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15장 사랑하는 이여 본문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15장 사랑하는 이여
사랑
2021. 10. 5.
이 멋진 아이가 이천 년 전에 태어났을 때 요셉은 그를 예슈아라 부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것이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이 그토록 축복했던 그의 히브리어 이름이다. 예슈아란 이름은 나중에 인간에게 알려진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그를 예수(Jesus)라 부른다. 하지만 나머지 모두보다 더귀한 보통명사가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던 덕분에 나는 더 높은 자각과 함게 그냥 '님 The Beloved" 이라는 이 거룩한 이름을 아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이름의 의미를 좀더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사랑이고 성스런 신비의 후예로서 우리 또한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지 우리의 현재 조건 때문에 거룩한 문맥 안에서 우리 자신의 기억해내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에서 너무나 멀리 떠어져 있어 우리 자신이 예수와 다르고 사랑과도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유감스런 상황이 생겨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거울에 비쳐진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알고자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과 평가와 의견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수는 이것을 '반사율'이라고 불렸다.
왜 불꽃이 자신의 타는 것을 보기 위해 옆으로 비켜설 수 없고, 왜 물이 자신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없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영원한 미스테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미스테리에 순응하는 것이 환상으로 가득한 그 어떤 반영보다 더 많은 지혜를 낳아준다 일단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자기 가치를 외적으로 쌓을 필요는 더 이상 없어진다.
예수는 단언했다.
"스스로 노력하기도 하고 남들의 노력을 빌리기도 해서 사랑을 알고자 하던 당신들은 사랑을 상품으로 여기는 법을 배웠소, 말하자면 행동이나 외적인 것으로 사랑을 생각하도록 배운 거요. 하지만 사랑을 외적인 것으로 보는 그런 발상들이 당신들을 판단과 분리로, 특히나 자신으로 부터의 분리로 데려갔소. 자신의 사랑을 아는 가장 참된 방법은 반사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에게서 느끼는 기쁨에서요. 이런 기쁨은 사랑의 현존에서 느끼는 영혼의 기쁨이오. 당신이 뭔가를 기쁨으로 체험할 때 마다 당신의 사랑 잔은 넘쳐흐릅니다. 당신은 자신의 기쁨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게 되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삶이라는 물결 위에 던질 때 당신의 영혼성을 알게 될 거요"
그의 현존에는 넘쳐흐르는 사랑이 있었다. 만족과 행복의 오라로 빛나는 그의 얼굴은 기쁨을 발산했다. 그는 자주 만면에 웃음을 띄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한번도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본 적이없다는 사실이 나를 사로잡았다. 대다수 사람들이 나를 친성적으로 유머러스 하고 쉽게 사람들을 웃기는 이로 여겼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그의 이런 특징에 주목하게 된 건 예수의 방문이 끝나고 나서도 몇 개월이 지난 뒤였다.
우연히도 그 당시 나는 예수의 생전 모습을 말해주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하나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블리우스 렌툴루스라는 로마 총독이 쓴 것이었다. 이 두 책에서 특히나 관심을 끈 건, 묘사된 예수의 모습이 서로 상당히 유사했다는 점이다. 비록 두 책 다 그 부분의 인용이 짧긴 했지만, 그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 구절들은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러자 나는 어째서 그가 나더러는 웃음을 터트리게 하면서도 그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순간의 영감으로 나는 깨달았다. 기쁨이란, 사랑을 쏟아내는 것인 반면, 웃음은 우리가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내려놓을 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처리하는 과정의 일부로 웃는다. 웃음은 예전에는 대할 수 없었던 뭔가를 우리가 쳐다볼 수 있게 해준다 막혀 있던 곳에 에너지가 흐르게 하면서 예전에는 거부했던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내려놓음이 우리를 웃게 만들고, 그 자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사랑을 가르막는 장애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나를 자주 웃게 할 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에서는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소한 지적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담컨대 사실 그것은 그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불멸의 진리에 대한 놀라운 암시였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신성이라는....
나로서는 그의 신성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서 신학 영역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신앙을 조성하는 것이 지상에서의 내 자리나 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런 고귀한 감정과 인식들을 누설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드높은 신성은 내게 그럴 수 없이 온화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내가 그의 현존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경험을 한 경우는 1991년11월23일 그가 처음으로 나타난 날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나를 압도하지 않고 내 필요를 배려해주는 친절하고 인간적이고 온화한 그의 성숙함을 체험했다. 그는 내가 작업을 하면서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원했고, 내가 있는 현실 차원으로 내려오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의 멋지고 자애로운 방식으로 그는 내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그는 최고의 신사였다. 따뜻하고 인정 많고 자주 유머러스했던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했으며,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
내 체험 전체는 익숙한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그 첫날부터 나는 내 내면에서 새롭고 고귀한 차원의 자각이 펼쳐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나는 이 고귀한 차원에서 지금까지도 표현하기 어려운, 흔치 않은 감정을 경험했다.이 느낌에 내가 붙일 수 있는 이름은'흠모심' 정도다 그것은 내가 알았던 그 어떤 사랑보다 더 완벽했고, 소리와 향기까지 있을 만큼 순수한 사랑이었다. 흠모심은 이 속세 영역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다. 숭배란 용어조차도 그 느낌의 깊이와 기쁨과 평온함을 포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감정의 상향곡선을 상상할 수있다면, 다시 말해 삶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해서 환희로 상승해가고 거기에서 다시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평온과 명징(明澄:깨끗하고 맑다)함으로 나아가는 그 곡선을 상상할 수 있다면, 분명히 당신은 감정의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상향곡선이 거룩한 열정이라는 봉우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이 흠모심이다.
흠모심은 이례적이고 독특한 느낌이다. 그것은 감정의 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인식하고 공경하는 우리 영혼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물질 형태에 집중하느라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 가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물질 차원에서는 이 감정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예수와 함께 있게 되면 이 고귀한 인식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가장 순수한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성 바울은 자신의 글들에서 예수를 자주 '님'이라고 표현하여 이 감정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느낌이나 표현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다. 그것은 권능이다! '님'은 있음으로서 사랑의 정점이다. 모든 실존의 근원인 위대한 '나'의 현존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아는 그 위대한 실존의 권능으로서만 자신을 채울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사랑에 대한 이 차원 높은 개념을 이해했다는 사실은 그가 쓴 글과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한 데서 드러난다. 또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이 고귀한 사랑을 알고 있었고, 그 높은 헌신 때문에 비방과 분노를 받았다는 증거를 전해주고 있다. 그녀가 창녀였다는 명백한 언급이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덕성은 그후 역사 전체에 걸쳐 의문시되어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예수의 아내가 아니었을까라고 의심하지만, 나는 그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건 '님'에 대한 그녀의 의식과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것이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유사한 전적인 헌신을 불러왔으리란 점이다.
그녀의 특별한 사랑은 엄청난 질투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혀 드러나지 않았을 잃어버린 미덕에 대한 비난에 불을 붙였다. 진리에 대한 그녀의 용기와 이해는 너무나도 커서 어떤 것도 그녀의 헌신을 막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캘커타의 거리에서 마더 테레사 역시 똑같이 용기 있게 , 절망적으로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의 삶 속에 '님'을 가져오는 일을 했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서 '님'을 보는 것으로 이런 게 인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의 과정이다!
예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님'에게 살아 있는 불꽃을 붙이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성 바울은 이 심오한 개념을 이해한 첫번째 사람이었고, 이런 이해를 가지고 세상을 바꾼 메시지를 끌어냈다. 그는 사랑 없는 숭배는 내재된 목적이나 가치가 전혀 없는, 의미 없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숭배는 자주 잘못된 결과를 불러온다. 원시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자연현상들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자연의 힘을 숭배했다. 오늘날에는 돈과 물질 지위와 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위태로울 만큼 숭배에 가까워졌다. 참된 숭배란 자아가 드높은 권능으로 승화함을 의미하는 거룩한 모든 것에 대한 타당한 찬미다. 그럴 경우라도 숭배는 또한 에고가 자신을 드높은 권능 곁에 위치시키는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님'이 현존할 때는 에고가 완전히 꺽이고 만다. 에고는 이 완벽상태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도 없다. 흠모는 환상과 함께 거할 수 없다. 사람들이 돈을 숭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담컨대 흠모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명성을 숭배할 수는 있지만, 장담컨대 흠모할 수는 없다. 이 유례 없는 감정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곧바로 신의 얼굴로, 곧바로 '님'의 얼굴로 데려갈 것이다. 흠모는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그럼에도 전적인 순응을 통해 쉽고 경이롭게 체험할 수 있다.
솔로몬 왕은 그의 시대에 천재 문필가이자 다작가였으나 그 역시도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예수는 내게 솔로몬의 <노래중의 노래>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흠모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글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눈부심을 다양한 형태로 찬미하고 있다. 솔로몬은 흠모를 전달하기 위해 신랑과 신부의 우화를 사용했다. 이 지상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흠모의 가장 순수하고 감미로운 표현 중 하나가 이제 막 결혼한 부부의 열정적인 사랑이다. 신랑과 신부의 서로에 대한 흠모는 그 관계를 창조하고 축복한 시과의 대단히 특별한 결합이기도 하다.
<노래 중의 노래>가 솔로몬 자신의 결혼을 자축하기 위해 쓰여졌는지. 아니면 순전히 고귀한 사랑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차원이 달라질 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우화식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내게 그것의 가장 고귀한 의미는 불멸의 영혼이 성스런 가슴과 결합하는 사랑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인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과 유사하게 개개 존재의 영혼 깊은 곳의 갈망이자 그것의 완성을 향한 추구이다.
당신의 진짜 사랑이 어딘가에 있으리란 희망으로 당신은 온마음을 다해 이 특별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서로를 찾아내 사랑에 빠지고 난 다음에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분리의 번뇌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만 결혼을 할 때까지는 이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결혼을 하더라도 그 둘은 이따금 떨어져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축복받은 재결합을 갈망하곤 할 것이다. 성스런 가슴과 영혼간의 참된 사랑을 선언하는 이 얼마나 멋진 방식인가! 예수는 성스런 가슴을 신의 딸로, 영혼을 신의 아들로, 다시 말해 성스런 남매로, 각자가 신랑과 신부로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고 서로가 세세토록 상대방의 열정을 알고자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솔로몬의 <노래 중의 노래>에서 그의 영혼은 가슴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 이로 인격화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피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기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예수는 몇 번이나 "당신이 갈망하는 정원이 이것이요"라고 하면서 성스런 가슴을 정원으로 표현했다. 재미있는 건 솔로몬의 이야기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포도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건 에덴동산에 대한 추억일까?
이 낙원에서는 석류 같은 맛있는 열매가 나고,
나르드, 사프란,
창포, 계수나무 같은
온갖 향나무도 나고,
몰약과 침향 같은
온갖 그윽한 향료가 나는구나
그대는 동산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어라
그대, 나의 짝은 다르사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귀엽구나
나에게서 눈을 돌려다오
눈이 부시어 쳐다볼 수가 없구나
그대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니리닫는 염소떼.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시킨 암양떼 같아라
새끼 없는 놈 하나 없이
모두 쌍둥이를 거느렸구나
너울 뒤에 비치는 그대의 볼은
쪼개놓은 석류 같아라
왕비가 육십 명 있고
후궁이 팔십 명 있으며
궁녀가 수없이 있으나 그들이 다 무엇이랴.
티 없는 나의 비둘기는 오직 하나뿐
낳아준 어머니에겐 둘도 없는 외동딸
그를 본 아가씨들은 부러워하고
왕비, 후궁들도 칭찬하여 마지않네
이는 누구인가?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보름달처럼 고운 얼굴
햇볕처럼 발고 별떨기처럼 눈부시구나
성스런 가슴은 영원한 신비이기에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냥 그것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감쌀 뿐이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영혼에게 노래를 보낸다.
'나의 임은 말쑥한 몸매에 혈색이 좋아
만인 위에 뛰어난 사람이라오.
머리는 금 중에서도 순금이요.
머리채는 종려나무 잎새 같은데.
검기가 까마귀 같지요.
눈은 흐르는 물가에 앉은 비둘기
우유로 목욕하고
넘실거리는 물가에 앉은 모양이라오.
두 볼은 향료를 내는 발삼꽃밭 같고
나리꽃 같은 입술에선 몰약이 듣고요
두 팔은 감람석이 박힌 황금방망이
허리는 청옥 두른 상아 토막이라오.
두다리는 순금받침대 위해 선 대리석 가둥
그의 모습은 레바논 같아
맥향목처럼 훤칠하다오
그 늠름하고 멋진 모습에 그만 반해버렸지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의 임은 이런 분이란다.
나의 짝은 이런 분이란다.
이런 게 영혼과 성스런 가슴이 나누는 사랑이다. 이 두 정수의 결합은 가장 순수한 흠모의 사랑이다. 함께 있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고,떨어지고 나서는 재결합의 그윽한 갈망이 있다. 우리는 남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도 이런 감정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지복이었떤 우리의 하나됨에 뒤이어 자아가 그 핵심에서 분리되는 번민의 순간들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우리는 묻는다. "내 전체의 완벽함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시대를 초월하는 이 드라마를 남녀간의 사랑의 우화로 절묘하게 보여준 것이 솔로몬이었다.
솔로몬이 여러번 되풀이했던 합창들 중 하나는 예수의 메시지 전반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흔들어 깨우지 말아다오"
사랑은 강요되거나 조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자신의 의지를 빼고는 어떤 것도 쉽사리 그것을 불러낼 수 없다. 사랑은 우리의 통제 능력 너머에 있는 권능이다. 비록 사랑의 권능을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는 사랑을 지휘할 권리를 갖지만, 사랑의 현존 속에서 우리는 참된 겸손을 경험하고 그것의 권능을 공경하며 경외한다. 사랑의 표현은 절대 환벽하게 예견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펼쳐질 때
사랑을 받아들이는 건 중요하다. 설사 그것을 잠시 우리에게서 가져가버리는 경우에도.
나는 예수에게 물었다. '왜 사랑을 주었다가 다시 까져가버리는 겁니까?"
"왜 사랑을 주었다가 다시 가져가버리는 겁니까?"
"당신이 자신과 자기 형제자매들의 가슴 안에서 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요. 만일 당신이 아는 님이 한 사람뿐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소? 설사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 신이라 해도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에 미치지 못할 테니 당신은 판단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요. 그래서 사랑의 감미가 주어지고 나면 당신 자신과 훨씬 더 넓은 현실 범위에서 사랑을 추구하도록 잠시 배고픔이 주어지는 것이오. 당신이 자그만 자기 중심적 덮개 속에서 사는 건 신의 의지가 아니요.
신의 의지는 오히려 모든 현실을 당신의 놀이터로 삼는 것이오"
"왜 우리는 그토록 강력한 덮개 보호막을 만들어낼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그런 결단과 관련 환상들, 우리 삶의 목적을 해치는 것들에 집착하는 걸까요?
