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11장 당신의 권리와 자유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11장 당신의 권리와 자유

柏道 2022. 2. 11. 06:00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11장 당신의 권리와 자유


사랑
2021. 10. 5.
예수가 이 장에 실린 정보를 처음으로 계시한 것은 1992년 2월 하순의 어느날 아침이었다. 그날 아침 일을 하러 화실로 들어선 내 기분은 심란하고 울적한 상태었다. 친족 중에 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를 간호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잠시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 날 아침, 내 마음은 이미 이런 결론으로 많이 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불가항력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약간 짜증스럽기도 했다.



내가 속으로는 그 문제에 전전긍긍하면서도 터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는 걸 눈치챈 예수가 먼저 입을 열어 그 불안한 침묵을 갰다.



"당신이 신경 써야 할 다른 일이 있으면, 당신에게는 이 일을 잠시 중당할 권리가 있소"



청하지 않고서도 동정을 얻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차리는 그의 한없는 능력을 다시 한번 목도하고 나니 참으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하고 내 마음에 길게 여운을 남긴 건 "당신에게는 ..... 권리가 있소"란 구절이었다. 이건 물론 내게는 내가 있고 싶은 곳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예수와 같이 있는 것 조차도 강제가 아니라는! 예수가 결정권이 내게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그 순간, 내 딜레마는 마치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속식을 알려주는 또 다른 친척의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행히도 나는 간호하러 갈 필요 없이 그림 그리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내가 침묵 속에서 맛본 그 느낌은 인간의 권리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를 일으켰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쪽은 예수였다.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는 걸 아는 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아는 거요. 전시대에 걸쳐 많은 이상론과 허다한 논지들이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집중되어왔소, 하지만 인류가 여타의 내재적 권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란 것도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된 건 최근의 의식과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요. 문맥에서 벗어난 자유의지는 아무 의미가 없소. 왜냐하면 그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 혼란스럽고 비합리적으로 처신해도 좋다는 허가장이 아니기 때문이오. 오히려 자유의지는 당신이 자신의 삶을 설정하거나 당신의 다른 권리들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바꿀 힘과 권리를 말합니다. 자유 없이는 권리가 지탱할 수 없고, 권리 없이는 자유가 무의미하니까요"



나는 미국 건국 당시에 미국을 다른 모든 나라들과 다르게 만든 핵심 신념이 이것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자키기 위해 이 땅으로 왔다. 그들은 그렇게하는 게 삶을 더낫게 만들어주리라고 절대 확신했다. 이런 추구가 1776년에 비로소 시작된 건 물론 아니다. 인간의 권리에 대한 선언과 존중은 인류사의 진행과정 동안 인간의 의식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다. 게다가 좀더 유동적인 문맥의 생활방식 속으로 옮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영적, 개인적 권리의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내 권리를 자각해야 한다는 단호함과 배려를 예수의 눈과 목소리로 확인했던 그날 아침의 깊은 감동은 나로 하여금 더 깊은 이해를 청하게 만들었다. 나는 알고 싶었다.









"이 권리들이란 건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해야 그것들을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 날 그의 이야기는 아주 길었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대단히 중요하고 상관성이 큰 주제인 자유의지를 놓고 말문을 열었다. 사실 자유의지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만 분명하다면 개인의 권리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권리를 운운할 근거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 주제의 귀결인 인간의 평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다른 모든 자유는 자유의지와 인간평등이라는 이 두 근본 원리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자유의지는 거룩한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준 토대권리요. 그것은 당신이 '참나'로 있을 권리이자. 살아가면서 이 진리를 증거할 선택들을 내릴 수 있는 권리오. 삶은 운동과 다양한 가능성, 변화를 위한 선택 사양들로 가득차 있소, 당신은 자신이 내리는 선택으로 자신의 삶과 사랑과 진리를 지원하는 거요.



어떤 문맥이나 환경 자체만으로 '참나'의 본질을 존중하거나 지탱하는 건 아니오. 그건 당신이 신의 자녀이지, 환경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오. 그런 만큼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당신은 환경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소. 당신은 자신의 사랑과 조화를 이루는 상황을 만들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 그런 상황들을 지원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소, 설사 당신이 이용할 수 있는 선택들 모두가 이상적이지는 않다 해도, 선택을 내리는 행위 그 자체가 당신에게 외부 상황과 그 상황을 경험하는 방식을 압도하는 확고한 권능을 부여하죠.



