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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 8장 다리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 8장 다리들

柏道 2022. 2. 11. 05:41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8장 다리들

사랑
2021. 10. 5.
"당신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사랑을 다시 찾아낼 최단 거리의 다리를 건너고자 한다면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요"

다리란 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 때로는 한 이해 차원에서 다른 이해 차원을 연결하거나 옮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공학이나 생각, 권능이 이루어내는 업적이다.



여러 생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다리들을 지나간다. 이 다리들은 강을 가로지르는 구조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의미를 전달하는 생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사실 이해를 확인해주는 표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수에 따르면 사랑 자체보다 더 연결력이 강한 다리는 없다고 한다.

예수는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멋진 방식으로 내 가슴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다. (어린 양과 사자)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양으로 가득한 그 목초지를 보니 그들이 그 골짜기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특히나 두드러졌다. 그 그림에는 내 가슴을 사로잡는 인상적인 면이 있어서 시편 23편의 광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그 광경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예수는 그 찬송가의 구절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가 각 구절의 주어 자리에 사랑을 놓았다는 한 가지만 달랐을 뿐.....



"사랑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랑이 나를 푸른 초원에 누이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도다



사랑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네



내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나와 함께 함이라



사랑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랑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고



내 잔이 넘치게 하는구나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사랑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



예수는 신이 사랑이고, 우리가 체험하는 것 모두가 그 본질에서 이런저런 형태의 사랑임을 내게 즐겨 깨우쳐주곤 했다. 우리 삶에서 신이 존재를 인지하게 해주는 궁극의 다리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이런 가르침에 새로운 요소를 보탰다



"당신 삶은 먼저 사랑에 의해 결정되고, 그런 다음 당신의 생각과 행동이 삶의 방향을 잡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하는 생각과 행동의 성격에 따라, 당신의 사랑은 강해지거나, 혹은 줄어들거나 변형되거나 오해되거나 뒤집히기까지 하죠"



예수는 내가 사랑의 권능과 성스런 가슴의 고귀한 지성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확신할 때까지는 개념화나 아이디어, 사고 과정등에 대해서 말하기를 삼갔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도 나는 되도록 그의 설명방식을 따르고자 해왔다. 예수는 말했다.



"마음은 전적으로 파생물이고 일차적인 어떤 에너지나 권능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리 좋은 출발점이 못 되오. 근본 본질을 찾는 데 있어 마음은 아무런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내가 정신 작용과 고귀한 지성 간의 차이를 분별한다고 느낀 뒤에야 사고 영역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학 강사로서 내가장 큰 과제와 만족은 학생들이 좀더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생각하도록 돕는 데 있다. 사고가 우리 본성의 결정적 부분이고, 지혜롭고 중심 잡힌 삶의 강력한 측면임을 분명하다. 따라서 일단 예수가 사고라는 주제를 논의하는 데 적극성을 띠자, 사고가 지성과 능력의 스펙트럼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를 이해하려는 대 호기심도 만개했다.



"생각이 시작되는 시점은 단순한 자각에서요. 자각이 최초 요소인 거죠. 자각은 아버지와 한 영과 모든 무한 입자들의 것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각합니다. 한 원자 안의 미립자들과 아미립자들의 교환 유형들이 얼마나 정확하고 예견 가능한지만 생각해보시오. 어떤 앎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까요? 장미는 무슨 수로 자기가 봉오리를 터트릴 때를 알까요? 새는 어떻게 계절에 따라 이주할 곳을 알까요? 또 산양 무리는 무슨 수로 물이 있는 곳을 알고, 해마다 캐나다에서 멕시코시티로 가는 모나크 나비는 그길을 어떻게 알까요?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각합니다 자각은 지성이 시작하는 지점이요.



하지만 그냥 자각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당신들이 말하는 의식이 창조되는 것도 아니요. 개념과 발상과 생각은 자각을 완료하고 안정시키거나, 아니면 그렇게 할 전망을 지닌 자각의 결정화입니다 일련의 쓸모 있는 개연성들에서 생각이 시작되는 거죠"



"그 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구석기 시대의 무리들 중에서 사냥에 나선 집단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사냥꾼들이 많은 수확을 올린 원정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은 본능과 경험과 필요요. 날씨가 예기치 않게나빠지는데 아직 돌아갈 길이 멀다면 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고기를 구워먹고 임시 은신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수확물을 잃고 말 테니까요.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장소를 찾는 중에, 무리들 중 한 명이 그런 작업을 하기에 딱 좋은 크고 평평한 바위를 발견합니다 그 상황에서 그 바위의 유용성은 일시적인 편리성과 기억에 남을 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 바위를 기억하고, 다음 원정 때에도 그 바위를 찾아내기로 계획하죠. 그런 식으로 계절이 몇 번 지나면 그 바위는 이제 의례적으로 묵어가는 곳이 됩니다.



다시 여러 해가 지나 기후변화와 사냥감의 이동 때문에 사냥꾼들은 비슷한 바위가 전혀 없는 다른 방향으로 사냥을 가게 됩니다. 그러다 한번은 숲속에 야영지를 세우는데. 거기서 갈라진 큰 통나무를 발견한 한 사람이 연결을 시킵니다. 다시 말해 평평한 바위를 떠올리면서 어떤 발상을 내는 거죠. 그는 다른 나무들도 몇 개 세로로 갈라서 바위처럼 평평한 표면이 되도록 나란히 놓자고 제안합니다. 이제 생각이 있게 된 거요! 이 마지막 행동은 바위의 기능과 연결한 것이 곧바로 탁자를 창조해내는 진전을 이루어냈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해서 탁자가 생기고 나면, 더 많은 생각들이 보다시피 탁자는 집중된 자각과 연상적인 연결을 통해서 '창조되었소' 여기서 필수적인 연결고리, 즉 창조로 가는 다리가 생각이오. 기능성의 지점으로까지 결정화되고, 그 후로는 그 부족의 삶에서 실용적인 물품일 뿐 아니라 정신의 배양기가 되는 거죠"









예수는 상징의 발달이 의식적 연결이라는 대단히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고대인들은 누구나 점성가들이었습니다. 이런 관찰로부터 위치와 방향 둘 다를 나타내는 원시적인 지도들이 그려졌죠. 그런 지도들은 처음에는 연상과 연결의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배열된 별이나 땅 모양의 그림 문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산봉우리와 별, 강, 사냥터, 야영지, 의식을 거행하는 지역등에 대한 이런 단순한 관찰과 연상이 그림문자의 발달을 불러왔죠. 그렇다면 그런 자극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인류에게 강하게 내재돼 있는 연결의 욕구에서요. 이것은 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없적을 이루게 만드는 욕구이기도 하죠. 이 욕구 속에는 타고난 자리에 책임 요소를 더함으로써 그것을 통합된 의식으로 바꾸는 방식을 이용해, 체험과 느낌과 반응과 열망을 연결시키려는 원초적인 추구도 들어 있소, 의식은 개인 차원에서도 집단 차원에서도 발달됩니다. 의식이란 유용한 연결관계 설정이 가져다주는 직접적인 결과니까요. 사랑은 합일하려는 욕구를 점화시키고, 생각은 연결을 이룸으로써 이 욕구를 현실화하죠.



