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9장 축복받는 삶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9장 축복받는 삶

柏道 2022. 2. 11. 05:48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9장 축복받는 삶

사랑
2021. 10. 5. 11:34


지상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천국을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갈등 가득한 배경과 확연히 대조되는 기쁨 가득한 정소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필멸(반드시 멸망함)자로서의 가치없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우리는 언제나 더 온화하고 더 편안한 장소들로 달아나고자 한다. 하지만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일찍이 이 지상에서 느꼈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갈등 없는 평온과 자유를 경험했다. 아마도 신의 평화가 두드러진 곳이면 어디나 천국은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내가 자신에 대해 알아챘던 가장 큰 차이는 문제를 다루는 영역에서다. 화가로서의 나는 언제나 도전과제들을 즐겼고, 일종의 호기심까지 발전하는 경우에는 자주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인한 진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다수는 아니라도 상당수의 어려움들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그것들이 제공하는 모험과 성취감에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예수와 함께 있음에서 오는 매혹적인 차이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 없이도 배우고 이루고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그 편안함이었다.

돌이켜 보면, 다른 경우들에서는 문제의 해결이 오히려 자주 환상의 특정 수준에서 내 에고가 승리를 주장하는 토대가 되곤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이제 나는 진짜 '극복'이란 참된 나 자신이 되는 희열로 되돌라가는 것, 외적 조건에 관계 없이 고요에 이를수 있다는 걸 아는 것임을 배웠다. 이와 더불어 나는 시도 조건이란 것들 다수가 불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역사의 어느 지점에선가 곤란한 문제를 대면할 가치가 잇는가를 놓고 결정을 내린 시점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럴 문제들이 불가피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하다고는 여겨졌을 테니, 아마도 우리는 그것들을 모험과 교육으로 여기면서 창조적으로 접근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것들을 벌과 응보로 보았을 수도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함에 있어 훨씬 더 비중 있게 고려해야 할 건, 사랑이 문제를 포용하는 건 문제란 게 결국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예수에게 갈등 대신에 축복을 끌어오는 법에 대해 물었던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진실로 축복받는 삶을 받아서 그것이 있게 할 수 있나요? 거기에 어떤 공식이 있나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예수가 대답했다

"나는 이미 그것을 당신들에게 말해주었소"

"언제요?"내가 재빨리 되물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 멋진 삶에 관한 것이오. 물론 당신이 특별히 산상수훈의 '여덟 지복(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시작되는 부분)을 지칭했을 수도 있지만요"

"아...예" 나는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산상수훈의 '여덟 지복이 영감을 강하게 주고 아름답긴 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데다. 그것들은 범인(凡人)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기보다는 성자가 되기 위한 처방인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여덟 지복'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가장 긴 연설인 '산상수훈'안에 포함된 축복 선언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런 대답을 들은 내가 유일하게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언급은, 내가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되어 갈릴리해 옆의 언덕에 앉아 있던 그 사람들의 흥분과 기대를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정도였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겠는가! 또 그 메시지를 예수의 목소리로 직접들을 수 있었다면!

사실 이 수훈은 내게 언제나 깊은 감동을 주곤 했기에 나로서는 그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예수가 진실로 뜻한 바를 더 충분히 이해하고 싶다는 갈망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가 든 비유들 자체가 다중적 의미를 내표하기도 했지만, 내가 성경의 일부 용어와 구절들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내 염려 때문인지 예수는 자신의 말이 좀더 구조화되고 형식화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묘한 문제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예수는 아람어가 이스라엘 '갑남을녀들'이 사용하던 대단히 실제적이고 세속적이고 다체로운 언어라고 설명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자연발생적인 모든 언어들이 그 전달하는 문맥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는 아람어의 가능한 의미 범위를 구조화되지 않은 우리말의 구어체 어법에 비유했다. 예를 들어 우리 영어 표현 중에 'I 'm cool'이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이 구절을 말하면 아마도 그것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내가 기온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해 한다고 결론지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내가 유행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아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같은 구절 안에 이 모든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번역하는 문제는 단순히 라틴어나 그리스어나 여러 현대어들에서 상응하는 표현을 찾아내는 것 이상으로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큰 장애는 예수의 진술이 진실로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확정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문맥을 회복해야 한다는 데 있다.

여덟 지복이란 말 그대로 예수의 약속에서 중심 의미였던 축복과 크나큰 행복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덟 지복은 인간 체험의 넘어설 수 없는 부분으로서 한계와 슬픔과 고통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왜 예수가 이런 식으로 말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소망을 표현하자마자, 예수는 내가 그 축복을 나 자신에게 주는 것으로 듣고 그것의 의미를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구절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의 낭랑한 바리톤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런 다음 그는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 구절은 아이 때 처음 들었을 때부터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어요. 제겐 천국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풍족함을 뜻하는데, 가난이 어떻게 천국의 풍요와 연결될 수 있나요? 게다가 가난과 천국을 연결시킨 것도 저를 헷갈리게 하구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요?"

"만일 당신이 가슴으로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은 번역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들을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관심이 자신의 오해에 집중되어 있느니만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봅시다. 당신은 '가난하다'는 말에 압도당해 있소. 아람어에서 '가난하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서 전달되는 문맥과 견해 안에서만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있소, 아람어의 '가난하다'는 말은 씻겨나간 토양처럼 화폐하고 헐벗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능력이 모자라거나 자질이 없거나 가능성이 적거나 결함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소, 이런 의미들은 당신에 용어로도 쉽게 번역될 수 있소.

그런데 아람어의 '가난하다'는 용어에는 대부분의 현대어들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또 한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하다'는 뜻이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선언했을 때, 이야기하려던 바도 이 단순함이었구요. 이제 내가 그 구절을 고쳐서 암송해보지요. 그러면 그것이 어덯게 느껴지는지 내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 거요.