"그건 그것들이 에고의 허구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오"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에고는 당신이 자신인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그 모든 허구들로 이루어져 있소, 오늘날의 어법은 에고를 자부심과 자기 권능화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에고란 건 자신에 대한 허구를 중심으로 당신의 삶을 쌓아올리는 무상함이오. 영원이란 물결에 견디지 못하는 모래성처럼 그것은 아무런 실제적 힘도 갖지 못하죠. 역설적인 건 사적인 환상들일수록 자부심과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을 크게 파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요. 무가치함의 환상이나, 실제로는 숨겨진 계획이 있는데도 순교의 환상이나, 실제로는 두려움뿐인데도 순종의 환상처럼요. 에고의 중추 대부분은 자부심과 거의 관계가 없지만, 그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을 대신한 환상이오.
당신 자신인 사랑은 당신의 참된 자기 영광이오. 이 때문에 에고가 지배하면 참나에 대한 앎은 파괴되고 맙니다. 내가 '사람은 삶을 발견하는 데 삶을 바쳐야 한다고'말했을 때,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 삶은 에고를 중심으로 쌓아올려진 것이라는 유감스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요. 당신이 자신인 사랑을 알고자 한다면, 이 거짓된 삶은 근절되어야 하오. 에고가 무엇인지 알 때까지는 당신의 사랑 쪽을 억누르고 근절할 테지만요"
"우리가 사랑의 잠재력을 정화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고를 근절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한가요?"
"에고를 창조한 것 자체가 당신이 행한 가장 큰 희생이오! 이보다 더한 희생을 어떻게 행할 수 있겠소? 당신은 무슨 수로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거나 자신을 부정할 수 있겠소? 내가 항상 부탁했던 건 자비를 베풀라는 거였지, 희생하라는 게 아니었소! 자비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에고의 희생이오! 당신이 복수하려는 모든 욕구를 내려놓고, 자기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때, 당신이 정의를 가지고 장난치길 그만두고, 자신을 옳은 쪽으로 상대방을 그른 쪽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권능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단순히 어떤 상황을 지배하기 위해서 상대방에 반대하기를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때라야 당신은 자비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거요. 자비의 권능 앞에서는 에고가 살아남을 수 없소.
잊지 마시오. 에고는 당신인 사랑을 왜곡하고 대신하고자 하는 개인 차원의 환상이오, 가장 공통된 환상 중의 하나가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오, 자신에 대한 이런 발상으로는 절대 신에게 다가갈 수 없소. 그리고 인간의 하찮음을 신앙의 초석으로 사용하는 모든 종교는 자기 충전하는 속성을 가진 에고의 발달만을 촉진할 뿐이오. 당신은 사랑이오! 여기에다 개인적 관찰과 풍부함, 꿈,바람, 그리고 독특한 자질들도 보탤 수 있겠죠.
사랑에 비해 에고는 두려움을 먹고 자라고, 두려움의 매커니즘에 전적으로 휘둘립니다. 에고는 머릿속에서 고안된 것인지라. 소멸되기도 아주 쉽소, 에고는 현실의 빛을 받으면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죠. 이 때문에 그것은 구조와 계획이 안전판이 되는 환상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당신의 에고는 신에게 무척 화가 나 있소, 왜냐하면 신은 현실과 하나이고 당신의 참된 존재인 사랑의 근원이니까요. 내가 다시 돌아오면 염소에게서 양을 떼어내겠노라고 말했던 건 에고를 '참나'로부터 떼어내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겠다는 이야기였소! 이 진술은 내가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리란 뜻으로 잘못 해석되어왔소, 이런 해석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오. 왜냐하면 내 사랑과 내 진리와 내 선물은 모두에게 주어져왔으니까요. 나는 내 현존을 통해서 개개인 안의 '참나'를 강화할 것이니, 고집센 염소 같은 거위는 사라질 것이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의 권능은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크다.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랑의 권능을 입증했던 영웅적 성과와 기적 같은 위업들에 대해서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 중 하나는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것인데, 어머니가 운전석 문 밖으로 튕겨져 나왔을 때, 차는 전복되고 아이는 차 안에 갇히고 말았다. 차 문은 열리지 않고, 아이는 고통으로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고 여린 여자였지만, 그 다급한 상왛에서 자식의 생명을 구해야겟다는 사랑으로 헤라클레스 같은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차를 뒤집어 아들을 차에서 끄집어냈다.
이와 비슷한 믿기 힘든 이야기가 2차대전 중에 포화로부터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데리고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을 뚫고 나온 수녀들의 이야기이다. 단 한명의 생존자라도 있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건강한 상태로 그 지역을 탈출했다 이런게 사랑의 권능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 권능에 더 자주 접근하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적용하거나 믿지조차 않는다는 건 유감스런 일이다. 절박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의문과 주저들을 물리치는건 사랑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금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하는 이모든 일들 이상을 당신들도 해낼 수 있소, 이런 게 사랑의 위대함이오. 하지만 여기서 주의를 주고 싶은 건, 내가 말하는 건 당신들의 환상적 자아가 아니란 거요. 나는 염소 같은 인간 부분인 고집과 발명이 어떤 실제적인 힘을 가졌다고 믿게 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소. 그것들이 힘을 사용하고 뭔가를 고안해내고 환경을 더 영리하게 조작할 순 있지만, 그래봤자 자기 소모적인 것에 지나지 않소, 당신더러 내가 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는 건 사랑의 권능이오"
이 순간, 내 의식은 에고에 대한 예수의 사전, 설명이 없었다면 결코 떠오르지 않았을, 한 질문에 휘저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사람들의 몸이나 영혼에서 악귀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도 여러번 언급되어 있어요. 악령 몰아내기는 카톨릭 교회 내에서 여러 세기 동안 행해져온 의식이었고, 오늘날의 많은 믿을 만한 일상 연구들도 인간의 정신 내에서 성격분열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악령이란 건 에고의 일부인가요? 악령은 그 자체로 실제적이고 특정한 실제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 안의 기능장애를 인격화한 환상인가요?"
"글렌다. 그건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있소. 하지만 알아둘 건 존재와 있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거요. 당신이 자신으로 삼을 수 없는 온작 것이 당신의 문맥과 살아갈 이유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나머지로 당신의 삶을 둘러싸고 감쌉니다. 문제가 생기는 건 그 나머지 모두가 자신들 안에서도 또 당신과도 조화롭게 배열되지 않기 때문이오.
모든 것이 존재와 있음으로 창조되었소, 있음이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다중화할 때 확장된 잠재력에 대한 자각의 다양화가 있게 되죠. 모든 실존은 있음의 여러 권능들에서 발현됩니다.
모든 실존 측면의 심장부에 있음이 있소, 그리고 그것은 순수하여 모든 존재의 근원과 자신을 맞출 수 있소. 하지만 있음이 자율성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근원에서 몸을 돌리게 되면 부조화와 어그러짐이 일어나기 시작하죠. 물리적 장벽과 물질 밀도가 축적되는 데 따라 분리 정도도 다양해지고요. 직선적인 시간 경과를 통하는 경우 말고는 유동적인 상호작용과 조정의 가능성도 잃게 되죠. 이 때문에 과거와 미래에 대한 환상이 그 존재의 변화욕구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있는 건 오로지 존재뿐이고, 사랑뿐이며, 근원과의 일치뿐인데 말이오. 이런게 한 존재의 유일한 고향이오!
고향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 물질층들과 시간의 강과 통제의 경계선들이 그 인식을 한정하는 존재는 그의 실존에 배어 있으면서 그의 자유의지를 위협하는, 유형의 있음과 무형의 있음에 시달리고 사로잡힌 듯이 느낄 겁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는 자기처럼 이탈했거나, 길 잃은 이들을 끌어당기죠. 이런 결합들 대부분은 흔히 무의식적이요. 이따금 그런 어그러진 결합은 그냥 파괴적일 뿐이어서 누군가가 개입하여 그 결합을 잘라낼 필요가 있소, 이것이 내가 악령을 쫓아낼 때 했던 일이오. 악령이란 자신의 참된 존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애정 깊은 연결이 영향을 미치려 해도 쉽사리 응하지 못하는 길 잃은 영혼에 지니지 않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긍정적인 연결을 뒤집으려하죠.
하지만 아무리 길 잃은 영혼이라도 고개 돌려 자신의 근원과 고향의 불빛을 바라본다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조화를 되찾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오. 이건 모두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따라서 근원에서 얼굴을 돌리면 누구라도 부조화를 경험하지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연결할 새로운 근원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 거요. 방향을 잘못 잡은 그런 노력들은 결국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자신에게 아픔을 자겨다주고, 자신을 참된 근원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만들 뿐이오.
모든 존재의 본래 서약은 자신의 근원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소, 있음은 다른 존재들과 다른 생명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진화하지 않소, 역사는 그것이 체험의 저장소인 한, 현실적이오. 비록 당신은 지금의 자기 모습이 자기 개인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 대단히 억지스런 환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테지만, 누구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개인사가 제시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소, 그런 놀라운 모습은 대체로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 다시 불붙거나 그 사람이 사랑의 참된 상태를 되찾았을 때 나타나게 되죠
반면에 시간이 지날수록 소외가 더 심해지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사람의 품성은 무책임과 무의식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존재는 더 이상 현실을 다듬어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없기에 자신의 환상에 부합하는 현실을 꾸며내게 되죠. 역사가 교훈과 과제와 곤란들을 되풀이하는 게 이 때문이요. 역사에 걸쳐 산재해 있는 성공과 승리와 실현은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를 넘고 올라선 의식과 행동의 결과요.
역사란 부분적으로 완료된 체험들과 함께 기억 속에 담긴 채 다시 삶과 재통합해줄 적절한 조건들이 나타날 때까지 유보되어 있는 삶에서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지점과는 관계 없는 부분이오! 그것은 당신이 잠시동안 내려놓았던 그 무엇이오.
이제 이 새로운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시오. 당신이 자기 존재의 참된 천성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세속적인 시간관념을 뒤집어야 합니다. 세상은 역사와 시간 흐름이 현재를 발생시키고 권력의 토대를 세우는 유력한 힘이라고 여기죠. 이런 논리에 따르면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준 건 분명히 과거요. 이에 비해 참된 존재의 관점은 과거를 관련된 무기력으로 추락하고 만 경험과 교육과 목표와 소망들의 파노라마로 보죠. 말하자면 당신이 과거를 추락시키는 것이지, 과거가 당신을 생산하는 게 아니오! 존재의 무한성을 생각한다면,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렇다면 미래란 건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며 내가 물었다.
"미래란 당신이 다시 기억해내고 추구하여 완결하겠다는 약속이오. 이렇게 추구할 때 무한한 잠재력이 당신의 필요와 갈망과 교훈과 배열들을 지원할 것이오. 마침내 당신이 참된 완결은 언제나 있어왔고, 집착만이 아니라 욕구까지도 털어버리는 것으로 다시 얻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요."
내가 입을 다문 채 이 놀라운 대답을 내 가슴과 의식 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노라니, 그가 있음이라는 주제 전체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것도 너무나 단순명료하게 설명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경악했다. 나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압도되었다. 내가 느낀 것은 내 자각이 무한한 영의 확장을 통해서 넘쳐흐를 때 느끼는 흠모와 유사했고, 내가 본 것은 합일된 연인으로서 우리 모습이었다. 이 완벽한 존재 상태에서는 그것을 더 권능 있게 하는 데 더 이상 어떤 말이나 개념도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완벽 자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해 욕구 중 가장 고귀한 것이 이런 상태로 복귀하는 것일게다 결국 내 생각은 교훈과 과제가 기다리고 있는 지점인 이 현실의 실존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런 실제적인 문맥 안에서 나는 허구적 자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당신의 허구적 자아는 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별다른 힘이 없소, 사실 그것은 진리의 빛을 쬐면 아주 쉽게 바스러지기 때문에 안전지대와 보호거품,지속적 긍정이라는 보호막 안에서만 견딜 수 있소, 현실은 여러 실존 차원들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살아있고 공명하는 삶의 흐름이오. 현실은 개개 존재들을 존중하고, 그 사랑에 공명하죠. 당신들은 언제나 필요와 목적에 따라 현실을 모양짓도록 권유받고 고무받고 있소, 하지만 현실을 모양짓는 것과 현실을 발명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소, 그차이를 배워 허구적 자아가 당신을 무효화하는 허구적 현실의 창조자임을 아는 편이 현명하오"
이것은 현실을 모양 짓는 것과 현실을 발명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한 예수의 두 번째 언급이었기에 내가 물었다.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현실을 모양짓는 과정은 여덟 가족이 주인으로 거쳐간 50년된 집의 일생에 비교할 수 있소, 처음에 그 집은 농가였소, 두번째 주인은 그 집을 빅토리아풍으로 장식했소, 나머지 여섯 가족들도 집의 모양을 바꾸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에초의 농가식 주택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죠. 어쨌든 아무리 스타일이 바뀌었더라도 그 집은 언제나 같은 집이었소. 다만 여덟 가족의 서로 다른 선호와 기쁨과 즐거움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장식과 배치를 다시 했던 것뿐이죠. 현실을 모양 짓는 건 쉽고, 이롭소, 현실은 허구적 현실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자신의 연인이라면 존중하고 지원하면서 공명하니까요.
반면에 발명된 현실은 아직 이르지 못한 성공을 흉내내기 위해 자기 능력을 넘는 집에 세를 드는 것과 같소. 누구라도 허구적 성공을 이루려고 애쓸 때는 행복하지 못한 법이죠.
사랑으로나 사랑을 존중하면서 구하는 모든 기도는 대답을 받겠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에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허구를 행복한 결과로 만들기 위해 하는 기도에는 응답하기로 서약하지 않았소, 당신의 창조주는 현실과 하나인데, 어떻게 그 자신인 사랑과 현실과 더 멀러지려는 기도에 답할 수 있겠소?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이해와 현실을 다룰 능력을 더 키워달라고 기도하면, 당신의 모든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고, 그것도 자주 극적인 응답을 받을 것이오.
신은 당신의 환상을 느긋이 참고 지켜볼 것이오. 부모가 아이의 발명에 인내하고 자주 웃어넘기듯 말이오. 아이가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을 때, 그 부모는 아이의 손재주와 상상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소? 다만 그 허약한 창조물이 씻겨갔을 때, 그건 단지 스쳐가는 공상에 불과하고 나중에 겪게 될 상황의 놀이 체험에 불과하다는 걸 아이가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더 중요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빼고는요.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도 이와 다르지 않소.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기도는 '제발 아버지시여. 제 모래성을 구해주십시오'란 식이요. 거기에 아버지가 대답하실 수 있는 건 '내 자식아. 너는 모래성과 진짜 토대 위에 몰타르와나무로 지어진 집과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네 모래성을 구해준다면, 무슨 수로 네가 그 차이를 배울 수 있겠느냐?"뿐 아니겠소?"