역사는 그런 실현들로 가득합니다 .고대 시기에는 무거운 물건들을 둥근 통나무 위에 얹어서 운반했지만, 어느 날 누군가가 그것을 연결해냄으로써 바퀴와 굴대를 '발명해낸'것만 해도 그렇소 사실 그 무거운 통나무들을 통째로 움직여야 하는 건 불필요한 고역이었지요. 커다란 나무 원반 두 개를 막대 하나에 꿰고, 그 막대로 방향을 자유자재로 틀어 굴리는 경우와 비교하면요. 자각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처음에는 의식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생각과 개념과 발상이 발전해갑니다 여기서 일차 조건은 자각이고, 생각은 연결고리요"









예수는 인류가 단순한 자각에서 의식의 발전으로 거기서 다시 평평한 바위 표면 대신 갈라진 통나무를 쓸 수 있다거나 구르는 통나무 대신 큰 원반과 굴대를 사용하면 더 효과적이라는 깨우침처럼 돌연히 명확한 개념적 깨우침으로 가는 긴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해왔다고 설명했다.









"생각은 의식과 체험과, 사회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까지 모든 양태의 관계 안에 든 연결고리요. '사려깊음'이 없다면 인간관계는 특성이나 의미를 거의 갖지 못할 거요. 당신이 생각할 때 당신은 연결하는 것이고, 당신이 연결할 때 당신은 생각하는 것이오!



일단 연결이 이루어지면, 방향, 즉 순서도 있게 됩니다 생각이 자신의 의미를 손에 넣는 지점이 여기요. 왜냐하면 삶에 그것을 적용하면서 생각은 방향성, 즉 존재 이유를 지니게 되니가요. 생각은 삶이라는 활시위에 걸려 있다가 사랑의 힘으로 날아가는 화살과 같소, 생각에는 벡터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백터란 게 무슨 뜻이죠?"









"벡터란 둘 이상 되는 요소를 배치했을 때 나오는 방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눈군가에게 지금 사는 곳에서 40마일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 당신은 여러 장소를 지칭하는 셈이되죠. 하지만 당신이 내 교향은 20번 고속도로의 서쪽으로 여기서 49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구체화하면, 그 고향마을은 지도 위의 한 점으로 정확히 표시될 수 있소"









"물질 영역에서 벡터가 방향을 결정짓는 방식은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이해 못하는 건 생각이 어떻게 벡터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당신이 꽃 한 다발을 사게 되는 간단한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그 꽃을 한 번 보고 충동으로 아무 생각 없이 쌋을 수도 있고, 그 꽃을 거실 장식용으로 쓰거나, 친구에게 주거나, 아니면 그림 구도를 잡기 위한 소품으로 쓸 생각에 샀을 수도 있소. 개념 자체만으로는 집중된 자각에 다름 아니오. 반면에 생가가에는 자각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잡는 것이 포함되죠. 생각에 힘이 적용되는 건 당신이 그것에 설정하는 방향을 매개로 해서요. 당신이 발상을 적용하고, 그것을 삶이라는 건축물을 위해 계속해서 연결을 이루는 데 사용하지 않는 한, 발상은 별반 가치가 없소"









이어서 예수는 벡터가 방위나 의도를 구성하는 둘 이상의 지점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개념이 정서적인 삶에 무한한 중요성을 갖는 건 모든 벡터를 창조하는 첫 번째 지점이 언제나 사랑이기 때문이오. 사랑은 만물의 시작이자 당신의 모든 생각들 뒤에 깔린 근본 권능이오. 두번재 지점은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사랑을 향하게 하는 방식이오. 당신이 사랑을 삶에 적용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고, 사랑을 가지고 하는 일은 무엇이오? 삶이라는 융단 제체가 당신의 사랑과 그 융단을 넓히기 위해 당신이 사용한 벡터로 짜여 있소



문제가 생기는 건 당신의 생각이 바깥으로 뻗어나가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고, 마음이 당신의 사랑을 통제하거나 줄이거나 속이기 위해 생각을 사용할 때요. 마음은 생각이 자기 것이 될 때까지 생각을 통제하려고 하죠. 그런 다음에는 생각들이 되돌아가 당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고요. 생각의 힘을 시각화해서 말할 때 가장 효과적인 비유가 활과 화살의 비유입니다. 생각은 사랑이라는 활 시위로 당겨졌다가 그 사수에게서 멀리 날아가는 화살 같을 때 가장 잘 작동합니다.



생각이 어떤 식으로 사랑의 권능을 훼손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실제 생활에서 보여주는 한 예가 있소. 개를 싫어가는 우편배달부 한 사람이 있었더랬소. 당연히 그는 개들의 적의를 끌어당겼고 덕분에 자주 공격을 당하곤 했지요. 아무리 조심하고 온갖 보호장비를 동원해 무장해도 그 문제는 그의 업무에서 항상적인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했소. 그래서 그는 더 나은 '마음자세'를 가질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마인드컨트롤 세미나에 등록했소, 그렇게 하면 기존의 문제 유형을 방향 전환하거나 적어도 좀더 나은 방어책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여긴 거죠



그렇게 해서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일상적인 걱정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식으로 그 사람과 그 문제 사이에 좀더 두꺼운 합판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소. 마음은 그 사람의 삶을 바꿀 아무런 권능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소. 이 특권적인 권능은 오직 가슴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자네를 공격했던 개들을 용서해주게'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진리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발견했소, 그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던가를 깨달은 순간, 예기치 못했던 슬픔이 갑자기 터져나오면서 그 우편배달원의 마음이 눈녹듯 녹아내린 것이오.



아이 때 그의 가장 큰 소원은 강아지를 갖는 것이었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집은 아파트인 데다가 식구가 많아서 사람이 쓸공간조차도 넉넉지 않았소. 크리스마스 대마다 아이는 산타에게 강아지를 부탁했지만, 슬프게도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열어보는 그의 양말 속에 강아지 같은 건 전혀 들어 있지 않았지요. 그 소년이 열 살이 된 어느 날, 소년은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내밀었소. 하지만 개는 그의 얼굴로 달려들더니 뺨을 할퀴고 달아났소, 의사가 그 찢어진 뺨을 꿰매는 동안 소년은 자신의 애초 소망을 완전히 뒤집는 생각을 만들어가고 있었소, 그 새로운 생각들은 그가 왜 강아지를 가져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었죠.