"영이 단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완벽해요. 그 자체로 완벽해요!' 그의 축복이 주는 강한 기운이 내 몸을 휩싸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가 이어서 그 축복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했다.

"영적인 추구를 할 때는 복잡하게 만들거나 서열 짓지 않도록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물질 실존에는 구조가 필요하지만, 영적 영역에서 구조에 권능이 주어지면 고립과 좌절, 판단과 오만만을 가져올 뿐이죠.

도 당신이 신에 접근하는 것을 한정짓고 통제하는 신앙에 권능을 부여하지 마시오. 다시 말해 당신의 영적 삶이 인간이 설정한 허가조건이나 조례에 따라서 상승하기를 요구하는 서열구조의 독재에 굴복하지 말라는 거요. 바벨탑을 둘러싼 결정적인 문제가 이것이었소, 고대 바빌론의 종교는 백성들의 천국행과 관련된 온갖 권한을 쥐고 있다고 추정된 승려계층에 장악되어 있었지요. 이건 조직화된 종교라면 항상 되풀이되어 일어나는 문제죠. 여러 영적 제국들이 무너지고 만 이유도 오직 마음과 인간의 권위를 토대로 했기 때문이오.
하늘왕국은 구조와 서열이란 걸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성스런 경험들을 인간이 설정한 온갖 요구조건들로 둘러싼다면, 기본적으로 당신은 하늘의 문을 닫는 짓을 저지르는 거요.
단순해지시오. 오직 한 영만이 있소, 천 개의 계단을 다 올라가야 창조주와 영적으로 충분히 연결될 수 있는 게 아니오. 영은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을 이루고 있으며, 당신을 둘러싸고 있고, 당신을 껴안고 있으며,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소, 성령이 당신을 위해 준비해둔 그 모두를 받는 데 구조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소. 역사상 위대했던 모든 제국들이 그들의 영적 삶을 지배했던 서열구조 때문에 결국 먼지로 흩어지고 말았소.
내가 '영이 단순한 자는 천국이 그들 것이니 복이 있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오. 당신이 영적으로 단순할 때 그냥 구하기만 해도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요. 최고 수준에 도달하자고 그에앞서 그보다 못한 수준들을 차례로 거쳐야 하는 건 아니오. 완성된 영적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과 단순성만 있으면 됩니다.

내분을 겪는 왕국은 황폐해지기 마련이고, 내분을 겪는 도시나 가정은 유지될 수가 없소. 그건 오직 한 영만이 있어 나눠질 수 없기 때문이오. 누구라도 이건 영을 가졌는데 저건 영을 가지지 않았다거나, 이 삶은 영에 속해 있지만 저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소. 어떤 것도 영에서 떼어내지 마시오. 영은 만물 속에 있고 만물을 이루고 있고 만물과 더물어 있소, 영이 관계하는 곳에는 전제조건이나 서열이란 게 없소. 영은 하나요 만일 당신이 그것을 쪼개려 한다면 그 쪼개진 쪽이 파괴자인 당신에게 맞서게 될거요. 당신이 영을 나누려 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에게서 '그 손해 배상을 받으라'고 허락하는 것이오!

자기 나름의 소박한 삶의 자리에서 한 영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열쇠요.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본모습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이시오. 다른 누군가처럼 되거나 다른 어딘가에 있을 필요가 없소.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영원성에 경탄하는 벼룩 쪽이 걸신들린 식욕으로 사리사욕을 위해서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거인보다 신의 얼굴을 보기 쉬운 법이요. 중요한 것은 크기나 중요도가 아니라 수용과 단순함이오. 실현은 당신에게 크나큰 행복을 가져다줄 단순함 속에 있소"

예수는 한번도 "자신에게 유리한 지위를 드높이기 위해 마음, 즉 세상의 정교한 구조를 세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인 사랑을 긍정하고, 인간의 신분 영역너머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결합하는 것이 영적으로 축복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열은 속물적 엘리트주의의 일부요. 구조는 땅의 것이지 하늘의 것이 아니오. 당신이 더 높이 승격하여 동료 인간들 및 창조주와의 관계가 더 많이 사랑으로 충만할수록 구조는 지배력을 일을 것이오 구조화된 인식층을 통해서 승격하길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에서만 승격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그들은 여전히 하늘왕국을 보지 못했소, 반면에 당신이 영 속에서 승격하면, 구조화된 현실은 당신의 자각에 어떤 흔적이나 관계도 갖지 못하고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과 영에게는 서열과 구조란 게 전혀 없소, 그리고 사랑은 당신 삶의 근원이요.

생각에서도 단순함을 유지하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생각대로 펼쳐져갑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을 지키고 그것이 제 방향을 잡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이 사령관이라면, 생각은 현장의 군대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연대장과 같소. 사령관의 명령이 군대에 제대로 전달되는 게 중요한데, 이것이 바로 생각의 역할이요. 그러니 당신의 생각을 지키고 그것들을 잘 가르치시오. 하지만 그것들이 당신 삶의 근원이라고 잘못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진짜 권능을 잊고 말 거요"


예수가 이렇게 말하자. 긍정적 사고방식을 공부하고 연습할 때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나는 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내 의향을 더 잘 관리해줄 것으로 믿거나 바랐던 몇 개의 세미나에 등록했다. 이 과정들 각각에는 긍정적 사고방법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하나하나가 다 효과와 성과가 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방법이든 얼마 동안 쓰고 나면 그 효율성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사실 내가 딱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여러 개의 과정을 선택한 이유가 이것이다. 나로서는 계속해서 효과를 볼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이 경험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 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 것을 청했다.

"그런 방법들이 처음에 잘 들었던 건 당신이 그것을 시작하던 시점에서는 감독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억눌린 사랑이 당신에게 많았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 방법이 그런 정체된 사랑 부분에 적용되어 쇄신되고 나면, 더 이상 이루어질 건 없게 되지요. 그 방법들을 효과 있게 만들려면 당신 생각의 뒤쪽에 사랑을 놓아야 합니다 생각 뒤쪽의 권능을 좀더 충분히 이해한다면, 더 나은 효과와 더 지속적인 성과들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고발달 및 사고운용 강좌는 많이 있소.

