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가 그것에서 자신을 떼어낸 다음 공백을 만들어내는 거요.
세대에서 세대로 역사가 되풀이되는 건 삶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비판과 부정 때문이오. 우주는 그 단절을 당신이 반대하고 부정했던 바로 그것을 가지고 순식간에 메꿔버리고 마니까요. 원치 않는 요소들은 그 비극의 순환주기를 따라서 재검토를 요구하며 몇 번이고 다시 떠오르죠. 따라서 인류로서는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정화하는 가슴의 권능을 이해하고, 완벽하지 못한 상황들이 나름의 목적에 기여하면서 전개되어 가도록 뇌두는 편이 훨씬 이롭소.
삶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랑과 창조와 의식과 행동의 흐름이오. 그 흐름이 당신의 가슴과 삶을 통해 나아갈 때, 당신은 나름의 노력과 사랑을 그것에 보태고, 당신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체험들을 그것에서 얻습니다. 그런데도 그 흐름을 멈추려고 하면, 흐름은 가로막혔다가 넘쳐흐르는 시냇물마냥 훨씬 불어나서 되돌아오게 되죠.
좋은 일이 당신 삶을 거쳐가도록 하기는 아주 쉽소, 찬탄은 조화와 해결을 가져오거든요. 그보다 덜 유쾌한 상황이라면 더 적합한 다른 장소로 그 흐름이 순탄하게 옮겨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오, 삶이 진행되는 데 따라 이루어지는 나름의 문맥 변화가 삶을 다듬고 정화하기 마련이오. 어떤 문맥에서는 잘못된 듯이 보이는 행동이 다른 문맥에서는 대단히 이로운 것이 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지 않소?
성스런 가슴은 삶을 거쳐가면서 삶의 불꽃을 완벽하게 다듬어주는 매체이자 도관이요. 삶이 흐르는 건 막을 수가 없소, 삶은 살아가고 참여하고 체험하고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거요. 신의 자녀로서 당신은 계속되는 창조의 일부요 따라서 성장하고 번영하면서 앞으로 나가자면, 삶이 당신에게 가져다준 세대 유형들을 사랑과 공경으로 인정해야 하오. 이것은 신성한 질서의 일부요"
여섯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물리적 폭력이 휘두르는 위험이 우리 사회의 특정 분야들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상 여러 부분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계명을 떠올려본 적은 거의 없다. 추측컨데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이 계명을 별달리 숙고해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은 남의 목숨을 빼앗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쪽을 선택하리란 데 있다. 형제애가 지구 차원에서 높아지고 공공방어 제도가 강화되는 세상이다 보니 우리는 너무 일찍 속 편하게 이제 생명은 다른 무엇보다 존중되고 있으며, 살인이란 건 야만적인 세상에나 있는 일이라는 식의 성급한 결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 주제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살인 위험이 줄어들수록, 모세의 훈계가 환기시키는 지적 깊이를 의식하는 일도 그 만큼 줄어들고 있지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숙고가 시간 낭비인 경우는 없는 법이다. 예수는 이 계명이 단순히 살인행위에 대한 제한 이상의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눈부시도록 분명하게 이해시켜주었다.
"정의의 기본 권능은 문제나 불공정을 개선하고 균형 잡을 수 있는 보편적 풍요에 있소, 예를 들어 밀 한 줄기에서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만들어지고 벼룩 한 마리가 얼마나 많은 알을 낳는지 생각해보시오. 자연 속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팽창하는 생명현상들 속에서 자신을 풍요롭게 배가합니다. 그런 생명에 위해가 가해지면, 생명은 자신의 씨앗을 배가하고요.
정의의 두 번째 권능은 교환이오. 만물의 일차 본질은 같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요소와 환경들 사이에 균형과 조정을 가져다줄 교환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정의의 세 번째 권능은 모든 대립, 모든 불화를 넘어서 계속될 수 있는 생명의 적응력이오. 대립해봤자 소용 없소. 전멸시켜봤자 무의미한 낭비일 뿐이오. 생명은 모든 비판, 모든 저항, 그 저항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를 넘어서 계속되니까요.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생명에 파괴적인 태도로 접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되고 맙니다.
