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2장 신과 현실 본문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12장 신과 현실
사랑
2021. 10. 5. 11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일깨우려는 그의 끝없는 갈망에 의해 드러납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자신의 현존이 인간의 가슴과 영혼과 감각들에 사랑으로 가 닿도록 하죠"
이토록 지극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수는 몇 번이나 "신과 현실은 하나"라고 말했다. 예수는 현실에 대한 신의 우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에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게 장담하곤 했다. 왜냐하면 사랑의 지휘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기록된 한 사건을 떠올려주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예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었다. 내가 알기로 이 사건에 대한 예수의 대응이야말로 어떤 문제에서나 예수가 견지했던 우선순위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예수가 보기에 신의 창조현실 속에서 신을 공경하지 않는 모든 의례는 전혀 성스럽지 않았다.
예수가 내게 이야기하거나 나와 함께 나눈 것들 모두가 언제나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가 말한 것들 대부분을 즉각 이해하고 내 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 그가 가르침들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나의 성장과 숙고를 위한 양식이 되어준 것에 비하면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그냥 입만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해준 통찰력이란 보물을 얻게 된 것이 현실과 그것을 주는 자(신을 말함-옮긴이) 양쪽 모두에 대한 그의 배려 덕분이란 사실은 중요하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나열되는 메시지들은 내가 그것들의 의미나 실제 적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 때문에 최대한 상세하게 옮겨놓았다. 이런 나의 이해부족은 몇몇 경우들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전체가. 아니 그것의 반정도라도 어떤 한 사람에 의해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기에 특정분야에서 기꺼이 노력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비옥한 이해와 탐구의 근거를 제공하리란 믿음과 근거를 가지고 내가 다음두 장의 내용을 제시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전문성은 천차만별 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이다.
어떤 메시지나 발상의 가치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실행력이다. 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온갖 발상들을 갖게 된다. 개중에는 굉장한 것들도 있지만, 명백하게 쓰잘데기 없는 것들도 있다. 예수는 말했다.
"현실과 통합된 발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추구해볼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전혀 그럴 가치가 없소. 그 발상이 신에게서 온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으뜸가는 기준은 그것의 현실성을 테스트하는 것이오. 과연 그 발상이 현실적인지, 현실의 의미를 더 높은 의식수준과 적용수준으로 넓혀주는지를 확인해보는 거지요. 신에게서 나온 모든 발상은 현실과 완전히 일치 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그토록 실감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그의 강력한 확신이었다. 예수가 보기에 신은 현실일 뿐 아니라 현실의 근원이자 최고의 현실이기도 했다.
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피조물들을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있고, 하늘과 땅은 사로 다른 차원이라고 믿도록 우리를 가르쳐온 것이 서양철학이다. 이런 류의 사고방식이 가져온 유감스런 부산물
은 모든 것을 위와 아래, 어둠과 밝음 등으로 나누는 철학적 이분법이다. 또 과학은 실제적이고 유용한 지식의 정점을 대변하는 반면, 종교는 오직 무한하고 불가지인 신에 대한 믿음만을 대변한다는 가정 역시 또 하나의 상실을 초래했다. 이렇게 해서 인간 관심의 가장 필수적인 두 영역은 권투시합에서의 양 코너처럼 대립하면서 한 영역의 지지자들이 다른 영역의 생명력을 짓밟곤 해왔다.
예수는 내 앞에 온갖 현실들을 진수성찬으로 차려주었는데, 특히나 그는 신을 현실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현실이란 걸 너무 자주 신의 권능을 빌어 벗어나고픈 가혹한 일년의 상황들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실을 해롭고 적대적인 것으로 판정하면서. 신은 그런 현실과는 아득히 먼 곳에서 천사와 축복받은 영혼들, 그리고 거룩한 음악에 둘러싸여 거하시니다는 믿음을 매게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은 자신의 창조물들과 떨어져 있지 않소. 당신들은 신을 현실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현실이 가혹한 것이 되도록 허용했소.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직면하기 어려워하는 건 그들이 지배 구조들 안에서만 움직이면서 신이 그들을 포기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그 모든 시련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이런 무지와 선입견과 혼한은 신이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믿을 때 더욱 커지죠. 당신이 신을 현실에서 배제할 때 현실은 더도 덜도 아닌 구조와 견해와 환상과 혼란 자체로 쫄아들 수 밖에 없소. 하지만 현실은 당신이 그것을 보려고만 한다면, 살아 있는 기적이오!"
예수의 이런 단언이 내 내면의 느낌과 유보조건들을 표현하게 만들었다.
"신이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바람에 우리가 더 심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당신의 설명은 인정해요. 하지만 이 세계가 그토록 경이로운 우주라면 왜 우리가 고난을 우선적으로 겪어야 하나요? 왜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이 물음에 대답하는 예수의 눈은 자애심으로 그윽했다.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건 믿음과 의식을 쌓기 위해서요. 신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특질의 강력한 두 측면이 이것이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상반되는 온갖 다양한 체험과 느낌들을 제시할 수 있는 현실 차원에서도 단련되어야 합니다 . 의식이란 온갖 다양한 인식들로 가득한 영겁의 체험과 자각들이 압축되고 통합되어 나오는 산물이거든요.
당신의 체험이 풍부해지고 깊어지고 완벽해지는 데 따라 의식도 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의식은 이천 년 전의 그것보다 더 커져서 그 당시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통찰들에 이르게 되었소, 의식은 믿음과 결부되어 있소, 믿음이란 올바른 행동이 가져올 열매에 대해 그 영혼이 갖는 확신이니까요. 하지만 믿음을 벼리려면 상반되는 상황들을 강하게 압축함으로써 그 사람의 확신을 심각하게 뒤흔드는 상황이 있어야 하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뻔히 안다면 어떻게 믿음이란 게 존재할 수 있겠소? 노력이나 위험 없이 만사가 다 제공된다면 무엇이 당신을 충분히 의식적이 되게끔 자극할 수 있겠소?
재미있는 건 믿음과 의식 둘 다가 비슷한 환경에서 단련된다는 거요. 가장 잘 벼려진 무쇠처럼 믿음과 의식은 강함과 참됨을 드러냅니다. 어떤 형혼이 이렇게 믿음과 의식을 이루고 나면 모순되는 현실의 혼란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되죠. 하지만 그때까지는 당신의 믿음과 의식이 깨어나고 완성될 수 있는 여러 다양한 경험 수준에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진리의 권능을 발견하는 건 이런 갈등 속에서요.
순수하고 무구한 발현으로서 신의 현존은 어떤 현실에서라도 체험할 수 있소. 이로부터 의식이 태어나죠. 당신이 조화와 완벽의 여러 유형들과 보편상수들을 찾아내게 되는 것도 당신의 현실 인식 안에서고요. 더 위대하고 더 단순하고 더 의미 있게 삶을 통합해주는 게 이런 진리들이오. 그 같은 진리들이 의식 없는 고역스런 삶에서 당신을 끌어올려 더 큰 명확성과 목적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거죠. 따라서 당신이 높고 완전하게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그 체험 자체가 신의 실재를 확인해줄 거요. 이점을 증언해주는 건 당신의 믿음이고요."
예수에 따르면 진리는 청사진과 건물 간의 관계처럼 현실을 복제 해주는 원형 공리나 원형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들은 진리를 역사적 상대성과 이상론적 개념들에 위탁하고 만다. 게다가 신의 권위보다는 인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게 이데올로기들이다.
"우주의 제1상수는 시공간에서 벗어나 있기에 의식의 높이와 깊이를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진리는 현실을 초월하여 그것을 단순한 이해로 녹여버립니다! 또 그것은 당신을 의존과 조건의 한계들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하죠.
진리는 항상성의 권능이요. 항상성 없이는 청사진과 건축물, 혹은 의식과 현실 간에 어떤 상호관계도 있을 수 없소, 진리는 건축물도 청사진도 아니고, 차라리 합일과 인과의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는 항상성의 권능이오. 항상성 없이는 진리가 있을 수 없는데, 진리 없이는 의식이 있을 수 없고, 믿음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소.
정직은 대단히 중요한 특질이오. 왜냐하면 그건 그 사람이 진리를 공경한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런데 진리는 믿음에 차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 이상이오. 양심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보니, 그 사실이 바뀌거나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소?
불변의 상수가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한 인간은 변화하는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 안에서 다시 온전해질 수 있소. 개개사람이나 개개상황 안에는 외부 형태의 변화에 관계없이 지배적인 항상성의 요소가 있소, 이 상수가 드러날 때마다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항상적 요소들은 비합리성 안엥서도 기쁘게 찾아낼 수 있소, 이것이 유머의 권능이고, 인산의 영에 미치는 그것의 치유력이오.
진리가 현존하면 균형이 되찾아집니다. 그와 더불어 실존 현실의 무한한 지평을 교차시키고 안정시키는 신과 고귀한 의식의 수직적 확장이 이루어지고요. 현실은 무한한 실존 방식들로 수평적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이건 사실이오. 무한한 현실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삶을 뒷받침하는 데 당신의 동의나 앎을 필요로 하지 않소. 당신이 뭘 할 수 있는지만 알고, 나머지는 당신 앞에 펼쳐질 미래로서 존중하시오. 일살 삶을 통해 당신은 신이 당신 앞에 놓은 것들에 대한 자각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요"
예수는 우리가 집단으로 현실 인식을 쌓아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현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거대한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고 나서 비교 관찰로 전체를 짜맞추고자 하는 '맹인들'과 흡사하다. 하지만 현실의 자비로운 면은 우리가 체험들을 비교할 때, 그것들이 솔직하게 보고되는 한, 그런 체험들이 우리가 추구하는 앎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은 현실은 우리의 자각 정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개인들이 나름의 현실인식을 가져온다 해도 현실이라는 직물은 특정 이해관계나 심지어 특정 지식에 대해서조차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 없이 자신의 쉼없는 과제들을 이행하는 방식으로 일관성과 측정가능성, 비편향성, 균질화된 예견성을 가진다.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현실은 실존하는 신의 끊임없는 현존이다. 진리는 항상적인 상수를 드러내어 이 현존을 밝혀준다.
"진리는 현실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명확성과 확실성을 부여하여, 현실에 예견가능성과 조작가능성을 가져다주죠. 진리의 기적은 그것의 항상성이 안정된 상황들에서만이 아니라 유동적인 상황들에서도 똑같이 은혜롭게 나타난다는 거요. 진리는 고정된 이념이나 공리에 집착할 필요가 없거든요. 오히려 진리는 구조에게 그러하듯 고정된 이념을 확실하게 산산조각내죠."
예수는 몇 번이나 우리가 구조의 환상적 성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현실 안의 기적적인 잠재력을 밀쳐내고 만다고 설명했다. 예견 가능한 질서가 완전하게 해체되는 건 굉장한 충격이다. 설사 그것이 크나큰 축복을 가져다준다 해도! 구조가 자신의 환상적 성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린다. 특히나 우리가 신보다 구조를 더 확신한다면,
"기적은 삶의 기적적인 성격을 받아들이고, 그 체험에 자신을 순순히 내맡기는 사람에게 오죠. 창조주는 시도때도 없이 당신을 현혹시킬 테지만, 그건 단지 당신의 주의를 얻기 위해서일 뿐이오. 창조주가 현실의 기적적인 잠재력에서 당신을 떠어내기 위해 당신을 현혹시키는 경우는 결코 없소. 이건 현실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완성시키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 측면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헤아려질'수 없다.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 자체가 구조화되어 있는 데다가, 예견 가능한 인과 유형들에의해 한없이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기적을 설명하는 건 말할것도 없고, 기적을 이해하는 것도 절대 불가능하다.
'신은 당신을 기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과 더불어 존재하고 당신 앞에 존재하는 그의 현존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요. 인간이 기적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는 건 두가지 집착 때문이오. 하나는 구조에 대한 의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모든 환상에 필적할 수 있도록 실존을 재창조하기 때문이오.
신의 모든 자녀들은 공유된 현실 안에서 가장 확실한 공동창조자들이고, 사실 당신들은 창조 현태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발현시키고 있는 거요. 하지만 당신 혼자서 창조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큰 공통 현실이라는 바탕이 있소, 따라서 실존 토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불안보다 더 커져서 한정된 공급원에 대한 당신의 의존을 제거하는 지점에 도달해야만 하오.
이런 확신이 없는 건, 장담컨데, 신보다 구조를 더 믿기 때문이오. 기적을 가장 크게 훼손하는 것이 예견 가능하고 제한된 구조에 대한 지배를 내려놓아야 하리란 두려움이오"
예수는 우주를 지휘하는 건 사랑이라는 점을 내게 항상 상기시켰다.
"사랑은 신이면서 당신인 것이오.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씨앗이 이미 당신 안에 있소, 만일 기적을 받고자 한다면, 그냥 고요히 있으면서 사랑의 발현물들을 받아들이시오. 사실 당신들은 대부분의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소, 삶은 워낙 기적으로 가득해서. 기적 없이는 삶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사랑은 모든 기적의 원천이오. 사랑이 기적들을 현존케 하죠"
마침내 나는 기적이란 사랑과 삶이 자신들을 뒤로 잡아당기는 환상의 베일들을 뚫고 나갈 때 발휘되는 성장의 권능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의 영향과 기적을 불러오는 사랑의 능력에 초첨을 맞추는 사람에게 기적은 이제 삶의 기대 부분이 된다. 하지만 그가 사랑과 삶의 위대한 권능을 부정하는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면 생겨나던 기적이 갑작스런 놀람 정도로도, 아니 충격이나 협박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기적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현실의 기적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의 온전함은 전혀 손ㄴ상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현실은 사람마다 다른 체험을 제공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요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존 자체의 본질이자 현존이어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인식과 체험과 기여와 희망과 꿈들을 이것에 가져가는 거요"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현실이 무척이나 유동적이고 호의적이어서 인과의 그 끝없는 고리가 잠시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런 평온은 역동적이고 전체론적 실존 유형 속에서 인과의 위치에 대해 물었던 최조의 내 과학적 질문들 중 하나를 내뱉게 만들었다.
그의 대답은 비유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사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성스런 지금은 바로 신의 현존이어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모습을 취하죠. 이것은 모든 잠재성이 환벽한 교감 속에 거하는 완벽한 공시성의 상태요. 이것이 실존의 영원한 시작이자 끝이요. 하지만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지점에서 교감이 대화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전체의 다양한 부분들이 대화를 실존 속으로 불러들이는 거죠. 이렇게 전체의 부분들이 서로 북돋우면서 상호작용하기 시작할 때 진행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요.
결국에는 상호작용의 유형들 속에 모순과 부조화가 나타나는데. 그 밀도가 점점 짙어지면서 조화를 위한 여백을 재공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죠. 그렇게 되면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거리가 필요해지고, 원인과 결과가 커큐니케이션의 토대가 되고요. 다라서 진행과정으로 보면 완벽한 공시성으로 시작했던 것이, 조화로운 대화가 되고, 마침내는 인과의 작용에 이르게 되는 거죠.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찾을 수 있소 부족사회들은 소박한 교감으로 살아가죠.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발달하면, 도시의 밀로와 갈등들이 많은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웃 간에 더 많은 거리를 갖기 위해 농촌지역으로 되돌아가죠.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잡한 도시 속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상호성을 통해 더 많은 조화를구하는 것이 될 테고요"
이런 비유가 전재되는 동안. 나는 인과의 법칙이 분리상태와 분리적 사고방식을 지배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에 생각을 모으고 있는지를 알아챈 예수가 재빨리 지적했다.
"케뮤니케이션의 세 차원은 우주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완벽한 공시성 속에는 절대 교감이 존재하는 반면, 분리라는 다른 편 극에서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죠. 인과는 시공간을 가로질러-특히 갈등이 있어온 곳에 -전달하고 균형을 다시 잡는 보편 수단이오. 어떤 사람, 아니 미립자까지도 분리상태에서 좀이라도 평화나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건 인과의 법칙에 대한 불변의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오. 또 이 두 극단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의 법칙이 상호 존재하고요. 요약하면 실존의 조화, 형제애의 상호성, 신과의 공시성, 이런게 바로 은혜의 법칙이오.
과학이 최근까지 관심을 기울였던 대부부의 우주는 개별 입자와 질량의 영역인데. 이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죠. 하지만 이 영역에서 완벽한 정지 및 상호성이라는 다른 영역들로 옮겨가는 데 필요한 거리는 아주 짧소. 게다가 이제 사람들이 이 거리를 메꾸고 있으니, 앞으로는 엄청난 소도로 이해가 가속화 될 거요! 사실 지금도 과학적 사고방식 안에는 상호성에 대한 여러 인식들이 들어 있소, 얼마 안 가 과학은 완벽한 공시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거구요. 이것이 상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의 다른 모든 차원들에 생명에너지를 공급하는 드러나지 않는 순수 잠재력의 무한성이오.