당신의 사랑과 생각을 활쏘는 궁수에 비유해보시오. 당신의 사랑이 궁수라면, 마음은 활이고, 생각은 화살이오. 생각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잡지 않고서는 표적을 맞출 수가 없소. 또 활에 화살을 메기고 잡아당기는 사랑이 없다면 화살을 쏘고자 하는 당신의 동기는 약화되거나 오도될 것이오. 이것들 모두가 당신이 가진 온전함의 일부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은 단순함이 그 권능이오.

자신의 생각을 지키고 감독하는 건 중요합니다. 그렇더라도 당신의 사랑과 별개인 권능을 생각에 할당하거나 천국에 이르는 열쇠를 마음에 할당하지는 마시오. 마음은 그 문을 열 수 없소, 마음의 활동은 아무래도 구조가 담을 수밖에 없는 복잡성을 불러오죠. 마음 구조의 서열 안에서 발상은 궤변의 수준으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그런 복잡한 기준들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부합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구요. 반면에 사랑은 단순합니다 영 또한 그렇구요 부디 단순성에 머무르고 복잡한 삶의 함정에 빠지지 마시오"

생각과 마음에 관한 예수의 이런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내 안에서 궁금증 하나가 커져갔다 차분하고 평온하면서도 무엇이든 받아줄 것 같은 그의 얼굴은 내가 하는 어떤 질문도 기꺼이 들어줄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질문을 하기 전에 내 존재 안에서 솟아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역사 이래로 성스런 구조와 성스런 건축물, 성스런 기하학적이란 관념을 다룬 이야기들은 많이 있었다. 나는 단순성의 본질과 관련해서 이런 관념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춰보았다. 우선 나는 구조와 단순성 간의 모순과 구조를 통해 완벽을 구하는 것의 무용성에 대해 생각했다. 반면에 내게는 구조의 영역에 내재된 단순성을 무구하게 인식하고 걸러냈던 사람들에 경탄하는 마음도 있었다.

화가로서 내가 느낀 가장 스릴 있는 순간들 중 일부가 복잡함이 단순함에 굴복하고 그림과 캔버스 위에는 탁월한 광휘를 발하는 구도만이 존재하는 순간들이었다. 특히나 멜로디와 반멜로디의 복잡한 배열 속에서 장엄한 단순 리듬들이 반복되는 거장의 음악들은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해가는 동안 내 가슴은 사랑의 경외스런 단순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사로 차올라, 결국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존재하는 아름다운 대칭과 유형과 조화들은 모두 성스러운 건가요?"

"오직 아버지만이 성스럽소, 물론 자연과 생각과 예술 표현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단순성이 아버지의 성스런 현존을 띄고 있을 수도 있지만요. 완벽에 대한 그 같은 인식으로 감동받고 영감받고 치유받기까지 한다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오. 하지만 그런 유형과 조화들이 자체의 생명력이나 권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고정관념으로 성문화할 경우에는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가 일거에 소멸될 수 있소.

완벽의 순간과 완벽의 발현은 존재의 정상적인 조화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빼고는, 사랑이 대신할 수 없거나 다시 배열할 수 없는 구조란 존재하지 않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적이일어날 수 있으며, 영혼을 위한 자유가 있을 수 있겠소?

사랑이 모든 구조를 재배열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할 때까지는 내가 생선을 어떤 식으로 불렸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요. 뭔가를 몇 배로 불리고자 할 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의 일부나 샘풀을 잡고서 그것을 충분히 사랑해주는 것뿐이오. 당신이 뭔가를 줄때 사랑을 가지고 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오.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은 그 선물을 몇 배로 불릴 수 있소, 아니 어떤 것이라도 불리고 키울 수 있소, 사랑이 충분하면, 하나는 다수가 됩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구조란 게 얼마나 유약하고 방어적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예수가 이어서 말했다.
"만일 구조가 존재의 주인이고 가장이라면, 생선 한 마리는 언제까지나 생선 한 마리로 남아 있을 거요. 그건 그 생선 한 마리가 하나의 분리된 실체를 구현하는 경계와 분자들을 나타내기 때문이요. 구조는 분리를 규정하오! 분리된 상황에서는 구조가 지배합니다. 따라서 구조는 결핍의 주인이요!

하지만 한 마리 생선 안에 들어 있는 그 모든 금강입자들과 그 모든 영들과 그 모든 사랑들을 고려해보시오. 그 잠재력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지 않소? 그것은 어디에도 담아둘 수 없는 것이어서 다수로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추진력뿐이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또 구조화된 현실의 유보적인 성격을 확인시키주는 기적 같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 질서를 필요로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구조들을 신성시하는 것 또한 잘못임을 깨우쳐주곤 한다.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들의 단순성은 모든 구조를 초월한다. 모든 형태에 공통된 그 요소들에는 무한한 가변적 잠재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단순함의 지속성을 생각할 때 내 머리 속에 그려진 이미지는 규칙적으로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두 번째 지복을 암송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마치 첫 번째 멜로디에 뒤이은 새로운 멜로디처럼 들렸다. 사실 첫 번째 축복은 두 번째 축복을 자연스럽게 불러온다. 왜냐하면 오직 한 영, 한 존재, 한 영원성만이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 어떤 실재도 영원히 잃거나 놓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이 구절을 암소하는 예수의 목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예수가 조심스런 어조로 내 생각을 물어본 것으로 봐서 내 얼굴에 약간의 불편한 심정이 드러난 게 틀림없었다. 그 구절을 들으면서 나 자신이 겪은 슬픔들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솔직히 그 구절이 축복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번역을 하면서 용어와 의미가 변질되었기 때문이오. 아람어에서 '애통함'은 슬픔이나 비탄, 아픔, 후회따위를 뜻하는데, 이런 의미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색채, 즉 잃음에 대한 집착을 암시하죠. 하지만 애통해하는 것에는 애통해하는 것의 가치에 집중되는 문맥으로만 표현 가능한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소.