당신이 사랑으로 팽장을 지켜볼 때, 당신은 자신의 삶에 퐁요의 권능을 주는 셈이요. 반대로 삶을 다투고 부족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여기는 건 당신 자신의 고귀한 권능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요. 팽창은 삶의 방식이지만, 자신이 더 위대한 전체 존재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이 두려운 것으로 보일 수 있소. 그런 사람에게 타인의 팽창은 자신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되죠. 그래서 상대방을 공격하고요.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람을 실제로 죽인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목적이나 재능이나 꿈이나 아이디어나 사랑이라면 얼마든지 스스럼없이 죽일 수 있소, 상대방의 생명력을 방해할 작정으로 무효화하는 것. 이런 게 바로 살인이오! 그렇게 하는 동기가 기껏해야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거나, 아니면 유리한 위치에 서기위해서라고 해도 말이오.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 죽이려는 충동이 이는 건 두려움 때문이오. 그 보다는 팽창이 간련 당사자 모두의 이해관계에 얼마나 잘 기여할 수 있는지를 연구해보는 쪽이 훨씬 더 나은 접근인데 말이오. 두 기업이 같은 대중을 놓고 다투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이 경우에도 그 두 기업이 서로 협력한다면 더 다양한 시장 속으로 더 크게 뻗어갈 수가 있소, 또 경쟁자들이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기술이 집단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도 자주 있는 일이죠. 지식을 함게 하는 편이 어느 한쪽이 단독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경우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텐데 말이오. 가슴의 높은 수준에서는 삶의 목적 전체가 팽창이오. 우리가 팽창에 대한 이런 사랑을 받아들일 때, 당신의 영향력과 자격은 한없이 넓혀져갈 수 있소, 종교와 철학이 갈등의 토대가 된다면 그것들은 잘못된 목적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오. 사실 지금까지 치워진 대다수 전쟁들이 종교 문제나 철학 문제에서 기인했죠. 당신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부 분쟁을 막을 방어장치와 자유를 함께 성정했던 것도 이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오. 덕분에 당신들은 만인에게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환경 안에서 의사표현의 자유와 자신의 의도대로 살아갈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게 된 거요. 이런 권리 이상의 많은 권리들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 우리 아버지의 우주고요"
이처럼 신성한 질서에 순응하고, 삶의 여러 가능성드을 받아들이고 통합하고서야 우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그 계명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이 계명이 팽장하는 현상으로서 삶을 존중하는 법칙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파괴는 우리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기여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류의 성장 때문에 우리 삶이 밀려나거나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그 팽창을 뒤집기 위해 시도되는 절망적인 헛된 시도에 다름 아니다.
내가 예수에게 각 요소가 똑같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 삶의 모든 것에는 나름의 주기가 있소, 밀물과 썰물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나무가 새 잎과 새 가지를 한꺼번에 낼 수 없듯이요. 신성한 질서를 존중한다는 건 함께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기다려준다는 의미일 때도 많습니다. 이건 성장을 완성하지면 먼저 발휘되어야 하는 쪽의 힘이 발휘도도록 허용해주는 순응의 정신과 더불어 인내와 관용을 필요로 할 수 있소.
국가가 전쟁에 뛰어드는 건 갈등 없이 확장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인데. 어쨌든 생명을 파괴하는 건 공존의 정신에서 나온 해결책이 아니오. 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될 것이고, 갈등을 겪는 사람의 좌절도 그가 삶을 아버지의 의지가 펼쳐지는 것으로 이해할 때까지는 계속될 것이요.
모든 정의의 토대는 생명의 풍성함과 선이요.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삶에 정의를 가져갈 수 있소.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폭력과 적대가 아닌 다양한 해결책을 이용할 수 있소, 예를 들어 변방에 사는 두 형제가 의견이 다르다면,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서 그들의 차이점을 소화해낼 새로운 대지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요. 모두가 가능성을 넓힐 수 있도록 함께 일하시오. 그러면 인종 말살 따위는 과거지사가 되지 않겠소?