신과 현실을 강조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한 성경 구절을 이참에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로서는 찬송가11장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의 시작이다'라는 구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신이 오직 사랑이라면, 어떤 식이든 두려움을 그 동기로 삼는 신성이란 게 상상이 안 되거든요"
"신은 사랑이오. 그리고 당신의 가슴은 그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옳소. 성경에서 신과 관련된 '두려움'은 '존중'을 뜻하는 거요. 거기다 신이 현실과 하나임을 전제로 하면, 당신은 이 가르침에 대단히 실용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오. 이 메시지를 '현실에 대한 존중은 지혜와 앎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생각해보시오. 좀더 쉽게 이해되지요?"
"신은 사랑이오. 그리고 당신의 가슴은 그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옳소. 성경에서 신과 관련된 '두려움'은 '존중'을 뜻하는 거요. 거기다 신이 현실과 하나임을 전제로 하면, 당신은 이 가르침에 대단히 실용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오. 이 메시지를 '현실에 대한 존중은 지혜와 앎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생각해보시오. 좀더 쉽게 이해되지요?"
"예, 그래요"
"일단 당신이 신을 현실과 하나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현실은 안락함과 깨달음의 근원이 됩니다. 현실이 당신의 사랑을 돕는 종복이 되는 거죠. 두려움을 가지고 현실을 대할 때 그렇듯이 불만의 대리인이 되는 게 아니라요"
내가 다시 예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현실과 발명의 차이를 알아서 그 둘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위험이나 배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소, 항상 경계해야 하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에고야말로 위험과 배신을 끌어당기는 가장 강한 자석임을 알아두시오. 당신을 속이기 위해 보내진 것들은 어느 것이나 정확히 당신의 에고나 당신의 마음을 향해갑니다. 그건 에고가 자신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것이면 뭐든 참이라 여기기 때문이오. 마음이 논리의 우위성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참이라 여기듯이요. 사실 마음은 사실과 허구가 똑같은 논리로 제시되면 그 둘을 구별할 수 없소.
이 둘은 식별해내는 건 고귀한 의식의 일부요. 판단에서 한걸음 올라선 게 식별이 아니오. 삶의 커리큘럼에서 식별은 판단의 반대요. 인간은 판단을 통해서 자신이 아직 대면해야 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반면, 식별을 통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마스터했는지 밝히죠.
당신의 가슴은 언제나 무엇이 참인지 알고 있소, 비록 살아가는 동안 세부상항들을 배워나가긴 해야 하지만요! 현실은 본능적으로 사랑에 반응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강제를 써서 현실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소, 용기를 가지시오. 현실은 작용하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현실은 잠재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이 굳이 설득하거나 유력인사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소. 현실은 똑같이 모두의 것이오 따라서 공인된 허가나 특별 교육이나 독창성 같은 것도 필요없소.
현실은 정직과 무구함, 접근가능성에서 최고치를 기록합니다. 가장 작고 가장 무구한 아이에게까지요. 당신은 그냥 현실이 신과 하나님을 알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만 가지면 됩니다. 가슴스스로가 자신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서 진리를 알아보니까요.
당신 가슴은 신의 사랑과 하나이고, 신은 현실과 하나요. 당신은 신과 사랑과 현실과 세 꼭지점으로 갖는 삼각형으로서 진리를 규정할 수도 있소, 진리는 사랑과 현실이 신 안에서 하나 되는 지점이오. 진리가 필멸의 존재인 모든 장애와 한계와 갈등과 문제의 보편 용매인 이유가 이것이오. 진리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진리가 다치게 하는 건 에고이지, 절대 사랑 가득한 당신 자신이아니오, 진리는 최고의 의식이고, 현실 속에 영원히 머무는 신의 현존이오.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사랑과 일치하는 진리를 알 것이오.
진리는 사랑이 현존할 때에만 드러납니다. 화난 사람이 정직한 경우를 본 적이 있소? 어떤 진리에 당신이 접근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사랑을 침해함으로써 그 진리를 질식시켰기 때문이오. 참된 친구나 참된 사랑의 위대한 가치가 이것이오. 그나 그녀의 현존 앞에서 진리는 눈부신 계시요. 이런 게 당신을 자유롭게 할 진리요.
만일 당신 다른 사람에 대해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시오. 오직 한 영, 한 신, 모든 현실이 거하는 한 토대밖에 없소. 인식의 자유와 현실에 대한 관점의 자유를 주는 건 아버지의 기쁨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들의 목적이 현실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확장하고 인격화하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오"
오늘날 사회의 심리적 사회적 전문어와 은어들에는 자기 나름의 현실을 창조할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개념과 사상들이 배어 있다. 내가 예수에게 이런 믿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관점들이 미묘하고도 중요한 차이들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위대한 보편 현실은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단언했다.
"현실에 대한 관점의 권능을 평가절하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당신의 관점은 당신이 보기를 바라는 상황으로 당신을 데려갈 테니까요. 이처럼 현실에 대한 관점은 당신의 삶을 경영하는 중요한 열쇠이긴 하지만, 현실에 대한 관점이 공동 실존의 보편 바탕을 대신하지는 않는다는 걸 잊지 않는 게 현명할 거요"
당신은 이것을 특정한 풍경을 그리기 위해 같은 장소에 모인 열 명의 화가가 다양한 결과물들을 내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화가들의그림을 본 관찰자는 그들이 열 군데의 다른 장소에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각 화가들의 독특한 해석 때문이다. 이처럼 그 표현들 각각이 특이하고 각자의 인식으로 풍부하긴 하지만, 당신이 표현필법 너머를 보면서 그려진 여러 소재들에 찬찬히 집중하다면, 공통의 현실을 발견하리란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실과 현실의 창조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덕분에 일찍부터 신에게 호의를 보였소, 오직 하나의 신, 하나의 영, 하나의 응집된 현실 토대만이 존재한다는 이런 이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지혜를 주어 세계 역사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게 했소,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무렵, 종교 교리는 영적인 지침으로서 보다 구조에 더 많이 봉사하기 시작했소, 이스라엘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변절이나 강제에 의지하지 않는 한에서 이스라엘은 신에게 진실된 믿음을 보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실과의 접촉을 잃었고, 그녀에게 부과된 고난들 때문에 가슴들이 사랑에 등들 돌리기 시작했소.
이것은 오늘날의 다수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교리와 신의 말을 살펴보지만, 너무 많은 경우 현실로부터 떨어진 안전지대를 설정하는데 자신들의 믿음을 적용하죠. 그렇게 되면 삶의 고난은 늘어가고 가슴들은 사랑에 등을 돌리게 되죠. 그렇게 해서 더 큰 이해를 잃고 마는 겁니다.
사랑은 현실을 지휘하고 현실은 신부처럼 사랑에 고명하오. 당신은 나와 똑같은, 신의 사랑하는 님이오. 만일 이 축복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보호막 밖으로 나와 허구적 자아가 현실의 빛에 부서지도록 놔두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신의 권능을 물려받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인 사랑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당신은 신의 사랑하는 님이니, 두려워마시오. 신은 당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다가 땅으로 떨어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오. 죽어가는 건 허구적 자아와 당신이 그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써왔던 윤색들뿐이오. 그것은 오로지 죽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필요악이오. 따라서 당신이 자신의 허구적 자아를 죽이기로 결단한다면, 당신은 이미 불멸의 의식을 회복하는 쪽으로 첫걸음을 내딛은 샘이오. 그러고나면 신의 사랑과 자비가 당신의 자녀 의식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회복될 때까지 다음 걸음을 끌어가줄 것이오.
이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완결되는 사람도 있지만, 좀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오. 이것은 어떤 아이들은 하룻밤 새에 성인이 되는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몇 년씩 걸리는 것과 하등 다른 게 없소. 그런 발달은 선호나 계층이나 지위의 결과가 아니오 개개인마다 그 성장곡선이 독특하기 때문이오."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허구적 자아가 무엇인지를 요약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내 청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허구적 자아란 당신이 자신이 사랑임을 잊었을 때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것이오. 여기에 그런 잘못된 관념을 윤색하기 위해 사용했던, 온갖 발명된 현실들을 포함할 수도 있겠죠. 무릇 모든 것은 문맥을 가져야 하오. 에고조차도 말이오. 개성의 허구적 측면을 참된 실존과 혼동하면 '나는 누구지? 이런 발명품이 어떻게 현실과 통합될 수 있지? 무슨 수로 현실에 뒷받침되지 않는 이 자가 발명의 요소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지?'라는 식의 의문이 떠오르지요.
실존은 진리를 드러내기 마련이어서. 그것이 진실로 당신 아닌 것을 부수도록 돠둔다면, 그것은 당신의 진리를 지키는 위대한 수호자일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도전과제들과 계시들을 무시하고 의도적인 속임수로 자신의 발명된 현실을 고집스레 주장한다면, 당신은 죄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오. 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냥 발명한 현실을 뿌리내리고 권능 있게 하는 데 사용된 강제와 해악에 지나지 않소. 그런 투자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당신은 그만큼 신에게서 멀어집니다.
세상은 엄청난 에너지를 판단에 낭비하고 있지만, 판단이란 건 발명된 현실을 놓고 다투는 경쟁에 다름 아니오. 사랑은 판단하지 않소, 판단은 지위를 놓고 다투는, 에고의 잔혹하고 유치한 게임이오. 그 밑에 깔려 있는 말로 밝히지 않은 교활한 의도는 판단을 지속시키는 데 성공하면 판단을 능가할 수 있다는 거요 이건 사실이 아니오. 진실은, 에고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지도 않으리란 거요. 용서를 유보하는 건 삶에 대한 에고의 공격이오. 오직 에고만이 판단하고, 판단을 통해서 죽어갈 것이오. 반면에 당신의 불멸성을 유지해주는 건 당신 자신인 사랑이오. 사랑은 판단이란 걸 전혀 모르니까요.
판단은 인간의 원죄였소,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이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가 이것이오. 판단이 불러오는 즉각적이고 불가피하고 불가결한 결과는 판단 대상에게서 분리된다는 거요. 그리고 창조주가 당신의 판단 대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창조주에게서도 분리되고요. 판단은 신과의 분리가 터무니 없이 엄청난 현실적인 문제가 될 때까지 스스로를 확대하고 배가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분리된 존재는 자신의 근원을 의식하지 못하기에, 끝없이 자신의 창조라는 과제를 추구하게 되죠.
오랫동안 분리를 잊는 일만 없었다면, 또 그 망각으로 인해 빚어진 다양한 밀도의 쓸데없는 동일시만 없었다면, 영혼은 결코 헤매지도, 잘못된 행동을 고안해내지도 않았을 거요. 세상이 죄라고 일컫는 것들은 결국 판단과 판단에서 비롯된, 신과 현실과 형제애로부터의 분리라는 진짜 죄의 비극적 귀결이오.
모든 잘못된 행동은 서글픈 일이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죄로 여기는 것은 단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오. 인간이 형재애 속에서 함께 산다면, 부도덕은 묵과될 수 없소, 하지만 그렇다고 부도덕을 비난하는 건 판단의 악순환에 빠질 뿐이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요. 만일 모든 판단을 그만두고 용서의 정신을 발휘했다면, 인간은 은총을 입어 자신의 무구함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내가 개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오"
예수가 여기서 말하는 개입이란 기적으로 가득한 그의 인생 목적을 일컫는 것이다. 이 위대한 기적은 그의 출생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저 유명한 기적들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다. 예수가 세상을 떠나고 300여 년 동안 이 기적들은 무구한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전해졌다.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윤색이 가해지고 지적인 과장이 이루어졌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가 생겨나기 전에 신념이 있었고, 세속의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어떤 앎에 이끌린 헌신의 추진력이 있었다. 역사를 그냥 흝어보기만 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의 유산은 지상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삶에 접촉케 만들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기적이다.
예수가 방문했던 그 시기에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천사 수태와 육신 부활의 문제를 놓고 몹시 궁금해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나눔이진행되고, 편안하고 자연스런 이해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관심의 중요서은 점점 줄어들었다. 물론 더 넓은 이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한편에서 나는 그의 일생이라는 그 장대한 기적을, 구성 부분을 이루는 기적들-그것들이 내게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상관없이-이 충분히 발현한 것으로서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현상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현존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2천년 전에 놀라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 분명하다. 지성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예수는 아무리 작은 기적이라도 본래적이고 원초적이며 신성한 실존 차원에서 고안된 것이라는 점과 모든 기적은 실존이라는 직물 안에서 조정이 벌어지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을 확고히 했다. 현실과 이해 사이의 여백에 우리가 집어넣을 수 있는 설명들은 그 가치와 신뢰도에서 봤을 때 미신에서부터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설명들이다. 가장 미세한 현상조차 그것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가장 세밀한 묘사로도 따라잡지 못하는 실존의 권능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면서 자주 간과하는 사실은, 우리는 실제로는 절대로 '있는 그대로' 보여질 수 없는 어떤 실존의 성격을 탐구하고 평가할 뿐이라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가장 쓸모 있고 효과적인 방식이 E=me2이라는 등식이다. 하지만 앞으로 백년 후라면 우리는 같은 현상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
삶의 상수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해석 밑에 깔려 있는 실제적 잠재력 속에서 찾아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의식과 체험이 전진하는데 따라 명확화도 높아진다. 이 때문에 증명할 수 있는 믿음들과 증명할 수 없는 믿음들이 서로 나란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기적의 발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우리 지성에 기여하기 위해서나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넘어서 이해를 도모하려는 욕구를 끌어올리는 데 있다 할 것이다.
내가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대화에서 '동정녀'라는 단어를 예수는 대단히 '사실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마치 그 개념이 그의 의식속에서 자연스런 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어조나 표현방식에서 볼 때, 자신이나 자신의 어머니를 종교 교리에서 말하는 위치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분이 말할 때, 나는 세속의 감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걸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계시로 무척이나 고양되고 감동받고 심지어 흔들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동정녀'라는 용어가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를 글자 그대로 표현 한 것인지 아니면 유덕하고 무구한 한 여성 안에 진실로 존제하고 있던 '순결한 개인적 잠재력'이라는 더 넓은 개념을 포괄하는 단어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중에 나는 예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이 주제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예수가 내게 준 유일한 대답은 이러했다.
'내 출생의 생물학적 측면 중에서 당신의 이해와 정말로 관련이 있는 건, 그 당시 일어난 인간 DNA 의 변화뿐이오. 이 변화는 소리 굽쇠의 마스터키처럼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수세기 동안 이어져갔소, DNA는 육체적인 사랑의 전달자요. 따라서 그것은 자신에게 제시된 모든 사랑의 자질에 순응합니다. 바로 이 고귀한 사랑을 정력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창조주가 준 성스런 가슴 안에서 일어나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퍼저가는 진동이오.