내가 말하려 했던 건 정화하고 놓아버리는 행동이요. 이것은 슬픔과 상실을 내면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죠.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슬픔이란 걸 알고 체험할 때 그는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좌절하고 충격까지 받기에 자신의 내면이 감정적 영적 상처를 겪도록 놔두죠. 이런 게 비탄이오. 하지만 그 과정이 마직막 단계에서 포기로 완결될 때, 그 사람은 애통해합니다. 애통해하는 건 받아들이고 놓아버리면서 저절로 눈물 흘리는 것이오.

이런 상태일 때라야 가슴은 특정 애착을 잃는다. 해도 삶은 계속되리란 걸 감지할 수 있소, 간직할 수 없는 걸 놓아버리는 속에서 그 사람은 치유되는 거죠. 이런 놓아버림을 통해서 그 사람은 축복받습니다. 슬퍼하는 건 잃은 것에 매달리는 것이지만, 애통해하는 건 놓아버리는 것이요. 슬픔이 시작될 때 축복받았다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 역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고요. 하지만 치유는 씻어내고 포기하고 눈물 흘리는 것으로 슬픔을 놓아버리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법이오.

이 과정은 단순히 사랑하던 사람을 잃는 경우만이 아니라 뭔가를 잃는 모든 경우에 해당되죠. 그것이 꿈이나 희망일 수도 있소, 어린 시절이 당신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끼는 경우에도 애통해하는 시간은 지금 내려놓고 있는 사랑을 존중할 수 있게 해주죠 그런 씻어냄은 새로이 다가오는 삶의 단계를 축하할 공간을 열어줍니다. 또 살아오면서 해오던 직업이나 역할이 끝났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들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지나간 것을 놓아버리고 영예롭게 하면서 눈물 흘리는 시간이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에 문을 여는 시간일 수도 있소.

이런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대단한 치유인 데다가 여러 은총을 불러올 수도 있소, 이것은 사랑에 두 측면, 다시 말해 붙잡는 측면과 놓아버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오. 사랑의 이 두 단계 다를 살아보고 이해할 때만 그 존재는 완벽해질 수 있소, 다가서고 연결하고 껴앉는 사랑의 측면은 쉽고 즐겁소, 반면에 놓아버리고 안녕이라고 말하기는 훨씬 어렵지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소, 그렇게 내려놓으면서 당신은 집착을 내려놓고, 다시 온전해지는 것이요. 말하자면 그렇게 해서 당신은 축복 받는 거요"

깊고 울리는 음성으로 예수는 다음 번 성경구절로 옮아갔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나는 거의 당혹스러움까지 느끼면서 이 또한 내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구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축복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건 주로 온유함이 지닌 순종적인 색채 때문이었다. 겸손함이 위대한 덕복의 하나인 데 반해. '온유함'이란 개념은 특히나 인간의 상대적 가치와 관련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나로서는 온유함과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을 자격을 연관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우리가 순종하면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여기에도 번역상의 문제가 있는 건가요?"


예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번역을 더 분명하게 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요. 아람어에서 온유하다는 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요. 그 말이 보잘 것 없고 불쌍하고 순종적이고 나서지 않는다는 걸 뜻할 수도 있소, 하지만 내가 말했던 건 이런 의미가 전혀 아니었소, 내가 의도했던 의미와 가장 가까운 용어를 영어에서 찾는다면 그건 중용moderation일 거요.

따라서 그 구절은 '중용을 지키며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읽혀져야 합니다. 중용은 신의 경제학이고 은혜의 경제학이요! 중용을 지키며 사는 데 어떻게 균형을 잃을 수 있겠소? 또 균형 있게 사는데 어떻게 온전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당신이 온전할 때,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지 않을 수 있겠소?

중용은 평정과 균형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내는 상대적인 개념이오. 그건 평등이니 제한이니 하는 것으로 강요될 수 없소. 책임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의 중용은 책임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 사람의 중용보다 더 많은 것을 공급받아야 하지요. 중용은 제한하고 순종하라는 일깨움이 아니라 인간은 균형 잡혀 있을 때 더 완벽하다는 순리를 일깨우는 거요. 한 인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는 그가 무엇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좌우되오! 사랑의 지휘 하에서 중용을 지킨다면 필요한 모든 것이 저절로 제공될 거요"

예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중용의 실천을 또 다른 판단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중용인 수준이 다른 사람에게는 과도한 것일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불충분한 것일 수 있소, 또 댄스의 스템들 사이에서 회복되는 균형에 비유할 수 있는 중용의 역동적 측면도 있고요. 중용은 균형이지만, 수동적으로 지탱하는 것에 자신을 소진하는 정태적인 내부 균형이 아니오. 중용에는 번 것을 보존하고 남들과 나누는 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특정의 진보적 성과가 있소, 중용의 진실된 느낌은 '안녕'이오

모든 것에서 중용을 구하시오. 먹는 음식이나 물질적 안락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욕구나 습관, 작업에서도 부디 중용을 지키시오. 이 땅에 천국이 이루어질 때, 중용이 그 경제의 기준이 될 것이오. 그때가 되면 누구는 재물을 쌓아두고 누구는 굶주리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요. 당신들이 나누는 모든 것이 자신이 받는 것의 토대가 되리란 걸 알면 나눔은 기쁨일 테니까요"

보다시피 이 축복들에는 멋진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서, 각각의 축복은 그 앞 축복의 자연스런 결과로서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삶의 필요가 어떤 식으로 공급되는지 알면, 지니고 있을 수 없는 것을 자발적으로 놓아버리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 말이다. 뭔가를 기꺼이 놓아버릴 수 있을 때, 쌓아둠은 집착이 되기를 그친다. 집착이 그치면 모두를 위해 충분히 있게 되고 말이다.