하지만 자유의지가 한 개인의 품성이나 삶의 필요들, 혹은 신의 법칙들과 무관하게 파괴적이거나 일탈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조장하거나 인가하는 건 아니오.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무분별한 난투극도 아니고요. 자유의지는 기본적으로 당신 자신으로 있고, 당신 자신을 알 권리이자 당신의 본성을 확장하고, 그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당신 삶의 요소와 동반자들은 선택할 권리요. 자유의지는 누가나가 자신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권리와 환경의 폭정에서 자유를 지킬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졌소,



신의 자녀들은 누구나 거룩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동등하오. 아버지의 편애를 받거나 그런 편애를 얻기에 특별히 유리한 사람 같은 건 없소 어느 누구도 필멸의 존재가 겪는 일시적인 고난에서 면제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불멸의 사랑과 용서에서 제외되지 않소 모든 사람이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 사랑 가득함의 핵심 본질은 아무리 황폐한 환경이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남으니까요. 각 개인의 내면에는 아버지와의 서약이 목적의식적으로 견지되는 성스런 중심이 있으니, 개개인 하나하나가 존재 전체 속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갖는 불멸의 영혼이오. 이 성스런 동등성이 사람들의 권리 및 자유의 직접 토대가 됩니다.



물론 당신의 권리와 자유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불평등도 존재하고요. 한 개인에게는 자신의 평등만이 아니라 불평등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지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가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건강이나 부나 지성을 가지고 평등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요. 이런 요소들 모두가 그 개인의 삶을 이루는 상황이죠. 그런 상황은 대단히 현실적이요. 물론 가슴이 변하고 노력이 더해지면 그것들도 모두 바뀔 수는 있소.



하지만 왜 그런 환경에 처했는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기존 현실 속에서 자부심을 체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를 조건의 동일성과 연관시키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것의 동등성을 침해하는 건 없소. 권리를 가진 건 사람이지 조건이 아니오!



자선을 제안할 때는 상대방을 당황시키고 굴욕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렇게 하시오. 당신의 형제자매를 깔보면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환경의 불평등은 현실의 일부요. 그렇긴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사랑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형제애의 힘이요. 동등성만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면서, 그 둘 다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합일이야마로 최고의 합일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리한 자를 억누르고 불리한 자에게 무자비한 요구를 내거는 획일성이라는 족쇄가 될 수도 있소.



모든 개인은 그가 처한 환경이 어떤 것이든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체험할 권리를 가져야 하오.



또 그는 자신과 환경 조건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감정적이고 활기찬 지원을 누릴 권리도 가져야 하오. 동료애를 누리는 건 집단적인 안녕을 강화하는 자긍심을 확장하는 것이오.



이런 기본 권리들을 주는 대가로 당신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판단하지 말라는 것뿐이오. 당신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소. 외면적인 표식만 보고는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기가 쉽죠. 처음 두 가지 토대 권리들을 손에 넣어 간수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세번째 권리들을 손에 넣어 간수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세 번재 권리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하오.



당신의 세 번재 토대 권리란 무구함의 영성을 알고 체험하고 드높이는 것이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무구함을 어디서 찾아낼 수 있는지 아는 것이오. 이런 이해에 도달할 당신의 능력을 판단보다 더 철저히 망가뜨리는 건 없소, 무구함은 아버지와 개개인 가슴의 성스런 중심에 속하고, 판단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인식력에 속하는 것이오. 무구한 인식을 발휘할 때, 그 사람의 생에서 모든 오해가 벗겨지니, 그는 그런 오해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삶에서 신과의 유의미성이 복구되는 건 무구한 가슴을 통해서요.



행동하고 살아가는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구함의 측면은 딱 세 가지가 있소 만일 당신 이외에 다른 것들이 있기를 기대한다면 당신은 좌절과 불만에서 끝없이 비판할 것이고, 기쁨과 관용하는 삶을 성취하는 자신을 부정할 것이오. 그 사람이 어디서 지혜를 발견할지 아는 지혜를 얻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 그가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오!



예를 들면 자신의 저녁식사로 땅에서 당근을 뽑는 사람은 자기 삶에서 그 만큼의 당근을 배앗는 것이오. 부모는 선의에서 자기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만, 그 아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후 시간을 운동능력을 더 키우는 데 쓸수 있었을 테죠. 반면에 부당하게 피해를 보지만 그게 오히려 잘 된 경우들도 있지요. 그런 사례의 하나가 부당하게 해고당한 사람의 경우요. 비록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시의적절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은 해고 당한 덕분에 자신의 참된 소명을 실현할 새로운 직장을 찾아내게 됩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삶에서 자신의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얘기는 내가 당신에게 벌서 몇 번이나 했지요. 판단은 무구함에 대한 존중심을 말살하고, 무구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고 어디서는 찾을수 없는지에 대한 이해를 없앱니다. 무구함은 외부세계의 것이 아니요. 이런 이해심을 잃은 사람은 남들에게 양심을 품고 관용하지 않죠. 그는 자신의 삶에서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아서 생명력을 소진 하는 공리들에 같혀 있게 됩니다 내가 예전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오! 무구함과 외부행동 사이에서 이끌어내는 연관관계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무구함 자체의 의미를 빼앗고 맙니다. 토끼에게 입맛을 다시는 사자는 그 먹이를 스스로 부정하고 굶어죽는 경우보다 덜 무구한 걸까요?