내가 2천년 전에 지상에 왔을 때 나 역시 기본 잠재력에서 당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소. 다만 나는 아버지와의 분리란 걸 모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자신을 알지못했으며, 자신에 대해 한번도 허구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빼고는요. 나는 동정녀에 의해 수태되는 게 필요했소, 그건 내가 일반적인 인간수태 방식을 피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오.
유기체의 DNA는 사랑의 복잡하고 신비한 작용을 지휘하도록 설계되어 있소, 그 중에서도 인간의 DNA는 아주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작용들을 조절하고 지휘하도록 설계되어 있소, 당신이 사랑의 그런 작용을 가속화하면, 당신의 DNA도 그에 따라 변합니다. 내 경우에 분리 상태에서 생산된 인간의 DNA를 사용하는 건 흡사 폭스바겐 자동차 안에 로겟 연료를 넣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거요. 말하자면 그런 몸과는 그냥 결합할 수 없었던 거요. 게다가 내가 분리를 체험할 때는 아직 오지 않았고요. 나의 수태에서부터 십자가에 매달리 때까지나는 내가 체험하기로 동의했던 분리를 준비해갔소. 이 때문에 내 어머니의 임신은 정상적인 것이었고,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내 성장도 통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십자가에 못 박힌 내 희생의 핵심은 내가 당신들을 위해 죽은 데 있다기보다는 내가 당신들을 위해 분리한 데 있소. 죽음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내 불멸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죽음의 고통은 사랑으로 순식간에 중단될 수 있었으니까요. 인류에게 준 내 선물은 내가 체험하고자 선택했던 분리였소, 인간의 분리는 예외 없이 사랑의 근원이자 현실인 신에게서 벗어난 데 그 이유가 있소, 인간이 개인적 허구 및 에고의 투영물에 헌신함으로써요. 개인적 복안과 발명된 현실에 대한 인간의 뒤집힌 추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자신인 사랑을 잊게 만들었소. 나는 사랑의 행동으로 분리했소. 그렇게 되면 사랑이 분리 상태와도 결합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해묵은 신과의 분리도 끝날 수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죽었소,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원리들에 대한 존중에서 형제를 위해서나 자유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소, 많은 성인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죽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고통받았소, 하지만 당신들을 위해 분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사랑은 분리와도 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그렇게 함으로서 분리라는 사실이 단순한 환상으로 전락하리라는 사랑의 정신으로 분리했소, 내가 분리한 사건은 내가 아는 한, 내 실존 전체에서 최극단의 비애였소.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세상의 모든 분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잠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체험을 했소,
이제 은총의 법칙에 따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자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뿐이오. 내가 온 인류에게 조건 없이 준 영원한 기적이 이것이오. 그것은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기적이오. 근본적으로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예전에는 분리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였소. 하지만 이제 그것은 누구라도 진리의 검을 집어들고 베일을 가르는 것으로 끝낼 수 있는 환상에 지나지 않소.
내 죽음이 불러일으킨 기적은 분리를 판단이 아닌 사랑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분리를 끝냈다는 것이오. 내 부활의 기적은 내 몸이 온전해 졌다는데 있지 않고, 인간이 신과 함께 하자 온전해졌고, 분리가 일개 환상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소,
이런 변신은 이제 자신이 사랑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하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환상을 지속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선물을 받아들일 수도 있소. 이것은 지금 인류에게 존재하는 잠재력의 변화에 주목하는 사람 모두에게 무료로 주어진 아버지와 나의 선물이오.
나는 그 선물을 준 사람보다 선물 자체가 더 높이 받아들여졌으면 합니다 준 사람이야 그 선물의 은총을 음미하면서 받게 되면 결국 찾아내게 될 테니까요. 내 많은 친구들과 내 지지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요. 왜냐하면 그들은 내 영광을 지키려 하니까요. 단ㄴ순히 그 선물에 대한 이햑 부족하거나 준 사람이 그들에게 억지로 떠넘겼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회피하게 되는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오. 오히려 나는 그 반대였으면 하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그 선물을 이해하고 널리 받아들였으면 좋겠소.그건 무료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졌소.
오늘날 흔히 간주되는 방식에서 개인의 구원은 내가 요구한 것도 내 사도들이 가르친 것도 아니오. 인간이 구원바든 건 그 자신의 복귀에 위해서이지, 내가 그런 복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오. 구원인가. 모험인가를 결정하는 핵심 고리는 언제나 자유이지요. 판단하고 분리하고 자신을 그릇되게 창조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오.
이제 각자가 자기 나름의 복귀를 추구할 때가 왔소. 낸가 여러번 말했듯이 인과의 법칙이 구조와 물질 실존에 영향력을 휘두르지만 그것이 당신까지 묵고 있는 건 아니오. 물론 모든 물질형상들을 관리하고 동의 없이 극각적이고 정확한 반응을 가져오는 단일정신의 평형이란 건 있소, 또 행동에 대한 결말이란 것도 있소,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로, 그의 자녀들은 그 결말들의 성격에 대해 자유의지를 부여받았소, 당신들을 구원하는 건 언제나 은총과 선택이오.
사실 내가 인류를 위해 했던 일은 유례 없는 선물이었소. 나는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고, 당신 자신인 사랑에 대한 앎으로 돌아가고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소. 분리는 이제 이발 없는 상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꿰뚫을 수 있는 환상이오. 그럼에도 두려워하면서 해변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자신의 판단과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같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상어가 이빨 있는 상어가 될 수도 있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증오로 인해 영적으로 다시연결하길 여전히 두려워할 것이오.
내 선물의 필요성을 야기했던 인간 조건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건 인간들이 빠졌던, 판단이라는 왜곡된 순환이 자유의지를 사실상 붕괴시켰다는 데 있소, 물론 어느 세대나 완전 의식 속에서 신에게로 돌아갔던 헌신적이고 덕성 있는 소수의 영혼들이 있었소. 안타깝게도 대다수 인류들은 이렇게 할 수가 없었지만요. 자신들의 성스런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인간읫기에 더 큰 명확성과 지비의 유산을 남겨놓았소,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스런 상황는 여전히 지속되었죠"
예수가 즉각 확인해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내가 깨달았던 건 이지점에서였다. 어느 누구도 완벽으로 진화할 수는 없다! 완벽은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원래 상태다! 꿰뚫는 명확성을 가지고 나는 개인의 진화를 믿는 것이 왜 함정인지 알 수 있었다. 진리는 언제나 상수이기에. 진화할 수 있다는 건 다만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깨달음을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예수의 설명과 결합핮. 예수는 초월을 이루는 지점으로 영적 개인적 진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는 사시리이 갑자기 명확해져싿. 예수는 무국함의 우대한 권능이 인간 본래의 타고난 존재상태임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의 이름으로 의도적인 분리를 추구하고 있음을 처음부터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가 앞서 또 다른 생으로 지상에 온 적이 있는지 묻고 싶은 생각도 들디 않았고. 또 그럴 기회도 갖지 못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따금 세상에 와서 인간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십중팔구 사실일 테지만, 또 분명한 건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 위대한 계시는 그가 어떤 식으로 우리와 함게 있었는가에 관계없이 그건 언제나 무구함의 정신에서였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똑같은 무구의 정신으로 돌아감으로서 우리는 사랑의 권능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랑이 복구되었음을 깨닫는 데는 며천 가지 방식이 있을수 있소....그것은 평온한 가슴으로 올 수도 있고,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아이의 입맞춤으로 햇살반짝이는 봄날 아침으로 올 수도 있소, 그것이 보편적으로 뜻하는 바는 신의 사랑이 현존한다는 거요. 사랑이 잠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염려하지 마시오. 그건 그냥그런 식으로 보일 뿐이오. 당신이 그걸 다시 추구할 수 있도록요. 사랑은 신비요. 우주의 가장 위대한 신비 말이요.
사랑은 당신의 참모습이고, 규정 불가능의 영속하는 존재의 샘인 신에게서 솟아납니다.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에 무엇이 혹은 누가 그 불꽃을 점화할지는 알 수 없소. 또 반대로 당신이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의 불꽃을 점화하게 될지도 알 수 없소, 세 사람이 함께 여행할 대 처음에는 무리의 한 사람이 더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참된 친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소?
사랑은 선물이고 깆거이며 신비요. 당신이 그것의 문지방으로 이끌리는 것은 당신과의 유사성과 당신의 경향성과 당신 가슴의 갈망 때문이오. 비록 사랑의 권능은 기대나 요구, 필요가 아닌 은총에 의해 드러나지만요. 사랑은 궁극의 역설이오. 사랑은 사자이기도 한 양이니까요. 사랑은 순종 속에 거하는 궁극의 권능이오...
사랑의 권능은 그것이 성스런 에너지와 성스런 자각의 영원성 속에서 시공간이 하나되는 제로점을 지휘한다는 데 있소, 이 거룩한 제로점에서 신은 새이자 미풍이고, 나무이자 흙이며, 배이자 강이고 양이자 사자요. 자신의 사랑 권능 내에서 살 때, 당신은 이 제로점을 경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항은 무너지고 맙니다.
거기에서 거룩한 지금 순간의 모든 이중성은 역설의 기적으로 귀착되죠. 당신은 주는 것으로 받을 것이고, 손에서 내려놓는 것으로 손에 넣을 것이며 용서하는 것으로 용서받을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것이며,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것이오. 사랑의 현존 속에서 일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고, 사랑없이 줄 때 그 선물이 낭비가 되는 이유가 이것이오. 사랑의 신비와 기적은, 사랑은 어떤 대립도 생생한 역동적 역설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있소, 예를 들어 몸의 질병이 영혼의 치유를 불러올 수 있고 경제적 손실이 새로운 삶과 비전의 촉매가 될 수 있소.
사랑이 당신을 위해 꽃 필 대마다 그것에 감사히시오. 그 사랑하는 님을 바라보시오. 그 사람들과 그 상황들은 당신의 친구이고, 당신의 기쁨이 존재하는 지점이오. 사랑을 보지 못할 때라도 적이나 적대 상황이 있다고 예단하지 마시오. 만물과 만인이 다 같은 부류요. 그것들을 축복하고, 그것들을 존중하며, 필요하다면 용서하시오. 무엇보다 사랑을 강요하거나, 사랑이 없다는 죄의식을 심거나,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마시오.
사랑은 강요될 수없소, 사랑 없음 또한 똑같은 감사와 겸손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오. 왜냐하면 그 또한 펼쳐가고 있는 신의의지의 일부이니까요. 사랑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함께 일할 시간이 안직 오지 않아서거나 어쩌면 지나가버렸음에 불과하다는 상호이해로 많은 갈등들을 피해갈 수 있소, 그 대신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는 상대방들을 축복하시오. 왜냐하면 사랑이 현존하지 않을 때에는 겸소과 내려놓음으로 그 짐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소. 사랑은 모든 면에서 수수께끼요
사랑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외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포괄적인 규정이라도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소. 사랑은 신이고 성스런 수수께끼니까요. 사라은 통제될 수없고, 예견될 수없으며, 강요될 수 없고, 묶여 있을 수없으며, 말살될 수 없고, 규정될 수 없소 만일 당신이 사랑의 깊이와 권능과 신비와 무한한 자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모든 이분법을 끝내는 그것의 자질에 대해 생각하시오.
사랑은 대립물을 갖지 않소, 사랑을 사로잡을 수는 없지만 사랑은 기꺼이 봉사합니다. 사랑은 무한하게 자유롭지만 포로로 머무릅니다.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모든 법칙의 토대요 사랑은 진리를 가져오는 자이지만, 결코 판단하지 않소, 모든 상황의 예언자이지만, 절대 비난하지 않고요. 그것은 순종하는 것으로 정복하고, 끌어올리는 것으로 지배합니다 역설로 존재할 수 있는 그것은 신비스런 자질이 모든 이분법을 끝내게 만드는 거죠.
만일 당신이 사랑의 작용에 대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역전이로서 그것에 대해 생ㅇ각하시오. 다시 말해 제3의 안정요소가 있는 속에서 보완하는 두 힘이 양식을 바꾸어 하나가 다른 하나가되는 작용점을요. 궁극의 입자가 실험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오. 그것은 모든 일차 입자들과 에너지 사이에서... 그리고 사랑에 관계하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작용이오. 사랑의 작용을 좀더 잘 이해하고 나면, 수수께끼는 저절로 물릴 것이오"
그는 확실하게 말했다.
"사랑이 우리의 DNA를 바꾸지, 그 반대가 아니오. 생물공학으로 DNA를 바꾸면 인류가 더 높은 차원으로승격되리라고 생각하는 악순환의 함정이 될 수있소, DNA가 바뀌게 만드는 기술자는 사랑이오. 이것을 가속화시키는 데 주요한 장애가 되는 것이 에고이고요. 에고에는 그 사람의 방어기제가 담겨 있거든요. 에고는 사랑의 에너지가 당신의 삶에서 일으킬 수 있는 치유와 기적을 불러오지 못하게 막고 있소.
에고는 언제나 통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고의 성질 깊은 곳에는 무가치하다는 느낌과 좌절감이 있기 때문이오. 수수께끼 같은 프라이버시라는 것 안에 봉해져서요. 좌절감도 무가치하다는 느낌도 다 거짓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창조로 강화되면 그것드은 진짜처럼 보일 수 있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에고야말로 모든 실패의 근원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항하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불러올 테니까요. 에고가 역설과 역전의 불안을 참아낼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 자신이 누군지 알고 나면, 당신이 사랑의 무한한 잠재력으로 돌아가는 순간, 에고도 불안도 다 사라지고 말 것이오.
이 장으 다른 많은 메시지들처럼 이 메시지도 1992년3월12일에 이야기된 것이다. 그날 그림은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어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누리할 부분을 찾는 데 썻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예수와 이야기하면서 보냈지만, 이제 얼마 안 있어 일어날 눈앞에 닥친 변화에 대해 말없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사계를 보았을 대의 시간은 이미 4시30분이어서. 얼마 안 잉ㅆ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할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흩날리는 그의 머리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더 보탤 요량으로 물감 몇 가지를 재빨리 섞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팔레트에서 얼굴을 들자 예수의 모습과 내 눈을 연결해주던 에너지끈이 없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예수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 형상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그가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이 위대한 국면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림은 완성되었지만, 그는 그대로의 명확성을 가지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양으로 온 사자이자 사자로 울부짓는 양이오. 나는 지상에 풀어놓아진 사랑의 생생한 역설.... 그것의 이중성을 끝내는 힘이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퍼져갈 때 그는 타는 듯하면서도 평온한 눈길로 나른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 혼자만에게가 아니라 당신과 인류 전체에게.
"그리고 당신들은 나의 연인이오"
[출처] 끝없는 사랑 547쪽 예수가 즉각 확인해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내가 깨달았던 건.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제15장 사랑하는 이여
사랑
2021. 10. 5.
