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에필로그 본문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에필로그
사랑
삶은 계속된다.
기억이란건
해방되기 위해서 써먹는 거야
그리고 해방이란 건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욕구를 넘어서서 사랑을 펼치는 것이고
그리하여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로부터도
해방되도록 - T.S Elior
예수의 방문은 이렇게 끝났지만, 내 체험과 성장은 이제 시작이었다. 끝이 없을 것 처럼 계속해서 여행과 그림 전시가 이어졌다.
하지만 1993년 가을 무렵이 되자. 계속되는 장거리 여행에 지친 탓에 조금이라도 느긋한 휴식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갔다. 지난 18개월 동안. 나는 활동과 여행과 도전, 개인적 성장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게다가 도로 위에 있지 않을 때의 우리는 거의 언제나 멀리서 찾아온 방문객들을 우리집 거실에서 맞고 있었다. 우리는 특히나 아이들이 찾아오는 것을 반겼다. 그들이 거리낌없는 무구함으로 예수를 알아보는 광경은 언제나 즐거웠고, 깊은 영감을 주는 일도 곧잘 있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고양이 구나에게 달려가거나, 적어도 그리스도를 직접 본 그 고양이를 곁눈질로 쳐다보곤 했다.
<어린 양과 사자>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의무감은 다른 모든 것에 여향을 미칠 만큼 중요했다. 게다가 다른 어떤 주제가 그 정도의 열정과 평온을 내게 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만큼 계속 따르기에는 버거운 약조이기도 했다. 회화에 대한 내 애정이 사적인 측면으로 1992년 가을까지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다른 예수 초상화들도 그려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 가장 많은 요구는 전통적인 자세로,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함께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외교력을 발휘해,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예수 초상을 그리는 것 또한 첫 번째 초상처럼 특별한 소명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포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예수 자신이 또 다른 그림을 원하여 그런 식으로 상황을 끌어간다면, 그에 동의하는 건 내 기쁨이자 특권이리란 부언을 달면서, 하지만 이런 특수 상황을 빼면 일반적인 종교미술 기법은 내 가슴의 창의성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하면서 나는 더 이상의 초상화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건 6개월 이상 사실이었다.
그런데 1992년 가을, 놀랍게도 그런 특수 상황이 전개되어 내게 또 다른 영상이 주어졌다 그건 저녁 전시회를 열기 위해 예수의 초상화를 가져간 한 작은 시골교회에서 일어났다. 끝맺음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예수가 내 화실에 있을 때면 느끼곤 했던 특이한 향기를 맡았다.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들면서 눈을 떳는데. 그건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예수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놀래키지 않으려고 숨죽여 지켜보는 내 눈 앞에서 참으로 매혹적인 과정이 펼져졌다. 예수의 모습이 점점 어려지더니 결국 어미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리아는 전형적으로 젊은 헤브루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움이란! 그녀의 무구한 이미지는 그녀 자신이 마치 아이인 듯이 보이게 했다. 잠시 후 안정된 영상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2개월 동안 계속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나중에 (사랑의 불꽃)으로 이름붙여진 그 그림은 (어린 양과 사자)가 완성된 날로부터 정확히 아롭달 후인 12월12일 낮12시 완성되었다. 마직막 붓터치는 그날 오후에 열릴 예정이던 공식 기념만찬을 앞두고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마무리되었다.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한 그 만찬에서 많은 이들이 젊은 마리아의 진실성에 눈물을 흘리거나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어린 양과 사자)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과 그 어릴 적 모습간의 부정할 수 없는 연관성에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그날 이후 우리의 생황은 활동의 광풍에 휩싸였고 내 그림붓은 먼지를 뒤집어써갔다.
그림과 관련해서 내가 내린 첫 번째 결정들 중 하나는 그것의 봉사가 보편종교적이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종교교리에도 독점적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몇천 개의 예수 초상화들에 비해 볼 때 (어린 양과 사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그것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은혜로움을 느낀다는 점일 것이다. 말하자면 각자가 자기 나름의 의미에서 그 그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계속 그런 식이길 원했다. 어느 한 교회에 그 그림을 안치시키는 것을 주저했던 이유도 대다수 교회들이 일주일 중 하루 그것도 몇 시간만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런 교려에서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현실이면서 내게는 걱정거리였다.
온갖 연령대의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의 초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명상하거나 그의 은총을 소리 없이 받을 수 있어야 할 터였다 나로서는 그 그림들의 상징적 내용이 뭐라고 단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발명한 것도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그림들은 대부분의 경우 보는 사람들 각자의 개인적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촉매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인다. 그림 속 그의 외모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유동성이 있었다. 만화경처럼 그것은 무수한 얼굴 표정과 윤곽과 개성을 지닌 듯이 보인다. 나는 이 초상화가 무한한 가능성과 적응력을 담고 있는 보편 청사진 위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즐겨한다. 또 동시에 나는 이 그림을 가지고 우리가 그의 역사성, 다시 말해 그의 존재의 지속성을 좀이라도 암시 받기를 바랬다.
이 점에서는 임사체험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써서 자신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 예수를 만났던 경험을 전해줌으로써 나의 이런 희망사항이 단순한 희망사항만은 아님을 확신시켜주었다. 한 목사는 이 초상화들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임을 바라는 내 희망사항에 대한 추가적인 지지로 자신의 세미니용 서적들 중에 하나에 실려 있는 다름과 같은 구절을 보내주었다. 이 구절은 당신 유대 총독이던 푸블리우스 랜툴루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보낸 편지에 실린 예수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지금 유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한 독신 남자가 살고 있는데. 그는 오랑캐 유대인들이 예언자로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신의 아들로 여기고 열렬히 따르며 숭배합니다 그는 죽은 자를 무덤에서 살려내고 말이나 닿는 것만으로 온갖 병들을 고칩니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온화하면서도 단아한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잘 익은 알밤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어깨 정도까지 길렀습니다. 또 그는 높고 넓으면서 앞으로 조금 뛰어나온 앞이마와 점이나 주름 따위가 일제 없는 불그스레한 멋진 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코와 입은 우아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숱 많은 수염은 턱아래로 내려오는 그의 머리칼에 어울리는 색깔을 하고 있습니다 밝은 파랑인 그의 눈동자는 맑고 잔잔하여, 순수하면서도 위엄 있고 온화한 인상을 줍니다. 몸의 비례는 어느 누구보다 완벽하고 매혹적이며, 그이 손과 팔은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럴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는 위엄을 가지고 책망하고, 온하함을 가지고 충고하는데, 말로 하든 행동으로 보여주든 그이 연설은 감동적이고 웅변적입니다. 누구도 그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행동방식은 놀랄 정도로 경쾌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슬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성스런 완벽을 생각하면, 그는 모든 면에서 진정 사람의 자식이 아닌 듯합니다."