이건 인간의 행동영역 속에서 삶과 개인적 성취에 도움되기는 모든 행동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그가 내리는 선택에 따라 그의 삶을 사실상 만들어갈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는 건 분명하니가요.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되어야 할 더 중요한 점이 있소. 그건 선은 겉모습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겁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되지도 않고요. 한 인간의 선함은 그 가슴의 무구함에서 찾을 수 있소, 반면에 그의 행동은 이따금 그에게 주어지는 요구와 기대들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삶이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허다한 선택들을 내릴 때, 완벽은 기껏해야 덧없을 뿐인 외부의 찬동이나 칭찬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신의 의지 및 자신인 사랑과 상호연관시키는 데 있음을 알아두는 편이 좋을 거요. 이런 시각을 잃는 사람은 곧이어 자기 구원에 대한 시각을 잃고,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줄 바로 그 권리와 자유들을 자신에게서 박탈하고 말 것이오. "









예수가 그 외 다른 권리들을 열거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권리들이 오로지 그날 논의했던 권리들로만 한정된다고 얘기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명을 비춘 나머지 권리와 자유들도 열두 개는 되는 듯했다. 자유의지와 인간의 동등성, 성스런 가슴 안의 영원한 무구성이 다른 모든 권리들의 토대를 이루고, 우리의 다른 자유들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항상성의 요소들을 제공한다는 건 명백하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일차 권리들은 삶 자체의 하사물인 반면, 나머지 열두 권리들은 우리가 삶은 이끌어가는 데 있어 도움을 주는 권리들이다.



이 나머지 권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창조주와 관계를 갖는 것이다.









"당신 아버지와의 연결은 절대 끊어지지 않소.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으로 당신 자신을 아무리 그에게서 멀리 떠어내더라도요. 분리시키려는 당신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연결은 언제나 유지됩니다. 하지만 신과 떨어진 삶을 추구할때 생기는 진공들이 당신을 무자비하게 지배하는 관념과 구조, 제도, 관계들로 채워지고 말죠. 이때 당신은 자신을 당신과 신 사이에 들어선 그 모든 것들의 포로가 된 것처럼 느낄 수도 있소. 사실 당신과 창조주 사이에 들어선 그것들은 당신에게 신의 권능을 행사하지요.



이로 인한 유감스런 결론은 당신이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당신의 분리에 개입하고 그 분리를 이용했던 그것들에게서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거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소. 왜냐하면 당신과 창조주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영속적이니까요. 건 다른 누군가의 동의에 좌우되지도 않고, 굴종하는 신앙으로 통제되지도 않는 관계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곤 불멸의 당신권리에 근거해서 거룩한 아버지와의 관계로 돌아가도록 행동하는 것뿐이오. 당신이 처한 조건이 어떠하든 아버지와의 그 끈은 결코 없어지지 않소.



당신은 자신을 사랑으로 알고, 이 진리를 당신 나름의 독특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소. 당신은 사랑이오 아마도 세상은 당신이 단지 사랑에서 나왔을 뿐이어서, 당신이 얼만큼 사랑에 찬행동을 하는가가 당신 삶을 정당화한다고 당신더러 믿게 했을 거요. 세상은 당신이 사랑이라는 그 사실만 빼고 사랑에 대한 나머지 모든 것을 믿도록 당신을 설득했을 수 있소, 하지만 당신 가치의 본질과 당신의 유의미성, 당신의 불멸성, 당신의 자유 자체가 당신이 사랑이라는 그 명백함 속에 놓여 있소.



당신이 자신인 사랑으로 존재할 때 당신은 삶의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당신은 존재의 핵심에서 당신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을 끌어당기고, 당신의 삶이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에 가담합니다. 사랑인 당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동료와 활동과 목표와 사물들을 받아들일 권리를 가지고 있소,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사랑할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신의 권리요.



편견과 비판과 부화뇌동으로 가득한 세상이 가하는 압력으로 인기 없는 사랑을 표현하려는 욕구나 자신감이 약해질 수도 있지만, 외부의 것이 당신이 지닌 사랑의 권능를 약화시킬 순 없소 자기 자신을 드높이고, 자신의 사랑이 진실로 표현되는 방식으로 자기 삶을 부양하는 건 통합성의 무제요. 사랑은 당신의 영원한 권리요. 다시 말해 그것은 당신 자신이오.



또 당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교감할 권리도 가지고 있소, 당신이 지닌 것 중에서 결코 닮지 않을 유일한 보물이 당신의 사랑이오. 당신이 소유하거나 경험하거나 낳거나 계발하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이 생에 너머까지 당신과 함께 남아 있게 될 건 사랑뿐이오, 당신이 소유하는 그 모든 사랑이 당신이 영원히 지니게 될 당신것이오. 그것과 분리되는 건 당신의 부와 분리되는 것이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억누르거나 잊거나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복하지 못한 경험을 했던 게 뭐 그리 놀랄 일이겠소? 당신은 사랑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확장하고 완성하는 것들과 결합하기 위해 창조되었소. 이런 기쁨과 성취와 유복함을 아는 건 당신의 권리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소유와 당신의 사랑은 영속되는 현실이요. 왜냐하면 만물의 일부인 한영만이 존재하기 때문이오. 전체는 나눠질 수 없고, 당신에게는 자신이 그것에 반드시 필요한 일부임을 알 권리가 있소, 모두의 삶이 그 벽걸이 융단으로 짜넣어졌소. 어느 누구도 당신더러 거기서 나가라고 심판하거나 협박할 수없고 당신을 거기서 쫓아낼 수 없소 왜냐하면 영은 단순하여 쪼개지지 않으니까요.