우주 전체는 안팎으로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완벽한 공시성의 관점에서 압축과 팽창의 끝없는 리듬이 존재하오. 압축과 팽창은 우주의 큰 숨이오. 우주질서를 낳은 완벽한 압축은 결국 팽창에 길을 내어주었소, 이들 매동하는 리듬들은 소리의 근원을 제공하면서 침묵과 폭발을 교대로 불러오죠 침묵과 푹발의 연속되는 리듬은 독특한 음조와 개개 생명에너지로서 모든 것 속에 존재하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자기 나름의 노래, 자기 나름의 음색을 갖는 거죠"
이것은 예수가 우리의 대화에서 이런 소리들이 우리의 안녕에 미치는 역할과 관련해서 논급했던 유일한 대목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런 언급에서 음악은 우주 노래의 맥동하는 경이로운 리듬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압축이란 내가 평소에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지만, 생각해봤다 하더라도 대개는 자동차 엔진처럼 에너지 발전설비와 관련해서였다. 우주 창조처럼 영광스런 주제의 경우, 아마 나라면 더 시적인 용어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압축과 팽창이라는 용어들로 현실의 두 핵심 유형들을 그려보여주었다. 예수는 여러날에 걸친 대화의 상당 부분을 압축이 삶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을 설명하는 데 보냈다. 하지만 예수는 더 높은 차원에서 압축이 미치는 영향에 내 주의를 돌림으로써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그 주제의 하중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그는 '압축의궁극 표현이 동시성'이라고 말했다. 동시성이란 모든 잠재력들이 그냥 공존하는 완벽한 균형의 '제로점'이다. 우리는 아직도 동시성을 체험할 때마다. 즉 우리가 '한번데 두 곳에' 있을 수 있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정말로 감정이입을 경험하거나 우연한 일치의 기적이 시공간의 권능을 통해 신은 새와 미풍, 물고기와 바다. 당신과 나, 양쪽 다와 함게 있을 수 있다.
동시성 과 공시정이 우리가 쓰레기 압축기로 연상하는 뼈까지 으깨버리는 압축을 말하는 건 아니다. 예수는 완벽한 압축은 갈등이나 고통, 파괴가 아니라 무한한 잠재력의 투명한 공존상태를 불러온다고 강조했다. 압축은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우리와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의 조화를 구하지 않고 인과의 결과들을 존중한다면, 사실 우리는 '꽝'하고 '펑'하는 방식으로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는 우리들 각자와 만물 안에는 압축을 불러일으키는 자력 중심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는 우리의 안녕 전반에 대단히 중요하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기적이 압축 유형들에 상응한다는 건 분명하다 내가 보기에 압축은 우선 원자 입자의 소우주 속에서 자기적으로 활성화되고 이어서 여러 다른 압축들을 끌어당기고 붙잡아 분자 차원의 밀도형태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여러 동심원들을 가진 하나의 바퀴처럼 압축은 같은 성질의 것들끼리 서로 끌어당긴다. 이렇게 하여 대등함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 정도의 밀도가 쌓일 수 있다. 비록 대등함을 잃을 때 열에너지가 생겨나긴 하지만, 압축은 밀도에 밀도를 쌓아간다. 그러고 나면 충돌하는 마구잡이 요소들이 그 공식 속으로 들어와 특정의 구조배열로 모양을 띄어가기 시작한다. 압축의 이 수준에 이르면 조직이 공시성을 대신하고, 힘이 에너지를 낳는다. 이것이 물질 밀도의 수준이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힘이다. 완벽한 공시성으로부터 조화와 조직으로의 진행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수준이 높아질 때마다 더 큰 밀도와 더 복잡한 구조패턴이 형성된다. 이런식의 진행은 커뮤니케이션의 세 단계와 팽행을 이룬다.
예수는 우주 전체가 압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것이 바로 에너지 법칙이라고 말했다. 압축은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반면에 팽창은 그것을 내어놓는다. 또한 예수는 모든 압축이 새로운 에너지를 낳는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요? 우리는 학교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양은 고정되어 있다고 배웠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에너지가 끊임없이 창조된다고 하시는군요"
예수는 웃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자제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자신이 말한 바대로라고 하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특정 이해 수준에서 타당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친절하게 덧붙었다.
"그것은 분리되어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의 영역에서는 타당한 설명이오, 하지만 그 법칙에는 한계가 있어서 우주에 불변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더 큰 힘인 자력과 궁극의 권능인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법칙도 재평가를 받을 것이요"
"이런 사랑에서 나오는 전위 상수가 있소. 비록 그것의 순생산에는 전혀 한계까 없지만요. 사랑에서 나올 수 있는 산출은 말 그대로 아무런 한계가 없어서, 새로운 압축이 생길 때마다. 더 많은 산출을 낳게 되죠. 고온 핵융합이 끝없이 진행되어 구조를 소진시키더라도 우주가 계속해서 팽창하는 건 이런 권능을 통해서요"
예수는 고온 핵융합이 제1본질이 아닌 구조만을 소진시킨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고온 핵융합에 대한이런 언급은 열역학 법칙들에 대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예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 일부인 보존의 법칙처럼 열역학은 열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밀도 영역과 관계가 있소, 그런 밀도 영역과 관련해서는 이 법칙들이 실용적이요. 그렇다 하더라도 열역학에는 존재 천체를 논리적으로 통합할 수 없게 막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소, 열역학은 에너지를 대우주 체계 내에 존재하는 물질의 작용으로 규정하는데, 문제는 여기서의 대우주 체계가 무한한.불가지'라는 부동의 배경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것이오. 달리 말하면, 무한을 나머지로 남겨둔다는 거요! 이건 독점욕을 말해주는 거요. 지배할 수 없는 건 무시한다는 식의..."
"그렇다면 압축을 만들어내는 건 뭔가요?"
"사랑... 무엇보다 우선적으로,그리고 언제나요! 압축을 만들어 내는 건 사랑이오. 사랑은 모든 걸 집합 안에 끌어들이니까요. 사랑은 결합에 불을 붙이죠. 사랑은 입자들을 결합하고, 관계들을 형성합니다. 그 물리적 대리인이 자기요. 이 힘이 물리차원에 적용된 것이 압축이고요"
예수가 자기란 용어를 사용할 때, 우주에 원초적 자기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는 건 명백했다. 예수는 이를 '흡인 영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창조적 잠재력의 이 기본 상태는 직접적이고 공시적인 방식으로 의식적인 자극에 뚜렷하게 반응하고 난 다음, 우리가 질량과 구조의 세계에서 참이라고 관찰하는 자력이라는 퍄생 행동을 조건짓는다. 언젠가 나는 온전한 원초 본질 안에 어떻게 '영역들' 이란 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예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위(잠재력)에 적용되는 의향이 그 의향의 충격 정도와 같은 '외전'반응을 만들어내니까요"
따라서 이런 창조행위들을 묘사하는 경우들에 예수는 자력 소용돌이(보테스)란 용어도 사용했다. 그런 용어의 사용은 내가 전제하는 것보다 '더 앞선 시초'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이 여겨졌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렇게 창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우주는 아직도 그 모든 것을 시작케 했다고 추정되는 엄청난 폭발의 여세 속에 있다는 현대 과학이론의 타당성이 입증될까요?" 내가 언급한 것은 '빅맹'이론이었다.
"글쎄요. 폭발이 일어나기 우이해서는 먼저 압푹이 있어야 하오! 그런 정도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압축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을 거구요. 과학이 관찰했던 건 이런 압축이 일으킨 결과였소, 그토록 강력한 압축이라면 그 발산 또한 그만큼 강력하지 않을 수 없죠. 따라서 그 엄청난 폭발을, 무한 공급에서 유한 공급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불의 벽'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소. 지금까지의 논리와 방법으로는 이점을 꿰뚫을 수 없었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좀더 알기를 원했다. 창조를 놓고는 다양한 설명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나는 이 구절이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것속에 스며 있고 모든 것으로 존재하는 오직 한 영밖에 없는데. 어떻게 공(허)이 있을 수 있는가? "공은 무엇이고 압푹이란 뭔가요? 게다가 빛이 있기 전에 어떻게 물 같은 복합물질이 존재할 수 있나요?"
"공은 한 영안에 창조된 자기 소용돌이였소, 그것을 통해서 금강입자들이 집합 속으로 끌어들여졌고요"
그런 다음, 예수는 고대식 상징론에서 물이란 게 물이라는 용액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의 영향과 반응도 표현한다는 설명으로 나아갔다.
"성경시대의 상징론에서 '물'은 곧잘 자기를 상징하는 용어였소"
그제서야 나는 창세기의 첫 구절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달의 자기력을 밀물과 결부시키고, 물의 요소를 자장이나 자기적 속성과 결부시킨다.
"금강입자들은 신의 살아 있는 몸이오. 그것들은 밀도로 압축할 수도 있고, 무한으로 팽창할 수도 있는 유일한 입자들이오. 그것들은 밀도의 차원과 무한한 잠재력의 영역 둘 다에 똑같이 속해 있소, 그것들은 집합 속에 끌어들여져 압축되었기 때문에 요소의 범주들과 하위 범주들이 만들어졋소,
금강입자들의 첫 번째 압축은 빛을 만들어냈소, 하지만 이건 제1 빛이었소, 그건 의식하는 영혼에게만 보이고, 흔히 천국이라 부르는 더 높은 차원에서 상존하는 빛이오. 햇빛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압축은 이 빛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소. 당신이 해에게서 받는 것은 여러 압축 차원들이 만들어낸 복합 결과요. 압축을 뒤집는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광자들이 방축되었는데. 이것이 제2 밀도의 빛이오.
대폭발 전에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제1밀도의 압축 속에 있어서 오직 끊임없는 빛만이 존재했소. 당신이 아는 대로의 에너지 및 공간 현상을 드러내는 팽창 입자들의 고삐 풀린 힘이 생겨난것이 이 폭발로 인해서요. 그래서 요소들 간의 차이가 드러날 수있었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 낮과 밤이 있게 된 거요. 이렇게 해서 둘째날이 마무리된 거고요"
게다가 예수에 따르면, 각각의 날들마다 나름의 전형적인 창조행위들이 이루어졌다.
"매폭발 이후에도 압축은 계속되어 마침내 항성들의 창조를 가져왔소, 하지만 항성들이 창조될 수 있으려면 먼저 창조의 세 번째 행위인 물들의 분리와 물의 설정, 식물의 생산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소.
성경에도 해가 있기도 전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예수는 물들의 분리가 자장의 행창 및 개별 소용돌이들의 활성화와 연관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창조의 세 번째 행동은 자기 소용돌이의 증가요. 압축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소용돌이가 있어야 했소, 왜냐하면 이제 우주는 팽창하는 양식으로 있게 되었기 때문이오. 이렇게 해서 딱딱한 물질 속에 존재하는 소용돌이들과 하늘에 존재하는 소용돌이들, 유기체의 형태를 낳기로 되어 있는 소용돌이들이 있게 되었소. 세 번째 날에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소용돌이들 안에서 전위의 차별화가 진행되었지요. 그럼으로써 압축은 특정화된 발현영역들 속으로 확장될 수 있었고요."
만일 당신도 나처럼 아직 해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세 번재 날에 어떻게 나무와 풀들이 자랄 수 있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면, 그 대답은 나무와 풀들이 나중에 가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토대가 형성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잠재력은 자기 소용돌이의 증가를 통해서 커져갔다.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자신 안에 자기 중심을 가지고 있소, 이것이 생명이 오늘날까지도 지니고 있는 조인된 목적 할당이오"
이 순간에 나는 예수가 말한 바에 내재된 또 하나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예전에 녹은 철덩어리가 타고 폭발하고 있는 것이 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예수는 이제 막 우리의 태양은 강력한 자석이라고 진술하지 않았는가! 내가 더 구체적으로 묻자 예수는 해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꼬, 반감기의 진행도에 다라 앞으로도 언제나 어느 정도는 이런 식일 거라고 대답했다.
"당신들의 태양은 엄청난 수소가스를 자신에게 글어당기는 자기 소용돌이를 가지고 시작되었소, 그것은 수소원자들을 차례로 끌어당겨 그것들을 압축시겼소, 수소가 압축되자 엄청난 열이 발생하여 열에너지가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변성을 시작했소, 이것은 절대온도 5백만도와 1천만도 사이에서 일어났소, 압축의 수준이 새로워질 때마다 더 많은 열과 더 많은 에너지 변성을 낳았소. 헬룸은 도위원소 12인 탄소로 바뀌었고, 다시 산소와 네온, 마그네슘, 규소, 유황, 아르곤 칼슘으로 바뀌었소, 그리고 변성이 일어날 때마다 더 밀도가 높아져, 자기 중심의 둘레에 딱딱한 고리를 만들어갔소. 시간의 이 지점에서 해는 아지곧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자석은 훨씬 더 강력해지기 시작하고 있었지요. 절대온도 5천만도 이상에 이르는 활기찬 가열의 최종 결과가 철의 형성이었소. 이전 요소들을 변성시킨 결과로 철이 나타나게 된 거지요.
달리 말하면 해는 단단한 물질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거요. 수소에서 압축된 이전 요소들이 압축되어 마침내 철이 된 거요.
젊은 별의일생에는 결정적인 지점이 있어서. 철로의 변성이 눈깜짝할 새에 일어날 수가 있소, 만일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급격하게 일어나고 별의 크기가 거대하다면, 핵 전체가 철로 가득해질 수 있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엄청난 내부폭발이 그 별의 폭발을 불러오죠. 이것이 초신성이오. 초신성은 젋고 거대한 별들의 경우에만 일어나는 것이어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죠.
나는 우리 태양의 미래가 특히나 궁금했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둘 중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소. 다소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철로의 변성이일어나 중심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소. 그렇게 되면 태양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자석이 되지 않죠. 태양은 그 지점에서 한정되는 역사. 한정되는 일생을 갖게 되죠. 이건 죽어가는 백색 왜성이오.
그런데 살아 있는 백색 왜성도 있소. 철로의 변성이 여전히 일어나면서도 그 중심이 아직도 활발한 자기활동을 하는 별들이 이런경우요. 당신들의 태양이 이런 별이오. 당신들의 태양은 살아 있는 자력이오. 그리고 태양계 내 유기생명체들의 발달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마도 우리의 신체적 안녕이 태양의 자력과 조화롭게 공명하기 때문에 예수는 하루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태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기라고 권고했을 것이란 생각이.
예수는 말했다.
"모든 생명형태들 속에는 자기 중심이 있는데. 이 의식과도 관련이 있소, 모두가 압축의 산물들이고, 사랑의 지휘를 받으면서 희망에 차서 나아가죠"
예수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압축이 창조의 부수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중심 활동임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내게는 영의 단일성이 물질 발현의 무작위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압축인 듯이 보였다. 우리가 무작위성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필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 게다.
"성스런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과 생명력 자체의 원천일 뿐아니라 당신의 자력중심이기도 하오. 당신 생명의 중심 자체가 거대하고 강력한 자석이오. 그렇거늘 자기 외부에서 목표를 구하는 것이 어찌 오류가 아니겠소?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외부에서 찾는 세상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가 이것 아니겠소? 그들은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문서들을 연구하거나 목표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떠돌죠. 자기 외부에서 목표를 발견하는 길에서 있는 온갖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면서요.
당신이 아버지의 창조물들로 넓혀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우주가 창조된 바로 그 원리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렇게 해나가야 하오. 그리고 창조의 첫째가는 원리는 물론 사랑이고요. 당신이 사랑이오. 사랑으로서 당신은 자신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올 권능을 가지고 있소, 사랑으로서 당신은 삶이 필요로 하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와 모든 형태의 공급에 불을 당겨 압축시킬 권능을 가지고 있소"
내가 신이 어떻게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압축의 궁극 표현이 동시성이오. 그 거룩한 근원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에너지, 모든 발현을 압축하죠 현존과 자각과 발현의 순수하고 완벽한 동시성이야말로 신만이 갖는 독특하고 전지전능한 권능이오"
이것이 궁극의 압축상태이고, 이것이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것은 '제로점'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일치와 동시적 커뮤니케이션과 동시적 이해 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균형점에서 따라서 신은 나와 함께 여기에 있으면서 중국의 누군가와도 있을 수 있고 말 그대로 우주 전체에 걸져 있을 수 있다! 그는 어떤 입자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에 신경쓸 수 있다. 새들이라고 그의 자각을 피할 수 없고, 새들이 뚫고 나는 공기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완벽하고 완전한 동시성이다. 즉 신만이 지닌 독특하고 전지전능한 권능이다.