이 구절과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측면은 최상의 존경을 보여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이토록 세심하면서도 공경스런 찬사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던 시대에 한 로마인이 한 유대인을. 또 한 남자가 한 남자를 이렇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나눔의 과정에 워낙 마음을 뱃긴 나머지, 나는 그림이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말았다. 그런 내게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난 것은 1993년 9월의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덧붙여서 나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런 개인적 갈망을 확인하고 나자 그의 현존속에 있던 당신의 평온함이 떠올랐다. 그것은 브라이언과 내가 유지해왔던 정신없는 흐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그림 속의 예수 모습에 눈을 모았다. 그 특별한 평화의 자리에 그와 함게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그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보는 대신에 그 그림으로부터 축복을 입은 몇백 명의 사람들을 본 것이다. 그 겹쳐진 얼굴층들이 하나하나씩 벗겨져나가고 나니 이윽고 예수의 얼굴만이 남았다. 이 영적 교감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성과 공경과 거룩함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화가로서의 내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내가 내 화실의 적막과 진지함을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 또한 진지함을 필요로 하나는 것을 알았다. 그것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과 삶과 믿음들이 똑같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경건하고도 고요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해답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는 해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확신한 나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내 걱정을 더 높은 인도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이 쥐고 있기보다 더 손쉬운 희망사항인 때들도 이따금 있기 마련이다. 몇 주가 지나도 아무런 논리적인 해결책이 안 나오자,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밖으로 뻗어가는 우리의 일상사들을 계속 꾸려가면서도 긴장으로 밤이면 늘 잠을 설쳤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움으로 기적을 맞았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나는 성스런 빛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일은 이번엔 새벽 3시에 우리 집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놀라 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앚아 눈을 비볐다. 첫 번째의 빛처럼 그 빛도 초자연적임을 깨달은 나는 배게를 세워 기댄 채 뭔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방구석에 집중되던 그 빛은 천사의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형상은 십중팔구 내 앞에 있던 부정할 수 없는 미지(未知)에 내 마음이 익숙한 유형과 개념을 적용하여 조정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놀라운 현상이었다! 어린 시절 천사를 믿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천사에 대해 생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천사를 보리라는 기대 같은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고, 그러기에 당시 내 앞에서 벌어진 그 상황은 나로서는 설명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드문 인식이었다. 몰론 직업적인 시각예술가로서의 경력이 내가 본 모든 장면을 떠올리거나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강력하면서도 생생한 시각능력을 키워주긴 했지만, 1991년까지 내 인식은 그냥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는 수준 이상이 절대 아니었다. 만약 눈군가가 내게 천사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면, 나는 1세기 전의 위대한 프랑스 사실주의자 쿠르베처럼 "만일 당신이 내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내가 천사를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을 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리둥절 해 하면서 배개에서 몸을 일으겼을 때 천사가 말했다 "두려워마시오. 나는 당신의 기도가 들려졌음을 알려주려 온 것이오. 전시실 마련을 위한 배열이 이루어지고 있소"
나는 그의 말에 기뻤지만, 훨씬 더 매혹당한 건 그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내 귀가 듣고 있던 소리는 사랑 가득한 천상의 음악이었던 반면, 내 마음이 듣고 있던 소리는 영어였다. 그것은 천사가 '말하는'음악이 그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 바꿀 수 있는 보편언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그후 며칠 동안 나는 이사건을 돌이켜보면서 시각적인 환영조차도 보편존재로부터 좀더 인삭되기 적합한 형태로 현실을 바꾼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사는 20분 정도 머문 듯이 느껴졌지만, 틀림없이 그보다는 짧았을 것이다. 전설에 나오는 천사들처럼 그도 기도에 대한 대답만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나의 반복되는 요구에도 그는 초상화들과 관련한 천상의 계획을 내게 자세히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손'을 내 가슴에 놓더니 말했다. '당신에게 더 많은 통찰력과 가르침을 줄 이 의식의 씨앗을 남겨주겠소"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가르침이나 대답들이 저절로 주어지리라고 전제하면서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1주일 정도가 지나자 호기심이 내 인내를 넘어서고 말았다. 사실 운명론적인 자세는 말할것도 없고 기다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천번 기도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침묵 명상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 천사가 '의식의 씨앗'을 남겨준 내 가슴의 그 특별한 자리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라면서, 나는 최대한 오랜 시간 평온 속에 거하다가 쳐다보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명상상태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 그 음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예전처럼 집중을 하자 말이 확연해졌다.
"예?"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내 관심과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기도 스크린'을 세우라고 말했다.
기도 스크린이란 게 무엇이고, 왜 내가 그걸 세워야 하지? 내가 대답을 구했더니 그는 내게 작업 순서를 일러주었다! 나는 그날 내내 그럴듯한 명분을 찾았지만, 어떤 것도 그런 지시의 명분이 되지는 못했다. 내가 끌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합리적 결론은 기도 스크린이 그것이 놓인 공간에 더큰 공경심을 품게 함으로써 기도와 명상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게 만들지 않을까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감히 천사와 논쟁할 수 있었겠는가? 기도스크린으로 삼을 소개와 그것을 세울 방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요량으로 동네의 홈인테리어 재료점을 찾은 나는 영감의 순간과 진행방도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상당한 시간 동안 그 가게의 통로를 걸어다녔다. 몇 개월에 걸쳐 우리 집을 개조해본 경험이 있던 나였기에 가게에서 보는 재료와 부품들의 용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거의 모든 소재들이 거칠고 무겁거나 전동기구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가게를 나서려고 문들이 진열된 곳을 지날 때였다. 뭔가 딱딱한 물체에 발이 걸려 잘못하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가 진열된 문 중 하나를 통로에 그대로 뉘여놓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세워놓으려고 그것을 집었다. 그런데 엄청 무거우리라는 예상과 달리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가벼웠다. 그건 속이 텅빈 회색 문이었고, 잡고 보니 그 나무결 무늬도 무청 멋있었다. 게다가 그건 대각선 길이가 60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여서 내가 필요로 하던 넓이에 딱 들어맞았다. 몇 분 동안 가능성들을 저울질해본 결고, 나는 이 판넬 세 개를 함께 붙이면 아주 멋진 스크린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에다 약간의 장식을 하고 니스를 좀 바르면 기도스크린-그용도가 어떤 것이든 -으로 충분했다.