이렇게 비록 개를 갖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사라졌지만, 그가 애초에 품었던 사랑까지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소. 그냥 생각의 변화 밑에 그 소망을 뭍어버린 거지요. 문제가 생긴 건 이때부터요. 왜냐하면 그대 이후로 그의 생각은 자신의 소망을 외부 삶 속에 비추는 대신에 자신의 본래 사랑에 등을 돌리고 말았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문 그 개를 용서하고, 더 중요하게는 그에게 강아지를 갖지 몸하게 한 자신의 부모를 용서하고서야 비로소 구원과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거요!



삶에서 유일한 권능은 사랑이오, 그리고 사랑은 생각의 모든 벡터들이 연결되어 있는 최초의 지점이오. 그래서 모순된 생각들이 있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요. 삶에서 근본적인 뭔가가 바뀌어야 하오.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사랑의 권능과 선을 훼손하는 역전현상에 지나지 않소. 부정적인 생각으로 무능력해진 사랑은 위험한 것일 수 있소.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큰 권능은 없고, 사랑보다 더 영혼에 가까운 것은 없기 때문이오"









우리의 대화는 사랑과 목적의 연관관계도 건드렸다. 이 역시 벡터에 근거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핵심적인 연관관계는 당신 자신인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와 맺은 서약과 당신이 삶을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과 맺은 서약을 통해 삶 속으로 뻗어갑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의 참된 목적은 아버지에 의해 설정되고 신성한 질서 안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 자신인 사랑의 현실적 확장에 지나지 않소. 당신 자신이 되고, 온 가슴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 연관관계에서 비롯되는 능력들을 활용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요.



세상은 당신에게 당신의 의무와 우선순위를 서로 다른 것으로 보개끔 해왔을 거요. 어렸을 때부터 당신은 개인적 동기가 아니라 지침과 조건에 따라 움직이라고 배워왔소, 어떤 아이나 자기 개인의 의지보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우선임을 인정하는 건 분명히 필요하오. 하지만 이것이 그런 조건 설정의 진짜 이유는 아니오.



세상은 당신이 자신을 증명하길 원하오! 이 때문에 정체성을 가지려는 당신의 자발성이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거요!



세상이 설정한 자격 조건은 허다히 많죠. 예를 들어 당신이 뭔가를 하려면 먼저 소유해야 합니다! 뭔가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과 설비와 소재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구요. 비록 직업들이 수행능력과 우수성의 기준을 설정할 권리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후견권을 위탁받은 사람들은 생각과 행동의 모든 벡터들은 사랑과 있음의 일차 권능에 부속된다는 걸 기억하는 편이 현명할 거요.



물질적 우위성과 경쟁적 성취만으로는 질적인 성과를 낳을 수 없소. 모든 질을 결정하는 건 사랑과 있음이오. 따라서 삶을 경영하는 데 사용되는 우선순위들이 이런 현실을 방영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구조적인 고려가 삶을 지배하고 통제할 때는 많은 비정상적 관계들이 생겨나게 되고, 뒤이어 일어나는 요구들은 자연스런 삶의 유형과 모순되고 말죠.



개개 영혼 안에는 기꺼이 존재하려는 자발성으로 점화되는 거대한 잠재력이 있소, 세상이 짐 지운 허구적 조건 설정에서 벗어나려면 이 진리를 알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오. 그래서 이따금은 산에오르고, 자신하고만 있고,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보시오. 그런 순간들에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알게 될 거요. 자신의 참된 잠재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그 잠재력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당신만의 사랑을 다시 찾아내시오. 그것이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다른 모든 것들을 비춰줄 거요. 당신이 이렇게 할 때, 당신의 삶도 의미를 갖기 시작할 거고요"









나는 예수가 자세를 똑바로 하면서 내 눈을 대단히 강하고 힘 있게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아채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그는 속삭이듯이, 낮았지만 내 가슴 속에서는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의지는 아버지가 당신에게 이르는 다리요. 당신이 언제나 사랑과봉사 속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것, 이것이 아버지의 의지요. 당신은 그의 의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땅에 천국을 가져오고, 땅을 천국에 가져가는 아버지의 다리가 됩니다."





나는 내 앞의 그 장엄한 현존을 맛보면서 2,3분간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본성과 체험을 추구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하셨어요. 그런 계시를 들으니 경이롭고 흥분되긴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어떻게 아버지의 더 큰 의지와 조화를 이루며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가 없군요."









"의지well는 단순히 강한 생각이나 집요한 의도intent가 아니요. 의지란 개념은 너무 자주 사람들이 삶에 조건을 부여할 때 사용하는 완강한 행동이나 고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소, 사실 모든 걸 의도할 수 있소, 의도는 삶과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찾아낼 수 있소, 반면에 의지란 통합과 온전함을 가지고 의향intention을 둘러싸는 권능이오. 의지는 개인의 추진력을 점화하고 후원하여 실제적 실존이라는 문맥 내에서 그것의 성과를 끌어가는 합일과 집중이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부정적 의향을 둘러싸는 의지는 고귀한 의향을 둘러싸는 의지보다 더 쉽게 부서집니다. 이럴진대, 의지의 권능과 특권이 아버지 아닌 다른 누구의 것일 수 있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삶의 모든 것 속에서 의지의 작용을 발견하는 건 당신의 권리이자 의무요. 당신은 이 탐구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소. 당신은 당신 삶의 고귀한 목적을 깨닫고 그 삶을 권능있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가 아버지의 의지와 조화하는 걸 발견할 것이오.



자.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쳤던 기도문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오시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란 말에 가만히 귀기울여 보시오.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 아버지의 의지요. 당신은 이것을 긍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아버지의 의지와 일치시키는 것이오. 나는 당신들에게 '아버지시여, 당신의 의지가 이루어지고 내 의지를 무시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시여, 내가 원하는 모든것을 주시겠나이까?'라고 기도하라고 하지도 않았소.



참된 의지인 아버지의 의지는 상조(相助)하는 전체 안에서의 촉진력이오. 이 때문에 장담컨대, 당신은 당신의 의지와 아버지의 의지가 일치하는 한 지점을 발견할 것이오. 이 지점을 부지런히 찾아보는 게 당신의 의무요. 이것이 당신이 신의 자녀로서 했던 서약이오.