일곱 번재 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거요. 혼인제도는 가볍게 맺어졌다가 쉽게 부서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거룩한 결합이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의지요. 혼인의 거룩함은 자신의 권능을 속세 차원에서 끌어오는 게 아니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만나서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창조하는 건 아버지 및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과 결합했음을 상징하고, 불멸의 영혼이 자신의 소중한 가슴과 결합했음을 상징하며, 사랑 속에서 일하기 위해 함께 맻어진 창조의 제반 측면들이 성스럽게 결합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다른 모든 것들의 결합을 드높이고 확인시켜주니까요. 그것이 애정 깊고 순수한 결합이라면, 그것은 또한 지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친절과 온화함의 표현이기도 하죠. 자비는 모든 생명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요. 사람으로 충만한 성소에 친절이 가득할 때, 그것은 나머지 존재들 전체로 퍼져나갈 희망과 토대를 갖게 됩니다.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 그 관계가 어떤 것이든, 그 결합이 어떤 것이든 둘 이상이 사랑으로 함께 모일때, 한 영 속에는 합일이 창출됩니다. 사랑의 관리를 받으면서 금강입자들 간에 아주 긴밀한 상호교환이 일어나는 거요.
혼인처럼 깊고 의미심장한 결합은 순수해야 하고 부적절하거나 저질이거나 부정직한 요소들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결혼 후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건 그 기본 원인을 사랑의 불순함에서 찾을 수 있소, 헌신의 정도가 약하고 그 동기 또한 그다지 영예롭지 못한 혼인은 관계를 지속시킬 만큼의 강인함과 진지함을 갖지 못합니다. 또 그 결합이 순수하지 않을 때에도 실패로 끝나는 관계가 되기 쉽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그 관계에 이미 불손함이 섞여 있기 때문이오. 그 정도에 관계 없이 외적인 동기나 진실되지 못한 이유나 십중팔구 부적절한 방식으로 결합이 이루어졌던 거죠. 만일 돈이나 편의나 사회적 지위만을 위해서 이루어진 혼인이라면 그 관계 속에 이미 불순함이 내장되어 있는 셈이오. 그렇다면 그런 불순함이 나중에 부정함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이겠소?"
"지금 사회에서는 불안정한 부부관계와 이혼이 흔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결혼관계를 끝내는 편이 더 나은 상황과 조건이란 게 있나요?"
"합일의 진짜 중심은 존중과 진지함과 깊은 헌신을 가지고 자신들의 결합을 서로에게 영예로운 것으로 만들려는 두 사람의 사랑이오. 만일 이 사랑이 다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존재하지 않거나,사랑의 불순함이 그 부부의 해결능력보다 더 클 때는 사랑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말고 혼인관계를 끝내는 편이 나을 거요.
그렇다 하더라도 혼인관계를 가볍게 해체하거나 일시적인 스트레스와 압력에서 비롯된 이유를 때문에 해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혼인이란 신이 설정한 결합이니까요. 모든 혼인은 아버지의 것이어서. 그의 의지에 따라 권능 있게 되기도 하고 해지되기도 하죠. 이건 어떤 인간의 삶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설사 그것이 부부관계라는 결합을 통해서라고 하더라도요.
혼인관계가 잘 유지된다 해도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더 큰 서약이 맺어짐으로써 서로 헤어져서 기여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고요. 따라서 구조에게는 단순히 기존의 이해관계나 결속의 외적 징표들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기여 정도를 넘어서 사랑을 가두거나 할 권위가 주어져 있지 않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나됨은 어떤 것이든 간에 둘이 함께 모여 이룬 다른 모든 결합의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상징이요.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그것이 다른 관계들에도 심오한 의미를 가져다줄때 가장 잘 실현됩니다. 모든 관계의 상징이 혼인의 원리들이오. 당신이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어떤 직업이나 소명에 헌신하는 것. 이런 게 혼인 아니겠소? 또 당신이 자신의 동포나 형제나 가족이나 한 영과 맺고 있는 관계 또한 혼인이 아니겠소?"