거짓과 망상 외에 그 무엇도 영이 나뉘어져 있거나 찢어져 있다는 암시를 전하지 않았소. 당신이 영적인 분리를 믿게끔 설득당했던건 당신이 먼저 그런 믿음에 서명해야만 그것을 이용해서 당신을 격리해내고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런 격리를 당신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마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내리는 판단에 관계없이 당신은 가족의 일원이요. 판단은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문제로 놔두시오!"









예수가 인간의 판단보다는 인간의 실수에 더 큰 인내심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당신은 자신이 삶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그것에서 득을 볼 권리와 전체에 순응하는 것으로 치유받를 권리가 있소, 당신은 한 영을 통해서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영감들을 받을 수 있소, 그 영감들이 당신의 삶과 관계가 있다면요. 당신에게 의미 없는 그런 메시지들을 듣게 되는 일은 없소.



한 영은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살아 있는 지성이어서 온갖 기억들을 담아두고 온갖 잠재력들을 지니죠. 그러니 영의 단일성을 인정하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당신은 위대한 발상들과 당신의 삶과 미래에 관한 경이로운 메시지들을 받을 수 있소, 당신이 해야할 일은 청하는 것뿐이오"









"부정적 영향도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영 속으로 들어가는 걸 겁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쨌거나 당신도 말했다시피, 영은 모든 걸 다 지니고 있으니까요"









"한 영과 교감하는 데 있어 열쇠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새겨듣는 것이오. 이런 양식으로 받아들일 때 성스런 영은 자양분과 지침을 주기 위해 당신에게 강림할 것이오. 영적인 문제에 얽혀든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자신을 집어넣거나 자기 개인의 욕구를 위해 영을 조작하거나 지배하고자 했던 삶들이오. 잊지 마시오. 내가 이미 이야기했다시피 영을 혼란시키거나 분열시키거나, 아니면 특히나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것의 단순한 단일성을 훼손시키는 사람은 그 자신이 그런 공격에 직면하리란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 왕국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영적 자각을 행사하기를 거부하죠. 내가 말하건대.... 영적왕국은 외부에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어딘가에 있는 장소가 아니오. 그것은 당신 안에 있소, 영적 왕국은 모든 존재와 사물과 시간과 공간 속에 거합니다. 한 영은 영원하고 어디에나 있소, 그것은 당신 안에 있소, 그래서 자신이 그것의 일부임을 아는 건 당신의 권리요.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삶을 더 온전하게 만들어줄 많은 지혜와 통찰을 받을 수 있소.



당신에게는 의식하면서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갈 권리와 그것이 당신의 삶을 위해 준비해두고 있는 고귀한 지성을 알 권리가 있소. 이렇게 하려면 자신의 기본적 무구성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오. 가슴이 들어가려고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소. 당신의 권리요. 다만 한 가지 필요조건은 당신의 참된 자아로서,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요. 당신 존재의 핵심에 거하고 있는 무구함이 이것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삶이 문제와 고난과 곤란들로 갇히고, 당신 내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외부조차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힘든 경우라면, 당연히 이렇게 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것이오. 당신은 '내가 세속의 진흙탕 속에 푹 빠져 있는 마당에 무슨 수로 내 존재의 핵심에서 무구하고 완벽할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소, 하지만 이 권리는 조건계와 연결된 논리적인 귀결로 존재하는 게 아니오. 당신 자신인 참된 자아에 순응하고 아버지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연결관계에 순응하는 것이 반드시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오. 그건 당신이 어떤 조건 하에서도 내세울 수 있는 권리요. 당신이 진실로 필요로 하는 해답은 가슴의 지성으로 되돌아갈 때만 찾아낼 수 있소.



당신에게는 당신 나름의 관점에서 무한을 체험할 권리와 무한의 그 광대한 잠재력 내에서 당신의 존재 이유를 뒷받침하는 가치와 의미들을 확인할 권리가 있소, 그리고 이 권리의 일부로 당신에게는 구조를 넘어서 볼 권리와, 당신이 진심으로 잘못되었다고 믿는 상식들에 동의하지 않을 권리와 당신의 삶 및 가치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전망과 제안들에 '아니오'라고 말할 권리가 있소, 또 당신은 미지로 뻗어갈 권리와 감히 꿈꿀 권리를 가지고 있소, 이런 추구를 하면서 무한을 체험하고 자신의 희망과 꿈들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는 것도 당신의 권리요.