이것은 당신 자신이 살아 있는 다리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제자들에게 주었던 기도는 하늘과 땅, 형제와 형제, 그리고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다리들을 영구히 긍정하는 것이오. 그 연결들을 삶에 도입하겠노라는 서약을 이행할 때, 당신은 신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는 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인식하게 될 거요"









"이것이 당신이 성경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을 때의 의미인가요?"









"기본적으로는 그렇소. 우리 아버지는 모든 사랑의 근원이오. 나도 사랑이고, 당신 또한 사랑이오. 이 점에서 우리는 같은 이름을 갖지요. 누구라도 자신이 사랑이 충분히 되는 한, 아버지와 하나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왜냐하면 나는 다리니까요. 마친가지로 인류 역시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요.



누구에게나 다 그 사람만의 특별한 서약과 목적이 주어져 있소, 따라서 그 사람이 그걸 이행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소. 이것이 전체성의 위대한 진리요. 우주란 건 모든 조각이 제대로 맟춰져야 완성되는 거대한 퍼즐에 비유할 수 있소. 그래서 하나의 조각이 다른 조각을 대신할 수가 없지요. 이 웅장한 퍼즐에서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조각이고 목적들 하나하나가 다 실현되어야 하오.



내가'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했던 건 아무도 나를 돌아갈 수 없고 아무도 나를 대신하지 못하리란 뜻이었소. 나는 아버지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했소. 이 권리는 아버지와 당신이 맺은 서약과 관련해서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며칠 후, 우리가 나눈 우연한 대화는 이런 통찰을 더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현존이 내 삶의 체험을 엄청나게 고양시켜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또한 내 현실 수준에 기꺼이 동참하고, 내가 창조적인 자유를 행사하거나 잡다한 요구를 추구할 때면 자주 함께 즐기는 자상함도 잃지 않았다. 예수는 한없는 관대함과 배려로 그의 찬란한 진리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권능에서 내가 잠깐씩 한숨 돌릴 필요성이 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우리는 텔레비전을 켜서 함께 '보난자'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현존 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는 강력한 공시성이 있었다. 예수의 통찰력은 참으로 깊어서 예수는 흔히 일어나는 일들에 포함된 교훈들까지도 가려냈고, 독창적인 우화들로 그 교훈들에 빛을 더하곤 했다. 덕분에 우리가 함께본 '보난자'라는 가공의 이야기도 여러 가지 더 높은 진리들을 드러내는 배경이 되었다.



짧게 말하면, 아담카트라이트는 자기 아버지한테서 멀리 떨어진 시장에 소들을 끌고 가서 팔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사업상의 거래가 무리 없이 이루어지도록 아담의 아버지는 그에게 특정 가격에 팔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보증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아담은 구매자의 저항에 부딪쳤다. 그 구매자는 본래의 혐상가격대로 지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구매자가 재협상을 고집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이야기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담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곧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을 보고 예수가 말했다









"이런 게 바로 내가 말하는 서약이오. 당신들에게는 자신들이 여기서 하려는 일을 할 권한이 있음을 말해주는 위임장이 있어서, 아버지의 의지에 따른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제시하는 한, 누구도 그 위임장을 거부할 권리가 없소. 누구도 당신을 내쫓거나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을 이용해 당신의 빛이나 공덕이나 가치를 흐릴 권리가 없는 거요. 그 정도로 아버지가 당신을 존중하는 거죠. 그리고 당신이 이런 존중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할 때, 아버지 또한 그만큼 대접받게 됩니다.



당신이 맺은 서약에 관한 한, 아무도 당신을 대신하거나 당신을 무시할 수 없소. 위임받은 그 권한은 아버지만이 가진 권리여서 단순히 바라고 원한다거나, 그 사람이 못해냈음을 확신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소."









이런 이야기는 예수가 모든 사람을 왜 그토록 지극히 존중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 메시지의 명확성과 방향성을 받아들이고 나자. 나는 '의지'는 오로지 존재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그 유일자 만의 것이고, 인류에게는 그 '의지'를 찾아내고 행사할 수 있는 권능만이 주어졌다는 진리를 좀더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가 신성한 의지와 맺는 관계 안에 자유와 존중과 성취가 있다. '의지'에 대한 예수의 계시는 모든 조각이 제자리를 찾고서야 그 장대한 설계가 마침내 완성되리라는 간단하면서도 전체론적인 단언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이 내가 법칙의 모든 문구대로 이행되라고 했을 때의 의미요. 왜냐하면 법칙이란 당신과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요. 법칙은 현실오. 그것은 완벽하게 실현될 것이고, 실현되지 않고 남는 것은 없을 거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눈은 광채를 발했다 그 광채 속에서 나는 그가 왜 지극히 작은 미물인 나비까지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일본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개짓이 아프리카에 태풍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예수에게 사소한 것이란 없었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가장 작은 생물도 권능을 갖습니다. 그리고 존재에는 솔기가 없으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소"









우리가 논의한 여러 다리들 중에서특히나 계시적이었던 주제가 믿음이었다. 나는 예전에는 우리 이해를 넘어서 있는 것에 이르는 유일한 다리가 믿음임을 깨닫지 못했다. 믿음은 우리의 삶과 영적 안녕을 자신 있게 꾸려가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믿음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다리인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이 점을 깨닫자 나는 한 개인이 믿는 바가 중요한지, 아니면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믿음이 그 내용에 따라 중요도가 다른가요?"









"그렇소. 하지만 그건 신앙과는 아무 관계도 없소. 개개인의 진실된 믿음은 그가 아버지와 맺은 서약에서 나옵니다. 이런 믿음만이 유일하게 권능 있는 믿음이지요. 나머지 다른 믿음들은 모두 상황이나 고찰이 빚어낸 결과들이요.



당신이 진실로 믿는 바가 뭔지 알려면, 당신은 성스런 가슴 속으로 들어가, 고요 속에서 당신과 아버지는 영원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가슴이란 재단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요. 내가 당신더러 믿으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아가 믿는 법을 말해줄 수도 있소, 하지만 당신이 믿으려고 하는 그 내용은 당신의'참나'나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순응이나 생존 욕구에서 나오기 마련이요.



누구라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소, 당신이 믿는 바는 당신의 기대와 목적과 체험으로 부풀려진 당신의 존재상태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오, 당신이 할 일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슴이 허용하는 믿음을 존중하도록 그 사람을 돕는 것이오.



가장 순수한 믿음은 당신들이 창조주와 맺은 서약을 구체화하는 믿음이오. 신앙이 이런 믿음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란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열망과 관련해서 그 순응성이 과도하게 덧자란 것이오. 신앙과 순수 믿음 간의 차이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당신이 자신과 삶과 나머지 존재들에 대해 더 분명하게 이해할수록 당신은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여, 그것을 삶의 다리들을 세우는 데 이용할 수 있소"









"우리가 한 영과 연결되는 것이 믿음을 매개로 해서가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의 대답은 언제나 처럼 핵심에 곧바로 접근했다.