이 멋진 아이가 이천 년 전에 태어났을 때 요셉은 그를 예슈아라 부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것이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이 그토록 축복했던 그의 히브리어 이름이다. 예슈아란 이름은 나중에 인간에게 알려진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그를 예수(Jesus)라 부른다. 하지만 나머지 모두보다 더귀한 보통명사가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던 덕분에 나는 더 높은 자각과 함게 그냥 '님 The Beloved" 이라는 이 거룩한 이름을 아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이름의 의미를 좀더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사랑이고 성스런 신비의 후예로서 우리 또한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지 우리의 현재 조건 때문에 거룩한 문맥 안에서 우리 자신의 기억해내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에서 너무나 멀리 떠어져 있어 우리 자신이 예수와 다르고 사랑과도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유감스런 상황이 생겨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거울에 비쳐진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알고자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과 평가와 의견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수는 이것을 '반사율'이라고 불렸다.
왜 불꽃이 자신의 타는 것을 보기 위해 옆으로 비켜설 수 없고, 왜 물이 자신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없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영원한 미스테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미스테리에 순응하는 것이 환상으로 가득한 그 어떤 반영보다 더 많은 지혜를 낳아준다 일단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자기 가치를 외적으로 쌓을 필요는 더 이상 없어진다.
예수는 단언했다.
"스스로 노력하기도 하고 남들의 노력을 빌리기도 해서 사랑을 알고자 하던 당신들은 사랑을 상품으로 여기는 법을 배웠소, 말하자면 행동이나 외적인 것으로 사랑을 생각하도록 배운 거요. 하지만 사랑을 외적인 것으로 보는 그런 발상들이 당신들을 판단과 분리로, 특히나 자신으로 부터의 분리로 데려갔소. 자신의 사랑을 아는 가장 참된 방법은 반사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에게서 느끼는 기쁨에서요. 이런 기쁨은 사랑의 현존에서 느끼는 영혼의 기쁨이오. 당신이 뭔가를 기쁨으로 체험할 때 마다 당신의 사랑 잔은 넘쳐흐릅니다. 당신은 자신의 기쁨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게 되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삶이라는 물결 위에 던질 때 당신의 영혼성을 알게 될 거요"
그의 현존에는 넘쳐흐르는 사랑이 있었다. 만족과 행복의 오라로 빛나는 그의 얼굴은 기쁨을 발산했다. 그는 자주 만면에 웃음을 띄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한번도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본 적이없다는 사실이 나를 사로잡았다. 대다수 사람들이 나를 친성적으로 유머러스 하고 쉽게 사람들을 웃기는 이로 여겼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그의 이런 특징에 주목하게 된 건 예수의 방문이 끝나고 나서도 몇 개월이 지난 뒤였다.
우연히도 그 당시 나는 예수의 생전 모습을 말해주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하나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블리우스 렌툴루스라는 로마 총독이 쓴 것이었다. 이 두 책에서 특히나 관심을 끈 건, 묘사된 예수의 모습이 서로 상당히 유사했다는 점이다. 비록 두 책 다 그 부분의 인용이 짧긴 했지만, 그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 구절들은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러자 나는 어째서 그가 나더러는 웃음을 터트리게 하면서도 그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순간의 영감으로 나는 깨달았다. 기쁨이란, 사랑을 쏟아내는 것인 반면, 웃음은 우리가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내려놓을 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처리하는 과정의 일부로 웃는다. 웃음은 예전에는 대할 수 없었던 뭔가를 우리가 쳐다볼 수 있게 해준다 막혀 있던 곳에 에너지가 흐르게 하면서 예전에는 거부했던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내려놓음이 우리를 웃게 만들고, 그 자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사랑을 가르막는 장애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나를 자주 웃게 할 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에서는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소한 지적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담컨대 사실 그것은 그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불멸의 진리에 대한 놀라운 암시였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신성이라는....
나로서는 그의 신성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서 신학 영역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신앙을 조성하는 것이 지상에서의 내 자리나 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런 고귀한 감정과 인식들을 누설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드높은 신성은 내게 그럴 수 없이 온화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내가 그의 현존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경험을 한 경우는 1991년11월23일 그가 처음으로 나타난 날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나를 압도하지 않고 내 필요를 배려해주는 친절하고 인간적이고 온화한 그의 성숙함을 체험했다. 그는 내가 작업을 하면서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원했고, 내가 있는 현실 차원으로 내려오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의 멋지고 자애로운 방식으로 그는 내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그는 최고의 신사였다. 따뜻하고 인정 많고 자주 유머러스했던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했으며,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
내 체험 전체는 익숙한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그 첫날부터 나는 내 내면에서 새롭고 고귀한 차원의 자각이 펼쳐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나는 이 고귀한 차원에서 지금까지도 표현하기 어려운, 흔치 않은 감정을 경험했다.이 느낌에 내가 붙일 수 있는 이름은'흠모심' 정도다 그것은 내가 알았던 그 어떤 사랑보다 더 완벽했고, 소리와 향기까지 있을 만큼 순수한 사랑이었다. 흠모심은 이 속세 영역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다. 숭배란 용어조차도 그 느낌의 깊이와 기쁨과 평온함을 포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감정의 상향곡선을 상상할 수있다면, 다시 말해 삶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해서 환희로 상승해가고 거기에서 다시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평온과 명징(明澄:깨끗하고 맑다)함으로 나아가는 그 곡선을 상상할 수 있다면, 분명히 당신은 감정의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상향곡선이 거룩한 열정이라는 봉우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이 흠모심이다.
흠모심은 이례적이고 독특한 느낌이다. 그것은 감정의 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인식하고 공경하는 우리 영혼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물질 형태에 집중하느라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 가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물질 차원에서는 이 감정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예수와 함께 있게 되면 이 고귀한 인식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가장 순수한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성 바울은 자신의 글들에서 예수를 자주 '님'이라고 표현하여 이 감정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느낌이나 표현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다. 그것은 권능이다! '님'은 있음으로서 사랑의 정점이다. 모든 실존의 근원인 위대한 '나'의 현존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아는 그 위대한 실존의 권능으로서만 자신을 채울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사랑에 대한 이 차원 높은 개념을 이해했다는 사실은 그가 쓴 글과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한 데서 드러난다. 또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이 고귀한 사랑을 알고 있었고, 그 높은 헌신 때문에 비방과 분노를 받았다는 증거를 전해주고 있다. 그녀가 창녀였다는 명백한 언급이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덕성은 그후 역사 전체에 걸쳐 의문시되어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예수의 아내가 아니었을까라고 의심하지만, 나는 그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건 '님'에 대한 그녀의 의식과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것이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유사한 전적인 헌신을 불러왔으리란 점이다.
그녀의 특별한 사랑은 엄청난 질투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혀 드러나지 않았을 잃어버린 미덕에 대한 비난에 불을 붙였다. 진리에 대한 그녀의 용기와 이해는 너무나도 커서 어떤 것도 그녀의 헌신을 막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캘커타의 거리에서 마더 테레사 역시 똑같이 용기 있게 , 절망적으로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의 삶 속에 '님'을 가져오는 일을 했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서 '님'을 보는 것으로 이런 게 인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의 과정이다!
예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님'에게 살아 있는 불꽃을 붙이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성 바울은 이 심오한 개념을 이해한 첫번째 사람이었고, 이런 이해를 가지고 세상을 바꾼 메시지를 끌어냈다. 그는 사랑 없는 숭배는 내재된 목적이나 가치가 전혀 없는, 의미 없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숭배는 자주 잘못된 결과를 불러온다. 원시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자연현상들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자연의 힘을 숭배했다. 오늘날에는 돈과 물질 지위와 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위태로울 만큼 숭배에 가까워졌다. 참된 숭배란 자아가 드높은 권능으로 승화함을 의미하는 거룩한 모든 것에 대한 타당한 찬미다. 그럴 경우라도 숭배는 또한 에고가 자신을 드높은 권능 곁에 위치시키는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님'이 현존할 때는 에고가 완전히 꺽이고 만다. 에고는 이 완벽상태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도 없다. 흠모는 환상과 함께 거할 수 없다. 사람들이 돈을 숭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담컨대 흠모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명성을 숭배할 수는 있지만, 장담컨대 흠모할 수는 없다. 이 유례 없는 감정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곧바로 신의 얼굴로, 곧바로 '님'의 얼굴로 데려갈 것이다. 흠모는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그럼에도 전적인 순응을 통해 쉽고 경이롭게 체험할 수 있다.
솔로몬 왕은 그의 시대에 천재 문필가이자 다작가였으나 그 역시도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예수는 내게 솔로몬의 <노래중의 노래>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흠모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글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눈부심을 다양한 형태로 찬미하고 있다. 솔로몬은 흠모를 전달하기 위해 신랑과 신부의 우화를 사용했다. 이 지상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흠모의 가장 순수하고 감미로운 표현 중 하나가 이제 막 결혼한 부부의 열정적인 사랑이다. 신랑과 신부의 서로에 대한 흠모는 그 관계를 창조하고 축복한 시과의 대단히 특별한 결합이기도 하다.
<노래 중의 노래>가 솔로몬 자신의 결혼을 자축하기 위해 쓰여졌는지. 아니면 순전히 고귀한 사랑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차원이 달라질 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우화식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내게 그것의 가장 고귀한 의미는 불멸의 영혼이 성스런 가슴과 결합하는 사랑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인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과 유사하게 개개 존재의 영혼 깊은 곳의 갈망이자 그것의 완성을 향한 추구이다.
당신의 진짜 사랑이 어딘가에 있으리란 희망으로 당신은 온마음을 다해 이 특별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서로를 찾아내 사랑에 빠지고 난 다음에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분리의 번뇌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만 결혼을 할 때까지는 이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결혼을 하더라도 그 둘은 이따금 떨어져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축복받은 재결합을 갈망하곤 할 것이다. 성스런 가슴과 영혼간의 참된 사랑을 선언하는 이 얼마나 멋진 방식인가! 예수는 성스런 가슴을 신의 딸로, 영혼을 신의 아들로, 다시 말해 성스런 남매로, 각자가 신랑과 신부로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고 서로가 세세토록 상대방의 열정을 알고자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솔로몬의 <노래 중의 노래>에서 그의 영혼은 가슴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 이로 인격화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피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기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예수는 몇 번이나 "당신이 갈망하는 정원이 이것이요"라고 하면서 성스런 가슴을 정원으로 표현했다. 재미있는 건 솔로몬의 이야기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포도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건 에덴동산에 대한 추억일까?
이 낙원에서는 석류 같은 맛있는 열매가 나고,
나르드, 사프란,
창포, 계수나무 같은
온갖 향나무도 나고,
몰약과 침향 같은
온갖 그윽한 향료가 나는구나
그대는 동산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어라
그대, 나의 짝은 다르사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귀엽구나
나에게서 눈을 돌려다오
눈이 부시어 쳐다볼 수가 없구나
그대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니리닫는 염소떼.
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시킨 암양떼 같아라
새끼 없는 놈 하나 없이
모두 쌍둥이를 거느렸구나
너울 뒤에 비치는 그대의 볼은
쪼개놓은 석류 같아라
왕비가 육십 명 있고
후궁이 팔십 명 있으며
궁녀가 수없이 있으나 그들이 다 무엇이랴.
티 없는 나의 비둘기는 오직 하나뿐
낳아준 어머니에겐 둘도 없는 외동딸
그를 본 아가씨들은 부러워하고
왕비, 후궁들도 칭찬하여 마지않네
이는 누구인가?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보름달처럼 고운 얼굴
햇볕처럼 발고 별떨기처럼 눈부시구나
성스런 가슴은 영원한 신비이기에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냥 그것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감쌀 뿐이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영혼에게 노래를 보낸다.
'나의 임은 말쑥한 몸매에 혈색이 좋아
만인 위에 뛰어난 사람이라오.
머리는 금 중에서도 순금이요.
머리채는 종려나무 잎새 같은데.
검기가 까마귀 같지요.
눈은 흐르는 물가에 앉은 비둘기
우유로 목욕하고
넘실거리는 물가에 앉은 모양이라오.
두 볼은 향료를 내는 발삼꽃밭 같고
나리꽃 같은 입술에선 몰약이 듣고요
두 팔은 감람석이 박힌 황금방망이
허리는 청옥 두른 상아 토막이라오.
두다리는 순금받침대 위해 선 대리석 가둥
그의 모습은 레바논 같아
맥향목처럼 훤칠하다오
그 늠름하고 멋진 모습에 그만 반해버렸지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의 임은 이런 분이란다.
나의 짝은 이런 분이란다.
이런 게 영혼과 성스런 가슴이 나누는 사랑이다. 이 두 정수의 결합은 가장 순수한 흠모의 사랑이다. 함께 있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고,떨어지고 나서는 재결합의 그윽한 갈망이 있다. 우리는 남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도 이런 감정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지복이었떤 우리의 하나됨에 뒤이어 자아가 그 핵심에서 분리되는 번민의 순간들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우리는 묻는다. "내 전체의 완벽함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시대를 초월하는 이 드라마를 남녀간의 사랑의 우화로 절묘하게 보여준 것이 솔로몬이었다.
솔로몬이 여러번 되풀이했던 합창들 중 하나는 예수의 메시지 전반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흔들어 깨우지 말아다오"
사랑은 강요되거나 조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자신의 의지를 빼고는 어떤 것도 쉽사리 그것을 불러낼 수 없다. 사랑은 우리의 통제 능력 너머에 있는 권능이다. 비록 사랑의 권능을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는 사랑을 지휘할 권리를 갖지만, 사랑의 현존 속에서 우리는 참된 겸손을 경험하고 그것의 권능을 공경하며 경외한다. 사랑의 표현은 절대 환벽하게 예견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펼쳐질 때
사랑을 받아들이는 건 중요하다. 설사 그것을 잠시 우리에게서 가져가버리는 경우에도.
나는 예수에게 물었다. '왜 사랑을 주었다가 다시 까져가버리는 겁니까?"
"왜 사랑을 주었다가 다시 가져가버리는 겁니까?"
"당신이 자신과 자기 형제자매들의 가슴 안에서 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요. 만일 당신이 아는 님이 한 사람뿐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소? 설사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 신이라 해도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에 미치지 못할 테니 당신은 판단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요. 그래서 사랑의 감미가 주어지고 나면 당신 자신과 훨씬 더 넓은 현실 범위에서 사랑을 추구하도록 잠시 배고픔이 주어지는 것이오. 당신이 자그만 자기 중심적 덮개 속에서 사는 건 신의 의지가 아니요.
신의 의지는 오히려 모든 현실을 당신의 놀이터로 삼는 것이오"
"왜 우리는 그토록 강력한 덮개 보호막을 만들어낼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그런 결단과 관련 환상들, 우리 삶의 목적을 해치는 것들에 집착하는 걸까요?