예수가 말한 대로 행해보고 싶었던 나는 다음날, 옷장을 뒤져서 내게 소용없거나 내 외모와 어울리지 않아 입지 않고 걸어둔 꽤 괜찮은 옷 몇 벌을 찾아냈다. 그 옷들을 마음에 들어할 친구들을 생각하자 나는 소유에 따르는 책임감이 어떤 건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옷들의 진짜 주인이 될 사람들을 과연 찾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막상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보니 시혜(施惠:은혜를 베풂, 또는 그 은혜)적인 태도나 오만함 없이 대단히 편안한 마음으로 줄 수가 있었다. 나는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내 생각에 너한데 꼭 어울릴 것 같은 옷이 내 옷장에 걸려 있거든 아마 그 옷을 살 때 너를 생각했나봐" 나는 책과 장식품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했다.



이런 식으로 책장과 옷장을 흝어보는 동안나는 소유의 타당성이란 원리를 따르는 것으로 나눔에 대한 내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준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친구들도 내게 선물을 주곤 했는데, 그 선물들이 정말로 나한테 필요하고 딱 맞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설명은 더 나아갔다.

"당신은 돈을 소유할 수도 있소. 물론 돈이 당신의 참된 소유권을 확정해줄 수는 없지만요. 어떤 것이 참으로 당신 소유인가는 당신의 가슴이 무엇을 끌어당기고 당신의 사랑은 무엇을 지휘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오. 당신의 삶에 성취와 양분을 가져다줄 수 있는 건 당신 가슴이란 자산뿐이오. 중용을 실천하게 되면 이것을 알수 있소. 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음식이 뭔지 알고 반찬거리들을 살 수도 있게 될 거요. 그리고 잠재의식상의 허기를 보상하기 위해 과도하게 먹지도 않게 될 거구요.



인류는 모든 걸 과도하게 하는 것으로 자신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게 무엇이고 어느 정도 소유하는 것이 알맞는지에 대한 감각을 크게 손상시키고 말았소, 그 같은 지나침은 물건이나 물질 쾌락을 과도하게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아서, 인류는 일도 너무 과하게 하고 부정도 너무 과하게 하고, 고통도 너무 과하게 받고, 처벌도 너무 과하게 하고, 슬픔도 너무 과하게 겪고, 지배도 너무 과하게 하고 있소, 희생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란 약간 잘못된 전제 하에서 실패와 빈곤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요. 부정이 너무 과하다는 건 이런 사람들을 말하는 거요.



어떤 것이라도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소, 모든 추구와 모든 순환에는 균형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있소. 온전함과 성취와 축복은 균형 속에 있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오.



이 축복은 성스런 가슴과 직접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말할 때, 그의 가슴의 기본 순결과 무구함이 일깨워질 테니 말이요"


예수는 우리의 무구함과 선함의 내적 중심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가슴이란 사실을 여러번 내게 상기시켰다. 우리가 자신이 사랑이 될 수 있는 게 가슴의 권능을 매개로 해서이다. 이것은 그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진 한 사례로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내 컵은 날마다 흘러넘쳤다. 그가 하는 한마디 말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의 의(義)와 정(正) 을 맛보고 있었기에,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언제나 배불렀다. 의는 이 세상에서 배우기 힘든 주제다. 왜냐하면 세상에 순수한 의는 거의 없고 정을 둘러싼 거짓된 다툼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축복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란 무엇인가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의란 자신인 사랑으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건 당신이 자신과 아버지와 한 영과의 관계에서 올바름을 뜻합니다. 그냥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있으시오. 이건 가슴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발견되고 발달됩니다.

가슴은 몸과 영혼을 위해 생명에너지를 발생시키고, 당신 삶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끌어다주는 강력한 자석이오. 가슴안의 성스런 방에서 당신은 창조주의 현존을 느낄 것이고, 그의 의로 세례될 것이오. 이 성스런 교감을 통해 고귀한 지성의 원리가 당신에게 드러날 것이고, 그 원리들을 통해 당신의 삶에 정이 다가올 것이오"

고귀한 지성의 원리들에 대해서는 6장에서 깊이 있게 다른 바 있다. 하지만 삶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관점에서 여기서 다시 한번 그 원리들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원리들이란 합일과 사랑, 삶, 공경, 정직, 정의, 친절이다. 합일은 모든 사랑이 펼쳐지는 정의 토대다. 그리고 사랑에 고무될 때, 우리는 지휘권을 받고,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고귀한 앎으로 채워진다. 삶은 지성의 세 번째 제공자이다. 삶은 삶을 낳고 삶을 끌어들인다. 삶에 직면할 때 우리는 그것의 내재된 진실을 볼 수 있다. 나아가 공경할 때에만 배울 수 있다 우리가 남들의 정당성과 선과 사랑만이 아니라 삶의 정당성과 아름다움을 드높이는 건 공경을 통해서이다. 무구한 인식이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대답은 우리 면전에 있다 .이것을 알 때 정직의 원리가 권능을 갖게 된다. 그러고 나면 만물의 균형에서, 또 모든 행동이 균형 잡힐 필요성에서 느끼는 정의가 그 뒤를 잇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의 의지인 친절이 있다. 친절보다 더 위대한 정은 있을 수 없다.



예수의 설명은 다시 그 다음 성경구절로 이어졌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자비를 베푸는 자, 자비를 받는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 예수는 이외에도 한 가지 이유를 더 주었다. 오직 가슴만이 용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따라서 당신의 삶에서 날마다 용서를 실천할 때 가슴에게는 걸출함이 주어질 것이다.