"당신이 한 영과 연결되지 않는 지점 같은 건 없소, 그런데 믿음은 이 합일 속에 던져진 생각과 비슷해서 , 믿음에도 방향과 의도가 있소.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믿음을 검토하려 한다면, '내가 이 믿음을 가지고 설정하는 벡터는 어떤 것이지? 그것은 내 참나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디로 가고 있지?'라고 물어볼 수 있소. 믿음이라는 화살도 생각이라는 화살만큼 빠르고 솔직해서 자신의 과녁을 찾아내기 마련이라오. 영보다 더 유연하고 모양짓기 쉬운 건 없소. 당신이 자신의 사랑과 생각과 믿음을 영과 뒤섞으면 당신 삶의 모양이 갖춰지지요. 그러니 이 진리를 소홀히 하지 말고 최대한 적용하는 편이 현명할 거요"









가민히 생각해보니 내가 헷갈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과 '의도'와 '믿음'이라는 용어들 모두가 욕구를 발현 형태로 바꾸는 일차 권능을 비슷하게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주 그것들을 뒤섞어 쓰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내 의문이 좀더 적절한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예수가 결과라는 주제로 되돌아갔을 때 그런 기회가 왔다.









"당신의 행동과 당신의 존재 둘 다가 결과를 갖습니다. 그것들은 삶의 전개를 조건지으니까요. 결과를 불러일으킬 충동과 힘과 열정을 제공하는 것이 당신의 의향이오"









"생각은 그 유형의 어디쯤에 들어가나요?"내가 끼어들었다.









"생각은 원인과 결과 간의 연결을 볼 수 있는 능력이고, 전체 상황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는 포괄적 개념을 형성하는 능력이요. 만일 당신이 삶을 드라마에 비유한다면, 배우는 당연히 그 삶을 사는 개인이고, 그 드라마를 밀고 가는 건 행동이오. 의향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을 연결해주는 구성이나 의미일 거구요. 그리고 생각은 대본이겠죠. 극작가라면 누구나 알 듯이 연극에서 중심되는 요소는 등장인물이요. 행동은 줄거리를 풀어가고, 의향은 왜라는 이유와 열정과 클라이막스를 제공하죠. 드라마의 이 세가지 필수요소와 관련해서 가장 유동적이고 가장 쉽게 고칠 수 있고, 이 때문에 가장 위대한 자유의 표현이 되는 것이 대본이요!"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되어지리라'고 하잖아요?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제 보기에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생각이 더 일차적일 것 같은데요"









"사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뭐든 그는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소, 하지만 생각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존재를 되비추면서 키울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는 대본 부분을 제공한다는 데 있소,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그 사람의 의향에 좌우되고요. 생각은 탐구하고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엄청난 자유를 제공하죠. 그것은 그림의 스케치와 비슷합니다. 스케치가 없다면 그림은 결정될 수 없소, 대본이 연극과 나란히 달리면서 운명과 장면과 촉발요소들로 줄거리를 펼져가듯이, 생각도 삶과 나란히 달리면서 안내와 합리적 설명과 반추와 가능성의 확대를 제공합니다.



생각의 참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삶에 대해 갖는 평행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신도 불확실성의 언저리에 놓이게 되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어'라고 자주 말하지 않소? 이 때 당신이 물러서서 궁리하고자 하는 바가 평행 차원의 생각이요. 이 차원에서는 어떤 상황을 직접 살아보지 않더라도 그 상황이 만들어낼 결과를 검토할 수 있죠. 생각은 평행이기 때문에, 삶의 드라마 바깥에서 자유롭게 표현하고 탐구하고 발견하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신약에서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바대로 이미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은 생각이 행동을 되새겨보고 행동을 이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거군요 지금까지 전 생각이 행동을 불러온다는 뜻인 걸로 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이런 오해는 제가 '최악의 시나리오'나 파멸 가능성을 생각할 때는 어쩐지 죄의식이 들게 하고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극히 조심하고 생각을 제한하고 오직 긍정적인 생각만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게 만들었어요. 이부분에 대해 좀더 명확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람들은 지금껏 생각과 의향을 혼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소. 의향이란 행동 뒤에 놓인 추진력이자 원동력이오. 당신의 가슴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든 이런저런 형태로 의지가 생기리란 건 분명하오, 그 성경구절은 의도의 권능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대신 그것을 '생각'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요. 그 성경 구절의 참된 의미는 영원히 타당하오. 어떤 잘못이나 악행이 있기 훨씬 전에 즉 행동이 있기 훨씬 전에 의향이 그것의 원인 순간에 있다는 거요!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행동을 넘어서 자신이 처음으로 그런 의향을 가졌던 순간까지 살펴봐야 하오.



내가 여러 번 말했듯이 당신들이 삶을 바꾸고자 한다면, 가슴을 바꿔야 합니다 가슴은 의향이 관찰하는 영역이요. 반면에 생각은 의향과 행동 둘 다를 재고해볼 자유를 주어 당신더러 선택하게 하거나 고치게 하거나 강화하게 만듭니다.



재난들 중 상당수가 가능성들의 행렬 전체를 미리 두루 헤아려보기만 했더라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오. 고난들 중 상당수도 조심스런 생각에서 나온 준비를 줄일 수 있었을 거고요. 파괴적 열정들 중 다수도 그것들의 생각의 차원에서 뛰놀게 하는 것으로 숨통을 틔워줄 수 있었을 테고요. 생각은 영혼의 칠판이자 운동장이고 거울이오. 생각은 당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모든 상황을 검토하거나 강화하거나 고치게 해주죠. 하지만 생각이 그 상황 뒤에 놓인 창조결은 아니오. 이 권능은 당신 자신인 사랑과 생각을 행동으로 몰아가는 의향의 것이요"









생각의 창조 파노라마에 대해 되세기고 있노라니,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개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누고 있던 건 예술적 창조작업이었지만, 미(美)라는 주제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내 경험은 삶을 연국에 비유한 예수의 우화와 잘 맞아떨어졌다. 주제와 의향을 안내하는 건 생각과 표현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면? 내 그림에서 아름다움이 나타날 때 나는 창조작업이 제대로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확인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그림에서 드러나면, 나는 골목만 돌면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뭔지 전혀 확실하지 않았기에 나는 이렇게 묻는 것에서 시작했다.









"아름다움도 다리인가요?"