"그건 그것들이 에고의 허구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오"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에고는 당신이 자신인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그 모든 허구들로 이루어져 있소, 오늘날의 어법은 에고를 자부심과 자기 권능화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에고란 건 자신에 대한 허구를 중심으로 당신의 삶을 쌓아올리는 무상함이오. 영원이란 물결에 견디지 못하는 모래성처럼 그것은 아무런 실제적 힘도 갖지 못하죠. 역설적인 건 사적인 환상들일수록 자부심과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을 크게 파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요. 무가치함의 환상이나, 실제로는 숨겨진 계획이 있는데도 순교의 환상이나, 실제로는 두려움뿐인데도 순종의 환상처럼요. 에고의 중추 대부분은 자부심과 거의 관계가 없지만, 그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을 대신한 환상이오.
당신 자신인 사랑은 당신의 참된 자기 영광이오. 이 때문에 에고가 지배하면 참나에 대한 앎은 파괴되고 맙니다. 내가 '사람은 삶을 발견하는 데 삶을 바쳐야 한다고'말했을 때,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 삶은 에고를 중심으로 쌓아올려진 것이라는 유감스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요. 당신이 자신인 사랑을 알고자 한다면, 이 거짓된 삶은 근절되어야 하오. 에고가 무엇인지 알 때까지는 당신의 사랑 쪽을 억누르고 근절할 테지만요"
"우리가 사랑의 잠재력을 정화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고를 근절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한가요?"
"에고를 창조한 것 자체가 당신이 행한 가장 큰 희생이오! 이보다 더한 희생을 어떻게 행할 수 있겠소? 당신은 무슨 수로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거나 자신을 부정할 수 있겠소? 내가 항상 부탁했던 건 자비를 베풀라는 거였지, 희생하라는 게 아니었소! 자비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에고의 희생이오! 당신이 복수하려는 모든 욕구를 내려놓고, 자기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때, 당신이 정의를 가지고 장난치길 그만두고, 자신을 옳은 쪽으로 상대방을 그른 쪽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권능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단순히 어떤 상황을 지배하기 위해서 상대방에 반대하기를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때라야 당신은 자비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거요. 자비의 권능 앞에서는 에고가 살아남을 수 없소.
잊지 마시오. 에고는 당신인 사랑을 왜곡하고 대신하고자 하는 개인 차원의 환상이오, 가장 공통된 환상 중의 하나가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오, 자신에 대한 이런 발상으로는 절대 신에게 다가갈 수 없소. 그리고 인간의 하찮음을 신앙의 초석으로 사용하는 모든 종교는 자기 충전하는 속성을 가진 에고의 발달만을 촉진할 뿐이오. 당신은 사랑이오! 여기에다 개인적 관찰과 풍부함, 꿈,바람, 그리고 독특한 자질들도 보탤 수 있겠죠.
사랑에 비해 에고는 두려움을 먹고 자라고, 두려움의 매커니즘에 전적으로 휘둘립니다. 에고는 머릿속에서 고안된 것인지라. 소멸되기도 아주 쉽소, 에고는 현실의 빛을 받으면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죠. 이 때문에 그것은 구조와 계획이 안전판이 되는 환상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당신의 에고는 신에게 무척 화가 나 있소, 왜냐하면 신은 현실과 하나이고 당신의 참된 존재인 사랑의 근원이니까요. 내가 다시 돌아오면 염소에게서 양을 떼어내겠노라고 말했던 건 에고를 '참나'로부터 떼어내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겠다는 이야기였소! 이 진술은 내가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리란 뜻으로 잘못 해석되어왔소, 이런 해석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오. 왜냐하면 내 사랑과 내 진리와 내 선물은 모두에게 주어져왔으니까요. 나는 내 현존을 통해서 개개인 안의 '참나'를 강화할 것이니, 고집센 염소 같은 거위는 사라질 것이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의 권능은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크다.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랑의 권능을 입증했던 영웅적 성과와 기적 같은 위업들에 대해서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 중 하나는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것인데, 어머니가 운전석 문 밖으로 튕겨져 나왔을 때, 차는 전복되고 아이는 차 안에 갇히고 말았다. 차 문은 열리지 않고, 아이는 고통으로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고 여린 여자였지만, 그 다급한 상왛에서 자식의 생명을 구해야겟다는 사랑으로 헤라클레스 같은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차를 뒤집어 아들을 차에서 끄집어냈다.
이와 비슷한 믿기 힘든 이야기가 2차대전 중에 포화로부터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데리고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을 뚫고 나온 수녀들의 이야기이다. 단 한명의 생존자라도 있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건강한 상태로 그 지역을 탈출했다 이런게 사랑의 권능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 권능에 더 자주 접근하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적용하거나 믿지조차 않는다는 건 유감스런 일이다. 절박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의문과 주저들을 물리치는건 사랑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금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하는 이모든 일들 이상을 당신들도 해낼 수 있소, 이런 게 사랑의 위대함이오. 하지만 여기서 주의를 주고 싶은 건, 내가 말하는 건 당신들의 환상적 자아가 아니란 거요. 나는 염소 같은 인간 부분인 고집과 발명이 어떤 실제적인 힘을 가졌다고 믿게 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소. 그것들이 힘을 사용하고 뭔가를 고안해내고 환경을 더 영리하게 조작할 순 있지만, 그래봤자 자기 소모적인 것에 지나지 않소, 당신더러 내가 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는 건 사랑의 권능이오"
이 순간, 내 의식은 에고에 대한 예수의 사전, 설명이 없었다면 결코 떠오르지 않았을, 한 질문에 휘저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사람들의 몸이나 영혼에서 악귀를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도 여러번 언급되어 있어요. 악령 몰아내기는 카톨릭 교회 내에서 여러 세기 동안 행해져온 의식이었고, 오늘날의 많은 믿을 만한 일상 연구들도 인간의 정신 내에서 성격분열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악령이란 건 에고의 일부인가요? 악령은 그 자체로 실제적이고 특정한 실제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 안의 기능장애를 인격화한 환상인가요?"
"글렌다. 그건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있소. 하지만 알아둘 건 존재와 있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거요. 당신이 자신으로 삼을 수 없는 온작 것이 당신의 문맥과 살아갈 이유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나머지로 당신의 삶을 둘러싸고 감쌉니다. 문제가 생기는 건 그 나머지 모두가 자신들 안에서도 또 당신과도 조화롭게 배열되지 않기 때문이오.
모든 것이 존재와 있음으로 창조되었소, 있음이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다중화할 때 확장된 잠재력에 대한 자각의 다양화가 있게 되죠. 모든 실존은 있음의 여러 권능들에서 발현됩니다.
모든 실존 측면의 심장부에 있음이 있소, 그리고 그것은 순수하여 모든 존재의 근원과 자신을 맞출 수 있소. 하지만 있음이 자율성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근원에서 몸을 돌리게 되면 부조화와 어그러짐이 일어나기 시작하죠. 물리적 장벽과 물질 밀도가 축적되는 데 따라 분리 정도도 다양해지고요. 직선적인 시간 경과를 통하는 경우 말고는 유동적인 상호작용과 조정의 가능성도 잃게 되죠. 이 때문에 과거와 미래에 대한 환상이 그 존재의 변화욕구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있는 건 오로지 존재뿐이고, 사랑뿐이며, 근원과의 일치뿐인데 말이오. 이런게 한 존재의 유일한 고향이오!
고향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 물질층들과 시간의 강과 통제의 경계선들이 그 인식을 한정하는 존재는 그의 실존에 배어 있으면서 그의 자유의지를 위협하는, 유형의 있음과 무형의 있음에 시달리고 사로잡힌 듯이 느낄 겁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는 자기처럼 이탈했거나, 길 잃은 이들을 끌어당기죠. 이런 결합들 대부분은 흔히 무의식적이요. 이따금 그런 어그러진 결합은 그냥 파괴적일 뿐이어서 누군가가 개입하여 그 결합을 잘라낼 필요가 있소, 이것이 내가 악령을 쫓아낼 때 했던 일이오. 악령이란 자신의 참된 존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애정 깊은 연결이 영향을 미치려 해도 쉽사리 응하지 못하는 길 잃은 영혼에 지니지 않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긍정적인 연결을 뒤집으려하죠.
하지만 아무리 길 잃은 영혼이라도 고개 돌려 자신의 근원과 고향의 불빛을 바라본다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조화를 되찾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오. 이건 모두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따라서 근원에서 얼굴을 돌리면 누구라도 부조화를 경험하지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연결할 새로운 근원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 거요. 방향을 잘못 잡은 그런 노력들은 결국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자신에게 아픔을 자겨다주고, 자신을 참된 근원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만들 뿐이오.
모든 존재의 본래 서약은 자신의 근원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소, 있음은 다른 존재들과 다른 생명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진화하지 않소, 역사는 그것이 체험의 저장소인 한, 현실적이오. 비록 당신은 지금의 자기 모습이 자기 개인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 대단히 억지스런 환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테지만, 누구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개인사가 제시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소, 그런 놀라운 모습은 대체로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 다시 불붙거나 그 사람이 사랑의 참된 상태를 되찾았을 때 나타나게 되죠
반면에 시간이 지날수록 소외가 더 심해지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사람의 품성은 무책임과 무의식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존재는 더 이상 현실을 다듬어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없기에 자신의 환상에 부합하는 현실을 꾸며내게 되죠. 역사가 교훈과 과제와 곤란들을 되풀이하는 게 이 때문이요. 역사에 걸쳐 산재해 있는 성공과 승리와 실현은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를 넘고 올라선 의식과 행동의 결과요.
역사란 부분적으로 완료된 체험들과 함께 기억 속에 담긴 채 다시 삶과 재통합해줄 적절한 조건들이 나타날 때까지 유보되어 있는 삶에서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지점과는 관계 없는 부분이오! 그것은 당신이 잠시동안 내려놓았던 그 무엇이오.
이제 이 새로운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시오. 당신이 자기 존재의 참된 천성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세속적인 시간관념을 뒤집어야 합니다. 세상은 역사와 시간 흐름이 현재를 발생시키고 권력의 토대를 세우는 유력한 힘이라고 여기죠. 이런 논리에 따르면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준 건 분명히 과거요. 이에 비해 참된 존재의 관점은 과거를 관련된 무기력으로 추락하고 만 경험과 교육과 목표와 소망들의 파노라마로 보죠. 말하자면 당신이 과거를 추락시키는 것이지, 과거가 당신을 생산하는 게 아니오! 존재의 무한성을 생각한다면,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렇다면 미래란 건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며 내가 물었다.
"미래란 당신이 다시 기억해내고 추구하여 완결하겠다는 약속이오. 이렇게 추구할 때 무한한 잠재력이 당신의 필요와 갈망과 교훈과 배열들을 지원할 것이오. 마침내 당신이 참된 완결은 언제나 있어왔고, 집착만이 아니라 욕구까지도 털어버리는 것으로 다시 얻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요."
내가 입을 다문 채 이 놀라운 대답을 내 가슴과 의식 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노라니, 그가 있음이라는 주제 전체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것도 너무나 단순명료하게 설명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경악했다. 나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압도되었다. 내가 느낀 것은 내 자각이 무한한 영의 확장을 통해서 넘쳐흐를 때 느끼는 흠모와 유사했고, 내가 본 것은 합일된 연인으로서 우리 모습이었다. 이 완벽한 존재 상태에서는 그것을 더 권능 있게 하는 데 더 이상 어떤 말이나 개념도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완벽 자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해 욕구 중 가장 고귀한 것이 이런 상태로 복귀하는 것일게다 결국 내 생각은 교훈과 과제가 기다리고 있는 지점인 이 현실의 실존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런 실제적인 문맥 안에서 나는 허구적 자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당신의 허구적 자아는 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별다른 힘이 없소, 사실 그것은 진리의 빛을 쬐면 아주 쉽게 바스러지기 때문에 안전지대와 보호거품,지속적 긍정이라는 보호막 안에서만 견딜 수 있소, 현실은 여러 실존 차원들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살아있고 공명하는 삶의 흐름이오. 현실은 개개 존재들을 존중하고, 그 사랑에 공명하죠. 당신들은 언제나 필요와 목적에 따라 현실을 모양짓도록 권유받고 고무받고 있소, 하지만 현실을 모양짓는 것과 현실을 발명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소, 그차이를 배워 허구적 자아가 당신을 무효화하는 허구적 현실의 창조자임을 아는 편이 현명하오"
이것은 현실을 모양 짓는 것과 현실을 발명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한 예수의 두 번째 언급이었기에 내가 물었다.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현실을 모양짓는 과정은 여덟 가족이 주인으로 거쳐간 50년된 집의 일생에 비교할 수 있소, 처음에 그 집은 농가였소, 두번째 주인은 그 집을 빅토리아풍으로 장식했소, 나머지 여섯 가족들도 집의 모양을 바꾸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에초의 농가식 주택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죠. 어쨌든 아무리 스타일이 바뀌었더라도 그 집은 언제나 같은 집이었소. 다만 여덟 가족의 서로 다른 선호와 기쁨과 즐거움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장식과 배치를 다시 했던 것뿐이죠. 현실을 모양 짓는 건 쉽고, 이롭소, 현실은 허구적 현실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자신의 연인이라면 존중하고 지원하면서 공명하니까요.
반면에 발명된 현실은 아직 이르지 못한 성공을 흉내내기 위해 자기 능력을 넘는 집에 세를 드는 것과 같소. 누구라도 허구적 성공을 이루려고 애쓸 때는 행복하지 못한 법이죠.
사랑으로나 사랑을 존중하면서 구하는 모든 기도는 대답을 받겠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에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허구를 행복한 결과로 만들기 위해 하는 기도에는 응답하기로 서약하지 않았소, 당신의 창조주는 현실과 하나인데, 어떻게 그 자신인 사랑과 현실과 더 멀러지려는 기도에 답할 수 있겠소?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이해와 현실을 다룰 능력을 더 키워달라고 기도하면, 당신의 모든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고, 그것도 자주 극적인 응답을 받을 것이오.
신은 당신의 환상을 느긋이 참고 지켜볼 것이오. 부모가 아이의 발명에 인내하고 자주 웃어넘기듯 말이오. 아이가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을 때, 그 부모는 아이의 손재주와 상상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소? 다만 그 허약한 창조물이 씻겨갔을 때, 그건 단지 스쳐가는 공상에 불과하고 나중에 겪게 될 상황의 놀이 체험에 불과하다는 걸 아이가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더 중요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빼고는요.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도 이와 다르지 않소.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기도는 '제발 아버지시여. 제 모래성을 구해주십시오'란 식이요. 거기에 아버지가 대답하실 수 있는 건 '내 자식아. 너는 모래성과 진짜 토대 위에 몰타르와나무로 지어진 집과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네 모래성을 구해준다면, 무슨 수로 네가 그 차이를 배울 수 있겠느냐?"뿐 아니겠소?"