"날마다 용서를 실천하시오. 용서는 영혼이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이것 외에도 용서는 마음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란 면이 있소. 마음의 유일한 의도는 회계장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인 터라. 도덕성의 문제에서도 마음은 수지만을 맞추고 싶어하죠.

그러니 설령 사소한 문제들이라도 날마다 용서를 실천하시오. 이건 마음을 길들이고 가슴을 권능있게 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오. 자비는 단순히 원인과 결과를 균형잡기 위한 벙법이 아니요.

비록 이것이 자비를 실천할 한 이유인 건 분명하지만,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자비를 베풀 때마다 당신 자신이 성장한다는 데 있소, 당신이 자랄수록 당신은 더 많이 축복받을 것이고, 당신을 해치거나 당신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들의 힘은 약화될 것이오. 자비는 성장의 꽃이요. 자비를 제한하는 사람은 살면서 제한된 영향력밖에 가질 수가 없소.

마음이 순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이건 여섯 번째 축복이다.

"아버지는 성스런 가슴의 중심에서는 당신이 그냥 완벽할 뿐이란 걸 압니다. 아버지는 죄가 뭔지 모르시니, 죄란 행위 자체가 당신을 아버지에게서 떼어놓는 게 이 때문이요. 가슴의 순결 속에서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좀더 쉽게 우리 가슴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나요" 내가 물었다.

"그건 당신이 자신을 순수하고 완벽하고 무구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오. 자신을 이런 식으로 볼 때라야 가슴의 성스런 방으로 들어갈 수 있소, 당신이 자신의 온갖 무가치와 실수들을 가슴속에 함께 가지고 들어가는 한, 당신은 가슴의 문간에 머물 뿐이지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소.



내 사도들은 내게 몇 번이나 기도하는 법에 대해 묻곤 했죠. 용어와공식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오. 가슴속에 있는 것이 기도라는게 내 한결같은 대답이었지만, 결국 나는 그들에게 가슴의 문을 열어줄 기도문을 주었소, 내가 준 기도문대로 기도하면, 누구라도 자신의 순수성과 무구함을 되찾을 수 있소, 그 기도문은 가슴에게 하는 기원이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그 기도문을 옲고 잠시 동안 고요와 평화와 무구함 속에 머물도록 하시오.



그 성스런 방에서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이니, 그하나됨 속에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는 당신의 근원은 오로지 완벽만을 보죠 성스런 가슴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자신의 삶을 복구하고 있는 것이고, 자신을 다시 온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요.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는데, 어떻게 신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소?



무구한 인식을 통해 당신은 모든 존재들 안에서 신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소, 이것이 바로 순수한 인식이요. 이것을 실천할 때, 당신은 삶과의 관계에서 평화로울 수 있고 당신 앞에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소, 모든 것이 무구함으로 창조되었소, 신의 얼굴을 보려면, 이 점을 볼 수 있어야 하오.



현실을 창조하는 건 마음의 관할이 아니오. 그보다는 현실을 관찰하고 통합하고 이해하고 보완하는 것이 마음의 역할이요. 반면에 가슴의 역할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순수한 가슴이라면 조건 없이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비록 이해하길 구한다 하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꾸며내거나, 심지어 판단을 내리기까지 하죠. 이건 위험한 현상이오. 왜냐하면 마음은 당신 자신인 거과 당신 삶의 참된 목적에서 당신을 떼어놓는 현실을 꾸며낼 테니까요. 존재는 꾸며냄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냥 있을 뿐이란 사실을 수긍할 때라야 당신은 진실로 신의 얼굴을 들여다볼 문간에 설 수 있소.



판단은 이 성스런 공간에서 당신을 떼어내죠. 사실 판단이야말로 순수하고 완벽한 신의 자녀가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죄요. 판단은 그만큼 원죄인지라. 계속해서 판단내리고자 한다면, 당신은 아버지의 현존을 경험할 수 없소"


예수가 판단에 대해 쥐하는 그 태도의 심각성을 느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판단이 무구함을 훼손하는 것이고 아버지가 모든 무구함의 근원이라면, 왜 성경에는 아버지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그렇게 많은 건가요?"


"판단을 뜨하는 히브리어 '미쉬펫mishpat'은 구제와 입증을 뜻하지. 의견이나 비난을 뜻하지 않소. 인간은 그 참된 잠재력에서 무구하고 선합니다. 이 점을 아버지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더 확실하게 장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면 당신은 아버지와 맞서는 것이요. 어떤 상황에서나 자신의 자녀들을 이해하고 방어하는 이가 아버지요. 거짓된 자아나 불공평한 세상이 저지르는 온갖 반칙에도요.



아버지는 그 차이를 알고 당신들의 기본적 정당성을 다시 찾아내죠. 용의자의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는 무죄로 본다는 미국 사법제도의 초석이 된 것이 고대 히브리어에서 판단이란 용어의 의미요 이처럼 어떤 고발이든 그 타당성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피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사람이 판사인데, 아버지의 입장이 바로 이러하오. 다만 훨씬 더 큰 명확성과 순수성과 용서를 가지고요.



죄의식과 무가치함을 북돋우고, 자신의 파괴적인 일정을 지원하기 위해 비난과 처벌의 권력을 휘두르는 건 세상이지, 아버지가 아니요. 사실 신의 자녀들이 고발의 무익함을 깨닫기만 해도 무구한 인식으로 형제애가 꽃을 피울 거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파괴적인 행동을 제재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가해자를 규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형제애가 유지될 수 있겠소?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형제애를 나누거나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애를 되찾을 작정으로 정의로운 행동들이 취해져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오.


나는 제자들에게 판단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뭔지를 설명할 때 양이나 물고기를 자주 그 비유로 사용하곤 했소, 비슷하게 떼를 이루고 사는 물고기와 양은 새로운 구성원을 무리 속에 받아들일 때, 어떤 자격조건이나 유보조건을 달지 않소, 이들에게는 한 영의 무구함만이 존재합니다. 나는 여섯 마리양이 물밭이나 시장으로 가던 새로운 무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천 마리로까지 불어나는 것을 본 적도 있소. 그들은 어떤 한 마리도 거부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였소."