동시적 시행과 공시성은 확장을 통해 사랑의 자녀로서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차원들에서 동시적으로 살아가고 작용한다. 그것을 명백하게 말해주는 한 예가 우리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숨쉬고 우리 가슴은 뛴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 비록 우리 몸은 지상에 붙박혀 있지만 우리 영혼은 천상에 가 닿는다. 이것이 그 가장 순수한 형태에서의 동시성이 아니겠는가? 한번이라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혹은 상실감과 획득감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동시성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안다. 예수가 요약했듯이
"당신은 지금까지 되어왔던 그 모든 것인 동시에, 당신이 앞으로 될 그 모든 것들의 씨앗이 당신에게 있소, 여기에 무슨 갈등이 있겠소? 그냥 약간만, 정말로 약간만 주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어제에서 내일로 갈수 있소, 다시 한번 약간 주의를 바꾸는 것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자는 상태로 갈 수 있구요. 그 잠자는 상태가 당신의 본성을 바꿀까요?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오. 전적으로 완전하게요. 당신은 모든 능력이 동시에 작용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않소?"
일단 우리의 주의가 이 점에 집중되면 이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우리는 일직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 전문화에 적응해왔다. 이런 적용은 우리로 하여금 원인과 결과가 삶의 작동방식에 대한 유일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해하려는 욕구가 인과의 설명만으로 다 해소되는 건 아니오. 물론 인과의 결과를 이해하는 건 대단히 중요하오. 하지만 상호성과 공시성을 이해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오. 이해의 이 세 차원모두가 추구되어야 하고, 관련이 있을 때마다 삶에 적용되어야 하오"
자신에 대한 합리화가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기를 요구하면 얼마든지 편의적으로 무시하면서도, 일직선 결과의 협소한 틀을 넘어 그에게 참된 해답을 줄 더 큰 시야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인간의 역설을 깨닫자 나는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 세 유형의 상호작용 모두를 우리의 이해 속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나아지리란 사실이 난생 처음으로 내게 명백해졌다.
"그것의 주된 원인은 전문화에 있고, 부분적으로는 물리 현실에 대한 인간의 지시기 욕구가 물질 요소를 제1원인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오.
먼 옛날부터 인간은 제1원인을 물질 우주 안에서 찾아왔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소, 인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파생적인 것이오. 제1 근원은 있소, 신이 바로 그것이오. 하지만 신성한 의식의 가슴속에는 완벽한 발현과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의도만이 존재하오. 이것을 원원인 이라 여길 수도 있소.
제1의 물질원인에 대한 탐구는 무한히 계속될 수 있지만 결코 성과 있는 수확을 올리지는 못할 거요. 원인을 결과의 주인으로 신성시하려는 갈망이 셀 쑤 없이 많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으로 가득한 댇본을 써왔소, 거기다가 그것은 과학발전의 특정 진로들을 막아왔소. 인과는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요. 사실 삶의 한 국면에서는 닭이 달걀보다 먼저지만, 또 다른 국면에서는 달걀이 닭보다 먼저지요. 하지만 어떤 국면도 삶의 모든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더 큰 포괄 없이는 이해될 수 없소"
"그렇다면 왜 인간은 고집스레 원인을 결과의 주인으로 신성시해 왔을까요?"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동기가 있어서였소. 인간이 인과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하면, 그는 자신의 '처벌에 의한 통제'일정 또한 어떤 허점도 없이 정당화해낼 수 있게 되요. 내가 당신들과 신과의 기나긴 분리를 끝내려면 용서하고 내려놓고 더 큰 은총의 권능을 관찰하라고 부탁했던 이유가 이것이오. 신과의 그 오랜 분리로 당신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현실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어떤 상황이든 가능성의 전체 스펙트럼 안에는 인과의 유형과 상호영향의 리듬. 그리고 완벽한 공시성이 존재하오. 그 중에서 당신의 선택은 당신이 초점을 맞추는 그것이오. 따라서 많은 경우 당신이 내린 선택이 당신의 지혜를 반영하죠. 인과가 가장 많이 관계하는 경우에 인과의 결과를 피하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오. 하지만 상호부조의 영역에서 은혜와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소.
이곳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면서 온갖 창조 가능성을 가진, 무한히 효율적인 우주요. 당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건 당신 삶의 목적과 봉사와 완성의 길을 계시해주는 것이오.
당신이 능력의 한계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구하시오. 나는 그것이 상호 존중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오"
이것을 이해하는 건 전체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붙잡는다는 뜻이다. 전문화가 우리 자신인 더큰 전체로부터 우리를 테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는 실존과 그것의 여러 차원들에 대해 한정된 인식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압푹은 우리가 사는 삶에서 지울 수 없는 부분이다. 압축은 전체 실존의 일부이다. 비록 관련 갈등이나 조화의 다양한 정도에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이런 다양한 압축 수준들에 대해 고려하길 권했다.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압축상태들을 다시 살펴보기만 해도 당신의 삶을 다시 책임질 수 있소, 어둡고 밀도가 무거운 경우에는 양립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압축되어 있기 마련이오. 그럴 때는 그냥 뭔가를 바꾸고 뭔가를 놓아버리고 뭔가를 옮기시오"
예수는 "완벽한 압축은 갈등이 아니라 투명한 중첩상태를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이 투명한 중첩상태는 많은 압축들을 끌어당기고, 제자리에 붙들어두는 자기중심과 완벽하게 양립한다. 이것들은 우리 삶에 존재하는 다양한 투명충돌이다. 이 완벽한 압축상태로부터 우리는 다른 모든 발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동시적 자각이라는 훨씬 투명한 중첩이 존재하는 곳을 확인하시오. 삶의 이 영역이 삶의 엄청난 정당성과 신과의 합일이 존재하는 곳이요. 당신들은 이 영역이 당신들을 위한 의미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오. 이런 것들을 강화하여 당신의 삶 전체가 다층화된 단순성을 가지고 확장할 수 있게 하시오."
압축의 다음 수준은 협응과 상호작용이다. 비록 그것에 질서가 있다고 해도 이 수준에서는 더 많은 저항이 생겨나기에 열에너지의 발생을 초래한다. 활기차고 생산적인 이런 압축들은 운동선수의 무용담에 비견될 수 있다. 올림픽 주자가 세계기록을 갱신했을 때, 그가 해낸 건 무엇인가? 그는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이런 게 압축이 아닌가? 그런 압축들은 자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열정적이다. 우리 또한 일을 해나가면서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에서 희열을 맛보곤 한다. 우리는 뭔가를 능가하고자 하며, 그런 도전을 즐긴다. 솔직하게 말해 소비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할 때 우리는 고무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가 이 수준에서 삶을 너무 많이 소비하는 것에 주의를 주었다.
"더 많은 열기와 에너지가 있는 곳이니만치 당신은 함께 작용하는 여러 협응력들을 갖게 되죠. 아마도 당신은 그런 역동적인 행동을 무척 즐길거요. 하지만 그 불이 당신을 소진시키기 전에 그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아내고, 그것이 당신을 위해 지닌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마침내 다른 행동들로 옮아갈 수 있게 될 것이오. 여기는 당신이 영원히 살기로 되어 있는 자리가 아니요"
압축의 세번째 수준은 구조의 특별한 집합체를 이루는, 두서 없는 부정할 요소들을 강제로 조직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 물결 밀도의 수준이고, 익히 알고 있는 다양한 조직과 갈등과 세력이다. 이 특정 차원은 우리를 대단히 좌절시키는 차원이다. 압축과 관련해서 우리가 지니는 경험이 오직 이것뿐이라면, 과연 이런 과정을 신과 연관시킬지조차 의문스런 차원 말이다.
나는 (어린 양과 사자)그림을 많은 점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압축을 보여주는 한 예로 여기고 싶다.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 유화물감은 하루면 다 말라 있곤 했다. 여느 때라면 그것이 마르는 데 3일씩은 족히 걸렸을 텐데 말이다. 적어도 시간은 압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필요한 모든 것이 노력없이 즉각 제공되거나.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은 걸로 봐서, 내가 가장 높은 차원의 압축을 지휘하는 누군가의 현존 앞에 있었던 것이 명백했다. 나는 이것이 예수가 동시에 많은 것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를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어준 완벽한 압축상태가 말 그대로 그를 우리 한가운데 있게 하면서도 서로 동의하는 경우에만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의 투명성이기도 하다.
그림과 관련해서 일어난 기적들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 그림이 높은 압축도 하에서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적의 해부학이라면 아마도 구조의 갈등을 지우고 단순한 실존이라는 완벽한 압축에 잘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 생애의 마지막 주 동안 벌어진 엄청난 압축과 고도의 열정이 단 며칠 사이에 인류와 세상의 역사 전체를 바꾸었다. 이런 게 압축이다!
온전한 압축이라는 문제는 치유의 세계에서 대단한 잠재력을 갖는다. 이다금 살면서 대단히 온전해질 때, 생활 속에서 고도의 압축을 실행할 때 질병에 대한 내 면역력은 엄청나게 커진다. 감기나 유행성 독감에 걸린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전혀 감염되거나 하지 않는것이다. 이렇게 온전함이 다른 요소가 침입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을 때 방울뱀의 소굴이라도 안전하게 걸어서 지나가지 않겠는가! 아마도 침입요소가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그런 온전함의 상태로 있는것. 바로 이것이 치유의 위대한 비밀 중 하나일 것이다.
압축에 대해 실제적이 되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이유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우리가 압축에 관여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인데다. 압축이 객관적으로 조망될 때, 그 사람 삶의 많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함께 속하지 않는 요소들을 뒤섞으면 그 결과는 언제나 아픔과 고통이오. 이것의 흔한 예가 알콜이나 마약, 나아가 몸의 기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공식품에 대한 집착이요. 핵심은 어떤 요소나 어떤 발상, 어떤 행동이나 인간관계의 어떤 조합은 실제 현실이란 의미에서 그냥 슬모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소들의 무용한 배합을 고집스럽게 강요하거나 조작하는 건 아픔과 고난과 불행과 에너지 상실. 그리고 결국에는 빈곤만을 가져올 뿐이오.
다른 한편, 전혀 통합하고 압축하지 못하는 건 흩어지고 중심이 없고 에너지가 부족한 삶을 만들어내죠. 우리 각자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압축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함께 묶어 쓸모 있게 만들수 있을까? 하고요. 압축과 관련해서 특히 재미있는 건 압축이 목적과 우선순위와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시작할까?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까?
"엄청난 단순성을 가지고요. 시간의 가장 큰 압축은 지금 이오! 그러니 그냥 지금 여기에 있으시오. 그냥 그렇게 하시오. 또 인식의 가장 큰 압축은 무구함이오. 그러니 삶에 덧붙이지 마시오. 당신은 그것을 바꿀 필요가 없소. 불필요한 조건들을 덧붙이지도, 현실을 발명하지도. 고장나지 않은 것을 고치려 하지도 마시오. 핵심으로 가시오. 당신이 쓸수 있는 그 모든 도구와 자각과 재능을 포함해서 자신이 지닌 것들을 활용하시오 늦추지 말고 그냥 사시오! 이런 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의 압축이오. 그것은 당신을 자신의 중심으로, 자신만의 '제로점'으로 다시 데려갈 거요"
이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여러날의 대화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가 내 관심을 채워주자. 새로운 종류의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압축이 먼저인가? 압축은 창조주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는가? 같은 의문들이
"천지만물이 신이요. 하지만 근원으로서 신이 있고, 통로로서 신이 있소. 압축은 근원을 통로로 바꾸는 수단이자 현상이오. 압축을 이해하면 당신들은 그 과정을 다시 밟을 수 있고, 지금 알고 있는 근원과 통로 간의 연관관계보다 더 유동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발견할 것이오. 이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으로 당신들이 지금의 현실 실존과 영적 실존 사이에서 체험하는 분리효과도 줄이게 될 테고요. 입자 밀도의 불질 차원은 전체 실존 중 1%도 차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당신들은 그것의 많은 도전과 문제들에 끝없이 초점을 맞추면서 그 밀도들의 베일 너머에 놓인 온갖 축복들을 놓칩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물질 밀도와 그 외 나머지 실존 간의 전환국면들을 관찰하는 편이 현명할 거요"
이 점은 나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왜곡된 설명들에만 협소한 관심을 보이는, 가슴이 단순한 영혼들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사람들과 교류 될 수 있을까?
"삶은 자신의 모든 주기마다 이것과 교류합니다. 내가 당신들의 관심 수준과 오늘날 인간의식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하지만 이건 어떤 상황에서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요. 그건 어떤 창조에나 내재되어 있소. 예를 들어 출산 과정을 생각해보시오. 강렬한 압축이 이루어지지만, 깊고 규칙적인 호흡조절로 아픔을 줄이고 나아가 없앨 수도 있소, 그러고 나면 오직 신만이 아는 무구한 생명은 강한 압축으로 산모의 몸밖으로 밀려나와 생명의 숨결을 터트리게 되죠"
내 물음은 대답받았다.
"인간의 형제애라는 현실은 인간 모두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혼란과 재난의 시기들에는 이런 현실을 압축하면 이 진리를 훨씬 더 강력하게 만들 수 있소. 성취의 시기에는 모두가 그 기쁨을 나누게 되고요. 이에 반해 환상과 인간의 구조들은 무관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제쳐지게 되죠. 인간의 형제애는 현실로서 존재하고 당신들을 함께 뒷받침해주는 현실이란 걸 항상 기억하시오. 어떤 행정체계에 권한이 주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그것이 모두에게 공정하고 인간의 필요를 뒷받침해주는 한에서는요.
현실은 존재하는 중에서 최고의 경제요. 사실 현실은 경제의 혼이오. 만일 당신이 환상에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자가 될지 생각해보시오. 만일 구조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만 한정된다면, 당신이 삶의 기쁨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시간을 얼마나 많이 갖게 될지 생각해보시오! 환상을 창조하고 구조를 뒷받침하는 데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는 거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개인으 건강과 생산적인 생활에 더 잘 소비되었을 에너지가 말이오. 당신이 환상과 구조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것들은 당신의 삶을 훔칠 수도 있소"
"환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까요? 그 둘을 구별하는 막이 워낙 얇을 때도 있거든요.
"알고있소, 그 주제에 접근할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시작하지도 말고, 환상과 현실이 서로 적인 듯이 다루지도 마시오. 환상은 각 개인의 사적 현실의 일부요. 당신이 자신의 환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 있소, 그것이 공동의 현실에 해악이 되는 건 단지 당신이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요. 환상은 현실과 창조적인 연결고리요. 당신의 마음과 가슴과 영혼은 환상을 사용해서 개입영역 바깥의 한 지점으로부터 현실 내의 잠재력에 접근하고 그것을 배우고 맛보고 평가하죠.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지도와 고속도로의 관계나 연극과 삶이라는 드라마의 관계와 비슷하오.
문제는 환상이 그들 나름의 생명력을 얻어서 현실에서의 도피가 되거나. 더 나쁘게는 현실을 잘못 대변할 때 생기죠. 그 차이는 개입과 구별로 알아낼 수 있소, 만일 조금이라도 의문이 남는다면 이렇게 해보시오. 문제되는 상황이 더 이상 창조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해보는 거요. 당신도 알다시피, 현실은 당신이 그것을 더 이상 창조하지 않더라도 사라지지 않소. 하지만 환상은 사라지죠. 그래도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면, 그 상황에서 압축이 가속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시오. 무엇이 부서지고 무엇이 지속될지를요.
예수의 이런 설명을 듣노라니, 브라이언과 내가 텍사스주 파라다이스에 포도밭을 갖고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건 낙원에 대한 환상이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멋지고 낭만적인 경험을 즐겼다 그곳은 아름다운 포도원이었고, 사실 우리는 텍사스 주에서 처음으로 크로거 식품 체인에 식탁용 포도를 판 최초의 생산자였다. 또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용 포도를 길러서 근처의 양조장에 팔았다.
하지만 기후의 관련해서는 환상과 현실 사이의 균열이 존재했다. 텍사스 중부의 기후는 포도를 생산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기후였다. 우리는 무수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화학약품들을 사용해야 했고 해마다 봄이면 뒤늦은 냉해를 겪어야 했다. 언젠가는 태울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태우면서 기온이 급락하는 걸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밤을 꼬박 세운 적도 있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는 기운을 잃어갔고 포도원의 생산력도 떨어졌다 불가능한 현실의 조합이 우리의 어긋난 환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보완작업을 그만두고 일시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길 그만두게 되면 그 포도원은 완전히 실패로 끝날판이었다. 반면에 우리 포도원이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었더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그런 포도원은 낭만적이고 잘못된 환상 속에서만 번창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백일몽을 이따금 즐겨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비록 결국에 가서는 우리 앞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에 직면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종류의 모래성을 쌓죠. 이건 잘하는 일이오. 왜냐하면 그건 현실 속에 뛰어들기 전에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를 검토해볼 방법을 제공해주니까요. 실수는 모래성 속에 살기를 기대할 때 저질러지죠. 신과 당신의 모래성과의 관계를 오해한 것이 당신더러 역경을 겪게 만드는 거요. 그 모래성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오. 모래성을 쌓아놓고는 밀물이 들어 모래성을 씻어내는데도, 신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거나 그것을 구원해주길 기대하는 게 인간의 크나큰 어리석음이오.