공시성과 목적의식적 일치의 이 사건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문들은 길이를 줄여야 했는데. 우리 집을 개조했던 사람들로부터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판넬들을 붙일 준비가 되자 나는 그것들을 내 화실로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한쪽면의 나뭇결은 아름다운데다 그대로 니스를 칠할 수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세문 모두 다른 쪽 면은 밋밋했다. 뭔가 보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나는 손에 붓을 들고 한 회색 판넬 앞에서서 천사를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스크린을 지시한 이에게 책임을 되돌리는 게 그리 부적절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신 나는 내 앞에 놓인 그 문이 단순한 그림이상이라는 걸 몰랐다. 그건 나 자신의 위대한 펼침을 위한 출발이었던 것이다. 화실에서의 그날 저녁, 내가 의식하고 있던 유일한 의도. 혹은 목적은 '기도 스크린'을 장식하여 작업 순서를 끝맺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대가로 이 프로젝트의 완성 지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해답이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에 수반된 대가는 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문들에 천사들을 그리는 그 작업의 처음부터 나는 에너지와 기쁨이 솟구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완성된 스크린은 내가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 작업은 마침 우리의 연례행상인 크리스마스 파티 전에 완성되어.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물론 판매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신작을 선보인 것도 9개월만의 일이라. 이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파티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그 그림이 끌어내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뭔가 신선하고 솔직담백한 것이 있었다. 특히나 한 부인은 그 그림에 푹 빠진 나머지 끈질기게 그것을 팔라고 졸랐다. 그녀의 제안에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나는, 그네에게 그 스크린은 내게 영감 면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판매용이 아니라고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하지만 나의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날마다 전화를 걸었고, 결국 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사용할 것은 다시 하나 그리면 되지 않겠냐면서 나를 설득했고, 결국 나는 그럴 계획으로 본래의 스크린은 그녀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천사 스크린을 가지고 집에 도착한 그녀는 그것이 그녀 집의 평면도에 비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소한 문제에 굴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또 다른 가능성을 구체화하고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스크린을 분리하여 판넬들을 따로따로 벽에 걸고 싶어했다 이런 그녀의 창의력은 내게도 새로운 인식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또다른 공시성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이틀 후, 내게 다시 전화를 건 그녀는 그 천사 판넬을 다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물었다. 놀란 내가 반문했다 "왜요? 도독맞았나요? 아님 훼손이라도 됐나요?"
약간 머뭇거리면서 그녀는 자기가 그것을 팔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가 속한 한 기도 동아리가 전날 밤 그녀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동아리의 두 멤버가 자기들 예배당에 걸 요량으로 그 판넬을 구입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 끈질김을 가지고 그들은 '안 된다'는 대답을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프로젝트가 나 자신의 의지보다 훨씬 더 큰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과 흡사했다. 그것이 무엇을 뿜어낼지 한시바삐 알고 싶었던 나는 재빨리 재료들을 다시 모아서 그녀에게 줄 두 번쩨 판넬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에는 의무로 시작되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채 알기도 전에 나는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표현력과 자유로움을 가지고 이 기쁨에 찬 발견의 과정에 푹 빠져들었다. 본능이든 기대이든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걸 알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미 결정적인 결정을 내린 마당인 말이다.
나는 더 넓은 문들을 골라 그 비율이 디자인과 표현과 발달을 가진 그림에 좀더 적합하도록 높이를 과감히 줄였다. 그렇게 하고 보니, 예전 같으면 전형적인 내 작업 습관들과 노력에 대한 기대로 가로막혔을 직관과 창조적 확신과 본능적 아름다움의 깊이를 여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은 아주 재빨리 일어났다. 2주가 채가지 않아 나는 그녀 집으로 운반할 준비가 된 새로운 그림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자기 집에 그림을 걸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글렌다. 판넬 하다 더 그려줄 수 있어요" 이번것도 팔았어요" 숲을 지나는 그 바람은 이제 질풍노도의 힘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건 단지 현상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거의 2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문에 천사를 그렸고, 그러고 나면 언제나 며칠 안에 누군가가 내 화실에 와서 그 그림을 보고 '이건 내 천사야!"라고 선언하고 했다.
이 과정에서 언제나 나를 탄복시킨 건 천사가 일조의 매체로서 회색문을 선택한 것의 완벽성이었다. 그것은 문인 것에 대해서 내 자각을 키우는 입구이자 우주에 존재하는 천사의 비유적 표현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더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는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화가로서 전형적인 훈련과정을 밟은 내 입장에서 볼 때, 한가지는 확실했다. 외부의 개입 없이 나 혼자 힘으로는 그런 매체를 선택하지 못했으리란 것 그것을 스타일의 성장을 위한 촉매제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란 건 두말 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개되는 사건들 뒤에 있던 주된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4년2월의 일이었다. 처음 두 판넬을 구입했던 내 고객의 친구들이 더 많은 천사를 필요로 했고, 또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다. 우리 집을 찾아온 그들은 (어린 양과 사자)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감동적이면서 따스한 경함이 되었고, 깊고 의미 있는 우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덧붙이면 그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에 걸 일곱 대천사들을 그려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다가오는 봄 내내 계속된 그 프로젝트 덕분에 우리는 더 친해질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 단체로 단순한 교회 이상의 것이었다. 1939년에 설립되어 모든 사람과 기독교 진리의 모든 측면에 계속해서 열려 있겠노라고 선언했던 이 친목 단체의 이름은 '그리스도 진리연맹'이었다. 그 이후로 이 교회는 포트 위쓰에 있는 아름다운 만칠천 평의 대지 위에서 조용조용히 자신의 가르침과 봉사를 펼져왔다. 자신의 초교파적 이상에 발맞추어 그것은 주로 출판활동과 다른 기독교 형제들을 너그럽게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다. 전통양식과 현대양식이 멋지게 혼합된 그 예배당은 참으로 정싱스럽게 가꿔진 정원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무리 지친 영혼이라도 기운을 되찾기에 충분한 평온과 안전의 정신이 엄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예배당의 아름다운 풍경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거꾸로 <어린 양과 사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그 교회의 목사 아플레케이트 박사는 나더러 <어린 양과 사자>를 그 예배당에 전시하고, 일요일 예배에서 간증해달라고 부탁했다. 알고보니 우리가 선택한 그날은 새로운 천사 그림 모두가 그 예배당의 벽에 걸리는 첫 날이기도 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다. 나는 유난히 화창한 날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림와 관계해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림과 관계해서 말하면,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날씨가 아우리 험악하더라도 그림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시점에는 언제나 날씨가 말게 개곤 했다. 때로는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던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림을 차에서 꺼내옮겨야 할 때가 되면, 날씨가 거짓말처럼 말짱해졌다! 이 현상은 워낙 다반사로 일어났던 일인지라 나는 거의 당연한 기적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요일 아침, 새들이 노래하고 햇살이 환한 걸 보니 무척 기뻤다. 그 문제가 내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란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는 면에서.....