"그럼 가장 위대한 혼인은 어떤 건가요?"
"신과 인간의 하나됨이오. 이것이 바로 다른 모든 혼인들 뒤에 깔려 있는 권능이오. 신부가 자신의 신랑에게 하듯이 인류가 신의 의지에 공명할 때, 땅에도 하늘나라가 있게 될 것이오"
이 강력한 진술이 있고 나서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예수가 이어서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근 한 시간 동안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이야기를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강력한 통찰이 내 의식을 흝고 지나간 것은 내가 메모해둔 공책을 펼쳐서 다시 읽어보았을 때였다.
앞의 일곱 계명들이 자례로 반영한 건 바로 가슴 안에 존재하는 일곱 차원의 지성들이 아닌가! 이 계명들 뒤에 놓인 근거들은 각각 합일과 사랑, 삶.공경, 정직, 정의, 친절로 볼 수 있고, 각 계명들 안에는 고귀한 지성이 지닌 동일한 추진력들이 들어 있었다. 내게 이런 깨달음이 밀려들어왔을때 우리의 눈은 다시 마주쳤고, 예수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내가 얻은 새로운 이해에 내리는 축복처럼 울려퍼졌다.
"지금 당신은 이 계명들 뒤에 놓인 더 큰 진리를 보았소, 그렇소 그 계명들은 가슴의 지휘도구요!"
"그럼 남은 세 계명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신성한 질서에 '사족'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이 문제가 자못 궁금했다.
예수는 기꺼이 호의를 베풀었다.
"뒤의 세 계명은 가슴의 서약에 속합니다. 자력을 매개로 하는 가슴의 첫번째 서약은 당신 자신인 사랑의 확장으로서 당신의 삶을 펼치겠다는 거요. 따라서 당신이 하게 되고 갖게 될 모든 것이 가슴이 내적 생명력과 외적 생명력 사이에서 이룬 균형의 직접적인 결과요. 가슴의 두번째 서약은 삶을 무구하게 인식하겠다는 것이고요. 이것은 창조의 증인으로 현존할 수 있고, 모든 것들 속에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당신의 권리요. 가슴의 세 번째 서약은 당신과 당신의 성스런 근원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목적을 견지하고 그것을 권능 있게 하겠다는 것이요"
여덟 번재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지어다'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도둑질은 경제적 협박이자 사회적 위험요소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만연된 도덕적 해이의 표식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좀더 동정적인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경제적 유동성이 빠른 속도로 상실되어가는 세상에서 부를 재순환시키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 해도 사실 도둑질에 대한 대부분의 관찰과 결론들이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사람들은 도둑질을 금지하고 그것을 처벌하는 법률에 너무 신경을 쏟다 보니, 소유권을 존중해야 하는 근거 자체에 대해서는 무시해왔다 어린 시절에 받은 학습의 영향으로 나는 사람들 각자가 훔칠지 말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믿고 있었다. 일단 선택이 내려지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선택에 근거해서 처신한다고 계명의 의미에 대한 이런 식의 협소한 관점은 이해라는 면에서 지성이 숙고해보거나 영혼이 음미해볼 여지를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좀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줄 수 있는 다른 시각에서 그 주제를 접근하기로 마음먹고, "정당한 소유란 건 뭔지'를 묻는 것에서 시작했다.
"정당한 소유관계는 그 사람의 사랑과 그 사람의 진정한 소유들간의 관계에서만 존재합니다 소유를 존중하는 건 권리를 존중하고 개인을 존중하는 문제요. 이 계명은 개인에 대한 존중과 각 개인이 자기 나름의 지정된 장소와 시간을 가질 권리와 정당한 그의 소유물들을 공급받을 권리를 중심으로 삼고 있소.