또 당신에게는 자신이 불멸임을 알 권리가 있소"





또 당신에게는 자신이 불멸임을 알 권리가 있소















이토록 명백한 것이 권리로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받을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서구인들 상당수가 생물학적 기원과 사회적 문맥에서 끌어낼 수 있는 자아관 이상의 자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닥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기 마련이다. 물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다수를 점할 사람들이 불멸을 믿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또한 허락받고 보상받을 때만 지닐 수 있는 권리로서일 뿐이다.









"세상에는 당신의 삶이 한계와 구조의 법칙으로 규정되게끔 당신더러 필멸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발상이란 이런거요. '지금 살아 있거나 아니면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프로그램에 복종하라... 당신이 지금 갖지 못한 건 나중에도 갖지 못한다'



자신이 불멸임을 알 때 그는 오직 자유로울 뿐이니, 통제할 수 없고, 인간의 손으로 세워지는 어떤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소, 이 때문에 불멸의 삶에 대한 참된 이해는 심하게 억눌러져 왔소, 어떤 경우들에는 노골적으로 부정되기도 했고, 다른 경우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경우에는 인간이 끝없이 윤회하는 삶의 수레바퀴속에 같혀 있다는 의미로 오도되기도 했소.



진실은, 당신은 오직 하나의 삶만을 가지며, 그것은 영원하다는 것이요. 당신 삶의 외형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가는 전적으로 당신의 사랑에 달려 있소, 당신의 사랑이 있는 곳이면, 당신 또한 거기에 있소, 이건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오, 이건 법칙이오.



당신은 자신의 사랑이 존재하는 그곳에 있게 될 거요. 그래서 당신의 사랑이 천상의 기쁨을 더 좋아하고 즐길 정도로 다듬어지면 그때는 당신도 거기 있게 될 거요. 인생의 이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삶의 이런 측면에 접근할 수 있는 영역에 있게 될 것이고요. 당신의 사랑이 있는 곳이 어디든, 당신은 거기에 있게 될 거요. 당신은 언제나 멈춰서는 일이 없는 자신의 사랑과 함께 있게 될 거요.



당신의 그 모든 성장 양태와 당신 삶의 그 모든 변화들이 당신의 사랑 형태에서 뭔가가 변했기 때문에 일어났소, 당신의 삶에서 변화가 펼쳐지는 건 사랑의 발전 패턴을 통해서요. 당신이 한 곳에서 사랑을 갖지 않게 되면, 당신은 다른 어딘가에 있게 되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불멸성과 나란히 걸어갑니다.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자기 완성이 참으로 가능하리란 확신을 갖게 될 거요. 뻗어나갈 수 있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하죠....불멸성의 지점으로까지도요 이건 당신의 권리요.



당신에게는 충만함 속에서 살 권리와 삶의 모든 축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소. 고통받기로 서약한 이는 아무도 없소. 물론 고통이 이따금 삶의 일부일 수는 있소. 나아가 당신의 교훈이 펼쳐지는 데 있어 불가피한 일부일 수도 있소. 하지만 누구도 고통을 서약하지는 않았소. 고난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속해 있는 더 큰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풍요와 기쁨으로 축복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서약에는 기쁨이 새겨져 있소. 그래서 누군가가 고통을 겪는다 해도 그건 아버지의 뜻이 아니오.



고통은 출산처럼 완결되고 나면 기쁨을 가져다주는 삶의 요소일 경우가 곧잘 있소.



때로는 집단적 남용과 무지 때문에, 혹은 고통에 가담하려는 그 사람 자신의 의지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지요. 고통을 신이 내린 벌로 잘못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여기에는 인과의 결과라는 면에서 약간의 진실이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고의로 벌을 주는 일은 절대 없지만요.



또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실재성보다 고통의 전망을 더 많이 믿기 때문에 고통받게 되는 건 비극이요. 고통스런 삶을 체험해온 사람들은 고난이 적어도 하나의 의지처는 된다고 느끼죠. 어떤 예측이라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보다는 나은 법이니까요. 그들의 아버지가 고통받았고, 그에 앞서서는 그들의 할아버지가 고통받았소. 이것이 그 고통스런 전통에 일종의 사랑을 던져주는 거죠. 실제로 개중에는 자신의 고통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소, 왜냐하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유대가 고통이니까요. 또 불운에서 살아남은 덕분에 성취와 자부심을 위한 토대로 삼을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고요. 요컨대 사랑과 고통이 접합되면, 그 유대는 자기 영속적이요. 당신이 사랑하는 한 당신은 그렇게 있게 되니까요!



반면에 고통을 서로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소. 그건 고통이란 위협을 통제와 지배의 일부로 삼는 환경을 그들이 만들어냈기 때문이오 앙갚음을 위해 고통을 기대하고 이용하는 식의 환경을 창조한거죠. 결국에 가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고안해내고 의도했던 것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고통에 대한 그들 나름의 충분한 의미를 받게 되죠.