당신이 신과 맺은 서약은 현실에 관한 것이기에. 그 서약에 따라 당신은 더 이상 애정 깊고 자비로운 후원자를 갖지 못할 수도 있소. 현실을 존중하면서 가슴을 통해 청해진 모든 기도는 응답 받기 마련이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도가 위기에 몰리거나 무너지고 있는 환상을 위해 청해진다는 데 크나큰 비극이 있소, 환상은 대도이자 억장을 무너뜨리는 존재요. 왜냐하면 그건 신이 안간상황에 개의치 않는다는 잘못된 관념을 인간에게 주기 때문이오.
신은 현실과 하나요. 그리고 인간은 이런 현실의 상속자이자 확장자로 선택되었소, 당신은 당신들이 이런 업적을 이루든 말든 신이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천만에요! 당신이 현실적이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보여줄 때, 당신은 자신이 가는 길의 반 이상에서 기적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사랑과 지원과 도움을 만나게 될 것이오.
지상에서 당신의 삶은 믿음과 의식을 쌓는 것이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당신은 현실이 위안이자 기적임을 발견할 거요. 하지만 이 단순한 과정에 안착할 때까지 당신들은 헛되게도 구조를 매개로 위안을 구할 것이고, 환상을 매개로 기적을 구할 것이며, 전문화를 매개로 능력을 구할 것이오. 대다수 사람들이 경험하는 분리상태가 이것이오"
"판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사람이 환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래선 안 되오. 모두가 믿음과 의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자기 힘으로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배워야 합니다. 모든 체험을 현실의 환상으로 보는 것 역시 미숙한 인식이요. 환상도 있고 현실도 있다는 깨달음이 있고서야 성숙해질 수 있소, 일단 그 차이를 혼자힘으로 알고 나면, 당신은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의 환상이 미치는 영향을 언제 어떻게 차단할지도 알게 될 거요.
당신이 이런 이해를 얻으면, 나는 당신더러 모든 상황에서 중용을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소. 중용에는 내재된 은총이 있어서 판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잘 식별하고 방어하게 해주거든요"
기술 선진국들에서 이루어지는 전문화의 심화가 환상과 현실을 더 잘 식별하게 해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문화는 반대 결과도 낳는다. 전문화는 우리 행동이 가치를 갖는 더 큰 문맥에 대한 인식을 훼손한다. 사실 가치의 발생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야 말로 환상과 현실을 식별하는 열쇠다. 이해에 근거한 가치는 효율성과 통합성, 결과에 대한 체험과 관찰 위에 세워진다. 반면에 전문화는 이런 자각을 망가뜨린다. 통합성을 가질 수 있는 선택사항들이 너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미국의 노동현장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의 두 원인이 가치 중심적인 이해의 감소와 전문화라고 설명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무렵에 가장 피곤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업화된 작업을 행하는 조립라인 노동자들이라는 것이 세심한 연구로 밝혀진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작업 자체는 말끔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세세한 것에 한없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노동자들의 진을 빼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 우주가 압축 위에 쌓여져 있으며, 이것이 에너지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분업화는 사람들 고갈시킨다. 우리가 일차원적 행동에만 우리의 활동을 한정할 때, 우리는 언제나 에너지를 잃게 된다. 예수는 이것이 미국사람들이 그토록 지쳐 있는 이유 중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미국인들은 점점 더 지극히 단조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겹고 긴 업무와 뒤이은 온갖 허드레 가사노동과 의무들, 불충분한 수면에 시달리는 사람이 에너지와 활력으로 새날을 준비하기는 힘든 법이죠.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많이 일하는 것일 테니,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해결책이요.
핵심은, 당신이 행하고 있는 그 일을 잡아서 더 풍요롭게 하는 거요. 자신의 다양한 차원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다양한 측면이 일터에 스며들게 하시오. 친구를 만드시오. 다른 측면들에서 삶을 품요롭게 해줄 배움의 곡선을 개척하시오. 기억력이나 집중력, 교제력을 발휘하시오. 실제로는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잃었던 에너지를 되찾게 될 것이오.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자신의 더 많은 측면을 적용하시오. 이건 당신의 활동시간을 더 많이 늘리라고 권하는게 아니오 그건 같은 시간이라도 당신의 모든 것을 더 많이 투명하게 중첩시키고 압축시켜서 자신의 활동을 풍부하게 만들라는 이야기요"
하지만 그는 사랑이 관리하는 압축이 영혼에게 가치 있는 에너지를 낳는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우리가 압축을 만들어내고 창조할 때는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사랑으로 생겨난 압축은 살아가는 데 있어 당신에게 이득이 됩니다. 이것은 일터에서도 당신에게 이득을 주죠 이득이란 개념이 죄의식이나 질투심을 동반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그건 이득이란 걸 오해한 데서 생긴 거요. 많은 경우, 존재하는 건 참된 이득이 아니오 단지 돈이 끼어든다는 것뿐이죠.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되지 않았을 때, 돈은 세력이 가장 강한 사람들의 주머니로 슬며시 들어가는 경향이 있소, 이 때문에 이득이 오명을 쓰게 되었지만, 그건 사람들이 풍요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요.
인류가 사랑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더 강한 압축을 사용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이득은 죄의 상징이 아니라 실현을 나타내는 용어가 될 것이오. 이득이란 걸 남의 접시에서 뺏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와 풍요를 낳아주는 것으로 여길 테니까요. 이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들이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에너지를 낳아줄 거요. 선한 이득은 가격과 물가상승을 낮추고 기쁨과 사기를 높여주죠.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든다고 해서 게으름을 부추기게 되지는 않소. 오히려 그건 일할 의욕을 되찾아줍니다.
오히려 게으름을 부추기는 건 피곤에 절은 육신과 아무런 참된 이득이나 보상 없이 힘에만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사업과 생산체제에 분개하는 반항적인 태도요. 선한 이득은 선도자를 유리하게 만드는 사랑의 투자요. 이 문제라면 기러기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거요. 당신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기러기들의 'V'자에서 한마리가 선도자의 자리에 선다는 걸 알 수 있을거요. 그 한마리는 선도자로 날면서 바람을 뚫고 다른 기러기들이 더 쉽게 날 수 있도록 해주죠. 선한 이득이 모두를 위해 하는 일이 이런 거요. 사실 선한 이득은 에너지를 창조하기에. 모두가 참여하는 전체 경제를 활기차게 하고 풍요롭게 해주죠. 효과적인 압축이 있는 곳에는 빈곤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거나 만연하는 일이 절대 없소"
압축의 권능은 사랑이고, 그 대리자는 자기다. 이 진리는 아직 현실적으로 지상에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도 불씨를 만들기 위해 막대기 두 개를 서로 비비던 그 최초의 인간에게서 나온 마찰-저항 에너지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런 마찰-항(길항) 에너지가 전기력의 토대다. 우리는 이것 위에 기술과 사고방식을 세워왔다.
지금 생산에서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마찰에 근거한 힘인 전기력을 사용하는 데서 생긴다. 전기 양식은 고도의 분업화를 낳는데 이것은 오직 농밀한 압축만을 뒷받침할 수 있고, 다시 이 농밀한 압축은 더 고도의 모든 압축들을 퇴화시킨다. 지난 50년 동안 힘과 분업화의 고도성장은 산업국가들 내에서 가장 독립적인 기업들을 쓸어가버렸다.
예수는 공룡기업들이 압축을 더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만 존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과 산업을 다차원적 압축을 가지고 경영하는 소규모 기업과 개인들이 재평가받는 대역전이 있게될 것이다. 이것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미래의 추세인 것은 분명하다.
또 우리 태양이 결국 수소가스의 압축이라면, 이 가장 지배적인 물질을 연구하고 그것이 우리 태양계에서 행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검토하게 되면, 좀더 풍부하면서도 저항이 더 작은, 따라서 더 청결한 연료를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산업에서 발생하는 문제 및 방향 전환과 관련해서 예수는 농업분야의 한 예를 들었다. 미국에서는 강도 높은 토지합병으로 영세농민과 목장주들이 토지에서 쫓겨났다. 이것은 10년 전쯤에야 최고조에 달한 장기적인 경향이 되어왔다. 그런데 이제 이 같은 생산경영상의 과도한 책임확대는 이윤과 부담을 전적으로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많은 대기업들이 탁상행정만으로 현장 경영과 생산을 효과적으로 해내기 힘들다는 사실에 직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농사나 원예만큼 압축적인 측면을 많이 요구하는 산업분야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이 분야의 생산자는 많은 요소를 야외에서 동시에 경영해야 한다. 반면에 중개와 유통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의 가정에 실제로 식품을 배달할 수 있는 건 거대기업들 뿐이다. 이때 그 과정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역할은 결국 압축의 효율성으로 결정될 것이다. 압축의 권능이 그 벽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있을 때뿐이다.
"이것은 기업과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에도 사실이오. 과도확장과 분업화가 역으로 압축을 불러오고 있는 징후들에 주목하시오. 그런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아직도 남아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면 경제가 붕괴되는 사태가 알어날 거요.. 로마제국에 일어났던 일이 이것이오. 로마는 무력에 기초한 경제를 과도하게 확장했소, 그러자 도덕과 철학과 사회조직상의 균열이 너무 많아서 그 과잉확장을 압축으로 역전시킬 수 없었지요. 압축과 확장은 우주의 숨이오. 건강하지 못하면 그 주기의 한 측면이나 두 측면 모두가 실현되지 못하게 됩니다. 로마는 압축할 토대를 잃었기에 과도확장으로 소멸했던 거요"
우리 시대에 그런 재난의 가장 가까운 예가 구소련의 몰락이다. 과도확장이 나라를 고갈시킨 나머지 압축으로의 필연적인 복귀에 자금을 조달하고 그 복귀를 지탱할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쓸모 있는 압축들을 실현할 수 있는 분야는 지역정치와 공동의 유산, 그리고 공장생산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압축들과 다른 몇몇 압축들이 적어도 사람들의 삶을 다시 건설할 수 있게는 해주고 있다 이것은 인류 모두가 동정심과 지원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극적인 예이다.
예수는 말했다.
"확장이나 압축 어느 한 쪽이 불가피한 그 리듬을 압도하는 일 없이 똑같이 은혜롭게 순환하면서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이 참된 문명의 상징이요. 이런 게 현실이오. 확장만이 권능과 영광에 이를 유일한 방도라는 건 구조와 환상이 낳은 오해의 상징이요. 국가나 사회가 자신의 힘을 무엇보다 구조와 환상에 집중하면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확장을 억지로 계속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죠. 불필요한 몇몇 구조와 잘못된 환상을 압축이 폭로하고 무너뜨리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연스럽게 압축으로 순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거나 피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확장이 더욱 가속화되면 압축으로의 역전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두려움으로 발전하게되죠. 사실 이건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그런 역전은 불가피하게 올 수밖에 없지요
잊지 마시오 신을 아는데 있어 당신의 관념이 현실적일수록 당신의 꿈이나 관념이 현실과 맺는 관계도 깊어진다는 걸. 당신은 어떤 관념이 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언제나 알수 있소, 왜냐하면 그 관념은 현실에 대해 좀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고 현실에 더 늪은 차원을 가져다줄 테니까요. 어떤 사람이나 사회가 신에게서 멀어지면, 생겨나는 관념들도 크나큰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현실 적용력을 상실하게 되죠.
충분히 강제로 밀어붙이고 충분히 조작하면 어떤 관념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오해요. 이런 게 폭력과 조작의 세계를 불러오는, 신에게서 분리된 관념이오. 비현실적인 발상들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살면, 내가 장담컨대 푹력과 조작이 들어와 그 간격을 매우려할 겁니다 반면에, 당신이 신을 알면, 현실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 커질 거요"
여기서 주목할 건 , 예수는 당신이 신학을 알면 당신의 현실 이해력도 커지리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학이란 신에 대한 믿음을 포괄적으로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소. 하지만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소. 게다가 당신은 신을 직접 알 수 있소, 자신의 창조주를 아는 건 당신이 가진 불멸의 신성한 권리요. 그 앎을 촉진해줄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옳바르게 알기 위해 신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견해가 필요한 것도 아니오. 왜냐하면 신은 당신 가슴에 있으니까요
신을 알면 당신의 발상들은 더 잘 작용할 것이고, 또한 당신은 집중하여 자신을 건강하고 부유하고 현명하게 있도록 해줄 더 높은 수준의 압축을 낳을 수도 있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무엇을 함께 모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거요. 당신 삶의 여러 층들이 대단히 풍요롭게 동시에 펄쳐질 것이오"
이런 가르침을 펴고 나서 예수는 자애롭게도 창조의 지주들로서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를 뜻하는 그 위대한 삼각형에 또 한 차원의 이해를 보태주었다. 나는 예수가 지시하는대로 그 정삼각형 위에 반대 방향으로 놓이는 또 하나의 삼각형을 겹쳐 그렸다 그러자 그것은 육각형 별 모양이 되었다.
1. 사랑
2.영
3.금강입자들
4. 삶
5. 목적
6. 실존
"이 두 번재 삼각형은 현실을 지탱하는 요소들을 나타내죠. 그 세꼭지점에 삶, 목적, 실존이라고 적어보시오.
그러자 여섯 요소 모두가 정연하게 배열되었다. 예수가 말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여섯 요소에서 창조되었소, 이 중 사랑은 원점이고 실존은 모든 창조의 정점이오. 따라서 실존은 세속에 닿아 있고 우주현실을 유지하죠. 반면에 사랑은 영을 활성화하고 금강입자들을 지휘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은 목적을 가지고 삶을 이끌고, 목적의식적인 삶을 통해 실존이 상추되는 거죠"
예수에 따르면 '다윗의 별 의 본래 의미가 이것이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예수와 나눈 며칠 간의 대화와 몇 년에 걸친 혼자만의 숙고 결과, 나는 두 삼각형의 세 꼭지점들이 그 단순한 구성의 드러난 의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삼각형의 두 꼭지점을 써서 그 사이의 다른 한 꼭지점을 설명할 수도 있다.
에를 들면 삶은 사랑과 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고 실존의 영과 금강입자들간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발현이다. 그리고 사랑과 금강입자들 사이의 중간지점은 목적이다. 사랑은 최상의 원인점인 반면에 실존은 모든 것의 발현점이다. 또 목적과 영은 서로 보완하면서 이끄는 힘을 제공하는 반면, 삶과 금강입자들은 에너지와 권능화를 가지고 서로를 보완한다. 이 상징 속에서 현실을 신의 발현으로서 알수 있는 기호가 들어 있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상징 속에 들어 있던 권능이다.
유구한 세월의 지혜를 가지고서도 여전히 신을 아는 건 모든 인간이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힘든 과제가 되어왔다. 그래서 나는 예수에게 신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건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직접 알기보다는 신에 대한 이론을 아는 쪽을택하는 이유가 이것이오. 유감스럽게도 신학 또한 무가치하다는 관념을 강화시키죠.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덫에 걸려 있소. 신은 말보다 더 위대한 권능이고, 사랑이오. 말이나 공리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보다요. 게다가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겠소?"
나는 나 자신의 경우를 떠올리면서 예수의 물음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전 인간의 판단엣 나온 잘못된 무가치성에 더 이상 젖어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과 경이감은 그대로 남아서 나 자신을 신에 비하면 그지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끼조. 당신이 말씀하셨듯이, 규정하는 쪽은 규정당하는 쪽의 이해를 넘어서 있으니까요"
"그 모두가 사실이오. 글렌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현실 문맥이 주어져왔소, 당신이 신에 대한 앎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자각 문맥에는 대략 여덟가지가 있소,
1. 사랑으로서, 따라서 신의 자녀로서 자신을 아는 거요.
2. 은총과 건강과 균형의 진리를 아는 거요. 이 앎을 추구할 수 있도록 당신들에게는 생명의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들만이 아니라 균형의 여타 보완적 측면들이 주어져왔소, 남녀 관계는 이 앎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죠. 다양한 이해관계와 필요들이 균형과 상호지원 속으로 들어오는 기족이라는 전체 개념과 더불어서요.
3. 목적의 권능이 현실을 드러내고 많은 가슴을 공통된 노력 집단으로 묶는다는 걸 아는 거요.
4. 인간의 형제애를 통해 봉사를 아는 거요.
5. 자연의 경향을 관찰하는 것으로 생명의 전체유형을 아는 거요.
6. 무구한 인식과 보편원리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통해 의식을 아는 거요
7. 우리의 한 영을 유지해주는 믿음의 권능과 신의 의지인 사랑의 권능을 아는 거요.
8. 모든 구조를 능가하는 무한을 아는 거요. 궁극의 실재는 신이오.