나는 예수가 물고기와 양을 비유로 든 이유를 알게 되어 무척 기뻤다. 왜냐하면 그런 비유 속에 내표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인 순종성과 평범성, 의존성이 나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도감을 알아챈 듯 예수가 덧붙였다.


"내가 말하려던 건, 인간은 서로 돕고 화합하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였소,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을 희생하거나 당파적인 획일성을 요구해서는 안 되지요"

예수는 무구한 인식이 어떻게 판단에 따라 삶을 교정하려는 모든 경향을 무력화하는지를 일상에서 보여주곤 했다. 그의 현존 속에 있을 때 나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건 내가 곤란을 겪거나 이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같은 표현의 자유 또한 무구한 인식의 한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정의 선입견과 판단에 우리의 생명력을 맞추려는 끝없는 시도가 그것을 얼마나 고갈 시키는지 알고 있다. 예수는 말했다.


"대부분의 갈등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삶과 실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부정하는 데서 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



살면서 화평케 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소, 화평케 하자고 굳이 외교관이나 협상가나 상담가나 대리인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오. 또 이 축복이 논란이나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오. 이 축복의 권능은 이분법을 끝내는 결단에서 나옵니다.



이분법을 끝낼 때, 당신은 온전함으로 축복받을 것이고, 삶이란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일 수밖에 없다는 관점을 넘어설 것이요. 지금 시기에 인류가 인정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삶에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것요. 우리는 이런 인정을 통해 영과의 일체성을 확인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소."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직장이나 집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 이상으로 더크고 포괄적인 영향을 뜻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를 심란케 하는 문제들에 신경을 쓰고 그 때문에 자주 잠까지 설치지만, 그럼에도 그런 문제들 대부분은 갈등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전형은 자기 스스로 문제를 설정해 놓고는, 그 같은 문제를 사용해서 '얼마나 멋진가!우리가 그걸 해결했어!'라고 선언한다는 거요. 어떤 문제를 만들어 냈다는 건 당연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에게 있다는 뜻이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문제가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했을까? 라고 묻는 편이 낫지 않겠소?"


예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뒤아래, 안/밖, 앞/뒤, 행복/슬픔처럼 서로 명백하게 대립되는 것들로 조건지워지는 우리의 상황을 떠올렸다.


"우리는 밤과 낮이 존재하는 행성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요?"

예수가 즐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맞소, 그럴 수 있소, 단지 당신들은 그런 한정된 관찰에만 집중할지, 아니면 그 너머의 좀더 완벽한 이해를 구할지 선택할 권리가 있소, 그런 넓혀진 인식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소, 성층권을 돌고 있는 인공위성 중의 하나에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시오. 이제 지구를 돌아보고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보시오. "


"음 여기서 보면 지구 천체가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비치는 모습이 보여요. 둥근 원의 가장자리 쪽으로는 약간 그늘이 지고요. 하지만 빛과 어둠이 반반씩인 건 아니고요. 거의 어디에나 어둠보다는 빛이 많다고 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게 핵심이오. 어둠과 빛은 절대 대립물이 아니오. 그것은 광원에 노출되는 다양한 정도를 나타낼 뿐이오. 이건 이분법이 아니오. 이분법이라는 개념모델은 마음이 구조의 대칭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간단한 준거들에 지니지 않소. 마음은 이해하기보다 설명하고자 하니까요.

앞으로도 낮과 밤은 계속해서 존재할 거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그것들을 대립으로 볼 필요가 없소. 밤이 낮과 똑같은 권능을 갖는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요. 존재하는 건 빛의 권능뿐이오 다양한 강도를 가지고 이따금씩 이분법은 사라지죠. 고귀한 지성은 당신더러 한 영을 다시 인정하게 해주는 온전성에 대한 통합된 인식을 통해 발현됩니다. 신의 자녀라면 삶을 설명하거나 이분법적 개념들로 삶을 조작하지 않고, 만물 속에서 온전성을 인식하고자 할 것이오"


나는 궁금했다. "우리가 어쩌다 그런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에 갇혔을까요?"


"인간이 자라고 살아온 지구 또한 인간처럼 자라고 자신을 조직해왔소, 삶을 좁은 시야로 접근하면 좁게밖에 이해할 수 없소, 하지만 당신들의 시야를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제야한 건 인류가 에너지를 인식하고 발생기키고 조절해온 방식이오. 에너지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이서, 그것을 어떤 식으로 운용하는가가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요. 막대기 두 개를 마찰하면 불씨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인류는 마찰이 만들어낸 에너지에 근거한 문화들을 세워왔소, 핵발전 역시 이것에 예외가 아니요. 그 '막대기들'이 좀더 복잡해지긴 했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도 길항(拮抗)적인 마찰발생 과정인 건 변함이 없소"

"이런 상황이 과연 변하기는 할까요?"

"그렇고, 과학은 그 성과가 원초적 자력의 원리에 근거하는 새로운 에너지 시대의 초입에 서 있소, 자력은 그 사람의 이해수준에 따라 파생물로 보일 수도 있고, 원초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소, 자력을 원초적인 것으로 볼 경우, 극성이나 희소성은 존재 할 여지가 없게 되죠. 에너지가 싸워 얻거나 비축할 상품이 아닌 문명을 한번 상상해보시오. 이것이 모든 걸 바꾸리라는 게 이해가 되오?"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기노라니 평온함이 내 온몸을 적셨다. 잠시후 이 침묵을 깨고 예수가 마지막 축복을 옮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그들의 것이다. 이 축복에는 굉장한 교훈이 담겨 있소. 하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땅을 위해서도요. 이건 누구나 가장 깨닫기 어려운 교훈이지만, 일단 깨닫고 나면 누구라도 고난의 폭정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경험할 수 있소. 이것이 마지막 축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

나는 예수의 이런 장담을 듣게 되어 기뻤다. 왜냐하면 솔직히 이지복은 언제나 나를 좀 겁먹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강한 자신감에 마음이 편해지긴 했지만, 내가 보일 수 있었던 반응은 불안감을 드러내면서 확실히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듣고 싶었다.