그 소유물이 무형이나 유형이냐에 관계없이 그것을 끌어오는 건 가슴의 권능을 매개로 한 사랑이오. 기실 만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것이오. 다만 생존과 책임과 기쁨을 위해 그 자녀들에게 관리권이 주어질 뿐이지요. 뭔가를 소유하게 되는 방식은 벌어서 얻는 것에서 선물 받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뭔가를 손에 넣고 지니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당신 가슴 속의 사랑이요. 소유에 대한 존중은 사로와 서로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상징에 지나지 않소."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내 머리 속에는 여러 해 전에 내가 고용한 한 젊은 여성과 겪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그녀가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있게 되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내 파일 캐비넷에서 노트 몇 권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챘다. 내 색상이론에 대한 연구들을 모아놓은 그 노트들은 나한데는 달리 대용물을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무가치하달 수 있었다. 나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그녀를 추궁할 만큼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계속 여기저기를 찾아보면서 뭔가 더 확실한 실마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틀 후 나는 그 노트들이 파일 캐비넷 속의 본래 위치로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빠지거나 잃어버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연유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던 데다가, 부하직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하지고 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모든 걸 털어놓고 이야기해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순전히 호기심에서 그 노트들을 자신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인정했지만, 재빨리 이렇게 덧붙였다.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아냐. 넌 훔쳤어 넌 나의 프라이버시와 이 정보에 대한 내 소유권을 훔친 거야" 이것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발상이었고, 서로가 배워야 할 교훈이었다. 그녀는 사죄했고, 나는 용서했다. 그후로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더 많이 존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함께 나눔 또한 더커졌다.
이런 생각에 예수가 논평했다.
"함께 나눔은 삶을 완성하고 삶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질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결과요. 존중심이 모자란 경우에는 물질 소유가 사람들의 삶을 분리하는 장벽이되고 말지만요. 한 사람은 너무 많이 갖고 있고 한 사람은 너무 적게 갖고 있는데. 어느 쪽도 그런 편중을 깨기에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거나. 어째서 그게 그런 식이어야 하는지 알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는 거죠"
"정말로 가난해서 줄을 만큼 배가 고픈 사람이라면요? 그런데도 아무도 자비를 베풀거나 일거리를 주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음식을 조금 훔치는 것도 잘못인가요?"
예수는 눈에 한없는 자비심을 담고 대답했다.
"그렇소. 그건 잘못된 행동이오. 비록 그건 아버지의 더 넓은 관점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쌍방 범죄이긴 하지만, 그 범죄 자체에 대해서는 징계가 내려져, 자포자기 상태인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행동이 그의 성격 중에 지울 수없는 부분으로 되고 말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그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궁핍의 상황 또한 처리해야 합니다. 그가 그런 부족상태를 겪는 데 어떤 탐욕과 매점매석이 일조했는지도 해명되어야 하고요 탐욕은 도둑질의 또 다른 행태에 지나지 않소.
부족과 과잉 모두가 참된 소유의식을 잃은 데서 나오는 결과요. 가슴의 내적 확신에서 나오는 정당한 자기 소유에 대한 앎은 돈으로 살수 없는 앎이오. 그런 확신이 없는 소유는 한계를 설정하고 서약을 제한 하는 것으로만 증대하죠"
예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소유란 행위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대한 내 깨달음도 커져갔다. 반드시 참된 소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또 우리가 공동체와 활동과 직업과 학교 따위와 함께 나누는 집단 소유란 것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함게 사랑하고 함께 나눈다. 자주 포트 위쓰 보타니컬 공원에서 강의 준비를 하는 나는 이 공원을 '나의 또 다른 사무실'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물론 내가 이 공원의 소유자인 건 아니지만, 나는 그곳을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한 영 안의 특별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가 소유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개인적으로 구입하고 지닐 수 있는 것 이상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시라는 공간이 그들의 영혼에 의해 공유되는 곳이다. 또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산을 아끼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록키산맥을 노래 부르는 존 덴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산맥을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모든 존재 속에는 눈으로도 관찰할 수 있는, 창조의 밀물과 썰물이 있소, 만물이 다 신에게서 나와서 결국 이 근원으로 되돌아가죠. 그럼에도, 존재하는 그 동안에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오. 이것은 창조를 지탱하는 존재의 우월성을 말하는 거요. 당신이 소유의 법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깊은 이해는 모두에게 그 자신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거요. 신에게는 신의 것을 주고, 땅에게는 땅의 것을 주시오. 그리고 당신의 형제에게는 그의 것을 주고, 당신 자신에게는 당신의 것을 주시오. 이것은 숭고한 진리이자 철저히 실제적인 공식이요.