"사실 아름다운은 무수한 원점들에서 나온 많은 다리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결과요. 아름다움은 ㄴ성악가들의 합창이고,꿈꾸는 이들의 코러스이며, 열망들의 콘서트이고, 목표들의 관현악이며, 야망들의 교향곡이고, 생산의 발레요. 기쁨과 완벽을 가지고 나타나는 협응 벡터들이 아름다움을 아루어내는 거죠. 이것은 그 아름다움이 꽃 속에 있든, 노래나 일몰이나 웅장한 그림 속에 있든 상관없이 그러하오, 아름다움은 긍정적 상황을 확인해주고 띄워주는 표식이요. 또 아름다움은 자주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의 타당성을 생생하게 말해주튼 지표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유감스러운 건 구조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위조할 수 있다는 거요. 일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불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소. 따라서 그들의 여정에서 아름다움의 안내를 받을 수 있으려면 구조의 호소력과 내면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오. 참된 아름다움이 존재할 때 당신은 신의 현존과 당신이 그의 의지 안에서 하나되는 것을 느낄 것이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삶에 존재하는 게 이 때문이죠. 아름다움은 조화와 안녕을 함께 가져오거든요"









그는 이어서 삶의 다리들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더 넓고 깊게 적용하는 면으로 나아갔다. 그 설명을 들으니 예견 가능한 인과관계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멋진 다리들 중 하나란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어디고 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고, 그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선택권과 결정권을 갖기를 희망한다. 아마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인과 유형들을 확인할 수만 있어도. 우리는 삶이 주는 수수께끼와 스트레스에서 상당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저지른 모든 일이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된다는 점을 여러 방식으로 설명해주었다. 비슷하게 우리가 남에게 준 것들도 우리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단어에 의문을 제기했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다리를 뜻하는 게 확실하다면, 덕 있는 자가 보상받지 못하고 도리어 악한 자가 엄청난 부를 얻는 경우가 허다한 건 무엇 때문인가요?"









"그런 경우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지 않소. 겉보기에 불공평해 보이는 것은 단지 우주의 균형 잡는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인과에는 두 측면이 있는데. 이 둘은 약간 다르게 작용하죠.



하나는 갈증을 채워주면 그 갈증이 사라진다든지 하는 식으로 단선적인 예견할 수 있는 측면이요. 이 즉자적 반응요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개의치 않고, 백퍼센트의 신뢰도를 가지고 무자비한 사람에게든 유순한 사람에게든 똑같이 작용하죠. 이 경우의 유불리(有不利)는, 기회주의자들은 통제가 가져다주는 여분의 이득을 구해서 그런 예견 가능한 요소들에 속달되고자 하는 반면, 겸소하고, 유덕한 영혼은 예견가능한 효과를 도모하는 것을 사기치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는 데 있소.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더 심약한 영혼을 신의 법칙에서 때어내는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신의 법칙은 유덕자(有德者)를 받아들이고 보호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지만, 그건 단지 그런 법칙들을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긍정하는 한도 내에서지요.



인과의 법칙은 그것에 동의하는가 안 하는가. 혹은 그 법칙을 잘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에 관계없이 똑같이 작용합니다 비록 의식적인 참여와 자발성이 이미 설정되어 있는 보상을 훨씬 더 늘려주긴 하지만요.



인과의 두 번째 측면은 전체적인 환결성과 균형이라는 더 넓은 차원이오. 영의 단일성 덕분에 우리 우주에는 꿰맨 솔기가 없습니다 이 하나상태 속에는 만물의 타당성을 느끼고 인식하여,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균형잡고, 치유하는 공동의 가슴이란 게 있소. 존재의 이 성스런 중심은 행동의 인과가 아니라 사랑의 인과에 방응하죠. 따라서 당신이 주기는 이 삶에게 주었지만, 받기는 저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거요. 그가 수고는 일터에서 했더라고, 그 보수는 자식들의 사랑으로 받을 수 있고요. 혹은 이타심에 자연보호 활동을 했을 뿐인데도, 그 대가를 삶의 가르침이란 것으로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픈 이를 찾아봐 주었는데 자신의 자기연미이 치유되거나, 어떤 사람을 용서했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용서받기도 하고요.



이것은 이기적인 방식으로는 조작할 수 없는 인과의 차원이요. 왜냐하면 이 차원은 각 개인의 사랑에 의해서만 활성화되니까요. 당신이 당신 자신인 사랑을 표현할 때, 당신 앞에 펼쳐질 수 있는 축복에는 한계가 없소"









예수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예수가 시편 23편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암울한 어둠 속에 해매는 동안에도 우리 삶을 인도해주는 사랑의 권능을 설명해주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심에 가득 차서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내 생각이 현실적인 고려와 지금 상황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러고 나서였다.





"요즘들어 앞일을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그냥 인과의 유형을 읽고 그것을 먼 미래에 비춰보는 것인가요. 아니면 뭔가 더 위대한 앎이 있는 건가요?"









"예언에 투자하는 주요 세력들은 구조의 세력들이오. 구조는 추세를 예견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구조는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바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언에 투자하죠. 그런 예언들은 경향성 분석에서 장기적인 투자와 관련된 연간 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알다시피 예언이 단순히 신비적인 인식인 것만은 아니오. 그것은 현실에 근거한 관찰이자 예견할 수 있는 삶에 이르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언술과 예언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슴을 관통하고 가슴의 지원을 간청하고서야 얻을 수 있는 감정적 영적 내용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그것은 남용될 수 있소. 구조는 사람들의 가슴이 변해서 예언들이 무효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로 투자하죠.



예언이 솟아나는 참된 원천은 가슴이오. 내면과 외부가 하나가 되는 지점을 지휘하는 게 가슴이니까요. 따라서 가슴이야말로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정확한 진단 도구요. 당신이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가슴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오. 성스런 가슴과 그것의 고귀한 일곱 지성층이 당신의 삶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줄 거요.



누구라도 인과의 유형을 검토해보면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소, 정보로 무장한 지성인이라면 인과의 유형들을 살펴보고 장긱적인 경향성이 가져올 결과를 논리적으로 예견할 수 있죠.