하지만 예배 마지막 기도문이 읊조려지기 시작하자, 하늘이 시커매지는가 싶더니 천둥과 번개가 우리의 아멘 소리를 대신할 듯이 우르릉 꽝꽝 울리는 게 아닌가. 곧이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날씨로 인한 장애는 잠시만 기다리면 곧바로 해결되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비가 단순한 소낙비가 아니라 마치 장마비처럼 3일 내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림을 그 교회에 그대로 두고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 그림이 그려지고 나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보살핌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그 그림은 우리집 밖에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물론 나는 이 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공경심만이 아니라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자신의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였다 이를 위해 그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은 슬리핑백을 가지고 와서 그림을 둘러싸고 72시간 보초를 섰는데, 이건 그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유익한 경험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예수의 초상이 가져다주는 사랑과 은총과 영혼 깊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초상화를 가까이에 두고 잔 수면은 많은 꿈과 비전들을 의식 차원으로 끌어냈다. 가장 중요한 꿈을 꾼 사람은 천사 스키린을 처음 구입한 그 교회 신자인 데비였다 그녀는꿈에서 <어린 양과 사자>그림이 이제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이 꿈이 신성한 영감을 받은 꿈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이런 주장은 건방진 무례함으로 비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브라이언을 빼고는 누구에게도 우리집이 아닌 다른 곳에 그 그림을 놓아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그녀가 용기를 내서 자신이 꾼 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건 서너 주가 지나고 나서였다. 그것도 내가 그림을 가지고 그 예배당을 방문했던 일이 우리의 지닌 봄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경험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하고 나서 말이다.
그녀의 꿈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깔려 있는 제안은 나를 놀라게 했다 2월 이전에는 그리스도 진리연맹이 뭔지 생판 모르던 내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다시 한번 맞닥뜨린 셈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을 검토해봤을 때 그 예배당에 그림을 놓아두는 것이 기도와 명상을 하러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일주일 내내 개방되는 것을 비롯하여 내가 원하던 모든 기준에 들어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찾기 쉽고 아름답고 경건한 장소였다.
<어린 양과 사자> 와 <사랑의 불꽃>이 그들의 새로운 안식처에 놓인것은 6월 무렵이었다. 그것은 긴 여행 끝에 나온 멋진 결론이었다. 그 여행을 이끈 힘이 일련의 기적에서 나오긴 했지만, 내가 내 인생을 거쳐 지나가면서 신의 의지를 마침내 전면에 이끌어낸 공시성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기 시작한 건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란히 놓인 두 그림을 바라보게 되고서였다. 공시성이란 기적이 펼쳐져가는 역동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물론 우리가 귀기울이고 반응하는 한에서이지만.
이제 그림들은 자기 나름의 일정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내 경우로 말하면, 나는 1996년 초까지 회색문에 천사를 그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아마도 더 큰 이해와 개인적 발전을 가져다줄 내 다음 입구를 지나는 데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부언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건 내가 그린 천사들을 모두 '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사랑을 강력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느끼기는 했다. 물론 이따금 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빛을 얼핏 보거나 어디서 풍겨오는지 모르는 달콤한 향기가 내 코 끝은 스치고 자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 인식 영역은 여전히 우리가 '정상'...이것의 의미가 무엇이든-이라고 부르는 상식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내가 천사를 그린 건 고귀한 삶을 알고 보고자 하는 갈증이 내 영혼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고귀한 의식의 권능이 나를 통해 쏟아져 그 아름다운 현존을 밎도록 놔두었을 때, 처음에는 그토록 고통스런 굴종의 행위였던 것이 이제는 기꺼운 감수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앞의 모델이나 바라볼 영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영상'은 내 동료 인간과 영혼 대 영혼으로 결합하는 특권만이 아니라, 드높은 안내를 존중하고 그것에 이바지할 기회말고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는 내 가슴의 간청이었다. 문지방을 넘어서자 창조적 표현의 새로운 세계가 나를 환영했다. 이런 자각에 이른 나는 더이상 문을 캔버스 대용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은유로서 회색 문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 가슴이 입구였기 때문이다.
내 새로운 작품이 발전해갈수록 내 자각도 켜져갔다 나는 여전히 천사를 그렸지만, 그들은 그 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표현상에서 여분의 차원이 발전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인간 영혼을 포현하고 드러내는 차원이다. 백장이 넘는 천사화를 그리고 나서 내가 알아챈 한 가지는 그들로서 그려지는 인물의 부정할 수 없는 실존이었다. 이것은 신체상의 초상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색이나 상징, 배경의 선택이나 더 빈번하게는 의사교류의 성격 자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개별 존재들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천사들의 본질이나 그들이 우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건 그들의 의무도 권리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온 동료로서 그들의 이따금 우리를 위험에서 구해주고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끌어올리고자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건 영혼의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갈수록 활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 이 영혼의 연결이다. 처음 천사들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더 높은 존재 영역에서 온 존재의 특이한 발현 모습에 강조점을 두었다. 하지만 1995년경부터는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새로운 그림들에서는 천사들과 접촉하는 인간 영혼이 더 높은 부분이 천사라는 소재의 구현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 내 영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삶이 진행되는 데 따라 이루러진 또 다른 의미심장한 변화는.... 변함없는 내 동료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어린 양과 사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살아가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친한 친구들이 멀리 떠나고 나서도 친숙한 모든 환경들 속에서 그들이 남긴 자취를 느끼는 것과 흡사했다 그러고 나서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추억의 회상 속으로 바져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한 건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는 영적으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내 개인적 성장의 풍성함은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이상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만다 예수의 현존을 찾아 화실 이곳저곳을 살피거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그가 남긴 영향의 자취들을 찾아내곤 햇다 하지만 천사와의 관계에서 그러했듯이 예수와의 관계에서도 강조점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혼을 통한 연결이 어떤 신체적 발현보다도 더 중요해져갔던 것이다. 나는 최초의 성스런 방문을 거기서 나온 여상보다 더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뱔견했다.
1991년 11월23일의 그 특별한 날, 나는 순수한 영적 형상의 흰광태 속에서 내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내가 인식할 수 있엇던 건 오로지 그의 성스러움이었다. 몇 년 후 내가 그 기억을 음미하면서 그것에 매달려 안내를 구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것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으로서 예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우침은 나 자신의 자기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후 내가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안내판이 되고 있다.
이 기억과 그 순수함에 대한 자각의 성장을 기리기 위해 나는 그 첫 만남을 그리으로 그려 <최초의 광휘>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내게 추구의 시작이자 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리와 평온이라는 완벽한 평화 속에 우리의 마지막 사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면 속에서 거하는 하늘왕국, 성스런 가슴이다.
내가 일상의 명상과 기도와 창조활동들에서 오는 영감을 따랐을 때, 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훨씬 더 깊고 강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감각으로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의 방문은 더 이상 없었지만, 평온과 깨달음을 주는 교감은 그후로도 이어졌다. 더 중요한 건 내가 1992년에 생각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빛을 발하는 관계가 성장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내면의 진리를 말할 용기가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그 성스러움을 함께나누는 것으로 나는 내 사원을 얻어가고 있었다. 수동적인 후퇴로서가 아니라 내 삶과 내 작업을 끌어가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과정으로서, 마침내
나는 영혼이 신과 영원한 교감을 나누고
모든 생명과 형제애를 나누는 내면 성소이자
인류의 사원이 성스런 가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출처] 끝없는 사랑 553쪽 에필로그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에필로그
사랑
삶은 계속된다.