[출처] 끝없는 사랑 442쪽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종류의 모래성을 쌓죠.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 부자
제 12장 신과 현실
사랑
2021. 10. 5. 11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일깨우려는 그의 끝없는 갈망에 의해 드러납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자신의 현존이 인간의 가슴과 영혼과 감각들에 사랑으로 가 닿도록 하죠"
이토록 지극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수는 몇 번이나 "신과 현실은 하나"라고 말했다. 예수는 현실에 대한 신의 우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에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게 장담하곤 했다. 왜냐하면 사랑의 지휘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기록된 한 사건을 떠올려주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예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었다. 내가 알기로 이 사건에 대한 예수의 대응이야말로 어떤 문제에서나 예수가 견지했던 우선순위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예수가 보기에 신의 창조현실 속에서 신을 공경하지 않는 모든 의례는 전혀 성스럽지 않았다.
예수가 내게 이야기하거나 나와 함께 나눈 것들 모두가 언제나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가 말한 것들 대부분을 즉각 이해하고 내 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 그가 가르침들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나의 성장과 숙고를 위한 양식이 되어준 것에 비하면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그냥 입만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해준 통찰력이란 보물을 얻게 된 것이 현실과 그것을 주는 자(신을 말함-옮긴이) 양쪽 모두에 대한 그의 배려 덕분이란 사실은 중요하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나열되는 메시지들은 내가 그것들의 의미나 실제 적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 때문에 최대한 상세하게 옮겨놓았다. 이런 나의 이해부족은 몇몇 경우들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전체가. 아니 그것의 반정도라도 어떤 한 사람에 의해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기에 특정분야에서 기꺼이 노력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비옥한 이해와 탐구의 근거를 제공하리란 믿음과 근거를 가지고 내가 다음두 장의 내용을 제시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전문성은 천차만별 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이다.
어떤 메시지나 발상의 가치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실행력이다. 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온갖 발상들을 갖게 된다. 개중에는 굉장한 것들도 있지만, 명백하게 쓰잘데기 없는 것들도 있다. 예수는 말했다.
"현실과 통합된 발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추구해볼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전혀 그럴 가치가 없소. 그 발상이 신에게서 온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으뜸가는 기준은 그것의 현실성을 테스트하는 것이오. 과연 그 발상이 현실적인지, 현실의 의미를 더 높은 의식수준과 적용수준으로 넓혀주는지를 확인해보는 거지요. 신에게서 나온 모든 발상은 현실과 완전히 일치 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그토록 실감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그의 강력한 확신이었다. 예수가 보기에 신은 현실일 뿐 아니라 현실의 근원이자 최고의 현실이기도 했다.
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피조물들을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있고, 하늘과 땅은 사로 다른 차원이라고 믿도록 우리를 가르쳐온 것이 서양철학이다. 이런 류의 사고방식이 가져온 유감스런 부산물
은 모든 것을 위와 아래, 어둠과 밝음 등으로 나누는 철학적 이분법이다. 또 과학은 실제적이고 유용한 지식의 정점을 대변하는 반면, 종교는 오직 무한하고 불가지인 신에 대한 믿음만을 대변한다는 가정 역시 또 하나의 상실을 초래했다. 이렇게 해서 인간 관심의 가장 필수적인 두 영역은 권투시합에서의 양 코너처럼 대립하면서 한 영역의 지지자들이 다른 영역의 생명력을 짓밟곤 해왔다.
예수는 내 앞에 온갖 현실들을 진수성찬으로 차려주었는데, 특히나 그는 신을 현실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현실이란 걸 너무 자주 신의 권능을 빌어 벗어나고픈 가혹한 일년의 상황들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실을 해롭고 적대적인 것으로 판정하면서. 신은 그런 현실과는 아득히 먼 곳에서 천사와 축복받은 영혼들, 그리고 거룩한 음악에 둘러싸여 거하시니다는 믿음을 매게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은 자신의 창조물들과 떨어져 있지 않소. 당신들은 신을 현실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현실이 가혹한 것이 되도록 허용했소.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직면하기 어려워하는 건 그들이 지배 구조들 안에서만 움직이면서 신이 그들을 포기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그 모든 시련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이런 무지와 선입견과 혼한은 신이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믿을 때 더욱 커지죠. 당신이 신을 현실에서 배제할 때 현실은 더도 덜도 아닌 구조와 견해와 환상과 혼란 자체로 쫄아들 수 밖에 없소. 하지만 현실은 당신이 그것을 보려고만 한다면, 살아 있는 기적이오!"
예수의 이런 단언이 내 내면의 느낌과 유보조건들을 표현하게 만들었다.
"신이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바람에 우리가 더 심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당신의 설명은 인정해요. 하지만 이 세계가 그토록 경이로운 우주라면 왜 우리가 고난을 우선적으로 겪어야 하나요? 왜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이 물음에 대답하는 예수의 눈은 자애심으로 그윽했다.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건 믿음과 의식을 쌓기 위해서요. 신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특질의 강력한 두 측면이 이것이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상반되는 온갖 다양한 체험과 느낌들을 제시할 수 있는 현실 차원에서도 단련되어야 합니다 . 의식이란 온갖 다양한 인식들로 가득한 영겁의 체험과 자각들이 압축되고 통합되어 나오는 산물이거든요.
당신의 체험이 풍부해지고 깊어지고 완벽해지는 데 따라 의식도 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의식은 이천 년 전의 그것보다 더 커져서 그 당시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통찰들에 이르게 되었소, 의식은 믿음과 결부되어 있소, 믿음이란 올바른 행동이 가져올 열매에 대해 그 영혼이 갖는 확신이니까요. 하지만 믿음을 벼리려면 상반되는 상황들을 강하게 압축함으로써 그 사람의 확신을 심각하게 뒤흔드는 상황이 있어야 하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뻔히 안다면 어떻게 믿음이란 게 존재할 수 있겠소? 노력이나 위험 없이 만사가 다 제공된다면 무엇이 당신을 충분히 의식적이 되게끔 자극할 수 있겠소?
재미있는 건 믿음과 의식 둘 다가 비슷한 환경에서 단련된다는 거요. 가장 잘 벼려진 무쇠처럼 믿음과 의식은 강함과 참됨을 드러냅니다. 어떤 형혼이 이렇게 믿음과 의식을 이루고 나면 모순되는 현실의 혼란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되죠. 하지만 그때까지는 당신의 믿음과 의식이 깨어나고 완성될 수 있는 여러 다양한 경험 수준에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진리의 권능을 발견하는 건 이런 갈등 속에서요.
순수하고 무구한 발현으로서 신의 현존은 어떤 현실에서라도 체험할 수 있소. 이로부터 의식이 태어나죠. 당신이 조화와 완벽의 여러 유형들과 보편상수들을 찾아내게 되는 것도 당신의 현실 인식 안에서고요. 더 위대하고 더 단순하고 더 의미 있게 삶을 통합해주는 게 이런 진리들이오. 그 같은 진리들이 의식 없는 고역스런 삶에서 당신을 끌어올려 더 큰 명확성과 목적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거죠. 따라서 당신이 높고 완전하게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그 체험 자체가 신의 실재를 확인해줄 거요. 이점을 증언해주는 건 당신의 믿음이고요."
예수에 따르면 진리는 청사진과 건물 간의 관계처럼 현실을 복제 해주는 원형 공리나 원형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들은 진리를 역사적 상대성과 이상론적 개념들에 위탁하고 만다. 게다가 신의 권위보다는 인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게 이데올로기들이다.
"우주의 제1상수는 시공간에서 벗어나 있기에 의식의 높이와 깊이를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진리는 현실을 초월하여 그것을 단순한 이해로 녹여버립니다! 또 그것은 당신을 의존과 조건의 한계들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하죠.
진리는 항상성의 권능이요. 항상성 없이는 청사진과 건축물, 혹은 의식과 현실 간에 어떤 상호관계도 있을 수 없소, 진리는 건축물도 청사진도 아니고, 차라리 합일과 인과의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는 항상성의 권능이오. 항상성 없이는 진리가 있을 수 없는데, 진리 없이는 의식이 있을 수 없고, 믿음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소.
정직은 대단히 중요한 특질이오. 왜냐하면 그건 그 사람이 진리를 공경한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런데 진리는 믿음에 차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 이상이오. 양심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보니, 그 사실이 바뀌거나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소?
불변의 상수가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한 인간은 변화하는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 안에서 다시 온전해질 수 있소. 개개사람이나 개개상황 안에는 외부 형태의 변화에 관계없이 지배적인 항상성의 요소가 있소, 이 상수가 드러날 때마다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항상적 요소들은 비합리성 안엥서도 기쁘게 찾아낼 수 있소, 이것이 유머의 권능이고, 인산의 영에 미치는 그것의 치유력이오.
진리가 현존하면 균형이 되찾아집니다. 그와 더불어 실존 현실의 무한한 지평을 교차시키고 안정시키는 신과 고귀한 의식의 수직적 확장이 이루어지고요. 현실은 무한한 실존 방식들로 수평적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이건 사실이오. 무한한 현실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삶을 뒷받침하는 데 당신의 동의나 앎을 필요로 하지 않소. 당신이 뭘 할 수 있는지만 알고, 나머지는 당신 앞에 펼쳐질 미래로서 존중하시오. 일살 삶을 통해 당신은 신이 당신 앞에 놓은 것들에 대한 자각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요"
예수는 우리가 집단으로 현실 인식을 쌓아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현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거대한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고 나서 비교 관찰로 전체를 짜맞추고자 하는 '맹인들'과 흡사하다. 하지만 현실의 자비로운 면은 우리가 체험들을 비교할 때, 그것들이 솔직하게 보고되는 한, 그런 체험들이 우리가 추구하는 앎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은 현실은 우리의 자각 정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개인들이 나름의 현실인식을 가져온다 해도 현실이라는 직물은 특정 이해관계나 심지어 특정 지식에 대해서조차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 없이 자신의 쉼없는 과제들을 이행하는 방식으로 일관성과 측정가능성, 비편향성, 균질화된 예견성을 가진다.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현실은 실존하는 신의 끊임없는 현존이다. 진리는 항상적인 상수를 드러내어 이 현존을 밝혀준다.
"진리는 현실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명확성과 확실성을 부여하여, 현실에 예견가능성과 조작가능성을 가져다주죠. 진리의 기적은 그것의 항상성이 안정된 상황들에서만이 아니라 유동적인 상황들에서도 똑같이 은혜롭게 나타난다는 거요. 진리는 고정된 이념이나 공리에 집착할 필요가 없거든요. 오히려 진리는 구조에게 그러하듯 고정된 이념을 확실하게 산산조각내죠."
예수는 몇 번이나 우리가 구조의 환상적 성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현실 안의 기적적인 잠재력을 밀쳐내고 만다고 설명했다. 예견 가능한 질서가 완전하게 해체되는 건 굉장한 충격이다. 설사 그것이 크나큰 축복을 가져다준다 해도! 구조가 자신의 환상적 성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린다. 특히나 우리가 신보다 구조를 더 확신한다면,
"기적은 삶의 기적적인 성격을 받아들이고, 그 체험에 자신을 순순히 내맡기는 사람에게 오죠. 창조주는 시도때도 없이 당신을 현혹시킬 테지만, 그건 단지 당신의 주의를 얻기 위해서일 뿐이오. 창조주가 현실의 기적적인 잠재력에서 당신을 떠어내기 위해 당신을 현혹시키는 경우는 결코 없소. 이건 현실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완성시키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 측면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헤아려질'수 없다.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 자체가 구조화되어 있는 데다가, 예견 가능한 인과 유형들에의해 한없이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기적을 설명하는 건 말할것도 없고, 기적을 이해하는 것도 절대 불가능하다.
'신은 당신을 기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과 더불어 존재하고 당신 앞에 존재하는 그의 현존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요. 인간이 기적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는 건 두가지 집착 때문이오. 하나는 구조에 대한 의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모든 환상에 필적할 수 있도록 실존을 재창조하기 때문이오.
신의 모든 자녀들은 공유된 현실 안에서 가장 확실한 공동창조자들이고, 사실 당신들은 창조 현태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발현시키고 있는 거요. 하지만 당신 혼자서 창조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큰 공통 현실이라는 바탕이 있소, 따라서 실존 토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불안보다 더 커져서 한정된 공급원에 대한 당신의 의존을 제거하는 지점에 도달해야만 하오.
이런 확신이 없는 건, 장담컨데, 신보다 구조를 더 믿기 때문이오. 기적을 가장 크게 훼손하는 것이 예견 가능하고 제한된 구조에 대한 지배를 내려놓아야 하리란 두려움이오"
예수는 우주를 지휘하는 건 사랑이라는 점을 내게 항상 상기시켰다.
"사랑은 신이면서 당신인 것이오.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씨앗이 이미 당신 안에 있소, 만일 기적을 받고자 한다면, 그냥 고요히 있으면서 사랑의 발현물들을 받아들이시오. 사실 당신들은 대부분의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소, 삶은 워낙 기적으로 가득해서. 기적 없이는 삶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사랑은 모든 기적의 원천이오. 사랑이 기적들을 현존케 하죠"
마침내 나는 기적이란 사랑과 삶이 자신들을 뒤로 잡아당기는 환상의 베일들을 뚫고 나갈 때 발휘되는 성장의 권능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의 영향과 기적을 불러오는 사랑의 능력에 초첨을 맞추는 사람에게 기적은 이제 삶의 기대 부분이 된다. 하지만 그가 사랑과 삶의 위대한 권능을 부정하는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면 생겨나던 기적이 갑작스런 놀람 정도로도, 아니 충격이나 협박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기적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현실의 기적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의 온전함은 전혀 손ㄴ상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현실은 사람마다 다른 체험을 제공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요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존 자체의 본질이자 현존이어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인식과 체험과 기여와 희망과 꿈들을 이것에 가져가는 거요"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현실이 무척이나 유동적이고 호의적이어서 인과의 그 끝없는 고리가 잠시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런 평온은 역동적이고 전체론적 실존 유형 속에서 인과의 위치에 대해 물었던 최조의 내 과학적 질문들 중 하나를 내뱉게 만들었다.
그의 대답은 비유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사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성스런 지금은 바로 신의 현존이어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모습을 취하죠. 이것은 모든 잠재성이 환벽한 교감 속에 거하는 완벽한 공시성의 상태요. 이것이 실존의 영원한 시작이자 끝이요. 하지만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지점에서 교감이 대화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전체의 다양한 부분들이 대화를 실존 속으로 불러들이는 거죠. 이렇게 전체의 부분들이 서로 북돋우면서 상호작용하기 시작할 때 진행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요.
결국에는 상호작용의 유형들 속에 모순과 부조화가 나타나는데. 그 밀도가 점점 짙어지면서 조화를 위한 여백을 재공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죠. 그렇게 되면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거리가 필요해지고, 원인과 결과가 커큐니케이션의 토대가 되고요. 다라서 진행과정으로 보면 완벽한 공시성으로 시작했던 것이, 조화로운 대화가 되고, 마침내는 인과의 작용에 이르게 되는 거죠.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찾을 수 있소 부족사회들은 소박한 교감으로 살아가죠.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발달하면, 도시의 밀로와 갈등들이 많은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웃 간에 더 많은 거리를 갖기 위해 농촌지역으로 되돌아가죠.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잡한 도시 속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상호성을 통해 더 많은 조화를구하는 것이 될 테고요"
이런 비유가 전재되는 동안. 나는 인과의 법칙이 분리상태와 분리적 사고방식을 지배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에 생각을 모으고 있는지를 알아챈 예수가 재빨리 지적했다.
"케뮤니케이션의 세 차원은 우주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완벽한 공시성 속에는 절대 교감이 존재하는 반면, 분리라는 다른 편 극에서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죠. 인과는 시공간을 가로질러-특히 갈등이 있어온 곳에 -전달하고 균형을 다시 잡는 보편 수단이오. 어떤 사람, 아니 미립자까지도 분리상태에서 좀이라도 평화나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건 인과의 법칙에 대한 불변의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오. 또 이 두 극단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의 법칙이 상호 존재하고요. 요약하면 실존의 조화, 형제애의 상호성, 신과의 공시성, 이런게 바로 은혜의 법칙이오.
과학이 최근까지 관심을 기울였던 대부부의 우주는 개별 입자와 질량의 영역인데. 이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죠. 하지만 이 영역에서 완벽한 정지 및 상호성이라는 다른 영역들로 옮겨가는 데 필요한 거리는 아주 짧소. 게다가 이제 사람들이 이 거리를 메꾸고 있으니, 앞으로는 엄청난 소도로 이해가 가속화 될 거요! 사실 지금도 과학적 사고방식 안에는 상호성에 대한 여러 인식들이 들어 있소, 얼마 안 가 과학은 완벽한 공시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거구요. 이것이 상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의 다른 모든 차원들에 생명에너지를 공급하는 드러나지 않는 순수 잠재력의 무한성이오.