하지만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당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시오. 어떤 예견도 가슴이 그것을 지지해주는 한에서만 유효해서, 가슴이 바뀌면, 그 순간 완전히 새로운 시나리오가 펼져지게 되죠. 내가 이야기했던, 자기를 문 개를 마침내 용서했던 그 우편배달부의 예를 잊지 마시오. 그 후로는 더 이상 어떤 개도 그를 물지 않았소, 말하자면 완전히 미래가 바뀐 거요. 가슴이 진실로 바뀌면 미래도 바뀝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외적 변화를 지나치게 많이 강조하곤 하죠. 물론 그렇다고 외적 개선이 잘못이란 건 아니요. 집을 청소하는 건 건설적인 노력이요. 하지만 깨끗한 집이 가정을 이뤄주지는 못합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노동하는 것으로 삶을 바꾸려고 미친 듯이 애쓰지만, 그래봤자 소용이 없다보니 거의 신경쇠약 상태죠. 그냥 가슴만 바꾸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가슴의 강력한 변화는, 특히나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체험하게 되면. 이전에 이루어진 모든 예언들을 바꿀 수 있소, 이천년 전 내가 지상에서 살던 당시, 그 당시의 상황대로라면 오백년 안에 대격변이 일어나리란 예언에는 충분히 근거가 있었소, 하지만 그런 대격변은 일어나지 않았죠"









웃음을 머금은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빛이 뿜어져나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 생각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소?"









그 순간, 그의 환한 미소는 내 내면의 명확성이 가져다준 의기양양 함으로 내 얼굴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당신이 세상에 오시고 나서 수많은 가슴들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죠"









"그후로도 다시 이백년에서 오백년 사이에 또 한번의 대격변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때가 있었지만, 그 또한 일어나지 않았소. 가슴들이 바뀌는 한, 외부적인 예언들도 계속해서 바뀌게 마련이오"









다음 질문을 하기 전에 나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가 약간 올라가고 그의 눈이 내게 말하길 권하자. 그런 주저하던 마음은 사라졌다.









"예언이란 게 가슴이 가진 더 큰 권능의 진실 뒤에서 그냥 스러지거나 무너질 수 있는 일시적 가능성을 비추는 것에 불과하다면, 계시록이 계속해서 타당성을 갖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계시록은 단순한 예언서가 아니요. 그것은 시간과 관계없이 부정적 가능성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사라지듯이. 모든 허구적인 것들의 위태로운 서거와 더불어 마침내 영혼이 아버지에게 돌라감에 대한 계시요. 계시록은 삶의 일시적 개연성들에 의미를 집중하지도 않고, 그 메시지의 의도 또한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과는 관계가 없소.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신성한 문서를 외부 사건들의 전재를 일러주는 것으로 크게 오해해왔소. 물론 현실의 외부 형태와 관련을 맺지 않거나 외부 형태로 드러나지 않고서 인간 영혼만 심대하게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따라서 일부 물질 현상들에는 그런 드라마가 동반될 것이오. 특히나 세상을 지배하는 구조들이 먼지로 돌아갈 요소가 되리라고 간주하면요



이 책은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직면해야 하는 임계질량점을 예언한 것이요. 인간은 먼저 무의식과 분리를 통해 만들어지 모든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한, 아버지와 자신의 부자관계를 깨달을 수 없으니까요. 영혼이 자신의 참된 서약을 입중할 정도로 권능 있게 될때, 허구적 정체성들과 허구적 의미들, 무가치한 구조들은 사라지고 말 거요. 따라서 그것은 두려움보다 사랑으로 접근 해야 할 영광스런 사건이고, 가슴들이 그것에 대비하면, 그만큼 외적 결과도 악화될 것이오. 앞으로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일은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이고 불가피해서,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소. 하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선택할 수 있소, 사랑을 가지고 그것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실현에 이르는 궁극의 다리임을 알게 될 거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이 알려준 임박한 대재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든지 많은 것을 물을 수 있는 그의 현존을 앞에 하고서도 내 주의가 그 불길한 재난의 가능성 쪽으로 한번도 향하지 않았던 건 사실 나로서도 다소 의외였다. 그런데 내가 임박한 재난의 가능성과 관련해서 딱 한번 질문했던 것이 예수가 위의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낸 뒤였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긍정적 확신에 차 있었으며, 어떤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들은 모두 분리와 무의식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오. 이 구조들이 지닌 강력한 추진력에는 억압을 지속시키는 씨앗이 담겨 있소, 그런 피조물들이 살아남으려면 인간의 영혼을 억누르고 인간의 굴종을 지속시켜야 하거든요. 인간이 실현되는 시기에 이르면 구조들의 동시다발적인 붕괴와 함께 인간의 선(善)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구조들의 양갚음이 있게 될 거요. 하지만 문제의 진상이 이렇게 드러나면 인간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 의식적인 상태에서, 또 신성한 질서와의 연결 속에서 구조가 재설정되는 새로운 형제애의 시대가 지상에 열릴 것이오"









그런 다음 내가 물었다









"엄청난 고통이 있게 되는 건가요?"









" 고통은 절대 아버지의 뜻이 아니오. 비록 고통이란 체험에는 아무도 예외일 수 없겠지만요.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슬픔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보일 때를 빼고는 거의 고통을 겪지 않을 거요. 반면에 다른 쪽 극단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어떻게 해도 그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요. 하지만 이조차도 축복이요. 번뇌로 가득찬 삶은 독을 뽐어내기 마련이고, 그렇게 해서 치유될 기회도 갖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체험하는가는 주로 개인의 선택과 오래전 부터 쌓여온 선택 결과들의 필연성에 좌우됩니다. 하지만 개개인이 변화의 충격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에 상관없이, 인간의 변모가 불러올 이 결과들로 모든 인류가 축복받으리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요"









인간의 잠재력이 그처럼 완벽하게 변하는 날이 올 때까지 우리 삶을 더 높은 의식 수준과 능력 수준으로 전달해줄 다리들은 많다. 예수의 말에 따르면, 우리에게 시급한 건 끊임없이 더 높은 토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도 그 문제가 생기고 혼재하는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질문이어서, 그보다 적어도 한 차원은 높은 자각이나 능력 수준에서만 해결됩니다 해결책을 시야에서 가리는 자각상실이 애초에 없었다면 문제로 발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삶의 문제들와 관련해서 인류가 저지르는 큰 실수 중 하나는 그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수준에서 그것들을 다룬다는 것이요. 마치 이것이 원인이기라도 한 것처럼요. 하지만 이는 갈등과 다툼과 계속되는 좌절말을 기져올 뿐이요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봄으로써 더 넓은 시야를 얻는 것이오. 이것은 몸의 치유 영역에서 특히 쉽게 관찰할 수 있는데, 의사든 치료사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질병을 잡아두거나 그것이 진행되는 걸 막거나 염증을 줄여서 치료될 수 있는 상태를 제공하는 것뿐이오. 하지만 사실 치유란 언제나 더 높은 차원에서 온전성을 복구했을 때 일어나는 기적이요. 문제가 무엇이든, 치유는 언제나 더 높은 차원에서 옵니다."