기억이란건
해방되기 위해서 써먹는 거야
그리고 해방이란 건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욕구를 넘어서서 사랑을 펼치는 것이고
그리하여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로부터도
해방되도록 - T.S Elior
예수의 방문은 이렇게 끝났지만, 내 체험과 성장은 이제 시작이었다. 끝이 없을 것 처럼 계속해서 여행과 그림 전시가 이어졌다.
하지만 1993년 가을 무렵이 되자. 계속되는 장거리 여행에 지친 탓에 조금이라도 느긋한 휴식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갔다. 지난 18개월 동안. 나는 활동과 여행과 도전, 개인적 성장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게다가 도로 위에 있지 않을 때의 우리는 거의 언제나 멀리서 찾아온 방문객들을 우리집 거실에서 맞고 있었다. 우리는 특히나 아이들이 찾아오는 것을 반겼다. 그들이 거리낌없는 무구함으로 예수를 알아보는 광경은 언제나 즐거웠고, 깊은 영감을 주는 일도 곧잘 있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고양이 구나에게 달려가거나, 적어도 그리스도를 직접 본 그 고양이를 곁눈질로 쳐다보곤 했다.
<어린 양과 사자>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의무감은 다른 모든 것에 여향을 미칠 만큼 중요했다. 게다가 다른 어떤 주제가 그 정도의 열정과 평온을 내게 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만큼 계속 따르기에는 버거운 약조이기도 했다. 회화에 대한 내 애정이 사적인 측면으로 1992년 가을까지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다른 예수 초상화들도 그려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 가장 많은 요구는 전통적인 자세로,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함께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외교력을 발휘해,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예수 초상을 그리는 것 또한 첫 번째 초상처럼 특별한 소명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포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예수 자신이 또 다른 그림을 원하여 그런 식으로 상황을 끌어간다면, 그에 동의하는 건 내 기쁨이자 특권이리란 부언을 달면서, 하지만 이런 특수 상황을 빼면 일반적인 종교미술 기법은 내 가슴의 창의성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하면서 나는 더 이상의 초상화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건 6개월 이상 사실이었다.
그런데 1992년 가을, 놀랍게도 그런 특수 상황이 전개되어 내게 또 다른 영상이 주어졌다 그건 저녁 전시회를 열기 위해 예수의 초상화를 가져간 한 작은 시골교회에서 일어났다. 끝맺음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예수가 내 화실에 있을 때면 느끼곤 했던 특이한 향기를 맡았다.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들면서 눈을 떳는데. 그건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예수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놀래키지 않으려고 숨죽여 지켜보는 내 눈 앞에서 참으로 매혹적인 과정이 펼져졌다. 예수의 모습이 점점 어려지더니 결국 어미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리아는 전형적으로 젊은 헤브루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움이란! 그녀의 무구한 이미지는 그녀 자신이 마치 아이인 듯이 보이게 했다. 잠시 후 안정된 영상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2개월 동안 계속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나중에 (사랑의 불꽃)으로 이름붙여진 그 그림은 (어린 양과 사자)가 완성된 날로부터 정확히 아롭달 후인 12월12일 낮12시 완성되었다. 마직막 붓터치는 그날 오후에 열릴 예정이던 공식 기념만찬을 앞두고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마무리되었다.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한 그 만찬에서 많은 이들이 젊은 마리아의 진실성에 눈물을 흘리거나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어린 양과 사자)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과 그 어릴 적 모습간의 부정할 수 없는 연관성에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그날 이후 우리의 생황은 활동의 광풍에 휩싸였고 내 그림붓은 먼지를 뒤집어써갔다.
그림과 관련해서 내가 내린 첫 번째 결정들 중 하나는 그것의 봉사가 보편종교적이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종교교리에도 독점적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몇천 개의 예수 초상화들에 비해 볼 때 (어린 양과 사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그것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은혜로움을 느낀다는 점일 것이다. 말하자면 각자가 자기 나름의 의미에서 그 그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계속 그런 식이길 원했다. 어느 한 교회에 그 그림을 안치시키는 것을 주저했던 이유도 대다수 교회들이 일주일 중 하루 그것도 몇 시간만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런 교려에서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현실이면서 내게는 걱정거리였다.
온갖 연령대의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의 초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명상하거나 그의 은총을 소리 없이 받을 수 있어야 할 터였다 나로서는 그 그림들의 상징적 내용이 뭐라고 단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발명한 것도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그림들은 대부분의 경우 보는 사람들 각자의 개인적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촉매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인다. 그림 속 그의 외모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유동성이 있었다. 만화경처럼 그것은 무수한 얼굴 표정과 윤곽과 개성을 지닌 듯이 보인다. 나는 이 초상화가 무한한 가능성과 적응력을 담고 있는 보편 청사진 위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즐겨한다. 또 동시에 나는 이 그림을 가지고 우리가 그의 역사성, 다시 말해 그의 존재의 지속성을 좀이라도 암시 받기를 바랬다.
이 점에서는 임사체험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써서 자신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 예수를 만났던 경험을 전해줌으로써 나의 이런 희망사항이 단순한 희망사항만은 아님을 확신시켜주었다. 한 목사는 이 초상화들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임을 바라는 내 희망사항에 대한 추가적인 지지로 자신의 세미니용 서적들 중에 하나에 실려 있는 다름과 같은 구절을 보내주었다. 이 구절은 당신 유대 총독이던 푸블리우스 랜툴루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보낸 편지에 실린 예수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지금 유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한 독신 남자가 살고 있는데. 그는 오랑캐 유대인들이 예언자로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신의 아들로 여기고 열렬히 따르며 숭배합니다 그는 죽은 자를 무덤에서 살려내고 말이나 닿는 것만으로 온갖 병들을 고칩니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온화하면서도 단아한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잘 익은 알밤색의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어깨 정도까지 길렀습니다. 또 그는 높고 넓으면서 앞으로 조금 뛰어나온 앞이마와 점이나 주름 따위가 일제 없는 불그스레한 멋진 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코와 입은 우아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숱 많은 수염은 턱아래로 내려오는 그의 머리칼에 어울리는 색깔을 하고 있습니다 밝은 파랑인 그의 눈동자는 맑고 잔잔하여, 순수하면서도 위엄 있고 온화한 인상을 줍니다. 몸의 비례는 어느 누구보다 완벽하고 매혹적이며, 그이 손과 팔은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럴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는 위엄을 가지고 책망하고, 온하함을 가지고 충고하는데, 말로 하든 행동으로 보여주든 그이 연설은 감동적이고 웅변적입니다. 누구도 그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행동방식은 놀랄 정도로 경쾌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슬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성스런 완벽을 생각하면, 그는 모든 면에서 진정 사람의 자식이 아닌 듯합니다."