세상에서 가장 흔한 도둑질이 바로 비생산적인 대상을 지원하기 위해 당신 삶의 일부를 훔치는 것이요 예를 들어 집세를 다른 용도로 쓰고 나면, 가계 예산이 구멍이 나는 형국처럼요. 우주에는 에너지의 흐름을 끌어당기는 것과 그것을 받는 것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일종의 '기금 계정'이란 게 있소. 그래서 각각의 할당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면 에너지의 확장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무시될 때는 지원을 잃고 말죠.
지휘하고 끌어당기는 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존중될 때 부에는 한계가 없소 참된 소유는 사랑이요. 당신이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면 도둑들도 더 이상 당신의 것을 가로채거나 훔칠수 없을 거요"
모세의 아홉번째 계명은 '너희는 거깃으로 증언하지 말라'이다.
이 계명의 의미가 특히나 자신의 동료 인간이나 자신이 목격하거나 본 것에 대해 거짓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임은 명확하다. 하지만 예수는 좀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잘못 보거나 누구에게도 잘못 전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깊이 있게 현실을 사랑하시오. 현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정직의 핵심이고 무구한 인식의 본질이오. 속임수를 쓰는 건 일종의 배신행위요. 왜냐하면 그건 당신을 당신 자신과 신에게서 떼어놓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정직의 완전한 의미는 현실에 대한 사랑, 당신 눈앞의 현실에 온전히 현존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붉은색 안경을 끼고 삶을 살아가지요"
우리는 자주 불라인드를 치고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부정한다. 예수가 말하는 무구한 인식이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능력이다. 무구한 인식은 발견하고 깨닫고 자비롭게 살고자 하는 가슴의 열망이다. 예수는 "정직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오. 그건 지혜와 지성의 토대요"라고 목박았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면 상처 입는다고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진실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건 왜 그런가요?"
"그건 그들이 솔직함과 정직함을 심히 혼동하기 때문이오. 워낙 솔직해서 미주알고주알 온갖 일을 다 이야기하면서도 달이 떠오르는 건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런 삶들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불분명할 때도 자기 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솔직함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고, 실제로 자주 상처를 입히지요. 반면에 정직은 언제나 현실로 돌아가 조회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위안과 지원과 결단의 요소가 들어 있소.
진실은 보편상수요.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현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 있소. 진실을 밝히는 건 대단히 온화하고 친절한 일일 수 있소, 다른 사람의 이해방식을 관용하고 동정하는 마음과 함께 말이오.
나는 자주 우화를 써서 진실을 이야기하곤 하죠. 우화와 비유가 좋은 점은 듣는 사람마다 제각각인 가슴과 마음과 기대 수준에 맞출 수 있다는 거요. 이런 식으로 하면 하나의 진리라도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각자가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자각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소, 진리는 말하고 듣는 그 내용이 있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지 않소"
모세의 마직막 계명은 "너희는 탐하지 말라"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탐욕은 심각한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동료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외부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하리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온갖 상품들을 슈퍼스타들이 나와서 광고하는 배경에는 그 물품을 소비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세뇌적인 암시가 깔려 있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말했다.
"당신의 완성을 외부에서 구하지 마시오.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에게 사랑과 능력의 재능을 주었소, 이건 외적인 우월성을 닦거나 자신의 이득과 곤란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오. 이 계명 뒤에 놓인 사랑이란 자신의 목적과 하나됨을 사랑하는 것이어서, 내적 실현을 사랑하고 자기 나름의 존재 이유를 거둘 수 있게 해주죠.