대부분의 고통은 삶을 축복받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류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상처와 불만족과 아픔과 혼란과 좌절을 당신이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소. 게다가 당신이 축복을 구하면, 아버지와 맺은 서약의 나머지 부분이 펼쳐지기 마련이오. 내가 당신에게 말했듯이 아버지는 기쁨으로 서약을 작성했소.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서약을 쉽게 찾아내지 못하죠. 그 서약을 찾아내자면 축복을 구해야 하오. 축복을 구하고 그것을 기대하시오. 청했기에 그것이 당신 것임을 알고 감사하시오.



당신에게는 살아가면서 당신 나름의 결정들을 내릴 권리가 있소, 당신이 갖기로 선택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일부러 거절하는 것도 그런 결정들 중에 들어갑니다. 당신 외의 어느 누구도 당신을 대리하여 이렇게 할 수 없소"









많은 면에서 우리는 이 권리를 매개로 해서 여타의 권리들을 행사한다. 프로그램된 획일성으로 고통받는 세상에서 동료들의 요구와 사업상의 관례, 사회규약 따위로부터 끊임없이 압력을 받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에게는 옳은 일을 할 권리가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권리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따금 우리는 흐름에 반대하거나 맞서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권리를 빼앗기는 쪽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걸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우리 권리들을 빼앗기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들을 제것인 양 행사할 수 있다.



선택의 권리는 도덕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삶 전체를 포괄한다. 예를 들면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단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만도 몇천 가지의 결정들을 어렵잖게 내리곤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매 시간마다 무구한 결정들을 내린다. 그것들 대다수는 운영상의 결정들이고, 상당수는 우선순위와 관련된 결정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이란 올바른 선택을 많이 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수도 있다. 그리고 실패란게 존재한다고 치면, 실패란 잘못된 선택들을 많이 한 결과로 볼 수 있고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결정들을 내리길 거부해왔는데. 이것이 그들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설명해준다. 이따금 결정 내리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조언을 구하면 그 과정에 지혜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결국 자신이 내렸거나 내리기를 거부한 결정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많은 체험과 근원들, 서약과 능력들과 관련해서 당신이 내린 그 모든 선택들의 집합이요. 선택하는 것으로 당신은 자신이 되고 자신의 사랑을 외적으로 구현해 갈 책임을 행사하죠. 선택하는 것은 당신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기회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경우도 많소. 당신은 자신에게 안 맞거나 자신의 안녕에 해로운 것들을 불허하거나 방어할 권리를 갖고 있소, '아니오'는 그닥 인기있는 단어는 아니지만, 올바른 결정 또한 인기와는 관계가 없으니까요"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 팽배해 있는 특정 믿음, 즉, 그 사람의 이해가 완전하고 완벽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체험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런 믿음들은 우리의 영원한 실존이 완성되려면, 먼저 모든 것을 체험해야 한다는 발상으로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이런 발상과 관련된 진리가 어떤 것인지... 만일 있다면 ...알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사랑을 완성시켜주는 것만을 채험해야 하오. 그 모두를 행하고, 그 모두를 보고, 그 모두를 듣고, 그 모두를 생각하고, 그 모두를 느낄 필요는 없소.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독특하고 다른 누구와도 다른 존재요. 자신이 완성되는 건 당신의 사랑이 완성될 때지,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아질 때가 아니오. 획일성은 당신 삶의 목적 중 하나가 아니오"









다른 주제로 옮겨가기 전에 이 주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뭔가 기여하고 싶다는 충동이 내 가슴 아주 깊은 곳에서 일었다. "전 그런 류의 믿음들이 단지 환경이 바뀌기만 해도 거지가 왕이 될 수 있고 왕이 거지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여 사회 '패잔병'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예수는 부드럽게 수긍하는 얼굴로 부분적으로 동의햇다.









" 그렇소, 그런 발상의 동기라면 당신 말이 맞소. 하지만 그런 발상에서 나온 희망들이 현실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 또한 사실이오. 체험의 유사성과 획일성이 언제나 관용과 자비심을 불러오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사랑이 완결된다면 당신은 천성적으로 자비로워질 것이오. 당신의 사랑이 완결될 때, 당신은 거지 또한 이미 왕만큼 위대함을 볼 것이오!



당신에게는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권리가 있소, 당신은 무구한 인식으로 삶을 바라볼 권리와 당신이 물을 수 있는 모든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소, 당신은 삶에 대한 얄팍한 설명이나 황당한 설명, 혹은 정치적으로만 정확하거나 관습적인 설명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일 필요가 없소.



당신은 답을 얻을 때까지 물을 수 있소, 그리고 그 대답이 솔직한 대답일 때까지 더 물을 수 있소.