이 구절과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측면은 최상의 존경을 보여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이토록 세심하면서도 공경스런 찬사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던 시대에 한 로마인이 한 유대인을. 또 한 남자가 한 남자를 이렇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나눔의 과정에 워낙 마음을 뱃긴 나머지, 나는 그림이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말았다. 그런 내게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난 것은 1993년 9월의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덧붙여서 나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런 개인적 갈망을 확인하고 나자 그의 현존속에 있던 당신의 평온함이 떠올랐다. 그것은 브라이언과 내가 유지해왔던 정신없는 흐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그림 속의 예수 모습에 눈을 모았다. 그 특별한 평화의 자리에 그와 함게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그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보는 대신에 그 그림으로부터 축복을 입은 몇백 명의 사람들을 본 것이다. 그 겹쳐진 얼굴층들이 하나하나씩 벗겨져나가고 나니 이윽고 예수의 얼굴만이 남았다. 이 영적 교감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성과 공경과 거룩함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화가로서의 내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내가 내 화실의 적막과 진지함을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 또한 진지함을 필요로 하나는 것을 알았다. 그것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과 삶과 믿음들이 똑같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경건하고도 고요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해답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는 해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확신한 나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내 걱정을 더 높은 인도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이 쥐고 있기보다 더 손쉬운 희망사항인 때들도 이따금 있기 마련이다. 몇 주가 지나도 아무런 논리적인 해결책이 안 나오자,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밖으로 뻗어가는 우리의 일상사들을 계속 꾸려가면서도 긴장으로 밤이면 늘 잠을 설쳤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움으로 기적을 맞았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나는 성스런 빛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일은 이번엔 새벽 3시에 우리 집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놀라 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앚아 눈을 비볐다. 첫 번째의 빛처럼 그 빛도 초자연적임을 깨달은 나는 배게를 세워 기댄 채 뭔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방구석에 집중되던 그 빛은 천사의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형상은 십중팔구 내 앞에 있던 부정할 수 없는 미지(未知)에 내 마음이 익숙한 유형과 개념을 적용하여 조정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놀라운 현상이었다! 어린 시절 천사를 믿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천사에 대해 생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천사를 보리라는 기대 같은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고, 그러기에 당시 내 앞에서 벌어진 그 상황은 나로서는 설명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드문 인식이었다. 몰론 직업적인 시각예술가로서의 경력이 내가 본 모든 장면을 떠올리거나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강력하면서도 생생한 시각능력을 키워주긴 했지만, 1991년까지 내 인식은 그냥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는 수준 이상이 절대 아니었다. 만약 눈군가가 내게 천사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면, 나는 1세기 전의 위대한 프랑스 사실주의자 쿠르베처럼 "만일 당신이 내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내가 천사를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을 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리둥절 해 하면서 배개에서 몸을 일으겼을 때 천사가 말했다 "두려워마시오. 나는 당신의 기도가 들려졌음을 알려주려 온 것이오. 전시실 마련을 위한 배열이 이루어지고 있소"
나는 그의 말에 기뻤지만, 훨씬 더 매혹당한 건 그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내 귀가 듣고 있던 소리는 사랑 가득한 천상의 음악이었던 반면, 내 마음이 듣고 있던 소리는 영어였다. 그것은 천사가 '말하는'음악이 그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 바꿀 수 있는 보편언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그후 며칠 동안 나는 이사건을 돌이켜보면서 시각적인 환영조차도 보편존재로부터 좀더 인삭되기 적합한 형태로 현실을 바꾼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사는 20분 정도 머문 듯이 느껴졌지만, 틀림없이 그보다는 짧았을 것이다. 전설에 나오는 천사들처럼 그도 기도에 대한 대답만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나의 반복되는 요구에도 그는 초상화들과 관련한 천상의 계획을 내게 자세히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손'을 내 가슴에 놓더니 말했다. '당신에게 더 많은 통찰력과 가르침을 줄 이 의식의 씨앗을 남겨주겠소"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가르침이나 대답들이 저절로 주어지리라고 전제하면서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1주일 정도가 지나자 호기심이 내 인내를 넘어서고 말았다. 사실 운명론적인 자세는 말할것도 없고 기다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천번 기도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침묵 명상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 천사가 '의식의 씨앗'을 남겨준 내 가슴의 그 특별한 자리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라면서, 나는 최대한 오랜 시간 평온 속에 거하다가 쳐다보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명상상태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 그 음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예전처럼 집중을 하자 말이 확연해졌다.
"예?"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내 관심과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기도 스크린'을 세우라고 말했다.
기도 스크린이란 게 무엇이고, 왜 내가 그걸 세워야 하지? 내가 대답을 구했더니 그는 내게 작업 순서를 일러주었다! 나는 그날 내내 그럴듯한 명분을 찾았지만, 어떤 것도 그런 지시의 명분이 되지는 못했다. 내가 끌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합리적 결론은 기도 스크린이 그것이 놓인 공간에 더큰 공경심을 품게 함으로써 기도와 명상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게 만들지 않을까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감히 천사와 논쟁할 수 있었겠는가? 기도스크린으로 삼을 소개와 그것을 세울 방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요량으로 동네의 홈인테리어 재료점을 찾은 나는 영감의 순간과 진행방도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상당한 시간 동안 그 가게의 통로를 걸어다녔다. 몇 개월에 걸쳐 우리 집을 개조해본 경험이 있던 나였기에 가게에서 보는 재료와 부품들의 용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거의 모든 소재들이 거칠고 무겁거나 전동기구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가게를 나서려고 문들이 진열된 곳을 지날 때였다. 뭔가 딱딱한 물체에 발이 걸려 잘못하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가 진열된 문 중 하나를 통로에 그대로 뉘여놓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세워놓으려고 그것을 집었다. 그런데 엄청 무거우리라는 예상과 달리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가벼웠다. 그건 속이 텅빈 회색 문이었고, 잡고 보니 그 나무결 무늬도 무청 멋있었다. 게다가 그건 대각선 길이가 60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여서 내가 필요로 하던 넓이에 딱 들어맞았다. 몇 분 동안 가능성들을 저울질해본 결고, 나는 이 판넬 세 개를 함께 붙이면 아주 멋진 스크린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에다 약간의 장식을 하고 니스를 좀 바르면 기도스크린-그용도가 어떤 것이든 -으로 충분했다.