"이 축복의 권능은 아버지가 만물의 창조주이고, 그는 만물과 더불어, 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거합니다. 신이 없는 곳은 없고, 신이 있지 않은 체험은 없소, 또 신이 있지 않은 이해수준이나 자각수준이란 건 없소. 행복한 상태에서만 신을 아는 사람은 창조주의 가장 작은 부분만을 아는 것에 불과하오. 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신에게 조건을 설정해야 하는 사람은 신을 받아들일 수 없소. 풍요로운 지복의 체험속에서만 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삶의 나머지 부분들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소.

하지만 하늘왕국이란 게 만물의 온전함을 배고 달리 무엇이겠소? 당신이 신의 일부만을 알고자 하는데 어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겠소? 욥기에서 말하는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오. 물론 그것의 진짜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요"

"사실 제가 그런 삶들 중 한 명이에요. 전 욥기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한번도 욥기를 읽은 적이 없다. 나는 욥기를 불쌍한 한 영혼이 지상에서 겪은 참담한 악몽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게는 욥기가 예수가 신약에서 말했던 사랑의 신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내 편향된 믿음은 욥의 고통스런 체험을 소화해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다독이는 어조로 예수가 물었다.
"그걸 나와 함께 다시 한번 읽어 보지 않겠소?"

나는 기꺼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런다음, 우리는 나란히 앉아 욥기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예수가 행을 따라 읽어가는 동안, 나는 그속에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놀랐다. 구약성경 중 한 권인 이 책에는 우주의 경이로움과 신의 전권성, 무한의 광대함과 존재 전체의 전능한 권능에 대한 절묘한 구절들이 들어 있었다.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욥은 건강과 가족과 땅과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면에서 축복받은 거부였다. 그는 안식일을 지겼고, 하나님을 공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이유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이 시험에 들게 되었다. 욥이 신의 축복으로 누리는 물질 풍요에 감사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과영 '극단적으로 힘겨운 상황에서도 그가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지"가 문제였다 예전에 내가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 이 때문이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가 다시 거둬가는 변덕스럽고 잔혹한 신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욥기가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완전히이해할 채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야기에는 그 사건의 전개가 피상적으로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건, 하나님은 욥이 모든 것을 가질 준비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의 협소한 집착과 의존을 거둬들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부와 안락속에서의 욥은 신의 일부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욥은 자신의 '거품'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창조주와 더 발전된 관계를 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이 같은 운면의 급변을 예상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어겼을지도 모르는 모든 죄를 신이 용서해주기를 바라면서 속죄와 고해의 기도를 했다.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시닝 겪는 그 온갖 고난 속에 뭔가 교훈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도 상황은 계속 나빠져갔다. 그는 친구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완전히 실의에 빠진 욥은 우주의 전능함과 아름다움과 광할함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형언할 수 없는 경외심에 사로잡힌 요의 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장엄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숭고한 깨달음을 통해 그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그가 판단을 그만두자 그 끔찍한 상황도 끝이 났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받아들인 순간, 그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다!

"영어로 박해는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처벌을 뜻합니다 하지만 아람어에서는 '고난'을 뜻하는 전형적인 용어가 박해요.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을 절대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 않소, 비록 그들이 존재의 충만함을 알았으면 하는 게 아버지의 가장 큰 갈망이긴 하지만요.

누군가가 자신의 보호막 너머로 성장하여 더 위대한 방식으로 신의 사랑을 체험하려면 도전과 고난을 딛고 올라서야 합니다. 어떤 관계에서나 주도적인 쪽은 조건들을 그 작용 방식에 따라 만들어 내는 쪽이기 마련이오. 따라서 그 사람이 성스런 근원으로 하여금 삶의 조건들을 확장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한, 진실로 성스런 관계란 있을 수 없소.

또 이 지복에는 환상의 소멸과 관련된 부차적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이 부차적인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옳은 일을 한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란 걸 깨달아야 하오. 당신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자신인 사랑을 붙잡고 표현하면서 굳건하게 설 때마다. 당신은 환상이 스러짐을 볼 거요. 자신인 사랑으로 있음으로써, 고난을 극복할 권능을 갖게 되니까요"


예수는 몇 번이나 "사랑이 내면에서 나오는 권능임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적들을 사랑하시오"라고 말했다.


대립 상황이 있을 뿐이지, 영원한 적이란 당연히 없지 않겠는가. 모든 삶에는 나름의 시험이 있기 마련이니,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겪을 때는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으로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특별한 존재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의해 외적으로 지배되거나 통제될 수 없음을 확인한다.


"당신이 진실로 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적이 존재할 때뿐이오. 논리적으로는 당신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그 모든 외부 조건들을 넘어서서 그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오직 그럴때만, 당신은 자신이 사랑의 더 깊은 우물을 발견할 수 있소, 시편23장에 보면 다윗왕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차리고 잔이 넘칠 때까지 그 잔을 채워주길 주게 청하고 있소, 그의 잔을 가득 채웠던 건 사랑이오. 다윗왕은 사랑의 권능을 통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사랑을 가질 때, 당신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권능을 가질 수 있소, 당신이 진실로 이것을 알려면 먼저 적대성을 극복하는 외에는 달리 길이 없소 그러기에 이 마직막 지복은 가장 큰 축복이요. 왜냐하면 이것을 알 때, 당신은 당신을 압도하고 당신의 삶을 오도하는 환상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