나는 체중 문제를 겪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만병통치약을 찾아내길 바라면서, 다이어트약과 다이어트 비법에서 운동과 최면술에 이르기까지 최상의 치료법을 끊임없이 구하고 있다. 이 문제를 포함하여 이와 유사한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는 문제와 직접 맞대결하기보다는 해당 문제를 포괄하는 더 높은 관점을 구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제안했다.









"당신이 정말로 목말라하는 게 뭔지 찾아내고, 당신이 정말로 정화해야 하는 것에서 찾으시오. 어떤 아픔이 당신의 삶을 비탄 속에 묻고 있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정돈시키고, 생활방식 속에 더 많은 온전성을 가져오길 구하시오. 모든 물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시행할 방법을 찾아내려면, 신에게서 나온 것이든 딘간에게서 나온 것이든 언제나 더 높은 차원에서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이런 해결책이 나타나면 당신은 그것이 삶에 가져다주는 온전함으로 그것을 알아볼 것이요"









우리 삶의 질을 개선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는 파나마 운하처럼 서로 다른 높이의 물을 연결하는 운하를 지나가는 배의 우화를 예로 들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삶을 더 높은 완결성과 성취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과정의 지속성에 관한 것이었다.









"첫 갑문(운하나 방수로 따위에서 물 높이가 일정하도록 물의 양을 조절하는데 쓰는 문)에 들어가면 당신 눈에는 물을 가두고 있는 높은 담만이 보일 거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당신이 현재 체험하는 한계를 마주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오. 물의 수위가 올라가면 기적처럼 상황이 변하리란 걸 알면서, 자신의 상실감과 제한된 전망을 마주하는 건 신념의 문제이고요. 그렇게 그 갑문이 열리고 당신의 배가 다음 번 갑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더 위대힌 온전성의 힘이 드러나죠. 반면에 당신 앞에는 당신의 비전이 도달한 그 수준을 넘어저시 못하도록 방해하는 새로운 높은 담벽들도 다시 펼쳐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바라는 수위로 새로이 물을 끌어오리려면 또 다시 신념과 의식이 요구되죠. 이런 식으로 갑문을 통과할 때마다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는데, 그러다 돌연ㅇ히 마지만 갑문이 열리면서 당신은 마침내 바다의 광활한 수평선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운 땅과 만나, 마침내 꿈을 실현하는 거죠.



하지만 그때까지는 운하의 비유에서 보듯이, 자신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든 자신의 삶으 둘러보면서 '어떻게 해야 내가 가진 것으로 최고치를 만들 수 있을까?'를 묻는 편이 좋을 거요. 이사 온 이웃과 사귀거난 자신의 형제자매를 용서하거나 빚을 갚는 따위의단순한 가능성들에서 시작하시오. 잔지를 깎아줄 누군가를 찾아내듯이 당신 쪽에서가시를 제거하시오. 어쩌면 학습장애아의 경우처럼 약간의 치료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고, 때로는 부업을 갖는 게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휴가를 갖는 게 훨씬 더 필요할 수도 있소, 온전성은 단칼에 끝장을 보려 해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복합적 상황에서 국부적인 해답을 찾아서야 맞아떨어질 리가 거의 없죠. 자기 삶의 수준을 끌어올려줄 해결채은 더 큰 온전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거요"









예수는 전향적인 개선들이 멋지게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작은 변화들조차 얼마 안 가 새로운 ㄴ시야와 더 큰 통찰력이 생기게 만들고 삶의 질도 높여줄 수 있다.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나는 이것의 간단한 예는, 우리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가지고 밤 늦게까지 끙끙거릴 때 겪는 좌절감이다. 결국 우리는 평화와 활력을 회복해줄 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자고 일어나 보면 전날 밤에는 그토록 어려워보이던 문제의 해답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이것은 잠을 자며 쉬는 동안 에너지와 자각과 온전성의 수준이 문제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문제들을 규정하고 만들어내는 벽돌에 자신을 가둬놓는 건 더 높은 지성의 시야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예수는 말했다.









"해결책을 구할 대는 온전해지고자 하시오. 갈수록 관점을 더 넓히고 갈수록 삶을 더 많이 포괄하는 것, 이것이 온전함으로 가는 다리요. 구조의 세상은 실재(현재)는 불변인 반면, 변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당신더러 믿게 만들었을 거요. 그래서 뭔가가 가변적일 때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고 믿게 했을 거구요. 그렇게되면 영속하는 것만이 실재가 되지만,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들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실재요. 실재의 이 세 측면은 그 실재성을 전혀 줄이지 않고서도 무한한 방식으로 모양을 바꾸거나 무한한 각도에서 인식될 수 있소. 삶이란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유동성을 따라 흐르는 실재의 강이요"









예수가 실재의 유동성과 관련해서 내게 주었던 이해를 매개로, 나는 이제 각 개인의 삶에서 자유의지가 갖는 결정적인 역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현실 안에 무한한 잠재성들이 동시엥 존재할 경우, 우리는 중요한 선택들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선택들은 현실이 우리 삶을 포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점을 깨닫고 난 지금, 나는 찢어진 그림이 복구된 그 위대한 기적을 특별한 통찰력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이 손상되던 날을 돌아보면, 나는 내 손가락이 벌어진 구멍과 캔버스의 실밥을 가만히 건드렸을 때 느꼈던 그 파멸의 감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멀쩡해진 그림을 보았을 때의 그 온전함이란! 그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권능과 통합의 눈부신 광휘처럼 보였다.

지금 와서 전혀 다른 그 두 느낌을 떠올리면, 시각 이미지란 무한속으로 펼쳐져가는 끈없는 장막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장막의 한쪽 면에는 손상 당한 외관이 있는 반면, 다른 쪽 면에는 한번도 변하지 않았던 온전한 상태가 있다. 이 두 가지 느낌은 얼마나 많은 발현가능성들이 어느 쪽이나 가능한 그런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를 내게 증명해준다. 어느 쪽이 지속되는가는 그것들을 놓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좌우된다. 하지만 [어린 양과 사자]는 완벽하게 진리와 사랑으로 그려졌기에, 손상이라는 현실이 들어설 여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삶에 관한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즉, 우리는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 공존하는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우리가 선택한 그것에 지속성을 부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문제를, 자기 삶의 방향과 질을 실제로 선택하는 건 바로 자신임을 아는 데는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 이런 관점이 가슴과 우리 삶을 바꾸는 가슴의 권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도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하다. 우리의 가슴이 바뀔 때, 우리의 선호 또한 바뀌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다리이리라.
믿음가 의식을 통해 뒷받침되고 온존해지는 선택과 책임의 다리 말이다.


[출처] 끝없는 사랑 310쪽 요즘 들어 앞일을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그냥 ..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