공시성과 목적의식적 일치의 이 사건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문들은 길이를 줄여야 했는데. 우리 집을 개조했던 사람들로부터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판넬들을 붙일 준비가 되자 나는 그것들을 내 화실로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한쪽면의 나뭇결은 아름다운데다 그대로 니스를 칠할 수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세문 모두 다른 쪽 면은 밋밋했다. 뭔가 보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나는 손에 붓을 들고 한 회색 판넬 앞에서서 천사를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스크린을 지시한 이에게 책임을 되돌리는 게 그리 부적절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신 나는 내 앞에 놓인 그 문이 단순한 그림이상이라는 걸 몰랐다. 그건 나 자신의 위대한 펼침을 위한 출발이었던 것이다. 화실에서의 그날 저녁, 내가 의식하고 있던 유일한 의도. 혹은 목적은 '기도 스크린'을 장식하여 작업 순서를 끝맺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대가로 이 프로젝트의 완성 지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해답이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에 수반된 대가는 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문들에 천사들을 그리는 그 작업의 처음부터 나는 에너지와 기쁨이 솟구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완성된 스크린은 내가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 작업은 마침 우리의 연례행상인 크리스마스 파티 전에 완성되어.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물론 판매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신작을 선보인 것도 9개월만의 일이라. 이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파티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그 그림이 끌어내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뭔가 신선하고 솔직담백한 것이 있었다. 특히나 한 부인은 그 그림에 푹 빠진 나머지 끈질기게 그것을 팔라고 졸랐다. 그녀의 제안에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나는, 그네에게 그 스크린은 내게 영감 면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판매용이 아니라고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하지만 나의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날마다 전화를 걸었고, 결국 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사용할 것은 다시 하나 그리면 되지 않겠냐면서 나를 설득했고, 결국 나는 그럴 계획으로 본래의 스크린은 그녀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천사 스크린을 가지고 집에 도착한 그녀는 그것이 그녀 집의 평면도에 비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소한 문제에 굴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또 다른 가능성을 구체화하고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스크린을 분리하여 판넬들을 따로따로 벽에 걸고 싶어했다 이런 그녀의 창의력은 내게도 새로운 인식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또다른 공시성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이틀 후, 내게 다시 전화를 건 그녀는 그 천사 판넬을 다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물었다. 놀란 내가 반문했다 "왜요? 도독맞았나요? 아님 훼손이라도 됐나요?"
약간 머뭇거리면서 그녀는 자기가 그것을 팔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가 속한 한 기도 동아리가 전날 밤 그녀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동아리의 두 멤버가 자기들 예배당에 걸 요량으로 그 판넬을 구입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 끈질김을 가지고 그들은 '안 된다'는 대답을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프로젝트가 나 자신의 의지보다 훨씬 더 큰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과 흡사했다. 그것이 무엇을 뿜어낼지 한시바삐 알고 싶었던 나는 재빨리 재료들을 다시 모아서 그녀에게 줄 두 번쩨 판넬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에는 의무로 시작되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채 알기도 전에 나는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표현력과 자유로움을 가지고 이 기쁨에 찬 발견의 과정에 푹 빠져들었다. 본능이든 기대이든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걸 알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미 결정적인 결정을 내린 마당인 말이다.
나는 더 넓은 문들을 골라 그 비율이 디자인과 표현과 발달을 가진 그림에 좀더 적합하도록 높이를 과감히 줄였다. 그렇게 하고 보니, 예전 같으면 전형적인 내 작업 습관들과 노력에 대한 기대로 가로막혔을 직관과 창조적 확신과 본능적 아름다움의 깊이를 여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은 아주 재빨리 일어났다. 2주가 채가지 않아 나는 그녀 집으로 운반할 준비가 된 새로운 그림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자기 집에 그림을 걸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글렌다. 판넬 하다 더 그려줄 수 있어요" 이번것도 팔았어요" 숲을 지나는 그 바람은 이제 질풍노도의 힘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건 단지 현상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거의 2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문에 천사를 그렸고, 그러고 나면 언제나 며칠 안에 누군가가 내 화실에 와서 그 그림을 보고 '이건 내 천사야!"라고 선언하고 했다.
이 과정에서 언제나 나를 탄복시킨 건 천사가 일조의 매체로서 회색문을 선택한 것의 완벽성이었다. 그것은 문인 것에 대해서 내 자각을 키우는 입구이자 우주에 존재하는 천사의 비유적 표현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더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는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화가로서 전형적인 훈련과정을 밟은 내 입장에서 볼 때, 한가지는 확실했다. 외부의 개입 없이 나 혼자 힘으로는 그런 매체를 선택하지 못했으리란 것 그것을 스타일의 성장을 위한 촉매제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란 건 두말 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개되는 사건들 뒤에 있던 주된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4년2월의 일이었다. 처음 두 판넬을 구입했던 내 고객의 친구들이 더 많은 천사를 필요로 했고, 또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다. 우리 집을 찾아온 그들은 (어린 양과 사자)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감동적이면서 따스한 경함이 되었고, 깊고 의미 있는 우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덧붙이면 그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에 걸 일곱 대천사들을 그려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다가오는 봄 내내 계속된 그 프로젝트 덕분에 우리는 더 친해질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 단체로 단순한 교회 이상의 것이었다. 1939년에 설립되어 모든 사람과 기독교 진리의 모든 측면에 계속해서 열려 있겠노라고 선언했던 이 친목 단체의 이름은 '그리스도 진리연맹'이었다. 그 이후로 이 교회는 포트 위쓰에 있는 아름다운 만칠천 평의 대지 위에서 조용조용히 자신의 가르침과 봉사를 펼져왔다. 자신의 초교파적 이상에 발맞추어 그것은 주로 출판활동과 다른 기독교 형제들을 너그럽게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다. 전통양식과 현대양식이 멋지게 혼합된 그 예배당은 참으로 정싱스럽게 가꿔진 정원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무리 지친 영혼이라도 기운을 되찾기에 충분한 평온과 안전의 정신이 엄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예배당의 아름다운 풍경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거꾸로 <어린 양과 사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그 교회의 목사 아플레케이트 박사는 나더러 <어린 양과 사자>를 그 예배당에 전시하고, 일요일 예배에서 간증해달라고 부탁했다. 알고보니 우리가 선택한 그날은 새로운 천사 그림 모두가 그 예배당의 벽에 걸리는 첫 날이기도 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다. 나는 유난히 화창한 날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림와 관계해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림과 관계해서 말하면,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날씨가 아우리 험악하더라도 그림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시점에는 언제나 날씨가 말게 개곤 했다. 때로는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던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림을 차에서 꺼내옮겨야 할 때가 되면, 날씨가 거짓말처럼 말짱해졌다! 이 현상은 워낙 다반사로 일어났던 일인지라 나는 거의 당연한 기적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요일 아침, 새들이 노래하고 햇살이 환한 걸 보니 무척 기뻤다. 그 문제가 내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란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는 면에서.....