흑사병이 중세 유럽을 쉽쓸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악마의 저주라고 느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벌이어서 철회할 수 없다고 믿었소. 반면에 루이 파스퇴르 같은 과학자들은 치밀한 연구 끝에 '우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선언했소



무지와 지배권력의 대리인들이 힘을 실어주는 관습적 설명을 당신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거요. 당신에게는 쓸모없는 설명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람에 대해 탐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권리가 있소,



인간의 역사는 너무 자주 성스런 신비를 현실사태에 대한 무지를 용인하는 구실로 삼아왔소, 물론 인간의 파악 능력을 넘어서는 인식 차원들이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소 하지만 인간 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기 위해 신성의 영역을 이용하는 건 정직을 모독하는 짓이오. 신과 관련해서 신비와 신비주의를 존중하는 것이 정직한 관점이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주제를 이해할 당신의 능력에 대한 참된 평가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모든 문제들에서라면 사용 가능한 모든 의식적 조치들이 신비를 대신해야 하오. 신비적 진리들은 절대로 당신들이 실제적 지시과 책임 영역에 정직하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로 되어 있지 않소.



정직함의 결정적인 부분은 자신의 주관적 느낌과 인식을 놓고 스스로 인정하는 진실이오. 그건 당신의 주관적 인식이 외적 현실과 일치해야 유효한 게 아니오. 당신 자신으로 있는 것의 기적, 삶에서 당신 자리를 지키는 경이 중 일부가 이런 것이오. 당신은 내적 현실의 경탄 할 만한 작품이니, 그 현실을 솔직하게 볼 권리가 있소, 자신의 느낌과 다른 것을 외부에서 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느낌을 부인하고 거짓으로 순종해야 하는 건 아니요"









예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골치 아파 보이는 상황의 와중에도 콧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십대 때의 나는 거의 매일 말을 타고 다니면서 어서 빨리 겨울이 와서 첫 '우울한 북풍'이 불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투덜대면서 기온이 하루가 다르게 뚝뚝 떨어져가는 것에 겁을 먹곤 했다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말이 흥분하는 것까지도 내 마음에 들었다.우리 둘 다 날씨의 급격한 변화에서 특정 종류의 에너지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들은 벽난로 안에 땔감을 집어넣고 있을 시간에 나는 밖에서 인생을 즐겼다!



대학생이 되자 나는 뉴욕은 위험한 도시이니, 주의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뉴욕 시에 사는 사람들은 상대방과 눈을 마주시지도 않고 대체로 불친절하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 도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내가 만난 가장 친절한 사람들 부류에 속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상황을 다르게 체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식당에 혼자 들어간 나를 자기들 식탁으로 초대해준 부부만도 두 쌍이나 있었다. 한번은 극장의 입장권을 사려고 길게 줄을서 있었는데. 내가 창구에 이를 무렵이 되자 앞 뒤로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서로의 성씨를 알 정도로 진해진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 거의 날마다 찾아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나는 우정을 느끼곤 했다. 만일 내가 남에게서 빌린 견해와 편견을 가지고 뉴욕시에 갔더라면, 나는 크토록 열린 마음으로 그토록 즐거운 체험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의 감정과 인식에 솔직했던 덕분에 나는 그에 상응하는 경험들을 겪어보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이 나를 잠재적 위험에서 구해준 경우들도 있었다. 역시 뉴욕 시에 있을 때였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청년 한 명이 다가와서 '코크 좀 사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 괜찮아요. 난 콜라 안 마셔요"라고 대답했다 그 청년이 코카인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서 다시 말해 나 자신의 느낌에 충실했던 덕분에 그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가벼렸다. 또 큰 이윤을 약속하는 사업'기회'들을 제안받은 적들도 있었지만, 내 느낌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나는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이런 개인적 회상에 잠겨 있던 나는 다시 예수가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나 자신의 감정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정직해질 권리가 있소, 다른 사람들이 당신더러 뭘 믿게 만들더라도 당신에게는 자신에게 진실해질 권리가 있소.



당신은 개인적 성장을 체험할 권리와 자신의 삶을 품위 있게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소. 출발점에 상관없이 더 나은 것과 바꾸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더 도덕적이고 더 품위 있소. 도덕이란 더 낫게 바꾸는 것이오. 처음 것이 마지막 것이 되고 마지막 것이 처음 것이 되는 매커니즘이 바로 이것이오. 이 우주에서 불변의 상수는 사랑뿐이오. 다른 모든 것은 성장하고 쇠퇴하면서 항상 변화하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면서 현상을 유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쇠락해가는 삶을 위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오. 내가 고대 이스라엘 바리새파 내의 잘못된 경향으로 몇 번이나 폭로했던 것이 이것이오. 그들은 바뀌어야 함에도, 현상유지에 집착하여 자기들 멋대로 그것을 미화하곤 했소, 쇠락의 주기를 폭로하는 편이 그것이 계속되게끔 나두는 것보다는 언제나 더 나은 법이오. 쇠락이 확연해지고서야 개선의 여지도 생기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해 보이는 이미지를 유지하는데 자신의 삶과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죠. 그들 발 밑의 흙이 해가 갈수록 무너져내리고 있는 상황에서도요. 그런 사람들은 품위의 원리가 아니라 판단의 철학으로 자신의 삶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판단으로 삶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기에 결국 자신이 세운 벽에 자신이 갇히는 꼴이 되고 말죠.