우주 전체는 안팎으로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완벽한 공시성의 관점에서 압축과 팽창의 끝없는 리듬이 존재하오. 압축과 팽창은 우주의 큰 숨이오. 우주질서를 낳은 완벽한 압축은 결국 팽창에 길을 내어주었소, 이들 매동하는 리듬들은 소리의 근원을 제공하면서 침묵과 폭발을 교대로 불러오죠 침묵과 푹발의 연속되는 리듬은 독특한 음조와 개개 생명에너지로서 모든 것 속에 존재하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자기 나름의 노래, 자기 나름의 음색을 갖는 거죠"
이것은 예수가 우리의 대화에서 이런 소리들이 우리의 안녕에 미치는 역할과 관련해서 논급했던 유일한 대목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런 언급에서 음악은 우주 노래의 맥동하는 경이로운 리듬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압축이란 내가 평소에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지만, 생각해봤다 하더라도 대개는 자동차 엔진처럼 에너지 발전설비와 관련해서였다. 우주 창조처럼 영광스런 주제의 경우, 아마 나라면 더 시적인 용어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압축과 팽창이라는 용어들로 현실의 두 핵심 유형들을 그려보여주었다. 예수는 여러날에 걸친 대화의 상당 부분을 압축이 삶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을 설명하는 데 보냈다. 하지만 예수는 더 높은 차원에서 압축이 미치는 영향에 내 주의를 돌림으로써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그 주제의 하중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그는 '압축의궁극 표현이 동시성'이라고 말했다. 동시성이란 모든 잠재력들이 그냥 공존하는 완벽한 균형의 '제로점'이다. 우리는 아직도 동시성을 체험할 때마다. 즉 우리가 '한번데 두 곳에' 있을 수 있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정말로 감정이입을 경험하거나 우연한 일치의 기적이 시공간의 권능을 통해 신은 새와 미풍, 물고기와 바다. 당신과 나, 양쪽 다와 함게 있을 수 있다.
동시성 과 공시정이 우리가 쓰레기 압축기로 연상하는 뼈까지 으깨버리는 압축을 말하는 건 아니다. 예수는 완벽한 압축은 갈등이나 고통, 파괴가 아니라 무한한 잠재력의 투명한 공존상태를 불러온다고 강조했다. 압축은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우리와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의 조화를 구하지 않고 인과의 결과들을 존중한다면, 사실 우리는 '꽝'하고 '펑'하는 방식으로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는 우리들 각자와 만물 안에는 압축을 불러일으키는 자력 중심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는 우리의 안녕 전반에 대단히 중요하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기적이 압축 유형들에 상응한다는 건 분명하다 내가 보기에 압축은 우선 원자 입자의 소우주 속에서 자기적으로 활성화되고 이어서 여러 다른 압축들을 끌어당기고 붙잡아 분자 차원의 밀도형태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여러 동심원들을 가진 하나의 바퀴처럼 압축은 같은 성질의 것들끼리 서로 끌어당긴다. 이렇게 하여 대등함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 정도의 밀도가 쌓일 수 있다. 비록 대등함을 잃을 때 열에너지가 생겨나긴 하지만, 압축은 밀도에 밀도를 쌓아간다. 그러고 나면 충돌하는 마구잡이 요소들이 그 공식 속으로 들어와 특정의 구조배열로 모양을 띄어가기 시작한다. 압축의 이 수준에 이르면 조직이 공시성을 대신하고, 힘이 에너지를 낳는다. 이것이 물질 밀도의 수준이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힘이다. 완벽한 공시성으로부터 조화와 조직으로의 진행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수준이 높아질 때마다 더 큰 밀도와 더 복잡한 구조패턴이 형성된다. 이런식의 진행은 커뮤니케이션의 세 단계와 팽행을 이룬다.
예수는 우주 전체가 압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것이 바로 에너지 법칙이라고 말했다. 압축은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반면에 팽창은 그것을 내어놓는다. 또한 예수는 모든 압축이 새로운 에너지를 낳는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요? 우리는 학교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양은 고정되어 있다고 배웠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에너지가 끊임없이 창조된다고 하시는군요"
예수는 웃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자제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자신이 말한 바대로라고 하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특정 이해 수준에서 타당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친절하게 덧붙었다.
"그것은 분리되어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의 영역에서는 타당한 설명이오, 하지만 그 법칙에는 한계가 있어서 우주에 불변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더 큰 힘인 자력과 궁극의 권능인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법칙도 재평가를 받을 것이요"
"이런 사랑에서 나오는 전위 상수가 있소. 비록 그것의 순생산에는 전혀 한계까 없지만요. 사랑에서 나올 수 있는 산출은 말 그대로 아무런 한계가 없어서, 새로운 압축이 생길 때마다. 더 많은 산출을 낳게 되죠. 고온 핵융합이 끝없이 진행되어 구조를 소진시키더라도 우주가 계속해서 팽창하는 건 이런 권능을 통해서요"
예수는 고온 핵융합이 제1본질이 아닌 구조만을 소진시킨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고온 핵융합에 대한이런 언급은 열역학 법칙들에 대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예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 일부인 보존의 법칙처럼 열역학은 열에너지를 발생시키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밀도 영역과 관계가 있소, 그런 밀도 영역과 관련해서는 이 법칙들이 실용적이요. 그렇다 하더라도 열역학에는 존재 천체를 논리적으로 통합할 수 없게 막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소, 열역학은 에너지를 대우주 체계 내에 존재하는 물질의 작용으로 규정하는데, 문제는 여기서의 대우주 체계가 무한한.불가지'라는 부동의 배경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것이오. 달리 말하면, 무한을 나머지로 남겨둔다는 거요! 이건 독점욕을 말해주는 거요. 지배할 수 없는 건 무시한다는 식의..."
"그렇다면 압축을 만들어내는 건 뭔가요?"
"사랑... 무엇보다 우선적으로,그리고 언제나요! 압축을 만들어 내는 건 사랑이오. 사랑은 모든 걸 집합 안에 끌어들이니까요. 사랑은 결합에 불을 붙이죠. 사랑은 입자들을 결합하고, 관계들을 형성합니다. 그 물리적 대리인이 자기요. 이 힘이 물리차원에 적용된 것이 압축이고요"
예수가 자기란 용어를 사용할 때, 우주에 원초적 자기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는 건 명백했다. 예수는 이를 '흡인 영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창조적 잠재력의 이 기본 상태는 직접적이고 공시적인 방식으로 의식적인 자극에 뚜렷하게 반응하고 난 다음, 우리가 질량과 구조의 세계에서 참이라고 관찰하는 자력이라는 퍄생 행동을 조건짓는다. 언젠가 나는 온전한 원초 본질 안에 어떻게 '영역들' 이란 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예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위(잠재력)에 적용되는 의향이 그 의향의 충격 정도와 같은 '외전'반응을 만들어내니까요"
따라서 이런 창조행위들을 묘사하는 경우들에 예수는 자력 소용돌이(보테스)란 용어도 사용했다. 그런 용어의 사용은 내가 전제하는 것보다 '더 앞선 시초'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이 여겨졌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렇게 창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우주는 아직도 그 모든 것을 시작케 했다고 추정되는 엄청난 폭발의 여세 속에 있다는 현대 과학이론의 타당성이 입증될까요?" 내가 언급한 것은 '빅맹'이론이었다.
"글쎄요. 폭발이 일어나기 우이해서는 먼저 압푹이 있어야 하오! 그런 정도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압축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을 거구요. 과학이 관찰했던 건 이런 압축이 일으킨 결과였소, 그토록 강력한 압축이라면 그 발산 또한 그만큼 강력하지 않을 수 없죠. 따라서 그 엄청난 폭발을, 무한 공급에서 유한 공급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불의 벽'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소. 지금까지의 논리와 방법으로는 이점을 꿰뚫을 수 없었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좀더 알기를 원했다. 창조를 놓고는 다양한 설명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나는 이 구절이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것속에 스며 있고 모든 것으로 존재하는 오직 한 영밖에 없는데. 어떻게 공(허)이 있을 수 있는가? "공은 무엇이고 압푹이란 뭔가요? 게다가 빛이 있기 전에 어떻게 물 같은 복합물질이 존재할 수 있나요?"
"공은 한 영안에 창조된 자기 소용돌이였소, 그것을 통해서 금강입자들이 집합 속으로 끌어들여졌고요"
그런 다음, 예수는 고대식 상징론에서 물이란 게 물이라는 용액 자체만이 아니라 자기의 영향과 반응도 표현한다는 설명으로 나아갔다.
"성경시대의 상징론에서 '물'은 곧잘 자기를 상징하는 용어였소"
그제서야 나는 창세기의 첫 구절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달의 자기력을 밀물과 결부시키고, 물의 요소를 자장이나 자기적 속성과 결부시킨다.
"금강입자들은 신의 살아 있는 몸이오. 그것들은 밀도로 압축할 수도 있고, 무한으로 팽창할 수도 있는 유일한 입자들이오. 그것들은 밀도의 차원과 무한한 잠재력의 영역 둘 다에 똑같이 속해 있소, 그것들은 집합 속에 끌어들여져 압축되었기 때문에 요소의 범주들과 하위 범주들이 만들어졋소,
금강입자들의 첫 번째 압축은 빛을 만들어냈소, 하지만 이건 제1 빛이었소, 그건 의식하는 영혼에게만 보이고, 흔히 천국이라 부르는 더 높은 차원에서 상존하는 빛이오. 햇빛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압축은 이 빛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소. 당신이 해에게서 받는 것은 여러 압축 차원들이 만들어낸 복합 결과요. 압축을 뒤집는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광자들이 방축되었는데. 이것이 제2 밀도의 빛이오.
대폭발 전에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제1밀도의 압축 속에 있어서 오직 끊임없는 빛만이 존재했소. 당신이 아는 대로의 에너지 및 공간 현상을 드러내는 팽창 입자들의 고삐 풀린 힘이 생겨난것이 이 폭발로 인해서요. 그래서 요소들 간의 차이가 드러날 수있었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 낮과 밤이 있게 된 거요. 이렇게 해서 둘째날이 마무리된 거고요"
게다가 예수에 따르면, 각각의 날들마다 나름의 전형적인 창조행위들이 이루어졌다.
"매폭발 이후에도 압축은 계속되어 마침내 항성들의 창조를 가져왔소, 하지만 항성들이 창조될 수 있으려면 먼저 창조의 세 번째 행위인 물들의 분리와 물의 설정, 식물의 생산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소.
성경에도 해가 있기도 전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예수는 물들의 분리가 자장의 행창 및 개별 소용돌이들의 활성화와 연관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창조의 세 번째 행동은 자기 소용돌이의 증가요. 압축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소용돌이가 있어야 했소, 왜냐하면 이제 우주는 팽창하는 양식으로 있게 되었기 때문이오. 이렇게 해서 딱딱한 물질 속에 존재하는 소용돌이들과 하늘에 존재하는 소용돌이들, 유기체의 형태를 낳기로 되어 있는 소용돌이들이 있게 되었소. 세 번째 날에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소용돌이들 안에서 전위의 차별화가 진행되었지요. 그럼으로써 압축은 특정화된 발현영역들 속으로 확장될 수 있었고요."
만일 당신도 나처럼 아직 해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세 번재 날에 어떻게 나무와 풀들이 자랄 수 있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면, 그 대답은 나무와 풀들이 나중에 가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토대가 형성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잠재력은 자기 소용돌이의 증가를 통해서 커져갔다.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자신 안에 자기 중심을 가지고 있소, 이것이 생명이 오늘날까지도 지니고 있는 조인된 목적 할당이오"
이 순간에 나는 예수가 말한 바에 내재된 또 하나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예전에 녹은 철덩어리가 타고 폭발하고 있는 것이 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예수는 이제 막 우리의 태양은 강력한 자석이라고 진술하지 않았는가! 내가 더 구체적으로 묻자 예수는 해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꼬, 반감기의 진행도에 다라 앞으로도 언제나 어느 정도는 이런 식일 거라고 대답했다.
"당신들의 태양은 엄청난 수소가스를 자신에게 글어당기는 자기 소용돌이를 가지고 시작되었소, 그것은 수소원자들을 차례로 끌어당겨 그것들을 압축시겼소, 수소가 압축되자 엄청난 열이 발생하여 열에너지가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변성을 시작했소, 이것은 절대온도 5백만도와 1천만도 사이에서 일어났소, 압축의 수준이 새로워질 때마다 더 많은 열과 더 많은 에너지 변성을 낳았소. 헬룸은 도위원소 12인 탄소로 바뀌었고, 다시 산소와 네온, 마그네슘, 규소, 유황, 아르곤 칼슘으로 바뀌었소, 그리고 변성이 일어날 때마다 더 밀도가 높아져, 자기 중심의 둘레에 딱딱한 고리를 만들어갔소. 시간의 이 지점에서 해는 아지곧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자석은 훨씬 더 강력해지기 시작하고 있었지요. 절대온도 5천만도 이상에 이르는 활기찬 가열의 최종 결과가 철의 형성이었소. 이전 요소들을 변성시킨 결과로 철이 나타나게 된 거지요.
달리 말하면 해는 단단한 물질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거요. 수소에서 압축된 이전 요소들이 압축되어 마침내 철이 된 거요.
젊은 별의일생에는 결정적인 지점이 있어서. 철로의 변성이 눈깜짝할 새에 일어날 수가 있소, 만일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급격하게 일어나고 별의 크기가 거대하다면, 핵 전체가 철로 가득해질 수 있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엄청난 내부폭발이 그 별의 폭발을 불러오죠. 이것이 초신성이오. 초신성은 젋고 거대한 별들의 경우에만 일어나는 것이어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죠.
나는 우리 태양의 미래가 특히나 궁금했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둘 중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소. 다소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철로의 변성이일어나 중심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소. 그렇게 되면 태양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자석이 되지 않죠. 태양은 그 지점에서 한정되는 역사. 한정되는 일생을 갖게 되죠. 이건 죽어가는 백색 왜성이오.
그런데 살아 있는 백색 왜성도 있소. 철로의 변성이 여전히 일어나면서도 그 중심이 아직도 활발한 자기활동을 하는 별들이 이런경우요. 당신들의 태양이 이런 별이오. 당신들의 태양은 살아 있는 자력이오. 그리고 태양계 내 유기생명체들의 발달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마도 우리의 신체적 안녕이 태양의 자력과 조화롭게 공명하기 때문에 예수는 하루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태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기라고 권고했을 것이란 생각이.
예수는 말했다.
"모든 생명형태들 속에는 자기 중심이 있는데. 이 의식과도 관련이 있소, 모두가 압축의 산물들이고, 사랑의 지휘를 받으면서 희망에 차서 나아가죠"
예수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압축이 창조의 부수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중심 활동임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내게는 영의 단일성이 물질 발현의 무작위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압축인 듯이 보였다. 우리가 무작위성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필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 게다.
"성스런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과 생명력 자체의 원천일 뿐아니라 당신의 자력중심이기도 하오. 당신 생명의 중심 자체가 거대하고 강력한 자석이오. 그렇거늘 자기 외부에서 목표를 구하는 것이 어찌 오류가 아니겠소?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외부에서 찾는 세상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가 이것 아니겠소? 그들은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문서들을 연구하거나 목표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떠돌죠. 자기 외부에서 목표를 발견하는 길에서 있는 온갖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면서요.
당신이 아버지의 창조물들로 넓혀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우주가 창조된 바로 그 원리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렇게 해나가야 하오. 그리고 창조의 첫째가는 원리는 물론 사랑이고요. 당신이 사랑이오. 사랑으로서 당신은 자신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올 권능을 가지고 있소, 사랑으로서 당신은 삶이 필요로 하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와 모든 형태의 공급에 불을 당겨 압축시킬 권능을 가지고 있소"
내가 신이 어떻게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압축의 궁극 표현이 동시성이오. 그 거룩한 근원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에너지, 모든 발현을 압축하죠 현존과 자각과 발현의 순수하고 완벽한 동시성이야말로 신만이 갖는 독특하고 전지전능한 권능이오"
이것이 궁극의 압축상태이고, 이것이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것은 '제로점'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일치와 동시적 커뮤니케이션과 동시적 이해 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균형점에서 따라서 신은 나와 함께 여기에 있으면서 중국의 누군가와도 있을 수 있고 말 그대로 우주 전체에 걸져 있을 수 있다! 그는 어떤 입자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에 신경쓸 수 있다. 새들이라고 그의 자각을 피할 수 없고, 새들이 뚫고 나는 공기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완벽하고 완전한 동시성이다. 즉 신만이 지닌 독특하고 전지전능한 권능이다.