하지만 예배 마지막 기도문이 읊조려지기 시작하자, 하늘이 시커매지는가 싶더니 천둥과 번개가 우리의 아멘 소리를 대신할 듯이 우르릉 꽝꽝 울리는 게 아닌가. 곧이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날씨로 인한 장애는 잠시만 기다리면 곧바로 해결되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비가 단순한 소낙비가 아니라 마치 장마비처럼 3일 내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림을 그 교회에 그대로 두고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 그림이 그려지고 나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보살핌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그 그림은 우리집 밖에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물론 나는 이 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공경심만이 아니라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자신의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였다 이를 위해 그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은 슬리핑백을 가지고 와서 그림을 둘러싸고 72시간 보초를 섰는데, 이건 그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유익한 경험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예수의 초상이 가져다주는 사랑과 은총과 영혼 깊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초상화를 가까이에 두고 잔 수면은 많은 꿈과 비전들을 의식 차원으로 끌어냈다. 가장 중요한 꿈을 꾼 사람은 천사 스키린을 처음 구입한 그 교회 신자인 데비였다 그녀는꿈에서 <어린 양과 사자>그림이 이제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이 꿈이 신성한 영감을 받은 꿈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이런 주장은 건방진 무례함으로 비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브라이언을 빼고는 누구에게도 우리집이 아닌 다른 곳에 그 그림을 놓아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그녀가 용기를 내서 자신이 꾼 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건 서너 주가 지나고 나서였다. 그것도 내가 그림을 가지고 그 예배당을 방문했던 일이 우리의 지닌 봄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경험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하고 나서 말이다.
그녀의 꿈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깔려 있는 제안은 나를 놀라게 했다 2월 이전에는 그리스도 진리연맹이 뭔지 생판 모르던 내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다시 한번 맞닥뜨린 셈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을 검토해봤을 때 그 예배당에 그림을 놓아두는 것이 기도와 명상을 하러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일주일 내내 개방되는 것을 비롯하여 내가 원하던 모든 기준에 들어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찾기 쉽고 아름답고 경건한 장소였다.
<어린 양과 사자> 와 <사랑의 불꽃>이 그들의 새로운 안식처에 놓인것은 6월 무렵이었다. 그것은 긴 여행 끝에 나온 멋진 결론이었다. 그 여행을 이끈 힘이 일련의 기적에서 나오긴 했지만, 내가 내 인생을 거쳐 지나가면서 신의 의지를 마침내 전면에 이끌어낸 공시성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기 시작한 건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란히 놓인 두 그림을 바라보게 되고서였다. 공시성이란 기적이 펼쳐져가는 역동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물론 우리가 귀기울이고 반응하는 한에서이지만.
이제 그림들은 자기 나름의 일정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내 경우로 말하면, 나는 1996년 초까지 회색문에 천사를 그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아마도 더 큰 이해와 개인적 발전을 가져다줄 내 다음 입구를 지나는 데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부언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건 내가 그린 천사들을 모두 '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사랑을 강력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느끼기는 했다. 물론 이따금 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빛을 얼핏 보거나 어디서 풍겨오는지 모르는 달콤한 향기가 내 코 끝은 스치고 자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 인식 영역은 여전히 우리가 '정상'...이것의 의미가 무엇이든-이라고 부르는 상식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내가 천사를 그린 건 고귀한 삶을 알고 보고자 하는 갈증이 내 영혼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고귀한 의식의 권능이 나를 통해 쏟아져 그 아름다운 현존을 밎도록 놔두었을 때, 처음에는 그토록 고통스런 굴종의 행위였던 것이 이제는 기꺼운 감수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앞의 모델이나 바라볼 영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영상'은 내 동료 인간과 영혼 대 영혼으로 결합하는 특권만이 아니라, 드높은 안내를 존중하고 그것에 이바지할 기회말고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는 내 가슴의 간청이었다. 문지방을 넘어서자 창조적 표현의 새로운 세계가 나를 환영했다. 이런 자각에 이른 나는 더이상 문을 캔버스 대용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은유로서 회색 문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 가슴이 입구였기 때문이다.
내 새로운 작품이 발전해갈수록 내 자각도 켜져갔다 나는 여전히 천사를 그렸지만, 그들은 그 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표현상에서 여분의 차원이 발전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인간 영혼을 포현하고 드러내는 차원이다. 백장이 넘는 천사화를 그리고 나서 내가 알아챈 한 가지는 그들로서 그려지는 인물의 부정할 수 없는 실존이었다. 이것은 신체상의 초상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색이나 상징, 배경의 선택이나 더 빈번하게는 의사교류의 성격 자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개별 존재들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천사들의 본질이나 그들이 우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건 그들의 의무도 권리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온 동료로서 그들의 이따금 우리를 위험에서 구해주고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끌어올리고자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건 영혼의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갈수록 활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 이 영혼의 연결이다. 처음 천사들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더 높은 존재 영역에서 온 존재의 특이한 발현 모습에 강조점을 두었다. 하지만 1995년경부터는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새로운 그림들에서는 천사들과 접촉하는 인간 영혼이 더 높은 부분이 천사라는 소재의 구현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 내 영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삶이 진행되는 데 따라 이루러진 또 다른 의미심장한 변화는.... 변함없는 내 동료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어린 양과 사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살아가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친한 친구들이 멀리 떠나고 나서도 친숙한 모든 환경들 속에서 그들이 남긴 자취를 느끼는 것과 흡사했다 그러고 나서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추억의 회상 속으로 바져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한 건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는 영적으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내 개인적 성장의 풍성함은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이상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만다 예수의 현존을 찾아 화실 이곳저곳을 살피거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그가 남긴 영향의 자취들을 찾아내곤 햇다 하지만 천사와의 관계에서 그러했듯이 예수와의 관계에서도 강조점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혼을 통한 연결이 어떤 신체적 발현보다도 더 중요해져갔던 것이다. 나는 최초의 성스런 방문을 거기서 나온 여상보다 더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뱔견했다.
1991년 11월23일의 그 특별한 날, 나는 순수한 영적 형상의 흰광태 속에서 내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내가 인식할 수 있엇던 건 오로지 그의 성스러움이었다. 몇 년 후 내가 그 기억을 음미하면서 그것에 매달려 안내를 구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것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으로서 예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우침은 나 자신의 자기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후 내가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안내판이 되고 있다.
이 기억과 그 순수함에 대한 자각의 성장을 기리기 위해 나는 그 첫 만남을 그리으로 그려 <최초의 광휘>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내게 추구의 시작이자 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리와 평온이라는 완벽한 평화 속에 우리의 마지막 사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면 속에서 거하는 하늘왕국, 성스런 가슴이다.
내가 일상의 명상과 기도와 창조활동들에서 오는 영감을 따랐을 때, 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훨씬 더 깊고 강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감각으로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의 방문은 더 이상 없었지만, 평온과 깨달음을 주는 교감은 그후로도 이어졌다. 더 중요한 건 내가 1992년에 생각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빛을 발하는 관계가 성장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내면의 진리를 말할 용기가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그 성스러움을 함께나누는 것으로 나는 내 사원을 얻어가고 있었다. 수동적인 후퇴로서가 아니라 내 삶과 내 작업을 끌어가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과정으로서, 마침내
나는 영혼이 신과 영원한 교감을 나누고
모든 생명과 형제애를 나누는 내면 성소이자
인류의 사원이 성스런 가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출처] 끝없는 사랑 553쪽 에필로그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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