신과 현실을 강조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한 성경 구절을 이참에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로서는 찬송가11장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의 시작이다'라는 구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신이 오직 사랑이라면, 어떤 식이든 두려움을 그 동기로 삼는 신성이란 게 상상이 안 되거든요"
"신은 사랑이오. 그리고 당신의 가슴은 그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옳소. 성경에서 신과 관련된 '두려움'은 '존중'을 뜻하는 거요. 거기다 신이 현실과 하나임을 전제로 하면, 당신은 이 가르침에 대단히 실용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오. 이 메시지를 '현실에 대한 존중은 지혜와 앎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생각해보시오. 좀더 쉽게 이해되지요?"
"신은 사랑이오. 그리고 당신의 가슴은 그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옳소. 성경에서 신과 관련된 '두려움'은 '존중'을 뜻하는 거요. 거기다 신이 현실과 하나임을 전제로 하면, 당신은 이 가르침에 대단히 실용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오. 이 메시지를 '현실에 대한 존중은 지혜와 앎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생각해보시오. 좀더 쉽게 이해되지요?"
"예, 그래요"
"일단 당신이 신을 현실과 하나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현실은 안락함과 깨달음의 근원이 됩니다. 현실이 당신의 사랑을 돕는 종복이 되는 거죠. 두려움을 가지고 현실을 대할 때 그렇듯이 불만의 대리인이 되는 게 아니라요"
내가 다시 예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현실과 발명의 차이를 알아서 그 둘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위험이나 배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소, 항상 경계해야 하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에고야말로 위험과 배신을 끌어당기는 가장 강한 자석임을 알아두시오. 당신을 속이기 위해 보내진 것들은 어느 것이나 정확히 당신의 에고나 당신의 마음을 향해갑니다. 그건 에고가 자신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것이면 뭐든 참이라 여기기 때문이오. 마음이 논리의 우위성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참이라 여기듯이요. 사실 마음은 사실과 허구가 똑같은 논리로 제시되면 그 둘을 구별할 수 없소.
이 둘은 식별해내는 건 고귀한 의식의 일부요. 판단에서 한걸음 올라선 게 식별이 아니오. 삶의 커리큘럼에서 식별은 판단의 반대요. 인간은 판단을 통해서 자신이 아직 대면해야 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반면, 식별을 통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마스터했는지 밝히죠.
당신의 가슴은 언제나 무엇이 참인지 알고 있소, 비록 살아가는 동안 세부상항들을 배워나가긴 해야 하지만요! 현실은 본능적으로 사랑에 반응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강제를 써서 현실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소, 용기를 가지시오. 현실은 작용하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현실은 잠재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이 굳이 설득하거나 유력인사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소. 현실은 똑같이 모두의 것이오 따라서 공인된 허가나 특별 교육이나 독창성 같은 것도 필요없소.
현실은 정직과 무구함, 접근가능성에서 최고치를 기록합니다. 가장 작고 가장 무구한 아이에게까지요. 당신은 그냥 현실이 신과 하나님을 알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만 가지면 됩니다. 가슴스스로가 자신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서 진리를 알아보니까요.
당신 가슴은 신의 사랑과 하나이고, 신은 현실과 하나요. 당신은 신과 사랑과 현실과 세 꼭지점으로 갖는 삼각형으로서 진리를 규정할 수도 있소, 진리는 사랑과 현실이 신 안에서 하나 되는 지점이오. 진리가 필멸의 존재인 모든 장애와 한계와 갈등과 문제의 보편 용매인 이유가 이것이오. 진리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진리가 다치게 하는 건 에고이지, 절대 사랑 가득한 당신 자신이아니오, 진리는 최고의 의식이고, 현실 속에 영원히 머무는 신의 현존이오.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사랑과 일치하는 진리를 알 것이오.
진리는 사랑이 현존할 때에만 드러납니다. 화난 사람이 정직한 경우를 본 적이 있소? 어떤 진리에 당신이 접근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사랑을 침해함으로써 그 진리를 질식시켰기 때문이오. 참된 친구나 참된 사랑의 위대한 가치가 이것이오. 그나 그녀의 현존 앞에서 진리는 눈부신 계시요. 이런 게 당신을 자유롭게 할 진리요.
만일 당신 다른 사람에 대해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시오. 오직 한 영, 한 신, 모든 현실이 거하는 한 토대밖에 없소. 인식의 자유와 현실에 대한 관점의 자유를 주는 건 아버지의 기쁨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들의 목적이 현실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확장하고 인격화하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오"
오늘날 사회의 심리적 사회적 전문어와 은어들에는 자기 나름의 현실을 창조할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개념과 사상들이 배어 있다. 내가 예수에게 이런 믿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관점들이 미묘하고도 중요한 차이들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위대한 보편 현실은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단언했다.
"현실에 대한 관점의 권능을 평가절하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당신의 관점은 당신이 보기를 바라는 상황으로 당신을 데려갈 테니까요. 이처럼 현실에 대한 관점은 당신의 삶을 경영하는 중요한 열쇠이긴 하지만, 현실에 대한 관점이 공동 실존의 보편 바탕을 대신하지는 않는다는 걸 잊지 않는 게 현명할 거요"
당신은 이것을 특정한 풍경을 그리기 위해 같은 장소에 모인 열 명의 화가가 다양한 결과물들을 내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화가들의그림을 본 관찰자는 그들이 열 군데의 다른 장소에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각 화가들의 독특한 해석 때문이다. 이처럼 그 표현들 각각이 특이하고 각자의 인식으로 풍부하긴 하지만, 당신이 표현필법 너머를 보면서 그려진 여러 소재들에 찬찬히 집중하다면, 공통의 현실을 발견하리란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실과 현실의 창조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덕분에 일찍부터 신에게 호의를 보였소, 오직 하나의 신, 하나의 영, 하나의 응집된 현실 토대만이 존재한다는 이런 이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지혜를 주어 세계 역사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게 했소,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무렵, 종교 교리는 영적인 지침으로서 보다 구조에 더 많이 봉사하기 시작했소, 이스라엘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변절이나 강제에 의지하지 않는 한에서 이스라엘은 신에게 진실된 믿음을 보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실과의 접촉을 잃었고, 그녀에게 부과된 고난들 때문에 가슴들이 사랑에 등들 돌리기 시작했소.
이것은 오늘날의 다수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교리와 신의 말을 살펴보지만, 너무 많은 경우 현실로부터 떨어진 안전지대를 설정하는데 자신들의 믿음을 적용하죠. 그렇게 되면 삶의 고난은 늘어가고 가슴들은 사랑에 등을 돌리게 되죠. 그렇게 해서 더 큰 이해를 잃고 마는 겁니다.
사랑은 현실을 지휘하고 현실은 신부처럼 사랑에 고명하오. 당신은 나와 똑같은, 신의 사랑하는 님이오. 만일 이 축복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보호막 밖으로 나와 허구적 자아가 현실의 빛에 부서지도록 놔두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신의 권능을 물려받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인 사랑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당신은 신의 사랑하는 님이니, 두려워마시오. 신은 당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다가 땅으로 떨어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오. 죽어가는 건 허구적 자아와 당신이 그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써왔던 윤색들뿐이오. 그것은 오로지 죽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필요악이오. 따라서 당신이 자신의 허구적 자아를 죽이기로 결단한다면, 당신은 이미 불멸의 의식을 회복하는 쪽으로 첫걸음을 내딛은 샘이오. 그러고나면 신의 사랑과 자비가 당신의 자녀 의식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회복될 때까지 다음 걸음을 끌어가줄 것이오.
이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완결되는 사람도 있지만, 좀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오. 이것은 어떤 아이들은 하룻밤 새에 성인이 되는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몇 년씩 걸리는 것과 하등 다른 게 없소. 그런 발달은 선호나 계층이나 지위의 결과가 아니오 개개인마다 그 성장곡선이 독특하기 때문이오."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허구적 자아가 무엇인지를 요약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내 청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허구적 자아란 당신이 자신이 사랑임을 잊었을 때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것이오. 여기에 그런 잘못된 관념을 윤색하기 위해 사용했던, 온갖 발명된 현실들을 포함할 수도 있겠죠. 무릇 모든 것은 문맥을 가져야 하오. 에고조차도 말이오. 개성의 허구적 측면을 참된 실존과 혼동하면 '나는 누구지? 이런 발명품이 어떻게 현실과 통합될 수 있지? 무슨 수로 현실에 뒷받침되지 않는 이 자가 발명의 요소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지?'라는 식의 의문이 떠오르지요.
실존은 진리를 드러내기 마련이어서. 그것이 진실로 당신 아닌 것을 부수도록 돠둔다면, 그것은 당신의 진리를 지키는 위대한 수호자일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도전과제들과 계시들을 무시하고 의도적인 속임수로 자신의 발명된 현실을 고집스레 주장한다면, 당신은 죄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오. 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냥 발명한 현실을 뿌리내리고 권능 있게 하는 데 사용된 강제와 해악에 지나지 않소. 그런 투자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당신은 그만큼 신에게서 멀어집니다.
세상은 엄청난 에너지를 판단에 낭비하고 있지만, 판단이란 건 발명된 현실을 놓고 다투는 경쟁에 다름 아니오. 사랑은 판단하지 않소, 판단은 지위를 놓고 다투는, 에고의 잔혹하고 유치한 게임이오. 그 밑에 깔려 있는 말로 밝히지 않은 교활한 의도는 판단을 지속시키는 데 성공하면 판단을 능가할 수 있다는 거요 이건 사실이 아니오. 진실은, 에고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지도 않으리란 거요. 용서를 유보하는 건 삶에 대한 에고의 공격이오. 오직 에고만이 판단하고, 판단을 통해서 죽어갈 것이오. 반면에 당신의 불멸성을 유지해주는 건 당신 자신인 사랑이오. 사랑은 판단이란 걸 전혀 모르니까요.
판단은 인간의 원죄였소,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이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가 이것이오. 판단이 불러오는 즉각적이고 불가피하고 불가결한 결과는 판단 대상에게서 분리된다는 거요. 그리고 창조주가 당신의 판단 대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창조주에게서도 분리되고요. 판단은 신과의 분리가 터무니 없이 엄청난 현실적인 문제가 될 때까지 스스로를 확대하고 배가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분리된 존재는 자신의 근원을 의식하지 못하기에, 끝없이 자신의 창조라는 과제를 추구하게 되죠.
오랫동안 분리를 잊는 일만 없었다면, 또 그 망각으로 인해 빚어진 다양한 밀도의 쓸데없는 동일시만 없었다면, 영혼은 결코 헤매지도, 잘못된 행동을 고안해내지도 않았을 거요. 세상이 죄라고 일컫는 것들은 결국 판단과 판단에서 비롯된, 신과 현실과 형제애로부터의 분리라는 진짜 죄의 비극적 귀결이오.
모든 잘못된 행동은 서글픈 일이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죄로 여기는 것은 단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오. 인간이 형재애 속에서 함께 산다면, 부도덕은 묵과될 수 없소, 하지만 그렇다고 부도덕을 비난하는 건 판단의 악순환에 빠질 뿐이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요. 만일 모든 판단을 그만두고 용서의 정신을 발휘했다면, 인간은 은총을 입어 자신의 무구함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내가 개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오"
예수가 여기서 말하는 개입이란 기적으로 가득한 그의 인생 목적을 일컫는 것이다. 이 위대한 기적은 그의 출생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저 유명한 기적들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다. 예수가 세상을 떠나고 300여 년 동안 이 기적들은 무구한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전해졌다.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윤색이 가해지고 지적인 과장이 이루어졌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가 생겨나기 전에 신념이 있었고, 세속의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어떤 앎에 이끌린 헌신의 추진력이 있었다. 역사를 그냥 흝어보기만 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의 유산은 지상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삶에 접촉케 만들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기적이다.
예수가 방문했던 그 시기에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천사 수태와 육신 부활의 문제를 놓고 몹시 궁금해하고 의아해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나눔이진행되고, 편안하고 자연스런 이해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관심의 중요서은 점점 줄어들었다. 물론 더 넓은 이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한편에서 나는 그의 일생이라는 그 장대한 기적을, 구성 부분을 이루는 기적들-그것들이 내게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상관없이-이 충분히 발현한 것으로서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현상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현존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2천년 전에 놀라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 분명하다. 지성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예수는 아무리 작은 기적이라도 본래적이고 원초적이며 신성한 실존 차원에서 고안된 것이라는 점과 모든 기적은 실존이라는 직물 안에서 조정이 벌어지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을 확고히 했다. 현실과 이해 사이의 여백에 우리가 집어넣을 수 있는 설명들은 그 가치와 신뢰도에서 봤을 때 미신에서부터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설명들이다. 가장 미세한 현상조차 그것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가장 세밀한 묘사로도 따라잡지 못하는 실존의 권능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면서 자주 간과하는 사실은, 우리는 실제로는 절대로 '있는 그대로' 보여질 수 없는 어떤 실존의 성격을 탐구하고 평가할 뿐이라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가장 쓸모 있고 효과적인 방식이 E=me2이라는 등식이다. 하지만 앞으로 백년 후라면 우리는 같은 현상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
삶의 상수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해석 밑에 깔려 있는 실제적 잠재력 속에서 찾아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의식과 체험이 전진하는데 따라 명확화도 높아진다. 이 때문에 증명할 수 있는 믿음들과 증명할 수 없는 믿음들이 서로 나란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기적의 발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우리 지성에 기여하기 위해서나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넘어서 이해를 도모하려는 욕구를 끌어올리는 데 있다 할 것이다.
내가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대화에서 '동정녀'라는 단어를 예수는 대단히 '사실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마치 그 개념이 그의 의식속에서 자연스런 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어조나 표현방식에서 볼 때, 자신이나 자신의 어머니를 종교 교리에서 말하는 위치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분이 말할 때, 나는 세속의 감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걸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계시로 무척이나 고양되고 감동받고 심지어 흔들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동정녀'라는 용어가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를 글자 그대로 표현 한 것인지 아니면 유덕하고 무구한 한 여성 안에 진실로 존제하고 있던 '순결한 개인적 잠재력'이라는 더 넓은 개념을 포괄하는 단어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중에 나는 예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이 주제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예수가 내게 준 유일한 대답은 이러했다.
'내 출생의 생물학적 측면 중에서 당신의 이해와 정말로 관련이 있는 건, 그 당시 일어난 인간 DNA 의 변화뿐이오. 이 변화는 소리 굽쇠의 마스터키처럼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수세기 동안 이어져갔소, DNA는 육체적인 사랑의 전달자요. 따라서 그것은 자신에게 제시된 모든 사랑의 자질에 순응합니다. 바로 이 고귀한 사랑을 정력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창조주가 준 성스런 가슴 안에서 일어나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퍼저가는 진동이오.