동시적 시행과 공시성은 확장을 통해 사랑의 자녀로서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차원들에서 동시적으로 살아가고 작용한다. 그것을 명백하게 말해주는 한 예가 우리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숨쉬고 우리 가슴은 뛴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 비록 우리 몸은 지상에 붙박혀 있지만 우리 영혼은 천상에 가 닿는다. 이것이 그 가장 순수한 형태에서의 동시성이 아니겠는가? 한번이라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혹은 상실감과 획득감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동시성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안다. 예수가 요약했듯이
"당신은 지금까지 되어왔던 그 모든 것인 동시에, 당신이 앞으로 될 그 모든 것들의 씨앗이 당신에게 있소, 여기에 무슨 갈등이 있겠소? 그냥 약간만, 정말로 약간만 주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어제에서 내일로 갈수 있소, 다시 한번 약간 주의를 바꾸는 것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자는 상태로 갈 수 있구요. 그 잠자는 상태가 당신의 본성을 바꿀까요?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오. 전적으로 완전하게요. 당신은 모든 능력이 동시에 작용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않소?"
일단 우리의 주의가 이 점에 집중되면 이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우리는 일직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 전문화에 적응해왔다. 이런 적용은 우리로 하여금 원인과 결과가 삶의 작동방식에 대한 유일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해하려는 욕구가 인과의 설명만으로 다 해소되는 건 아니오. 물론 인과의 결과를 이해하는 건 대단히 중요하오. 하지만 상호성과 공시성을 이해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오. 이해의 이 세 차원모두가 추구되어야 하고, 관련이 있을 때마다 삶에 적용되어야 하오"
자신에 대한 합리화가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기를 요구하면 얼마든지 편의적으로 무시하면서도, 일직선 결과의 협소한 틀을 넘어 그에게 참된 해답을 줄 더 큰 시야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인간의 역설을 깨닫자 나는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 세 유형의 상호작용 모두를 우리의 이해 속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나아지리란 사실이 난생 처음으로 내게 명백해졌다.
"그것의 주된 원인은 전문화에 있고, 부분적으로는 물리 현실에 대한 인간의 지시기 욕구가 물질 요소를 제1원인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오.
먼 옛날부터 인간은 제1원인을 물질 우주 안에서 찾아왔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소, 인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파생적인 것이오. 제1 근원은 있소, 신이 바로 그것이오. 하지만 신성한 의식의 가슴속에는 완벽한 발현과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의도만이 존재하오. 이것을 원원인 이라 여길 수도 있소.
제1의 물질원인에 대한 탐구는 무한히 계속될 수 있지만 결코 성과 있는 수확을 올리지는 못할 거요. 원인을 결과의 주인으로 신성시하려는 갈망이 셀 쑤 없이 많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으로 가득한 댇본을 써왔소, 거기다가 그것은 과학발전의 특정 진로들을 막아왔소. 인과는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요. 사실 삶의 한 국면에서는 닭이 달걀보다 먼저지만, 또 다른 국면에서는 달걀이 닭보다 먼저지요. 하지만 어떤 국면도 삶의 모든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더 큰 포괄 없이는 이해될 수 없소"
"그렇다면 왜 인간은 고집스레 원인을 결과의 주인으로 신성시해 왔을까요?"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동기가 있어서였소. 인간이 인과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하면, 그는 자신의 '처벌에 의한 통제'일정 또한 어떤 허점도 없이 정당화해낼 수 있게 되요. 내가 당신들과 신과의 기나긴 분리를 끝내려면 용서하고 내려놓고 더 큰 은총의 권능을 관찰하라고 부탁했던 이유가 이것이오. 신과의 그 오랜 분리로 당신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현실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어떤 상황이든 가능성의 전체 스펙트럼 안에는 인과의 유형과 상호영향의 리듬. 그리고 완벽한 공시성이 존재하오. 그 중에서 당신의 선택은 당신이 초점을 맞추는 그것이오. 따라서 많은 경우 당신이 내린 선택이 당신의 지혜를 반영하죠. 인과가 가장 많이 관계하는 경우에 인과의 결과를 피하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오. 하지만 상호부조의 영역에서 은혜와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소.
이곳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면서 온갖 창조 가능성을 가진, 무한히 효율적인 우주요. 당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건 당신 삶의 목적과 봉사와 완성의 길을 계시해주는 것이오.
당신이 능력의 한계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구하시오. 나는 그것이 상호 존중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오"
이것을 이해하는 건 전체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붙잡는다는 뜻이다. 전문화가 우리 자신인 더큰 전체로부터 우리를 테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는 실존과 그것의 여러 차원들에 대해 한정된 인식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압푹은 우리가 사는 삶에서 지울 수 없는 부분이다. 압축은 전체 실존의 일부이다. 비록 관련 갈등이나 조화의 다양한 정도에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이런 다양한 압축 수준들에 대해 고려하길 권했다.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압축상태들을 다시 살펴보기만 해도 당신의 삶을 다시 책임질 수 있소, 어둡고 밀도가 무거운 경우에는 양립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압축되어 있기 마련이오. 그럴 때는 그냥 뭔가를 바꾸고 뭔가를 놓아버리고 뭔가를 옮기시오"
예수는 "완벽한 압축은 갈등이 아니라 투명한 중첩상태를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이 투명한 중첩상태는 많은 압축들을 끌어당기고, 제자리에 붙들어두는 자기중심과 완벽하게 양립한다. 이것들은 우리 삶에 존재하는 다양한 투명충돌이다. 이 완벽한 압축상태로부터 우리는 다른 모든 발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동시적 자각이라는 훨씬 투명한 중첩이 존재하는 곳을 확인하시오. 삶의 이 영역이 삶의 엄청난 정당성과 신과의 합일이 존재하는 곳이요. 당신들은 이 영역이 당신들을 위한 의미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오. 이런 것들을 강화하여 당신의 삶 전체가 다층화된 단순성을 가지고 확장할 수 있게 하시오."
압축의 다음 수준은 협응과 상호작용이다. 비록 그것에 질서가 있다고 해도 이 수준에서는 더 많은 저항이 생겨나기에 열에너지의 발생을 초래한다. 활기차고 생산적인 이런 압축들은 운동선수의 무용담에 비견될 수 있다. 올림픽 주자가 세계기록을 갱신했을 때, 그가 해낸 건 무엇인가? 그는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이런 게 압축이 아닌가? 그런 압축들은 자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열정적이다. 우리 또한 일을 해나가면서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에서 희열을 맛보곤 한다. 우리는 뭔가를 능가하고자 하며, 그런 도전을 즐긴다. 솔직하게 말해 소비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할 때 우리는 고무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가 이 수준에서 삶을 너무 많이 소비하는 것에 주의를 주었다.
"더 많은 열기와 에너지가 있는 곳이니만치 당신은 함께 작용하는 여러 협응력들을 갖게 되죠. 아마도 당신은 그런 역동적인 행동을 무척 즐길거요. 하지만 그 불이 당신을 소진시키기 전에 그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아내고, 그것이 당신을 위해 지닌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마침내 다른 행동들로 옮아갈 수 있게 될 것이오. 여기는 당신이 영원히 살기로 되어 있는 자리가 아니요"
압축의 세번째 수준은 구조의 특별한 집합체를 이루는, 두서 없는 부정할 요소들을 강제로 조직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 물결 밀도의 수준이고, 익히 알고 있는 다양한 조직과 갈등과 세력이다. 이 특정 차원은 우리를 대단히 좌절시키는 차원이다. 압축과 관련해서 우리가 지니는 경험이 오직 이것뿐이라면, 과연 이런 과정을 신과 연관시킬지조차 의문스런 차원 말이다.
나는 (어린 양과 사자)그림을 많은 점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압축을 보여주는 한 예로 여기고 싶다.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 유화물감은 하루면 다 말라 있곤 했다. 여느 때라면 그것이 마르는 데 3일씩은 족히 걸렸을 텐데 말이다. 적어도 시간은 압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필요한 모든 것이 노력없이 즉각 제공되거나.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은 걸로 봐서, 내가 가장 높은 차원의 압축을 지휘하는 누군가의 현존 앞에 있었던 것이 명백했다. 나는 이것이 예수가 동시에 많은 것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를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어준 완벽한 압축상태가 말 그대로 그를 우리 한가운데 있게 하면서도 서로 동의하는 경우에만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의 투명성이기도 하다.
그림과 관련해서 일어난 기적들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 그림이 높은 압축도 하에서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적의 해부학이라면 아마도 구조의 갈등을 지우고 단순한 실존이라는 완벽한 압축에 잘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 생애의 마지막 주 동안 벌어진 엄청난 압축과 고도의 열정이 단 며칠 사이에 인류와 세상의 역사 전체를 바꾸었다. 이런 게 압축이다!
온전한 압축이라는 문제는 치유의 세계에서 대단한 잠재력을 갖는다. 이다금 살면서 대단히 온전해질 때, 생활 속에서 고도의 압축을 실행할 때 질병에 대한 내 면역력은 엄청나게 커진다. 감기나 유행성 독감에 걸린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전혀 감염되거나 하지 않는것이다. 이렇게 온전함이 다른 요소가 침입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을 때 방울뱀의 소굴이라도 안전하게 걸어서 지나가지 않겠는가! 아마도 침입요소가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그런 온전함의 상태로 있는것. 바로 이것이 치유의 위대한 비밀 중 하나일 것이다.
압축에 대해 실제적이 되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이유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우리가 압축에 관여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인데다. 압축이 객관적으로 조망될 때, 그 사람 삶의 많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함께 속하지 않는 요소들을 뒤섞으면 그 결과는 언제나 아픔과 고통이오. 이것의 흔한 예가 알콜이나 마약, 나아가 몸의 기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공식품에 대한 집착이요. 핵심은 어떤 요소나 어떤 발상, 어떤 행동이나 인간관계의 어떤 조합은 실제 현실이란 의미에서 그냥 슬모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소들의 무용한 배합을 고집스럽게 강요하거나 조작하는 건 아픔과 고난과 불행과 에너지 상실. 그리고 결국에는 빈곤만을 가져올 뿐이오.
다른 한편, 전혀 통합하고 압축하지 못하는 건 흩어지고 중심이 없고 에너지가 부족한 삶을 만들어내죠. 우리 각자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압축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함께 묶어 쓸모 있게 만들수 있을까? 하고요. 압축과 관련해서 특히 재미있는 건 압축이 목적과 우선순위와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시작할까?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까?
"엄청난 단순성을 가지고요. 시간의 가장 큰 압축은 지금 이오! 그러니 그냥 지금 여기에 있으시오. 그냥 그렇게 하시오. 또 인식의 가장 큰 압축은 무구함이오. 그러니 삶에 덧붙이지 마시오. 당신은 그것을 바꿀 필요가 없소. 불필요한 조건들을 덧붙이지도, 현실을 발명하지도. 고장나지 않은 것을 고치려 하지도 마시오. 핵심으로 가시오. 당신이 쓸수 있는 그 모든 도구와 자각과 재능을 포함해서 자신이 지닌 것들을 활용하시오 늦추지 말고 그냥 사시오! 이런 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의 압축이오. 그것은 당신을 자신의 중심으로, 자신만의 '제로점'으로 다시 데려갈 거요"
이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여러날의 대화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가 내 관심을 채워주자. 새로운 종류의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압축이 먼저인가? 압축은 창조주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는가? 같은 의문들이
"천지만물이 신이요. 하지만 근원으로서 신이 있고, 통로로서 신이 있소. 압축은 근원을 통로로 바꾸는 수단이자 현상이오. 압축을 이해하면 당신들은 그 과정을 다시 밟을 수 있고, 지금 알고 있는 근원과 통로 간의 연관관계보다 더 유동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발견할 것이오. 이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으로 당신들이 지금의 현실 실존과 영적 실존 사이에서 체험하는 분리효과도 줄이게 될 테고요. 입자 밀도의 불질 차원은 전체 실존 중 1%도 차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당신들은 그것의 많은 도전과 문제들에 끝없이 초점을 맞추면서 그 밀도들의 베일 너머에 놓인 온갖 축복들을 놓칩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물질 밀도와 그 외 나머지 실존 간의 전환국면들을 관찰하는 편이 현명할 거요"
이 점은 나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왜곡된 설명들에만 협소한 관심을 보이는, 가슴이 단순한 영혼들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사람들과 교류 될 수 있을까?
"삶은 자신의 모든 주기마다 이것과 교류합니다. 내가 당신들의 관심 수준과 오늘날 인간의식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하지만 이건 어떤 상황에서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요. 그건 어떤 창조에나 내재되어 있소. 예를 들어 출산 과정을 생각해보시오. 강렬한 압축이 이루어지지만, 깊고 규칙적인 호흡조절로 아픔을 줄이고 나아가 없앨 수도 있소, 그러고 나면 오직 신만이 아는 무구한 생명은 강한 압축으로 산모의 몸밖으로 밀려나와 생명의 숨결을 터트리게 되죠"
내 물음은 대답받았다.
"인간의 형제애라는 현실은 인간 모두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혼란과 재난의 시기들에는 이런 현실을 압축하면 이 진리를 훨씬 더 강력하게 만들 수 있소. 성취의 시기에는 모두가 그 기쁨을 나누게 되고요. 이에 반해 환상과 인간의 구조들은 무관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제쳐지게 되죠. 인간의 형제애는 현실로서 존재하고 당신들을 함께 뒷받침해주는 현실이란 걸 항상 기억하시오. 어떤 행정체계에 권한이 주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그것이 모두에게 공정하고 인간의 필요를 뒷받침해주는 한에서는요.
현실은 존재하는 중에서 최고의 경제요. 사실 현실은 경제의 혼이오. 만일 당신이 환상에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자가 될지 생각해보시오. 만일 구조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만 한정된다면, 당신이 삶의 기쁨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시간을 얼마나 많이 갖게 될지 생각해보시오! 환상을 창조하고 구조를 뒷받침하는 데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는 거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개인으 건강과 생산적인 생활에 더 잘 소비되었을 에너지가 말이오. 당신이 환상과 구조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것들은 당신의 삶을 훔칠 수도 있소"
"환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까요? 그 둘을 구별하는 막이 워낙 얇을 때도 있거든요.
"알고있소, 그 주제에 접근할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시작하지도 말고, 환상과 현실이 서로 적인 듯이 다루지도 마시오. 환상은 각 개인의 사적 현실의 일부요. 당신이 자신의 환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 있소, 그것이 공동의 현실에 해악이 되는 건 단지 당신이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요. 환상은 현실과 창조적인 연결고리요. 당신의 마음과 가슴과 영혼은 환상을 사용해서 개입영역 바깥의 한 지점으로부터 현실 내의 잠재력에 접근하고 그것을 배우고 맛보고 평가하죠.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지도와 고속도로의 관계나 연극과 삶이라는 드라마의 관계와 비슷하오.
문제는 환상이 그들 나름의 생명력을 얻어서 현실에서의 도피가 되거나. 더 나쁘게는 현실을 잘못 대변할 때 생기죠. 그 차이는 개입과 구별로 알아낼 수 있소, 만일 조금이라도 의문이 남는다면 이렇게 해보시오. 문제되는 상황이 더 이상 창조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해보는 거요. 당신도 알다시피, 현실은 당신이 그것을 더 이상 창조하지 않더라도 사라지지 않소. 하지만 환상은 사라지죠. 그래도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면, 그 상황에서 압축이 가속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시오. 무엇이 부서지고 무엇이 지속될지를요.
예수의 이런 설명을 듣노라니, 브라이언과 내가 텍사스주 파라다이스에 포도밭을 갖고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건 낙원에 대한 환상이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멋지고 낭만적인 경험을 즐겼다 그곳은 아름다운 포도원이었고, 사실 우리는 텍사스 주에서 처음으로 크로거 식품 체인에 식탁용 포도를 판 최초의 생산자였다. 또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용 포도를 길러서 근처의 양조장에 팔았다.
하지만 기후의 관련해서는 환상과 현실 사이의 균열이 존재했다. 텍사스 중부의 기후는 포도를 생산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기후였다. 우리는 무수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화학약품들을 사용해야 했고 해마다 봄이면 뒤늦은 냉해를 겪어야 했다. 언젠가는 태울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태우면서 기온이 급락하는 걸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밤을 꼬박 세운 적도 있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는 기운을 잃어갔고 포도원의 생산력도 떨어졌다 불가능한 현실의 조합이 우리의 어긋난 환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보완작업을 그만두고 일시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길 그만두게 되면 그 포도원은 완전히 실패로 끝날판이었다. 반면에 우리 포도원이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었더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그런 포도원은 낭만적이고 잘못된 환상 속에서만 번창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백일몽을 이따금 즐겨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비록 결국에 가서는 우리 앞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에 직면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종류의 모래성을 쌓죠. 이건 잘하는 일이오. 왜냐하면 그건 현실 속에 뛰어들기 전에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를 검토해볼 방법을 제공해주니까요. 실수는 모래성 속에 살기를 기대할 때 저질러지죠. 신과 당신의 모래성과의 관계를 오해한 것이 당신더러 역경을 겪게 만드는 거요. 그 모래성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오. 모래성을 쌓아놓고는 밀물이 들어 모래성을 씻어내는데도, 신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거나 그것을 구원해주길 기대하는 게 인간의 크나큰 어리석음이오.