당신이 진실로 당신 자신으로 있을 때, 당신은 자신이 신의 자녀임을 압니다. 그렇게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소. 당신은 신의 창조를 촉진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니, 당신이 하는 일 중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소 따라서 당신에게는 목적이 있고, 살아가는 과정이 그 목적을 펼쳐갈 것이오. 하지만 탐하는 것은 자신의 성스런 목적을 순전히 외적인 동기로 대신하는 것이오. 외적인 동기는 자기 나름의 목적을 인식하거나 존중할 그 사람의 능력을 결국 파괴하고 맙니다. 다른 사람이 이룬 것을 질투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승리를 자괴감으로 대하게 만들고요 질투에 내몰린 삶을 사는 건 거짓된 목적에 따라 삶을 사는 거요. 하지만 실현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일으키는 참된 과정을 존중하면 참된 목적의식을 다시 되살릴 수 있소
실현의 참된 과정은 벽돌을 하나하나씩 쌓아가는 것과 같소. 먼저 별돌 하나가 회반죽 위에 놓이면, 다시 다른 벽돌이 그 옆에 놓입니다. 이렇게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에는 하나하나의 벽돌이 똑바로 놓이고 다른 벽돌과 잘 붙도록 만드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되죠. 숙련된 벽돌공은 벽돌선 하나하나가 그 집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걸 잘 앎니다 마침내 벽돌공은 뒤로 물러서서 벽이 제대로 완성되었는지를 보고 나아가 건물 전체를 조망하죠. 그 동안에 필요한 것은 세우는 과정에 대한 믿음과 헌신이오. 그런 내적 확신 없이는 본래의 큰 그림을 놓치고 말 테지요. 또 헌신하는 그 작업에서 얻는 기쁨보다 개개 작업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마음이 더 커질 태고요.
살아가는 과정에 사랑을 순응시키는 건 강력한 효과를 갖습니다. 외적인 성과만을 바라보면서 그 과정을 존중하길 이지을 때, 당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처럼 되고 맙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보고 싶었던 이카루스는 왁스로 주조한 거대한 날개 한 쌍을 만들어냈지요. 그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날개를 자신의 팔에 묶었습니다. 지금의 행글라이더처럼 그는 절벽에서 바람의 기류를 타고 날아가기 시작했고. 점점 더 태양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급했던 관계로 태양 가까이 가면 그 열기로 그의 날개가 녹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지요. 그는 순식간에 바다로 떨어졌고, 파도에 밀려 해변으로 떠내려갔습니다.
이카루스가 잊고 있었던 건, 그것이 태양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목적지든 간에 우리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번에 한걸음씩 그 목표에 적합한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는 점이요. 이카루스는 업적을 달성해서 다른 사람들이 놀라자빠지도록 만들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이루는 과정을 경시했지요.
사람들이 이룸의 과정 자체를 사랑하면, 자신의 업적을 남들의 것과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계획에 따라 활동합니다. 한 사회 안에 노인이 있는가 하면 젊은이도 있듯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마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오. 또 누구나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그것을 완성하는 과정을 밟게 되고 , 그 다음에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지요.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보다 앞서서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삶의 주기가 그런 것에 지나지 않소.
자신이 이룬 대작의 마지막 벽돌을 놓는 이웃 사람이 뿌듯한 자부심을 경험하고 남들의 찬탄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요. 그런데 같은 이웃 중에 장차 세워질 건물의 첫 벽돌을 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감도 없고 막연해서 자신의 초라한 시작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감출 테죠.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하등 다르지가 않소 왜냐하면 어느 쪽이나 목적의식적인 삶의 계속되는 과정 속에서 그냥 하나의 벽돌을 놓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탐하는 행위는 당사지로 하여금 자신의 동기를 외부에서 구하게 함으로써 이런 깊은 이해에 이르지 못하게 하죠. 이 마지막 계명이 진실로 토대로 삼는 건 이룸의 과정을 사랑하고 자신의 목적을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이니까요.
[출처] 끝없는 사랑 378쪽 예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소유란 행위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는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마스터와 가르침 > 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2장 신과 현실 (0) | 2022.02.11 |
---|---|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11장 당신의 권리와 자유 (0) | 2022.02.11 |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9장 축복받는 삶 (0) | 2022.02.11 |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 8장 다리들 (0) | 2022.02.11 |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 7장 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다. (0) | 2022.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