내가 2천년 전에 지상에 왔을 때 나 역시 기본 잠재력에서 당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소. 다만 나는 아버지와의 분리란 걸 모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자신을 알지못했으며, 자신에 대해 한번도 허구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빼고는요. 나는 동정녀에 의해 수태되는 게 필요했소, 그건 내가 일반적인 인간수태 방식을 피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오.
유기체의 DNA는 사랑의 복잡하고 신비한 작용을 지휘하도록 설계되어 있소, 그 중에서도 인간의 DNA는 아주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작용들을 조절하고 지휘하도록 설계되어 있소, 당신이 사랑의 그런 작용을 가속화하면, 당신의 DNA도 그에 따라 변합니다. 내 경우에 분리 상태에서 생산된 인간의 DNA를 사용하는 건 흡사 폭스바겐 자동차 안에 로겟 연료를 넣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거요. 말하자면 그런 몸과는 그냥 결합할 수 없었던 거요. 게다가 내가 분리를 체험할 때는 아직 오지 않았고요. 나의 수태에서부터 십자가에 매달리 때까지나는 내가 체험하기로 동의했던 분리를 준비해갔소. 이 때문에 내 어머니의 임신은 정상적인 것이었고,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내 성장도 통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십자가에 못 박힌 내 희생의 핵심은 내가 당신들을 위해 죽은 데 있다기보다는 내가 당신들을 위해 분리한 데 있소. 죽음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내 불멸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죽음의 고통은 사랑으로 순식간에 중단될 수 있었으니까요. 인류에게 준 내 선물은 내가 체험하고자 선택했던 분리였소, 인간의 분리는 예외 없이 사랑의 근원이자 현실인 신에게서 벗어난 데 그 이유가 있소, 인간이 개인적 허구 및 에고의 투영물에 헌신함으로써요. 개인적 복안과 발명된 현실에 대한 인간의 뒤집힌 추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자신인 사랑을 잊게 만들었소. 나는 사랑의 행동으로 분리했소. 그렇게 되면 사랑이 분리 상태와도 결합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해묵은 신과의 분리도 끝날 수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죽었소,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원리들에 대한 존중에서 형제를 위해서나 자유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소, 많은 성인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죽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고통받았소, 하지만 당신들을 위해 분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사랑은 분리와도 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그렇게 함으로서 분리라는 사실이 단순한 환상으로 전락하리라는 사랑의 정신으로 분리했소, 내가 분리한 사건은 내가 아는 한, 내 실존 전체에서 최극단의 비애였소.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세상의 모든 분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잠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체험을 했소,
이제 은총의 법칙에 따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자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뿐이오. 내가 온 인류에게 조건 없이 준 영원한 기적이 이것이오. 그것은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기적이오. 근본적으로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예전에는 분리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였소. 하지만 이제 그것은 누구라도 진리의 검을 집어들고 베일을 가르는 것으로 끝낼 수 있는 환상에 지나지 않소.
내 죽음이 불러일으킨 기적은 분리를 판단이 아닌 사랑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분리를 끝냈다는 것이오. 내 부활의 기적은 내 몸이 온전해 졌다는데 있지 않고, 인간이 신과 함께 하자 온전해졌고, 분리가 일개 환상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소,
이런 변신은 이제 자신이 사랑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하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환상을 지속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선물을 받아들일 수도 있소. 이것은 지금 인류에게 존재하는 잠재력의 변화에 주목하는 사람 모두에게 무료로 주어진 아버지와 나의 선물이오.
나는 그 선물을 준 사람보다 선물 자체가 더 높이 받아들여졌으면 합니다 준 사람이야 그 선물의 은총을 음미하면서 받게 되면 결국 찾아내게 될 테니까요. 내 많은 친구들과 내 지지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요. 왜냐하면 그들은 내 영광을 지키려 하니까요. 단ㄴ순히 그 선물에 대한 이햑 부족하거나 준 사람이 그들에게 억지로 떠넘겼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회피하게 되는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오. 오히려 나는 그 반대였으면 하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그 선물을 이해하고 널리 받아들였으면 좋겠소.그건 무료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졌소.
오늘날 흔히 간주되는 방식에서 개인의 구원은 내가 요구한 것도 내 사도들이 가르친 것도 아니오. 인간이 구원바든 건 그 자신의 복귀에 위해서이지, 내가 그런 복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오. 구원인가. 모험인가를 결정하는 핵심 고리는 언제나 자유이지요. 판단하고 분리하고 자신을 그릇되게 창조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오.
이제 각자가 자기 나름의 복귀를 추구할 때가 왔소. 낸가 여러번 말했듯이 인과의 법칙이 구조와 물질 실존에 영향력을 휘두르지만 그것이 당신까지 묵고 있는 건 아니오. 물론 모든 물질형상들을 관리하고 동의 없이 극각적이고 정확한 반응을 가져오는 단일정신의 평형이란 건 있소, 또 행동에 대한 결말이란 것도 있소,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로, 그의 자녀들은 그 결말들의 성격에 대해 자유의지를 부여받았소, 당신들을 구원하는 건 언제나 은총과 선택이오.
사실 내가 인류를 위해 했던 일은 유례 없는 선물이었소. 나는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고, 당신 자신인 사랑에 대한 앎으로 돌아가고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소. 분리는 이제 이발 없는 상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꿰뚫을 수 있는 환상이오. 그럼에도 두려워하면서 해변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자신의 판단과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같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상어가 이빨 있는 상어가 될 수도 있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증오로 인해 영적으로 다시연결하길 여전히 두려워할 것이오.
내 선물의 필요성을 야기했던 인간 조건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건 인간들이 빠졌던, 판단이라는 왜곡된 순환이 자유의지를 사실상 붕괴시켰다는 데 있소, 물론 어느 세대나 완전 의식 속에서 신에게로 돌아갔던 헌신적이고 덕성 있는 소수의 영혼들이 있었소. 안타깝게도 대다수 인류들은 이렇게 할 수가 없었지만요. 자신들의 성스런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인간읫기에 더 큰 명확성과 지비의 유산을 남겨놓았소,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스런 상황는 여전히 지속되었죠"
예수가 즉각 확인해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내가 깨달았던 건 이지점에서였다. 어느 누구도 완벽으로 진화할 수는 없다! 완벽은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원래 상태다! 꿰뚫는 명확성을 가지고 나는 개인의 진화를 믿는 것이 왜 함정인지 알 수 있었다. 진리는 언제나 상수이기에. 진화할 수 있다는 건 다만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깨달음을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예수의 설명과 결합핮. 예수는 초월을 이루는 지점으로 영적 개인적 진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는 사시리이 갑자기 명확해져싿. 예수는 무국함의 우대한 권능이 인간 본래의 타고난 존재상태임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의 이름으로 의도적인 분리를 추구하고 있음을 처음부터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가 앞서 또 다른 생으로 지상에 온 적이 있는지 묻고 싶은 생각도 들디 않았고. 또 그럴 기회도 갖지 못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따금 세상에 와서 인간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십중팔구 사실일 테지만, 또 분명한 건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 위대한 계시는 그가 어떤 식으로 우리와 함게 있었는가에 관계없이 그건 언제나 무구함의 정신에서였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똑같은 무구의 정신으로 돌아감으로서 우리는 사랑의 권능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랑이 복구되었음을 깨닫는 데는 며천 가지 방식이 있을수 있소....그것은 평온한 가슴으로 올 수도 있고,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아이의 입맞춤으로 햇살반짝이는 봄날 아침으로 올 수도 있소, 그것이 보편적으로 뜻하는 바는 신의 사랑이 현존한다는 거요. 사랑이 잠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염려하지 마시오. 그건 그냥그런 식으로 보일 뿐이오. 당신이 그걸 다시 추구할 수 있도록요. 사랑은 신비요. 우주의 가장 위대한 신비 말이요.
사랑은 당신의 참모습이고, 규정 불가능의 영속하는 존재의 샘인 신에게서 솟아납니다.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에 무엇이 혹은 누가 그 불꽃을 점화할지는 알 수 없소. 또 반대로 당신이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의 불꽃을 점화하게 될지도 알 수 없소, 세 사람이 함께 여행할 대 처음에는 무리의 한 사람이 더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참된 친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소?
사랑은 선물이고 깆거이며 신비요. 당신이 그것의 문지방으로 이끌리는 것은 당신과의 유사성과 당신의 경향성과 당신 가슴의 갈망 때문이오. 비록 사랑의 권능은 기대나 요구, 필요가 아닌 은총에 의해 드러나지만요. 사랑은 궁극의 역설이오. 사랑은 사자이기도 한 양이니까요. 사랑은 순종 속에 거하는 궁극의 권능이오...
사랑의 권능은 그것이 성스런 에너지와 성스런 자각의 영원성 속에서 시공간이 하나되는 제로점을 지휘한다는 데 있소, 이 거룩한 제로점에서 신은 새이자 미풍이고, 나무이자 흙이며, 배이자 강이고 양이자 사자요. 자신의 사랑 권능 내에서 살 때, 당신은 이 제로점을 경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항은 무너지고 맙니다.
거기에서 거룩한 지금 순간의 모든 이중성은 역설의 기적으로 귀착되죠. 당신은 주는 것으로 받을 것이고, 손에서 내려놓는 것으로 손에 넣을 것이며 용서하는 것으로 용서받을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것이며,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것이오. 사랑의 현존 속에서 일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고, 사랑없이 줄 때 그 선물이 낭비가 되는 이유가 이것이오. 사랑의 신비와 기적은, 사랑은 어떤 대립도 생생한 역동적 역설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있소, 예를 들어 몸의 질병이 영혼의 치유를 불러올 수 있고 경제적 손실이 새로운 삶과 비전의 촉매가 될 수 있소.
사랑이 당신을 위해 꽃 필 대마다 그것에 감사히시오. 그 사랑하는 님을 바라보시오. 그 사람들과 그 상황들은 당신의 친구이고, 당신의 기쁨이 존재하는 지점이오. 사랑을 보지 못할 때라도 적이나 적대 상황이 있다고 예단하지 마시오. 만물과 만인이 다 같은 부류요. 그것들을 축복하고, 그것들을 존중하며, 필요하다면 용서하시오. 무엇보다 사랑을 강요하거나, 사랑이 없다는 죄의식을 심거나,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마시오.
사랑은 강요될 수없소, 사랑 없음 또한 똑같은 감사와 겸손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오. 왜냐하면 그 또한 펼쳐가고 있는 신의의지의 일부이니까요. 사랑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함께 일할 시간이 안직 오지 않아서거나 어쩌면 지나가버렸음에 불과하다는 상호이해로 많은 갈등들을 피해갈 수 있소, 그 대신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는 상대방들을 축복하시오. 왜냐하면 사랑이 현존하지 않을 때에는 겸소과 내려놓음으로 그 짐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소. 사랑은 모든 면에서 수수께끼요
사랑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외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포괄적인 규정이라도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소. 사랑은 신이고 성스런 수수께끼니까요. 사라은 통제될 수없고, 예견될 수없으며, 강요될 수 없고, 묶여 있을 수없으며, 말살될 수 없고, 규정될 수 없소 만일 당신이 사랑의 깊이와 권능과 신비와 무한한 자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모든 이분법을 끝내는 그것의 자질에 대해 생각하시오.
사랑은 대립물을 갖지 않소, 사랑을 사로잡을 수는 없지만 사랑은 기꺼이 봉사합니다. 사랑은 무한하게 자유롭지만 포로로 머무릅니다.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모든 법칙의 토대요 사랑은 진리를 가져오는 자이지만, 결코 판단하지 않소, 모든 상황의 예언자이지만, 절대 비난하지 않고요. 그것은 순종하는 것으로 정복하고, 끌어올리는 것으로 지배합니다 역설로 존재할 수 있는 그것은 신비스런 자질이 모든 이분법을 끝내게 만드는 거죠.
만일 당신이 사랑의 작용에 대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역전이로서 그것에 대해 생ㅇ각하시오. 다시 말해 제3의 안정요소가 있는 속에서 보완하는 두 힘이 양식을 바꾸어 하나가 다른 하나가되는 작용점을요. 궁극의 입자가 실험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오. 그것은 모든 일차 입자들과 에너지 사이에서... 그리고 사랑에 관계하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작용이오. 사랑의 작용을 좀더 잘 이해하고 나면, 수수께끼는 저절로 물릴 것이오"
그는 확실하게 말했다.
"사랑이 우리의 DNA를 바꾸지, 그 반대가 아니오. 생물공학으로 DNA를 바꾸면 인류가 더 높은 차원으로승격되리라고 생각하는 악순환의 함정이 될 수있소, DNA가 바뀌게 만드는 기술자는 사랑이오. 이것을 가속화시키는 데 주요한 장애가 되는 것이 에고이고요. 에고에는 그 사람의 방어기제가 담겨 있거든요. 에고는 사랑의 에너지가 당신의 삶에서 일으킬 수 있는 치유와 기적을 불러오지 못하게 막고 있소.
에고는 언제나 통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고의 성질 깊은 곳에는 무가치하다는 느낌과 좌절감이 있기 때문이오. 수수께끼 같은 프라이버시라는 것 안에 봉해져서요. 좌절감도 무가치하다는 느낌도 다 거짓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창조로 강화되면 그것드은 진짜처럼 보일 수 있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에고야말로 모든 실패의 근원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항하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불러올 테니까요. 에고가 역설과 역전의 불안을 참아낼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 자신이 누군지 알고 나면, 당신이 사랑의 무한한 잠재력으로 돌아가는 순간, 에고도 불안도 다 사라지고 말 것이오.
이 장으 다른 많은 메시지들처럼 이 메시지도 1992년3월12일에 이야기된 것이다. 그날 그림은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어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누리할 부분을 찾는 데 썻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예수와 이야기하면서 보냈지만, 이제 얼마 안 있어 일어날 눈앞에 닥친 변화에 대해 말없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사계를 보았을 대의 시간은 이미 4시30분이어서. 얼마 안 잉ㅆ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할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흩날리는 그의 머리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더 보탤 요량으로 물감 몇 가지를 재빨리 섞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팔레트에서 얼굴을 들자 예수의 모습과 내 눈을 연결해주던 에너지끈이 없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예수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 형상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그가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이 위대한 국면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림은 완성되었지만, 그는 그대로의 명확성을 가지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양으로 온 사자이자 사자로 울부짓는 양이오. 나는 지상에 풀어놓아진 사랑의 생생한 역설.... 그것의 이중성을 끝내는 힘이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퍼져갈 때 그는 타는 듯하면서도 평온한 눈길로 나른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 혼자만에게가 아니라 당신과 인류 전체에게.
"그리고 당신들은 나의 연인이오"
[출처] 끝없는 사랑 547쪽 예수가 즉각 확인해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내가 깨달았던 건.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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