당신이 신과 맺은 서약은 현실에 관한 것이기에. 그 서약에 따라 당신은 더 이상 애정 깊고 자비로운 후원자를 갖지 못할 수도 있소. 현실을 존중하면서 가슴을 통해 청해진 모든 기도는 응답 받기 마련이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도가 위기에 몰리거나 무너지고 있는 환상을 위해 청해진다는 데 크나큰 비극이 있소, 환상은 대도이자 억장을 무너뜨리는 존재요. 왜냐하면 그건 신이 안간상황에 개의치 않는다는 잘못된 관념을 인간에게 주기 때문이오.
신은 현실과 하나요. 그리고 인간은 이런 현실의 상속자이자 확장자로 선택되었소, 당신은 당신들이 이런 업적을 이루든 말든 신이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천만에요! 당신이 현실적이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보여줄 때, 당신은 자신이 가는 길의 반 이상에서 기적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사랑과 지원과 도움을 만나게 될 것이오.
지상에서 당신의 삶은 믿음과 의식을 쌓는 것이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당신은 현실이 위안이자 기적임을 발견할 거요. 하지만 이 단순한 과정에 안착할 때까지 당신들은 헛되게도 구조를 매개로 위안을 구할 것이고, 환상을 매개로 기적을 구할 것이며, 전문화를 매개로 능력을 구할 것이오. 대다수 사람들이 경험하는 분리상태가 이것이오"
"판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사람이 환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래선 안 되오. 모두가 믿음과 의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자기 힘으로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배워야 합니다. 모든 체험을 현실의 환상으로 보는 것 역시 미숙한 인식이요. 환상도 있고 현실도 있다는 깨달음이 있고서야 성숙해질 수 있소, 일단 그 차이를 혼자힘으로 알고 나면, 당신은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의 환상이 미치는 영향을 언제 어떻게 차단할지도 알게 될 거요.
당신이 이런 이해를 얻으면, 나는 당신더러 모든 상황에서 중용을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소. 중용에는 내재된 은총이 있어서 판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잘 식별하고 방어하게 해주거든요"
기술 선진국들에서 이루어지는 전문화의 심화가 환상과 현실을 더 잘 식별하게 해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문화는 반대 결과도 낳는다. 전문화는 우리 행동이 가치를 갖는 더 큰 문맥에 대한 인식을 훼손한다. 사실 가치의 발생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야 말로 환상과 현실을 식별하는 열쇠다. 이해에 근거한 가치는 효율성과 통합성, 결과에 대한 체험과 관찰 위에 세워진다. 반면에 전문화는 이런 자각을 망가뜨린다. 통합성을 가질 수 있는 선택사항들이 너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미국의 노동현장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의 두 원인이 가치 중심적인 이해의 감소와 전문화라고 설명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무렵에 가장 피곤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업화된 작업을 행하는 조립라인 노동자들이라는 것이 세심한 연구로 밝혀진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작업 자체는 말끔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세세한 것에 한없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노동자들의 진을 빼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 우주가 압축 위에 쌓여져 있으며, 이것이 에너지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분업화는 사람들 고갈시킨다. 우리가 일차원적 행동에만 우리의 활동을 한정할 때, 우리는 언제나 에너지를 잃게 된다. 예수는 이것이 미국사람들이 그토록 지쳐 있는 이유 중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미국인들은 점점 더 지극히 단조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겹고 긴 업무와 뒤이은 온갖 허드레 가사노동과 의무들, 불충분한 수면에 시달리는 사람이 에너지와 활력으로 새날을 준비하기는 힘든 법이죠.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많이 일하는 것일 테니,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해결책이요.
핵심은, 당신이 행하고 있는 그 일을 잡아서 더 풍요롭게 하는 거요. 자신의 다양한 차원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다양한 측면이 일터에 스며들게 하시오. 친구를 만드시오. 다른 측면들에서 삶을 품요롭게 해줄 배움의 곡선을 개척하시오. 기억력이나 집중력, 교제력을 발휘하시오. 실제로는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잃었던 에너지를 되찾게 될 것이오.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자신의 더 많은 측면을 적용하시오. 이건 당신의 활동시간을 더 많이 늘리라고 권하는게 아니오 그건 같은 시간이라도 당신의 모든 것을 더 많이 투명하게 중첩시키고 압축시켜서 자신의 활동을 풍부하게 만들라는 이야기요"
하지만 그는 사랑이 관리하는 압축이 영혼에게 가치 있는 에너지를 낳는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우리가 압축을 만들어내고 창조할 때는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사랑으로 생겨난 압축은 살아가는 데 있어 당신에게 이득이 됩니다. 이것은 일터에서도 당신에게 이득을 주죠 이득이란 개념이 죄의식이나 질투심을 동반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그건 이득이란 걸 오해한 데서 생긴 거요. 많은 경우, 존재하는 건 참된 이득이 아니오 단지 돈이 끼어든다는 것뿐이죠.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되지 않았을 때, 돈은 세력이 가장 강한 사람들의 주머니로 슬며시 들어가는 경향이 있소, 이 때문에 이득이 오명을 쓰게 되었지만, 그건 사람들이 풍요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요.
인류가 사랑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더 강한 압축을 사용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이득은 죄의 상징이 아니라 실현을 나타내는 용어가 될 것이오. 이득이란 걸 남의 접시에서 뺏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와 풍요를 낳아주는 것으로 여길 테니까요. 이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들이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에너지를 낳아줄 거요. 선한 이득은 가격과 물가상승을 낮추고 기쁨과 사기를 높여주죠.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든다고 해서 게으름을 부추기게 되지는 않소. 오히려 그건 일할 의욕을 되찾아줍니다.
오히려 게으름을 부추기는 건 피곤에 절은 육신과 아무런 참된 이득이나 보상 없이 힘에만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사업과 생산체제에 분개하는 반항적인 태도요. 선한 이득은 선도자를 유리하게 만드는 사랑의 투자요. 이 문제라면 기러기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 거요. 당신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기러기들의 'V'자에서 한마리가 선도자의 자리에 선다는 걸 알 수 있을거요. 그 한마리는 선도자로 날면서 바람을 뚫고 다른 기러기들이 더 쉽게 날 수 있도록 해주죠. 선한 이득이 모두를 위해 하는 일이 이런 거요. 사실 선한 이득은 에너지를 창조하기에. 모두가 참여하는 전체 경제를 활기차게 하고 풍요롭게 해주죠. 효과적인 압축이 있는 곳에는 빈곤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거나 만연하는 일이 절대 없소"
압축의 권능은 사랑이고, 그 대리자는 자기다. 이 진리는 아직 현실적으로 지상에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도 불씨를 만들기 위해 막대기 두 개를 서로 비비던 그 최초의 인간에게서 나온 마찰-저항 에너지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런 마찰-항(길항) 에너지가 전기력의 토대다. 우리는 이것 위에 기술과 사고방식을 세워왔다.
지금 생산에서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마찰에 근거한 힘인 전기력을 사용하는 데서 생긴다. 전기 양식은 고도의 분업화를 낳는데 이것은 오직 농밀한 압축만을 뒷받침할 수 있고, 다시 이 농밀한 압축은 더 고도의 모든 압축들을 퇴화시킨다. 지난 50년 동안 힘과 분업화의 고도성장은 산업국가들 내에서 가장 독립적인 기업들을 쓸어가버렸다.
예수는 공룡기업들이 압축을 더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만 존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과 산업을 다차원적 압축을 가지고 경영하는 소규모 기업과 개인들이 재평가받는 대역전이 있게될 것이다. 이것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미래의 추세인 것은 분명하다.
또 우리 태양이 결국 수소가스의 압축이라면, 이 가장 지배적인 물질을 연구하고 그것이 우리 태양계에서 행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검토하게 되면, 좀더 풍부하면서도 저항이 더 작은, 따라서 더 청결한 연료를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산업에서 발생하는 문제 및 방향 전환과 관련해서 예수는 농업분야의 한 예를 들었다. 미국에서는 강도 높은 토지합병으로 영세농민과 목장주들이 토지에서 쫓겨났다. 이것은 10년 전쯤에야 최고조에 달한 장기적인 경향이 되어왔다. 그런데 이제 이 같은 생산경영상의 과도한 책임확대는 이윤과 부담을 전적으로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많은 대기업들이 탁상행정만으로 현장 경영과 생산을 효과적으로 해내기 힘들다는 사실에 직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농사나 원예만큼 압축적인 측면을 많이 요구하는 산업분야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이 분야의 생산자는 많은 요소를 야외에서 동시에 경영해야 한다. 반면에 중개와 유통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의 가정에 실제로 식품을 배달할 수 있는 건 거대기업들 뿐이다. 이때 그 과정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역할은 결국 압축의 효율성으로 결정될 것이다. 압축의 권능이 그 벽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있을 때뿐이다.
"이것은 기업과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에도 사실이오. 과도확장과 분업화가 역으로 압축을 불러오고 있는 징후들에 주목하시오. 그런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아직도 남아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면 경제가 붕괴되는 사태가 알어날 거요.. 로마제국에 일어났던 일이 이것이오. 로마는 무력에 기초한 경제를 과도하게 확장했소, 그러자 도덕과 철학과 사회조직상의 균열이 너무 많아서 그 과잉확장을 압축으로 역전시킬 수 없었지요. 압축과 확장은 우주의 숨이오. 건강하지 못하면 그 주기의 한 측면이나 두 측면 모두가 실현되지 못하게 됩니다. 로마는 압축할 토대를 잃었기에 과도확장으로 소멸했던 거요"
우리 시대에 그런 재난의 가장 가까운 예가 구소련의 몰락이다. 과도확장이 나라를 고갈시킨 나머지 압축으로의 필연적인 복귀에 자금을 조달하고 그 복귀를 지탱할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쓸모 있는 압축들을 실현할 수 있는 분야는 지역정치와 공동의 유산, 그리고 공장생산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압축들과 다른 몇몇 압축들이 적어도 사람들의 삶을 다시 건설할 수 있게는 해주고 있다 이것은 인류 모두가 동정심과 지원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극적인 예이다.
예수는 말했다.
"확장이나 압축 어느 한 쪽이 불가피한 그 리듬을 압도하는 일 없이 똑같이 은혜롭게 순환하면서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이 참된 문명의 상징이요. 이런 게 현실이오. 확장만이 권능과 영광에 이를 유일한 방도라는 건 구조와 환상이 낳은 오해의 상징이요. 국가나 사회가 자신의 힘을 무엇보다 구조와 환상에 집중하면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확장을 억지로 계속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죠. 불필요한 몇몇 구조와 잘못된 환상을 압축이 폭로하고 무너뜨리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연스럽게 압축으로 순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거나 피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확장이 더욱 가속화되면 압축으로의 역전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두려움으로 발전하게되죠. 사실 이건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그런 역전은 불가피하게 올 수밖에 없지요
잊지 마시오 신을 아는데 있어 당신의 관념이 현실적일수록 당신의 꿈이나 관념이 현실과 맺는 관계도 깊어진다는 걸. 당신은 어떤 관념이 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언제나 알수 있소, 왜냐하면 그 관념은 현실에 대해 좀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고 현실에 더 늪은 차원을 가져다줄 테니까요. 어떤 사람이나 사회가 신에게서 멀어지면, 생겨나는 관념들도 크나큰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현실 적용력을 상실하게 되죠.
충분히 강제로 밀어붙이고 충분히 조작하면 어떤 관념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오해요. 이런 게 폭력과 조작의 세계를 불러오는, 신에게서 분리된 관념이오. 비현실적인 발상들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살면, 내가 장담컨대 푹력과 조작이 들어와 그 간격을 매우려할 겁니다 반면에, 당신이 신을 알면, 현실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 커질 거요"
여기서 주목할 건 , 예수는 당신이 신학을 알면 당신의 현실 이해력도 커지리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학이란 신에 대한 믿음을 포괄적으로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소. 하지만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소. 게다가 당신은 신을 직접 알 수 있소, 자신의 창조주를 아는 건 당신이 가진 불멸의 신성한 권리요. 그 앎을 촉진해줄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옳바르게 알기 위해 신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견해가 필요한 것도 아니오. 왜냐하면 신은 당신 가슴에 있으니까요
신을 알면 당신의 발상들은 더 잘 작용할 것이고, 또한 당신은 집중하여 자신을 건강하고 부유하고 현명하게 있도록 해줄 더 높은 수준의 압축을 낳을 수도 있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무엇을 함께 모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거요. 당신 삶의 여러 층들이 대단히 풍요롭게 동시에 펄쳐질 것이오"
이런 가르침을 펴고 나서 예수는 자애롭게도 창조의 지주들로서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를 뜻하는 그 위대한 삼각형에 또 한 차원의 이해를 보태주었다. 나는 예수가 지시하는대로 그 정삼각형 위에 반대 방향으로 놓이는 또 하나의 삼각형을 겹쳐 그렸다 그러자 그것은 육각형 별 모양이 되었다.
1. 사랑
2.영
3.금강입자들
4. 삶
5. 목적
6. 실존
"이 두 번재 삼각형은 현실을 지탱하는 요소들을 나타내죠. 그 세꼭지점에 삶, 목적, 실존이라고 적어보시오.
그러자 여섯 요소 모두가 정연하게 배열되었다. 예수가 말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여섯 요소에서 창조되었소, 이 중 사랑은 원점이고 실존은 모든 창조의 정점이오. 따라서 실존은 세속에 닿아 있고 우주현실을 유지하죠. 반면에 사랑은 영을 활성화하고 금강입자들을 지휘합니다. 그런 다음 사랑은 목적을 가지고 삶을 이끌고, 목적의식적인 삶을 통해 실존이 상추되는 거죠"
예수에 따르면 '다윗의 별 의 본래 의미가 이것이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예수와 나눈 며칠 간의 대화와 몇 년에 걸친 혼자만의 숙고 결과, 나는 두 삼각형의 세 꼭지점들이 그 단순한 구성의 드러난 의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삼각형의 두 꼭지점을 써서 그 사이의 다른 한 꼭지점을 설명할 수도 있다.
에를 들면 삶은 사랑과 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고 실존의 영과 금강입자들간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발현이다. 그리고 사랑과 금강입자들 사이의 중간지점은 목적이다. 사랑은 최상의 원인점인 반면에 실존은 모든 것의 발현점이다. 또 목적과 영은 서로 보완하면서 이끄는 힘을 제공하는 반면, 삶과 금강입자들은 에너지와 권능화를 가지고 서로를 보완한다. 이 상징 속에서 현실을 신의 발현으로서 알수 있는 기호가 들어 있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상징 속에 들어 있던 권능이다.
유구한 세월의 지혜를 가지고서도 여전히 신을 아는 건 모든 인간이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힘든 과제가 되어왔다. 그래서 나는 예수에게 신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건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직접 알기보다는 신에 대한 이론을 아는 쪽을택하는 이유가 이것이오. 유감스럽게도 신학 또한 무가치하다는 관념을 강화시키죠.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덫에 걸려 있소. 신은 말보다 더 위대한 권능이고, 사랑이오. 말이나 공리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보다요. 게다가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겠소?"
나는 나 자신의 경우를 떠올리면서 예수의 물음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전 인간의 판단엣 나온 잘못된 무가치성에 더 이상 젖어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과 경이감은 그대로 남아서 나 자신을 신에 비하면 그지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끼조. 당신이 말씀하셨듯이, 규정하는 쪽은 규정당하는 쪽의 이해를 넘어서 있으니까요"
"그 모두가 사실이오. 글렌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현실 문맥이 주어져왔소, 당신이 신에 대한 앎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자각 문맥에는 대략 여덟가지가 있소,
1. 사랑으로서, 따라서 신의 자녀로서 자신을 아는 거요.
2. 은총과 건강과 균형의 진리를 아는 거요. 이 앎을 추구할 수 있도록 당신들에게는 생명의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들만이 아니라 균형의 여타 보완적 측면들이 주어져왔소, 남녀 관계는 이 앎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죠. 다양한 이해관계와 필요들이 균형과 상호지원 속으로 들어오는 기족이라는 전체 개념과 더불어서요.
3. 목적의 권능이 현실을 드러내고 많은 가슴을 공통된 노력 집단으로 묶는다는 걸 아는 거요.
4. 인간의 형제애를 통해 봉사를 아는 거요.
5. 자연의 경향을 관찰하는 것으로 생명의 전체유형을 아는 거요.
6. 무구한 인식과 보편원리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통해 의식을 아는 거요
7. 우리의 한 영을 유지해주는 믿음의 권능과 신의 의지인 사랑의 권능을 아는 거요.
8. 모든 구조를 능가하는 무한을 아는 거요. 궁극의 실재는 신이오.
[출처] 끝없는 사랑 442쪽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종류의 모래성을 쌓죠.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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