사랑은 언제나 더 나아질 방법, 삶을 더 쓸모 있고 더 즐겁고 더 온전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 방법을 구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개선기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선택사양들을 검토하죠. 이런 식의 분별은 품위있는 행동이지 판단하는 행동이 아니오. 반면에 판단의 완고한 철학들은 품위 대신에 구조를, 신뢰 대신에 지배를, 고귀한 자각 대신에 마음을 내세우죠.



이처럼, 살면서 판단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중 잣대로 살아가기에, 어떤 것에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이란 딱지를 붙입니다. 대개는 나쁜 것쪽으로요. 이런 판단은 선과 품위를 조롱하는 행동이요. 왜냐하면 판단이 의도하는 바는 오로지 지배에 있으니까요.



판단과 관련해서 최악의 치명적 질병이 소위 무책임성이요. 판단의 가장 교활한 의도가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통제 임무를 할당하고.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부과 하는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불안정한 역할 할당이요. 왜냐하면 그건 부정직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되면 결국 지배받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게 되죠. 자신들에게 책임이 부과되지 않도록요"









예수의 이런 언급은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고 간단하게 선언하는 것으로 판단의 해악을 무효화시키길 제안하는 최근 들어 유행하는 일부 철학들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과격한 반응에 불과한지 아니면 사고방식의 그 같은 역전이 의식발전 과정의 일부인지 알고 싶었다.









"그 동기는 참으로 진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판단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소모적인 과정을 겪도록 그냥 놔두는 것보다 판단의 권능을 억지로 박탈하는 것이 더 파괴적인 경우도 자주 있소, 물로 그런 순진한 '해결책'을 유독한 갱도 굴착 작업의 종식과 비교할 수도 있소, 하지만 갱도를 열어둔 채 그냥 놔두어 친진난만한 아이들이 그 속에 빠져죽을 가능성도 남지요.



참된 역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참된 이해가 필요하오. 문제는 인간이 무구한 가슴에서 떠나 자신의 고귀한 지성을 마음의 역학에 양도함으로써 생겼던 거요. 인류가 자신의 집을 떠났을 때, 인류는 판단과 고난의 세계로 들어갔소, 마음은 오직 지배에만 관심이 있어서, 삶에 품위를 가져온다는 목적에 맞는가 아닌가에는 아무 관심도 없소.



품위에 신경 쓰는 건 오직 가슴뿐이오. 오직 가슴만이 인간의 노력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죠. 그러니 가슴으로 돌라갈 때만 당신들은 참된 성장과 창조의 생산과 무구함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소,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가 뜻하는 것이 이것이오. 삶에 대한 더 큰 지배력을 얻기 위해서 아담과 아브는 마음이 중심인 판단의 세상을 택하여 가슴이 중심인 무구의 정원에서 떠났소, 아담과 이브는 이런 선택을 내리고 그런 다음 판단의 권능을 인정하고 앞세우는 것으로 죄의식을 끌어들인 당신 선조들 모두를 대표하는 인물들에 지나지 않소. 이제 판단이 불러온 결과들은 판단이 스스로를 소진하고, 판단의 오류가 전면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완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요.



당신이 자신 속에 내재된 분리하고 분리되려는 경향을 정복하고 나면, 마침내 당신은 식별의 과정에 지혜를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오. 허용하기를 좋아하고 불허하기를 좋아하는 건 옳고 그름의딱지를 붙이는 것과는 다르오. 예를 들어 방울뱀을 생각해보시오. 당신은 방울뱀이 자연 속의 자기 자리인 사막에서 살도록은 허용하지만, 당신 집 뒤뜰에 또아리를 트는 건 불허할 것이오. 모든 것은 자기에게 맞는 때와 장소가 있기 마련이오. 그래서 식별은 허용하기를 좋아하고 불허하기를 좋아하는 행위요.



판단으로 점철된 기나긴 시대는 인간의 암흑시대였지만, 이제 얼마 안 가 마지막 판단이 내려지고 나면 그 시대는 끝날 것이오. 그리고 그 마지막 판단은 판단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오. 그때가 되면 인간의 의식은 씩씩한 신랑이 신부인 성스런 가슴과 함께하듯이 눈부신 광휘 속에서 솟아로를 것이오. 이것이 예언자들이 항상 꿈꾸던 성스런 혼인이요. 이 혼인이 이루어지고 나면 땅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오. 그동안에는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써서 삶을 더 낫게 만들고자 애쓰는 것이 당신의 권리요. 긍정적 변화를 가져다줄 모든 기회를 즐기시오. 매일매일을 최상의 것으로 만드시오.

마지막으로 당신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소, 당신에 믿는 바가 당신의 가장 진솔한 기도요"

사위가 고요해졌다 잠시 동안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가 가만히 내뱉은 말은 정곡을 찌르면서도 단순했다.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존재하고. 믿는 만큼 되는 거요"


[출처] 끝없는 사랑 397쪽 또 당신에게는 자신이 불멸임을 알 권리가 있소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